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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아쓰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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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노에 아쓰마로는 1863년 교토에서 태어난 일본의 공작이자 정치인이다. 그는 좌대신 고노에 타다후사의 장남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제 아래에서 공작 작위를 받았다. 유럽 유학 후 귀족원 의장과 가쿠슈인 원장을 역임했으며, 문벌 정치를 비판하고 범아시아주의를 주창했다. 청일 전쟁 이후에는 동아동문회를 설립하여 일본과 중국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1903년에는 대러동지회를 설립하여 러시아에 대한 강경 외교 정책을 추진했지만, 러일 전쟁 발발 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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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아쓰마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작 고노에 아쓰마로
출생일1863년 8월 10일
사망일1904년 1월 2일
사망 장소일본 도쿄
배우자마에다 사와코
자녀고노에 후미마로
고노에 히데마로
나오마로
다다마로
아버지고노에 다다후사
친척마에다 요시야스 (장인)
경력
학력라이프치히 대학교
직업정치인
교육자
작위공작
훈장훈2등 욱일중광장
관위종1위
정치 경력
소속 정당불명
의회 경력귀족원 의원
귀족원 의장제3대
임기: 1896년 10월 3일 ~ 1903년 12월 4일
추밀원 고문관임기: 1903년 12월 4일 ~ 1904년 1월 2일
가족 관계
형제자매쓰가루 히데마로 (동생)
인척 관계마에다 도시쓰구 (처남)
도쿠가와 이에사토 (인척)
오야마 가시와 (사위)
도쿠가와 이에마사 (조카)
호소카와 모리히로 (종손)
가계
고노에 가 당주제29대
재임: 불명
선대 당주고노에 다다후사
후대 당주고노에 후미마로
교육 경력
학습원장제7대
재임: 1895년 ~ 1904년

2. 생애

메이지 유신 이후, 고노에 가문은 귀족 계급에서 벗어나 새로운 화족 제도 아래에서 공작(公爵) 작위를 받았다. 1885년부터 1890년까지 유럽을 방문하여 독일본 대학교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1895년에는 가쿠슈인 원장이 되었다.[2]

1890년 귀족원이 발족하면서 공작이었기에 무투표로 의원이 되었다. 의장인 이토 히로부미 백작을 대신하여 임시 의장을 맡아 회기 대부분의 의장직을 대행했다. 원내 회파로서 동지회를 결성했고, 이듬해인 1891년에 삼요회로 개칭했다. 같은 해에 월요회도 설립하여 동지를 모았으나, 월요회는 잠시 후 자연 소멸했다. 아쓰마로는 오섭가 출신인 니조 모토히로 등과 함께 삼요회에 속해 타니 간죠 등이 결성한 간화회와 공동 보조를 취하며 귀족원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후에 삼요회가 쇠퇴하자 아사히 클럽과 합병했고, 활동이 저조해진 간화회와도 합병하여 새롭게 결성한 토요회로 옮겨 활동을 계속하며 점차 정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6]

1892년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여 1903년까지 재임했다. 1896년 10월 3일부터 1903년 12월 4일까지 제10회에서 제18회까지의 회의를 주재했으며, 1903년부터는 추밀원 의원을 겸임했다.

1893년 동방협회 부회장에 취임했다.[7] 청일 전쟁 이후 서구 열강이 조차권 등으로 중국 분할 움직임을 보이자 위기감을 느꼈다. 1898년 1월 잡지 『태양』에 기고한 글에서 "최후의 운명은 황인종과 백인종의 경쟁이며, 이 경쟁 아래에서는 지나인도 일본인도 함께 백인종의 원수로서 인정받는 지위에 서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일본과 중국은 동문동종임을 강조하며 동아동문회를 설립했다. 동아동문회는 흥아회, 동아회 등 여러 단체를 흡수하여 아시아주의 대동 단결 운동을 꾀했고, 캉유웨이와의 회담에서는 아시아 먼로주의를 주장했다.

1900년 6월, 의화단의 난이 발생하자 러시아만주를 점령하게 되었다. 아쓰마로는 이토 히로부미 등 정부 고관들에게 러시아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할 것을 제안했지만, 대러시아 융화파인 이토는 응하지 않았다. 아쓰마로는 이누카이 쓰요시, 도야마 미쓰루 등과 함께 국민동맹회를 결성하여 대러시아 주전론을 제창하며 러시아와의 개전에 나서지 않는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1903년 8월, 러시아에 대해 강경 외교 정책을 추진하는 対露同志会|대러동지회일본어를 설립했는데, 이는 러시아가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의 독립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고노에는 개인적으로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할 것을 촉구했지만, 1904년러일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사망했다.[3]

오가와 헤이키치와 도야마 등이 아쓰마로를 수반으로 하는 내각을 만들려던 중[9], 1904년 1월 2일에 사망[3]했다. 향년 42세 (만 40세). 중국으로 건너갈 때 감염된 전염병 악티노마이코제 (방선균증)가 원인이었다[10]. 6일 장례에 즈음하여 전날 칙사시종자작호조 우지야스가 파견되어 폐백과 제사료 5천 엔이 하사되었다[11][12]. 고노에 가의 보제사인 다이토쿠지 (교토시기타구)에 묻혔다.

아쓰마로의 죽음 2개월 후에 그의 희망대로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사후, 다액의 빚이 남았지만 도야마나 이오키 료조 등 국민동맹회의 멤버가 채권자를 물러나게 했다고 한다[13].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863년 6월 26일 좌대신 고노에 다다후사의 장남으로 교토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시마즈 히사나가의 딸) 미츠코로 알려져 있지만, 시마즈 가문의 자료에는 "코란 부인(미츠코) 아쓰마로 ''양모''"라고 기재되어 있다[4]. 1873년 아버지의 가독을 이은[5] 다음 달에 아버지가 35세로 병사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고노에 다다히로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했다(문헌에 따라 다다히로의 아홉째 아들로 기재).

1879년에 대학 예비문에 입학했지만, 병을 얻어 퇴학하고 교토로 돌아갔다. 이후, 일본 고유의 학문과 한학 외에 영어를 독학했다. 1884년, 화족령 제정에 따라 공작에 서임되었다. 이듬해 1885년이토 히로부미의 권유로 독일 · 오스트리아 양국에 유학하여, 본 대학교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유럽으로 가는 배 여행 도중, 청불 전쟁의 강화 회의가 시작되려던 시기였기 때문에, 타이완 해협을 통과했을 때 펑후 섬 곳곳에 세워진 프랑스 국기를 목격했다. 아쓰마로는 그것에 대해 일기에 "우리나라가 어찌 이를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있겠는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비유, 볼 만하다."라고 적고, 다음은 일본의 차례라고 백인제국주의에 대한 공포심을 드러냈다. 당시 해외 유학을 한 사람은 서양 숭배주의자가 되거나, 반대로 공포심에서 국수주의자가 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아쓰마로는 후자였다.

2. 2. 정치 활동

메이지 유신 이후, 고노에 가문은 귀족 계급에서 벗어나 새로운 화족 제 아래에서 공작(公爵, koshaku) 작위를 받았다. 1885년부터 1890년까지 고노에는 유럽을 방문하여 독일본 대학교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그는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1895년에는 가쿠슈인 원장이 되었다.[2]

이후 고노에는 귀족원 의장으로 재임하며, 1896년 10월 3일부터 1903년 12월 4일까지 제10회에서 제18회까지의 회의를 주재했다. 1903년부터 그는 추밀원 의원을 겸임했다.[2]

국내적으로 고노에는 일본의 정치 무대를 계속 지배했던 문벌 정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외교 정책과 관련하여 고노에는 범아시아주의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청일 전쟁 이후 일본과 중국 간의 상호 이해와 관계 개선을 촉진하는 東亜同文会|Toa Dobunkai중국어라는 범아시아 정치 운동을 설립했다. 이 학회는 1900년 난징에 東亜同文書院|Toa Dōbun Shoin중국어이라는 대학을 설립했고, 1901년 상하이로 이전했다. 이 대학은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배우고 싶어하는 일본 학생들을 모집했으며, 일본에서 고등 교육을 받으려는 중국 학생들을 위해 도쿄에 학교를 후원했다(이 학교의 후신은 아이치 대학|愛知大学|Aichi Daigaku일본어이다).[2] 이 학회는 또한 학술 저널과 11,00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인 『중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책』을 출판했다. 두 학교 졸업생들은 언어 능력과 중국에 대한 심층적인 지식 때문에 일본 군부, 일본 비밀 정보 기관 및 초국수주의 단체에서 매우 선호되었다. 이 졸업생들 중 많은 수가 1930년대에 만주국 정부에서 일했다.[2]

1903년 8월, 고노에는 러시아 제국에 대해 강경 외교 정책을 추진하는 対露同志会|Tairo Dōshikai일본어를 설립했는데, 이는 러시아가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의 독립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고노에는 개인적으로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할 것을 촉구했지만, 1904년 말 러일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사망했다.[2]

1890년에 귀국하여 같은 해 귀족원이 발족하여 공작이었기에 무투표로 의원이 되었다. 의장인 이토 히로부미 백작을 대신하여 임시 의장을 맡아 회기 대부분의 의장직을 대행했다.[6] 원내 회파로서 동지회를 결성했다. 이듬해인 1891년에 삼요회로 개칭하고, 같은 해에 월요회도 설립하여 동지를 모았다. 월요회는 잠시 후 자연 소멸했지만, 아쓰마로는 같은 오섭가 출신인 니조 모토히로 등과 함께 삼요회에 속해 타니 간죠 등이 결성한 간화회와 공동 보조를 취하며 귀족원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 후에 삼요회가 쇠퇴하자 아사히 클럽과 합병, 마찬가지로 활동이 저조해진 간화회와도 합병하여 새롭게 결성한 토요회로 옮겨 활동을 계속하며 점차 정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6] 귀족원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정당 정치가는 되지 않고 당리당략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6] 시라야나기 슈코에 따르면, 무사 계급 출신이 자칫 노골적인 이기주의를 보이는 데 반해, 공가 계급 출신인 그는 국가적 견지에서 진퇴했다고 한다.[6] 메이지 천황은 내명을 통해 시종장을 거쳐 아쓰마로에게 의견이 있으면 무엇이든 임의로 주소할 것을 명했다.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황실과 고노에가의 특별한 관계 및 아쓰마로의 탁월한 식견이 평가된 것에 의한 것이다.[6]

1891년 오쓰 사건으로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가 습격당했을 때 귀족원을 대표하여 황태자를 문병한 후, 각료 문책 운동을 일으켰다.[6]

1892년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여, 병으로 퇴임하는 1903년까지 재임했다. 1895년에는 가쿠슈인 원장이 되어 화족 자제 교육에 힘썼다. 그 활발한 정치 활동은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지만, 수입은 귀족원 의장(공작은 귀족원 의원으로서 무급)과 가쿠슈인 원장으로서의 급여뿐이었기 때문에 항상 빚을 지고 있었다.[6]

제1차 마쓰카타 내각가바야마 스케노리 해군대신의 "만용 연설"을 둘러싸고 분규, 공전된 중의원해산 총선거에서는, 시나가와 야지로 내무대신이 주도한 선거 간섭으로 민당 측에 사망자 25명, 부상자 388명이 발생하는 참사가 발생했고, 아쓰마로는 이에 대해 정부의 자세를 추궁했다. 또한 정당에 대해서도 엽관주의로 흐르면 그것은 단순한 도당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후,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 야마가타 아리토모 내각, 이토 히로부미 내각 등으로부터 입각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했다.[6]

2. 3. 아시아주의 활동

메이지 유신 이후, 고노에 아쓰마로는 범아시아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청일 전쟁 이후 일본과 중국 간의 상호 이해와 관계 개선을 위해 東亜同文会|동아동문회일본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2] 이 단체는 1900년 난징에 東亜同文書院|동아동문서원일본어이라는 대학을 설립했고, 1901년 상하이로 이전했다. 이 대학은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배우고 싶어하는 일본 학생들을 모집했으며, 일본에서 고등 교육을 받으려는 중국 학생들을 위해 도쿄에 학교를 후원했다(이 학교의 후신은 아이치 대학|愛知大学|아이치 대학일본어이다).[2]

1893년에는 동방협회의 부회장에 취임했다.[7] 청일 전쟁 이후 서구 열강이 조차권 등으로 중국 분할 움직임을 보이자 위기감을 느꼈다. 1898년 1월 잡지 『태양』에 기고한 글에서 "최후의 운명은 황인종과 백인종의 경쟁이며, 이 경쟁 아래에서는 지나인도 일본인도 함께 백인종의 원수로서 인정받는 지위에 서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일본과 중국은 동문동종임을 강조하며 동아동문회를 설립했다. 동아동문회는 흥아회, 동아회 등 여러 단체를 흡수하여 아시아주의 대동 단결 운동을 꾀했고, 캉유웨이와의 회담에서는 아시아 먼로주의를 주장했다.

동아동문회는 아시아주의적 색채가 강한 입장에 입각하여 중국, 조선의 보호와 일본의 권익 보호를 위해 외무성, 군부와 긴밀히 협력했다. 1900년에는 난징 동문서원 (후의 동아동문서원, 그 후신 아이치 대학)을 설립하는 등 대중 정치·문화 활동을 추진했다. 또한, 청조 내에서 강한 권력을 가진 지방 장관 류쿤이 (량장 총독)나 장즈둥 (후광 총독) 등에게도 독자적으로 접근, 청일 간의 연계를 제안했다.

1900년 6월, 중국 화북과 만주 (현재의 중국 동북부)를 중심으로 의화단의 난이 발생하자,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게 되었다. 아쓰마로는 이토 히로부미 등 정부 고관들에게 러시아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할 것을 제안했지만, 대러시아 융화파인 이토는 응하지 않았다. 아쓰마로는 이누카이 쓰요시, 도야마 미쓰루 등과 함께 국민동맹회를 결성하여 대러시아 주전론을 제창하며 러시아와의 개전에 나서지 않는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1903년 8월, 고노에는 러시아 제국에 대해 강경 외교 정책을 추진하는 対露同志会|대러동지회일본어를 설립했는데, 이는 러시아가 중국, 한국, 그리고 일본의 독립에 위협이 된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고노에는 개인적으로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할 것을 촉구했지만, 1904년러일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사망했다.[3]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고노에 타다후사
어머니시마즈 미츠코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 시마즈 히사나가의 딸
양아버지고노에 타다히로
전처히로코마에다 요시야스의 다섯째 딸, 1869년 - 1891년
장남고노에 후미마로귀족원 의장, 내각총리대신, 공작
후처사다코마에다 요시야스의 여섯째 딸, 1871년 - 1945년
장녀타케코오야마 카시와 부인, 공작
차남고노에 히데마로음악가, 귀족원 의원, 자작
삼남고노에 나오마로가악 연주가・연구자
사남타다마로미즈타니가와 가문 계승자, 가스가타이샤궁사, 귀족원 의원, 남작


4. 기타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2005
[2] 웹사이트 移転しました:愛知大学東亜同文書院大学記念センター http://www.aichi-u.a[...]
[3] 간행물 官報 1904-01-06
[4] 서적 薩藩維新秘史
[5]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上
[6] 서적 近衞篤麿のこと : 私の欽仰する近世人
[7] 논문 東邦協会についての基礎的研究
[8] 서적 「七博士」 と日露開戦論 1998
[9] 서적 『信州の人脈(上)』
[10] 서적 事典有名人の死亡診断 近代編 吉川弘文館 2010
[11] 기타 近衛篤麿 http://www.jacar.arc[...] 아시아역사자료센터
[12] 간행물 官報 1904-01-06
[13] 서적 われ巣鴨に出頭せず
[14] 기타 近衛篤麿 http://www.jacar.arc[...] 아시아역사자료센터
[15] 간행물 官報 1884-07-08
[16] 간행물 官報 1903-12-29
[17] 간행물 官報 1900-06-11
[18] 간행물 官報 190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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