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막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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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막 운동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에도 막부의 지배에 반대하여 일어난 정치 운동이다. 유럽 열강의 침략과 쇄국 체제에 대한 반발, 존황 사상의 대두 등이 배경이 되었으며,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번 등이 주도했다. 삿초 동맹을 통해 세력을 결집하고, 대정봉환과 보신 전쟁을 거쳐 막부를 몰락시키고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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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말 -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1868년부터 188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 경제, 사회의 급격한 개혁으로, 도쿠가와 막부 붕괴 후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폐번치현, 징병제, 학제 개혁, 서구 문물 수용 등을 통해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이끌었으나 사회적 혼란과 불평등을 야기하여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는 시기이다. - 막말 - 공무합체
공무합체는 1850년대 일본에서 막부와 조정의 협력을 통해 외세에 대응하고 국론을 통일하려던 정치적 시도였으나, 존왕양이 운동과 다이묘들의 반대에 부딪혀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으로 실패했다. - 에도 시대 - 폐번치현
폐번치현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봉건적인 번 제도를 해체하고 현 제도를 도입하여 중앙 집권화와 재정 안정을 목표로 실시한 개혁으로, 1871년 칙령을 통해 260여 개의 번을 3부 302현으로 개편하고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현령을 임명하여 현재 일본 행정 구역 체계의 기반이 되었다. - 에도 시대 - 사가번
사가번은 히젠국을 지배하며 사가성을 번청으로 둔 번으로,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실권을 장악한 후 성립되었고, 에도 시대 나가사키 경비 부담 대신 산킨코타이 단축 특혜를 받았으며, 막말에는 나베시마 나오마사의 주도로 근대화를 추진, 메이지 유신에는 삿초토히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도막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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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명칭 | |
일본어 명칭 | 倒幕運動 (도바쿠 운도) |
로마자 표기 | Tōbaku undō |
다른 명칭 | 왕정복고 (王政復古, 오세이후코) |
원인 | |
주요 원인 | 에도 막부의 쇠퇴와 존왕양이 사상의 확산 |
목표 | |
주요 목표 | 에도 막부 타도 및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부 수립 |
기간 | |
시기 | 1860년대 ~ 1869년 |
주요 사건 | |
주요 사건 | 사쓰마 번, 조슈 번 등 반 막부 세력의 규합 보신 전쟁 (戊辰戦争) 왕정복고 대호령 (王政復古の大号令) 오우에쓰 열번 동맹 (奥羽越列藩同盟) |
주요 인물 | |
막부 측 | 도쿠가와 요시노부 (徳川慶喜)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松平容保) 히지카타 도시조 (土方歳三) |
반 막부 측 | 사이고 다카모리 (西郷隆盛)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 (木戸孝允) 이와쿠라 도모미 (岩倉具視) |
결과 | |
주요 결과 | 에도 막부 멸망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부 수립 |
영향 | |
주요 영향 | 일본의 근대화 서양 문물 수용 입헌군주제 확립 제국주의 팽창 |
2. 역사적 배경
에도 시대에는 일본의 고전 연구 등을 하는 국학이 발달하여 왕정복고와 무가 정권 비판의 흐름이 생겼다. 같은 시기, 외국 배의 내항도 빈번해져, 1853년 (가영 6년) 미국의 매튜 페리나 러시아 제국의 예피미 푸챠틴 등이 내항하여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국 에도 막부는 1858년 (안세이 5년) 여러 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개국을 결정했다.[1]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존왕양이파 공가들이 우세했기 때문에, 칙허를 기다리지 않고 조인한 조약은 무효라며 막부와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를 강하게 비난했다. 이 때문에 조정과 막부 사이의 긴장이 높아져 안세이의 대옥(같은 해)이나 이이 나오스케 암살(1860년)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1]
이에 막부는 권력 재구축을 위해 공무합체 정책을 추진, 1862년(분큐 2년) 런던 각서를 체결하는 등 개국 연기를 결정했다. 또한 외국 세력도 조약 체결 시 조정의 칙허를 요구했기 때문에, 천황과 조정의 권위가 다시 높아졌다.[1]
한편, 재야의 도막파 지사들은 수호학의 사상적 영향 아래 명분론에 입각하여 양이를 단행하지 않는 막부에 대한 토막론을 형성했다.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길지스케), 오쿠보 도시미치, 고마쓰 기요카도,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 히로사와 사네오미, 도사번의 다케치 한페이타, 요시무라 도라타로, 그리고 공가 이와쿠라 도모미 등 도막파들은 왕정복고와 쇄국 유지를 구상하며 활동했다.[1]
2. 1. 에도 시대의 사회·정치적 상황
에도 시대에는 일본의 고전 연구 등을 하는 국학이 발달하여 왕정복고 및 무가 정권 비판의 흐름이 생겼다.[1] 같은 시기, 외국 배의 내항도 빈번했다.[1] 1853년(가영 6년) 미국의 매튜 페리나 러시아 제국의 예피미 푸챠틴 등이 내항하여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하자, 에도 막부는 1858년(안세이 5년) 여러 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개국을 결정했다.[1]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존왕양이파 공가들이 우세했기 때문에, 칙허를 기다리지 않고 조인한 조약은 무효라며 막부와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를 엄하게 비난했다.[1] 이 때문에 조정과 막부 사이의 긴장이 높아져 안세이의 대옥(같은 해)이나 이이의 암살(1860년)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1]
이에 막부는 권력 재구축을 위해 공무합체 정책을 추진, 1862년(분큐 2년) 런던 각서를 체결하는 등 개국 연기를 결정했다.[1] 또한 외국 세력도 조약 체결 시 조정의 칙허를 요구했기 때문에, 천황과 조정의 권위가 부활하게 되었다.[1]
2. 2.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
1853년(가영 6년) 미국의 매튜 페리와 러시아 제국의 예피미 푸챠틴 등이 내항하여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1] 막부는 1858년(안세이 5년) 여러 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개국을 결정했다.[1]2. 3. 존왕양이 운동의 대두
에도 시대에 일본의 고전 연구 등을 하는 국학이 발달하면서 왕정복고와 무가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흐름이 나타났다.[1] 같은 시기에 외국 선박의 내항이 잦아졌다.[1] 1853년(가영 6년) 미국의 매튜 페리와 러시아 제국의 예피미 푸챠틴 등이 내항하여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1] 이에 에도 막부는 1858년(안세이 5년) 여러 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개국을 결정했다.[1]그러나 당시 조정은 존왕양이파 공가들이 우세했기 때문에, 칙허 없이 조인된 조약은 무효라며 막부와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를 강하게 비난했다.[1] 이로 인해 조정과 막부 사이의 긴장이 높아져 안세이의 대옥(같은 해)이나 이이 나오스케 암살(1860년)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1]
이에 막부는 권력 재구축을 위해 공무합체 정책을 제시하고, 1862년(분큐 2년) 런던 각서를 체결하는 등 개국 연기를 결정했다.[1] 또한 외국 세력도 조약 체결 시 조정의 칙허를 요구했기 때문에, 천황과 조정의 권위가 다시 높아졌다.[1]
한편, 재야의 도막파 지사들은 수호학의 사상적 영향 아래 명분론에 입각하여 양이를 단행하지 않는 막부에 대한 토막론을 형성했다.[1]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길지스케), 오쿠보 도시미치, 고마쓰 기요카도,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가쓰라 고고로), 히로사와 사네오미, 도사번의 다케치 한페이타, 요시무라 도라타로, 그리고 공가 이와쿠라 도모미 등 도막파들은 왕정복고와 쇄국 유지를 구상하며 활동했다.[1]
3. 도막 운동의 전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는 200년 이상 지난 후 다이묘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고, 이 전투에서 비롯된 원한은 도막 운동의 동력이 되었다.[1]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 열강의 침략이 동아시아에 미치면서, 청나라는 아편 전쟁으로 홍콩을 잃었고, 일본에서는 러시아의 아담 락스만 내항(1792년)과 같은 외국과의 통상 요구, 페이튼 호 사건(1808년), 골로브닌 사건(1811년) 등 마찰과 분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은 쇄국 체제 하의 평화를 지키려는 조양이동(朝攘夷動)으로 이어졌다.
1841년 덴포 개혁이 시작되면서, 외양 다이묘들 중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히젠 번 등이 번정 개혁에 성공했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도막 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흑선 내항으로 상징되는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준 막부는 현실적인 해결책으로 개국을 선택했다. 조정은 조이(攘夷) 의지를 보였으나, 고메이 천황의 찬동 여부는 의견이 분분하다.
에도 후기, 국학에서는 "외래 종교 전래 이전의 일본인 고유의 생각"이라는 발상이 나타났다. 이는 료칸의 계어 "즐겨 당나라 말을 쓴다"에서 나타나는 사회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천황 중심의 존황 사상으로 이어졌다. 외압이 커지면서 존황 사상은 더욱 높아졌고, 정치 중심이 교토로 이동했다.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상경할 때 교토의 치안 악화를 우려하여 로시구미가 결성되었고, 이 중 교토에 남은 파가 신선조를 결성하여 헌병과 같은 역할을 했다.
조정의 조이(攘夷)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막부는 형식적인 조이 명령을 여러 차례 내렸다. 조슈 번은 시모노세키 전쟁을 일으켰으나, 영국, 프랑스, 란, 미국의 사국 연합에 대패하여 포대를 빼앗기고 영지에 침입당했다. 사쓰마 번은 사영 전쟁에서 인적 손실은 적었지만, 가고시마 성 아래 10분의 1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사쓰마 번은 사영 전쟁을 통해 조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개국으로 전환하여 번력 강화와 선진 기술 도입에 힘썼다. 조슈 번은 시모노세키 전쟁 후에도 존황론을 바탕으로 조이를 유지했으나, 1865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 고메이 천황이 칙허를 내리면서 존황과 조이는 결합되지 못하고 조이의 힘은 약해졌다. 도사 번의 사카모토 료마 등의 중재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화해하고 삿초 동맹을 맺었으며, 이후 서쪽의 여러 번이 도막을 위해 결집했다.
조슈 번은 속론당에 의해 일시적으로 막부에 공순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그 전후로는 반막부 자세를 유지했다. 사쓰마 번과 도사 번 등은 처음에는 공무합체와 도쿠가와 가를 의장으로 하는 제후 회의를 목표로 했으나, 이후 막부를 버리고 조슈 번과 손을 잡았다.
1867년 11월 9일, 사쓰마와 조슈에 토막의 밀칙이 내려졌으나(위조 칙서설도 있음), 전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 등의 진언으로 같은 날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단행했다.
3. 1. 삿초 동맹의 결성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에도 막부 말기에 도막 운동의 중심 세력이었다. 두 번은 원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한 외양 다이묘 출신으로, 막부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19세기 중반, 제국주의 열강의 압력으로 일본이 개국하게 되면서,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서양의 군사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사쓰마번은 사영 전쟁에서,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서양 열강에게 패배하면서, 조이(攘夷), 즉 외국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두 번은 개국으로 노선을 전환하고, 서양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번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조슈번은 존황론을 기반으로 조이(攘夷)를 계속 주장했지만, 1865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 고메이 천황이 칙허를 내리면서 존황과 조이는 맺어지지 않게 되었고, 조이의 힘은 잃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사번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가 중재에 나서,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1866년 삿초 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는 오랫동안 반목하던 두 번이 도막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손을 잡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삿초 동맹을 통해 서쪽의 여러 번이 도막을 위해 결집했다.
3. 2. 막부의 대응과 몰락
막부는 권력 재구축을 위해 공무합체 정책을 추진했다.[1] 1862년(분큐 2년)에는 런던 각서를 체결하여 개국을 연기했고, 외국 세력도 조약 체결에 조정의 칙허를 요구하면서 천황과 조정의 권위가 부활했다.[1]그러나 1867년(게이오 3년) 1월 고메이 천황이 35세로 붕어하고 14세의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1] 11월 9일, 사쓰마 번과 조슈 번에 토막의 밀칙이 내려졌고, 같은 날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단행했다.[1]
오쿠보 도시미치 등 도막파는 당초 1868년(게이오 4년) 1월 2일 왕정복고를 계획했으나, 도사번의 고토 쇼지로의 요청으로 연기,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발령하여 에도 막부가 소멸했다.[1]
3. 3. 보신 전쟁
1867년 (게이오 3년) 1월 고메이 천황이 35세로 붕어하자, 14세의 메이지 천황이 황위에 취임하였다. 그 후 5월부터 열린 사후 회의는 실패로 끝났다. 11월 9일, 조정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에 토막의 밀칙을 내렸다. 이에 사쓰마 번은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협력하여 조정에서 막부의 영향력을 없애고 조슈 번의 복권에 힘썼다.[1]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러한 도막파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토막의 밀칙과 같은 날인 11월 9일 대정봉환을 단행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등 도막파는 당초 런던 각서의 개시·개국 기일에 근거하여 1868년 (게이오 4년) 1월 2일 왕정복고를 계획했으나, 도사 번 고토 쇼지로의 요청으로 연기되었다. 이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발령되면서 (메이지 정부) 에도 막부는 소멸했고, 도막 운동은 명목상으로는 끝난 듯 보였다.[1]
그러나 막부 지지 세력이 남아 있었고, 1월 26일 교토에서 발생한 도바·후시미 전투를 시작으로 보신 전쟁이 발발했다.[1]
신정부의 기의정이었던 전 에치젠 번 주·마쓰다이라 슌가쿠는 이 싸움을 사쓰마 번과 사막파 간의 사적인 다툼으로 규정하고 정부의 관여에 반대했다. 그러나 기의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와쿠라 도모미는 사막파 정벌에 찬성했고, 정벌군에 긴노 미하타를 하사함으로써 사막파 세력은 조정의 적으로 간주되었다.[1]
5월 3일, 에도 막부의 본거지였던 에도 성이 무혈 개성되었다. 오사카 성에서 에도로 돌아온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정부에 귀순했고, 에도 성은 메이지 정부에 접수되었다. 이로써 도쿠가와 가문의 정치 기구는 소멸했다.[1]
하지만 사막파는 이후에도 도호쿠 여러 번과 함께 고슈나 도호쿠 지방, 에조치 등지에서 조적(朝敵)으로 몰리면서도 항전을 계속하여, 보신 전쟁은 계속되었다.[1]
4. 도막 운동의 주역
에도 시대에는 일본의 고전 연구 등을 하는 국학이 발달하여 왕정복고·무가 정권 비판의 흐름이 생겼다. 같은 시기, 외국 배의 내항도 빈번했다. 1853년(가영 6년) 미국의 매튜 페리나 러시아 제국의 예피미 푸챠틴 등이 내항하여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에도 막부는 1858년(안세이 5년) 여러 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 개국을 결정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존왕양이파 공가들이 우세했기 때문에, 칙허를 기다리지 않고 조인한 조약은 무효라며 막부와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를 비난했다. 이 때문에 조정과 막부 사이의 긴장이 높아져 안세이의 대옥(같은 해)이나 이이의 암살(1860년)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막부는 권력 재구축을 위해 공무합체 정책을 추진, 1862년(분큐 2년) 런던 각서를 체결하는 등 개국 연기를 결정했다. 외국 세력도 조약 체결 시 조정의 칙허를 요구했기 때문에, 천황과 조정의 권위가 부활했다.
한편, 재야의 도막파 지사들은 수호학의 사상적 영향 아래 명분론에 입각하여 양이를 단행하지 않는 막부에 대한 토막론을 형성했다.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길지스케), 오쿠보 도시미치, 고마쓰 기요카도, 조슈번의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 히로사와 사네오미, 도사번의 다케치 한페이타, 요시무라 도라타로, 이와쿠라 도모미 등은 왕정복고와 쇄국 유지를 구상하며 활동했다.
공무합체를 추진하던 아이즈번이나 사쓰마번 등 공무합체파(사막파)는 토막파(존왕양이파) 진압을 꾀했다. 사쓰마번은 덴추구미의 변(1863년), 긴몬의 변(1864년) 등에서 토막파를 진압했다. 조슈번은 1863년(분큐 3년) 5월 시모노세키 사건을 일으킨 후 조적으로 교토에서 추방되었다(8월 18일의 정변).
조슈번은 1864년(겐지 원년) 5월 다시 시모노세키 전쟁을 일으켰지만, 6월 제1차 조슈 정벌 이후 사막파(속론파)가 번정을 잡아 도막 운동은 둔화되었다. 그러나 다카스기 신사쿠 등의 정의파는 다시 사막파를 타도했다. 1865년(게이오 원년) 영국 글라버 상회에서 사쓰마번 명의로 증기선 군함 유니언 호를 구입하는 등 무력을 축적하며 도막 구상을 유지했다.
사쓰마번은 1863년 사영 전쟁에서 영국 기술력을 경험하고, 막정 개혁 방침이 막부와 달라 1866년(게이오 2년) 3월 7일 사카모토 료마 중재로 조슈번과 삿초 동맹을 맺었다. 조슈번은 6월 막부의 제2차 조슈 정벌군을 격퇴하여 권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1867년(게이오 3년) 1월 고메이 천황이 35세로 붕어하고, 14세 메이지 천황이 즉위했다. 5월부터 열린 사후 회의는 실패하고, 조정은 11월 9일 사쓰마번과 조슈번에 토막의 밀칙을 내렸다. 사쓰마번은 이와쿠라 도모미 등과 협력하여 조정에서 막부 영향력 배제와 조슈번 복권에 힘썼다.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도막파 움직임에 대해 11월 9일 대정봉환을 단행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등 도막파는 1868년(게이오 4년) 1월 2일 왕정복고 예정이었으나, 도사번 고토 쇼지로 요청으로 연기,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발령했다(메이지 정부). 에도 막부 소멸로 도막 운동은 명목상 끝난 듯 보였다.
그러나 막부 지지 세력이 남아 1월 26일 교토에서 도바·후시미 전투를 시작으로 보신 전쟁이 발발했다. 신정부 기의정이었던 전 에치젠번 주 마쓰다이라 슌가쿠는 사쓰마번과 사막파 간 사투라며 정부 관여에 반대했지만, 이와쿠라 도모미는 정벌군에 긴노 미하타를 주어 사막파 세력을 조정의 적으로 만들었다.
5월 3일 에도성이 무혈 개성하고, 오사카성에서 에도로 돌아온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정부에 귀순, 에도성은 메이지 정부에 접수되었고 도쿠가와 가문의 정치 기구는 소멸했다. 다만, 사막파는 도호쿠 여러 번과 함께 고슈, 도호쿠 지방, 에조치 등에서 항전을 계속하여 보신 전쟁은 이어졌다.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창설을 결정짓고, 200년 이상 각 다이묘들에게 교훈을 남겼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원한은 도막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 열강의 침략은 동아시아에도 다가왔다. 중국은 영국과 아편 전쟁으로 홍콩을 빼앗겼고, 일본은 러시아 아담 락스만 내항(1792년) 등 외국 통상 요구와 페이튼 호 사건(1808년), 골로브닌 사건(1811년) 등 마찰이 일어났다.
1841년(덴포 12년) 덴포 개혁 시작 후, 외양 다이묘 중 번정 개혁에 성공하는 번이 나타났다. 도막 주역인 사쓰마·조슈·도사·히젠 번이 대표적이었다.
에도 후기 국학에서 “외래 종교 전래 이전 일본인 고유의 생각”이라는 발상이 일어났다. “일본인 고유”의 종착점은 천황이었고, 외압 증대와 함께 존황 사상도 높아져 정치 중심이 교토로 이행했다.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상경 시, 교토 치안 악화 우려로 로시구미가 결성되었다. 교토에 남은 파가 신선조를 결성(헌병 역할)했다. 조정의 조이 소원을 무시할 수 없어, 막부는 형식적인 조이 명령을 여러 번 내렸다.
- '''사쓰마번'''은 사영 전쟁 경험으로 조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개국으로 전환하여 번력을 충실하게 하고 선진 기술을 취득하는데 힘썼다.
-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패배하였으나, 이후 존황론을 기반으로 조이를 유지했지만, 1865년(게이오 원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 고메이 천황이 칙허를 내림으로써 존황과 조이는 맺어지지 않게 되었고, 조이의 힘은 잃어버렸다.
- '''도사번''' 사카모토 료마 등의 중재로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화해, 삿초 동맹을 맺었다. 이후 서쪽 여러 번이 도막을 위해 결집했다.
- '''히젠번'''은 막말에 가장 근대화된 번 중 하나였지만, 정국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키며 대정봉환, 왕정복고까지 관망했다. 히젠번의 도막 운동 가담은 삿초도비 중 가장 늦었고, 보신 전쟁에 히젠번 병사가 파견된 이후였다.
4. 1. 사쓰마번
시마즈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는데, 이는 당시 가미가타 지역의 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반성한 사쓰마 번은 이후 독립 왕국과 같은 모습을 띠며 각지에 밀정을 배치하여 정보 수집 능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또한 적측의 밀정이 넘어온 경우에는 막부 관계자라 할지라도 엄격하게 처벌하여 정보 누설을 막고자 했다.사쓰마 번은 흑설탕 사업과 류큐 왕국을 통한 밀무역 사업을 통해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막부 말기에는 서양식 군비를 빠르게 도입할 수 있었다.
4. 2. 조슈번
조슈번에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등 하급 신분 출신 인물들이 도막 운동에 많이 참여했다. 이들은 도막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메이지 신정부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구 조슈번 세력을 일본 근대화와 부국강병의 원동력으로 성장시켰다.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관용도 특기할 만한 점이다. 기헤이타이는 도사번 번주 야마우치 요도가 무사 신분인 고시 계급에 대해 엄격한 차별을 한 것과 달리, 도사 고시보다 훨씬 하층 계급의 사람들을 주력으로 삼았다. 이는 메이지 초기의 사민평등 정책이나 징병제에 따른 국민개병 구상의 근간이 되었다.4. 3. 도사번
야마우치 가문이 도사에 들어올 때, 가케가와성 성주 시대까지의 가신(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의 가계)이나 도사 입봉 전에 오사카낭인을 등용한 자(고토 쇼지로 등의 가계), 조소카베 가문 구신 일부(요시다 도요, 타니 타테키 등의 가계)를 상사로 하고, 도사에 있던 낭당·지사를 향사로 구분했다. 그러나 도사번의 경우, 향사라도 특별한 가계나 공적이 있으면 상사 취급인 백찰로 하는 탄력적인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타케치 즈이잔은 조부 대부터 백찰 향사였고, 사카모토 료마의 증조부인 미야지 가문 등도 "촌장→향사→백찰 향사(상사)"로 가계가 올라간 가문이다. 막말기에는 가로격, 중로격, 바마와리격, 고쇼격, 루스이격으로 상사를 구성했다.[1]시바 료타로 등에 의한 역사 소설에서는 "초소카베씨의 신하들은 하사(향사)로 명확하게 신분이 나뉘었고, 오랫동안 신분 차별에 시달렸다"고 묘사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막말에는 토사의 풍요로운 풍토에서 독특하고 호쾌한 이고쏘라는 기질이 생겨,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타니 간죠, 타케치 즈이잔, 사카모토 료마, 나카오카 신타로와 같은 인재를 배출했다.[1]
번의 여론은 토막파와 사막파로 양분되었고, 야마우치 요도도 "취하면 존황, 깨면 사막"이라고 조롱받았다. 그러나 무력 토막을 추진하는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나카오카 신타로의 중재로 사이고 다카모리와 맺은 '''삿초 토막 밀약'''을 승인하고, 번의 군제 개혁, 연병의 근대화를 꾀했다. 한편, 막부에 '''대정봉환'''을 촉구하고 온건하게 도쿠가와씨를 존속시키는 '''삿초 동맹'''도 승인하여, 번내의 토막파·사막파의 공방이 가속되었지만, 대정봉환은 막부의 권위를 단계적으로 깎아내리는 효과를 발휘했다.[1]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요도의 정지를 뿌리치고 삿초 토막 밀약에 기초하여 오전부터 번사 야마다 헤이자에몬, 요시마츠 하야노스케, 야마모토 토하루, 키타무라 시게요리 등이 참전했다. 이로 인해 존황 토막이 결정적이 되었고, 토사 근왕당에서 활약한 향사들은 보신 전쟁에서 신충대에 참가하는 등 화려한 전과를 올렸다.[1] 아이즈 전쟁에서는 아이즈 번의 신분 격차가 심해 서민들이 막부에 불만을 품었고, 관군의 진행을 막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낙성하여 성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가 절에 근신할 때도 배웅하러 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 경험은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 보신 전쟁 종군자들이 메이지 유신 이후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하는 동기가 되었다.[1]
4. 4. 히젠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던 나베시마 가문은 같은 서군이었던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공략한 공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구 영지를 안도받아 35만 7천 석의 히젠번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 지행고는 지번(支藩)과 나베시마・류조지 서류 사가의 영지를 포함한 표고(表高)였으며, 번이 실제로 소유한 실질적인 내고(内高)는 6만 석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번이 지리적으로 나가사키와 가까워 막부로부터 지쿠젠번과 1년 교대로 나가사키 경비를 명령받았는데, 그 부담은 대대로 번 재정에 큰 짐이 되었다. 그 후, 에도 시대 전반에 걸쳐 번 직할령의 확대(1869년 시점에서 내고 )와 중앙 집권화가 이루어졌고,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가 번정 개혁에 착수한 덕분에 번 재정이 겨우 회복되어 막말의 일본에서 산업 혁명을 추진하여 일본 유수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갖추게 되었다.히젠번은 막말에 가장 근대화된 번 중 하나가 되었지만, 정국에 대해서는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고 막부, 조정, 공무합체파(公武合体派) 어느 쪽과도 균등하게 거리를 두며 대정봉환, 왕정복고까지 관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마모토 츠네토모의 구술을 저술한 '무사도는 죽음을 발견하는 것'으로 알려진 『하가쿠레(葉隠聞書)』는 히젠번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번 내에 도막 운동의 기운을 드리우게 했다. 히젠번이 도막 운동에 가담한 것은 삿초도비 중 가장 늦었고, 보신 전쟁에 히젠번 병사가 파견된 이후였다. 즉, 히젠번은 대정봉환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정치력과 군사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이 점은 메이지 정부에 소에지마 타네오미, 에토 신페이, 오쿠마 시게노부 등 다수의 인물이 등용되어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히젠 세력이 중앙에서 삿초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진 한 원인이 되었다.
5. 메이지 유신과 한국
메이지 유신은 한국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그 영향은 복합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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