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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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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바이는 고대 그리스 도시로, 보이오티아 평원 남쪽에 위치해 있다. 아이올리스인이 건설했다는 추측이 있으며, 미케네 문명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6세기부터 아테네와 갈등을 겪었으며, 페르시아 전쟁 당시 페르시아 편에 섰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의 동맹으로 아테네와 대립했고, 코린토스 전쟁에서 스파르타에 대항했다. 기원전 371년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며 패권을 장악했으나, 곧 쇠퇴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저항하다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파괴되었고, 이후 로마에게 정복당했다. 중세 시대에는 동로마 제국의 견직물 산지로 발전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테바이는 카드모스가 건국했으며, 오이디푸스, 헤라클레스 등 중요한 인물과 관련된 비극의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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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바이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현지 이름테바이
다른 표기Θῆβαι
지위폴리스
존속 기간 시작기원전 335년
존속 기간 끝기원전 87년
나라 이름테바이
수도테바이
공용어에게 지역 그리스어
종교다신교
현재 국가그리스
카드메아 유적
카드메아 유적
역사
사건 제목재건
사건재건
사건 날짜기원전 316년
보충 설명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멸망. 재건 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반란 진압
언어 정보
그리스어Θῆβαι
로마자 표기Thēbai
국제음성기호tʰɛ̂ːbaj

2. 역사

아이올리스인테바이를 건설한 것으로 추측된다. 테바이에서 미케네 문명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도리아인의 침략을 받았으며, 이들의 정복은 도시를 둘러싼 신화의 배경이 되었다. 테바이는 보이오티아 지방의 중심에 위치하고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보이오티아의 맹주가 되었다.

기원전 6세기 후반, 테바이는 플라타이아의 독립 문제로 아테네와 처음 충돌했다. 플라타이아는 보이오티아 지역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아테네의 지원을 받았다. 기원전 506년, 테바이는 아테네의 아티키 침공을 격퇴하였다.

기원전 480년, 아케메네스 왕조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했다. 테바이는 페르시아 편에 섰지만, 모든 테바이인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400명의 테바이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테바이군은 페르시아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나,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했다. 이후 테바이는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보이오티아 동맹의 맹주 자리에서 물러났다. 스파르타는 테바이를 델포이의 상호방위동맹에서 제명하려고 했지만, 아테네의 중재로 제명은 면했다.

플라타이아 전투 (기원전 479년)


기원전 460년, 아테네(델로스 동맹)와 스파르타(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년-기원전 445년)이 발발했다. 기원전 457년, 스파르타는 정책을 전환하여 중부 그리스에서 아테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보이오티아의 테바이를 복권시켰다. 아테네는 오이노피타 전투(기원전 457년)에서 보이오티아 동맹을 격파하고 테바이를 제외한 모든 도시를 점령하여 보이오티아를 지배했지만, 테바이의 카도메아 요새는 아테네에 대한 저항 거점으로 버텼다. 델포이를 둘러싼 제2차 신성 전쟁(기원전 449년-기원전 448년) 이후 보이오티아 도시들은 아테네에 반기를 들었다. 코로네이아 전투(기원전 447년)에서 보이오티아 연합군은 아테네에 승리했고, 아테네가 보이오티아에서 철수하면서 보이오티아의 도시는 독립을 되찾았다.

기원전 431년,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기원전 404년)이 발발했지만, 테바이는 스파르타의 동맹으로서 아테네와 싸웠다. 아테네는 플라타이아이 등 소규모 도시를 지원하여 테바이를 견제했다. 기원전 427년, 테바이는 플라타이아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기원전 424년에는 델리온 전투에서 테바이를 비롯한 보이오티아 군이 아테네 군을 격파하여 테바이의 군사적 실력이 드러났다.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고, 아테네에는 친 스파르타 정권인 삼십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테바이 지도자들은 스파르타가 합병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기원전 403년, 테바이는 아테네의 민주정 부활을 몰래 지원하였고, 스파르타에 대한 균형을 취하려고 했다. 반 스파르타 세력에게 아케메네스 왕조의 자금 지원이 이루어진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되어 테바이는 코린토스와 함께 반 스파르타 연합의 핵이 되었다. 기원전 395년, 테바이와 코린트 등의 국가와 스파르타 사이에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였다. 같은 해 테바이는 할리아르토스 전투와 기원전 394년의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군사적 능력을 보여 주었다.

기원전 387년,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모든 그리스 도시의 완전한 자치가 명기되었다. 이 평화 조약은 보이오티아 도시 국가들이 테바이로부터 이반을 초래하여 테바이에는 치명적인 결과가 되었다. 기원전 383년에 스파르타는 테바이를 급습하여 요새를 점거하고 군대를 약화시켰다.[1]

기원전 379년,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바이 시민 봉기가 성공하여 스파르타 군을 추방하고 민주정을 도입했다.[2] 이후 레욱트라 전투를 통해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하고 펠로폰네소스 침공을 통해 스파르타의 경제 기반을 파괴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퀴노스케팔라이 전투와 만티네이아 전투를 거치면서 유능한 지도자를 잃고 쇠퇴하였다. 제3차 신성 전쟁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지만, 이는 필리포스 2세의 그리스 세력 확대로 이어졌다.[2]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는 테바이에 인질로 보내져 에파메이논다스에게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기원전 339년, 아테네데모스테네스는 반 마케도니아 입장을 취하며 테바이를 설득하여 동맹을 맺었다.[2] 그러나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후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에 테바이-아테네 연합군은 패배했다.[2] 필리포스 2세는 보이오티아에 대한 지배권을 박탈하는 것에 만족했다.[2]

기원전 335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자, 테바이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반기를 들었다.[3]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테바이를 공격하여 철저하게 파괴했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다.[3] 이때 파괴를 면한 것은 사원과 핀다로스(기원전 5세기 테바이 출신의 시인)의 가문뿐이었고, 노예화를 면한 것은 성직자와 친 마케도니아 지도자, 핀다로스의 후예뿐이었다.[3]

기원전 316년, 카산드로스에 의해 테바이가 재건되었다.[3] 기원전 146년, 테바이는 로마 공화정에 정복당했다.[3] 로마 공화정이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독립을 시도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반란은 진압되고 영토의 절반이 사라졌다. 그때 이후로 테바이의 쇠락은 피할 수 없었다. 2세기의 파우사니아스는 테바이와 주변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게다가 소수의 사람들만 카드메아 바위에 산다고 보고하였다.[4]

테바이는 기원전 315년에 재건되었지만, 그리스에서 정치적으로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되지 못했다.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동로마 제국의 일부로 견직물 산지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2. 1. 도시의 기원

아이올리스인테바이를 건설한 것으로 추측된다. 테바이에서 미케네 문명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도리아인의 침략을 받았으며, 이들의 정복은 도시를 둘러싼 신화의 배경이 되었다. 테바이는 보이오티아 지방의 중심에 위치하고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보이오티아의 맹주가 되었다.

2. 2. 아테네와의 갈등과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6세기 후반, 테바이는 플라타이아의 독립 문제로 아테네와 처음 충돌했다. 플라타이아는 보이오티아 지역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아테네의 지원을 받았다. 기원전 506년, 테바이는 아테네의 아티키 침공을 격퇴하였다.

기원전 480년, 아케메네스 왕조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했다. 테바이는 페르시아 편에 섰지만, 모든 테바이인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400명의 테바이군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테바이군은 페르시아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나,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했다. 이후 테바이는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보이오티아 동맹의 맹주 자리에서 물러났다. 스파르타는 테바이를 델포이의 상호방위동맹에서 제명하려고 했지만, 아테네의 중재로 제명은 면했다.

2. 3.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460년, 아테네(델로스 동맹)와 스파르타(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60년-기원전 445년)이 발발했다. 기원전 457년, 스파르타는 정책을 전환하여 중부 그리스에서 아테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보이오티아의 테바이를 복권시켰다. 아테네는 오이노피타 전투(기원전 457년)에서 보이오티아 동맹을 격파하고 테바이를 제외한 모든 도시를 점령하여 보이오티아를 지배했지만, 테바이의 카도메아 요새는 아테네에 대한 저항 거점으로 버텼다. 델포이를 둘러싼 제2차 신성 전쟁(기원전 449년-기원전 448년) 이후 보이오티아 도시들은 아테네에 반기를 들었다. 코로네이아 전투(기원전 447년)에서 보이오티아 연합군은 아테네에 승리했고, 아테네가 보이오티아에서 철수하면서 보이오티아의 도시는 독립을 되찾았다.

기원전 431년,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기원전 404년)이 발발했지만, 테바이는 스파르타의 동맹으로서 아테네와 싸웠다. 아테네는 플라타이아이 등 소규모 도시를 지원하여 테바이를 견제했다. 기원전 427년, 테바이는 플라타이아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기원전 424년에는 델리온 전투에서 테바이를 비롯한 보이오티아 군이 아테네 군을 격파하여 테바이의 군사적 실력이 드러났다.

2. 4. 코린토스 전쟁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고, 아테네에는 친 스파르타 정권인 삼십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테바이 지도자들은 스파르타가 합병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스파르타와의 동맹을 파기했다. 기원전 403년, 테바이는 아테네의 민주정 부활을 몰래 지원하였고, 스파르타에 대한 균형을 취하려고 했다. 반 스파르타 세력에게 아케메네스 왕조의 자금 지원이 이루어진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되어 테바이는 코린토스와 함께 반 스파르타 연합의 핵이 되었다. 기원전 395년, 테바이와 코린트 등의 국가와 스파르타 사이에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하였다. 같은 해 테바이는 할리아르토스 전투와 기원전 394년의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군사적 능력을 보여 주었다.

기원전 387년,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모든 그리스 도시의 완전한 자치가 명기되었다. 이 평화 조약은 보이오티아 도시 국가들이 테바이로부터 이반을 초래하여 테바이에는 치명적인 결과가 되었다. 기원전 383년에 스파르타는 테바이를 급습하여 요새를 점거하고 군대를 약화시켰다.[1]

2. 5. 테바이의 패권

기원전 379년, 펠로피다스와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바이 시민 봉기가 성공하여 스파르타 군을 추방하고 민주정을 도입했다.[2] 레욱트라 전투(기원전 371년)에서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바이 군이 스파르타 군을 격파하면서 테바이는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했다. 에파미논다스가 이끄는 테바이 군은 펠로폰네소스를 침공하여 스파르타 경제의 기반인 노예를 해방시켰고, 테살리아마케도니아에도 비슷한 원정을 했다.

그러나 테바이의 패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기원전 364년 퀴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펠로피다스가 전사했고,[2] 만티네이아 전투(기원전 362년)에서는 에파미논다스를 비롯한 많은 장군을 잃었다.[2]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던 테바이는 패권을 잃고 부활한 아테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제3차 신성 전쟁(기원전 356년 – 기원전 346년)에서 테바이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도움으로 포키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는 필리포스 2세의 그리스 세력 확대로 이어졌다.[2]

2. 6. 마케도니아와의 항쟁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는 테바이에 인질로 보내져 에파메이논다스에게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기원전 339년, 아테네데모스테네스는 반 마케도니아 입장을 취하며 테바이를 설득하여 동맹을 맺었다.[2]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후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에 테바이-아테네 연합군은 패배했다.[2] 이 전투에서 테바이 신성대도 타격을 받았다.[2] 필리포스 2세는 보이오티아에 대한 지배권을 박탈하는 것에 만족했다.[2]

기원전 335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자, 테바이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반기를 들었다.[3]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테바이를 공격하여 철저하게 파괴했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다.[3] 이때 파괴를 면한 것은 사원과 핀다로스(기원전 5세기 테바이 출신의 시인)의 가문뿐이었고, 노예화를 면한 것은 성직자와 친 마케도니아 지도자, 핀다로스의 후예뿐이었다.[3]

2. 7. 헬레니즘 시대 이후

기원전 316년, 카산드로스에 의해 테바이가 재건되었다.[3] 기원전 146년, 테바이는 로마 공화정에 정복당했다.[3] 로마 공화정이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르는 동안 독립을 시도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기원전 87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반란은 진압되고 영토의 절반이 사라졌다. 그때 이후로 테바이의 쇠락은 피할 수 없었다. 2세기의 파우사니아스는 테바이와 주변 지역에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게다가 소수의 사람들만 카드메아 바위에 산다고 보고하였다.[4]

테바이는 기원전 315년에 재건되었지만, 그리스에서 정치적으로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되지 못했다.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동로마 제국의 일부로 견직물 산지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3. 지리

테바이는 보이오티아와 아티카를 나누는 키사이론 산맥의 북쪽 기슭, 보이오티아 평원의 남쪽 끝에 위치한다.

4. 신화

그리스 신화에서 테바이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신화에 따르면 테바이의 창건자는 카드모스이다. 페니키아 왕 아게노르의 명으로 제우스에게 납치된 에우로페를 수색하던 카드모스는 에우로페를 찾지 못해 귀국하지 못하고 대신 아레스의 용을 토벌하여 테바이를 건국했다. 카드모스는 하르모니아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지만 모두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중 한 명인 공주 세멜레가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풍요와 포도주와 주신인 디오니소스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오이디푸스의 비극의 무대이며, 오이디푸스는 카드모스의 현손에 해당한다. 오이디푸스에게는 2명의 아들(에테오클레스, 폴리네이케스)과 2명의 딸(안티고네, 이스메네)이 있었다. 2명의 아들은 왕위를 놓고 다투어 테바이 공략의 7장수의 이야기가 된다. 7장수는 공략에 실패하고, 반역자로서 매장이 금지된 형 폴리네이케스의 유해를 장례한 안티고네는 자결했다. 10년 후에 7장수의 아들들(에피고노이)이 승리를 거둔다. 신화에 따르면 테바이에는 일곱 개의 문이 있다고 하며, 테바이 공략의 7장수와 그 아들들인 에피고노이들은 각 장수가 하나의 문을 공격했고, 이에 맞선 테바이 측도 각 문에 한 명씩의 장수를 배치하여 대항했다.

또한 대영웅 헤라클레스 출생지이기도 하며, 여기서부터 테바이의 중장보병의 방패 문장에는 곤봉(헤라클레스의 상징)의 그림이 자주 사용되었다.

참조

[1] 기타 Thēbai
[2] 서적 헬레니카
[3] 서적 The Viotia the restoration of Thebes to the reduction in the Roman province Giuseppe Fiori 1899
[4] 서적 Description of Gre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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