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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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는 반제국주의와 반스탈린주의를 표방하며, 일본의 자본주의 타도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일본의 신좌익 정파이다. 1959년 결성 이후, 학생 운동, 노동 운동, 반핵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기관지 『전진』을 발행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일본 내 여러 시위에 참여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는 무장 공격, 폭탄 테러, 사회 기반 시설 파괴 등 과격한 투쟁을 벌여왔다. 내부 분열과 폭력적인 활동으로 인해 비판받고 있으며, 현재에도 시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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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국주의 반스탈린주의는 구로다 간이치가 주창한 사상으로 스탈린주의와 제국주의의 동시 타도를 주장하며, 소련을 적색 제국주의로 규정하고 기존 공산당을 혁명의 저해 물질로 보는 급진적인 입장을 취한다.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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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 |
원어 이름 | (가쿠메이테키 쿄우산슈기샤 도메이 젠코쿠 이인카이) |
다른 이름 | 중핵파 (츄카쿠하) 중핵파 중앙파 |
영어 이름 | Japan Revolutionary Communist League-National Committee |
![]() | |
본부 위치 | 도쿄도 에도가와구 마츠에 1-12-7 (전진사 본사) |
설립일 | 1957년 1963년 (혁마르파와의 분열) |
설립자 | 혼다 노부요시 |
회원수 | 약 5,000명 |
표어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웹사이트 | 중핵파 (전진) |
구글 지도 검색어 | 도쿄도 에도가와구 마츠에 1-12-7 |
정치 이념 | |
정치적 위치 | 극좌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반스탈린주의 반제국주의 반LGBT 보수좌파 사회보수주의 반군주제 (반천황제) 수정 트로츠키주의 반제국주의 반스탈린주의 KK연합 선제적 내전 전략 이중대치혁명전쟁 |
조직 | |
종류 | 시민단체・기타 정치단체 (법적으로는 임의단체. 정치단체의 신고를 하지 않음) |
관련 조직 |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전학련) 과거에는 부락해방동맹전국연합회 등 |
기관 | 『전진』(前進)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 |
학생 조직 | 마르학동 중핵파 |
청년 노동자 조직 | 마르크스주의 청년 노동자 동맹 |
노동조합 | 국철 치바 동력차노동조합 |
기타 | 전국부락청년전투동지회 도정을 혁신하는 회 백만인 서명 운동 법정대학 문화연맹 |
출판사 | 전진사 |
역사 | |
전신 정파 |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
분파 |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재건협의회 (관서파, 혁공동 통신파, 시오카와파) |
인물 | |
주요 인물 | 혼다 노부요시 시미즈 타케오 나카노 히로시 키타코우지 사토시 |
관계 사건 | |
주요 사건 | 도쿄교육대학생 린치살인사건 제1차 사카시타문 난입사건 시부야 폭동 류큐대학내 게바오인살인사건 중핵파 서기장 우치게바살인사건 동궁어소 앞 폭탄소지사건 요코스카 미도리소 오폭사건 가와사키시 여직원 우치게바살인사건 오사카 화염병 대량발사사건 미국 총영사관 파이프탄 발사사건 국전 동시다발 게릴라사건 영빈관 로켓탄 사건 요코하마요트 소형여객선 폭파사건 외무성 심의관실 부택 방화살인사건 교토 사사 등 동시방화사건 법정대학 학생운동의 일제검거 |
산리즈카 투쟁 관련 사건 | 나리타 공항 문제 게이세이 스카이라이너 방화사건 토테츠공업 작업원숙사 방화살인사건 자유민주당 본부 방화습격사건 나리타요스이공사 사업자 연속방화사건 10·20 나리타 현지투쟁 치바현 수용위원회회장 습격사건 일본비행기 전무댁 방화 살인 사건 |
2. 명칭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혁공동 전국위원회)가 정식 명칭이다.[20] 통칭 '''중핵파'''는 본래 학생 조직인 마르학동의 혼다 지지파가 사용하던 분파명이었으나, 이후 상부 조직까지 포함하는 명칭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다른 당파에서는 "구더기"(혁마르파), "C"(분트), "츙", "백"(논섹트)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2007년 분열 이후에는 혁공동 재건 협의회에서 "야스다 일파", 경찰 등에서는 "당 중앙", "중앙파" 등으로 불린다. 그 외에 "혼다파", "전진파", "부쿠로파", "쾰른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3. 사상
중핵파는 "반제국주의·반스탈린주의"를 주요 슬로건으로 내걸고,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일환으로서 일본 공산주의 혁명을 주장한다. 이들은 폭력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0]
"반제국주의·반스탈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반제국주의)"하고,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 등 기존 사회주의 국가들을 스탈린주의로 규정하여 타도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로동당과 일본 공산당 역시 스탈린주의로 규정하여 타도 대상으로 삼는다.[20]
경제적으로는 공산주의를 지향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는 젠더 평등과 자유주의에 부정적인 보수 좌파·사회 보수주의 입장을 취한다. 예를 들어, 성의 다양성 조례[24], LGBT 이해 증진법[25]에 반대한다.
2009년 강령 초안에서는 "자본주의·제국주의의 완전 타도 =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의 완수와 계급 사회의 폐지, 진정한 인간적인 공동 사회 =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설정했다. 이들은 현재의 제국주의가 반혁명으로 전락한 스탈린주의의 배신과 보완으로 연명하고 있으며, 국가 독점 자본주의 정책과 신자유주의 정책은 "마지막 발악"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은 폭력 혁명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 수립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비합법·비공개 마르크스주의의 "세계 단일 노동자 계급의 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 타도, 천황제 분쇄, 미국 제국주의 타도, 중국 스탈린주의 타도 등을 주장한다.[20]
4. 역사
혁명적 공산주의자동맹(혁공동)은 1957년 결성되어, 1958년 '''제1차 분열'''(오타파 이탈), 1959년 '''제2차 분열'''(구로다파·혼다파 이탈, 혁공동 전국위원회 결성), 1963년 '''제3차 분열'''(혁마르파 이탈)을 거쳤다. 이후 남은 전국위원회(혼다파)가 통칭 "중핵파"가 되었다.
중핵파는 "반제국주의·반스탈린주의의 깃발 아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주요 슬로건으로 삼고,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일환으로 일본 공산주의 혁명을 내걸었다. 이 혁명은 폭력 혁명이며, 수립할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주장한다.
"반제국주의·반스탈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반제국주의)"하고,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 등 기존 사회주의 국가를 스탈린주의로 규정하여 타도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로동당과 일본 공산당도 타도 대상이다.
혁마르파도 같은 "반제국주의·반스탈린주의"를 내걸지만, 혁마르파와 달리 중핵파는 대중 운동과 무장 투쟁을 중시하며,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이나 사청동 해방파 등 다른 당파와 연대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핵파는 권력에 대한 가두 무장 투쟁, 대학 투쟁 등으로 신좌익 최대 규모와 세력을 갖게 되었다. 1966년 제3회 대회에서 "제국주의의 근본적 동요의 시작"을 표명했고, 1974년 - 1975년의 세계 동시 불황과 고도 성장의 종말을 자본주의의 역사적 명맥이 다했다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혁명 정세는 성숙하고 있다"라고 규정하며, 급진주의적인 노선을 내걸었다.
냉전 종결 후, 1991년 "5월 테제" 이후에는 무장 투쟁 노선으로 쇠퇴한 당 조직 재건을 위해 노동 운동 노선으로 전환했다. 노사 협조 노선의 연합·전노련을 "체제 내 노동 운동"으로 규정하며 비판하고 있다.
2006년경부터 "제국주의전쟁을 내란으로"라는 슬로건으로 표현되는 종래 노선에서, 동노 지바를 축으로 한 "계급적 노동 운동 노선"으로 전환했다.
경제적으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한편, 성의 다양성 조례[24], LGBT 이해 증진법[25]에 반대하는 등, 사회·문화 면에서는 젠더 평등과 자유주의에 부정적인 보수 좌파·사회 보수주의 입장을 취한다.
중핵파의 사상은 "반 제국주의·반 스탈린주의", 목적은 "반 제국주의·반 스탈린주의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20]이다. 1959년 9월, 창립자 혼다 노부요시는 '전진' 창간호 권두 논문에서 "반 제국주의·반 스탈린주의의 깃발 아래,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에 결집하라"[20]고 호소했다.
2009년 강령 초안에서는 "자본주의·제국주의의 완전 타도 =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의 완수와 계급 사회의 폐지, 진정한 인간적인 공동 사회 =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설정했다. 현재의 제국주의는 반혁명으로 전락한 스탈린주의의 배신과 보완에 의해 연명하고 있으며, 국가 독점 자본주의 정책과 신자유주의 정책은 "마지막 발악"이라고 주장한다. 폭력 혁명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 수립을 위해서는 비합법·비공개 마르크스주의 "세계 단일 노동자 계급의 당"이 필요하며, 일본 제국주의 타도, 천황제 분쇄, 미국 제국주의 타도, 중국 스탈린주의 타도 등을 주장한다.[20]
4. 1. 결성 이전 (1955년 ~ 1963년)
1957년, 일본공산당의 노선에 불만을 가진 반체제 인사들과 전국 전학련 학생 운동가들이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RCL, 약칭 카쿠쿄도)을 결성했다.[4] 이들은 반(反)스탈린주의를 표방하며, 일본 정부 전복, 오키나와현의 미군 점령 종식, 미일 동맹 폐지를 목표로 했다.[5]
1959년, 구로다 간이치가 일본공산당 관련 정보를 도쿄도 경찰청에 팔려 한 스캔들로 RCL에서 축출되자, 혼다 노부요시와 함께 RCL-NC(전국위원회)를 결성했다.[6] 1960년, RCL-NC의 청년 조직으로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MSL, 약칭 마루가쿠도)이 창설되었고,[7] 1961년에는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청년 동맹(MWYL)이 창설되었다.[6]
1963년, RCL-NC는 구로다와 혼다의 이견으로 분열, 혼다가 이끄는 "중핵파"와 구로다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파"(카쿠마루파) 전학련으로 나뉘었다.[8]
4. 2. 중핵파 시대 (1963년 ~ 현재)
혁명적 공산주의자동맹(혁공동)은 1957년 결성되어, 1958년 '''제1차 분열'''(오타파 이탈), 1959년 '''제2차 분열'''(구로다파·혼다파 이탈, 혁공동 전국위원회 결성), 1963년 '''제3차 분열'''(혁마르파 이탈)을 거쳤다. 이후 남은 전국위원회(혼다파)가 통칭 "중핵파"가 되었다.
중핵파는 "반제국주의·반스탈린주의의 깃발 아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주요 슬로건으로 삼고,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일환으로 일본 공산주의 혁명을 내걸었다. 이 혁명은 폭력 혁명이며, 수립할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주장한다.
"반제국주의·반스탈린주의"는 "진정한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반제국주의)"하고,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 등 기존 사회주의 국가를 스탈린주의로 규정하여 타도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로동당과 일본 공산당도 타도 대상이다.
혁마르파도 같은 "반제국주의·반스탈린주의"를 내걸지만, 혁마르파와 달리 중핵파는 대중 운동과 무장 투쟁을 중시하며,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이나 사청동 해방파 등 다른 당파와 연대하기도 했다.
1960년대 중핵파는 권력에 대한 가두 무장 투쟁, 대학 투쟁 등으로 신좌익 최대 규모와 세력을 갖게 되었다. 1966년 제3회 대회에서 "제국주의의 근본적 동요의 시작"을 표명했고, 1974년 - 1975년의 세계 동시 불황과 고도 성장의 종말을 자본주의의 역사적 명맥이 다했다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혁명 정세는 성숙하고 있다"라고 규정하며, 급진주의적인 노선을 내걸고, 대학 투쟁, 가두 투쟁, 산리즈카 투쟁과 부락 해방 등의 여러 투쟁, 물리적인 당파 투쟁(특히 혁마르파와의 내게바를 "전쟁"으로 규정) 등, 다수의 테러리즘 사건이나 게릴라 투쟁을 벌였다.
냉전 종결 후, 1991년 "5월 테제" 이후에는 무장 투쟁 노선으로 쇠퇴한 당 조직 재건을 위해 노동 운동 노선으로 전환했다. 노사 협조 노선의 연합·전노련을 "체제 내 노동 운동"으로 규정하며 비판하고 있다.
2006년경부터 "제국주의전쟁을 내란으로"라는 슬로건으로 표현되는 종래 노선에서, 동노 지바를 축으로 한 "계급적 노동 운동 노선"으로 전환했다.
경제적으로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한편, 성의 다양성 조례[24], LGBT 이해 증진법[25]에 반대하는 등, 사회·문화 면에서는 젠더 평등과 자유주의에 부정적인 보수 좌파·사회 보수주의 입장을 취한다.
중핵파의 사상은 "반 제국주의·반 스탈린주의", 목적은 "반 제국주의·반 스탈린주의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20]이다. 1959년 9월, 창립자 혼다 노부요시는 '전진' 창간호 권두 논문에서 "반 제국주의·반 스탈린주의의 깃발 아래,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에 결집하라"[20]고 호소했다.
2009년 강령 초안에서는 "자본주의·제국주의의 완전 타도 = 프롤레타리아 세계 혁명의 완수와 계급 사회의 폐지, 진정한 인간적인 공동 사회 =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설정했다. 현재의 제국주의는 반혁명으로 전락한 스탈린주의의 배신과 보완에 의해 연명하고 있으며, 국가 독점 자본주의 정책과 신자유주의 정책은 "마지막 발악"이라고 주장한다. 폭력 혁명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 수립을 위해서는 비합법·비공개 마르크스주의 "세계 단일 노동자 계급의 당"이 필요하며, 일본 제국주의 타도, 천황제 분쇄, 미국 제국주의 타도, 중국 스탈린주의 타도 등을 주장한다.[20]
1955년 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와 1956년 스탈린 비판, 헝가리 봉기로 일본공산당 권위가 흔들리자, 일본에서 공산주의 신조직 결성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57년 1월, 구로다 간이치 등을 중심으로 일본 트로츠키스트 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일본공산당 가입 전술로 조직 확장에 성공, 1957년 12월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혁공동''')으로 개칭했다.
혁공동 내부에서는 오타 류 중심 「트로츠키스트파」와 구로다 간이치와 혼다 노부요시 중심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그룹」(RMG)이 레프 트로츠키 평가, 제4 인터내셔널 합류 등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1958년, 오타파는 혁공동에서 이탈하여 「일본 트로츠키스트 동지회」를 결성했다('''혁공동 제1차 분열''').
1959년 초, 구로다 간이치가 일본 민주청년동맹 정보를 경시청에 팔려다 미수에 그친 것이 발각되었고(「구로다・오카와 스파이 문제」), 같은 해 8월 혁공동 제1회 대회에서 구로다는 「스파이 행위라는 계급적 배반」을 이유로 제명되었다.
동시에, 혼다 노부요시 등 RMG도 구로다를 따라 혁공동을 이탈했다.
혼다는 구로다와 함께 「반제・반스탈린주의」를 테제로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혁공동 전국위''')를 결성, 구로다는 의장, 혼다는 서기장에 취임했다('''혁공동 제2차 분열''').
혁공동 전국위는 「공산주의자 동맹」(분트)과 학생 조직 「사회주의 학생 동맹」(사학동)에 대항해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마르학동)을 결성, 60년 안보 투쟁을 발판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안보 투쟁 후 분트가 투쟁 총괄을 둘러싸고 내부 분열했지만, 혁공동 전국위는 조직을 유지, 붕괴해 간 분트에서 다수 활동가들이 혁공동 전국위에 합류했다. 이때 시미즈 다케오 등, 후의 중핵파 간부도 있었다.
1962년 6월, 제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 전국구에 구로다가 혁공동 전국위 공인 후보로 출마, "미소핵실험 반대", "헌법 개악 저지" 등을 내걸고 선거전을 치렀지만, 약 23,000표로 낙선했다.
1962년 9월, 제3회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 총회("3전총")에서 당 건설 방식과 노동 운동 전술을 놓고 "혼다파"와 "쿠로다파"가 대립했다. 1963년 4월, 구로다 등은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파'''"('''혁마르파''')를 결성한다.
남은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혼다파)는 현재의 "'''중핵파'''"가 된다 ('''혁공동 제3차 분열''').
"중핵파" 명칭은, 혼다파가 전국위원회 정치국 다수를 차지, 정식 명칭은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였지만, 학생 조직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 다수는 구로다를 지지했기에, 새로운 학생 조직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 중핵파"를 만들었고, 이후, 상부 조직도 "중핵파"로 불리게 되었다.
1965년 참의원 선거 전국구에 간사이 지방 위원회 부의장 하마노 테츠오가 중핵파 등의 통일 후보로 출마, 약 28,000표로 낙선했다 (후에 제명).
경찰 단속으로 조직이 약화된 중핵파는 1970년 6월, "미일 안보 조약" 자동 연장에 즈음하여 "게바르트=가두 실력 투쟁"을 자제했다.
1971년, 중핵파 전투력이 회복되어 다시 격렬한 가두 투쟁을 전개했다. 산리즈카 투쟁 행정대집행 (강제 대집행)에 조직을 걸고 현지 투쟁에 참가했다.
중핵파는 "오키나와 반환 투쟁"("오키나와 탈환")에도 열심이었으며, "10.21 국제 반전 데이", 시부야 폭동 사건, 히비야 폭동 사건을 일으켰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는 이미 정치적으로 붕괴된 상태이며, 기동대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기동대 국가이다"라는 정세 인식에 근거한다. "기동대 섬멸"이라는 경찰관 살상 행위는 중핵파의 싸우는 목적에 포함되었으며, 공공연하게 슬로건으로 내걸어졌다.
"오키나와 결전"에서 중핵파는 대량 체포자를 냈지만, 1968년 시기와 비교하면 대중적 확산이 미미했고 정치적 성과도 적었다. 혁마르파 무장 습격과 보복도 격화되었고, 1970년 미일 안보·오키나와 투쟁 패배감과 노선 상실은 "내게바의 계절"로 이어졌다.
70년 안보 투쟁 당시, 중핵파 등 많은 신좌익 정파는 가두 실력 투쟁에 열심이었다. 혁마르파는 조직 유지 확대를 중시, 각 대학 자치회 지배권 장악을 시도했다. 혁마르파는 중핵파 가두 실력 투쟁을 "권력 도발 행위"로 비판했다.
도쿄대 투쟁에서 1969년 1월 기동대 도입 직전 혁마르파는 "적전 도망"했고, 각 대학에서 고립되었다. 혁마르파는 "폭력적 당파 투쟁에 의한 타 당파 해체와 세력 확대"를 목표로 하는 노선으로 변경, 민주 청년 동맹 및 모든 신좌익, 논섹트까지 폭력적 습격을 시작했다.
혁마르파는 최대 규모 중핵파와 해방파에 격렬한 폭력적 습격을 가했다. 중핵파는 가두 실력 투쟁에 의한 대량 체포로 조직이 약화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중핵파와 해방파는 조직을 "군대화", 혁마르파에 폭력적 보복을 시작한다.
중핵파·해방파와 혁마르파 사이 "'''내게바'''"가 본격화되었다. 양측에 많은 희생자를 냈고, 슬픔, 증오에 의한 복수 연쇄, 조직 괴멸을 목적으로 한 "살육전"으로 격화되었다. "내게바"는 '''학생 운동'''을 약화시키고, 일반 대중, 학생들을 신좌익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1975년 3월 14일, 중핵파 최고 지도자 혼다 노부요시가 혁마르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중핵파 서기장 내게바 살인 사건'''").
중핵파는 혁마르파 간부 "구로다 간이치, 마츠자키 아키라, 도몬 하지의 혁명적 처형"을 선언하고 보복했다. 그러나 3명 "혁명적 처형"은 실현되지 않았다 (구로다는 2006년, 마츠자키는 2010년 병사. 중핵파는 구로다 죽음에 "부끄러운 죽음을 강요했다"라고 칭함).
시미즈 다케오 통계에 따르면 "73년 9.21 이후 중핵파 대 혁마르파 '적색 테러'는 436전투, '완전 전멸'(사망) 43명, 75년 3.14 (혁마르파에 의한 혼다 살해) 이후 혁마르파 사망은 31명". 혁마르파와 해방파 항쟁은 "내게바 전쟁"이 되었고, 사망자 수는 백 명 가까이 되었다. "내게바 전쟁" 피해는 일반인에게까지 미쳤다.
1974년 2월 6일 류큐 대학 구내에서 중핵파가 혁마르파로 오인, 무관한 일반 학생을 살해하는 등, 중핵파는 일반인을 혁마르파로 오인, 습격하는 "오폭" 사건을 여러 차례 일으켰다.
중핵파는 오폭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 사과 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외: 재일 조선인 여성 부상, 재일본대한민국민단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조선총련) "조직적 항의" 후 사과 표명).
1980년대 '''산리즈카 투쟁''' (나리타 공항 문제)에서,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은 "1평 재공유화 운동" 시비를 둘러싸고 내부 의견 대립,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충돌했다.
공유화 운동 추진 "아쓰타 파"는 제4 인터 통일 서기국파 ("제4 인터파") 등이 지지했다. 공유화 운동을 "토지 매각" "돈벌이 운동"으로 반대한 "기타하라 파"는 중핵파 등이 지지했다.
반대 동맹 내부 대립은 지원 당파 대립으로 발전했다. 중핵파는 제4 인터파를 "공단에 토지 매각하려는 새로운 유형 반혁명"으로 규정했다.
1984년 1월, 중핵파는 전국 일제히 다섯 곳 제4 인터파 멤버 자택을 습격, 7월 다시 세 곳을 습격했다. 8명이 중상, 한 명은 두개골 함몰, 한 명은 다리 절단 중상을 입었다. 『전진』에서 테러 "전과" 발표 시 (1984년 1월 23일, 7월 23일), 습격한 멤버 본명, 직장, 주소를 게재했다.
중핵파는 제4 인터파 멤버나 "아쓰타 파" 소속 공항 반대파 농가, "1평 공유자" 자택, 근무처에 들이닥치거나, 협박 전화를 걸어 "다음은 너다" 등 조직적 恫喝을 전개했다.
지바현 수용 위원회 회장 습격 사건에서 중핵파는 범행 성명을 발표했다. 나리타 현지 투쟁 당시, 중핵파는 아쓰타 파 소속 농가, 또는 1987년 기타하라 파에서 이탈한 오가와 파 농가 툇마루에서, 지명하여 "탈락파 ○○ 분쇄"라고 슉레히콜을 외쳤다.
1988년, 중핵파는 "탈락파 재공유화에 응한 사람들을 포함한 전국 1천 2백 명 1평 공유자에게 호소한다. 그 권리를 절대로 지켜내는 것은 인민 정의이며, 산리즈카 투쟁 승리를 위해 불가결하다"라고 했다. 다만, 제4 인터파 테러 및 비 기타하라 파 반대파 농가 恫喝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았다.
"중앙파"와 결별한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재건 협의회'''" ("간사이 파". "중앙파"는 "시오카와 일파"라고 칭함)가 2009년 제4 인터 테러에 대해, "혁명군 전투라는 방법 군사적 전멸전은, 명백한 잘못이었다"라고 "계급 전체"에 자기 비판했지만, 제4 인터나 피해자 사과는 없었다. "중앙파"는 "간사이 파" 자기 비판에 대해, "시오카와 일파 적대 분쇄를 제4 인터에 '자기 비판'하고 산리즈카 투쟁 원칙 해체로 나선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제4 인터에 대한 내게바는, 피해 입은 제4 인터는 물론, 외부에서도 중핵파 비판이 집중되었다. 중핵파 이탈 고니시 마코토에 따르면, 중핵파 조직 내 비판적 목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중핵파 지도부 "비판자는 조직을 떠나라" 통제로, 내부 비판 공론화는 없었다고 한다.
제4 인터에 대한 중핵파 내게바는, 세상에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신좌익 각 당파나 대중 운동 일부에 있던 중핵파 호의적, 동정적 분위기가 사라졌다. 산리즈카 투쟁 분열은, 대중 운동 분열로 파급되어, 중핵파는 일부 대중 운동에서, 혁마르파와 함께 배제되었다. 당시 중핵파는, 통일 전선보다 독자 노선에 의한 운동 전개를 우선시했다.
전공투 운동 당시와 같은 대중적 확대와 기세를 잃은 중핵파는 1980년대 게릴라 투쟁에서 활로를 찾아 테러리즘을 일으켰다.
중핵파 비공개 조직 "혁명군(비밀 부대)"은 운수성(현 국토교통성) 간부 자택과 신도쿄 국제 공항 공단(현 나리타 국제공항 주식회사) 간부 직원 자택 등에 대한 폭파·방화·방화 미수 게릴라 사건, 협박죄 사건을 수십 차례 일으켰다.
중핵파는 적으로 간주한 사람들 개인 정보와 약점을 조사, "공유·확산"이라 칭하며 불특정 다수에게 유출시켜 분쟁을 부추기고 사업을 계속할 수 없게 하거나 정신적 압력을 가해 중핵파 요구를 받아들이게 하는 괴롭힘 문제를 일으켰다.
자유민주당 본부(자유민주당 본부 방화 습격 사건)나 공항 시설 등을 노린 화염병과 화염 방사기 사용 방화 게릴라 사건, 경찰서 습격 사건, 경찰 숙소 방화 게릴라 사건, 국철 동시 다발 게릴라 사건 등 150건 넘는 사건을 일으켰다.
1985년경부터 압력솥 폭탄·시한 발화 장치 제조와 사거리 수 킬로미터 박격포·로켓포도 사용했다. 1985년 10월 20일 혁노협 등과 10.20 나리타 현지 투쟁에서 기동대와 대규모 충돌했고, 1986년 제12회 선진국 정상 회의에서는 나리타 국제공항과 영빈관을 향해 박격포와 비상탄(로켓탄) 발사 사건, 방화 사건을 일으켰다.
1988년 9월 21일 지바시내 노상에서 지바현 수용 위원회 회장 변호사 오가와 아키라를 습격했다(지바현 수용 위원회 회장 습격 사건). 오가와는 온몸을 혁명군에게 철 파이프로 맞고, 양 다리와 왼쪽 팔 골절 중상을 입었다(2003년 7월 테러 후유증을 괴로워하며 자살).
중핵파는 범행 성명을 발표, "수용 위원회 해체 투쟁"이라 칭하며 "전화와 편지를 집중하라"며 다른 수용 위원 전원 주소와 전화 번호를 기관지 '전진'에 게재했다. 중핵파는 수용 위원 및 친족에게 협박장과 협박 전화를 보내 "가족 전체를 죽이겠다"고 협박, 지바현 수용 위원회 협박 전화 사건 등이 발생했다. 다음 달 수용 위원 전원 사임 사태가 되었다(지바현 수용 위원회는 2004년 재건).
중핵파 투쟁이 가장 격렬했던 것은 쇼와 천황 붕어와 황태자 아키히토 친왕 천황 즉위 관련 1989년부터 약 2년간 "천황 결전"이었다. 중핵파는 "다이조사이 분쇄"라고 칭하며 "모든 것이 군사적 결착으로 귀결되는 사투전"을 선언했다. 오야마즈미 신사나 아키타현 호국 신사 등 옛 일본군 군사사 관련 신사, 산젠인, 닌나지, 쇼렌인 등 황실과 인연이 깊은 신사 불각 기물 손괴·방화 사건 "교토 사찰 등 동시 방화 사건", 이세 신궁 박격포 발사 미수 사건·행정 대상 폭력 사건, 기업 협박 사건, 조선소 방화 사건, 나리타 공항 습격 미수 사건, 신도쿄 국제 공항 공단 관계자 협박 사건, 나리타 공항행 게이세이 전철 열차 방화 사건 등 124건 테러·게릴라 사건을 일으켰다.
중핵파 "게릴라 투쟁" 관련, 복수 게릴라 사건에서 일반인 피해와 희생자를 냈다. 1975년 9월 4일, 중핵파 활동가가 요코스카 료쿠소 아지트에서 폭탄 제조 중 실수로 폭발, 주민 2명 사망(중핵파 활동가도 3명 사망)(요코스카 료쿠소 오폭 사건).
1983년 6월 7일 지바현 요쓰카이도시 나리타 공항 관련 항공 연료용 파이프라인 수송 부설 공사 현장 반바 방화, 노동자 2명 소사(도테츠 공업 작업원 숙소 방화 살인 사건). 1984년 10월 1일 사와라시 나리타 용수 사업 하청업체 사장 자택 방화(나리타 용수 공사 사업자 연속 방화 사건). 사장 자택 외 나리타 공항 문제와 무관한 인접 주택 2채도 전소. "게릴라 투쟁" 일반인 피해에 대해 중핵파는 피해자 유족에게 사과, 배상하지 않았다.
대립 당파 혁마르파와 내게바도 1980년대 양측 조직이 "내게바 전쟁"으로 피폐해져 소강 상태였지만, 국철 분할 민영화 과정에서 혁마르파 동맹원으로 여겨지던 국철 동력차 노동조합이나 진국철 노동조합(진국로), JR 총련 활동가를 습격했다. 과거 혁마르파가 했던 대학 구내 다른 당파나 논섹트 활동가 폭력적 배제 "당파에 의한 공포 지배"를, 중핵파도 호세이 대학·교토 대학 등 각지 대학에서 강화했다는 당시 활동가도 존재한다.
4. 2. 1. 1960년대
1960년대 중반부터 중핵파는 시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6년, 중핵파는 "제2분트"와 사회주의 청년 동맹 해방파와 동맹을 맺어 "3파" 전학련을 결성했다.[9]
1967년 10월 8일, 중핵파는 하네다 공항에서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의 남베트남 방문을 막으려는 시위에 참여했다.[10] 1968년에는 미 해군의 핵 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가 사세보에 기항하는 것에 항의했다.[11] 같은 해 말, 중핵파는 신주쿠 폭동으로 불리는 신주쿠역에서 미군 연료 탱크 수송에 대한 시위에 참여했다.[5]
1968년부터 중핵파는 산리즈카 투쟁에 관여하여 도쿄 외곽 나리타 공항 건설에 폭력적으로 반대하는 농민들을 지원했다. 1968년과 1969년, 일본 전역의 캠퍼스에서 여러 시위를 벌였다. 이 기간과 1970년대까지 중핵파는 가쿠마루파와의 격렬한 갈등에 휩싸였다. 그 과정에서 가쿠마루파는 1975년 지도자 혼다 노부요시를 포함한 여러 명의 중핵파 구성원을 암살했다.[6][12] 중핵파에 따르면, 가쿠마루파는 경찰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5]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면서 세계 각지에서 반전 운동이 고조되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일관되게 지지했던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1967년 10월 8일 남베트남을 방문하게 되자, 하네다 공항으로 가는 총리를 막기 위해 '''3파 전학련''' (중핵파, 분트, 사청동 해방파 계 자치회로 구성된 전학련)과 반전 청년 위원회가 모여 처음으로 헬멧과 각목으로 "무장"하고 경찰 기동대를 돌파하려 했다(하네다 사건).
이후, 급진적인 학생들과 청년 노동자들은 1968년 1월 사세보 기지에서 있었던 엔터프라이즈 기항 저지 투쟁과 같은 해의 "10.21국제 반전 데이 투쟁(신주쿠 소란)" 등, "베트남 반전-일본의 참전국화 저지"를 내걸고 격렬한 가두 투쟁을 벌였다.
이때 중핵파는 이러한 투쟁을 "70년 안보의 전초전"으로 규정하고 "격동의 7개월"이라 칭하며 전력투구하여 동원력과 전투성에서 으뜸가는 존재였다.
같은 시기, 학생 운동에서는 도쿄대, 니혼대를 비롯한 일본 전국의 대학에 스튜던트 파워가 파급되어 전학 스트라이크와 바리케이드 봉쇄가 일어났다. 이는 기존 자치회를 넘어 만들어진 "전학공투회의"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고, "전공투 운동"이라고도 불렸다. 중핵파 및 신좌익 정파는 이 "학생 반란"을 "70년 안보 투쟁"과 일체화하여 참여했다.
4. 2. 2. 1970년대
1970년대 후반부터 중핵파는 일본에서 무장 공격, 폭탄 테러, 사회 기반 시설 파괴를 시작했다.[1] 수십 차례의 공격으로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사상자 중에는 지바현 토지 수용 위원회 위원장도 포함되었으며, 그의 죽음으로 해당 지역 개발이 지연되었다.[1]
1968년부터 중핵파는 산리즈카 투쟁에 참여하여 도쿄 외곽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에 폭력적으로 반대하는 농민들을 지원했다. 중핵파 일부 구성원들은 1980년대까지 이 투쟁에 깊이 관여했다.[5]
4. 2. 3. 1980년대 ~ 1990년대
1986년, 경찰은 두 명의 용의자가 트럭에 폭발물을 싣고 다닌 혐의로 체포된 후, 그들의 은밀한 무기 공장을 급습했다.[13] 중핵파의 공격은 20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으며, 마지막 공격은 2001년에 발생했다.[1]
1991년 5월, 중핵파는 "5월 테제"를 통해 무장 투쟁 노선에서 대중 투쟁 중심으로 전환을 시도했다. 냉전 종결 후, 무장 투쟁 노선으로 쇠퇴한 당 조직의 재건을 도모하여 노동 운동 노선으로 전환한 것이다.
4. 2. 4. 2000년대 이후
2017년, 경시청은 1971년 11월 14일 폭동 당시 경찰관 살해 혐의로 알려진 중핵파 지도자 오사카 마사아키를 체포했다.[14] 같은 날, 미국의 오키나와 점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렬해져 학생들이 경찰관에게 화염병을 던졌다.[15][16]
오늘날에도 중핵파는 여전히 시위를 벌이고 있으며, 활동을 기록하고 홍보하기 위해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2] 1971년부터 잠적했던 중핵파의 생존 지도자 중 한 명인 시미즈 다케오는 2020년 9월 6일 도쿄 아라카와에서 대중 앞에 나타났다.[17][2] 2021년 1월 27일 기자 회견에서 그는 도쿄의 코로나19 대응을 비판하며, 위기를 혁명의 기회라고 주장했다.[3]
2021년 현재, 일본 공산당의 행보에 불만을 품은 일부 젊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중핵파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18] 2023년 5월, 중핵파는 G7 정상회의를 "핵전쟁을 위한 제국주의"라고 비난하며 히로시마에서 반 G7 시위를 조직했다.[19]
2007년경, '''관서파''' 등 여러 분열과 이탈이 발생했다.
5. 조직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혁공동 전국위원회)는 1957년 결성된 혁명적 공산주의자동맹(혁공동)에서 여러 차례 분열을 거쳐 형성된 조직이다. 통칭 "중핵파"라고 불린다.
결성 당시 지도자는 혼다 노부요시였으며, 그는 1975년 혁마르파에 의해 암살되었다.[20] 현재 주요 집행부는 의장 시미즈 다케오, 서기장 아키즈키 다케시 등이다.
기관지로 『전진』(주 1회 간행,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주 2회 간행)과 이론지 『공산주의자』(계간)를 발행하고 있다.
학생 조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 중핵파(마르학동 중핵파), 청년 노동자 조직으로는 마르크스주의 청년 노동자 동맹(마르청노동)이 있다. 정치 단체로는 도정을 혁신하는 회가 있으며, 일부 구의회에서 의석을 보유하고 있다.
비공개 조직으로 혁명군(인민 혁명군, 혁명군·무장 유격대)이 있으며, 공개 거점은 전진사(현재 도쿄도 에도가와구 마쓰에 소재)이다.
주요 산하 또는 연대 조직은 다음과 같다.
조직명 | 설명 |
---|---|
국철 지바 동력차 노동조합(동노 지바) | 동노총연합의 실질적 중심 노조. "중핵파 노동운동의 정화" 또는 "세계 혁명의 사령탑" 등으로 칭하며 "계급적 노동운동 노선 아래 모든 노동자는 동노 지바처럼 투쟁하자"고 호소하고 있다. |
동노총연합 미토 노동조합 (동노총연합 미토) | 동노 미토에서 사실상 분열되는 형태로 2023년 3월에 결성. |
국철 서일본 동력차 노동조합 (동노 서일본) | |
국철 다카사키 동력차 연대 노동조합 (동노 연대 다카사키) | |
전국 노동조합 교류 센터 | 중핵파 계열의 내셔널 센터. 각지에 지부가 있다. |
국노 투쟁단 |
과거에는 국철 미토 동력차 노동조합(동노 미토)와도 공투 관계에 있었지만, 2022년에 동 조합은 활동 방침의 차이 등으로 동노총연합을 탈퇴하여 이후 공투 관계는 사실상 해소되었다.[71]
6. 주요 활동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노동 운동: 지방 자치, 우정, 교육, JR(국철)을 "4대 산별"로 지정하고, 이후 의료·복지, 비정규직 등을 포함한 "6대 산별"로 확대하여 노동조합에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31] 매년 11월경에는 "전국 노동자 총궐기 집회"를 도쿄에서 개최한다.[31]
- 반핵 운동: NAZEN(모든 원전 지금 당장 없애자! 전국 회의)을 설립하여 반원전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32] NAZEN 대표는 전 전학련 위원장 오다 요스케이다.
- 선거 운동: 도쿄도 스기나미구 등 일부 지방 의회에 의원을 진출시키고 있으며,[34] 국정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 등을 지원하기도 한다.[33] 2014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스즈키 다쓰오를 지지했다.[32]
- 학생 운동: 마르크스주의 학생 동맹·중핵파(마르학동 중핵파)를 중심으로, 호세이 대학, 교토 대학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 호세이 대학: 2006년 3월 14일, 호세이 대학 사무국에 의한 입간판 철거에 항의하던 중핵파 활동가 등 29명이 건조물 침입과 위력 업무 방해 혐의로 체포되었다.[76] 중핵파는 이 사건을 "2006·3·14 호세이 대학 탄압 사건"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2019년 4월 통일 지방 선거에서는 중핵파 활동가 호리구치 토모코가 스기나미구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80]
- 교토 대학: 1986년 당시 교토 대학 학생이었던 후쿠시마 신이치로가 교토대 교양부 구내에서 혁마르파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2012년 "교토 대학 전학자치회 동학회"를 재건했다고 한다.[81] 2015년 10월 27일, 중핵파계 동학회는 "반전 바리케이드 스트라이크"를 칭하며 교토 대학 요시다 남부 캠퍼스 구내 요시다 남 1호관 출입구를 책상, 울타리, 입간판 등으로 봉쇄했다.[83]
- 기타: 역사 교과서 문제에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집필한 후소샤 발행의 교과서 채택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7. 관련 단체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약칭 혁공동 전국위)는 다음과 같은 단체들과 지지·공투 관계를 맺고 있다.
- 국철 지바 동력차 노동조합(동노 지바)
- 전국 노동조합 교류 센터
- 산리쓰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 (기타하라파)
- 혁명적노동자협회(사회당 사회청년동맹 해방파) (소위 "하자마파")[92]
과거 국철 분할·민영화에 반대하는 치바 동력차 노동조합(동노 치바)을 지지했으며, 동노 미토와도 공투 관계였으나, 2022년 동노총연합 탈퇴로 이 관계는 해소되었다.[71]
7. 1. 지지·공투 관계
- 국철 지바 동력차 노동조합(동노 지바)
- 전국 노동조합 교류 센터
- 산리쓰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 (기타하라파)
- 혁명적노동자협회(사회당 사회청년동맹 해방파) (소위 "하자마파")[92]
7. 2. 과거의 공투 관계
국철 분할·민영화에 반대하는 치바 동력차 노동조합(동노 치바)을 지지했으며, 동노 미토와도 공투 관계를 맺었으나, 2022년 동노총연합 탈퇴로 공투 관계가 해소되었다.[71]7. 3. 분파
1997년 이후, 중핵파의 지도 체제는 의장 시미즈 타케오, 부의장 나카노 히로시(야스다), 서기장 아마타 미키오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시미즈 타케오의 당내 독재 체제와 나카노 히로시의 노동 운동 중시(이후의 "간사이파"는 동노(動労) 치바 제일주의라고 비판) 지도 방침에 대해 당내에서 점차 대립이 생겼다.[35]2006년 "간사이 위원회 지도부의 부패, 타락"을 호소하며 간사이(關西)를 중심으로 하는 당원 일부가 "결기"(3・14 결기)하여, 간사이 지방 위원회의 의장이었던 요다를 추방하고, 지도부에 대해 자기 비판, 노선의 전환을 요구했다. 이러한 내부 움직임에 대해 지도부는 쿠데타라고 판단하고 통제를 하려 했으나 오히려 내부의 강한 반발을 불렀다. 이를 계기로 당 조직은 "동노 치바파"를 자칭하며 노조 내에서의 주도권을 중시하는 시미즈 의장, 나카노(야스다) 부의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 전선파"(또는 "중앙파" 혹은 "야스다・나카노파")와, 지금까지의 노선을 답습하며 각 방면에서의 대중 운동에 관여하는 것을 중시하는 간사이 지방 위원회 중심의 "제전선파"(소위 "간사이파", "중앙파"는 "시오카와파〈시오카와 일파〉"라고 호칭. 이후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재건 협의회)로 분열해 갔다. 그 과정에서 규슈를 중심으로 한 히라타파(그 중심은 전 정치국원인 나가세인가)도 이탈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반 중앙파"로 지목된 당원에게 제명 등의 처분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중앙파는 "당의 혁명"이라고 호칭하고 있다.[35]
이러한 양측의 대립 배경에는 급격한 노선 전환 시에 잘려나간 "혁명군" 병사들의 처우를 둘러싼 갈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2006년에 현직 스기나미구 의원 2명도 의회 투쟁 방침의 대립으로 중핵파의 정치 단체 "도정을 혁신하는 모임"에서 이탈 (이후 중핵파에서 제명 처분)하고, "무소속 구민파"를 결성했다.[35]
전진사 간사이 지사를 거점으로, 중앙파에 대항하여 혁공동(革共同) 간사이 지방 위원회는 기관지 『혁공동 통신』, 이론지 『전망』을 발행하며 집행부 비판 등을 했으나, 2008년 5월에 반 중앙파가 결집하여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재건 협의회를 결성, 그 후 2009년 이후 기관지명을 『미래』로 개제했다.[35]
8. 관련 사건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중핵파)와 관련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시부야 폭동 사건 (1971년): 오키나와 반환 반대 시위가 격화되면서 학생들이 경찰관에게 화염병을 던져 경찰관이 사망했다.[15][16] 이 사건으로 중핵파 지도자 오사카 마사아키가 체포되었다.[14]
- 류큐 대학 내게바 오인 살인 사건 (1974년): 중핵파가 혁마르파로 오인하여 무고한 일반 학생을 살해했다.[6]
- 중핵파 서기장 내게바 살인 사건 (1975년): 중핵파의 최고 지도자 혼다 노부요시가 혁마르파에 의해 암살되었다.[6][12]
- 산리즈카 투쟁 (1960년대 ~ 현재): 중핵파는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산리즈카 투쟁에 참여했다.
- 자유민주당 본부 방화 습격 사건 (1984년): 중핵파의 비공개 조직인 '혁명군'이 일으킨 사건 중 하나이다.
- 국전 동시 다발 게릴라 사건 (1985년): 중핵파가 일으킨 150건이 넘는 사건 중 하나이다.
- 지바현 수용 위원회 회장 습격 사건 (1988년): 중핵파가 지바현 수용 위원회 회장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혔다.[21]
9. 비판 및 논란
중핵파는 폭력 혁명을 목표로 테러 및 게릴라 활동을 벌여왔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극단주의 단체로 비판받고 있다.[20]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등의 주장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큰 반감을 사고 있다.
1986년 교토 대학에서 발생한 혁마르파에 의한 교토대 학생 살해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중핵파는 내부적으로도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다. 또한, 과거의 폭력적인 활동 방식으로 인해 대중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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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Command History of USS ENTERPRISE (CVAN-65) for 1 January 1968 to 31 December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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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Dissenting Japan: A History of Japanese Radicalism and Counterculture from 1945 to Fukush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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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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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Protests Resume at Japan Airport
https://www.nytimes.[...]
198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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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Reward offered in search for killer of cop who died in Shibuya riot 45 years ago
https://www.tokyorep[...]
201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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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Japan Arrests Longest-Sought Fugitive After Nearly 46 Years
https://www.nytimes.[...]
201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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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Fugitive on the run for 45 years is caught
https://www.bbc.com/[...]
2017-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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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半世紀の潜伏…姿現した過激派最高幹部 背景に世代間対立? 警察当局は注視
https://www.sankei.c[...]
Sankei Shinbun
2021-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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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共産党は暴力革命を否定。本気で実力闘争を目指す中核派は? 若手活動家に聞いた
https://nikkan-spa.j[...]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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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Watch: Japan riot police pin G7 protesters to ground
https://www.bbc.com/[...]
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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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革共同)とは
http://www.zenshin.o[...]
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全国委員会
2020-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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半世紀の潜伏…姿現した過激派最高幹部 背景に世代間対立? 警察当局は注視 - 産経新聞
https://www.sanke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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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成27年版 警察白書 第5章 第3節 第2項 極左暴力集団の動向と対策 - 警察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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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日本の新左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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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杉並 「性の多様性」条例反対 洞口区議の訴えに熱烈な支持
http://www.zenshin.o[...]
202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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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焦点 「LGBT法」成立 狙いは運動の取り込みと分断
http://www.zenshin.o[...]
2024-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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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過激路線を正当化、83歳中核派議長会見 警察官犠牲の暴動「仕方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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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ニュース
2021-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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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号から週2回発行に 世界革命勝利への大挑戦」『前進』2714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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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紙の週1回発行と紙代改定についてのお知らせとお願い」『前進』3159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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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59 被爆75年 8月広島・長崎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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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局2021 Twi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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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安調査庁「内外情勢の回顧と展望(平成22年1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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鈴木候補都知事選 安倍・ファシストぶっ飛ばし革命のうねり始ま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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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大集会から「11月」へ 大恐慌、新自由主義の崩壊、虐殺・破壊・戦争の危機を世界革命へと転化しよう 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政治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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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北島候補堂々の4332票 闘う労組拠点建設へ大前進
http://www.zensh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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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旧与田派の3・7反「革共同」集会 断じて許さぬ 「差別事件」デッチあげ 国鉄・三里塚陣形の破壊狙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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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白ヘル皇居に侵入
1971-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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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新 警備用語辞典
立花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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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成田 あの1年
崙書房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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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運輸省幹部の車爆破事件 中核派アジトを捜査
http://sankei.jp.msn[...]
201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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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情況
情況出版
2012-11
[41]
뉴스
11・4京大で公安刑事摘発 この勝利を学生運動爆発へ 不当逮捕の3学友とり戻そう
http://www.zenshin.o[...]
前進
2014-11-10
[42]
뉴스
中核派の拠点を家宅捜索 東京・銀座の機動隊員暴行事件にからみ
https://www.sankei.c[...]
201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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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京大ポポロ】京大熊野寮を機動隊員暴行事件で家宅捜索 警視庁公安部
https://www.sankei.c[...]
2014-11-13
[44]
뉴스
自民党打倒へ総決起を 鈴木達夫弁護士を押し立て東京8区(杉並)で総選挙闘う 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政治局
http://www.zenshin.o[...]
前進
2014-11-24
[45]
뉴스
【衝撃事件の核心】「政治弾圧だ」中核派京大生が法廷〝演説〟 傍聴席「ナンセンス!」の不規則発言 裁判官「出て行け」とキレる異様
https://www.sankei.c[...]
2015-04-08
[46]
뉴스
警視庁、中核派活動家2人を逮捕 20代活動家を監禁し「自己批判」迫る 転落して一時危篤に…
https://www.sankei.c[...]
2015-09-29
[47]
뉴스
宣伝・扇動の変革で革命へ 機関紙『前進』週2回発行体制への移行に向けた歴史的な挑戦と決意 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政治局
http://www.zenshin.o[...]
中核派公式サイト
2015-12-07
[48]
뉴스
京大の授業妨害容疑、中核派全学連委員長ら3人を逮捕
https://www.asahi.co[...]
2016-02-29
[49]
뉴스
中核派京大生ら3人も逮捕 反戦スト叫び、授業妨害容疑
https://www.asahi.co[...]
2016-03-01
[50]
뉴스
迎賓館迫撃弾事件、中核派3人の実刑確定へ 事件発生から30年、ようやく裁判終結
https://www.sankei.c[...]
2016-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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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71年「渋谷暴動事件」 逃亡犯情報に最大300万円
http://news.tv-asahi[...]
テレ朝ニュース
2016-11-01
[52]
뉴스
【逃亡45年・中核派活動家逮捕】2LDKの室内に捜査員が踏み込んだとき、男は呆然と立ち尽くしていた…白髪に眼鏡、残る面影 長期逃亡の全貌解明へ
https://www.sankei.c[...]
2017-05-23
[53]
뉴스
【動画あり】渋谷暴動事件、大坂正明容疑者を逮捕 警視庁、事件から46年ぶり
https://www.sankei.c[...]
2017-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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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大坂容疑者かくまった疑い=中核派活動家の男再逮捕-大阪府警
https://www.jiji.com[...]
2017-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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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渋谷暴動事件の大坂正明容疑者を起訴 東京地検
https://www.sankei.c[...]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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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大坂正明被告を匿ったとして中核派の男起訴
http://www.mbs.jp/ne[...]
2017-07-01
[57]
뉴스
渋谷暴動事件の大坂被告匿った罪、2審も男に有罪
https://www.sankei.c[...]
2018-09-25
[58]
뉴스
中核派全学連活動家を逮捕 東洋大に侵入疑い、機関誌配布
https://www.sankei.c[...]
2018-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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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中核派”がコミケに初出展 PR活動にも変化「“ウケ”を大事に。コミケ参加もそのひとつ
https://www.oricon.c[...]
オリコンニュース/アニメ&ゲーム
2019-01-03
[60]
뉴스
埼玉の民家で飛翔弾発見 武器庫利用か 中核派拠点を爆取法違反で捜索
https://www.sankei.c[...]
2019-10-02
[61]
뉴스
星野受刑者が収容先で死亡 渋谷暴動事件で無期確定
https://www.sankei.c[...]
2019-05-31
[62]
뉴스
渋谷暴動事件の被告潜伏先に関与か、広島の町議を詐欺容疑で書類送検 大阪府警
https://www.sankei.c[...]
2020-01-16
[63]
뉴스
「中核派」最高指導者の姿、半世紀ぶり確認 集会に出席
https://www.asahi.co[...]
2020-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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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革命実現する労働者階級の党を 9・6革共同政治集会を開催 清水丈夫議長と歴史的合流果たす - 前進
http://www.zensh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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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中核派トップ姿確認 51年ぶり - NHK
https://web.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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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大坂正明被告に懲役20年、東京地裁判決 1971年の渋谷暴動事件
https://www.asahi.co[...]
2024-02-28
[67]
뉴스
中核派の活動家5人逮捕 平和式典の市職員に暴行容疑―広島県警など
https://www.jiji.com[...]
202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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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平和式典で広島市職員に集団暴行か 中核派の活動家5人逮捕、「前進社」を捜索
https://www.sankei.c[...]
2024-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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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平和式典で職員を集団暴行 中核派の男5人起訴、広島
https://www.sankei.c[...]
2024-03-19
[70]
뉴스
詐欺疑い中核派活動家を逮捕 京都府警、コロナ給付金
https://www.chugoku-[...]
202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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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公安調査庁「内外情勢の回顧と展望(平成18年1月)」
https://www.moj.go.j[...]
公安調査庁
200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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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事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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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どき政治犯など珍しくも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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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9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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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廷から】「死ね!」「アホ!」-法政大活動家の訴訟で飛び交う怒号 中核派系支援者に順法精神なし 廊下でも罵声浴びせ…
https://www.sankei.c[...]
202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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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全学連第77回定期全国大会議案」
http://www.zengak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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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SEALDs解散に際して300万学生に訴える キャンパスから反戦ストライキに立ち上がろう! 」2016年8月20日 全日本学生自治会総連合(斎藤郁真委員長)
http://www.zengakure[...]
全日本学生自治会総連合(斎藤郁真委員長)
201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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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普通の子供だった」私が中核派区議になった理由 {{!}} bizSPA!フレッシュ
https://bizspa.jp/po[...]
202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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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www.zensh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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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s://www.kyot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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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衝撃事件の核心】「反戦」京大中核派のバリケード封鎖 新左翼運動に垣間見える〝保守化〟 機動隊介入前に撤去したのは一般学生だった - 産経ニュース
https://www.sankei.c[...]
20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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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京大バリケード封鎖、授業妨害でメンバーら逮捕 「熊野寮」を捜索
https://www.sankei.c[...]
20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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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京都大学新聞社/Kyoto University Press » 4学生 無期停学処分 吉田南封鎖事件に関与(2016.10.1)
http://www.kyoto-up.[...]
20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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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京大生の中核派系全学連幹部を逮捕 職員に暴行、職務妨害疑い 京都府警、拠点の「熊野寮」捜索
https://www.sankei.c[...]
202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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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https://www.kyot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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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熊野寮自治会による抗議声明
https://kumano-ryo.j[...]
熊野寮自治会
2017-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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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京都大「熊野寮」を京都府警が捜索、中核派系活動家逮捕で 「不当捜査」と学生ら抗議|社会|地域のニュース|京都新聞
https://www.kyoto-np[...]
202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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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闘う広大自治会の再建を-福島の怒りと固く結合し広大を反原発・反核の砦に-マル学同中核派・広島大学支部
http://www.zenshin.o[...]
『前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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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沖縄大から反戦ストに立ち全島ゼネスト必ず切り開く マル学同中核派・沖縄大学支部
http://www.zenshin.o[...]
『前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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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核派とは何か?‐3.11以降再活性化
http://theplatnew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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