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국가
1. 개요
독일의 국가는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하고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이 작사한 곡으로, 1922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국가로 공식 선포되었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1절만 사용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1절이 금지되고 3절만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3절만 독일의 국가로 불리며, "통일과 정의와 자유"를 노래한다. 이 곡은 원래 오스트리아 제국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찬송가로도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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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Deutschlandlied독일어" (독일어: '독일의 노래') |
|---|---|
| 부제 | "Das Lied der Deutschen독일어" (독일어: '독일인들의 노래') |
| 별칭 |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독일어" (독일어: '통일과 정의와 자유') |
| 국가 | 독일 |
| 작사 |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 |
| 작사 연도 | 1841년 |
| 작곡 |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
| 작곡 연도 | 1797년 |
| 채택 | 1922년 |
| 폐지 | 1945년 |
| 재채택 | 1952년 |
| 이전 국가 | "신성 로마 제국: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1797–1806)" "독일 제국: Heil dir im Siegerkranz (1871–1918)" "나치 독일: Horst-Wessel-Lied (공동 국가, 1933–1945)" "동독: Auferstanden aus Ruinen (1949–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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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하이든 -
루트비히 판 베토벤
베토벤은 독일의 작곡가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을 연결하는 중요한 인물이며, 교향곡, 피아노 소나타, 현악 사중주곡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고 청력 상실에도 불구하고 창작 활동을 지속했다. -
요제프 하이든 -
미하엘 하이든
미하엘 하이든은 요제프 하이든의 동생으로, 잘츠부르크에서 360곡 이상의 교회 음악과 기악 작품을 작곡했으며 모차르트에게 영향을 주었고, 종교 합창곡, 교향곡, 협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기고 카를 마리아 폰 베버와 안톤 디아벨리 등을 제자로 길러낸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
재통일 이후 독일 -
재통일 이후 독일의 역사
재통일 이후 독일의 역사는 1990년 재통일부터 현재까지 정치, 경제, 사회 변화를 겪었으며, 헬무트 콜, 게르하르트 슈뢰더, 앙겔라 메르켈을 거쳐 현재 올라프 숄츠 총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책과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
재통일 이후 독일 -
독일-폴란드 국경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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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상징 -
독일의 국기
독일 국기는 검은색, 빨간색, 금색 가로 줄무늬 삼색기로, 자유주의와 통일 독일을 상징하며, 1949년 서독과 동독, 그리고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통일 독일의 공식 국기로 채택되었다. -
독일의 상징 -
브란덴부르크 문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에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개선문으로, 독일 최초의 그리스 부흥 양식 건축물 중 하나이며, 도리스식 기둥과 사륜전차상으로 장식되어 프로이센의 번영과 독일 통일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2. 역사
독일 국가의 역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찬가에서 시작된다. 요제프 하이든이 1797년에 작곡한 멜로디에 1841년 시인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이 독일 통일을 염원하며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독일어)〉라는 가사를 붙였다. 이 노래는 1922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공식 국가로 지정되었으나, 나치 독일 시대에는 1절만이 나치즘 선전과 당가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와 함께 불리며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연합국에 의해 금지되었던 〈독일인의 노래〉는 서독에서 논란 끝에 1952년, 민주주의 가치를 담은 3절("통일과 정의와 자유")만 부르는 조건으로 국가 지위를 회복했다. 한편 동독은 별도의 국가인 〈폐허에서 부활하여〉를 사용했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통일 독일의 국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서독의 방식을 따라 3절만이 공식 국가로 확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1. 기원과 초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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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가의 멜로디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이 1797년에 작곡했다. 이 곡은 원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 창설 이후 프란츠 1세)의 생일(2월 12일)을 축하하기 위해 헌정된 곡이었다. 당시 로렌츠 레오폴트 하슈카( Lorenz Leopold Haschka독일어, 1749-1827)가 쓴 〈하느님, 프란츠 황제를 지켜 주시옵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독일어)〉라는 가사가 붙여졌으며, 이는 영국의 국가 "신이여, 국왕 폐하를 지켜주소서"에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 멜로디는 하이든이 1796~1797년에 작곡한 〈황제 사중주〉(Op. 76의 3, 현악 사중주 '황제')의 제2악장 주제이기도 하다.
이 곡은 황제가 바뀔 때마다 가사의 이름만 바꾸어 불리며,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국 국가로 사용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제국 해체 이후 1929년에 이 곡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국가로 정했지만, 1946년 모차르트가 작곡한 선율을 다듬은 〈산의 나라, 강의 나라〉를 새로운 국가로 채택하였다.
현재 독일 국가의 가사인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독일어)〉는 1848년 독일 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1841년, 민족주의 시인이자 대학교수였던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August Heinrich Hoffmann von Fallersleben독일어)이 하이든의 멜로디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만들었다. 당시 독일 지역은 빈 회의 이후 35개의 군주국과 4개의 자유 도시로 이루어진 독일 연방(Deutscher Bund독일어, 1815–1866)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연방은 통일된 국가라기보다는 군사 동맹에 가까웠고,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등 보수 세력은 칼스바트 칙령(1819) 등을 통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프만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은 소국가 체제(Kleinstaaterei독일어)를 극복하고 통일된 독일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프만은 반체제적인 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쫓겨나 여러 지역을 떠돌던 중, 당시 영국령이었던 헬골란트 섬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으로 가는 배에서 영국 국가 '여왕 폐하 만세'와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연주되는 것을 듣고, 분열되어 통일된 국가도, 국가(國歌)도 없는 독일의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헬골란트 섬에 머무는 동안 그는 독일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며 〈독일인의 노래〉 가사를 썼고, 1841년 9월 4일 함부르크의 출판사 프리드리히 캄페를 통해 초판이 출판되었다.
가사의 첫 구절이자 후렴구인 "독일, 독일, 세상 모든 것 위에 있는 독일이여(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독일어)"는 원래 여러 개의 영방 국가로 나뉘어 있던 당시 독일의 현실을 넘어, 통일된 독일이라는 이상을 최우선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독일인의 단결과 통일 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독일인의 노래〉는 1841년 10월 5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횃불 행렬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불렸지만, 한동안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공식 석상에서 처음 불린 것은 1890년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에 따라 헬골란트 섬이 독일 영토가 되었을 때였다.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었을 때도 이 노래 대신 『라인강의 파수꾼』(Die Wacht am Rhein독일어)이나 『황제 폐하 만세』(Heil dir im Siegerkranz독일어)가 비공식 국가처럼 사용되었다.
하지만 가사 내용, 특히 1절의 영토 범위(마스강에서 메멜강까지, 에치강에서 벨트 해협까지)는 작사 당시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이 지역들은 당시 독일 연방의 경계를 넘어서는 곳으로,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덴마크 등의 영토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 랑게마르크 전투에서 젊은 독일 병사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돌격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독일의 초기 국가로는 작자 미상의 〈오이겐 왕자, 고귀한 기사(Prinz Eugen, der edle Ritter독일어)〉(1683년경 작곡) 등 여러 노래가 있었으나, 마침내 1922년 8월 11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독일인의 노래〉를 독일의 공식 국가로 선포했다.
2.2.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
제1차 세계 대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인 1922년 8월 11일, 사회민주당 소속의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독일어)를 국가로 공식 선포했다. 이는 19세기 자유주의 혁명가들이 사용했던 흑·적·금 삼색기를 국기로 채택한 것에 대한 정치적 타협의 일환으로, 보수 우파에게 민족주의적 색채의 곡을 국가로 지정한 측면이 있었다. 에베르트 대통령은 국가 제정 당시부터 3절("통일과 정의와 자유")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며, 이 구절이 독일의 분열과 억압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상징한다고 강조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잠시 4절 가사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곧 잊혔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국가 사용 방식은 크게 변경되었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독일인의 노래〉 1절(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독일어)만이 국가로 인정되었으며, 연주 시에는 반드시 나치당의 당가이자 SA의 노래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Horst-Wessel-Lied독일어, 깃발을 높이 올려라)가 뒤따라 연주되었다. 2절과 3절의 연주는 금지되었다.
나치 정권은 1절 가사를 본래의 통일 염원에서 벗어나, 독일 민족의 타 민족에 대한 우월성과 영토 팽창 야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왜곡하여 해석하고 선전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1절은 나치즘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용이 금지되고 비판받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 방식의 국가는 1945년 5월 7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나치 독일의 국가였던 〈독일인의 노래〉는 연합국에 의해 금지되었다. 나치 시대에 1절만 사용되고 당가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와 함께 불렸던 전례 때문에, 특히 1절은 나치의 팽창주의와 우월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연합군은 이 노래를 금지하고 처벌 대상으로 삼았으나, 독일인들의 노래에 대한 애착은 강했으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집회에서 불리기도 했다.
1949년 건국된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은 한동안 공식 국가가 없었다. 외교 행사 등에서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중 〈환희의 송가〉나 카니발 노래인 〈Trizonesien-Song〉 등이 임시로 사용되었다. 초대 대통령 테오도어 호이스는 새로운 민주 국가에 걸맞은 새 국가 제정을 원했고, 시인 루돌프 알렉산더 슈뢰더와 작곡가 헤르만 로이터에게 의뢰하여 〈Land des Glaubens, deutsches Land독일어〉을 만들었으나 국민적 호응을 얻지 못했다. 여론 조사에서는 대다수 국민이 〈독일인의 노래〉를 다시 국가로 사용하길 원했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독일인의 노래〉 부활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1950년 의회에서 공개적으로 3절을 불렀고, 1951년 자신의 생일 기념식에서도 연주를 관철시키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1952년 5월, 아데나워 총리와 호이스 대통령은 서신 교환을 통해 〈독일인의 노래〉를 국가로 인정하되, 공식 석상에서는 3절만 부르기로 합의했다. 1절은 나치에 의해 왜곡된 해석과 1841년 당시의 통일 염원이 전후 독일 영토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 때문에, 2절은 술과 여자를 찬미하는 내용이 국가로서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한편, 동독(독일 민주 공화국)은 1949년 자체 국가인 〈폐허에서 부활하여〉를 제정했다. 그러나 가사에 "독일, 통일된 조국"이라는 구절이 있어, 동독이 통일을 포기한 1972년경부터는 공식 석상에서 가사 없이 곡조만 연주되었다.
서독에서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독일 보수주의자들이 세 연 전체를 국가로 복원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기민련(CDU)은 학생들에게 세 연 전체를 가르치려 했고, 헤센 주의 CDU 정치인 크리스티안 바그너는 모든 고등학생이 세 연을 암기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또한 국가로 인정된 것이 3절뿐인지 노래 전체인지에 대한 법적 논쟁이 있었으나, 1990년 3월 연방 헌법 재판소는 3절만이 형법상 국가 모독죄의 보호 대상이 된다고 판결하여 논쟁을 종결시켰다.
1990년 통일 이후 새로운 국가 제정에 관한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서독의 국가가 통일 독일의 국가로 계승되었다. 1991년 11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과 헬무트 콜 총리는 서신 교환을 통해 〈독일인의 노래〉 3절이 통일 독일의 국가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3절의 첫 구절인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독일어"는 독일의 국가 모토로 널리 인식되지만 공식적으로 지정된 것은 아니다. 이 문구는 독일 연방군 군인들의 벨트 버클과 유로 동전 등에 새겨져 있다. 현재까지 독일에 국가에 관한 정식 법률은 제정되어 있지 않다.
3. 가사
현재 독일의 공식 국가는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독일어)의 3절 가사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1841년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이 당시 영국령이었던 헬골란트 섬에서 작성했다. 그는 요제프 하이든이 179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를 위해 작곡한 '신이여, 황제 프란츠를 보호하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독일어)의 멜로디에 맞춰 이 시를 썼다. 이 멜로디는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가로도 사용되었다.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이 가사를 쓸 당시 독일은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가사에는 통일된 독일에 대한 열망과 자유주의적 가치가 담겨 있다. 특히 1절의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독일어"는 개별 국가를 넘어선 통일 독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였으나, 훗날 나치 독일 시대에 민족 우월주의와 영토 확장주의적으로 왜곡되어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현재 독일에서는 1절과 2절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며, 민주주의적 가치인 "통일과 정의와 자유"(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독일어)를 노래하는 3절만이 국가로 불린다.
다음은 '독일인의 노래' 전체 가사와 한국어 번역이다. 현대 독일에서는 3절만이 공식 국가로 사용된다.
아래는 요제프 하이든의 곡조와 '독일인의 노래' 3절 가사가 함께 표시된 악보이다.
\relative c'
{ \key es \major \time 4/4
\partial 2 \repeat volta 2 { es4. f8 | g4 f as g | f8 (d) es4 c' bes | as g f g8 (es) | bes'2 }
f4 g | f8 (d) bes4 as' g | f8 (d) bes4 bes' as | g4. g8 a4 a8 (bes) | bes2
\repeat volta 2 { es4. d8 | d (c) bes4 c4. bes8 | bes (as) g4 f4. g16 (as) | bes8 [(c)] as [(f)] es4 g8 (f) | es2 } }
\addlyrics {
<<
{ Ei -- nig -- keit und Recht und Frei -- heit
für das deut -- sche Va -- ter -- land!
}
\new Lyrics
{ Da -- nach lasst uns al -- le stre --ben
brü -- der -- lich mit Herz und Hand! }
>>
Ei -- nig -- keit und Recht und Frei -- heit
sind des Glü -- ckes Un -- ter -- pfand.
Blüh im Glan -- ze die -- ses Glü -- ckes,
blü -- he, deut -- sches Va -- ter -- land!
}
--
--
--
3.1. 1절 (현재 사용되지 않음)
현재 독일에서는 3절만이 공식적인 국가로 불리지만, 과거에는 1절과 2절도 함께 불렸다. 1절의 가사와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 독일어 가사 | 한국어 번역본 | |||
|---|---|---|---|---|
| {{lang|de|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 Über alles in der Welt! Wenn es stets zu Schutz und Trutze Brüderlich zusammenhält! Von der Maas bis an die Memel, Von der Etsch bis an den Belt,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 Über alles in der Welt!|} | }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폐허가 된 독일로 돌아와 "Kinderhymne독일어" (어린이 찬가)라는 다른 버전의 가사를 썼고, 한스 아이슬러가 같은 해에 곡을 붙였다. 이 노래는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어느 정도 인기를 얻었으며, 일부 저명한 독일인들은 이 "반(反) 찬가"를 공식 국가로 지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반 찬가"의 독일어 원문은 독일인들이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며 다른 민족을 돕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악수하듯 독일인과도 기꺼이 악수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일 작곡가 막스 레거는 1915년에서 1916년 사이에 작곡한 오르간 작품집 《일곱 개의 소품》, 작품 145의 마지막 부분에서 당시 애국가였던 "독일인의 노래"를 인용했다.
아프리카너스어 애국가인 "아프리카너스 동포들"은 "독일인의 노래"와 동일한 멜로디와 유사한 구조의 가사를 가지고 있다. 세 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 노래는 아프리카너스 고향의 경계 설정, 어머니, 딸, 태양, 밭의 중요성, 그리고 통일, 정의, 자유의 중요성을 노래한다.
국가와 찬송가가 같은 멜로디를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 문제도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1905년부터 1938년경까지 이 멜로디를 찬송가(존 뉴턴의 가사를 편곡한 버전)로 불렀다. 나치 독일의 탄압이 심해지던 1933년 6월, 독일 신자들이 베를린에서 개최한 항의 집회에서 개회 노래로 이 찬송가를 불렀는데, 이는 후에 '나치를 회유하기 위해 국가의 곡을 불렀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호와의 증인 측은 '1905년부터 찬송가로 불러온 곡이 나중에 독일 국가로 지정된 것'이라고 반론했다. 또한, 비평가들이 '교단의 독일어판 노래집에 처음 게재된 것은 1928년으로, 국가 지정(1922년)보다 늦다'고 지적했지만 (참조: 독일어 사이트), 여호와의 증인 측은 독일 국가가 나치 집권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점, 당시 정부의 감시 하에 활동했다는 점, 번역이 타자기 등을 이용한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등을 들어 이러한 비난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5.2. 기타
독일 국가의 멜로디는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황제 찬가에서 유래했으며, 독일 국가로 공식 지정되기 이전부터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 찬송가: 1802년경 영미권에서 'Austria'라는 이름의 찬송가 곡조로 채택되어 사용되었는데, 이는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이 독일 국가 가사를 쓰기 전의 일이다. 일본에서도 일본기독교단 찬송가 (1954년판) 194번 '영광에 넘치는'으로 사용되었다. 이 찬송가의 원 가사는 1779년 존 뉴턴이 작사한 것으로, 신이 다스리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본래 황제 찬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비록 일본기독교단의 최신 찬송가집(찬송가 21)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본복음연맹 신성가(2001년판) 145번, 구세군가(1997년판) 362번·367번 등에서는 여전히 이 멜로디를 사용하고 있다.
* [[여호와의 증인]] 관련 논란: 여호와의 증인은 1905년부터 1938년경까지 존 뉴턴의 가사를 편곡한 버전을 찬송가로 불렀다. 나치 정권의 탄압이 심해지던 1933년 6월, 독일 신자들이 베를린에서 개최한 항의 집회에서 개회 노래로 이 찬송가를 불렀는데, 이로 인해 후에 '나치를 회유하기 위해 국가의 곡을 불렀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호와의 증인 측은 이에 대해 1905년부터 찬송가로 불러온 곡이 나중에 독일 국가로 지정된 것일 뿐이라고 반론했다. 또한, 교단의 독일어판 노래집에 해당 곡이 처음 실린 것이 1928년으로, 독일 국가 지정 연도인 1922년보다 늦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독일 국가는 나치 집권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당시 정부의 감시 하에 있었고 번역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던 점 등을 들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조: 독일어 사이트)
* 대중음악에서의 사용:
* 독일의 음악가 니코는 콘서트에서 종종 국가를 연주했으며, 이를 적군파 지도자였던 안드레아스 바더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그녀는 1974년 발매한 앨범 The End...에 Das Lied der Deutschen독일어 버전을 수록했다.
* 슬로베니아의 인더스트리얼 밴드 라이바흐는 2006년 여러 국가를 편곡한 곡들을 모은 앨범 Volk에서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의 가사를 사용한 "Germania"라는 곡을 발표했다.
* 논란 및 해프닝:
* 영국의 록 가수 피트 도허티는 2009년 11월 28일 뮌헨에서 열린 음악 축제 생중계 도중 나치 시대에 사용된 독일 국가 1절을 불러 관객의 야유를 받았다. 그는 노래를 중단시키려는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던지는 등 논란을 일으켰고, 이후 주최 측의 요구에 따라 11월 30일 사과했다. 그의 홍보 담당자는 스카이 뉴스 웹사이트를 통해 "독일 국가의 역사적 민감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며 "감정을 상하게 했다면 깊이 사과한다"고 밝혔다.
* 2017년 2월 11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테니스 국가대항전 페드컵 미국 대 독일 경기 전 국가 연주에서, 주최 측의 실수로 금지된 1절이 연주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미국 테니스 협회는 즉시 독일 팀과 팬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6. 현대적 사용
1949년 건국 이후 서독은 공식 행사에서 사용할 국가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외교 행사 등에서 국가가 필요했지만, 기본법에는 국기만 명시되었을 뿐 국가는 지정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 중 "환희의 송가"나 심지어 카니발 노래인 "Trizonesien-Song" 등이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52년 4월 29일,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테오도어 호이스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Das Lied der Deutschen독일어"의 세 번째 연만을 공식 행사에서 사용하도록 요청했다. 호이스 대통령은 1952년 5월 2일에 이에 동의했고, 이 서신 교환 내용이 연방 정부 게시판에 게재되면서 "Deutschlandlied독일어"의 세 번째 연이 사실상 서독의 국가가 되었다. 이는 국가 원수가 국가 상징을 정하는 전통적인 권리에 따른 것으로 여겨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연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동독은 자체 국가인 "Auferstanden aus Ruinen독일어"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 노래 가사에 "독일, 통일된 조국"이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어, 동독이 통일을 포기한 1972년경부터는 공식 석상에서 가사 없이 연주되거나 사용이 줄어들었다. 흥미롭게도 "Auferstanden aus Ruinen독일어"의 가사는 약간의 수정만 거치면 "Deutschlandlied독일어"의 멜로디에 맞춰 부를 수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세 연 전체를 국가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기민련(CDU)은 1985년과 1986년에 고등학생들에게 세 연 전체를 가르치려 시도했고, 1989년에는 CDU 소속 정치인 크리스티안 바그너가 헤센주의 모든 고등학생에게 세 연을 암기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통일을 앞둔 1990년 3월 7일,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의 시 중에서 세 번째 연만이 독일 형법 제90a조(국가 및 그 상징 모독죄)에 따라 법적으로 보호받는 국가라고 판결했다. 형법 조항은 국가 모독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지 국가 자체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판결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연은 형법상 보호 대상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1991년 11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과 헬무트 콜 총리는 서신 교환을 통해 통일 독일의 국가로 "Deutschlandlied독일어"의 세 번째 연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로써 세 번째 연이 독일의 유일한 공식 국가임이 명확해졌다.
세 번째 연의 첫 구절인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독일어"는 널리 독일의 국가 표어로 인식되지만, 공식적으로 지정된 적은 없다. 이 문구는 독일 연방군 군인들의 벨트 버클(나치 시대 국방군의 "Gott mit uns독일어" 문구를 대체)과 2 유로 동전 및 과거 독일 마르크 동전 가장자리에 새겨져 있다.
"독일인의 노래" 첫 번째 연은 역사적으로 나치 독일 시대의 국가주의 및 영토 확장주의와 연관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현대 독일 사회에서는 첫 번째 연을 부르는 것이 금기시된다. 독일 법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국내외 공식 행사에서 첫 번째 연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행위로 간주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 논란이 있었다.
* 1974년, 가수 니코는 자신의 앨범 The End...에 세 연 전체를 녹음하여 발표했다.
* 1977년, 독일 팝 가수 하이노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초등학교에서 사용하기 위해 세 연 전체를 포함한 음반을 제작하여 당시 비판을 받았다.
* 2009년, 영국 록 가수 피트 도허티가 뮌헨의 바이에른 방송(BR) 라디오에서 첫 번째 연을 불렀다가 청중의 야유를 받았다. 이후 그의 대변인은 도허티가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했으며 오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발표하며 사과했다. BR 측은 사과를 받아들였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추가 협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 2011년 헝가리에서 열린 카누 스프린트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실수로 첫 번째 연이 연주되어 독일 선수단이 당혹감을 표했다. 당시 유로스포츠는 첫 번째 연이 1952년에 금지되었다고 잘못 보도하기도 했다.
* 2017년 미국 하와이 라하이나에서 열린 페드컵 테니스 대회(안드레아 페트코비치 대 앨리슨 리스크 경기) 환영식에서 미국인 가수가 실수로 첫 번째 연을 불렀다. 이에 독일 테니스 선수들과 팬들은 세 번째 연을 불러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