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비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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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감비아의 역사는 고대 시대에는 말리 제국과 송가이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15세기부터 포르투갈 탐험가들이 감비아 강 유역에 도착하면서 유럽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 지배를 놓고 경쟁했으며, 19세기에는 영국의 지배가 강화되었다. 20세기에는 자치 정부 수립과 독립을 거쳐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 시대와 야히아 자메의 쿠데타로 인한 독재 시대를 겪었다. 2016년 아다마 배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며, 2018년에는 영연방에 재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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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비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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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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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서아프리카 |
역사 | |
선사 시대 | 세네감비아 환상열석 |
초기 역사 | 세네감비아 말리 제국 카부 살룸 니우미 니아니 왕국 울리 왕국 |
식민지 시대 | 쿠로니아 식민지화 알브레다 감비아 식민지와 보호령 |
독립 | 감비아 독립법 1964 |
쿠데타 | 1981년 (실패) 1994년 2014년 (실패) 2022년 (실패) |
현대 | 세네감비아 연합 2016-2017년 감비아 헌정 위기 감비아에 대한 ECOWAS 군사 개입 |
2. 초기 역사
서기 500년 이전 감비아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2]
2. 1. 고대 기록
서기 500년 이전 감비아 지역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2] 기원전 6세기 또는 5세기[35], 혹은 기원전 470년경[1] 카르타고의 탐험가 항해자 한노가 감비아강까지 항해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검증 가능한 기록은 서기 9세기와 10세기 아랍 상인들의 기록에서 나타난다.2. 2. 말리 및 송가이 제국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검증 가능한 서면 기록은 서기 9세기와 10세기에 활동했던 아랍 상인들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중세 시대 동안 이 지역은 사하라 종단 무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만딩고족의 통치자였던 만사 칸쿠 무사가 이끈 말리 제국은 막대한 부와 높은 수준의 학문, 그리고 발달된 문명을 통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13세기 초에는 말리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쿠루칸 푸가가 제정되어 이 지역의 법률로 기능했다.1352년, 북아프리카 출신의 학자이자 여행가인 이븐 바투타는 이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주민들의 훌륭한 자질과 사회의 안정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지역 사람들은 훌륭한 자질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공평한 경우가 거의 없고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도 불공평한 것을 더 싫어합니다. 그들의 나라에는 완벽한 치안이 있습니다. 나그네도 주민도 강도나 폭력배로부터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36]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송가이족의 왕이 공식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송가이 제국이 이 지역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부상했다.
3. 유럽인의 도래와 식민지 시대
15세기 포르투갈의 엔히크 항해왕자가 후원한 탐험을 통해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감비아강 유역에 도달하였다.[5] 초기 탐험가들은 강 유역에서 금을 발견했다고 보고했으며,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강변에 정착지를 건설하려 시도했다.[6]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당시 감비아 계곡 대부분은 말리 제국에서 이주한 만딩카족이 세운 여러 소규모 왕국들의 지배하에 있었다.[4]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잉글랜드 등 여러 유럽 세력이 감비아 지역에 진출하면서, 이후 감비아는 이들 간의 경쟁과 식민 지배의 대상이 되었다.[6]
3. 1. 포르투갈의 탐험과 정착 (15세기 ~ 17세기)

감비아에 대한 유럽인의 탐험은 15세기 포르투갈의 엔히크 항해왕자가 탐험을 후원하면서 시작되었다. 1446년, 포르투갈 선장 누누 트리스타우(Nuno Tristao)는 카보베르데 주민들과 처음 접촉하여 무역 및 우호 조약을 맺었고, 이후 매년 포르투갈 선박이 파견되어 무역 활동을 벌였다. 이들로부터 감비아 강 유역에서 많은 양의 금이 생산된다는 정보가 엔히크 항해왕자에게 전달되었다.[5] 1455년, 엔히크 왕자는 베네치아 출신의 알비세 카다모스토에게 배를 주어 감비아 강 탐험을 지시했고, 같은 해 후반에는 제노바 상인 안토니오토 우소디마레에게 배 두 척을 주어 같은 임무를 맡겼다. 두 탐험대는 카보베르데 근처에서 합류하여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감비아 강 하구를 발견했다.[5]
카다모스토와 우소디마레는 1455년 6월 감비아강에 도착하여 강 상류로 잠시 항해했으며, 이듬해인 1456년 5월에는 더 멀리 상류로 나아가 현지 부족의 추장들과 접촉했다. 강 하구 근처에서 탐험대는 이전에 열병으로 사망한 선원을 묻었던 섬에 정박했는데, 그 선원의 이름이 앤드류였기 때문에 섬 이름을 세인트 앤드류 섬이라고 지었다.[6]
이러한 탐험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감비아 강변에 정착지를 건설하려 시도했으나, 정착촌이 큰 규모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많은 포르투갈 정착민들은 현지 주민들과 혼인했지만, 포르투갈식 복장과 관습을 유지하고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여겼다. 포르투갈계 공동체는 18세기까지 감비아 지역에 계속 존재했으며, 1730년에는 산 도밍고, 게레지아, 탕쿨라 등지에 포르투갈 교회가 세워졌다. 강 상류 지역인 파타텐다 근처의 세투쿠에도 포르투갈 정착지가 있었다.[6] 감비아라는 국명은 무역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단어 '캄비우'(Cambio|캄비우pt)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8]
1580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차지하자,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이들 중 프란시스코 페레이라는 1587년 잉글랜드 선박 두 척을 감비아로 안내하여 가죽과 상아를 싣고 돌아와 이익을 남겼다. 1588년,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하던 안토니우, 크라투 수도원장은 런던과 데번의 상인들에게 세네갈 강과 감비아 강 사이의 무역 독점권을 판매했다. 이 권리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특허장을 통해 10년 동안 보장되었다. 잉글랜드 상인들은 여러 척의 배를 보냈지만,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포르투갈 세력의 방해로 인해 강 하구에서 북쪽으로 약 약 48.28km 떨어진 조알-파디우트 이상 남쪽으로 진출하지는 못했다. 당시 잉글랜드 상인들은 감비아를 "포르투갈인들이 숨겨 놓은 비밀스러운 무역과 부의 강"이라고 보고했다.[6]
3. 2.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17세기 ~ 18세기)
1612년, 프랑스의 감비아 정착 시도는 정착민들 사이에 질병이 퍼지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후 영국은 1598년, 1618년, 1632년에 여러 모험가들에게 감비아 강과의 독점 무역권을 부여하는 특허장을 발급했지만, 실제 탐험은 1618년에 이르러서야 시도되었다. 그 해 조지 톰슨이 이끈 탐험대는 팀북투와의 무역로 개설을 목표로 했으나, 톰슨 부재 중 포르투갈인들에게 선원들이 학살당하는 등 큰 손실을 입었고 결국 톰슨 자신도 내부 다툼으로 살해당했다.[6]이후 리처드 욥슨이 지휘하는 구호 탐험대가 파견되어 포르투갈 선박을 나포하고 네리코 강까지 진출하며 감비아 강의 상업적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 특히 욥슨은 아프리카 상인 부코르 사노가 제공한 노예를 거부하며 "우리는 그런 상품을 취급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서로를 사고팔지도 않고, 우리와 같은 모습을 가진 사람도 사고팔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태도와는 다른 주목할 만한 발언이었다.[9] 그러나 그의 탐험 역시 상당한 손실을 입었으며, 1624년의 후속 항해는 5,000파운드의 손실을 기록하며 완전한 실패로 판명되었다. 결국 특허 소유자들은 감비아에서의 추가적인 시도를 포기하고 골드 코스트에 집중하게 되었다.[6][9]
1651년, 잉글랜드 연방 시기 런던의 특정 상인들에게 특허가 부여되어 두 차례 탐험대가 파견되었고 빈탕에 무역 기지를 설립했다. 금을 찾아 바라쿤다 폭포까지 갔으나 기후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1652년에는 왕당파였던 라인강의 루퍼트 공이 감비아에 나타나 특허 소유자들의 선박을 나포하는 사건도 발생했으며, 이러한 손실로 인해 상인들은 감비아 사업을 포기했다.[6]
같은 시기, 쿠를란트 공국의 야콥 케틀러 공작은 1651년 여러 원주민 추장으로부터 세인트 앤드루스 섬과 바니온 포인트(주푸레 인근), 가산의 토지를 양도받았다. 쿠를란트에서 정착민, 상인, 선교사가 파견되었고 세인트 앤드루스 섬과 바니온 포인트에 요새가 세워졌다. 이는 쿠를란트 식민지화 시도로, 그들은 토바고 섬도 식민지화했다. 쿠를란트인들은 이 영토를 통해 강을 통제하고 통행세를 징수하려 했으며, 요새에 대포를 배치했다. 토바고 식민지에 노예를 판매하려는 계획도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10] 1658년, 케틀러 공작이 스웨덴-폴란드 전쟁 중 스웨덴군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감비아 식민지 유지를 위한 자금 지원이 중단되었다. 결국 1659년, 쿠를란트 공작의 대리인은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와 협정을 맺고 감비아의 소유지를 넘겨주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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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세인트 앤드루스 섬의 요새는 스웨덴에 고용된 프랑스 사략선에 의해 점령되고 약탈당했다. 이후 네덜란드인들이 요새를 버리자 쿠를란트인들이 잠시 소유권을 되찾았다. 같은 해 영국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감비아 강 상류에 금광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영국은 다시 감비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와 루퍼트 왕자 등이 참여한 왕립 아프리카 회사(초기 명칭 '아프리카 모험가 왕립 회사')에 새로운 특허가 부여되었다. 회사는 로버트 홈스가 지휘하는 원정대를 감비아로 파견했다.[6]
홈스는 1661년 초 감비아 강 어귀에 도착하여 도그 섬을 점령하고 '찰스 섬'으로 개명한 뒤 임시 요새를 건설했다. 1661년 3월 18일, 그는 세인트 앤드루스 섬으로 항해하여 소수의 병력만 남아있던 쿠를란트 수비대에 항복을 요구했고, 다음 날 요새를 점령했다. 이 요새는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제임스 2세의 이름을 따 제임스 요새로 개명되었다. 1662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가 바라 원주민 선동, 영국 장교 매수, 포격 시도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요새를 되찾으려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영국의 통제권은 유지되었다.[6][8]
한편, 쿠를란트 공작은 평화 시기에 자신의 재산이 압수된 것에 대해 영국에 항의했다. 결국 1664년 11월 17일 협상을 통해, 공작은 아프리카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영국 찰스 2세에게 양도하는 대신, 토바고 섬과 감비아 강에서 개인적으로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17세기 중반부터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발트해(쿠를란트 포함) 상인들은 제임스 요새와 알브레다 인근 기지를 중심으로 제한된 무역권을 공유하며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4]
1667년,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블랑코 곶과 팔마스 곶 사이의 권리를 '감비아 어드벤처러스'라는 다른 모험가 단체에 하청하여 감비아 강, 시에라리온, 셔브로 지역 개발을 맡겼다. 그러나 이 단체는 1년 만에 권리를 반납했고, 권리는 다시 왕립 아프리카 회사로 돌아갔다.[6]
1677년, 프랑스가 네덜란드로부터 고레 섬을 빼앗으면서 세네갈과 감비아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정치적, 상업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본격적인 경쟁 시대가 시작되었다. 1681년 프랑스는 제임스 요새 바로 맞은편 강둑에 위치한 알브레다에 작은 월경지를 확보했다. 이후 바라 원주민과의 문제나 영국과의 전쟁으로 잠시 떠나기도 했지만, 프랑스는 1857년까지 이곳을 거점으로 유지하며 영국과 경쟁 관계를 이어갔다.[6]
3. 3. 영국 식민지 확장 (18세기 ~ 19세기)
19세기 초, 몽고메리는 감비아강 유역의 대부분 정착지가 영국령임을 확인했다.[11] 그러나 강 북쪽에는 바라, 부르 살룸, 야니, 울리 등 여러 원주민 왕국이 존재했다. 당시 바라 왕국의 인구는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었으며 수도는 바라 인딩이었으나, 주요 무역 중심지는 질리프레이였다. 부르 살룸의 인구는 약 30만 명에 달했고, 그 북쪽으로는 야니와 울리라는 더 작은 왕국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 네 왕국의 주민은 주로 만딩고족이었으며, 모두 아프리카 내륙과 활발한 교역을 벌였다. 반면 감비아강 남쪽에는 이렇다 할 규모의 왕국이 없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11]1807년, 영국 의회는 노예 무역 폐지법을 통과시켰다. 당시 세네갈의 고레 섬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은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아 고레 주둔군을 통해 감비아강에서 활동하는 노예 상인들을 단속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주로 스페인과 미국 국적의 노예 상인들은 완강히 저항했으며, 이로 인해 왕립 아프리카 군단은 여러 차례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6] H. E. Egerton은 당시 상황에 대해 "서아프리카 요새의 존재 이유는 노예 무역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 무역이 폐지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 처음에는 이러한 전초 기지가 노예 무역을 억압하는 데 유용하게 남아 있었다."라고 언급하며, 노예 무역 폐지 이후 영국 전초 기지의 역할 변화를 설명했다.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을 종결시킨 파리 조약 체결 이후, 고레 섬에 주둔하던 영국군과 관리들은 철수했다. 왕립 아프리카 군단 소속의 알렉산더 그랜트 대위는 병력을 이끌고 제임스 섬의 요새를 재건할 가능성을 타진했으나, 섬의 공간이 협소하다고 판단하여 세인트메리 섬이 더 적합하다고 결정했다. 1816년 4월 23일, 그랜트는 콤보 왕과의 조약을 통해 세인트 메리 섬을 영국에 할양받았고, 이곳에 배서스트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1821년에는 왕립 아프리카 회사가 의회 법령에 의해 해산되었고, 감비아의 행정권은 시에라리온 총독의 관할 아래로 넘어갔다.[12] 감비아는 1843년까지 시에라리온의 일부로 통치되다가 잠시 별도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1866년에 다시 시에라리온과 통합되어 동일한 행정 체계 하에 놓였다.[6]
영국은 세인트 메리 섬을 넘어 감비아강 유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여러 원주민 추장들과 조약을 체결했다.
연도 | 획득 지역 | 할양 주체 | 비고 |
---|---|---|---|
1816 | 세인트메리 섬 | 콤보 왕 | 배서스트 건설 |
1823 | 레마인 섬 (매카시 섬으로 개칭) | 콜리 왕 | 조지타운 건설 (군 막사, 해방 노예 정착지) |
1826 | 시드 마일 (강 북쪽 제방 약 1.61km 구역) | 바라 왕 | |
1829 | 파타텐다 및 주변 지역 | [13] | |
1840, 1853 | 세인트메리 섬 인접 본토 | 콤보 왕 | 서인도 연대 제대 군인 및 해방 아프리카인 정착 목적 |
1857 | 알브레다 | 이전 프랑스 거류지[6] |
이처럼 영국은 조약을 통해 점진적으로 감비아강 유역의 주요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해 나갔다.
3. 4. 감비아 식민지 및 보호령 (19세기 말 ~ 20세기 초)
4. 20세기 독립과 발전
20세기에 들어 감비아는 영국의 식민 통치 아래 있었으나, 점차 자치권을 확대하고 독립을 향한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민족 의식이 성장했고, 독립운동이 본격화되어 1965년 마침내 독립을 이루었다. 독립 이후에는 초대 대통령 다우다 자와라의 장기 집권, 군사 쿠데타와 야히아 자메의 권위주의 통치, 그리고 21세기 들어 아다마 배로 대통령 집권 이후의 민주주의 회복 노력 등 격동의 시기를 거쳐왔다.
4. 1. 자치 정부 수립과 독립 (1901년 ~ 1965년)


1901년, 감비아는 자체적인 행정 및 입법 위원회를 갖게 되어 점진적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향해 나아갔다. 같은 해, 감비아 최초의 식민지 군사 부대인 감비아 중대(Gambia Company)가 창설되어, 새로 조직된 서아프리카 국경군(West African Frontier Force, WAFF)의 시에라리온 대대에 편입되었다. 1906년에는 법령을 통해 노예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감비아 중대는 도싯 연대 소속 V. B. 서스턴 대위의 지휘 아래 카메룬 전역에서 다른 영국군과 함께 싸웠으며, 많은 병사들이 용감한 행동으로 무공 훈장을 받았다.
전후인 1920년에는 아프리카인의 권익 신장을 목표로 하는 영국 서아프리카 국민 회의(National Congress of British West Africa, NCBWA)가 결성되었고, 에드워드 프랜시스 스몰이 감비아의 유일한 대표로 참여했다. 스몰은 감비아로 돌아와 회의 지부를 설립하고, 감비아 정부 내 선출된 대표 확보를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그는 또한 정부의 비민주적인 정책에 대해 자주 청원 활동을 벌였다. 1929년, 스몰은 감비아 최초의 노동조합인 바서스트 노동조합(Bathurst Trade Union)을 설립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럼에도 1922년과 1927년에는 그의 반대파인 오스만 젱이 입법 위원에 임명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932년, 스몰은 당시 리치먼드 팔머 총독과 보수 세력(포스터와 그의 조카 W. D. 캐롤 주도)의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 요금 납부자 협회(Rate Payers' Association, RPA)를 설립했다. RPA는 1934년 말까지 바서스트 도시 구역 의회와 그 후신인 바서스트 자문 타운 의회의 모든 의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입법 위원회에는 여전히 대표를 보내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감비아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기존의 감비아 중대는 1941년부터 2개 대대 규모의 감비아 연대로 확대 개편되었고, 이 부대는 앤토니 리드의 지휘 아래 버마 전역에 참전했다. 감비아 본토 역시 연합군의 중요한 군사 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RAF 배서스트 비행정 기지와 RAF 윈덤 공군 기지가 운영되었고, 해군 기지인 HMS 멜람푸스(HMS Melampus)도 한동안 배서스트에 주둔했다. 1942년에는 감비아의 이름을 딴 경순양함 HMS 감비아(HMS ''Gambia'' (48))가 진수되어 1960년 퇴역할 때까지 식민지와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배서스트는 다카르 해전 직전 비시 프랑스의 전함 리슐리외(Richelieu)가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던 다카르에서 가장 가까운 영어 사용 항구이기도 했다.[15] 감비아에는 제55 영국 종합 병원(1941-1942, 1945-1946)과 제40 영국 종합 병원(1942-1943)이 주둔했다.[16] 전쟁 중 감비아는 보조 경찰을 조직하여 배서스트의 야간 통행 금지 시행 등을 지원했으며, 곳곳에 공습 대피소가 건설되었다.
1943년,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카사블랑카 회담을 오가는 길에 배서스트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이는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의 아프리카 대륙 방문이었다. 이 방문은 루스벨트가 영국의 식민 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감비아의 빈곤과 질병에 충격을 받고, 윈스턴 처칠에게 편지를 보내 그곳을 "지옥 구덩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1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감비아에서는 정치 개혁의 속도가 빨라졌다. 당시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들처럼 감비아 경제는 농업, 특히 땅콩 생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땅콩은 수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여 경제 구조를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다. 땅콩은 수출 관세가 부과되는 유일한 상품이었는데,[18] 이는 오히려 땅콩이 인접한 프랑스령 세네갈로 불법 밀수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땅콩 외 다른 수출 작물 생산을 늘리려는 시도도 있었다. 영국 식민 개발 공사(Colonial Development Corporation, CDC)는 연간 2천만 개의 달걀과 약 453592.00kg의 가공 가금류 생산을 목표로 감비아 가금류 계획(Gambia Poultry Scheme, 일명 윤덤 달걀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현지 환경 조건이 불리했고 장티푸스가 돌아 많은 닭이 폐사하면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CDC는 비판에 직면했다.[19][20]
감비아강은 내륙 항해와 운송의 주요 경로였으며, 항구는 배서스트(현 반줄)에 있었다. 도로망은 주로 배서스트 주변에 집중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비포장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유일한 공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건설된 윤덤에 있었는데,[21] 전후에는 여객기 운항에 사용되었다. 영국 남아메리카 항공(BSAA)과 영국 해외 항공 공사(BOAC)가 운항했으나, BSAA는 콘크리트 활주로가 있는 다카르로 노선을 옮겼다.[22] 윤덤 공항은 1963년에 재건되었으며, 당시 지어진 건물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독립을 준비하며 내부 자치 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1960년 제정된 헌법은 19명의 선출직 의원과 8명의 부족 대표(chief)로 구성된 부분적 선출 하원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헌법은 1960년 선거에서 두 주요 정당인 인민진보당(People's Progressive Party, PPP)과 통합당(United Party, UP)이 각각 8석씩 얻어 동률을 이루면서 결함이 드러났다. 결국 부족 대표들의 지지를 얻은 통합당의 피에르 사르 은지에가 초대 수석 장관(Chief Minister)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반발한 인민진보당의 다우다 자와라는 교육부 장관직에서 사임했고, 이는 식민지 국무 장관 주재 하에 새로운 헌법 회의 개최로 이어졌다.[23][24]
헌법 회의 결과, 더 많은 자치권과 완전 선출제로 구성된 하원을 규정한 새 헌법이 마련되었다. 1962년 총선에서 자와라가 이끄는 인민진보당이 선출 의석의 과반수를 확보하며 승리했다. 새로운 헌법 절차에 따라 자와라는 총리(Prime Minister)로 임명되었으며, 이 직위는 1970년 대통령제 전환 전까지 유지되었다. 1962년 총선 이후, 1963년에는 완전한 내부 자치가 부여되었다.
1964년 6월, 런던 말버러 하우스에서 열린 제헌 회의에서 영국과 감비아 대표단은 감비아가 1965년 2월 18일에 독립 국가가 되는 것에 합의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국가원수 지위를 유지하고, 총독이 여왕을 대신하여 행정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제 형태였다. 1965년 2월 18일, 켄트 공작 에드워드 왕자가 참석한 가운데 자와라 총리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감비아는 영연방의 21번째 독립 회원국이 되었으며, 당시 헌법은 "웨스트민스터 수출 모델의 세련된 버전"으로 평가받았다.[41]
독립 직후, 정부는 국민투표를 통해 기존의 군주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이 안건은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해 부결되었다. 그럼에도 이 국민투표 결과는 감비아가 비밀 투표 보장, 공정한 선거 실시, 시민의 권리와 자유 존중 등 민주주의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는 증거로 국제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4. 2. 자와라 시대 (1965년 ~ 1994년)
1964년 6월 영국과 감비아는 말버러 하우스 제헌 회의에서 감비아가 1965년 2월 18일에 독립하는 것에 합의했다. 이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국가원수로 남고, 총독이 여왕을 대신해 행정권을 행사하는 영연방 내 입헌군주국 형태를 갖추기로 했다.[41] 1965년 2월 18일, 감비아는 공식적으로 독립하여 영연방의 21번째 독립 회원국이 되었다. 당시 총리였던 다우다 자와라가 정부를 이끌었다.독립 직후 정부는 국가원수를 여왕 대신 선출된 대통령으로 바꾸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헌법 개정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감비아가 비밀 투표와 공정한 선거,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후 1970년 4월 24일, 두 번째 국민투표를 통해 감비아는 영연방 내 공화국으로 전환했으며, 총리였던 다우다 자와라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자와라 시대의 상대적 안정성은 1981년 쿠데타 시도로 처음 흔들렸다. 이 쿠데타는 의회 선거에서 두 차례 낙선했던 쿠코이 삼바 상양이 주도했다. 쿠데타 발생 당시 런던에 머물고 있던 자와라 대통령은 세네갈에 지원을 요청했고, 일주일간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폭력 사태 끝에 세네갈 군대가 반란군을 진압했다.
쿠데타 시도의 여파로, 1982년 감비아와 세네갈은 연방 조약을 체결하여 세네감비아를 결성했다. 이 연방은 양국의 군대 통합과 경제 및 통화 통합을 목표로 했으나, 내부적인 이견 등으로 인해 감비아는 1989년 연방에서 탈퇴했다.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은 5번의 선거에서 재선되며 집권했으나, 1994년 7월 발생한 군사 쿠데타로 실각하며 자와라 시대는 막을 내렸다.
4. 3. 자메 시대 (1994년 ~ 2016년)

1994년 7월, 야히아 자메는 쿠데타를 일으켜 자와라 정부를 축출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자메는 무장군 임시 통치 위원회(AFPRC)의 수장으로서 감비아를 통치했으며, 이 기간 동안 야당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AFPRC는 민주적인 민간 통치로 복귀하기 위한 전환 계획을 발표하고, 1996년 선거를 치르기 위해 임시 독립 선거 위원회(PIEC)를 설립했다. 같은 해 8월,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이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자메는 1996년 11월 6일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1997년 4월 17일 PIEC는 독립 선거 위원회(IEC)로 전환되었다.
자메는 2001년, 2006년, 2011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한편, 감비아는 1995년 중화민국(대만)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이로 인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국제 사회에서는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비상임 이사국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2013년 10월 2일, 감비아 내무부 장관은 감비아가 "다시는 신식민주의 조직의 일부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영연방에서 즉시 탈퇴한다고 발표했다.[26] 2014년 12월에는 자메 대통령을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27]
4. 4. 민주화와 배로 시대 (2016년 ~ 현재)
2016년 감비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 아다마 배로는 43.3%의 득표율로 현직 대통령 야히아 자메를 누르고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자메는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퇴임을 거부하며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에 배로는 감비아를 떠나 세네갈로 피신했으며, 2017년 1월 19일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 있는 감비아 대사관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28]같은 날, 서아프리카 경제 공동체(ECOWAS)는 자메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민주주의 회복 작전이라는 군사 개입을 시작했다. 이 군사 행동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의안 2337호에 따라 승인되었다.[28][29] 결국 2017년 1월 21일, 자메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적도 기니로 망명하겠다고 발표했다. 닷새 뒤인 1월 27일, 배로는 감비아로 돌아와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29]
2017년 4월 6일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배로 대통령이 이끄는 통합민주당이 37.47%의 득표율로 전체 53석 중 31석을 확보하며 승리했다.[44] 이후 감비아는 2018년 2월 8일 영연방에 공식적으로 재가입했다.[44][30]
자메 정권이 물러난 후 감비아는 상당한 민주주의적 변화를 경험했다. 최근의 대통령 선거와 총선은 경쟁적이고 공정하게 치러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언론, 학문, 표현의 자유가 크게 신장되었다. 사법부 역시 이전보다 더 공정하고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32] 자메 정권 시절 정치적 반대자와 비판 세력에 대한 박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8년 진실, 화해 및 배상 위원회(Truth, Reconciliation and Reparations Commission, TRRC)가 설립되었으나, 위원회의 원활한 운영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33]
한편, 배로 대통령은 당초 3년 임기 약속을 지키지 않고, 기존 정당에서 탈당하여 새로운 국민인민당(NPP)을 창당했다. 또한 과거 집권당이었던 APRC와 연립 정부를 구성하면서 논란을 빚었다. 이러한 행보에 반발하여 '쓰리 이어스 조트나(Three Years Jotna, 3년은 충분하다)' 운동과 함께 광범위한 시위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시작된 시위는 점차 폭력적으로 변했고, 결국 당국은 이 운동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34]
2021년 12월 4일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아다마 배로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야당 후보들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부정 행위를 이유로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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