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코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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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코섬은 야마구치현에 속한 섬으로, 불규칙한 모양과 언덕이 많은 지형을 가지고 있다. 혼슈 본섬과 40m의 해협으로 구분되며, 시모노세키 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히코섬은 히코섬 본섬, 무츠레섬, 다케노코섬, 후나섬을 포함하며, 2020년 기준 약 2만 4천 명의 인구가 거주한다. 섬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단노우라 전투 이후 타이라 씨족 난민들이 이주하여 지역 농업의 기반을 다졌다. 현재는 조선소, 티타늄, 아연 제련소를 포함한 공업이 발달했으며, 어업과 농업 또한 이루어진다. 히코섬은 세 개의 다리와 간몬 철도 터널을 통해 혼슈와 연결되며, 버스 노선도 운행된다. 섬에는 다양한 종교 시설, 교육 시설, 공원, 그리고 전설과 민담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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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코섬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위치 정보 | |
| 위치 | 동중국해 |
| 좌표 | 33° 56' 14" N, 130° 54' 52" E |
| 일반 정보 | |
| 공식 이름 | 히코시마 (彦島) |
| 다른 이름 | 히키시마 (引島) |
| 별칭 | 해당 없음 |
| 행정 구역 | |
| 국가 | 일본 |
| 현 | 야마구치현 |
| 시 | 시모노세키시 |
| 지리 정보 | |
| 면적 | 10.58 km² |
| 길이 | 5.7 km |
| 폭 | 2 km |
| 해안선 길이 | 해당 없음 |
| 최고봉 | 오야마(大山) |
| 최고봉 높이 | 111.8 m |
| 인구 통계 | |
| 인구 | 30,182명 (2011년 기준) |
| 인구 밀도 | 2,853명/km² |
| 민족 | 일본인 |
2. 지리
히코섬은 불규칙한 모양이며 언덕이 많은 지형이다. 폭이 40m에 불과한 해협이 섬과 혼슈 본섬을 구분한다. 시모노세키시의 광대한 지역이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야마구치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작은 섬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에서는 구 히코시마정(히코시마촌)에 해당하며, 시모노세키 시청 히코시마 지소의 관할 구역을 말한다. 이 경우, 히코섬 본섬 외에, 히비키나다에 떠 있는 무츠레섬, 히코섬과 가까운 다케노코섬(히코섬과 도로교로 연결), 간류섬의 3섬을 포함한다.
; 섬
히코섬 본섬과 간류섬, 다케노코섬의 3개 섬을 통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히코섬 본섬만을 가리킨다. 또한, 다이쇼 시대나 쇼와 시대 무렵의 잔재로 무쓰레섬을 히코섬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현재는 없지만 예전에는 히코섬 본섬, 후나시마, 다케노코섬 외에도 4개의 작은 섬(마요코섬, 마이코섬, 시로노섬, 덴마섬)이 더 있어서 합쳐서 7개 섬이라고 불렸다.
; 동부 매립지
히코섬의 에노우라에서 아마고에 이르는 동부 매립지는 1927년(쇼와 2년)에 허가가 난 매립 사업으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에노우라 지구를 제1기, 혼무라 지구를 제2기, 아마고 지구를 제3기 지구로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공장이 건설되어 있어 착수가 어려워 제1기 지구를 사람이 적은 혼무라 지구로 변경했다. 이후 1932년(쇼와 7년) 혼무라 지구 매립이 완료되었고, 시모노세키시와의 합병으로 시모노세키시가 착공하면서 종료되었다. 현재도 에노우라 부근은 미쓰비시 조선소로 번성하고 있다.
현재 히코시마 지역에는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시모노세키 시립 무카이 초등학교, 시모노세키 시립 모토무라 초등학교, 시모노세키 시립 니시야마 초등학교가 있다. 중학교는 시모노세키 시립 히코시마 중학교와 시모노세키 시립 겐요 중학교가 있으며, 그 외 학교로는 야마구치 현립 시모노세키 중등 교육 학교가 있다. 초등학교는 예외를 제외하고 지역별로 지정된 학교에 등교하며, 중학교는 사립이나 현립 중학교 등에 등교하지 않는 경우 지정된 학교에 등교한다.
| 정・아자 | 정 | 번지・호 | 초등학교 | 중학교 |
|---|---|---|---|---|
| 히코시마 아지노사토마치 | - | 전역 | 시모노세키 시립 모토무라 초등학교 | 시모노세키 시립 겐요 중학교 |
| 히코시마 오이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3초메 | ||||
| 히코시마 오이노야마 공원 | - | |||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5초메 | ||||
| 6초메 | ||||
| 7초메 | ||||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 시모노세키 시립 히코시마 중학교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5초메 | ||||
| 6초메 | ||||
| 7초메 | ||||
| 8초메 | ||||
| 9초메 | ||||
| 히코시마 데시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 ||
| 2초메 | ||||
| 3초메 | ||||
| 히코시마 데시마 히가시마치 | - | |||
| 히코시마 스기타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히코시마 스미노쿠라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히코시마 야마나카마치 | 1초메 | 1~7・9~12번지 | ||
| 8번지 | 시모노세키 시립 무카이 초등학교 | |||
| 2초메 | 전역 |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 ||
| 히코시마 사쿠라가오카마치 | - | |||
| 히코시마 무카이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 ||
| 2초메 | ||||
| 히코시마 타노쿠비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무카이 초등학교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 ||
| 2초메 | 1번 1~36・54~65호, 2・3번, 5번 1~28호, 6번 1~11호, 7・8번, 9번 6~46호, 10~27번 | |||
| 1번 37~53・66~93호, 4번, 5번 29~46호, 6번 12~25호, 9번 1~5・47~68호 |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 |||
| 3초메 | 전역 |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 ||
| 히코시마 미도리마치 | - |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 ||
| 히코시마 세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니시야마 초등학교 | 시모노세키 시립 겐요 중학교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5초메 | ||||
| 6초메 | ||||
| 7초메 | ||||
| 니시야마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5초메 | ||||
| 히코시마 타케노코지마마치 | - | |||
| 아자 히코시마(간류지마) | - |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 시모노세키 시립 히코시마 중학교 |
2. 1. 지명 유래
히코섬이라는 지명에 관해서는 일본서기의 "추아이 기"에 "히키시마(引島)"라고 기재된 것이 최초이다.[1] 지쿠젠국 풍토기(이분)의 이토군 조항에는 "아나도(穴門)의 히키시마"라고 쓰여 있다.[2] 이 "히키시마(引島)"라는 이름은 현재 고세토를 사이에 두고 히코섬과 반대편에 있는 이자키 지구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을 때, 갑자기 조류가 흘러 들어와 히코섬이 이자키로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2] 다른 설로는 단순히 히코섬에는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낮은 섬'→'히쿠시마'→'히키시마'가 된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3]2. 2. 인구
히코섬의 면적은 11.62km2이다. 2020년 11월 말 기준 인구는 24,500명으로,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오키나와섬 등을 제외하면 일본에서 인구가 많은 섬 중 하나이다. 섬 안에는 중화학공업 지대가 펼쳐져 있다.3. 역사
1863년에서 1864년 사이 시모노세키 전쟁 당시 히코시마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으며, 당시 일본판 홍콩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3] 1924년에는 독일 기술 제휴로 황산 암모늄 공장이 건설되면서 섬의 산업화가 시작되었다.[4] 현재 섬은 조선소[5]와 티타늄, 아연 제련소를 포함하여 인구 밀도가 높고 산업화가 진행되었다.[6]
히코시마 전체에서는 인구 감소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2005년부터 2020년까지의 인구 변화는 아래 표와 같다.
| 연도 | 인구 |
|---|---|
| 2005년 | 32,542명 |
| 2006년 | 32,312명 |
| 2007년 | 31,882명 |
| 2008년 | 31,273명 |
| 2009년 | 30,787명 |
| 2010년 | 30,264명 |
| 2011년 | 29,665명 |
| 2012년 | 29,267명 |
| 2013년 | 28,595명 |
| 2014년 | 28,063명 |
| 2015년 | 27,624명 |
| 2016년 | 26,968명 |
| 2017년 | 26,391명 |
| 2018년 | 25,922명 |
| 2019년 | 25,319명 |
| 2020년 (11월 말) | 24,500명 |
3. 1. 고대
섬은 1918년에 발견된 암각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2] 단노우라 전투 이후 타이라 씨족의 난민들이 섬으로 이주하여 지역 농업의 기반을 다졌다.[3]; 율령 국가
율령 국가가 되면 중앙 집권의 측면이 강해지므로 각지에서는 특산품을 중앙에 공납할 필요가 있었다. 히코 섬은 바다에 면한 토지였기 때문에 생선을 공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헤이안 시대의 가인 미나모토노 토시요리는 히코 섬의 생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이 와카의 서사(앞 글)에는 "도미"라는 글자가 있으며, 옛날부터 히코 섬에서 도미 어업이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830년경에는 히코 섬은 칙지 섬이 되었고, 데시마치에는 칙지전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 2. 중세
단노우라 전투 이후 타이라 씨족의 난민들이 섬으로 이주하여 지역 농업의 기반을 다졌다.[3] 호겐의 난에서 패배한 고노 미치쓰구와, 지쇼·주에이의 난(겐페이 합전)에서 패배한 헤이시(이세 헤이시)의 잔당(패잔병)은 히코 섬으로 이주하여, 히코 섬 개척의 초석을 다졌다. 그들은 고노 미치쓰구를 필두로 "히코 섬 12 묘조"라고 불린다. 1157년 고노 미치쓰구와 5명의 집권, 1186년 헤이시 집권의 말손인 우에다 지부노스케, 오카노 쇼란, 유리의 민부, 1214년 시모사국 오쿠라의 영주 와다 요시노부, 1215년 헤이시 집권 도네 킨고와 토미타 교부노스케 등이 히코섬으로 들어왔다.처음에는 언젠가 재흥을 생각했던 12 씨족이었지만 잇펜의 종자 사이라쿠 법사에게 재흥은 포기하도록 설득당하여, 히코 섬에 영주하며 개척하기로 했다.
3. 3. 근세
섬은 1918년에 발견된 암각화에서 알 수 있듯이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2] 단노우라 전투 이후 타이라 씨족의 난민들이 섬으로 이주하여 지역 농업의 기반을 다졌다. 1863년에서 1864년 사이 시모노세키 전쟁 당시 섬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으며, 당시 섬이 일본판 홍콩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3] 1924년 독일 기술 제휴로 황산 암모늄 공장이 건설되면서 섬의 산업화가 시작되었다.[4]분로쿠 원년(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무렵, 시모노세키와 기타큐슈 사이의 간몬 해협을 지날 때 사건이 일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을 태운 배가 실수로 좌초하여 생환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죽음의 여울에 휩쓸린 것이다. 히데요시와 배의 선장 아카시 요지베는 모리 히데모토 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히데모토에게는 하시바의 성이 주어졌다. 그러나 요지베는 호조 가문의 집권자로 원수를 갚으려 한다는 종자의 고언으로 인해 히데요시는 이를 믿었고, 요지베는 목이 잘려 살해되었다. 사건 후, 이 여울은 요지베가세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죽음의 여울"은 현재 항로 정비의 일환으로 제거된 상태이다. 간분 10년(1670년)에 세워진 석탑은 암초를 제거할 때 이동되어, 현재는 기타큐슈시의 와카메카리 공원에 있다.
간류지마의 싸움은 게이초 17년(1612년) 4월 13일에 행해진 검호 2인의 결투로, 미야모토 무사시가 29세, 사사키 코지로가 18세 때 행해졌다. 간류지마의 싸움 당일, 코지로는 무사시를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전혀 오지 않았고, 코쿠라성 부근에서는 무사시가 코지로를 무서워하여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나가오카 오키나가가 눈치채고, 무사시에게 섬으로 가서 코지로와 결투하도록 재촉했다. 결투 당시 코지로가 무사시의 미간을 베는 순간, 무사시도 코지로의 머리띠를 베었고, 최종적으로 그 칼이 뇌까지 꽂혀 코지로가 져서 죽었다.
히코시마는 에도 초기에는 고쿠라번의 영지였고, 히코시마 맞은편에 있는 모지 지구가 초후번의 영토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초후번에게도 고쿠라번에게도 불편했기 때문에 겐나 6년(1620년)에 초후번주 모리 히데모토와 고쿠라번주 오가사와라 타다마사의 협의 하에 히코시마와 모지의 영토가 교환되었다.
시모노세키 전쟁 당시 히코시마에는 이국을 맞이하기 위해 포대가 설치되었다. 히코시마에는 다노코 포대, 아이즈바 포대, 야마토코 포대, 데시마 포대 등 4개의 포대가 설치되었으며, 가에이 2년(1849년)에는 요시다 쇼인도 히코시마의 포대를 순시하러 왔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전쟁에서는 무기를 갖춘 외국 군함에게 이길 수 없었고 참패하여, 히코시마 및 시모노세키는 일시적으로 점령 하에 있었다. 게다가 막부에 의한 조슈 정벌이 겹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조슈번은 첫째로 외국과의 강화 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카스기 신사쿠를 강화 대사로 파견했다. 이 때의 강화 조건에는 히코시마를 조차지로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이를 거부하여 히코시마는 구제되었다고 한다(시시도 게이마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영국의 큐퍼와 협상). 실제로는 번주로부터 "조차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를 걱정한 통역 이토 히로부미가 다카스기에게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후일 이토 본인의 회고록)과, 애초에 영국 측에서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는 설(영국 측 회의 의사록)도 있어, 판연하지 않다.
외국과의 교섭이 끝나자 다음으로 직면하는 것은 막부 등의 조슈 정벌(고쿠라 전쟁)이다. 게이오 2년(1866년) 6월 29일, 막부군은 고쿠라에 후지산마루를 정박시켰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이것을 "소선"이라고 칭하고, 하마자키 린츠치와 우메모토 간시, 히라가 긴츠치와 오바 덴쿠로, 이소베 신조와 오스미 이에헤이를 2명씩 1척, 총 3척의 포대를 실은 배로 보냈다. 이 배는 포대를 싣고 있었기 때문에 선대장이라고 불렸다.
보통은 군함에게 단순한 배가 이길 수 없지만 여섯 명은 와카마쓰(기타큐슈)까지 석탄을 운반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상대의 방심한 틈을 타 공격했다. 그러자 다노코나 데시마 쪽에서도 포격 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군함은 황급히 도망갔다. 이 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조슈번도 오자토(기타큐슈)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3. 4. 근대
히코시마는 1918년에 발견된 암각화를 통해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2] 단노우라 전투 이후에는 타이라 씨족의 난민들이 섬으로 이주하여 지역 농업의 기반을 다졌다.1863년에서 1864년 사이 시모노세키 전쟁 당시 히코시마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으며, 당시 일본판 홍콩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3] 1924년에는 독일 기술 제휴로 황산 암모늄 공장이 건설되면서 섬의 산업화가 시작되었다.[4] 현재 섬은 조선소[5]와 티타늄, 아연 제련소를 포함하여 인구 밀도가 높고 산업화가 진행되었다.[6]
메이지 12년(1879년)에는 아카마세키 구의 일부가 되어 쇼야마라는 장소에 호장(戶長)역할이 설치되었다. 메이지 22년(1889년)부터는 촌제가 시행되어 히코시마와 무쓰레 섬 두 섬으로 구성된 히코시마 촌이 탄생했다. 다이쇼 10년(1921년)에는 정제가 시행되어 도요우라군 히코시마정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메이지 14년(1881년)경, 시모노세키시에서는 콜레라가 만연하여 500명이나 사망했다. 주민들은 콜레라 환자를 간류지마에 격리했으나, 메이지 24년(1891년) 세 번째 콜레라 유행 시기에는 윤리적 문제로 인해 중단되었다.
근대 최초의 대외 전쟁인 청일 전쟁에서는, 히코시마에 니시마와 함께 고토 신페이가 관할하는 검역소가 설치되었다.
러일 전쟁 발발에 대비하여 히코시마에는 유선 수뢰를 발화시키기 위한 시설인 히코시마 수뢰위소가 설치되었다.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함대가 승리하면서, 히코시마 수뢰위소는 사용되지 않고 역할을 마쳤다.
히코시마와 시모노세키시의 합병은 1933년 3월 20일에 이루어졌다. 합병은 히코시마의 발전 전망과 음료수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다.
메이지 37년(1904년), 시모노세키에서 수입되는 소에 대한 우역 검역소인 시모노세키 우역 검역소 후쿠우라 해안 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이 검역소는 한때 국내 소 검역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대규모였으나, 전후 소 수입 감소로 1965년 폐지되었다.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에서는 시모노세키 미쓰이 화학 등에서 화학 공업이 활발하다. 스즈키 상점이 아연 제련 공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된 화학 제품 생산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수입이 어려워진 황산 암모늄 생산에 성공하면서 더욱 발전했다. 이후 미쓰이 광산으로 경영권이 이전되면서 메탄올 합성 공장도 설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히코시마에서도 전사자가 속출했다. 중일 전쟁부터 태평양 전쟁까지의 전몰자 수는 442명에 달했으며, 시모노세키시 히코시마 유족회는 전몰 위령탑을 세워 추모하고 있다.
쇼와 35년(1960년)까지 히코시마에는 정정이 대자 히코시마 밖에 없었지만, 이후 새로운 정정이 설치되었다.
주고쿠 지방과 큐슈 지방을 잇는 시모노세키 기타큐슈 도로 건설은 간몬교와 간몬 터널의 노후화 및 정체 문제 해결을 위해 제안되었으나, 2008년 재정 문제로 일시 정지되었다. 2019년, 국토교통성 전 부대신 쓰카다 이치로의 忖度(촌탁, 윗사람의 의중을 헤아려 알아서 처리함)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4. 교통
히코섬은 혼슈와 다리로 연결되기 전까지 배를 이용하여 왕래해야 했다. 메이지 시대에는 해녀 마을과 이자키(후에 다케자키로 변경)를 잇는 사영 도선이 있었고, 1902년에는 촌영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도선은 편도 5리(1전의 절반)였기 때문에 '5리 배'라고도 불렸다.
1912년에는 간몬 기선 주식회사가 시모노세키와 에노우라, 데시마치와 오사토(기타큐슈시), 오사토 잇타의 3개 항로를 순항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정영(1921년 정제 시행)의 도선이 해녀 마을에서 미사키노초까지 연장되었다. 1933년 시제 시행으로 시영이 되었다. 1936년에는 현재의 히가시야마토정과 야마토정을 매립하는 계획이 시작되어 해녀 마을 → 이자키 → 미사키노초 항로는 해녀 마을 → 이자키와 후로산 → 미사키노초로 변경되었다. 후로산은 현재의 야마구치 은행 히코시마 지점 부근을 가리키며, 후에 호리코시로 바뀌었다. 이 항로는 1989년 12월 31일에 폐업했다.
아라타항에서는 1971년 8월부터 히코시마와 고쿠라를 잇는 간몬 해협 페리(구 간큐 페리)가 운행했지만, 2011년 11월 경영 부진으로 폐업했다.
히코섬이 혼슈와 도보로 왕래 가능하게 된 것은 1936년에 갑문이 완성된 이후이다. 이 갑문에서는 같은 해에 통선식이 거행되었다. 1982년에는 갑문이 전면적으로 개수되었다.
1948년에는 자동차도 통행할 수 있도록 칸겐쿄가 완성되었다. 6년 후 칸겐쿄는 콘크리트제로 교체되었다.
- 야마구치현도 제250호선
- 야마구치현도 제251호선
- 야마구치현도 제252호선
4. 1. 다리
히코섬은 혼슈 본토와 세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갑문 위에 있다.[1] 히코섬으로 건너가는 수단은 갑문, 세키히코 다리 외에 히코시마 대교가 있다.
히코시마 대교는 1972년에 착공한 전 히코시마 유료 도로의 일부이며, 길이는 710m, 주교부 236m의 콘크리트 다리이다. 1975년에 완공된 당시에는 가장 대규모의 콘크리트 다리였다. 건설 방법은 디비다크 공법이다. 해면으로부터의 높이는 45m로 교각은 시모노세키 측(코몬)과 히코시마 측(코도)에 각각 1개씩 세워져 있다.
히코시마 대교는 히코시마 유료 도로의 개통과 함께 개통되었으며, 세키히코 다리의 정체를 해소할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야마구치 현도 252호 후쿠우라 항 금비라 선의 일부이며, 총 길이는 4.5km이다. 히코시마 측에는 히코시마 터널이 사사구리 산을 관통하여 개통되었으며, 그 전체 길이는 861m이다.
4. 2. 철도
히코섬은 혼슈 본토와 세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갑문 위에 있다. 간몬 철도 터널은 섬과 규슈를 연결하지만, 산요 본선은 섬에 정차하지 않으며, 인근 역은 시내에 있는 시모노세키역이다.[1]히코섬에서는 섬의 동쪽을 큐슈 여객철도(JR 큐슈) 산요 본선이 지나가지만, 섬 내에는 역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섬 내 철로의 대부분은 간몬 철도 터널 안에 있으며, 히코시마 에노우라 정에는 간몬 철도 터널의 시모노세키 쪽 입구가 있다. 산요 본선 개통은 1901년 5월이었지만, 1896년 시점에서 제국 의회에 청원이 제출되었다. 이후 고토 신페이가 철도원 총재였을 때 조사가 진행되었고, 예산 문제로 터널이 더 저렴하다는 이유로 1816만엔의 예산으로 1921년에 의회에서 합의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물가가 상승하고,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간몬 터널에 투입할 예산이 없어 공사는 일시 중단되었다. 1926년에 사업이 재개되었지만, 쇼와 금융 공황으로 인해 다시 연기되었다. 두 번의 일시 중단을 겪은 후, 1943년 12월 30일에 상하 복선이 개통되었고, 1944년 8월 9일에 운전이 시작되었다.
간몬 터널 시공 과정에서 32명이 순직했으며, 1942년 11월 14일에 국철 순직자비가 세워졌다. 이 비석의 제자(題字)는 당시 철도 대신 핫타 요시아키가 쓴 것이다. 현재에도 비석을 세운 11월 14일에는 순직자 유족들이 비석 근처에서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4. 3. 버스
히코섬에는 산덴 교통의 노선 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며, 니시야마 방면으로 가는 70번대 버스와 에노우라 방면으로 가는 80번대 버스가 있다. 시모노세키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모두 로터리를 경유한다. 아래는 계통별 종점 및 주요 경유지를 정리한 것이다. 단, 히코섬 외의 정류장은 생략했다.| 번호 | 경유지 | 종점 | |
|---|---|---|---|
| 70 | 로터리 | 혼무라 | 토아츠 정문 앞 |
| 71 | 토아츠 정문 앞 | 다케노코지마 | |
| 72 | 아라타 | 토아츠 정문 앞 | |
| 73 | 토아츠 정문 앞 | 다케노코지마 | |
| 74 | 혼무라 | 아마고 | |
| 80 | 후쿠우라니초 | 히코시마 영업소 | |
| 81 | 야마나카 | 타노쿠비 | 히코시마 영업소 |
| 82 | 주부 학원 앞 | ||
| 83 | 후쿠우라니초 | 후쿠우라 혼마치 | |
| 84 | 데시마치 |
5. 문화 및 시설
히코섬은 율령 국가 시대에 중앙 집권 강화로 특산품인 생선을 공납해야 했다. 헤이안 시대 가인 미나모토노 토시요리는 히코섬의 도미 어업에 대한 와카를 남겼다.[1] 830년경에는 칙지 섬이 되어 칙지전이 설치되기도 했다.[2]
에도 시대에는 나가토국도요우라군의 일부였으며, 1879년(메이지 12년) 아카마세키구에 속하며 쇼야마에 호장(戶長)역할이 설치되었다.[3][4] 1889년(메이지 22년) 촌제 시행으로 히코시마 촌이 탄생했고, 1921년(다이쇼 10년) 정제 시행으로 히코시마정이 되었다.[3]
1881년(메이지 14년)경 시모노세키시에 콜레라가 만연하여 간류지마에 콜레라 병원이 세워졌고, 이후에도 콜레라 유행이 반복되었다.[5] 1891년(메이지 24년) 세 번째 유행 때는 윤리적 문제로 간류지마 격리가 중단되었다.[6]
청일 전쟁 시기에는 고토 신페이가 관할하는 검역소가 히코시마에 설치되었다. 러일 전쟁에 대비하여 히코시마 수뢰위소가 설치되었으나, 쓰시마 해전 승리로 사용되지 않았다.[7]
1933년(쇼와 8년) 시모노세키시와 합병되었다. 합병은 양측의 필요에 의해 추진되었으나, 1928년(쇼와 3년) 도미타 고스케 사망 후 주춤했다가 1931년(쇼와 6년) 마츠이 신스케 시장의 제안으로 재개되었다.
1904년(메이지 37년) 시모노세키 우역 검역소 후쿠우라 해안 출장소가 설치되어 조선 소 검역을 담당했으나, 1965년(쇼와 40년) 폐지되었다.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에서는 화학 공업이 활발하다. 1916년(다이쇼 5년) 스즈키 상점의 아연 제련 공장 설립을 시작으로, 1922년(다이쇼 11년) 클로드식 질소 공장, 1924년(다이쇼 13년) 암모니아 합성이 시작되었다. 1931년(쇼와 7년) 일본 최초의 합성 메탄올 공장이 설립되었고, 이후 여러 합병을 거쳐 1963년(쇼와 38년)부터 석고 보드 생산도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히코시마에서도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1960년(쇼와 35년)까지 히코시마에는 정정이 대자 히코시마뿐이었으나, 이후 여러 정정이 설치되었다.
2000년(헤이세이 12년) 시모노세키 기타큐슈 도로 건설이 제안되었으나, 2019년 쓰카다 이치로의 忖度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 '''시모노세키 시청 히코시마 지소'''
시모노세키시의 지소 중 하나로, 히코시마 에노우라 정 1초메에 있다. 원래는 히코시마 혼무라 정에 있었지만, 1971년(쇼와 46년)에 신축 이전했다. 히코시마 지소의 전신은 히코시마 촌사무소, 히코시마정사무소, 시모노세키 시청 히코시마 출장소이다.
- '''히코시마 도서관'''
히코시마 에노우라 정에 있는 1990년(헤이세이 2년) 개관한 도서관이다. 도서관 앞에는 도미타 츠네스케 흉상이 있으며, 1995년(헤이세이 7년)에 설치되었다.
- '''다이바가하나 통항 조류 신호소'''
히코시마 다케노코지마 등대라고도 불리는 등대이다. 1909년(메이지 42년)에 완성되었다. 다이바는 포대를 뜻하며, 포대 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다이바가하나라고 불린다.
- '''구 맘판 암초 표지 (구 가네노쓰루미사키 등대)'''

가네노쓰루미사키는 히코시마의 최남단에 있는 곶으로, 여기서 오랫동안 가동했던 것이 가네노쓰루미사키 등대이다. 지금은 등대가 아니므로 '구 가네노쓰루미사키 등대'라고 했지만, 2020년 10월, 가네노쓰루미사키 등대의 전신인 '맘판 암초 표지'에 구를 붙인 '구 맘판 암초 표지'가 무쓰레지마 등대의 국가 중요 문화재 지정에 따라 부지정되어, 이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제안되고 있다.
- '''도미타의 우물'''

도미타 물은 히코시마 로마치 부근에서 사용되었던 우물로, 1925년(다이쇼 14년) 5월부터 제국 제빙 주식회사 (현재의 니치레이)가 제빙을 위해 사용했다. 이 물은 히코시마에서 가장 깨끗한 물로 불렸다. 1972년(쇼와 47년)에는 수요 감소와 제빙 공장 폐지로 우물의 필요성이 없어지고, 현재는 석비와 우물만 남아있다.
- '''환경 위생 후생 대신상 수상 기념비'''

히코시마 사코마치에 있는 기념비로, 1961년(쇼와 36년)에 환경 위생 후생 대신상 수상을 기념하여 1962년(쇼와 37년)에 건설되었다.
- '''천황 폐하, 황후 폐하 행차 기념비'''

히코시마 수문에 있는 기념비로, 제18회 국민체육대회 때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행차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 '''경찰서・소방서'''
| 시설명 | 주소 |
|---|---|
| 시모노세키 경찰서 니시야마 경찰관 주재소 | 히코시마 사코마치 |
| 시모노세키 경찰서 시모노세키미나미 파출소 | 히코시마시오하마마치 |
| 시모노세키 경찰서 후쿠우라 경찰관 주재소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경찰서 모토무라 경찰관 주재소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시모노세키시 서부 소방서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시모노세키 경찰서 히코시마 간부 파출소 | 히코시마 미도리마치 |
- '''우체국'''
| 시설명 | 주소 |
|---|---|
| 시모노세키 에노우라 우체국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시오하마 우체국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
| 시모노세키 니시야마 우체국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 시모노세키 후쿠우라 우체국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모토무라3 우체국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시모노세키 모토무라6 우체국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금융 기관'''
| 시설명 | 주소 |
|---|---|
| 야마구치 은행 후쿠우라 지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야마구치 은행 히코시마 지점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니시추고쿠 신용금고 후쿠우라 지점 | 히코시마 가쿠라마치 |
| 니시추고쿠 신용금고 모토무라 지점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교통 기관'''
- 산덴 교통 히코시마 영업소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 '''수도・전기 설비'''
| 시설명 | 주소 |
|---|---|
| 수도국 히코시마 배수장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주고쿠 전력 히코시마 변전소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시장'''
- 남풍박 시장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농업 관련 시설'''
- JA 시모노세키 히코시마 지소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집회장'''
| 시설명 | 주소 | 비고 |
|---|---|---|
| 겐요 공민관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원래는 겐요 중학교였으나, 1983년(쇼와 58년)에 공민관으로 변경되었다. |
| 히코시마 공민관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공원'''
공원 번호는 야마구치현이 공표하고 있는 도시 공원 계획 목록의 일련 번호이다.
| 종류 | 번호 | 공원명 | 주소 |
|---|---|---|---|
| 가로 공원 | 17 | 에노우라 공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7초메 |
| 31 | 시오타니 공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3초메 | |
| 33 | 가쿠라 공원 | 히코시마 가쿠라마치 4초메 | |
| 40 | 스기타 공원 | 히코시마 스기타마치 1초메 | |
| 50 | 가리야가사코 공원 | 히코시마 타노쿠비마치 2초메 | |
| 54 | 안샤 공원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3초메 | |
| 55 | 호무다 공원 | 히코시마 가쿠라마치 3초메 | |
| 64 | 쿄노 제1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2초메 | |
| 65 | 쿄노 제2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3초메 | |
| 77 | 시오하마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1초메 | |
| 78 | 시오하마 중앙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1초메 | |
| 79 | 야마나카 1호 공원 | 히코시마 무카이마치 1초메 | |
| 80 | 야마나카 2호 공원 | 히코시마 무카이마치 2초메 | |
| 81 | 야마나카 3호 공원 | 히코시마 무카이마치 2초메 | |
| 94 | 오키시오다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3초메 | |
| 95 | 쿄노 제3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3초메 | |
| 96 | 데시마치 나카요시 공원 | 히코시마 데시마치마치 1초메 | |
| 103 | 니시야마 공원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3초메 | |
| 108 | 보요다이 어린이 공원 | 히코시마 타노쿠비마치 2초메 | |
| 115 | 데시마치 해바라기 어린이 공원 | 히코시마 데시마치히가시마치 | |
| 119 | 니시야마마치 제2 어린이 공원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2초메 | |
| 125 | 야마나카마치 나카요시 어린이 공원 | 히코시마 야마나카마치 1초메 | |
| 근린 공원 | 2 | 데시마치 공원 | 히코시마 데시마치마치 1초메 |
| 3 | 타노쿠비 공원 | 히코시마 데시마치마치 3초메 | |
| 4 | 스지야마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4초메 | |
| 지구 공원 | 6 | 히코시마 지구 공원 | 히코시마 사코마치 4초메 |
| 종합 공원 | 1 | 오이노야마 공원 | 히코시마 오이노야마 공원 |
- '''보육・교육 시설'''
| 시설명 | 주소 |
|---|---|
| 에노우라 유치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니시야마 유치원 | 히코시마 사코마치 |
| 데시마츠 보육원 | 히코시마 스기타마치 |
| 구리노미 어린이원 | 히코시마 타노쿠비마치 |
| 히코시마 제1 보육원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
| 성모원 | 히코시마 미도리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니시야마 초등학교 | 히코시마 사코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가쿠라 초등학교 | 히코시마 가쿠라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모토무라 초등학교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무카이 초등학교 | 히코시마 무카이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히코시마 중학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겐요 중학교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야마구치현립 시모노세키 중등 교육 학교 | 히코시마 오이마치 |
| 나카베 학원 (중부 소년 학원) | 히코시마 가쿠라마치 |
- '''어항'''
- 남풍박 어항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공장'''
| 시설명 | 주소 |
|---|---|
| 미쓰비시 중공업 시모노세키 조선소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미쓰이 화학 | 히코시마 사코마치 |
| 미쓰이 금속 광업 히코시마 제련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 '''운동 시설'''
| 시설명 | 주소 |
|---|---|
| 히코시마 무도관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아라타 골프 센터 | 히코시마 사코마치 |
- '''부지'''
| 시설명 | 주소 |
|---|---|
| 모지 검역소 히코시마 조치장 부지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린카이 파크 부지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
- '''기타'''
| 시설명 | 주소 | 비고 |
|---|---|---|
| 히코시마 종말 처리장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 1980년(쇼와 55년)부터 운전을 시작했다. |
| 해상 보안청 간몬 부표 기지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 |
| 히코시마 제2 보육원 부지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히코시마의 교육 및 종교 시설에 대한 내용은 각각 교육 및 종교 시설 하위 섹션을 참조하라.
5. 1. 종교 시설

히코섬 하치만구는 히코섬 사코정 5초메에 있는 하치만구로, 과거에는 현사였다. 제신은 주 제신이 오진 천황, 배신이 주아이 천황, 진구 황후, 닌토쿠 천황이다.[1] 보물은 덴분 21년(1552년)에 오우치 요시나가가 기증한 것으로 여겨지는 웅검 2자루이다.[1] 기증물로는 보물 외에도 메이지 5년(1872년)에 모리 모토토시가 기증한 웅검과 단자(모토토시의 친필)가 있다.[2] 메이지 7년(1874년) 향사, 다이쇼 12년(1923년) 현사가 되었다.[2]
이 하치만구 앞바다를 지나는 배는 반드시 "반범"이라는 팻말을 들었기 때문에 "나다 하치만"이라고도 불린다.[3] 이 때문에 조선・어업 관계자로부터 두터운 신앙을 얻었고,[3] 순산을 기원하는 신으로도 알려져 "코야스 하치만"이라고도 불린다.[3]
호겐 2년(1157년) 가와노 미치쓰구가 바닷속에서 "하치만 존상"이라고 새겨진 거울을 얻었기 때문에 헤이지 원년(1159년) 11월 26일, 우사 신궁에서 권청하여 모셨고,[3] 에이랴쿠 원년(1160년)에 코카쿠덴에 납입하여 옮겼다. 그 후 미치쓰구의 자손인 미치히사가 조와 5년(1349년)에 신탁을 받아 사전을 세웠다는 것이 유래이다.[4][5]
겐로쿠 5년(1692년) 히코섬 하치만구가 재건되었으며, 비용은 당시 번주(모리 요시나리)가 부담했다.[6] 매년 10월 21일에 열리는 예제, 사이오리 신사에서는 갑옷을 입은 무사가 "사이오리"라고 외치며 어신체를 해중에서 끌어올리듯이 춤을 추며 축복한다.[4] 그 외 히코섬 하치만구의 제사로는 1월 1일에 열리는 원복제와 예제 전에 준비로 열리는 하츠고에제・요이야제가 있다.[7] 경내에는 다이토시 신사(제신: 오토시가미, 미토시가미, 와카토시가미), 와카미야 신사(제신: 닌토쿠 천황), 소레이샤의 세 신사가 있다.[1]

히코섬 로마치에 있는 기후네 신사는 교토의 기후네 신사를 총본산으로 한다. 제신은 다카오카미노카미, 호쇼쿠 신이다.[1] 가마쿠라 시대 중기인 고안 원년(1278년)에 창건되었다. "소의 궁"이라고도 불리며, 우마 안전을 기원하는 사당으로 과거 크게 번성했다.

히코섬 아마고정에 있는 에비스 신사의 제신은 코토시로누시노카미이다.[1] 바다의 신으로 신앙을 받으며, 매년 12월 3일에 열리는 보라 축제에서는 풍어를 기원한다.
후쿠우라 고토히라궁은 덴포 원년(1830년)에 이마쓰 신사에서 권청하여 성립했다. 제신은 오모노누시노카미와 스토쿠 천황이다.[1] 후쿠우라 고토히라궁 도리이까지의 길은 일본에서 가장 가파른 언덕이라고 하며, 그 돌계단 단수는 예로부터 사람에 따라 279단, 281단, 277단 등으로 다르다. 이것은 곤피라 여우의 짓이라는 전설이 있다.

시오하마(히코섬 시오하마정)에서는 에도 시대 후기까지 염전이 운영되었으며, 염전의 수호신으로 시오가마 신사가 모셔져 있었다. 제신 시오츠치노카미는 바다의 신으로 소금 정제법을 전수했다고 한다.

히코섬 타노쿠비정에 있는 하치만구의 제신은 주 제신이 오진 천황, 배신이 주아이 천황, 진구 황후, 닌토쿠 천황이다. 메이토쿠 2년(1391년)에 히코섬 하치만구에서 권청하여 제사했다.

히코섬 타케노코지마정에 있는 신사. 제신은 오모노누시노카미, 가나야마히코노카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공이다.[1] 분세이 3년(1820년)에 창건되었다.
렌코지(蓮光寺)는 다이쇼 3년(1914년) 진종 본파 혼간지 니시야마 설교소로 인정받았다. 쇼와 11년(1936년) 5월, 훗날 이 절의 초대 주지가 되는 아키야마 잇케가 원래 토요우라군 아와노 마을에 있던 렌코지에서 절 이름과 불사 쿄운이 만든 본존의 이전을 허가받아 렌코지가 되었다.

센류지(専立寺)는 다이에이 시대(1520년대)에 주지 넨사이가 관음당을 건립했고, 간에이 2년(1625년) 본당을 건립했다. 구명 안라쿠지가 현재 이름인 센류지가 된 것은 케이안 2년(1649년)의 일이다. 산호는 카이온잔(海音山), 본존은 아미타여래이다.
코라쿠지(康楽寺)는 쇼와 22년(1947년) 야나이시에 있던 폐사 코라쿠지를 현재의 후쿠우라 땅으로 이전하여 신게츠안(真月庵)으로 개명했다. 그 후, 절 이름을 코라쿠지로 되돌려 현재에 이른다. 산호는 하쿠쵸잔(白鳥山), 본존은 아미타여래, 종파는 정토진종 코쇼지파이다.
대승사는 1941년 "니치렌종 에노우라 교회", 1942년 "니치렌종 니치조 교회", 1949년 "대승사"로 개명되어 현재의 절 이름이 되었다. 산호는 개회산, 본존은 니치렌(닛켄) 및 석가여래이다.

서락사(西楽寺)는 서남 전쟁 때 부상당한 병사의 병원으로도 사용되었다. 산호는 쇼가쿠산(正覚山)이며 현재 히코섬 혼무라 정(彦島本村町)에 있다.

절 안에는 석비가 입구 부근과 끝에 각각 1개씩 있다.
히코시마 가톨릭 교회는 히코섬 혼무라정에 있는 가톨릭 교회이다. 시모노세키 교회의 오기하라(이름 불명)가 독일에서 귀환하여 체류하는 동안인 쇼와 12년(1937년)에 설립했다.
5. 2. 교육 시설
히코섬의 교육 역사는 가마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구전으로 전해지는 역사만 남아있고 문헌은 없다. 13세기경 히코섬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던 학교와 같은 장소는 "소라이안"이라고 불렸으며, 농업, 공업, 어업, 수렵, 읽고 쓰기 교육을 실시했다.[1]덴분 12년(1543년), 소라이안이 사라지고 쇼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와카슈쿠나 데라코야 등에서의 교육이 활발해졌다.[2] 소라이안 시대에 있었던 읽고 쓰기, 수렵 외에, 봉오도리나 히코섬 노래 등 지역 특유의 것도 교육하게 되었다.[3]
과거에 있었던 데라코야의 이름 중 완전히 학원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니시야마에 있던 슈로쿠주쿠뿐이며, 다른 것들은 정식 명칭을 알 수 없는 오치(혼무라), 고노(혼무라), 토미타(로), 카부토다니(후쿠우라), 니시하마(타노쿠비)와 위치를 알 수 없고 인물은 알 수 있는 아다치 덴조, 카와베 타츠노스케, 이쿠타 마사시치의 데라코야가 있었다.[4]
히코섬은 1879년(메이지 12년)에 아카마세키구에 소속되었고, 4년 후인 1883년(메이지 16년)에 5개의 소학교가 설치되었다. 시마 소학교, 토칸 소학교, 사코니시 소학교, 타노쿠비 소학교, 타케노코지마 소학교는 각각 현재의 혼무라, 후쿠우라, 사코, 타노쿠비, 타케노코지마 지역에 설치되었다. 1886년(메이지 19년)에는 타노쿠비 소학교를 폐지, 토칸 소학교와 사코니시 소학교를 분교, 타케노코지마 소학교를 분교장으로 했다. 1887년(메이지 20년)에는 시마 소학교가 시마 심상 소학교로 개명되었고, 토칸과 사코니시 분교도 폐지되었다.[5] 1890년(메이지 23년) 4월에는 보습과(2년간)를 설치, 1897년(메이지 30년) 4월에는 고등과(4년간)를 설치하여 시마 심상 고등 소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6][7] 1907년(메이지 40년) 10월에는 이 심상 고등 소학교를 히코섬 심상 고등 소학교로 개칭하고, 장소를 옮겨 신축했다.
시마 심상 소학교의 '시마'라는 이름에는 유래가 있는데, 첫 번째는 혼무라의 센리츠사에 데라코야를 설치한 시만(이름 불명)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두 번째는 시가쿠마신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다.
히코섬에는 메이지 시대 무렵, 소학교가 1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에노우라나 시오하마 지방에서는 통학에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아동 수가 증가했기 때문에 히코섬 심상 고등 소학교의 개명·신축과 동시에 히코섬 제2 심상 소학교를 스기타에 건설했다. 1923년(다이쇼 12년) 1월에는 히코섬 제2 심상 소학교도 아동이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시오야(슈야)의 땅에 신축 이설했다. 1927년(쇼와 2년)에는 고등과가 설치되어, 히코섬 제2 심상 고등 소학교로 개명했고, 1938년(쇼와 13년)에는 에노우라 심상 소학교로 개명했다.
분교장은 앞서 언급한 타케노코지마 분교장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다리가 놓여지지 않아 불편했기 때문에, 저학년 수업만 실시했다. 1910년(메이지 43년)에는 로쿠렌섬에 있던 번 소학교도 로쿠렌섬 분교장이 되었다. 타케노코지마 분교장에서는 분교장 출신과 본교 출신 간의 지식 격차가 심해,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1927년(쇼와 2년)에 타케노코지마에 철교를 놓고, 분교장을 폐지하여 히코섬 심상 고등 소학교에만 통학하게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1947년(쇼와 22년)에는 학제 개혁이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기존의 히코섬 심상 고등 소학교는 소학교가 혼무라 소학교로 개명되었고, 히코섬 중학교가 새롭게 설치되었다. 에노우라 심상 소학교는 에노우라 소학교로 개명되었다.
히코섬에서는 인구가 계속 증가하여, 전쟁 전에는 2개 학교밖에 없었지만 현재는 초등학교만 5개교가 되었다. 1949년(쇼와 24년)에는 니시야마 지역의 인구 증가 및 통학 거리의 멀리짐으로 미쓰이 금속의 청년학교 내에 혼무라 소학교 니시야마 분교를 신설했다. 1950년(쇼와 25년)에는 니시야마 소학교로 독립했다.
1955년(쇼와 30년)에는 겐요 중학교(현재의 공민관 위치에 있었다)가 새롭게 개교했고, 이듬해 히코섬 중학교 구역에서 니시야마 소학교 구역을 분리했다. 1956년(쇼와 31년) 에노우라 소학교에서도 인구 증가가 있었기 때문에 에노우라 소학교의 분교로 카쿠라 분교가 신설되어, 이듬해에는 독립하여 개교했다.
1980년(쇼와 55년)에는 혼무라 소학교 구역이 겐요 중학교 구역으로 편입되었고, 동시에 겐요 중학교는 니시야마 지역에서 혼무라 지역으로 이동했다. 1982년(쇼와 57년) 카쿠라 지역에서도 인구 증가로 인해 새롭게 무카이 소학교가 신설되었다.
이 무렵 히코섬은 공업이 번성했기 때문에 소학교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의 분교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49년(쇼와 24년)에는 시모노세키 미나미 고등학교의 정시제 히코섬 분교를 히코섬 중학교에 병설했다. 1952년(쇼와 27년)에는 시모노세키 공업 고등학교의 정시제 히코섬 분교를 히코섬 중학교에 병설했다. 이들은 모두 1950년(쇼와 25년), 1973년(쇼와 48년)에 폐지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1957년(쇼와 32년), 시는 새롭게 고등학교를 만들기 위해 로 산의 일부를 매수했다. 그 후, 명칭은 시모노세키 제1고등학교가 되었고, 1961년(쇼와 36년)에 착공하여, 1962년(쇼와 37년) 4월 7일에 개교식이 거행되었다. 1970년(쇼와 45년)에는 시립에서 현립이 되었다.
1999년(헤이세이 11년)에는 시모노세키 제1고등학교가 고등학교에서 중등교육학교가 된다는 것이 공표되었고, 2004년(헤이세이 16년)에는 시모노세키 중등교육학교가 되었다.
| 년(서기) | 신설 | 학구 변경 | 폐지 | 개명 | 분리 |
|---|---|---|---|---|---|
| 1883년 | 시마 소학교, 토칸 소학교, 사코니시 소학교, 타노쿠비 소학교, 타케노코지마 소학교 | ||||
| 1886년 | 타노쿠비 소학교 | 토칸 분교→토칸 소학교, 사코니시 분교→사코니시 소학교, 타케노코지마 소학교→타케노코지마 분교장 | |||
| 1887년 | 사코니시 분교, 토칸 분교 | 시마 소학교→시마 심상 소학교 | |||
| 1897년 | 히코섬 제2 심상 소학교 | 시마 심상 소학교→시마 심상 고등 소학교 | |||
| 1927년 | 타케노코지마 지역을 시마 심상 고등 소학교에 편입 | 타케노코지마 분교장 | 히코섬 제2 심상 소학교→히코섬 제2 심상 고등 소학교 | ||
| 1938년 | 히코섬 제2 심상 고등 소학교→에노우라 심상 소학교 | ||||
| 1947년 | 히코섬 심상 고등 소학교→혼무라 소학교 및 히코섬 중학교 | 에노우라 심상 소학교→에노우라 소학교 | |||
| 1949년 | 혼무라 소학교 니시야마 분교, 시모노세키 미나미 고등학교 정시제 히코섬 분교 | ||||
| 1950년 | 시모노세키 미나미 고등학교 정시제 히코섬 분교 | 혼무라 소학교 니시야마 분교→니시야마 소학교 | |||
| 1952년 | 시모노세키 공업 고등학교 정시제 히코섬 분교 | ||||
| 1955년 | 겐요 중학교 | ||||
| 1956년 | 에노우라 소학교 카쿠라 분교 | 니시야마 소학교 구역을 겐요 중학교 구역에 편입 | |||
| 1957년 | 에노우라 소학교 카쿠라 분교→카쿠라 소학교 | ||||
| 1962년 | 시모노세키 제1고등학교 | ||||
| 1973년 | 시모노세키 공업 고등학교 정시제 히코섬 분교 | ||||
| 1980년 | 혼무라 소학교 구역을 겐요 중학교 구역에 편입 | ||||
| 1982년 | 무카이 소학교 | ||||
| 2004년 | 시모노세키 중등교육학교 | 시모노세키 제1고등학교 |
현재 히코시마 지역에는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시모노세키 시립 무카이 초등학교, 시모노세키 시립 모토무라 초등학교, 시모노세키 시립 니시야마 초등학교가 있으며, 중학교는 시모노세키 시립 히코시마 중학교와 시모노세키 시립 겐요 중학교가 있고, 그 외 학교로는 야마구치 현립 시모노세키 중등 교육 학교가 있다. 초등학교는 예외를 제외하고 지역별로 지정된 학교에 등교하며, 중학교는 사립이나 현립 중학교 등에 등교하지 않는 경우 지정된 학교에 등교한다. 이하에서는 지역별로 지정된 초등학교 및 중학교를 표로 정리했다.
| 정・아자 | 정 | 번지・호 | 초등학교 | 중학교 |
|---|---|---|---|---|
| 히코시마 아지노사토마치 | - | 전역 | 시모노세키 시립 모토무라 초등학교 | 시모노세키 시립 겐요 중학교 |
| 히코시마 오이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3초메 | ||||
| 히코시마 오이노야마 공원 | - | |||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5초메 | ||||
| 6초메 | ||||
| 7초메 | ||||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 시모노세키 시립 히코시마 중학교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5초메 | ||||
| 6초메 | ||||
| 7초메 | ||||
| 8초메 | ||||
| 9초메 | ||||
| 히코시마 데시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 ||
| 2초메 | ||||
| 3초메 | ||||
| 히코시마 데시마 히가시마치 | - | |||
| 히코시마 스기타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히코시마 스미노쿠라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히코시마 야마나카마치 | 1초메 | 1~7・9~12번지 | ||
| 8번지 | 시모노세키 시립 무카이 초등학교 | |||
| 2초메 | 전역 |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 ||
| 히코시마 사쿠라가오카마치 | - | |||
| 히코시마 무카이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 ||
| 2초메 | ||||
| 히코시마 타노쿠비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무카이 초등학교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 ||
| 2초메 | 1번 1~36・54~65호, 2・3번, 5번 1~28호, 6번 1~11호, 7・8번, 9번 6~46호, 10~27번 | |||
| 1번 37~53・66~93호, 4번, 5번 29~46호, 6번 12~25호, 9번 1~5・47~68호 |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 |||
| 3초메 | 전역 | 시모노세키 시립 스미노쿠라 초등학교 | ||
| 히코시마 미도리마치 | - |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 ||
| 히코시마 세마치 | 1초메 | 시모노세키 시립 니시야마 초등학교 | 시모노세키 시립 겐요 중학교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5초메 | ||||
| 6초메 | ||||
| 7초메 | ||||
| 니시야마마치 | 1초메 | |||
| 2초메 | ||||
| 3초메 | ||||
| 4초메 | ||||
| 5초메 | ||||
| 히코시마 타케노코지마마치 | - | |||
| 아자 히코시마(간류지마) | - |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 시모노세키 시립 히코시마 중학교 |
5. 3. 기타 시설
- '''시모노세키 시청 히코시마 지소'''
시모노세키시의 지소 중 하나로, 히코시마 에노우라 정 1초메에 있다.[7] 원래는 히코시마 혼무라 정에 있었지만, 1971년에 신축 이전했다. 히코시마 지소의 전신은 히코시마 촌사무소, 히코시마정사무소, 시모노세키 시청 히코시마 출장소이다.
- '''히코시마 도서관'''
히코시마 에노우라 정에 있는 1990년 개관한 도서관이다. 도서관 앞에는 도미타 츠네스케 흉상이 있으며, 1995년에 설치되었다.
- '''다이바가하나 통항 조류 신호소'''
히코시마 다케노코지마 등대라고도 불리는 등대이다. 1909년에 완성되었다. 다이바는 포대를 뜻하며, 포대 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다이바가하나라고 불린다.
- '''구 맘판 암초 표지 (구 가네노쓰루미사키 등대)'''
가네노쓰루미사키는 히코시마의 최남단에 있는 곶으로, 여기서 오랫동안 가동했던 것이 가네노쓰루미사키 등대이다. 지금은 등대가 아니므로 '구 가네노쓰루미사키 등대'라고 했지만, 2020년 10월, 가네노쓰루미사키 등대의 전신인 '맘판 암초 표지'에 구를 붙인 '구 맘판 암초 표지'가 무쓰레지마 등대의 국가 중요 문화재 지정에 따라 부지정되어, 이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제안되고 있다.
- '''도미타의 우물'''
도미타 물은 히코시마 로마치 부근에서 사용되었던 우물로, 1925년 5월부터 제국 제빙 주식회사 (현재의 니치레이)가 제빙을 위해 사용했다. 이 물은 히코시마에서 가장 깨끗한 물로 불렸다. 1972년에는 수요 감소와 제빙 공장 폐지로 우물의 필요성이 없어지고, 현재는 석비와 우물만 남아있다.
- '''환경 위생 후생 대신상 수상 기념비'''
히코시마 사코마치에 있는 기념비로, 1961년에 환경 위생 후생 대신상 수상을 기념하여 1962년에 건설되었다.
- '''천황 폐하, 황후 폐하 행차 기념비'''
히코시마 수문에 있는 기념비로, 제18회 국민체육대회 때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행차를 기념하여 세워졌다.
- '''경찰서・소방서'''
| 시설명 | 주소 |
|---|---|
| 시모노세키 경찰서 니시야마 경찰관 주재소 | 히코시마 사코마치 |
| 시모노세키 경찰서 시모노세키미나미 파출소 | 히코시마시오하마마치 |
| 시모노세키 경찰서 후쿠우라 경찰관 주재소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경찰서 모토무라 경찰관 주재소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시모노세키시 서부 소방서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시모노세키 경찰서 히코시마 간부 파출소 | 히코시마 미도리마치 |
- '''우체국'''
| 시설명 | 주소 |
|---|---|
| 시모노세키 에노우라 우체국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시오하마 우체국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
| 시모노세키 니시야마 우체국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 시모노세키 후쿠우라 우체국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모토무라3 우체국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시모노세키 모토무라6 우체국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금융 기관'''
| 시설명 | 주소 |
|---|---|
| 야마구치 은행 후쿠우라 지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야마구치 은행 히코시마 지점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니시추고쿠 신용금고 후쿠우라 지점 | 히코시마 가쿠라마치 |
| 니시추고쿠 신용금고 모토무라 지점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교통 기관'''
- 산덴 교통 히코시마 영업소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 '''수도・전기 설비'''
| 시설명 | 주소 |
|---|---|
| 수도국 히코시마 배수장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주고쿠 전력 히코시마 변전소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시장'''
- 남풍박 시장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농업 관련 시설'''
- JA 시모노세키 히코시마 지소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집회장'''
| 시설명 | 주소 | 비고 |
|---|---|---|
| 겐요 공민관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원래는 겐요 중학교였으나, 1983년에 공민관으로 변경되었다. |
| 히코시마 공민관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공원'''
공원 번호는 야마구치현이 공표하고 있는 도시 공원 계획 목록의 일련 번호이다.
| 종류 | 번호 | 공원명 | 주소 |
|---|---|---|---|
| 가로 공원 | 17 | 에노우라 공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7초메 |
| 31 | 시오타니 공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3초메 | |
| 33 | 가쿠라 공원 | 히코시마 가쿠라마치 4초메 | |
| 40 | 스기타 공원 | 히코시마 스기타마치 1초메 | |
| 50 | 가리야가사코 공원 | 히코시마 타노쿠비마치 2초메 | |
| 54 | 안샤 공원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3초메 | |
| 55 | 호무다 공원 | 히코시마 가쿠라마치 3초메 | |
| 64 | 쿄노 제1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2초메 | |
| 65 | 쿄노 제2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3초메 | |
| 77 | 시오하마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1초메 | |
| 78 | 시오하마 중앙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1초메 | |
| 79 | 야마나카 1호 공원 | 히코시마 무카이마치 1초메 | |
| 80 | 야마나카 2호 공원 | 히코시마 무카이마치 2초메 | |
| 81 | 야마나카 3호 공원 | 히코시마 무카이마치 2초메 | |
| 94 | 오키시오다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3초메 | |
| 95 | 쿄노 제3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3초메 | |
| 96 | 데시마치 나카요시 공원 | 히코시마 데시마치마치 1초메 | |
| 103 | 니시야마 공원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3초메 | |
| 108 | 보요다이 어린이 공원 | 히코시마 타노쿠비마치 2초메 | |
| 115 | 데시마치 해바라기 어린이 공원 | 히코시마 데시마치히가시마치 | |
| 119 | 니시야마마치 제2 어린이 공원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2초메 | |
| 125 | 야마나카마치 나카요시 어린이 공원 | 히코시마 야마나카마치 1초메 | |
| 근린 공원 | 2 | 데시마치 공원 | 히코시마 데시마치마치 1초메 |
| 3 | 타노쿠비 공원 | 히코시마 데시마치마치 3초메 | |
| 4 | 스지야마 공원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4초메 | |
| 지구 공원 | 6 | 히코시마 지구 공원 | 히코시마 사코마치 4초메 |
| 종합 공원 | 1 | 오이노야마 공원 | 히코시마 오이노야마 공원 |
- '''보육・교육 시설'''
| 시설명 | 주소 |
|---|---|
| 에노우라 유치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니시야마 유치원 | 히코시마 사코마치 |
| 데시마츠 보육원 | 히코시마 스기타마치 |
| 구리노미 어린이원 | 히코시마 타노쿠비마치 |
| 히코시마 제1 보육원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
| 성모원 | 히코시마 미도리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에노우라 초등학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니시야마 초등학교 | 히코시마 사코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가쿠라 초등학교 | 히코시마 가쿠라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모토무라 초등학교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무카이 초등학교 | 히코시마 무카이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히코시마 중학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시립 겐요 중학교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야마구치현립 시모노세키 중등 교육 학교 | 히코시마 오이마치 |
| 나카베 학원 (중부 소년 학원) | 히코시마 가쿠라마치 |
- '''종교 관련 시설'''
| 시설명 | 주소 |
|---|---|
| 일본 기독교단 시모노세키 교회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일본 기독교단 시모노세키 히코시마 교회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교법사 히코시마 분원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사이후쿠지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다이죠지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신죠지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센리츠지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세이라쿠지 | 히코시마 모토무라마치 |
| 덴리교 하쿠히코 분교회 | 히코시마 스기타마치 |
- '''어항'''
- 남풍박 어항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공장'''
| 시설명 | 주소 |
|---|---|
| 미쓰비시 중공업 시모노세키 조선소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시모노세키 미쓰이 화학 | 히코시마 사코마치 |
| 미쓰이 금속 광업 히코시마 제련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 '''운동 시설'''
| 시설명 | 주소 |
|---|---|
| 히코시마 무도관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아라타 골프 센터 | 히코시마 사코마치 |
- '''부지'''
| 시설명 | 주소 |
|---|---|
| 모지 검역소 히코시마 조치장 부지 | 히코시마 에노우라마치 |
| 린카이 파크 부지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
- '''기타'''
| 시설명 | 주소 | 비고 |
|---|---|---|
| 히코시마 종말 처리장 | 히코시마 후쿠우라마치 | 1980년부터 운전을 시작했다. |
| 해상 보안청 간몬 부표 기지 | 히코시마 시오하마마치 | |
| 히코시마 제2 보육원 부지 | 히코시마 니시야마마치 |
6. 산업
히코섬은 1901년 히타치 조선의 전신인 오사카 철공소 히코시마 공장이 설치되면서 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1] 해사향과 로 지역에는 조선 관련 공장이 들어서 있다. 조선업과 중화학 공업이 발달했으며, 미쓰비시 중공업 시모노세키 조선소, 산세이 시모노세키 공장, 시모노세키 미쓰이 화학, 히코시마 제련 등의 기업이 있다.[2]
섬의 북쪽은 고세토 해협, 남쪽은 간몬 해협과 맞닿아 있어 어업이 활발하다. 히코시마 니시야마 4초메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복어를 취급하는 하에도마리 시장이 있다.[5] 이 시장은 1974년에 개설되었으며, 가라토 시장의 복어 부문이 이전해 온 것이다.[1] 복어 외에도 수산 가공업이 발달하여 어묵, 염장품, 명란젓, 모즈쿠 등을 생산하며,[6] 특히 모즈쿠 수프는 천황배를 수상하기도 했다.[7]
한때 히코섬 봄나물과 히코섬 여름 파종 양배추라는 지역 특산 채소가 재배되기도 했다. 히코섬 봄나물은 1950년 상표 등록되었으며, 히코섬 여름 파종 양배추는 크고 단단한 품종이었다. 현재는 거의 재배되지 않지만, 일부 지역에서 재배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1][2]
6. 1. 공업
히코섬은 1901년 히타치 조선의 전신인 오사카 철공소의 히코시마 공장이 설치된 이후 공업이 주로 발전해 왔다.[1] 조선업과 중화학 공업이 성행하며, 주요 기업으로는 미쓰비시 중공업 시모노세키 조선소(히코시마 에노우라 정)[2], 산세이 시모노세키 공장 (구 하야시카네 조선 시모노세키 제2공장), 시모노세키 미쓰이 화학 (미쓰이 화학 관련 회사, 구 미쓰이 토아츠 화학 히코시마 공장), 히코시마 제련 (미쓰이 금속 관련 회사) 등이 있다.6. 2. 어업
히코섬은 바다와 면해 있으며 북부는 고세토 해협, 남부는 간몬 해협과 면해 있어 어업이 활발하다. 히코시마 니시야마 4초메에는 하에도마리 시장이 있는데, 전국에서 유일하게 복어(시모노세키시에서는 후쿠라고도 불림)를 취급하는 시장이다.[5] 하에도마리 시장은 1974년에 개설되었지만, 원래는 가라토 시장의 복어 부문이 이전한 것이다.[1]복어와 관련된 시설로는 복어 손질을 전문으로 하는 가공 회사도 존재한다. 복어 외에도 수산 가공업이 번성하여, 어묵, 염장품, 명란젓, 모즈쿠 등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6] 특히 모즈쿠 수프는 하쿠마치의 유한회사 모즈쿠 센터가 특허를 취득했으며, 제35회 농림수산배에서는 천황배를 수상했다.[7]
6. 3. 농업
히코섬에서는 한때 히코섬 봄나물과 히코섬 여름 파종 양배추라고 불리는 지역 브랜드 채소가 재배되었다. 히코섬 봄나물은 1950년에 상표 등록되어 삶거나 절여서 먹었던 봄나물이며, 히코섬 여름 파종 양배추는 편평하고 대형이며 쪼개지기 어려운 품종으로 선발된 양배추이다. 이 두 종류는 모두 현재 거의 재배되지 않고 있으며, 봄나물은 우치비 지구에서,[1] 양배추는 가쓰야마 지구에서 재배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2]7. 전설
- 간류섬
간류섬은 에노우라 바로 옆에 있는 섬으로, 정식 명칭은 후나시마(舟島)이다. 배가 다녔다는 유래에서 이름이 붙여졌다.[1]
간류섬의 싸움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
- 타케노코 섬
아주 옛날, 귀신이 살던 오니가 섬과 인간이 살던 타케노코 섬이 부딪혀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타케노코 섬에는 귀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2] 타케노코 섬 북쪽은 오니가 섬이라고도 불린다.[3]
- 니시야마
히코시마 12 묘조의 코노 미치히사가 하치만 존상을 조각하기 위해 벌채한 녹나무가 자라던 곳에서 서쪽을 니시야마(西山), 동쪽을 히가시야마(東山)로 정한 데서 유래한다. 이후 히가시야마 일대가 혼무라 쪽으로 유명해지면서 니시야마는 점차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4]
니시야마에는 6명의 무사의 악행(전승 절 참조)에서 유래한 지명이 남아 있다. 버스 정류장에도 있는 하코와 와타세는 6명의 무사가 횡행할 때 옷을 벗겨진 것과 "물을 건네라"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다.[5]
- 아라타
지명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본 각지에 존재하는 "아라타"는 신전(新田)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이것이 유래라고 추정된다.[6] 현재 町名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버스 정류장 이름으로 "아라타", "아라타구치"가 남아 있다.
- 세메
지명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본 각지에 존재하는 "세메"나 "〇〇가세메" 등의 지명은 좁고 막힌 골짜기 지형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이것이 유래라고 추정된다.[7]
- 히코 섬 12 묘조
호겐의 난에서 패배한 고노 미치쓰구와, 지쇼·주에이의 난(겐페이 합전)에서 패배한 헤이시(이세 헤이시)의 잔당(패잔병)은 히코 섬으로 이주하여 히코 섬 개척의 초석을 다졌다. 그들은 고노 미치쓰구를 필두로 "히코 섬 12 묘조"라고 불린다. 고노 미치쓰구와 5명의 집권이 호겐 2년(1157년)에 이주한 이후, 분지 2년(1186년)에 헤이시 집권의 말손인 우에다 지부노스케, 오카노 쇼란, 유리의 민부가, 겐포 2년(1214년)에 시모사국 오쿠라의 영주 와다 요시노부가, 겐포 3년(1215년)에 헤이시의 집권, 도네 킨고와 토미타 교부노스케 등이 이주했다.
처음에는 재흥을 꿈꿨던 12 씨족이었지만, 잇펜의 종자, 사이라쿠 법사에게 설득당해 히코 섬에 영주하며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 히데요시와 요지베
분로쿠 원년(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무렵, 시모노세키와 기타큐슈 사이의 간몬 해협을 지날 때 사건이 일어났다. 히데요시 등을 태운 배가 실수로 좌초하여 죽음의 여울에 휩쓸린 것이다. 히데요시와 배의 선장 아카시 요지베는 모리 히데모토 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히데모토에게는 하시바의 성이 주어졌다. 그러나 요지베는 호조 가문의 집권자로 원수를 갚으려 한다는 종자의 고언으로 인해 히데요시에게 목이 잘려 살해되었다. 사건 후, 이 여울은 요지베가세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죽음의 여울"은 현재 항로 정비로 제거된 상태이다. 간분 10년(1670년)에 세워진 석탑은 암초를 제거할 때 이동되어, 현재는 기타큐슈시의 와카메카리 공원에 있다.
- 간류지마의 싸움
간류지마의 싸움은 게이초 17년(1612년) 4월 13일에 행해진 미야모토 무사시와 사사키 코지로의 결투이다. 무사시가 29세, 코지로가 18세 때였다. 코지로는 무사시를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고, 코쿠라성 부근에서는 무사시가 도망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가오카 오키나가가 이를 눈치채고 무사시에게 결투를 재촉했다. 결투에서 코지로가 무사시의 미간을 베는 순간, 무사시도 코지로의 머리띠를 베었고, 결국 코지로가 져서 죽었다.
- 히코시마의 영지 교환
히코시마는 에도 초기에는 고쿠라번의 영지였고, 히코시마 맞은편 모지 지구는 초후번의 영토였다. 그러나 이는 양쪽 번에 불편했기 때문에 겐나 6년(1620년)에 초후번주 모리 히데모토와 고쿠라번주 오가사와라 타다마사의 협의 하에 히코시마와 모지의 영토가 교환되었다.
- 시모노세키 전쟁과 조슈 정벌
시모노세키 전쟁 당시, 히코시마에는 이국을 맞이하기 위해 다노코, 아이즈바, 야마토코, 데시마 포대가 설치되었다. 가에이 2년(1849년)에는 요시다 쇼인도 히코시마의 포대를 순시하러 왔다.
그러나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외국 군함에게 참패하여 히코시마 및 시모노세키는 일시적으로 점령당했다. 조슈 정벌까지 겹치자, 조슈번은 다카스기 신사쿠를 강화 대사로 파견했다. 강화 조건에는 히코시마를 조차지로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다카스기 신사쿠는 이를 거부하여 히코시마는 구제되었다고 한다(시시도 게이마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영국의 큐퍼와 협상). 실제로는 번주로부터 "조차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통역 이토 히로부미가 다카스기에게 전하지 않았다는 설(이토 본인의 회고록)과, 애초에 영국 측에서 그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는 설(영국 측 회의 의사록)도 있어 불분명하다.
외국과의 교섭이 끝나자 막부 등의 조슈 정벌(고쿠라 전쟁)이 시작되었다. 게이오 2년(1866년) 6월 29일, 막부군은 고쿠라에 후지산마루를 정박시켰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이를 "소선"이라 칭하고, 하마자키 린츠치와 우메모토 간시, 히라가 긴츠치와 오바 덴쿠로, 이소베 신조와 오스미 이에헤이를 2명씩 1척, 총 3척의 포대를 실은 배로 보냈다. 이 배는 포대를 싣고 있었기 때문에 선대장이라고 불렸다.
여섯 명은 와카마쓰(기타큐슈)까지 석탄을 운반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여 방심한 틈을 타 공격했다. 다노코나 데시마 쪽에서도 포격 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군함은 도망갔다. 이 원조 덕분에 조슈번도 오자토(기타큐슈)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 7 복신
평가와 관련된 이야기로, 평가의 기도소 건설에 즈음하여 아키노쿠니의 이쓰쿠시마 (미야지마)와 함께 최종 후보지가 된 적이 있다. 그러나 "7리 7포구 7굽이"의 조건 중, 길이가 부족하여 이쓰쿠시마 신사가 선택되었다고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에 분개하여 "7 복신"을 만들었다고 한다. 7 복신은 지리 절에서 언급한 7개의 섬, 7개의 포구 외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히코시마는 개척으로 인해 옛날과는 지형이 다른 곳이 많아 현재는 없는 것도 있다.
| 종류 | 내용 |
|---|---|
| 7 사키(崎) | 우라베자키(우미고), 호코자키(혼무라 원하야시 겸 조선 제2공장 부근), 카마자키(에노우라 잔교통), 스키자키(원 시오야초), 카카자키(원 카카자키초), 사사자키(아라타), 나가사키(히코시마 변전소 부근) |
| 7 귀신 | 오니가시마(다케노코지마 북부), 오니아나(테트리카스), 오니사키(구 마이코지마 부근), 오니야마(니시야마 남서쪽 해안 부근의 마루야마), 오니반야(오니야마의 안경 바위), 오노세(시시구치 부근의 여울), 오니이와(타코이와) |
| 7 해적 | 해적 섬(덴마지마), 해적 계곡(시오하마), 해적 숙소(시오하마), 해적 저택(후쿠우라 금도비라궁 뒤), 해적 판(타노쿠비 마나이 세), 해적 둑(타노쿠비) |
| 7 둑 | 사토 둑(사코), 코사코 둑(사코), 나가와우라 둑(혼무라), 후지가사코 둑(오이노야마), 카마자키 둑(에노우라 5정), 스기타(미쓰비시 조선 부근), 시오야 둑(원 시오야초) |
| 7 세(瀬) | 사자에세(니시야마 북서), 시시구치세(니시야마 남서), 타와라세(에노우라 간류지마 사이), 오키노스세(현 야마토초), 나카스노세(간류지마 앞바다), 시노세(요지베이게세), 부쓰노세(키누카케이와 부근) |
- 6명의 무사의 악행
단노우라 전투에서 평가가 멸망했을 때, 이자키의 코몬(히코시마 대교의 혼슈 쪽)에는 평가 부흥을 기원하는 나카지마 시로타유 마사노리(시로타유)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평가 부흥의 꿈은 사라지고, 아들과 가신 4명을 데리고 6명의 무사라는 해적이 되었다. 그들은 히코시마뿐만 아니라 규슈까지 세력을 뻗으려고 했기 때문에 규슈 측은 150명을 파견했다. 시로타유와 아들은 도망갔지만 남은 4명은 저항하다 죽었다. 도망가지 않는 용기 있는 자세에서 히코시마에는 6명의 무사에 관한 지명이 있다.
- 코도에 있는 바위의 전설

키누카케이와 등을 포함한 암반은 코세토에 면한 히코시마 오마치나 히코시마 우미고초 부근에 있다. 키누카케이와는 현재 관음이 설치되어 있는 부근의 바위를 가리키며, 키누카케이와 외에도 5개의 큰 바위가 있다. ("부쓰이와"라는 것도 과거에는 있었지만 제거되었다). 현존하는 6개의 큰 바위는 동쪽부터 순서대로 미나게이시(몸을 던지는 돌), 미나게이와(몸을 던지는 바위), 키누카케이시(옷걸이 돌), 키누카케이와(옷걸이 바위), 보사쓰이시(보살 돌), 지조이시(지장 돌)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아래에 몸을 던지는 돌, 몸을 던지는 바위, 옷걸이 돌, 옷걸이 바위의 전설을 차례로 설명한다.
- 몸을 던지는 돌
단노우라 전투 후, 패한 평씨 측의 한 무장과 그 아내가 이 땅에서 추격자에 쫓겨 바다에 몸을 던졌지만, 아내만은 어부에 구출되었다. 그 후, 남편을 잃은 여자는 코세토의 암반에 서서 옷을 벗고 합장하여 바다에 몸을 던졌다. 여자는 해중에 사라졌지만, 옷은 바람에 날아가지 않고 바위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이 바위는 "미나게이시"라고 불리게 되었다.
- 몸을 던지는 바위
오사카에 있던 "오코메"라는 여자의 연인이 도망쳐버렸기 때문에, 오코메는 연인을 찾으러 히코시마까지 왔다. 그러나 만날 수 없는 것에 슬퍼하며 몸을 던졌고, 후에 그것을 알게 된 연인도 같은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이후, 이 바위는 미나게이와라고 불리게 되었다.
- 옷걸이 돌
단노우라 전투에서 평씨의 무장의 아내가 히코시마에 표류하여 살아남았다. 그러나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폭풍이 부는 날에 옷을 벗고 스스로 몸을 던졌다. 폭풍은 며칠간 계속되었지만 옷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키누카케이시라고 불리고 있다.
- 옷걸이 바위
이요노쿠니가 싸움에서 지고, 공주가 남편을 찾기 위해 히코시마에 왔다. 히코시마에 살고 있던 가와노 곤노신은 알지 못하는 샘물을 발견했고, 거기에 그 공주가 있었다. 곤노신은 공주를 집으로 데려갔지만 다음날 아침 공주는 없었다. 며칠 후 바위 부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코도에 있는 바위에 옷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공주가 몸을 던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샘물은 공주의 물, 바위는 키누카케이와라고 불리게 되었다.
키누카케이와에는 관음상이 서 있으며, 시모노세키 요새였던 히코시마에는 사령부의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상 설립 허가의 비석이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시모노세키 요새 사령부 지대
: 제265호
상 설립 허가,
:: 쇼와 14년 12월 8일
- 니시야마의 문어
니시야마와 다케노코지마 사이 부근에는 시시구치라는 바위가 있고 이 지역에는 문어의 전승이 남아 있다. 오나츠라는 사람이 해안에 있던 대문어의 다리를 자르니 맛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날에 자르려고 하자 문어에게 바다로 끌려갔다는 이야기이다. 소개하는 문헌이나 이야기에 따라 오나츠는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2번째 다리 또는 8번째 다리로 문어에게 끌려갔는지 등이 다르다.
- 테토리카(가)
테토리카스(손으로 뺏은 솥)는 니시야마 부근에 있는 동굴로, 풍화에 의해 구멍 안에 여러가지 모양의 것이 있다고 한다. 테토리카스는 테토리가스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각각 다른 유래가 있으며, 테토리가스의 가스는 간슈에서 온 것이다. 테토리카스와 테토리가스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테토리카스어느 날 고쿠라의 어부가 히코시마 니시야마까지 왔을 때, 테토리카스에 있던 찻주전자 같은 조형물을 가지고 돌아가 가보로 삼으려고 했지만, 갑자기 폭풍이 쏟아져 어부는 복통을 일으켰다. 찻주전자를 버리자 폭풍은 멈추고 복통도 나았다. 테토리카스의 카스는 찻주전자이다.
테토리가스두 명의 상인이 이 동굴에 왔을 때, 재물이 있는 항아리를 발견하여 나누어 갖기로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두통인데 배의 짐이 있으니 다른 한 사람에게 가라토까지 가게 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재물을 독차지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급히 돌아왔다. 돌아오자 두통이라고 속인 상인이 항아리 앞에서 쓰러져 죽어 있었고, 항아리에는 기와 등밖에 없었다. 다른 항아리가 있었기 때문에 무서워하며 봤지만 이 내용물도 기와 등밖에 없었고 발광하여 입수했다. 먼저 죽은 사람은 독차지하려고 한 것, 입수한 사람은 동료를 믿지 못한 것이 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 타쓰이와(辰岩)
타쓰이와는 히코시마 오마치에 있는 큰 바위로 숲 속에 있다. 평씨의 패잔병이 이 숲에 살고 있었지만 辰의 해 3월 24일에 죽었다. 그 이후, 이 숲에서는 용이 매달 24일에 나타나게 되었고, 스님이 3일 동안 경을 외웠기 때문에 용이 나타나는 일은 없어졌다. 그러나 그 후 큰 바위가 나타나 타쓰이와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평씨의 재보가 바위 아래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 3명의 남자가 그것을 파려고 했지만 모두 발광하여 죽었다. 특히 요하치라는 고쿠라의 상인은 사람을 모아 팠기 때문에 요하치의 발광하여 죽는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 어부의 아이와 고래의 아이
타노쿠비에 있던 어부에게는 허약한 체질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밤, 잠자리에 고래가 나타나 "관문해협을 지나갈 테니 아들은 못 본 척 해달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어부는 이 일을 퍼뜨려 동료 어부들과 함께 고래를 잡으러 갔다. 점심을 조금 넘었을 때 고래의 어미와 새끼가 왔다. 어부들은 작살을 던져 잡으려고 했지만 우연히 새끼 고래에 맞았고, 화가 난 아버지 고래는 바다를 휩쓸어 어부들은 육지로 헤엄쳐 갔다. 어부가 집에 돌아가니 아이는 죽어 있었다.
- 후네시마 괴담
후네시마, 즉 간류지마에는 후네시마 괴담이라는 간류지마에 관한 괴담이 남아 있다. 그 괴담은 대부분이 고지로를 연상시키는 괴담이다. 아래에 예를 든다.
발자국 소리와 묘비후네시마에 사람이 살고 있던 어느 해, 본 무렵의 밤이 되면 간류지마에서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에 겁을 먹은 사람들은 간류지마를 떠나 한 부부만 섬에 살고 있었다. 그 다음 해에도 본이 되면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며칠이나 계속되었기 때문에 아내는 발광하여 죽었다. 그 후 남편도 뒤를 따라 입수했다. 수년 후 부부의 집 아래에서는 묘비가 발견되었다.
부르는 소리어느 날 후네시마에서 어부가 낚시를 하고 있는데 소리가 들렸고, 거기에는 이마가 갈라진 젊은이의 시체가 있었다. 어부는 시체를 배에 태워 돌아가려고 했지만 본섬으로 돌아가 내려놓으려고 하자 피만 남고 시체는 사라졌다.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어부는 동료와 찾아봤지만 발견되지 않았고, 피마저 사라졌다. 이러한 일이 봄이 오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게 되었고, 후네시마에는 사람이 가까이 가지 않게 되었다.
바다 도깨비히코시마 대교에서 흘러, 갑문을 경유하여, 간몬 대교에서 간몬 해협을 나오는 해협은 코세토라고 불린다. 옛날에는 흐름이 빨랐고, 어부들은 흐름이 빠른 때와 느린 때를 잘 파악하여 배를 탔다. 어느 날 한 어부가 큰 바위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위가 아니라 바다 도깨비였다. 바다 도깨비의 머리에는 작살이 꽂혀 있었고 어부는 그것을 뽑았다. 어부는 바다 도깨비가 흐름을 늦추고 있다는 것을 바다 도깨비에게 듣고, 며칠 동안은 배를 내지 않도록 부탁받았다. 그러나 그런 것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믿지 않고 배를 낸 자는 죽고, 바다 도깨비를 도운 어부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히코시마 코세토의 바다 도깨비는 어부를 돕는 드문 예이다.
- 금의 "츠루"
현재, 히코시마 최남단의 타노쿠비에는 카네가겐(금의 현)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지만 이것에는 2개의 유래가 있다.
하나는 츠루를 학(鶴)에 적용하는 설이다. 옛날 이곳에는 겨울철이 되면 찾아오는 학 중 한 마리만 금색으로 빛나는 학이 있었지만, 날개가 부러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고쳐주려고 했지만 다른 학들이 방해를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었고, 학들은 방해하느라 먹이를 잡을 수 없어 죽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가까이 가지 않도록 했지만, 한 마을 사람은 금의 학을 잡고 동료와 함께 치료했다. 그 후 학들은 날아갔지만 배에서 "타인"에게 활로 쏘여 죽었다. 이 전승에서 카네가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다.
두 번째 설은 츠루를 덩굴에 적용하는 설이다. 이 땅에 자라던 금의 덩굴은 매력적이어서 아무도 가져가지 않았지만 마도로스(선원) 등이 이것을 뽑자 큰 바람이 불어 격류에 삼켜졌다. 금의 덩굴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지명만은 남았다는 것이다.
- 소(실존 불명의 인물)
철도 절에서 언급하겠지만, 쇼와 11년(1936년)에 간몬 터널 공사가 시작되었다. 지방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소"라는 남자만은 터널에서는 고지로와 시노세(요지베이게세)에서 죽은 원령이 공사를 방해한다고 하여 다리를 만드는 쪽을 지지했고, 터널에는 심하게 반대했다.
터널 완성 당일, 소는 중국 전장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러나 터널 완성 기념 때 소의 목격 정보가 있었다. 게다가 다른 날, 택시 운전사가 시모노세키 역에서 간몬 터널 입구까지 승객을 태우고 있는데 뒤에서 "터널이 좋다"는 소리가 들려와, 터널에 도착하자 뒤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아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는 기묘한 일도 일어났다. 소의 정체는 불명이다.
- 히코시마 스기타의 페트로 그래프와 옹기
히코시마 스기타의 페트로 그래프에서는 쇼와 62년(1987년) 10월 12일부터 페트로 그래프의 돌 부근을 촬영하면 주위에 옹기 같은 것이 비친다는 현상이 일어났다. 10월 12일에는 금색 옹기가 비쳐, 그 자리에서 촬영한 사람들의 사진에는 모두 찍혔지만 지역의 이과 교사들은 이를 부정했다. 우연일 가능성도 있어 그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같은 해 12월 3일에는 재차 촬영이 이루어졌고, 이 때는 흰색 옹기가 찍혔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12월 5일, 3번째에는 360°, 필름 1개분을 사용하여 촬영했다. 여기저기 증거가 나오자 그들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후 페트로 그래프를 공양하자, 옹기가 사진에 찍히는 일은 없어졌다. 게다가 옹기가 사진에 찍히지 않게 된 이후 일본에서는 전국적으로 페트로 그래프가 발견되었다.
8. 저명한 출신 인물
히코시마 출신의 저명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정치인・경제인
- 우에다 켄스케 (히코시마 촌장, 히코시마 전기 취체역)
- 우에다 스에조 (히코시마 정장)
- 우에다 소고로 (운송업, 토지 임대업, 노무 도급업, 해운업, 우에다 합명회사 대표 사원)
- 우에다 지사쿠 (군 의원, 촌 의원)
- 우에다 마츠조 (히코시마 운수 사장, 우에다 합명회사 대표)
- 고노 토쿠노스케 (야마구치현 다액 납세자, 상업, 시모노세키 시 의원)
- 고노 큐조 (야마구치현 다액 납세자, 상업, 시모노세키 시 의원)
- 연예인
- 고구레 미치요 (영화 배우)
- 야마시타 신지 (배우)
- 타무라 아츠시 (런던 부츠 1호 2호, 코미디언)
- 나카무라 료스케 (개그맨, 버스)
- 오토와 시노부 (엔카 가수)
- 카타기리 류지 (배우)
- 스포츠 선수
- 후지모토 히데오 (야구 투수, 조선 부산 출생)
- 오고와라 사카에 (전 프로 야구 선수)
- 미야모토 카즈토모 (전 프로 야구 선수)
- 니시야마 마사시 (유도 선수, 런던 올림픽 유도 90kg급 동메달리스트)
- 이즈미 아라타 (프로 축구 선수, 전 인도 대표)
8. 1. 정치인・경제인
| 이름 | 주요 경력 |
|---|---|
| 우에다 켄스케 | 히코시마 촌장, 히코시마 전기 취체역 |
| 우에다 스에조 | 히코시마 정장 |
| 우에다 소고로 | 운송업, 토지 임대업, 노무 도급업, 해운업, 우에다 합명회사 대표 사원 |
| 우에다 지사쿠 | 군 의원, 촌 의원 |
| 우에다 마츠조 | 히코시마 운수 사장, 우에다 합명회사 대표 |
| 고노 토쿠노스케 | 야마구치현 다액 납세자, 상업, 시모노세키 시 의원 |
| 고노 큐조 | 야마구치현 다액 납세자, 상업, 시모노세키 시 의원 |
8. 2. 연예인
- 고구레 미치요 - 영화 배우
- 야마시타 신지 - 배우
- 타무라 아츠시 - 코미디언 (개그맨, 런던 부츠 1호 2호)
- 나카무라 료스케 - 코미디언 (개그맨, 버스)
- 오토와 시노부 - 엔카 가수
- 후지모토 히데오 - 야구 투수
- 니시야마 마사시 - 유도 선수
- 카타기리 류지 - 배우
8. 3. 스포츠 선수
참조
[1]
웹사이트
Let's travel around Japan - Shimonoseki city
http://www.travel-ar[...]
[2]
서적
Handbook of Rock Art Research
[3]
서적
Life Works Itself Out: (And Then You Nap)
[4]
서적
Japanese-German Business Relations: Co-operation and Rivalry in the Interwar Period
[5]
웹사이트
Shimonoseki Shipyard & Machinery Works Enoura Plant/ Yamatomachi Plant
https://www.mhi.com/[...]
[6]
간행물
U.S. Geological Survey Minerals Yearbook, 2013, V. 3, Area Reports, International, Asia and the Pacific
[7]
웹사이트
Yamaguchi travel guide - Hikojima
http://www.visit-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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