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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내셔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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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탈루냐 내셔널리즘은 카탈루냐의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강조하며, 스페인으로부터의 자치 확대 또는 독립을 추구하는 정치적 운동이다. 프랑크 왕국 시대부터 시작된 카탈루냐의 독자성은 11세기 바르셀로나 백작령의 성장과 함께 더욱 공고해졌으며, 13-14세기에는 경제적 번영과 함께 카탈루냐어 사용이 확대되는 등 문화적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자치권을 상실하고, 19세기 르나센사 운동을 통해 민족주의가 부활했다. 20세기 초에는 자치권 획득을 위한 노력이 있었으나,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정권 하에서 탄압받았다. 민주화 이후 자치 정부가 부활하고 자치권 확대를 위한 노력이 이어졌으며, 2017년 독립 주민투표 이후 스페인 중앙 정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현재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자치 확대, 연방주의, 독립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언어와 문화, 경제적 자립, 정치적 자치 등을 주요 쟁점으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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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내셔널리즘
개요
유형민족주의
정치적 입장카탈루냐 분리주의, 범카탈루냐주의
역사적 배경
기원르네상스 시기, 중세 카탈루냐 헌법 복원 운동
주요 인물발렌티 알미랄
주요 문서만레사 초안 (Bases de Manresa)
이념 및 목표
핵심 이념카탈루냐 민족의 존재 주장, 카탈루냐의 정치적 자결권 옹호
주요 목표카탈루냐 독립, 카탈루냐어와 문화의 보존 및 발전, 카탈루냐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 추구
지향카탈루냐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믿음
정치적 측면
관련 정당다양한 카탈루냐 민족주의 정당 존재 (예: 카탈루냐 공화주의 좌파 (ERC), 카탈루냐 민주 수렴 (CDC))
지지 세력카탈루냐 지역 주민, 카탈루냐 문화 및 언어 옹호 단체
사회문화적 측면
언어카탈루냐어 사용 장려, 카탈루냐어 교육 확대
문화카탈루냐 문화 유산 보존, 카탈루냐 문화 예술 지원
지역적 범위
주요 활동 지역카탈루냐, 발렌시아 지방, 발레아레스 제도, 프랑스 남부 (북카탈루냐), 안도라, 사르데냐의 알게로
관련 지역카탈루냐어권 (Països Catalans)
기타
관련 개념카탈루냐 독립운동, 범카탈루냐주의

2. 역사적 배경

레콩키스타 초기에 프랑크족은 무슬림을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 몰아냈고, 이후 침략을 막기 위해 샤를마뉴는 정복한 영토에 프랑크 백작령을 설치하여 알-안달루스 사이의 완충국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878년에서 988년 사이 이 지역은 프랑크-무슬림 분쟁의 중심지였다. 11세기 동안 프랑크 군주제와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약화되면서, 여러 백작령이 바르셀로나 백작령으로 통합되었고, 이는 오늘날 카탈루냐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의 내용은 하위 섹션 "카탈루냐 정체성의 기원 (11~17세기)"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약한다.


  • 1070년경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1세가 카탈루냐 백작들과 귀족들을 봉신으로 복속시키며 카탈루냐 문화 정체성의 기반을 마련했다.
  • 11세기 말 "카탈루냐"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1137년 아라곤 왕국과 왕조 연합을 통해 아라곤 왕관이 형성되었다.
  • 1173년 카탈루냐는 법적으로 구획되었고, ''Liber feudorum maior''와 ''Gesta Comitum Barchinonensium''이 편찬되어 카탈루냐 정치 정체성의 이정표가 되었다.
  • Corts Catalanes(카탈루냐 코르테스)가 설립되어 왕권에 대항했고, 1283년 최초의 카탈루냐 헌법이 공포되었다.
  • 13세기 아라곤의 하이메 1세의 정복 활동으로 아라곤 왕관은 지중해 상업 제국으로 성장했고, 카탈루냐는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누렸다.
  • 14세기 중반 흑사병과 기근으로 카탈루냐는 쇠퇴했으나, 1410년 카스페 타협을 통해 카스티야의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 1458년부터 내전이 발생했고, 가톨릭 군주의 결혼으로 스페인 군주국이 통합되었으나, 카탈루냐는 여전히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 대항해 시대와 바르바리 해적의 부상으로 카탈루냐는 쇠퇴했다.
  • 13세기와 14세기 카탈루냐는 국가적 특징을 나타냈지만, 이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임을 피에르 빌라르는 지적했다.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결과, 1716년 카탈루냐의 자치적인 법적, 정치 조직은 폐지되었다.

2. 1. 카탈루냐 정체성의 기원 (11~17세기)

레콩키스타 초기에 프랑크족은 무슬림을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 몰아냈다. 이후 침략을 막기 위해 샤를마뉴는 정복한 영토에 프랑크 백작령을 만들어 알-안달루스 사이의 완충국 역할을 했다. 878년에서 988년 사이 이 지역은 프랑크-무슬림 분쟁의 온상이 되었다. 11세기 동안 프랑크 군주제와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모두 약해지면서, 여러 백작령이 바르셀로나 백작령으로 통합되었고, 이는 오늘날 카탈루냐의 기원이 되었다. 1070년경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1세는 다른 카탈루냐 백작들과 귀족들을 봉신으로 복속시켰다. 그의 행동은 카탈루냐 문화 정체성의 씨앗을 뿌렸다.[2]

학자들에 따르면 "카탈루냐"와 "카탈루냐"라는 용어는 11세기 말에 등장하여 1173년에 편집된 ''Usatges''에 나타났다. 안정적인 제도와 문화적 번영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이러한 정체성을 길렀다.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1137년 아라곤 왕국과 협약을 맺어 아라곤 왕관으로 알려진 두 실체의 왕조 연합을 창설했다. 1173년에 카탈루냐는 법적으로 처음으로 구획되었고, 1170년에서 1195년 사이에 ''Liber feudorum maior''와 ''Gesta Comitum Barchinonensium''이 함께 편집 및 기록되어 카탈루냐 정치 정체성의 세 가지 이정표로 간주되었다.[2]

또한, 왕국의 신분들은 왕의 권위에 대항하는 귀족, 주교, 수도원장 및 부르주아지의 대표 기구인 ''Corts Catalanes''(카탈루냐 코르테스)를 설립했다. 13세기 말까지 "군주는 법을 승인하거나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코르테스의 동의가 필요했다".[2] 최초의 카탈루냐 헌법은 1283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카탈루냐 코르테스에 의해 로마법의 전통을 따라 공포되었다.

13세기에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발렌시아 왕국발레아레스 제도를 정복했다. 그 이후 정복은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 나폴리 및 아테네 공작령까지 지중해로 확장되었으며, 1350년경 아라곤 왕관은 지중해에서 강력한 상업 제국 중 하나를 주재했다. 카탈루냐의 경제적 성공은 강력한 상인 계급을 형성했고, 이들은 코르테스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했다.

정치적, 경제적 성공과 함께 카탈루냐 문화는 13세기와 14세기에 번성했다. 이 기간 동안 카탈루냐어는 점차 문화와 정부의 언어로서 라틴어를 대체했다. 학자들은 고대 서고트족 법에서 종교 설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카탈루냐어로 다시 썼다.

그러나 14세기 중반에 기근과 흑사병이 카탈루냐를 강타한 후 인구는 5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감소했다. 이는 봉건적 긴장을 악화시켜 농촌 지역에서 농노 반란을 일으키고 바르셀로나에서 정치적 교착 상태를 초래했다.

1410년, 왕은 왕위를 계승할 상속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다. 아라곤 왕관을 구성하는 세 개의 이베리아 왕국(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 공국)의 대표자들은 카스페의 타협을 통해 카스티야의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에게 공석이 된 왕위를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1458년부터 1479년까지 아라곤의 후안 2세와 카탈루냐 기관 사이의 내전이 카탈루냐를 휩쓸었다.

분쟁 중에 후안 2세는 그의 상속자 페르난도를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결혼시켰고, 이사벨은 카스티야 왕위의 상속녀였다. 가톨릭 군주로 알려지게 된 그들의 왕조 연합은 스페인 군주국의 ''사실상'' 통일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는 카스티야 왕관과 아라곤 왕관의 국가들이 ''법적으로'' 여전히 별개의 실체로 남아 있었고, 각각 고유한 관할권, 기관, 의회 및 법률을 유지했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지중해 무역의 전조인 바르바리 해적의 부상과 함께 유럽 권력의 중심지는 지중해 분지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했다.

초기 정치, 경제 및 문화적 발전은 카탈루냐에게 국가적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 조직 방식과 자체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제공했다. 케네스 맥로버츠와 캐서린 울라드와 같은 다른 학자들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피에르 빌라르는 13세기와 14세기에 "카탈루냐 공국은 정치적, 경제적 제국주의 또는 '국가'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부정확하거나 위험하지 않은 유럽 국가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요베라는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며 "13세기 중반에 민족 의식의 첫 번째 뚜렷한 징후가 관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13세기와 14세기의 카탈루냐는 국가의 특징을 나타냈다. 그러나 빌라르가 지적했듯이, 이러한 비유는 14세기 국가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경우에만 사실이다.

카탈루냐 코르테스와 카탈루냐 공국의 나머지 자생적인 법적 및 정치적 조직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1716년에 최종적으로 종료되었다. 카탈루냐 기관과 대부분의 지역 인구는 카를 대공의 편을 들었고, 그는 법적 현상 유지를 유지하고 현대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의 완전한 패배는 아라곤 왕관의 자치 의회에 대한 법적, 정치적 종료를 의미했으며, 누에바 플란타 칙령이 통과되고 새로운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변환을 ''사실상'' 통일된 왕국에서 ''법적으로'' 중앙 집권화된 국가로 봉인했다.

2. 2. 카탈루냐의 쇠퇴와 스페인 통합 (15~18세기)

페르난도 2세가 주재하는 카탈루냐 코르테스의 세밀화(15세기)


1410년, 아라곤 왕은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아라곤 왕관을 구성하는 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 공국의 대표자들은 카스페 타협을 통해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새 왕조는 왕권 강화를 시도했고, 귀족들은 전통적 특권이 위협받는다고 느꼈다. 1458년부터 1479년까지 후안 2세와 카탈루냐 기관 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분쟁 중, 후안 2세는 프랑스의 공격을 받자[3]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를 결혼시켰다. 가톨릭 군주로 알려진 이들의 연합은 스페인 군주국의 통일을 의미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왕관과 아라곤 왕관은 여전히 별개의 국가로, 각자의 기관과 법률을 유지했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지중해의 아라곤 영토는 중요성이 감소했고, 유럽 권력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제약은 카탈루냐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역 갈등으로 인해 카탈루냐는 1070년에서 1410년 사이에 얻은 정치적 권리 대부분을 잃었다.

1659년 피레네 조약 이후 루시용(황토색)은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었다. 피레네 산맥 남쪽의 카탈루냐 공국은 스페인 왕국에 남았다.


카탈루냐 헌법 (1702).


그럼에도 초기 발전은 카탈루냐에게 독자적인 정체성을 부여했다. 케네스 맥로버츠와 캐서린 울라드 같은 학자들은 피에르 빌라르의 주장을 지지하며, 13~14세기 카탈루냐 공국이 정치, 경제적 제국주의 또는 '국가'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유럽 국가였다고 주장한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결과, 1716년 카탈루냐 코르테스와 자치적인 법적, 정치 조직은 폐지되었다. 카탈루냐 기관과 지역 인구는 카를 대공을 지지했지만, 그의 패배로 아라곤 왕관의 자치 의회는 종말을 맞았다. 누에바 플란타 칙령이 통과되고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을 중앙 집권화된 국가로 만들었다.

3. 근대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발전

발렌티 알미랄


엔릭 프라트 데 라 리바


르나센사(카탈루냐어로 "부활" 또는 "르네상스")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억압과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후 카탈루냐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문화, 역사, 문학 운동이었다. 1868년 혁명과 스페인 제1 공화국의 실패 이후, 스페인 내에서 카탈루냐 자치를 달성하려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1]

낭만주의처럼 르나센사는 역사적 분석을 중시했다. 발렌티 알미랄 이 로제르의 ''카탈라니즘'', 빅토르 발라게르의 ''카탈루냐와 아라곤 왕국의 역사'', 엔릭 프라트 데 라 리바의 ''카탈루냐 민족성'' 등은 카탈루냐 민족성을 증명하는 데 역사를 사용했다.[2] 엘리 케두리는 "과거"가 "현재"를 설명하고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19세기 민족주의 담론에서 이런 주장이 흔했다고 언급했다.[3]

민족 개념은 카탈루냐 낭만주의 민족주의의 핵심이었다. 이는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등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저술에서 유래한다.[5] 1830년대 카탈루냐 지식인들은 중세 역사와 언어학을 강조하며 민족 개념을 받아들였다. 호안 코르타다, 마르티 데 익살라와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요렌스 이 바르바는 카탈루냐 민족성 문학을 재활성화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상식학파 등의 영향을 받아 카탈루냐인이 카스티야인과 다른 이유를 탐구했다.[6] 코르타다는 카탈루냐인이 강한 결의와 근면함을 가졌다고 결론지었고, 익살라와 요렌스는 상식(세니)과 근면함이 카탈루냐인의 특징이라 주장했다.[6]

카탈루냐 ''민족'' 연구는 정치 진출보다 먼저 나타났다. 카탈루냐 부르주아는 스페인을 이끌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6] 1880년경 카탈루냐 산업가들은 스페인 엘리트의 차별에 스페인을 이끌 꿈을 접고 카탈루냐를 "국가"로 보기 시작했다. 빌라르는 카탈루냐 산업 부르주아가 스페인 시장 확보 과정에서 국가 기구 확보에 실패하며 카탈루냐가 "국가"가 되었다고 언급한다.[6] 낭만주의 민족주의는 철학을 넘어 정치로 확장되었다.

19세기 말, 카탈루냐주의는 진보, 보수 세력 사이에서 교리적 기반을 형성하고, ''억울함의 기념비'', ''만레사 기초''(1892) 등 정치 프로그램을 수립, 민족주의적 문화, 협회 운동을 창출했다.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스페인이 쿠바, 필리핀 식민지를 잃자 국가적 자신감 위기가 오고, 정치적 카탈루냐주의가 추진력을 얻었다. 리가 레히오날리스타는 최초의 카탈루냐 현대 정당이었다. 1901년 창당된 이 정당은 1907년 ''솔리다리다트 카탈라나''로 연합, 엔릭 프라트 데 라 리바의 지역주의 프로그램으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3. 1. 르나센사(Renaixença) 운동 (19세기)

르나센사(카탈루냐어로 "부활" 또는 "르네상스")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억압과 급격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겪은 후 카탈루냐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문화, 역사, 문학 운동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1868년 혁명(카탈루냐 출신 호안 프림 장군 주도)과 스페인 제1 공화국(1873-1874)의 실패 직후, 이 운동은 스페인 자유주의 국가 내에서 카탈루냐 자치를 달성하려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1]

낭만주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르나센사는 역사적 분석을 중시했다. 역사는 카탈루냐의 "부활"에 필수적이었다. 낭만주의 역사 철학에서 영감을 받은 카탈루냐 역사 관련 텍스트는 카탈루냐주의 운동의 토대를 마련했다. 발렌티 알미랄 이 로제르의 ''카탈라니즘'', 빅토르 발라게르의 ''카탈루냐와 아라곤 왕국의 역사'', 엔릭 프라트 데 라 리바의 ''카탈루냐 민족성'' 같은 작품들은 카탈루냐 민족성을 증명하는 데 역사를 사용했다.[2] 엘리 케두리에 따르면, "과거"가 "현재"를 설명하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민족주의 담론에서 흔했다.[3] 역사 출판물은 카탈루냐인들이 스페인의 다른 지역이나 해안 지방이 아닌 민족을 구성하는 이유를 "설명"했다.[4]

르나센사의 많은 작품의 핵심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민족 개념은 주류 카탈루냐 낭만주의 민족주의에서 중요했다. 이는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같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저술에서 유래한다.[5]

민족 개념은 1830년대 카탈루냐 지식인 사회에 유입되었으며, 이 지역의 중세 역사와 언어학을 강조하면서 나타났다.[6] 이는 호안 코르타다(1805–1868), 마르티 데 익살라(1807–1857) 및 그의 제자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요렌스 이 바르바의 저술에서 처음 등장했다.[6] 이들은 카탈루냐 민족성에 대한 문학을 재활성화한 지식인들이었다. 헤르더, 사비니, 스코틀랜드 상식학파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아, 그들은 카탈루냐인이 다른 스페인 사람, 특히 카스티야인과 다른 이유를 탐구했다.[6] 예를 들어 코르타다는 열악한 자연 환경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가 스페인의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성공적인 이유를 밝히고자 했다. 그는 "카탈루냐인들은 수세기에 걸쳐 강한 결의와 불변성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근면함이다."라고 결론지었다.[6] 데 익살라와 요렌스는 카탈루냐 민족성에 대한 비슷한 관점을 가졌다. 그들은 카탈루냐인에게 고유한 두 가지 특성은 상식(세니)과 근면함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전통적인 카탈루냐 세니는 민족정신의 표현"이었으며, 이는 카탈루냐인을 카스티야인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들었다.[6]

카탈루냐 ''민족''에 대한 초기 연구는 정치에 진출하기 오래전에 종이 위에 남아있었다. 이는 카탈루냐의 부르주아가 아직 스페인 국가를 이끌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6] 1830년대에는 르나센사가 아직 초기 단계였고, 산업 계급은 여전히 스페인 경제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카탈루냐의 독특성에 대한 개념은 전체 국가를 통합하고 이끌 수 있다고 믿는 집단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1880년경 스페인 엘리트들의 수십 년간의 차별 이후, 카탈루냐의 산업가들은 스페인을 이끌겠다는 꿈을 접었다. 빌라르는 "카탈루냐 산업 부르주아가 스페인 시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국가 기구를 확보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스페인 전체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여론에서 '작은 조국' 카탈루냐가 마침내 '국가적인' 초점이 되었다"고 언급한다.[6]

이러한 충성심의 변화는 카탈루냐 민족에 대한 아이디어가 이미 이 지역의 "독특성"과 ''민족정신''에 대한 텍스트로 성숙되었기 때문에 특히 쉬웠다.[6] 이러한 낭만주의 민족주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카탈루냐의 경제 엘리트들은 "카탈루냐의 사회 구조와 나머지 국가의 사회 구조 사이의 증가하는 비유사성"을 인식하게 되었다.[6] 낭만주의 민족주의는 철학적 경계를 넘어 정치 무대로 확장되었다.

19세기 말, 카탈루냐주의는 진보 및 보수 세력 사이에서 자체적인 교리적 기반을 형성했다. 동시에 첫 번째 정치 프로그램(예: ''억울함의 기념비'', ''만레사 기초''(1892))을 수립하고, 명백히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띤 광범위한 문화 및 협회 운동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스페인쿠바필리핀에서 마지막 식민지를 잃으면서, 국가적 자신감에 큰 위기가 닥쳤고, 이는 정치적 카탈루냐주의에 추진력을 제공했다. 카탈루냐 최초의 현대 정당은 리가 레히오날리스타였다. 1901년 창당된 이 정당은 1907년 카를주의부터 연방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른 카탈루냐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솔리다리다트 카탈라나''를 결성, 엔릭 프라트 데 라 리바가 그의 선언문 ''라 나시오날리타트 카탈라나''(1906년)에서 공식화한 지역주의 프로그램으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3. 2. 20세기 초 카탈루냐 민족주의

르나센사는 유럽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카탈루냐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부흥시키려는 운동이었다. 1868년 혁명과 스페인 제1공화국의 실패 이후, 이 운동은 스페인 내에서 카탈루냐의 자치를 추구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4]

발렌티 알미랄 이 로제르의 ''카탈라니즘'', 빅토르 발라게르의 ''카탈루냐와 아라곤 왕국의 역사'', 엔릭 프라트 데 라 리바의 ''카탈루냐 민족성''과 같은 작품들은 카탈루냐의 민족성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를 이용했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민족주의 담론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었다.[4]

민족 개념은 카탈루냐 낭만주의 민족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와 같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1830년대 카탈루냐 지식인들은 카탈루냐 민족성에 대한 문학을 재활성화하면서 카탈루냐인이 다른 스페인 사람들과 구별되는 이유를 탐구했다. 그들은 상식(세니)과 근면함을 카탈루냐인의 특징으로 보았다.[4]

1880년경, 카탈루냐 산업가들은 스페인을 이끌겠다는 꿈을 접고 카탈루냐를 "국가적인" 초점으로 삼게 되었다. 낭만주의 민족주의는 철학적 경계를 넘어 정치 무대로 확장되었다.[4]

19세기 말, 카탈루냐주의는 진보 및 보수 세력 모두에게서 지지를 받으며 자체적인 교리적 기반을 형성했다. ''억울함의 기념비''와 ''만레사 기초''(1892)와 같은 정치 프로그램이 수립되었다.[4]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면서 카탈루냐 최초의 현대 정당인 리가 레히오날리스타가 창당되었다. 1901년에 창당된 이 정당은 1907년 다른 카탈루냐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솔리다리다트 카탈라나''를 형성, 엔릭 프라트 데 라 리바가 제시한 지역주의 프로그램으로 선거에서 승리했다.[4]

18세기 스페인 경제는 주로 농업에 의존했지만, 산업 혁명은 카탈루냐에서 어느 정도 진전을 보였다. 산업화와 무역은 르네상스와 함께 이루어졌으며, 이는 카탈루냐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지역 지식인들은 바르셀로나 산업 거물들의 후원을 받아 문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들은 카탈루냐의 문화, 언어, 세계관에 뿌리를 둔 새로운 존재론을 창조하려 했다.[4]

그러나 산업가들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카탈루냐 민족주의가 스페인을 포함하기를 원했다. 18세기 동안 마드리드의 경제적 이익과 카탈루냐 산업가들은 협력했다. 민족주의 지식인들에게 이것은 카탈루냐주의가 국가 정체성을 장려할 수 있지만 스페인 내에서 작동해야 함을 의미했다.[4]

바르셀로나 산업 엘리트들은 카탈루냐 산업 시장이 다른 스페인 지역의 소비에 의존했기 때문에 카탈루냐가 스페인의 일부로 남기를 원했다. 산업가들은 보호 무역과 국내 시장 헤게모니를 추구했다.[4]

1889년, ''리가 레히오날리스타''는 카탈루냐 민법을 지켜냈다. 2년 후, 보호 무역 조치가 통과되면서 제조업자들 사이에서 친스페인적 태도가 강화되었다. 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스페인의 중립과 모로코에서의 스페인 확장에서 큰 이익을 얻었다.[4]

이러한 민족주의-산업주의 협정은 포괄적 카탈루냐주의의 전형이었다. ''리가 레히오날리스타 데 카탈루냐''는 이러한 타협을 지지하여 20세기 초부터 카탈루냐 정치를 지배했다. ''리가''는 카탈루냐주의가 번성하도록 허용했지만 스페인 내에서 연방주의를 장려했다.[4]

20세기 초반, 주요 민족주의 정당은 보수적인 ''Lliga Regionalista''였다. 이 시기의 주요 성과는 카탈루냐 연방이었다. 1919년 자치 헌장을 부여받는 데 실패하면서 카탈루냐 민족주의 정당들은 급진화되었고, ''Acció Catalana''과 ''Estat Català''가 창설되었다.[4] 자우메 보필, 안토니 로비라 이 비르질리, 루이스 니콜라우 달워가 ''Acció Catalana''의 지도자들이었다.[4] 프란세스크 마시아는 ''Estat Català''를 설립했다.[4]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정권 동안 카탈루냐 만코무니타트는 해산되었다(1925년).[4]

1931년, 카탈루냐 공화 좌파(''Esquerra Republicana de Catalunya'', ERC)는 카탈루냐 선거에서 승리하여 카탈루냐 공화국을 옹호했다. ERC의 지도자 프란세스크 마시아는 자치 카탈루냐 정부를 수용했고, Generalitat de Catalunya라는 이름을 되찾았다.[4]

1934년 10월 사건에서 카탈루냐 정부는 공화국 법적 질서를 위반했다. 루이스 콤파니스는 스페인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4]

스페인 내전 발발로 민주주의와 문화적 정상성은 중단되었다. 1939년 자치 정부는 폐지되었다. 루이스 콤파니스는 카탈루냐 독립을 선언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4]

콤파니스는 1940년 프랑코 정권에 의해 처형되었다.[4]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기간 동안 여러 카탈루냐 운동이 지하에서 활동했다. 카탈루냐 정부 수반은 망명 상태에서 활동했다.[4]


3. 3.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독재 (1936-1975)

스페인 제2공화국의 압력으로 카탈루냐 공화 좌파(ERC)의 지도자 프란세스크 마시아는 자치 카탈루냐 정부를 수용했고, 이는 Generalitat de Catalunya라는 역사적인 이름을 되찾았다.[4]

1934년 10월 사건에서 루이스 콤파니스가 이끄는 카탈루냐 정부는 스페인 중앙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며 공화국 법적 질서를 위반했다. 민주주의와 문화적 정상성의 회복은 스페인 내전의 발발로 인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중단되었다. 1936-1939년 전쟁 기간 동안 공화국에 충성했던 자치 정부는 프랑코주의 군대의 승리 후 1939년에 폐지되었다. 전쟁 막바지에 공화파의 패배가 임박했을 때, 카탈루냐 자치 정부 수반 루이스 콤파니스는 카탈루냐 독립을 선언했지만, 카탈루냐 내부의 반대와 스페인 제2공화국의 패배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전쟁 직후, 콤파니스는 수천 명의 스페인 공화주의자들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지만, 1940년 프랑스 공방전 이후 프랑코 정부와 나치 독일 간의 협력으로 체포되어 스페인 당국에 넘겨졌다. 그는 고문을 받은 후 '군사 반란'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40년 10월 15일 오전 6시 30분 바르셀로나 몬주익에서 처형되었다. 콤파니스는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시민 경비대의 총살대에 끌려갔으며, 총살대의 발포와 함께 '카탈루냐를 위하여!'라고 외쳤다.[4]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기간(1939-1975) 동안, 여러 정치적, 문화적 카탈루냐 운동은 지하에서 활동했다. 카탈루냐 정부 수반은 망명 상태에서 상징적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3. 4. 민주화 이후 카탈루냐 민족주의 (1975~)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가 끝나면서 여러 카탈루냐 민족주의 운동이 지하에서 활동을 재개했다. 망명 중이던 호셉 타라데야스는 1977년 카탈루냐로 돌아와 자치 정부를 복원했다. 1978년 스페인 헌법 승인에 이어 자치 헌장이 승인되면서 카탈루냐는 자치 공동체로 조직되었다. 1980년, 보수 민족주의 정당인 Convergència Democràtica de Catalunya 소속 조르디 푸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3년간 자치 정부를 이끌었다.

카탈루냐 독립 찬반 주민투표를 촉구하는 간판. 2010년 3월


2003년, 푸졸의 정당은 선거에서 패배하고, 파스쿠알 마라갈이 이끄는 3당 연립 정부가 들어섰다. 2006년 카탈루냐 자치주 선거에서는 여러 민족주의 정당들이 주요 의석을 차지했다. 이들 정당 내에서는 카탈루냐 독립에 대한 의견이 다양했다.

2006년, 카탈루냐 자치 헌장 개정 주민투표가 실시되어 더 많은 자치권을 확보했지만, 낮은 투표율은 대중의 무관심 또는 정체성 정치에 대한 피로감을 보여주었다.

유럽발 경제 위기 이후, 카탈루냐에서는 독립 요구가 더욱 거세졌다. 경제 정책에서 카탈루냐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인식[85]이 독립 세력을 강화시켰다. 2012년 카탈루냐 주 의회 선거에서는 독립을 주장하는 정당들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86] 매년 9월 11일 카탈루냐의 날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87]

2014년과 2017년에 실시된 독립 주민투표는 높은 찬성률을 보였지만, 중앙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90] 2015년 카탈루냐 의회는 카탈루냐 독립 절차 개시 선언을 채택했고,[92][93] 2017년에는 카를레스 푸지데몬 주 총리가 독립 선언에 서명했다. 그러나 중앙 정부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정지시키고[94] 독립 선언을 무효화했다.[95]

2019년, 독립 투표를 주도한 오리올 준케라스 등 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96] 2021년 스페인 정부는 이들에 대한 사면을 결정했다.[96]

4. 현대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다양한 형태

현대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정치적으로는 카탈루냐 민주 연합, 카탈루냐 민주 연합, 카탈루냐 공화 좌파(ERC), 카탈루냐 독립 연대 등 여러 정당이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이들은 2010년 카탈루냐 지방 선거에서 50.0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5] 그러나 이들 정당 내에서도 카탈루냐 독립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카탈루냐 국가라는 개념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이는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는 지역 전체의 정치적 정체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범민족주의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카탈루냐 공화 좌파(ERC)와 Junts는 카탈루냐 국가에 대한 지지를 보여주었지만, 수렴과 연합(CiU) (Junts는 여기서 파생됨)은 이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지 않았다. 발렌시아 민족주의 블록 (BNV),[80] Bloc Nacional i d'Esquerres,[81] 마요르카 사회당(PSM), 마요르카 연합(UM) 등 카탈루냐 외 지역에서도 카탈루냐 국가 정체성 구축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정당들이 존재한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좌파, 중도, 우파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운동으로 인식한다. 2024년 현재, 함께 카탈루냐를 위해(Junts), 카탈루냐 공화 좌파 (ERC), 카탈루냐 사회당 (PSC),[76] 카탈루냐 엥 코무 (Comuns), 인민 단결 후보 (CUP) 등 주요 카탈루냐 정당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카탈루냐주의를 지지한다. 다만, PSC와 Comuns Sumar는 일반적으로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4. 1. 자치 확대론

2006년 카탈루냐 자치 규약 개정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카탈루냐 정부의 권한이 더욱 확대되었다. 투표자 중 73.24%가 찬성하여 2006년 8월 9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그러나 투표율 48.84%는 카탈루냐 민주주의 역사상 전례 없는 높은 기권율을 나타냈다.[7] 이는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의 피로감, 또는 일반 대중이 카탈루냐 정체성 정치에 관여하지 않거나 반대한다는 징후로 인용되기도 했다. 카탈루냐 공화 좌파와 국민당은 2006년 자치 규약 통과에 반대했는데, 전자는 너무 미흡하다고, 후자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다.

학자들은 카탈루냐 민족주의 부활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6]

  • 스페인의 재정 연방 정책에 대한 불만
  • 중앙 집권화로 인식되는 헌법 개혁 이후 카탈루냐 자치 침식에 대한 우려
  • 2008년 금융 위기로 인한 지역적 불만 심화


2012년 9월 11일, 60만 명에서 200만 명의 사람들이 바르셀로나 중심부에 모여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다. 9월과 10월에는 수많은 카탈루냐 지방 자치 단체가 자유 카탈루냐 영토임을 선언했다.

2013년 9월 11일에는 160만 명이 참여한 480km의 인간 사슬인 카탈루냐 길이 카탈루냐 독립 지지를 위해 열렸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아르투르 마스 정부는 카탈루냐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2014년 구속력 없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2015년 카탈루냐 의회 선거에서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자, 아르투르 마스는 이를 국민 투표 선거라고 선언했다.

2017년 카탈루냐 지방 선거에서 독립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정당(JuntsxCat, ERC, CUP)은 다수 의석을 확보했지만,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은 비민족주의 정당인 시민당 (Cs)이었다.

4. 2. 연방주의

현재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주요 정당은 카탈루냐 민주 연합, 카탈루냐 민주 연합이다. 카탈루냐 공화 좌파는 민족주의에서 파생되었지만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독립 옹호라고 칭하며, 카탈루냐 독립 연대도 마찬가지이다.[5] 이들 정당은 2010년 카탈루냐 지방 선거에서 50.03%의 득표율을 기록했으며, 정당 내에서는 의견 차이가 크다. 더 급진적인 세력은 분리된 카탈루냐 국가 건설에만 만족하는 반면, 온건한 세력은 카탈루냐 정체성 보호가 스페인 내에서 양립할 수 없다고 반드시 생각하지는 않는다.

학자들은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부활이 스페인의 재정 연방 정책에 대한 불만, 중앙 집권화로 인식되는 헌법 개혁 이후 카탈루냐 자치의 침식에 대한 우려, 2008년 금융 위기로 인한 경제 불만 심화 등 여러 요인의 결합으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6]

2006년에는 카탈루냐 자치 규약 개정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카탈루냐 정부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투표자 중 73.24%가 찬성하여 통과되었으며, 2006년 8월 9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그러나 투표율 48.84%는 카탈루냐 민주주의 역사상 전례 없는 높은 기권율을 나타냈다.[7] 이는 대중의 광범위한 부분이 카탈루냐의 정체성 정치에 관여하지 않거나 반대한다는 징후, 또는 정치적 자치나 독립을 향해 더 과감한 조치를 원했던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의 피로감의 징후로 인용되기도 했다.

2012년 9월 11일, 60만 명(스페인 바르셀로나 정부 대표단에 따르면)에서 200만 명(조직 위원회에 따르면)의 사람들이 바르셀로나 중심부에 모여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다. 9월과 10월에는 수많은 카탈루냐 지방 자치 단체가 자유 카탈루냐 영토임을 선언했다.

2013년 9월 11일에는 160만 명이 참여하여 카탈루냐 독립을 지지하는 480km의 인간 사슬인 카탈루냐 길이 열렸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아르투르 마스 정부는 이전의 지역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 카탈루냐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카탈루냐 정부는 2014년에 이 문제에 대한 구속력 없는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2015년 카탈루냐 의회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아르투르 마스는 이를 국민 투표 선거라고 선언했다.

2017년 카탈루냐 지방 선거에서 독립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정당(JuntsxCat, ERC 및 CUP)는 다수의 의석을 확보했지만, 50% 미만의 득표율로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은 비민족주의 정당인 시민당 (Cs)이었다.

광범위한 운동인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현재 정치 무대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2024년 현재, 주요 카탈루냐 정당 대부분—함께 카탈루냐를 위해(Junts), 카탈루냐 공화 좌파 (ERC), 카탈루냐 사회당 (PSC),[76] 카탈루냐 엥 코무 (Comuns) 및 인민 단결 후보 (CUP)—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카탈루냐주의를 지지한다. 다만 PSC와 Comuns Sumar는 일반적으로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히로나에 전시된 카탈루냐 민족주의 상징

4. 3. 독립주의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주요 정당으로는 카탈루냐 민주 연합, 카탈루냐 민주 연합, 카탈루냐 공화 좌파(ERC), 카탈루냐 독립 연대 등이 있다. 이들은 2010년 카탈루냐 지방 선거에서 50.0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5] 이들 정당 내에서는 독립에 대한 의견 차이가 크다. 더 급진적인 세력은 분리된 카탈루냐 국가 건설을 추구하는 반면, 더 온건한 세력은 스페인 내에서 카탈루냐 정체성 보호를 추구한다.

2006년 2월 18일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카탈루냐 민족주의 시위


2006년 카탈루냐 자치 규약 국민 투표에서는 카탈루냐 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는 내용의 개정안이 통과되었으나, 투표율은 48.84%로 카탈루냐 민주주의 역사상 전례 없는 높은 기권율을 보였다.[7] 이는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의 피로감 또는 정치적 자치, 독립에 대한 더 과감한 조치를 원했던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2010년 7월 10일 바르셀로나 시위. 스페인 헌법 재판소의 자치 규약 (2006년) 판결에 반대하고 자기 결정권을 지지하기 위해 열렸다.


2012년 9월 11일, 60만 명에서 200만 명의 사람들이 바르셀로나 중심부에 모여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다. 2013년 9월 11일에는 160만 명이 참여하여 카탈루냐 독립을 지지하는 480킬로미터(300 mi)의 인간 사슬인 카탈루냐 길이 열렸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카탈루냐 정부는 구속력 없는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2015년 카탈루냐 지방 선거에서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17년 카탈루냐 지방 선거에서 독립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정당(JuntsxCat, ERC 및 CUP)은 다수의 의석을 확보했지만, 50% 미만의 득표율로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다.

2014년 11월 9일에 실시된 2014년 카탈루냐 독립 주민투표에서는 카탈루냐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가 80.76%에 달했다.[90] 2015년 카탈루냐 자치 주 의회 선거에서 독립 찬성파는 과반수 의석을 획득했고,[91] 카탈루냐 독립 절차 개시 선언을 채택했다.[92][93] 2017년 카탈루냐 독립 주민투표에서는 찬성이 9할 이상에 달했고, 카를레스 푸지데몬 주 총리 등이 카탈루냐 독립 선언에 서명하고 직후 동결했다. 중앙 정부는 카탈루냐 자치 정부의 권한을 일시 정지하기로 결정했다.[94] 10월 27일 주 의회에서 독립 선언이 승인되었다.[95]

2019년, 카탈루냐 독립 주민 투표를 강행한 혐의로 오리올 준케라스 등 9명이 반란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수감되었다.[96] 2021년, 스페인 정부는 이들에 대한 사면을 결정했다.[96]

5.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주요 쟁점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주요 쟁점은 크게 정치, 자치, 경제, 재정, 그리고 언어와 문화로 나눌 수 있다.
정치와 자치레콩키스타 초기, 프랑크족은 무슬림을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 몰아냈다. 이후 침략을 막기 위해 샤를마뉴는 정복한 영토에 프랑크 백작령을 만들어 알-안달루스 사이의 완충국 역할을 했다. 11세기 동안 바르셀로나 백작령으로 통합되었고, 이는 오늘날 카탈루냐의 기원이 되었다. 1070년경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1세는 다른 카탈루냐 백작들과 귀족들을 봉신으로 복속시켰다. 그의 행동은 카탈루냐 문화 정체성의 씨앗을 뿌렸다.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1137년 아라곤 왕국과 협약을 맺어 아라곤 왕관이라는 왕조 연합을 창설했는데, 이 시스템은 왕과 귀족의 권력을 상호 견제하도록 설계되었다. 1173년에 카탈루냐는 법적으로 처음 구획되었고, ''Liber feudorum maior''와 ''Gesta Comitum Barchinonensium''이 1170년에서 1195년 사이에 편집 및 기록되어 카탈루냐 정치 정체성의 세 가지 이정표로 간주되었다.[2]

또한, 왕국의 신분들은 왕의 권위에 대항하는 귀족, 주교, 수도원장 및 부르주아지의 대표 기구인 ''Corts Catalanes''(카탈루냐 코르테스)를 설립했다. 13세기 말까지 군주는 법을 승인하거나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코르테스의 동의가 필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탈루냐 코르테스는 ''Diputació del General'' 또는 ''Generalitat''라고 불리는 상설 기구를 선출했다. 최초의 카탈루냐 헌법은 1283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카탈루냐 코르테스에서 로마법 전통에 따라 공포되었다.

13세기에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발렌시아 왕국발레아레스 제도를 정복했다. 이후 정복은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 나폴리 및 아테네 공작령까지 지중해로 확장되었으며, 1350년경 아라곤 왕관은 이 시기 지중해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강력한 상업 제국 중 하나를 주재했다. 카탈루냐의 경제적 성공은 강력한 상인 계급을 형성했고, 이들은 코르테스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했다.

13세기와 14세기에 걸쳐 이 상인들은 막대한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축적하여 아라곤 왕관의 권력에 상당한 제동을 걸 수 있었다. 15세기까지 아라곤 군주는 코르테스 앞에서 토지의 기본법을 존중하겠다고 맹세하기 전까지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러한 권력 균형은 카탈루냐 정치 문화의 특징인 ''pactisme''(계약주의)의 예이다.

1410년, 왕은 상속자 없이 사망했다. 아라곤 왕관을 구성하는 세 개의 이베리아 왕국(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 공국) 대표자들은 카스페의 타협을 통해 카스티야의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에게 공석이 된 왕위를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바르바리 해적의 부상과 함께 유럽 권력의 중심지는 지중해 분지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했다.

카탈루냐 코르테스와 카탈루냐 공국의 나머지 법적, 정치적 조직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결과로 1716년에 종료되었다. 카탈루냐 기관과 대부분의 지역 인구는 카를 대공의 편을 들었고, 그는 법적 현상 유지를 유지하고 현대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의 패배는 아라곤 왕관의 자치 의회에 대한 법적, 정치적 종료를 의미했으며, 누에바 플란타 칙령이 통과되고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을 중앙 집권화된 국가로 전환했다.

르나센사는 억압과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시대를 거친 후, 카탈루냐 고유의 언어와 문학을 되살리려는 문화, 역사, 문학 운동이었다. 스페인 제1 공화국 (1873-1874)의 실패 직후, 이 운동은 스페인 자유주의 국가 내에서 카탈루냐 자치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세기 말, 카탈루냐주의는 진보 및 보수 세력 사이에서 자체적인 교리적 기반을 형성했다. 동시에 첫 번째 정치 프로그램 (''억울함의 기념비'', ''만레사 기초'', 1892)을 수립하고, 민족주의적 성격의 문화 및 협회 운동을 창출했다.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스페인쿠바필리핀에서 마지막 식민지를 잃었는데, 이는 정치적 카탈루냐주의에 추진력을 제공했다. 카탈루냐 최초의 현대 정당은 리가 레히오날리스타였다. 1901년에 창당된 이 정당은 1907년에 카를주의에서 연방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른 카탈루냐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솔리다리다트 카탈라나''를 결성, 엔릭 프라트 데 라 리바의 지역주의 프로그램으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프란세스크 마시아, 공화주의자이자 좌익 독립주의 지도자, 카탈루냐 자치 정부 초대 수반(1931–1933)


루이스 콤파니스, 좌익 카탈루냐 민족주의 지도자이자 카탈루냐 제2대 수반(1933-1940), 1940년 프랑코 독재 정권에 의해 처형됨


20세기 초반, 주요 민족주의 정당은 프란세스크 캄보가 이끈 보수적인 ''Lliga Regionalista''였다. 이 시기 주요 성과는 제한된 행정 권한을 가진 4개 카탈루냐 지방을 묶은 카탈루냐 연방이었다. 연방은 카탈루냐 근대화를 위한 기반 시설(도로, 전화 등)을 개발하고 문화(직업 교육, 도서관, 카탈루냐어 규제, 과학 연구)를 장려했다. 1919년 자치 헌장 부여 실패로 카탈루냐 온건 민족주의 정당들은 급진화되었고, ''Acció Catalana''과 ''Estat Català''가 창설되었다.

카탈루냐 만코무니타트는 1925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정권 동안 해산되었다. 1926년 11월, 마시아는 카탈루냐를 프랑스에서 군사적으로 침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31년, 카탈루냐 공화당과 Estat Català의 합병으로 탄생한 ''카탈루냐 공화 좌파''(ERC)는 스페인 제2공화국 선포와 같은 날 카탈루냐 공화국을 옹호하며 카탈루냐 선거에서 승리했다. 프란세스크 마시아는 자치 카탈루냐 정부를 수용했고, Generalitat de Catalunya라는 역사적인 이름을 되찾았다.

카탈루냐 정부는 1934년 10월 사건에서 공화국 법적 질서를 위반했는데, 루이스 콤파니스는 스페인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스페인 내전 발발로 민주주의와 문화적 정상성은 중단되었다. 1939년 자치 정부는 폐지되었고, 콤파니스는 1940년 프랑스 공방전 이후 체포되어 '군사 반란' 혐의로 처형되었다.[4]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기간 동안 여러 카탈루냐 운동이 지하에서 활동했다. 1977년 망명 중이던 호셉 타라데야스가 돌아왔을 때, ''Generalitat''가 복원되었다. 1978년 스페인 헌법 승인에 이어, 자치 헌장이 공포되어 국민 투표에서 승인되었다. 카탈루냐는 자치 공동체로 조직되었고, 1980년 호르디 푸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3년 연속 자치 정부를 통치했다. 프랑스 북부 카탈루냐 지역은 정치적 자치권이나 언어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thumb. 스페인 헌법 재판소의 자치 규약 (2006년) 판결 거부 및 자기 결정권 지지.]]

현재 주요 카탈루냐 민족주의 정당은 ''카탈루냐 민주 연합'', ''카탈루냐 민주 연합''이다. ''카탈루냐 공화 좌파''는 독립 옹호를 칭하며, ''카탈루냐 독립 연대''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2010년 선거에서 50.0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006년 2006년 카탈루냐 자치 규약 국민 투표에서 카탈루냐 정부 권한 확대 개정안이 통과되었으나, 투표율은 48.84%로 낮았다.

2012년 9월 11일, 60만~200만 명이 바르셀로나에서 독립 요구 시위를 벌였다. 9월과 10월, 카탈루냐 지방 자치 단체들이 자유 카탈루냐 영토임을 선언했다.

2013년 9월 11일, 160만 명이 카탈루냐 길이라는 인간 사슬을 통해 독립을 지지했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아르투르 마스 정부는 카탈루냐 독립을 공개 지지했다. 2014년 구속력 없는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2015년 카탈루냐 의회 선거에서 민족주의자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17년 카탈루냐 지방 선거에서 독립 지지 정당이 다수 의석을 확보했지만,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다. 시민당 (Cs)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

카탈루냐 자치 정부 수반 카를레스 푸지데몬과 700명 이상의 카탈루냐 시장들이 독립 주민투표 지지를 위해 만남.


2016년 9월, 푸지데몬은 독립 주민투표를 2017년 9월 하반기에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7년 6월, 주민투표는 10월 1일에 열리고 질문은 "카탈루냐가 공화국 형태의 독립 국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발표했다. 스페인 정부는 "불법"이라고 말했다.[9]

카탈루냐 자치 의회는 2017년 9월 6일 독립 공화국 창설 법률을 승인했다.[10][11][12] 야당은 항의하며 퇴장했다.[13] 9월 7일, "전환법"이 통과되었다.[14][15] 같은 날, 스페인 헌법 재판소는 법률을 정지시켰다.[16][17] 이 법은 10월 17일 무효 선언되었고,[18] 카탈루냐 자치 규약에 따라 불법이다.[19][20][21]

중앙 정부는 투표 용지 압수, 휴대폰 압수, 투표소 운영자 벌금 위협, 웹사이트 폐쇄, 구글에 앱 삭제 요구 등을 했다.[22] 경찰 파견에도 불구, 학부모들은 투표소 점거를 맹세했다.[23] 선거 조직자 등이 체포되며 시위가 커졌다.[24]

주민투표는 정지되었음에도 2017년 10월 1일에 열렸다. 90%가 독립을 지지했지만 투표율은 43%였고 부정행위 보고가 있었다.[25] 2017년 10월 10일, 카를레스 푸지데몬은 독립을 선언했지만 유예했다. 스페인 정부와 대화를 위해 유예를 제안했다.[25][26]

스페인 민간 경비대의 카탈루냐 정부 청사 급습 후 바르셀로나 시위.


2017년 10월 27일, 카탈루냐 의회는 독립 선언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스페인 헌법 제155조가 발동되어 카탈루냐 정부가 해산되고 중앙 정부 직접 통치가 시행되었다.[27][28][29] 2017년 12월 21일 선거에서 친독립 정당들이 의회 통제력을 유지했다. 이네스 아리마디스의 시우다다노스당이 최다 득표 정당이 되었다.

2017년 카탈루냐 독립 주민투표는 '''1-O''' ("10월 1일")로도 알려져 있으며, 2017년 10월 1일에 실시된 독립 주민투표다. 카탈루냐 자치 의회에서 카탈루냐 자결권에 관한 법률로 통과되었고, 카탈루냐 자치 정부에 의해 소집되었다.[31][32][33] 2017년 9월 7일 불법 선언 및 정지되었다.[34][35][36] 스페인 헌법 재판소는 스페인 헌법 위반으로 선언했다.[37][38][39] 카탈루냐 고등 법원은 경찰에 저지를 명령했다.[40][41][42] 국제 옵서버들은 최소 기준 미달이라고 선언했다.[43][44][45]

주민투표는 2017년 9월 6일 카탈루냐 공화국 법적 전환 및 창설 법과 함께 통과되었고, 9월 7일 독립은 단순 과반수로 구속력이 있다고 명시했다.[10][11] 10월 17일 무효 선언되었고,[18] 카탈루냐 자치 규약에 따라 불법이다.[19][20][46]

2018년 10월 1일 바르셀로나 시위


주민투표 질문은 "카탈루냐가 공화국 형태의 독립 국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였다. "예" 측이 승리(92.01%), 투표율은 43.03%였다. 경찰 단속으로 최대 77만 표가 투표되지 못했다고 추산되었다.[47][48][49][50] "보편적인 인구 조사" 시스템으로 모든 투표소에서 투표 가능했다.[51][52]

모소스 다스쿼드라 일부 소극적 태도로 많은 투표소가 열렸다. 국가 경찰과 민간 경비대가 투표소를 습격했다.[59][60] 893명 민간인, 111명 경찰 및 경비대 요원 부상 보고.[61][60][62][63]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1066명 민간인, 11명 경찰 및 경비대 요원, 1명 모소스 다스쿼드라 요원 부상.[67] 유엔 인권 고등 판무관은 폭력 행위 입증 촉구.[68][69]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휴먼 라이츠 워치는 경찰 행위를 "과도하고 불필요한 무력 사용" 비판.[70][71] 스페인 대법원 판사는 푸지데몬이 경고를 무시했다고 말했다.[72][73]

모소스 다스쿼드라는 카탈루냐 고등 법원 명령 불복종 혐의, 호셉 루이스 트라페로 알바레스 경찰청장은 반역죄 수사 중.[74][75] 모소스 다스쿼드라는 혐의 부인, 비례성 원칙 적용 주장.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2024년 현재, 주요 정당 대부분—함께 카탈루냐를 위해(Junts), 카탈루냐 공화 좌파 (ERC), 카탈루냐 사회당 (PSC),[76] 카탈루냐 엥 코무 (Comuns), 인민 단결 후보 (CUP)—은 카탈루냐주의를 지지한다. PSC와 Comuns Sumar는 일반적으로 민족주의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국가적 목표 범위는 다르다. 일부는 카탈루냐 본토에 국한, 다른 이들은 "카탈루냐 국가"(전체 카탈루냐어 사용 지역) 정치적 개성 인정 추구. 범민족주의로 볼 수 있으며, CiU,[77] ERC,[78] CUP 공식 문서에서 확인.[79] 카탈루냐 외 지역에도 민족주의 정당, 연합이 있으며, 요구를 지지한다. 발렌시아 민족주의 블록 (BNV),[80] Bloc Nacional i d'Esquerres,[81] PSM, 마요르카 연합 (UM) 등.

ERC와 Junts는 카탈루냐 국가 아이디어에 헌신. 전 CiU(Junts 파생)는 주요 의제 아니었지만, BNV,[82] UM,[83] 마요르카 사회당 (PSM)과 협력.[84] ERC는 루시용, 발레아레스 제도, 발렌시아 공동체로 당 확장.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운동을 좌파, 중도, 우파 모두 아우르는 광범위한 운동으로 본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와 독립 운동은 카탈루냐 문화가 스페인(카스티야) 문화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1714년 스페인 부르봉 왕가 점령 이후 억압받아 온 국가라고 주장. 펠리페 5세의 신 국가 기본법으로 법 제도 폐지, 카탈루냐어 사용 금지. 모든 사회 상황에서 카탈루냐어 우선 사용 장려.

카탈루냐 민족주의자와 분리주의자는 카탈루냐가 재정 적자, 세금 대비 혜택 적다고 주장. 사법, 행정, 입법, 문화, 경제 자치 요구.

카탈루냐 독자적 선수단 주장. 스코틀랜드, 웨일스, 마카오처럼 국제 스포츠 이벤트 참가.

5. 1. 언어와 문화

르나센사(부활 또는 르네상스)는 유럽 낭만주의의 뒤를 이어, 카탈루냐 고유의 언어와 문학을 되살리려는 문화, 역사, 문학 운동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스페인 제1 공화국 (1873-1874)의 실패 직후, 이 운동은 스페인 자유주의 국가의 틀 내에서 카탈루냐의 자치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명확한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발렌티 알미랄 이 로제르의 ''카탈라니즘'', 빅토르 발라게르의 ''카탈루냐와 아라곤 왕국의 역사'', 엔릭 프라트 데 라 리바의 ''카탈루냐 민족성''과 같은 작품들은 카탈루냐의 민족성을 증명하는 데 역사를 사용했다. 엘리 케두리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은 "과거"가 "현재"를 설명하고 의미와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19세기 민족주의 담론에서 흔했다.

르나센사의 많은 작품의 핵심에는 민족이라는 강력한 개념이 있었다. 민족 개념은 주류 카탈루냐 낭만주의 민족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특히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와 같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저술에서 유래한다.

민족 개념은 1830년대 카탈루냐 지식인 사회에 유입되었으며, 이 지역의 중세 역사와 언어학에 대한 강조에서 비롯되었다. 호안 코르타다, 마르티 데 익살라와 그의 제자인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요렌스 이 바르바의 저술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들은 헤르더, 사비니, 스코틀랜드 상식학파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아, 카탈루냐인이 다른 스페인 사람, 특히 카스티야인과 다른 이유를 물었다. 코르타다는 열악한 자연 환경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가 스페인의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성공적인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카탈루냐인들은 수세기에 걸쳐 강한 결의와 불변성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그들이 근면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다."고 결론지었다. 데 익살라와 요렌스는 카탈루냐인에게 특유한 두 가지 특성은 상식(세니)과 근면함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전통적인 카탈루냐 세니는 민족정신의 표현이었으며", 이는 카탈루냐인을 카스티야인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들었다.

19세기 말엽, 카탈루냐주의는 진보 및 보수 세력 사이에서 자체적인 교리적 기반을 형성했다. 동시에 첫 번째 정치 프로그램 (''억울함의 기념비'', ''만레사 기초''(1892))을 수립하고, 명백히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띤 광범위한 문화 및 협회 운동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와 독립 운동은 카탈루냐 문화가 스페인(카스티야)의 문화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1714년 스페인 부르봉 왕가가 무력으로 카탈루냐를 점령한 이후 억압받아 온 국가라고 주장한다. 펠리페 5세가 포고한 누에바 플란타 법령에 의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후 카탈루냐의 법 제도가 폐지되고, 공적인 장소에서 카탈루냐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문화적 입장에서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카탈루냐에서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 카탈루냐인이 카스티야어보다 우선하여 민족 고유의 언어인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도록 장려한다. 또한, 화자 수와 문화적·전통적 입장에서 스페인 정부 시설 또는 유럽 각국의 시설에서 카탈루냐어를 사용할 권리를 지키려고 한다.

5. 2. 경제와 재정

18세기 스페인 경제는 농업 중심의 계층적 사회 구조였으며, 가톨릭 교회와 부르봉 왕가가 지배권을 다투었다. 19세기 나폴레옹 침략으로 국가는 황폐화되었고 초기 산업화는 실패했다. 스페인은 정치적, 문화적으로 유럽에서 고립되었다.

산업 혁명은 카탈루냐에서 섬유, 공예품, 와이너리 등 산업화를 통해 진전되었다. 산업화와 무역은 ''르네상스''(Renaixença)라는 문화 운동과 함께 일어났는데, 이 운동은 마드리드 왕실에 불만을 품고 카탈루냐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카탈루냐의 초국가주의적 지식인들은 바르셀로나 산업 거물들의 후원을 받아 문화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 지식인들은 카탈루냐의 문화, 언어, 세계관을 바탕으로 새로운 존재론을 창조하여 스페인의 낙후성에 대응하고 카탈루냐 정체성을 쇄신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후원자들이 카탈루냐 민족주의가 스페인을 포함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분리 요구는 피했다.

  •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는 산업 시장을 파괴하고 지역을 빈곤하게 만들 것이었다.
  • 카탈루냐 산업 계급은 "마음속으로는 무조건 친스페인적"이었다.


18세기 동안 마드리드의 경제적 이익과 떠오르는 카탈루냐 산업가들은 협력했다. 민족주의 지식인들에게 이것은 카탈루냐주의가 국가 정체성을 장려할 수 있지만 스페인 내에서 작동해야 함을 의미했다.

바르셀로나의 산업 엘리트들은 카탈루냐가 스페인의 일부로 남기를 원했는데, 카탈루냐의 산업 시장이 다른 스페인 지역의 소비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산업가들은 보호 무역, 국내 시장 헤게모니, 그리고 "중앙 스페인 문제에 개입하여 마드리드의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미치려는" 욕구를 가졌다. 따라서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는 경제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카탈루냐의 저명한 산업가들은 스페인의 주요 경제 수장 역할을 했다. 스탠리 페인은 "현대 카탈루냐 엘리트는 19세기의 경제적 산업화에서 주요 역할을 했으며, 카탈루냐를 적대자가 아니라 어느 정도 더 자유롭고 번영하는 스페인의 지도자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라고 관찰했다. 바르셀로나의 부르주아 산업가들은 보호 무역과 리더십이 "'국내 시장' 또는 '국내 경제 발전'(여기서 국내는 스페인을 의미함)"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스페인의 포함은 카탈루냐의 성공에 필수적이었으며, 이는 산업가들이 어떠한 분리주의 운동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의미했다. 독립은 약한 시장, 내부의 적, 아나키스트 운동의 강화만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제조업체들은 ''르네상스''와 카탈루냐 민족주의에 자금을 지원했지만, 경제적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카탈루냐가 스페인의 일부로 남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연방주의적 로비는 처음에는 효과가 없었고, 1880년대 후반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1889년, 산업 친화적인 ''리가 레히오날리스타''는 스페인의 법적 구조를 동질화하려는 시도 이후, 특정 카탈루냐 민법을 지켜냈다. 2년 후, 그들은 마드리드를 설득하여 보호 무역 조치를 통과시켰고, 이는 제조업자들 사이에서 친스페인적 태도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스페인의 중립에서 큰 이익을 얻었는데, 이는 양쪽에 수출할 수 있게 해주었고, 카탈루냐 산업가들이 장려한 모로코에서의 스페인 확장은 그들에게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20세기 초까지 카탈루냐 사업가들은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 및 옛 식민지, 즉 쿠바푸에르토리코 사이의 가장 수익성 있는 상업을 장악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적인 카탈루냐를 희망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후원자들은 시장 접근과 보호 무역이 필요했다. 그 결과, 민족주의자들은 산업가들의 친스페인적 입장이 일치하는 한 카탈루냐 정체성을 전파할 수 있었다. ''리가 레히오날리스타 데 카탈루냐''가 이러한 타협을 지지했기 때문에 20세기 초부터 카탈루냐 정치를 지배했다. 페인은 "주요 카탈루냐주의 정당인 부르주아 리가는 분리주의를 추구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스페인 내에서 자치하는 카탈루냐를 위한 더 신중하고 독특한 위치를 추구했다. ''리가''의 지도자들은 1916년 선거 운동을 '''Per l'Espanya Gran''' (위대한 스페인을 위하여)라는 슬로건으로 펼쳤다"라고 언급한다. ''리가''는 민족주의적 입장을 포괄적 민족주의로 완화했다. 그것은 카탈루냐주의가 번성하도록 허용했지만 스페인 내에서 연방주의를 장려하고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를 장려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섬세한 균형에서 벗어나는 것은 카탈루냐를 지지하고 스페인 정체성을 지닌 산업가들을 격분시켰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분리를 향한 어떠한 움직임도 방지하는 동시에 1914년 카탈루냐 자치 정부가 권력을 잡은 후 카탈루냐의 "연방" 권리를 강화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자와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는 카탈루냐가 재정 적자를 메우려는 스페인 국가에 의해 경제적 손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납부한 세금보다 받아야 할 혜택이 적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전통적으로 카탈루냐는 사법, 행정, 입법, 문화, 경제의 각 입장에서 현재보다 더 높은 자치를 요구하고 있다.

5. 3. 정치와 자치

레콩키스타 초기, 프랑크족은 무슬림을 피레네 산맥 남쪽으로 몰아냈다. 이후 침략을 막기 위해 샤를마뉴는 정복한 영토에 프랑크 백작령을 만들어 알-안달루스 사이의 완충국 역할을 했다.

11세기 동안 프랑크 군주제와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약해지면서 바르셀로나 백작령으로 통합되었고, 이는 오늘날 카탈루냐의 기원이 되었다. 1070년경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1세는 다른 카탈루냐 백작들과 귀족들을 봉신으로 복속시켰다. 그의 행동은 카탈루냐 문화 정체성의 씨앗을 뿌렸다.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1137년 아라곤 왕국과 협약을 맺어 아라곤 왕관으로 알려진 두 실체의 왕조 연합을 창설했는데, 이 시스템은 왕과 귀족의 권력을 상호 견제하도록 설계되었다. 1173년에 카탈루냐는 법적으로 처음으로 구획되었고, 1170년에서 1195년 사이에 ''Liber feudorum maior''와 ''Gesta Comitum Barchinonensium''이 함께 편집 및 기록되어 카탈루냐 정치 정체성의 세 가지 이정표로 간주되었다.[2]

또한, 왕국의 신분들은 왕의 권위에 대항하는 귀족, 주교, 수도원장 및 부르주아지의 대표 기구인 ''Corts Catalanes''(카탈루냐 코르테스)를 설립했다. 13세기 말까지 군주는 법을 승인하거나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코르테스의 동의가 필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탈루냐 코르테스는 ''Diputació del General'' 또는 ''Generalitat''라고 불리는 상설 기구를 선출했다. 최초의 카탈루냐 헌법은 1283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카탈루냐 코르테스에 의해 로마법의 전통을 따라 공포되었다.

13세기에 아라곤의 하이메 1세는 발렌시아 왕국발레아레스 제도를 정복했다. 그 이후 정복은 사르데냐, 코르시카, 시칠리아, 나폴리 및 아테네 공작령까지 지중해로 확장되었으며, 1350년경 아라곤 왕관은 이 시기 지중해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강력한 상업 제국 중 하나를 주재했다. 카탈루냐의 경제적 성공은 강력한 상인 계급을 형성했고, 이들은 코르테스를 정치적 무기로 사용했다.

13세기와 14세기에 걸쳐 이 상인들은 막대한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축적하여 아라곤 왕관의 권력에 상당한 제동을 걸 수 있었다. 15세기까지 아라곤 군주는 코르테스 앞에서 토지의 기본법을 존중하겠다고 맹세하기 전까지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러한 권력 균형은 카탈루냐 정치 문화의 특징으로 보이는 고전적인 ''pactisme'', 즉 계약주의의 예이다.

1410년, 왕은 왕위를 계승할 상속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다. 아라곤 왕관을 구성하는 세 개의 이베리아 왕국(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 공국)의 대표자들은 카스페의 타협을 통해 카스티야의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에게 공석이 된 왕위를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지중해 무역의 전조인 바르바리 해적의 부상과 함께 유럽 권력의 중심지는 지중해 분지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했다.

카탈루냐 코르테스와 카탈루냐 공국의 나머지 자생적인 법적 및 정치적 조직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1716년에 최종적으로 종료되었다. 카탈루냐 기관과 대부분의 지역 인구는 카를 대공의 편을 들었고, 그는 법적 현상 유지를 유지하고 현대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의 완전한 패배는 아라곤 왕관의 자치 의회에 대한 법적, 정치적 종료를 의미했으며, 누에바 플란타 칙령이 통과되고 새로운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변환을 사실상 통일된 왕국에서 법적으로 중앙 집권화된 국가로 봉인했다.

르나센사는 억압과 급격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의 시대를 거친 후, 카탈루냐인 고유의 언어와 문학을 되살리려는 문화, 역사, 문학 운동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특히 1868년 혁명과, 스페인 제1 공화국 (1873-1874)의 실패 직후, 이 운동은 스페인 자유주의 국가의 틀 내에서 카탈루냐의 자치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명확한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세기 말엽, 카탈루냐주의는 진보적인 세력뿐만 아니라 보수적인 세력 사이에서도 자체적인 교리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동시에 첫 번째 정치 프로그램 (예: ''억울함의 기념비'', ''만레사 기초'', 1892)을 수립하고, 명백히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띤 광범위한 문화 및 협회 운동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스페인쿠바필리핀에서 마지막 식민지를 잃었는데, 이는 정치적 카탈루냐주의에 추진력을 제공했다. 카탈루냐 최초의 현대 정당은 리가 레히오날리스타였다. 1901년에 창당된 이 정당은 1907년에 카를주의에서 연방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른 카탈루냐주의 세력과 연합을 형성하여, 소위 ''솔리다리다트 카탈라나''로 묶여, 엔릭 프라트 데 라 리바가 그의 선언문 ''라 나시오날리타트 카탈라나'' (1906)에서 공식화한 지역주의 프로그램으로 선거에서 승리했다.

20세기 초반, 주요 민족주의 정당은 보수적인 ''Lliga Regionalista''였으며, 프란세스크 캄보가 이끌었다. 민족주의자들에게 있어 이 시기의 주요 성과는 제한된 행정 권한을 가진 4개의 카탈루냐 지방을 묶은 카탈루냐 연방이었다. 연방은 카탈루냐를 근대화하기 위해 중요한 기반 시설(도로 및 전화 등)을 개발하고 문화(직업 교육, 도서관, 카탈루냐어 규제, 과학 연구)를 장려했다. 1919년 복고 정권 하에서 자치 헌장을 부여받는 데 실패하면서, 카탈루냐의 온건 민족주의 정당들은 급진화되었고, 그 결과 ''Acció Catalana''과 ''Estat Català''가 창설되었다.

카탈루냐 만코무니타트는 1925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 정권 동안 해산되었다. 1926년 11월, 마시아는 카탈루냐를 프랑스에서 군사적으로 침공하려는 시도를 주도하여 고의적으로 시민 봉기를 일으키고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포하려 했으나, 국경을 넘지도 못했다.

1931년, 카탈루냐 공화당과 Estat Català의 합병으로 탄생한 좌익 카탈루냐 민족주의 정당인 ''카탈루냐 공화 좌파''(Esquerra Republicana de Catalunya, ERC)는 스페인 제2공화국 선포와 같은 날 스페인과 연방으로 묶인 카탈루냐 공화국을 옹호하며 카탈루냐 선거에서 승리했다. 새로운 스페인 정부의 압력으로 ERC의 지도자 프란세스크 마시아는 대신 자치 카탈루냐 정부를 수용했고, 이 정부는 Generalitat de Catalunya라는 역사적인 이름을 되찾았다.

카탈루냐 정부는 1934년 10월 사건에서 공화국 법적 질서를 위반했는데, 당시 루이스 콤파니스는 스페인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민주주의와 문화적 정상성의 회복은 스페인 내전의 발발로 인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중단되었다. 1936-1939년 전쟁 기간 동안 공화국에 충성했던 자치 정부는 프랑코주의 군대의 승리 후 1939년에 폐지되었다. 전쟁 직후, 콤파니스는 1940년 프랑스 공방전 이후 체포되어 스페인 당국에 넘겨졌고, 고문을 받은 후 '군사 반란'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40년 10월 15일 바르셀로나 몬주익에서 처형되었다.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그는 시민 경비대의 총살대에 끌려갔고, 그들이 발포하자 '카탈루냐를 위하여!'라고 외쳤다.[4]

1975년까지 지속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 기간 동안 여러 정치적 또는 문화적 카탈루냐 운동이 지하에서 활동했다.

망명 중인 콤파니스의 후계자 호셉 타라데야스는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1977년에 그가 돌아왔을 때, 카탈루냐 정부 - ''Generalitat'' - 가 다시 복원되었다. 1978년 스페인 헌법 승인에 이어, 자치 헌장이 공포되어 국민 투표에서 승인되었다. 카탈루냐는 자치 공동체로 조직되었고, 1980년, 보수 민족주의 정당 ''Convergència Democràtica de Catalunya'' 출신의 호르디 푸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3년 연속 자치 정부를 통치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프랑스에 속한 역사적인 북부 카탈루냐 지역(프랑스 피레네-오리엔탈 부의 루시용)에서는 유의미한 정치적 자치권이나 언어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thumb(바르셀로나)의 모습. 이 시위는 스페인 헌법 재판소가 자치 규약 (2006년)에 대해 내린 판결을 거부하고 자기 결정권을 지지하기 위해 열렸다.]]

현재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주요 정당은 ''카탈루냐 민주 연합''(Convergència Democràtica de Catalunya), ''카탈루냐 민주 연합''(Unió Democràtica de Catalunya)이다. ''카탈루냐 공화 좌파''(Esquerra Republicana de Catalunya)는 민족주의에서 파생되었지만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거부하고 독립 옹호라고 칭하며, ''카탈루냐 독립 연대''(Soldaritat Catalana)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정당은 2010년 선거에서 50.0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006년에는 2006년 카탈루냐 자치 규약을 개정하여 카탈루냐 정부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는 내용의 1979년 카탈루냐 자치 규약 개정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자 중 73.24%가 찬성하여 통과되었으며, 2006년 8월 9일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그러나 투표율 48.84%는 카탈루냐 민주주의 역사상 전례 없는 높은 기권율을 나타냈다.

2012년 9월 11일, 60만 명에서 200만 명의 사람들이 바르셀로나 중심부에 모여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다. 9월과 10월에는 수많은 카탈루냐 지방 자치 단체가 자유 카탈루냐 영토임을 선언했다.

2013년 9월 11일에는 160만 명이 참여하여 카탈루냐 독립을 지지하는 480킬로미터의 인간 사슬인 카탈루냐 길이 열렸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아르투르 마스 정부는 카탈루냐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카탈루냐 정부는 2014년에 이 문제에 대한 구속력 없는 국민 투표를 실시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2015년 카탈루냐 의회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아르투르 마스는 이를 국민 투표 선거라고 선언했다.

2017년 카탈루냐 지방 선거에서 독립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정당은 다수의 의석을 확보했지만, 50% 미만의 득표율로 과반수 득표에는 실패했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정당은 비민족주의 정당인 시민당 (Cs)이었다.

2016년 9월 말, 푸지데몬은 의회에 독립에 대한 구속력 있는 주민투표를 2017년 9월 하반기에 실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푸지데몬은 2017년 6월, 주민투표가 10월 1일에 열릴 것이며 질문은 "카탈루냐가 공화국 형태의 독립 국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발표했다. 스페인 정부는 이에 대해 "그 주민투표는 불법이기 때문에 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9]

주민투표가 실시되어 과반수의 "찬성" 투표가 이루어진 경우, 카탈루냐 자치 의회는 카탈루냐 자치 의회에서 2017년 9월 6일 회의에서 독립 공화국을 창설하는 법률을 승인했다.[10][11][12] 야당은 이 법안에 반대하며 항의했고, 투표 전에 퇴장했다.[13] 9월 7일, 카탈루냐 의회는 "전환법"을 통과시켰다.[14][15] 같은 날인 9월 7일, 스페인 헌법 재판소는 9월 6일 법률을 정지시켰으며, 이는 10월 1일에 주민투표가 합법적으로 진행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16][17] 이 법은 결국 10월 17일에 무효로 선언되었으며[18] 카탈루냐의 지위 변경에는 카탈루냐 의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는 카탈루냐 자치 규약에 따라 불법이기도 하다.[19][20][21]

중앙 정부는 투표 용지를 압수하고 휴대폰을 압수했으며, 투표소 운영자에게 최대 30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하겠다고 위협하고, 웹사이트를 폐쇄했으며, 구글에 안드로이드 앱 스토어에서 투표 위치 찾기를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22] 경찰은 투표를 억압하고 투표소를 폐쇄하기 위해 스페인 나머지 지역에서 파견되었지만, 학부모들은 투표소에서 주말에 행사를 계획하고 투표 기간 동안 열어두기 위해 점거하겠다고 맹세했다.[23] 일부 선거 조직자, 카탈루냐 내각 관계자를 포함하여 체포되었으며, 지역 기관의 시위와 가두 시위가 더욱 커졌다.[24]

주민투표는 헌법 재판소에 의해 정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 10월 1일에 열렸다. 카탈루냐 당국에 따르면 유권자의 90%가 독립을 지지했지만 투표율은 43%에 불과했으며 부정행위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25] 2017년 10월 10일, 주민투표 후, 카탈루냐 자치 정부 수반 카를레스 푸지데몬은 카탈루냐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유예했다. 푸지데몬은 카탈루냐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주민투표 결과를 발표하면서 "카탈루냐가 공화국 형태의 독립 국가가 되기 위한 국민의 명령"을 가정하지만, 앞으로 몇 주 안에 의회가 스페인 정부와의 "합의된 해결책을 찾기 위한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 독립 선언의 효력을 유예"할 것을 제안했다.[25][26]

2017년 10월 27일, 카탈루냐 의회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결의안을 무기명 투표로 통과시켰으며, 헌법주의 의원들이 불법으로 간주되는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70-10으로 통과되었다. 그 결과, 스페인 헌법 제155조가 발동되어 카탈루냐 정부가 해산되고 마드리드의 중앙 정부로부터 직접 통치가 시행되었다.[27][28][29] 스페인의 직접 통치하에, 2017년 12월 21일에 카탈루냐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세 개의 친독립 정당은 70석의 소수 정당과 투표 유효 득표수의 47.5%를 차지하며 의회 통제력을 유지했다. 이네스 아리마디스의 반독립 시우다다노스당이 25.4%의 득표율로 가장 많은 득표를 한 정당이 되었으며, 이는 카탈루냐 역사상 처음으로 비민족주의 정당이 선거에서 가장 많은 득표와 의석을 차지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2017년 카탈루냐 독립 주민투표는 스페인 언론에서 수사자 '''1-O''' ("10월 1일"을 의미)로도 알려져 있으며, 스페인 자치 공동체 카탈루냐에서 2017년 10월 1일에 실시된 독립 주민투표로, 카탈루냐 자치 의회에서 카탈루냐 자결권에 관한 법률로 통과되었고, 카탈루냐 자치 정부에 의해 소집되었다.[31][32][33] 이는 2017년 9월 7일에 불법으로 선언되었으며[34][35][36] 스페인 정부의 요청에 따라 스페인 헌법 재판소에 의해 정지되었으며, 이는 스페인 헌법을 위반한 것으로 선언했다.[37][38][39] 또한, 9월 초에 카탈루냐 고등 법원은 경찰에 주민투표 준비 담당자의 체포를 포함하여 이를 막도록 명령했다.[40][41][42] 투표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행위 의혹과 국가 경찰과 민간 경비대의 무력 사용으로 인해 카탈루냐 자치 정부가 초청한 국제 옵서버들은 주민투표가 선거에 대한 최소한의 국제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선언했다.[43][44][45]

주민투표는 2017년 9월 6일 카탈루냐 의회에서 카탈루냐 공화국 법적 전환 및 창설 법과 함께 통과되었으며, 다음 날인 9월 7일에 독립은 최소 투표율을 요구하지 않고 단순 과반수로 구속력이 있다고 명시했다.[10][11] 정지된 후, 이 법은 10월 17일에 최종적으로 무효로 선언되었으며[18] 카탈루냐의 지위 변경에는 카탈루냐 의회에서 3분의 2의 다수, 즉 90석이 필요하다는 카탈루냐 자치 규약에 따라 불법이기도 하다.[19][20][46]

유권자들이 "예" 또는 "아니요"로 답변한 주민투표 질문은 "카탈루냐가 공화국 형태의 독립 국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였다. "예" 측이 승리하여 2,044,038명(92.01%)이 독립에 찬성했고 177,547명(7.99%)이 반대했으며, 투표율은 43.03%였다. 카탈루냐 정부는 경찰의 단속으로 인해 투표소가 폐쇄되어 최대 77만 표가 투표되지 못했다고 추산했다.[47][48][49][50] 하지만, 그날 일찍 도입된 "보편적인 인구 조사" 시스템을 통해 유권자들은 모든 투표소에서 투표할 수 있었다.[51][52]

주민투표 당일, 카탈루냐 자치 경찰인 모소스 다스쿼드라의 일부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많은 투표소가 열릴 수 있었다. 스페인 국가 경찰과 민간 경비대가 개입하여 여러 투표소를 습격했다.[59][60] 893명의 민간인과 111명의 국가 경찰 및 민간 경비대 요원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고되었다.[61][60][62][63] 카탈루냐 자치 정부의 카탈루냐 보건 서비스(CatSalut)의 공식 최종 보고서에 따르면 1066명의 민간인, 11명의 국가 경찰 및 민간 경비대 요원, 그리고 1명의 지역 경찰인 모소스 다스쿼드라 요원이 부상을 입었다.[67] 유엔 인권 고등 판무관 자이드 라드 알 후세인은 스페인 정부에 주민투표를 막기 위해 발생한 모든 폭력 행위를 입증할 것을 촉구했다.[68][69] 경찰의 행위는 또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과 휴먼 라이츠 워치로부터 "과도하고 불필요한 무력 사용"으로 비판을 받았다.[70][71] 스페인 대법원 판사 파블로 야레나는 푸지데몬이 주민투표가 개최될 경우 폭력 사태가 악화될 것이라는 반복적인 경고를 무시했다고 말했다.[72][73]

모소스 다스쿼드라는 주민투표를 막기 위한 카탈루냐 고등 법원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혐의로 불복종 혐의를 받고 있다.[74] 호셉 루이스 트라페로 알바레스, 모소스 다스쿼드라 경찰청장을 포함하여, 스페인 국립 법원에 의해 반역죄로 수사받고 있다.[75] 모소스 다스쿼드라는 이러한 혐의를 부인하고 명령을 따랐지만 스페인 법에서 모든 경찰에 요구되는 비례성의 원칙을 적용했다고 주장한다.

광범위한 운동인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현재 정치 무대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2024년 현재, 주요 카탈루냐 정당 대부분—함께 카탈루냐를 위해(Junts), 카탈루냐 공화 좌파 (ERC), 카탈루냐 사회당 (PSC),[76] 카탈루냐 엥 코무 (Comuns) 및 인민 단결 후보 (CUP)—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카탈루냐주의를 지지한다. 다만 PSC와 Comuns Sumar는 일반적으로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들의 국가적 목표의 범위는 다르다. 일부는 이를 카탈루냐 본토에만 국한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소위 "카탈루냐 국가", 즉 전체 카탈루냐어 사용 지역의 정치적 개성을 인정받기를 추구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종의 범민족주의로 볼 수 있으며, CiU,[77] ERC[78] 및 인민 단결 후보 (CUP)의 공식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79] 카탈루냐 외에도 주요 카탈루냐어 사용 지역에는 자체적인 민족주의 정당과 연합이 있으며, 이들은 카탈루냐 국가의 국가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요구를 다양한 정도로 지지한다. 예를 들어, 발렌시아 민족주의 블록 (BNV)[80]는 발렌시아 공동체에서, Bloc Nacional i d'Esquerres,[81] PSM 및 마요르카 연합 (UM)은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활동한다.

두 주요 카탈루냐 민족주의 정당(ERC와 Junts)은 다양한 방식으로 카탈루냐 국가에 대한 아이디어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었다. 전 CiU (Junts는 여기서 파생됨)에게 이 문제는 그들의 주요 의제 중 하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iU는 발렌시아 정당 BNV[82], 마요르카 정당 UM[83] 및 마요르카 사회당 (PSM)과 장기적인 협력을 해왔다.[84] 반면에, 카탈루냐 공화 좌파 (ERC)는 루시용, 발레아레스 제도 및—발렌시아 국가 공화 좌파 (ERPV)로서—발렌시아 공동체로 당을 확장함으로써 그러한 방향으로 더 실질적인 조치를 취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좌파, 중도, 우파의 정당과 시민들을 모두 아우르는 광범위한 운동으로 본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와 독립 운동은 카탈루냐 문화가 스페인(즉, 카스티야)의 문화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1714년 스페인 부르봉 왕가가 무력으로 카탈루냐를 점령한 이후 억압받아 온 국가라고 주장한다. 펠리페 5세가 포고한 신 국가 기본법에 의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후 카탈루냐의 법 제도가 폐지되고, 공적인 장소에서 카탈루냐어 사용이 금지되었다. 문화적 입장에서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은 카탈루냐에서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 카탈루냐인이 카스티야어보다 우선하여 민족 고유의 언어인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도록 장려한다.

카탈루냐 민족주의자와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는 카탈루냐가 재정 적자를 메우려는 스페인 국가에 의해 경제적 손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납부한 세금보다 받아야 할 혜택이 적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전통적으로 카탈루냐는 사법, 행정, 입법, 문화, 경제의 각 입장에서 현재보다 더 높은 자치를 요구하고 있다.

상징적인 입장에서는 카탈루냐가 스페인 선수단 구성에 참여하지 않고 카탈루냐 독자적인 선수단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페인 선수단과는 명확히 구분하여 비국가인 스코틀랜드, 웨일스, 마카오처럼 국제적인 스포츠 이벤트에 공식적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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