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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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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국가는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하고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이 작사한 곡으로, 1922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국가로 공식 선포되었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1절만 사용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1절이 금지되고 3절만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3절만 독일의 국가로 불리며, "통일과 정의와 자유"를 노래한다. 이 곡은 원래 오스트리아 제국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찬송가로도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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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국가
일반 정보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의 독일인의 노래 자필 원고. 실물은 콜렉션 베를린카(크라쿠프 소재) 소장."
제목"" (독일어: '독일의 노래')
부제"" (독일어: '독일인들의 노래')
별칭"" (독일어: '통일과 정의와 자유')
국가독일
작사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
작사 연도1841년
작곡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작곡 연도1797년
채택1922년
폐지1945년
재채택1952년
이전 국가"신성 로마 제국: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1797–1806)"
"독일 제국: Heil dir im Siegerkranz (1871–1918)"
"나치 독일: Horst-Wessel-Lied (공동 국가, 1933–1945)"
"동독: Auferstanden aus Ruinen (1949–1990)"

2. 역사

독일 국가의 역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 찬가에서 시작된다. 요제프 하이든이 1797년에 작곡한 멜로디에[6] 1841년 시인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이 독일 통일을 염원하며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de)〉라는 가사를 붙였다.[37] 이 노래는 1922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공식 국가로 지정되었으나,[52] 나치 독일 시대에는 1절만이 나치즘 선전과 당가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와 함께 불리며 본래의 의미가 왜곡되었다.[37][2]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연합국에 의해 금지되었던[37] 〈독일인의 노래〉는 서독에서 논란 끝에 1952년, 민주주의 가치를 담은 3절("통일과 정의와 자유")만 부르는 조건으로 국가 지위를 회복했다.[11][52] 한편 동독은 별도의 국가인 〈폐허에서 부활하여〉를 사용했다.[12]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통일 독일의 국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서독의 방식을 따라 3절만이 공식 국가로 확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52][14][41]

2. 1. 기원과 초기 역사

독일의 시인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이 쓴 가사 '독일인의 노래'


독일 국가의 멜로디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이 1797년에 작곡했다. 이 곡은 원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란츠 2세(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 창설 이후 프란츠 1세)의 생일(2월 12일)을 축하하기 위해 헌정된 곡이었다. 당시 로렌츠 레오폴트 하슈카( Lorenz Leopold Haschkade, 1749-1827)가 쓴 〈하느님, 프란츠 황제를 지켜 주시옵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de)〉라는 가사가 붙여졌으며, 이는 영국의 국가 "신이여, 국왕 폐하를 지켜주소서"에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6] 이 멜로디는 하이든이 1796~1797년에 작곡한 〈황제 사중주〉(Op. 76의 3, 현악 사중주 '황제')의 제2악장 주제이기도 하다.

이 곡은 황제가 바뀔 때마다 가사의 이름만 바꾸어 불리며,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국 국가로 사용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제국 해체 이후 1929년에 이 곡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국가로 정했지만, 1946년 모차르트가 작곡한 선율을 다듬은 〈산의 나라, 강의 나라〉를 새로운 국가로 채택하였다.

현재 독일 국가의 가사인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de)〉는 1848년 독일 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1841년, 민족주의 시인이자 대학교수였던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August Heinrich Hoffmann von Fallerslebende)이 하이든의 멜로디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만들었다.[37] 당시 독일 지역은 빈 회의 이후 35개의 군주국과 4개의 자유 도시로 이루어진 독일 연방(Deutscher Bundde, 1815–1866)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연방은 통일된 국가라기보다는 군사 동맹에 가까웠고,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등 보수 세력은 칼스바트 칙령(1819) 등을 통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프만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은 소국가 체제(Kleinstaatereide)를 극복하고 통일된 독일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호프만은 반체제적인 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쫓겨나 여러 지역을 떠돌던 중, 당시 영국령이었던 헬골란트 섬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으로 가는 배에서 영국 국가 '여왕 폐하 만세'와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연주되는 것을 듣고, 분열되어 통일된 국가도, 국가(國歌)도 없는 독일의 현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헬골란트 섬에 머무는 동안 그는 독일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며 〈독일인의 노래〉 가사를 썼고, 1841년 9월 4일 함부르크의 출판사 프리드리히 캄페를 통해 초판이 출판되었다.

가사의 첫 구절이자 후렴구인 "독일, 독일, 세상 모든 것 위에 있는 독일이여(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 위버 알레스de)"는 원래 여러 개의 영방 국가로 나뉘어 있던 당시 독일의 현실을 넘어, 통일된 독일이라는 이상을 최우선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2] 즉, 독일인의 단결과 통일 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 것이었다.

〈독일인의 노래〉는 1841년 10월 5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횃불 행렬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불렸지만, 한동안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공식 석상에서 처음 불린 것은 1890년 헬골란트-잔지바르 조약에 따라 헬골란트 섬이 독일 영토가 되었을 때였다.[6]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었을 때도 이 노래 대신 『라인강의 파수꾼』(Die Wacht am Rheinde)이나 『황제 폐하 만세』(Heil dir im Siegerkranzde)가 비공식 국가처럼 사용되었다.

하지만 가사 내용, 특히 1절의 영토 범위(마스강에서 메멜강까지, 에치강에서 벨트 해협까지)는 작사 당시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이 지역들은 당시 독일 연방의 경계를 넘어서는 곳으로, 프랑스, 벨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 덴마크 등의 영토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 랑게마르크 전투에서 젊은 독일 병사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돌격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7]

독일의 초기 국가로는 작자 미상의 〈오이겐 왕자, 고귀한 기사(Prinz Eugen, der edle Ritterde)〉(1683년경 작곡) 등 여러 노래가 있었으나, 마침내 1922년 8월 11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독일인의 노래〉를 독일의 공식 국가로 선포했다.[52]

2. 2.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 독일

제1차 세계 대전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인 1922년 8월 11일, 사회민주당 소속의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de)를 국가로 공식 선포했다.[52][37] 이는 19세기 자유주의 혁명가들이 사용했던 흑·적·금 삼색기를 국기로 채택한 것에 대한 정치적 타협의 일환으로, 보수 우파에게 민족주의적 색채의 곡을 국가로 지정한 측면이 있었다. 에베르트 대통령은 국가 제정 당시부터 3절("통일과 정의와 자유")만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며,[6] 이 구절이 독일의 분열과 억압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상징한다고 강조했다.[37]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잠시 4절 가사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나 곧 잊혔다.[37]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국가 사용 방식은 크게 변경되었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독일인의 노래〉 1절(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도이칠란트, 도이칠란트 위버 알레스de)만이 국가로 인정되었으며, 연주 시에는 반드시 나치당의 당가이자 SA의 노래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Horst-Wessel-Liedde, 깃발을 높이 올려라)가 뒤따라 연주되었다.[37] 2절과 3절의 연주는 금지되었다.[37]

나치 정권은 1절 가사를 본래의 통일 염원에서 벗어나, 독일 민족의 타 민족에 대한 우월성과 영토 팽창 야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왜곡하여 해석하고 선전했다.[37][2][8][9] 이러한 방식으로 1절은 나치즘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으며,[10]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용이 금지되고 비판받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38][39] 이 방식의 국가는 1945년 5월 7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할 때까지 사용되었다.[52]

2.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나치 독일의 국가였던 〈독일인의 노래〉는 연합국에 의해 금지되었다.[37] 나치 시대에 1절만 사용되고 당가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와 함께 불렸던 전례 때문에,[37] 특히 1절은 나치의 팽창주의와 우월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10][38][39] 연합군은 이 노래를 금지하고 처벌 대상으로 삼았으나, 독일인들의 노래에 대한 애착은 강했으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집회에서 불리기도 했다.[37]

1949년 건국된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은 한동안 공식 국가가 없었다. 외교 행사 등에서는 베토벤교향곡 9번 중 〈환희의 송가〉나 카니발 노래인 〈Trizonesien-Song〉 등이 임시로 사용되었다.[11] 초대 대통령 테오도어 호이스는 새로운 민주 국가에 걸맞은 새 국가 제정을 원했고, 시인 루돌프 알렉산더 슈뢰더와 작곡가 헤르만 로이터에게 의뢰하여 〈Land des Glaubens, deutsches Land|믿음의 나라 독일de〉을 만들었으나 국민적 호응을 얻지 못했다.[37] 여론 조사에서는 대다수 국민이 〈독일인의 노래〉를 다시 국가로 사용하길 원했다.[37]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독일인의 노래〉 부활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1950년 의회에서 공개적으로 3절을 불렀고, 1951년 자신의 생일 기념식에서도 연주를 관철시키는 등[37]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1952년 5월, 아데나워 총리와 호이스 대통령은 서신 교환을 통해 〈독일인의 노래〉를 국가로 인정하되, 공식 석상에서는 3절만 부르기로 합의했다.[11][37] 1절은 나치에 의해 왜곡된 해석과 1841년 당시의 통일 염원이 전후 독일 영토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 때문에,[39] 2절은 술과 여자를 찬미하는 내용이 국가로서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52]

한편, 동독(독일 민주 공화국)은 1949년 자체 국가인 〈폐허에서 부활하여〉를 제정했다. 그러나 가사에 "독일, 통일된 조국"이라는 구절이 있어, 동독이 통일을 포기한 1972년경부터는 공식 석상에서 가사 없이 곡조만 연주되었다.[12]

서독에서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독일 보수주의자들이 세 연 전체를 국가로 복원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기민련(CDU)은 학생들에게 세 연 전체를 가르치려 했고, 헤센 주의 CDU 정치인 크리스티안 바그너는 모든 고등학생이 세 연을 암기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또한 국가로 인정된 것이 3절뿐인지 노래 전체인지에 대한 법적 논쟁이 있었으나, 1990년 3월 연방 헌법 재판소는 3절만이 형법상 국가 모독죄의 보호 대상이 된다고 판결하여 논쟁을 종결시켰다.[13][37]

독일 연방군 벨트 버클.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 문구가 새겨져 있다.


독일 2 유로 동전에 새겨진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


1990년 통일 이후 새로운 국가 제정에 관한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서독의 국가가 통일 독일의 국가로 계승되었다.[52] 1991년 11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과 헬무트 콜 총리는 서신 교환을 통해 〈독일인의 노래〉 3절이 통일 독일의 국가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14][41] 3절의 첫 구절인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통일과 정의와 자유de"는 독일의 국가 모토로 널리 인식되지만 공식적으로 지정된 것은 아니다. 이 문구는 독일 연방군 군인들의 벨트 버클과 유로 동전 등에 새겨져 있다.[14] 현재까지 독일에 국가에 관한 정식 법률은 제정되어 있지 않다.[37]

3. 가사

현재 독일의 공식 국가는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de)의 3절 가사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1841년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이 당시 영국령이었던 헬골란트 섬에서 작성했다.[4] 그는 요제프 하이든179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를 위해 작곡한 '신이여, 황제 프란츠를 보호하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de)의 멜로디에 맞춰 이 시를 썼다. 이 멜로디는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가로도 사용되었다.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이 가사를 쓸 당시 독일은 여러 소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가사에는 통일된 독일에 대한 열망과 자유주의적 가치가 담겨 있다. 특히 1절의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독일, 독일 그 무엇보다도de"는 개별 국가를 넘어선 통일 독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였으나, 훗날 나치 독일 시대에 민족 우월주의와 영토 확장주의적으로 왜곡되어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현재 독일에서는 1절과 2절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며, 민주주의적 가치인 "통일과 정의와 자유"(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de)를 노래하는 3절만이 국가로 불린다.

다음은 '독일인의 노래' 전체 가사와 한국어 번역이다. 현대 독일에서는 3절만이 공식 국가로 사용된다.

독일어 가사한국어 번역본
1절 (현재 사용되지 않음)
2절 (현재 사용되지 않음)
3절 (현재 독일 국가 가사)



아래는 요제프 하이든의 곡조와 '독일인의 노래' 3절 가사가 함께 표시된 악보이다.



\relative c'

{ \key es \major \time 4/4

\partial 2 \repeat volta 2 { es4. f8 | g4 f as g | f8 (d) es4 c' bes | as g f g8 (es) | bes'2 }

f4 g | f8 (d) bes4 as' g | f8 (d) bes4 bes' as | g4. g8 a4 a8 (bes) | bes2

\repeat volta 2 { es4. d8 | d (c) bes4 c4. bes8 | bes (as) g4 f4. g16 (as) | bes8 [(c)] as [(f)] es4 g8 (f) | es2 } }

\addlyrics {

<<

{ Ei -- nig -- keit und Recht und Frei -- heit

für das deut -- sche Va -- ter -- land!

}

\new Lyrics

{ Da -- nach lasst uns al -- le stre --ben

brü -- der -- lich mit Herz und Hand! }

>>

Ei -- nig -- keit und Recht und Frei -- heit

sind des Glü -- ckes Un -- ter -- pfand.

Blüh im Glan -- ze die -- ses Glü -- ckes,

blü -- he, deut -- sches Va -- ter -- land!

}


미국 해군 밴드 버전

3. 1. 1절 (현재 사용되지 않음)

Über alles in der Welt!
Wenn es stets zu Schutz und Trutze
Brüderlich zusammenhält!
Von der Maas bis an die Memel,
Von der Etsch bis an den Belt,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
Über alles in der Welt!|}}

| 독일, 독일 그 무엇보다도,
세상 그 무엇보다도 독일!
방어하고 공격할 때도
형제처럼 늘 함께 뭉친다면!
마스 강에서 메멜 강까지,
에치 강에서 벨트 해협까지,
독일, 독일 그 무엇보다도,
세상 그 무엇보다도 독일!

|}

이 가사는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이 1841년 당시 영국령이었던 헬골란트 섬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작성했다.[4] 그는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오스트리아 제국 찬가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지켜주소서de"의 멜로디에 맞춰 부를 것을 염두에 두고 가사를 썼다.

가사의 첫 구절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 über alles in der Welt|독일, 독일 그 무엇보다도, 세상 그 무엇보다도de"는 당시 여러 독일 군주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상황에서 개별 국가보다는 통일된 독일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열망을 담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영토적 우월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독일을 하나로 묶는 '통일'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5] 또한 3절의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통일과 정의와 자유de" 구절과 연결되어, 임의적인 군주제가 아닌 법치에 기반한 통일되고 자유로운 독일을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염원을 표현했다.[5]

빈 회의 이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보수적 체제 하에서 이러한 가사는 혁명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 통일 독일에 대한 요구는 언론의 자유 등 시민권 요구와 맞물려 있었고, 지역 군주에 대한 충성보다 더 큰 독일 민족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사상이었다. 이 때문에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은 교수직을 잃고 숨어 지내야 했으며, 1848년 혁명 이후에야 사면받을 수 있었다.

1절 가사에 언급된 지리적 범위(마스, 메멜, 에치, 벨트)는 19세기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생각했던 독일어권 문화 영역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현대 독일(녹색)과 1절 가사에 언급된 지리적 범위(굵은 파란색 선). 붉은 선은 1815년 독일 연방의 경계이다. 옅은 노란색은 1843년 카를 베른하르디가 상상한 독일어 사용 지역, 연두색은 1828년 관세 동맹의 경계이다.


이 경계들은 당시 독일 연방의 경계와 일치하지 않으며, 실제 민족 분포와도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슐레스비히 공국(벨트 해협)에는 독일인과 덴마크인이 함께 살았고, 아디제 강 유역에는 독일어 외에 다른 언어 사용자들이 섞여 있었으며, 네만 강 지역에는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도 거주했다. 뫼즈 강 유역은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표현은 당시 민족주의 담론에서는 흔히 사용되었다.[16][17] 이 지리적 언급은 독일 통일 이전에 쓰였기에 특정 시점의 독일 국경을 묘사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이후 수복주의 또는 영토 확장주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15] 현재 이 네 곳 모두 독일 영토 밖에 위치한다.

"독일의 노래"는 독일 제국 시기 널리 불리는 애국가 중 하나였으며,[6]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 랑게마르크 전투(1914년)에서 젊은 독일 병사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돌격하다 큰 희생을 치른 사건으로 더욱 유명해졌다.[7] 당시 미국 등에서는 이 노래가 독일의 전쟁 정신과 우월주의를 나타낸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었다.[8][9]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인 1922년, 사회민주당 출신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독일의 노래" 전체를 국가로 제정했다. 이는 당시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공화국의 상징으로 채택된 자유주의적 삼색기(흑-적-금)와 함께 보수 우파 세력에게는 민족주의적 상징인 이 노래를 국가로 인정해 준 것이다. 에베르트 대통령은 국가 제정 당시 연설에서 "'''통일과 정의와 자유!''' 여기서 읊어지는 이 세 단어는, 독일 내부의 분열과 억압의 시대에, 독일인 모두가 품는 간절한 희망을 나타낸 것이다. 이 단어들은, 앞으로도 더 나은 미래의 구축을 위해, 어려운 길을 걷는 우리들의 좌우명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3절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37] 실제로는 세 절 모두 공식 국가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나치 독일 시대(1933-1945)에 1절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나치 정권은 1절만을 국가로 부르도록 하고, 그 뒤에는 나치당의 당가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깃발을 높이de"를 연주하도록 했다. 이 시기 1절의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독일, 독일 그 무엇보다도de"는 독일 민족의 우월성과 세계 지배 야욕을 정당화하는 구호로 해석되었고,[37] 나치 정권의 침략 전쟁 및 인종차별 범죄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10]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 독일에서는 1절을 부르는 것이 사실상 금기시되고 있다.[21][22][23]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공식 석상에서 1절을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나치즘을 연상시키는 행위로 간주된다.[24][25]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국제 행사 등에서 실수로 1절이 연주되거나 불리는 경우가 발생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 1977년 독일 가수 하이노가 교육용 음반에 1절을 포함시켜 비판을 받았다.[26]
  • 2009년 영국 가수 피트 도허티가 뮌헨 공연에서 1절을 불렀다가 관객의 야유를 받고 사과했다.[27][28]
  • 2011년 헝가리 카누 스프린트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시상식 때 1절이 연주되어 독일 선수들이 당혹감을 표했다.[29][30]
  • 2017년 미국 하와이 라하이나에서 열린 페드컵 테니스 경기(안드레아 페트코비치 대 앨리슨 리스크)에서 미국인 가수가 실수로 1절을 불러 독일 선수들과 팬들이 3절을 부르며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32]

3. 2. 2절 (현재 사용되지 않음)

독일어 가사한국어 번역본



2절은 독일의 여성, 성실함, 와인, 노래 등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가사의 내용이 주로 언어 유희에 그치고, 현대적 관점에서 여성 차별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비판 등으로 인해 현재 공식적인 국가 가사에서는 제외되었다.

가사에 언급된 독일 와인은 주로 라인강 유역에서 생산되었는데, 이 지역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07년 당시 프랑스 제국의 직할령이거나 프랑스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42][43] 나폴레옹 실각 후 빈 회의를 거쳐 독일 연방에 편입되었다.[44]

3. 3. 3절 (현재 독일 국가 가사)

현재 독일의 공식 국가는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de)의 3절이다. 후렴구는 반복하여 총 2번 부른다.

독일어 가사한국어 번역본
3절 (현재 독일 국가 가사)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이 1841년에 쓴 이 시의 3절은 "통일과 정의와 자유"(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de)를 노래하며, 이는 법치주의에 기반한 통일되고 자유로운 독일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5] 이 구절은 당시 권위주의적인 군주제에 반대하는 혁명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격을 띠었다.[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이 건국되었으나 한동안 공식 국가가 없었다. 1952년,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요청과 테오도어 호이스 대통령의 동의에 따라 '독일인의 노래' 3절만이 공식 행사에서 사용되도록 인정되었다.[11] 이는 국가 원수가 국가 상징을 정하는 전통적인 권한에 따른 결정이었다.[11] 서독 정부는 1절과 2절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3절만을 국가로 사용하기로 했다.

1990년 독일 재통일을 앞두고, 연방 헌법 재판소는 3월 7일 판결을 통해 '독일인의 노래' 중 3절만이 독일 형법 제90a조에 따라 국가 모독죄로부터 법적 보호를 받는다고 명시했다.[13] 이는 3절이 법적으로 보호받는 공식 국가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통일 이후인 1991년 11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과 헬무트 콜 총리는 서신 교환을 통해 3절만이 통일 독일의 국가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14][41] 따라서 현재 독일 국가는 '독일인의 노래' 3절이며, 요제프 하이든의 곡에 맞춰 부른다.

3절의 첫 구절인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통일과 정의와 자유)는 독일의 비공식적인 국가 표어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 이 문구는 독일 연방군 군인들의 벨트 버클(나치 시대 국방군의 "Gott mit uns" 문구를 대체함)과 독일에서 발행된 2 유로 동전 및 과거 독일 마르크 동전의 가장자리에 새겨져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 통일의 감격 속에서 많은 독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이 3절을 불렀으며,[38] 서독 독일 연방의회에서도 베를린 장벽 붕괴 소식이 전해지자 의원들이 기립하여 3절을 함께 부르기도 했다.[45][46] 이는 3절 가사가 담고 있는 통일에 대한 염원이 현실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4. 논란

Das Lied der Deutschen|독일인의 노래deu는 그 가사와 역사적 배경, 사용 맥락 등으로 인해 다양한 논란에 휩싸여 왔다.

가장 큰 논란은 1절에 집중된다.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독일, 독일, 모든 것 위에deu"라는 구절은 본래 19세기 독일 통일을 염원하는 자유주의적 외침이었으나,[2][5] 나치 독일 시대에 민족 우월성과 지배 야욕을 드러내는 구호로 변질되었다.[2][37] 또한 1절에 언급된 지리적 범위는[15] 영토 확장주의적 해석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비판을 받았다.[15]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부정적 함의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절은 공식 석상에서 불리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금기시되고 있다.[21][22][23]

2절 역시 "독일 여성, 독일의 충성심, 독일의 포도주와 독일의 노래"를 찬미하는 내용이 현대적 관점에서 시대착오적이거나 성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18][19]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곡조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위해 작곡한 〈황제 찬가〉에서 유래했는데,[6] 이 곡이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가였다는 점에서 오스트리아와의 관계에서 역사적,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미묘한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에서 국가를 다시 제정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나치즘과의 연관성 때문에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으나,[37] 결국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의 주도로 여론의 지지를 받아[37] 1952년, 공식 행사에서는 3절만을 부르는 조건으로 '독일인의 노래'가 다시 국가로 인정되었다.[11][39] 1990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3절만이 형법상 국가로서 보호받는다고 판결했으며,[13][37] 1991년 통일 독일의 국가가 3절임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했다.[14][41]

최근에는 3절 가사 중 Vaterland|파터란트deu(조국)이나 brüderlich|브뤼덜리히deu(형제처럼)과 같은 표현이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적절한지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기도 했다.[47] 이처럼 독일 국가는 독일의 복잡한 역사와 사회 변화를 반영하며 계속해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4. 1. 1절에 대한 논란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독일, 독일, 모든 것 위에deu라는 구절은 원래 19세기 분열된 독일의 소국가 체제를 극복하고 통일된 독일을 만들자는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의 염원을 담은 것이었다.[2] 이는 개별 군주국에 대한 충성보다 통일된 독일이라는 '이념'을 우선시하자는 자유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의미였다.[5]

그러나 나치 독일 시대에 이 구절은 다른 국가에 대한 독일의 우월성과 지배욕을 나타내는 것으로 의미가 변질되었으며,[2] 독일 민족주의와 영토 확장 야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37] 나치 정권은 1절만을 국가로 사용했고, 그 뒤에는 SA의 노래인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붙여 불렀다. 이 때문에 1절은 나치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10]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절은 나치즘의 상징처럼 여겨져 연합군에 의해 금지되기도 했다.[37] 서독 건국 후 국가 제정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으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테오도어 호이스 대통령 간의 합의를 통해 1952년 공식 행사에서는 3절만을 부르기로 결정되었다.[11][37] 이는 나치 시대와의 단절을 보여주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3절의 내용이 당시 상황에 더 적합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39]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1절과 2절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11]

1절 가사에 언급된 지리적 범위(마스 강에서 메멜 강까지, 에치 강에서 벨트 해협까지)[15]는 1841년 당시 독일 연방의 경계 또는 독일어권 지역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으나, 통일 독일의 국경을 명확히 설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이 지역들은 대부분 현재 독일 영토 밖에 있으며,[15] 민족 분포와도 정확히 일치하지 않아[17] 영토 확장주의적 해석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15]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 구절을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구호"라 비판했으며,[18] 평화주의자 쿠르트 투홀스키 역시 이를 풍자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국 측에서 "모든 다른 민족보다 독일인이 우월하다"는 의미로 해석하여 선전에 활용하기도 했다.[8][9][20]

현재 독일에서 1절을 부르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24][25] 역사적 배경과 나치즘과의 연관성 때문에 공식 석상에서는 절대 사용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금기시되고 부적절하게 여겨진다.[21][22][23]

  • 1977년 가수 하이노가 교육용 음반에 1절을 포함시켜 논란이 되었다.[26]
  • 2009년 영국 록 뮤지션 피트 도허티뮌헨 공연에서 1절을 불렀다가 청중의 야유를 받고 사과했다.[27][28]
  • 2011년 헝가리에서 열린 카누 스프린트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실수로 1절이 연주되어 독일 선수들이 경악했다.[29][30]
  • 2017년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페드컵 테니스 경기에서 미국 가수가 실수로 1절을 불러 독일 선수들과 팬들이 3절을 부르며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32]


1990년 3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독일 형법 제90a조(국가 및 그 상징 모독죄)에 따라 법적으로 보호받는 국가는 3절에 한정된다고 판결하여, 1절과 2절은 국가의 일부일 수는 있으나 형법적 보호 대상은 아님을 명확히 했다.[13][37] 1991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과 헬무트 콜 총리는 서신 교환을 통해 통일 독일의 국가가 '독일의 노래' 3절임을 재확인했다.[14][41]

4. 2. 2절에 대한 논란






Deutsche Frauen, deutsche Treue,de


Deutscher Wein und deutscher Sangde


Sollen in der Welt behaltende


Ihren alten schönen Klang,de


Uns zu edler Tat begeisternde


Unser ganzes Leben lang –de


Deutsche Frauen, deutsche Treue,de


Deutscher Wein und deutscher Sang!de





독일 여성, 독일의 충성심,


독일의 포도주와 독일의 노래


세상에서 유지해야 한다.


그들의 옛 아름다운 소리를,


고귀한 행위에 우리를 영감을 준다.


평생 동안 –


독일 여성, 독일의 충성심,


독일의 포도주와 독일의 노래!





이 2절은 가사에 드러나는 남성 우월주의적인 태도로 인해 자주 비판을 받아왔다.[18][19] 또한 가사의 내용이 언어 유희에 그치고, 여성 차별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이유로 현재 독일 국가로 사용되지 않는다. '독일 여성, 독일의 충성심, 독일의 포도주와 독일의 노래'를 찬양하는 내용이 핵심인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독일 문화와 가치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현대적 관점에서는 시대착오적이거나 성차별적인 요소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4. 3.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독일의 국가의 곡조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신성 로마 제국프란츠 2세 황제(1804년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1세)를 위해 1797년에 작곡한 〈황제 찬가〉(Kaiserhymnede)에 기반한다. 이 곡은 로렌츠 레오폴트 하슈카(Lorenz Leopold Haschkade)의 가사 〈하느님, 프란츠 황제를 지켜 주시옵소서(Gott erhalte Franz, den Kaiserde)〉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가로 1918년까지 사용되었다.[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후, 오스트리아는 1929년에 이 곡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국가로 정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6년에 모차르트의 곡으로 알려진 선율을 편곡한 〈산의 나라, 강의 나라(Land der Berge, Land am Stromede)〉를 새로운 국가로 채택하여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다.

1922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하이든의 곡조에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의 가사를 붙인 〈독일인의 노래〉를 국가로 제정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6] 그러나 오늘날 일부 오스트리아인들은 자국의 황제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 독일의 국가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에 대해 독일 측에서는 곡이 작곡될 당시(1797년)에는 오스트리아라는 독립된 국가 형태보다는 신성 로마 제국(역사적으로 독일인의 국가로 여겨짐)의 황제에게 헌정된 것이며, 1806년 이후에도 오스트리아 제국독일 연방의 의장국으로서 독일 전체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는 점을 들어 반박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민족 정체성에 대한 인식 차이는 현대에도 이어져, 독일 공영방송 ZDF가 모차르트를 "가장 위대한 독일인"으로 선정하려 했을 때 오스트리아 측에서 "당시 '독일'이라는 국가도 없었으니 괴테도 '독일인'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등 논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오스트리아 내에서도 일부 우익 성향의 학생들 사이에서 독일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조국 독일이여"라는 가사가 포함된 〈독일인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오스트리아가 독일 민족의 중심이었던 시기에 만들어진 곡이 현재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의 국가로 사용되는 상황은 대독일주의와 독일 민족주의라는 과거의 이념을 현재에도 미묘하게 상기시키는 측면이 있다.

최근 독일에서는 국가 가사 중 "조국(Vaterland|파터란트de, 아버지의 땅)", "형제처럼(brüderlich|브뤼덜리히de)"과 같은 표현이 성차별적이라는 문제 제기가 사회민주당 계열의 젠더 활동가로부터 나와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보수 정치인들과 앙겔라 메르켈 총리까지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2012년에 국가 가사의 "위대한 아들들의 조국(Heimat bist du großer Söhnede)" 부분을 "위대한 아들딸들의 조국(Heimat großer Töchter und Söhnede)"으로 변경하여 양성평등을 반영한 바 있다.[47]

5. 한국과의 관계

대한민국에서는 개신교의 찬송가 중 《시온성과 같은 교회》(21세기 찬송가 210장, 통일찬송가 245장)와 《예수님의 귀한 사랑》(통일찬송가 127장)의 곡으로 사용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는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선율이 독일 국가로 채택되기 이전부터 다른 용도로 사용된 사례 중 하나이다.

5. 1. 찬송가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이 선율은 본래 오스트리아 제국을 위해 작곡한 〈황제 찬가〉였기에,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가로도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인 1946년에 오스트리아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선율을 바탕으로 한 〈산의 나라, 강의 나라(Land der Berge, Land am Strome)〉를 새로운 국가로 채택했다.

이 멜로디는 1802년경 영미권에서 먼저 찬송가로 채택되었는데(튜운 이름: ''Austria''), 이는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이 가사를 쓰기 전의 일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개신교의 찬송가 중 통일찬송가 127장 《예수님의 귀한 사랑》과 21세기 찬송가 210장(통일찬송가 245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의 곡으로 사용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도 일본기독교단 찬송가 (1954년판) 194번 '영광에 넘치는' (원 가사: 존 뉴턴, 1779년) 등으로 사용된 바 있다. 이 가사는 신이 다스리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황제 찬가와는 관련이 없다. 일본기독교단의 최신 찬송가집(찬송가 21)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본복음연맹 신성가(2001년판) 145번, 구세군가(1997년판) 362번·367번 등에서는 여전히 이 멜로디를 사용하고 있다.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은 이 가사를 술 마시는 노래로 사용할 의도도 가지고 있었으며, 2절의 독일의 와인, 여자, 노래에 대한 건배는 이러한 장르의 전형적인 예시다.[33] 원래의 헬리고란트 필사본에는 이를 위한 3절의 다른 결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폐허가 된 독일로 돌아와 "Kinderhymne|킨더휨네de" (어린이 찬가)라는 다른 버전의 가사를 썼고, 한스 아이슬러가 같은 해에 곡을 붙였다. 이 노래는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어느 정도 인기를 얻었으며, 일부 저명한 독일인들은 이 "반(反) 찬가"를 공식 국가로 지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lang|de|Anmut sparet nicht noch Mühe



이 "반 찬가"의 독일어 원문은 독일인들이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며 다른 민족을 돕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악수하듯 독일인과도 기꺼이 악수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독일 작곡가 막스 레거는 1915년에서 1916년 사이에 작곡한 오르간 작품집 《일곱 개의 소품》, 작품 145의 마지막 부분에서 당시 애국가였던 "독일인의 노래"를 인용했다.

아프리카너스어 애국가인 "아프리카너스 동포들"은 "독일인의 노래"와 동일한 멜로디와 유사한 구조의 가사를 가지고 있다. 세 개의 연으로 구성된 이 노래는 아프리카너스 고향의 경계 설정, 어머니, 딸, 태양, 밭의 중요성, 그리고 통일, 정의, 자유의 중요성을 노래한다.

국가와 찬송가가 같은 멜로디를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 문제도 있다. 여호와의 증인1905년부터 1938년경까지 이 멜로디를 찬송가(존 뉴턴의 가사를 편곡한 버전)로 불렀다. 나치 독일의 탄압이 심해지던 1933년 6월, 독일 신자들이 베를린에서 개최한 항의 집회에서 개회 노래로 이 찬송가를 불렀는데, 이는 후에 '나치를 회유하기 위해 국가의 곡을 불렀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호와의 증인 측은 '1905년부터 찬송가로 불러온 곡이 나중에 독일 국가로 지정된 것'이라고 반론했다. 또한, 비평가들이 '교단의 독일어판 노래집에 처음 게재된 것은 1928년으로, 국가 지정(1922년)보다 늦다'고 지적했지만 (참조: 독일어 사이트), 여호와의 증인 측은 독일 국가가 나치 집권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점, 당시 정부의 감시 하에 활동했다는 점, 번역이 타자기 등을 이용한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는 점 등을 들어 이러한 비난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5. 2. 기타

독일 국가의 멜로디는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황제 찬가에서 유래했으며, 독일 국가로 공식 지정되기 이전부터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 찬송가: 1802년경 영미권에서 'Austria'라는 이름의 찬송가 곡조로 채택되어 사용되었는데, 이는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이 독일 국가 가사를 쓰기 전의 일이다. 일본에서도 일본기독교단 찬송가 (1954년판) 194번 '영광에 넘치는'으로 사용되었다. 이 찬송가의 원 가사는 1779년 존 뉴턴이 작사한 것으로, 신이 다스리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찬양하는 내용이며, 본래 황제 찬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비록 일본기독교단의 최신 찬송가집(찬송가 21)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본복음연맹 신성가(2001년판) 145번, 구세군가(1997년판) 362번·367번 등에서는 여전히 이 멜로디를 사용하고 있다.

  • 여호와의 증인 관련 논란: 여호와의 증인1905년부터 1938년경까지 존 뉴턴의 가사를 편곡한 버전을 찬송가로 불렀다. 나치 정권의 탄압이 심해지던 1933년 6월, 독일 신자들이 베를린에서 개최한 항의 집회에서 개회 노래로 이 찬송가를 불렀는데, 이로 인해 후에 '나치를 회유하기 위해 국가의 곡을 불렀다'는 비판을 받았다. 여호와의 증인 측은 이에 대해 1905년부터 찬송가로 불러온 곡이 나중에 독일 국가로 지정된 것일 뿐이라고 반론했다. 또한, 교단의 독일어판 노래집에 해당 곡이 처음 실린 것이 1928년으로, 독일 국가 지정 연도인 1922년보다 늦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독일 국가는 나치 집권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당시 정부의 감시 하에 있었고 번역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던 점 등을 들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조: 독일어 사이트)

  • 대중음악에서의 사용:
  • 독일의 음악가 니코는 콘서트에서 종종 국가를 연주했으며, 이를 적군파 지도자였던 안드레아스 바더에게 헌정하기도 했다.[34] 그녀는 1974년 발매한 앨범 ''The End...''에 Das Lied der Deutschende 버전을 수록했다.
  • 슬로베니아의 인더스트리얼 밴드 라이바흐는 2006년 여러 국가를 편곡한 곡들을 모은 앨범 ''Volk''에서 호프만 폰 팔러슬레벤의 가사를 사용한 "Germania"라는 곡을 발표했다.[35][36]

  • 논란 및 해프닝:
  • 영국의 록 가수 피트 도허티는 2009년 11월 28일 뮌헨에서 열린 음악 축제 생중계 도중 나치 시대에 사용된 독일 국가 1절을 불러 관객의 야유를 받았다. 그는 노래를 중단시키려는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던지는 등 논란을 일으켰고, 이후 주최 측의 요구에 따라 11월 30일 사과했다. 그의 홍보 담당자는 스카이 뉴스 웹사이트를 통해 "독일 국가의 역사적 민감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며 "감정을 상하게 했다면 깊이 사과한다"고 밝혔다.[48][49]
  • 2017년 2월 11일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테니스 국가대항전 페드컵 미국 대 독일 경기 전 국가 연주에서, 주최 측의 실수로 금지된 1절이 연주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미국 테니스 협회는 즉시 독일 팀과 팬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50][51]

6. 현대적 사용

1949년 건국 이후 서독은 공식 행사에서 사용할 국가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외교 행사 등에서 국가가 필요했지만, 기본법에는 국기만 명시되었을 뿐 국가는 지정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베토벤교향곡 9번 중 "환희의 송가"나 심지어 카니발 노래인 "Trizonesien-Song" 등이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11]

1952년 4월 29일,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테오도어 호이스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Das Lied der Deutschen|독일인의 노래de"의 세 번째 연만을 공식 행사에서 사용하도록 요청했다. 호이스 대통령은 1952년 5월 2일에 이에 동의했고, 이 서신 교환 내용이 연방 정부 게시판에 게재되면서 "Deutschlandlied|독일의 노래de"의 세 번째 연이 사실상 서독의 국가가 되었다. 이는 국가 원수가 국가 상징을 정하는 전통적인 권리에 따른 것으로 여겨졌다.[11] 첫 번째와 두 번째 연이 법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동독은 자체 국가인 "Auferstanden aus Ruinen|폐허에서 부활하여de"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 노래 가사에 "독일, 통일된 조국"이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어, 동독이 통일을 포기한 1972년경부터는 공식 석상에서 가사 없이 연주되거나 사용이 줄어들었다.[12] 흥미롭게도 "Auferstanden aus Ruinende"의 가사는 약간의 수정만 거치면 "Deutschlandliedde"의 멜로디에 맞춰 부를 수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세 연 전체를 국가로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기민련(CDU)은 1985년과 1986년에 고등학생들에게 세 연 전체를 가르치려 시도했고, 1989년에는 CDU 소속 정치인 크리스티안 바그너가 헤센주의 모든 고등학생에게 세 연을 암기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통일을 앞둔 1990년 3월 7일,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의 시 중에서 세 번째 연만이 독일 형법 제90a조(국가 및 그 상징 모독죄)에 따라 법적으로 보호받는 국가라고 판결했다.[13] 형법 조항은 국가 모독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지 국가 자체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판결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연은 형법상 보호 대상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1991년 11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과 헬무트 콜 총리는 서신 교환을 통해 통일 독일의 국가로 "Deutschlandliedde"의 세 번째 연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14] 이로써 세 번째 연이 독일의 유일한 공식 국가임이 명확해졌다.

세 번째 연의 첫 구절인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통일과 정의와 자유de"는 널리 독일의 국가 표어로 인식되지만, 공식적으로 지정된 적은 없다. 이 문구는 독일 연방군 군인들의 벨트 버클(나치 시대 국방군의 "Gott mit uns|신은 우리와 함께de" 문구를 대체)과 2 유로 동전 및 과거 독일 마르크 동전 가장자리에 새겨져 있다.

"독일인의 노래" 첫 번째 연은 역사적으로 나치 독일 시대의 국가주의 및 영토 확장주의와 연관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현대 독일 사회에서는 첫 번째 연을 부르는 것이 금기시된다.[21][22][23] 독일 법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국내외 공식 행사에서 첫 번째 연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행위로 간주된다.[24][25]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 논란이 있었다.


  • 1974년, 가수 니코는 자신의 앨범 The End...에 세 연 전체를 녹음하여 발표했다.
  • 1977년, 독일 팝 가수 하이노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초등학교에서 사용하기 위해 세 연 전체를 포함한 음반을 제작하여 당시 비판을 받았다.[26]
  • 2009년, 영국 록 가수 피트 도허티뮌헨바이에른 방송(BR) 라디오에서 첫 번째 연을 불렀다가 청중의 야유를 받았다. 이후 그의 대변인은 도허티가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했으며 오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발표하며 사과했다.[27] BR 측은 사과를 받아들였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추가 협력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28]
  • 2011년 헝가리에서 열린 카누 스프린트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실수로 첫 번째 연이 연주되어 독일 선수단이 당혹감을 표했다.[29][30] 당시 유로스포츠는 첫 번째 연이 1952년에 금지되었다고 잘못 보도하기도 했다.[31]
  • 2017년 미국 하와이 라하이나에서 열린 페드컵 테니스 대회(안드레아 페트코비치 대 앨리슨 리스크 경기) 환영식에서 미국인 가수가 실수로 첫 번째 연을 불렀다. 이에 독일 테니스 선수들과 팬들은 세 번째 연을 불러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32]

참조

[1] 서적 The Complete Guide to National Symbols and Emblems https://books.google[...] Greenwood Press 2010-03-06
[2] 서적 Tunes of Blood & Iron: German Regimental and Parade Marches from the Age of Frederick the Great to the Present Day Helion & Co. Limited
[3] 웹사이트 Schwefelhölzer, Fenchel, Bricken (Der deutsche Zollverein) http://www.von-falle[...] 2010-06-27
[4] 서적 Heligoland: Britain, Germany, and the Struggle for the North Sea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5] 웹사이트 Staatssymbole Zeichen politischer Gemeinschaft http://www.bundestag[...] 2005-02
[6] 웹사이트 National Anthem of Slovenia and Its Historical Context https://slovenija30l[...] 2023-11-26
[7] 서적 Fallen Soldiers: Reshaping the Memory of the World War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4-02-25
[8] 웹사이트 The Evening Post 19 December 1914 — The NYS Historic Newspapers https://nyshistoricn[...] 2023-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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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웹사이트 The Triumph of Hitler http://www.historypl[...] 201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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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웹사이트 Case: BVerfGE 81, 298 1 BvR 1215/87 German National Anthem – decision http://www.utexas.ed[...] University of Texas School of Law / Nomos Verlagsgesellschaft 2015-01-18
[14] 웹사이트 Repräsentation und Integration http://www.bundespra[...] 201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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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웹사이트 Herwegh: Die deutsche Flotte https://gedichte.xbi[...] 2019-10-12
[17] 문서 Music and German National Identity
[18] 간행물 Deutsche Nationalhymne: 'Die blödsinnigste Parole der Welt' http://www.spiegel.d[...] 200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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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뉴스 Deutschlandlied: Ist die erste Strophe verboten? https://www.welt.de/[...] 202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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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웹사이트 Rockzanger Pete Doherty schoffeert Duitsers http://www.rnw.nl/nl[...] 200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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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뉴스 Cabaret: Nico is back 1979-02-21
[35] 뉴스 Völker, hört die Fanale! http://www.tagesspie[...] 2009-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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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웹사이트 ドイツ連邦共和国国歌 https://japan.diplo.[...] ドイツ連邦共和国大使館・総領事館 2017-08-24
[38] 뉴스 ジダンが仏国歌を歌わずドイツの先生が国歌の1番歌わぬ理由 https://www.news-pos[...] 2017-08-12
[39] 뉴스 なぜ1番・2番ではなく3番が歌われるのか? W杯の覇者ドイツ国歌の謎 https://www.huffingt[...] 2017-06-30
[40] 간행물 中世ドイツの詩人[[ヴァルター・フォン・デア・フォーゲルヴァイデ]] がドイツの女性を、挙措と容姿に優れ、男子を教養高いと褒め称えた、いわゆる「讃歌」(Preislied; Lachmann 56,14: “Ir sult sprechen willekomen”)の影響を受けている。Prof. Dr. [[:de: Ulrich Müller]] (Salzburg): ''Das Weiterleben mittelhochdeutscher Lyrik in der Gegenwart (mit Musikbeispielen) ''. [1988年9月27日、名古屋大学での講演;講演要旨:小栗友一] 日本独文学会東海支部『ドイツ文学研究』21号 1989年 155頁およびJoerg Schaefer, ''Walther von der Vogelweide. Werke.''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Darmstadt 1972 (ISBN 3-534-03516-X), S. 428. 参照。なお、「讃歌」の訳は、石川敬三訳 「ワルター 詩集」(Gedichte):訳者代表 呉茂一・高津春繁『世界名詩集大成 ①古代・中世編』平凡社、1960年、295頁。
[41] 간행물 ''DAAD Letter'', herausgegeben vom Deutschen Akademischen Austauschdienst e. V. Bonn, Nr. 3 September 1991, S. 7.
[42] 서적 ドイツ史研究入門
[43] 서적 ワインという名のヨーロッパ-ぶどう酒の文化史
[44] 서적 ドイツ史研究入門
[45] 서적 自由と統一の長い道 Ⅱ ~ドイツ近現代史1933-1990年~
[46] 서적 ベルリンの壁
[47] 뉴스 独国歌の性差 論争に「父なる祖国」「兄弟」活動家が解消提案 読売新聞 2018-03-30
[48] 뉴스 P・ドハーティ、ナチス時代のドイツ国歌を歌い謝罪 http://jp.reuters.co[...] トムソン・ロイター 2017-08-23
[49] 뉴스 P・ドハーティ、ナチス時代のドイツ国歌を歌い謝罪 https://www.asahi.co[...] 2017-08-23
[50] 뉴스 チェコ対スペインは1-1のタイ、米独戦では国歌間違えるミス フェド杯 https://www.afpbb.co[...] AFPBB News 2017-06-30
[51] 뉴스 米テニス協会が謝罪、試合前の国歌斉唱にナチス時代の歌詞 https://www.cnn.co.j[...] CNN (アメリカの放送局) 2017-06-30
[52] 뉴스 Wer sind wir, und was wollen wir dazu singen? http://www.faz.net/a[...]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201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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