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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스 올리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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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런스 올리펀트는 1829년에 태어난 스코틀랜드 출신의 작가, 외교관, 정치인이다. 그는 케이프 식민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아버지와 함께 실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네팔 여행을 바탕으로 소설 《카트만두 여행》을 썼다. 이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캐나다와 미국을 방문하고, 엘긴 백작의 비서로 중국과 일본에 파견되어 《엘긴 경 일본사절록》을 출판했다. 그는 하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소설 《피카딜리》를 발표했고, 심령주의에 심취하여 유토피아 공동체에 참여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농업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188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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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스 올리펀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렌스 올리펀트
로렌스 올리펀트, 1882년
이름로런스 올리펀트
원어 이름Laurence Oliphant
출생 및 사망
출생일1829년 8월 3일
출생지케이프타운, 케이프 식민지
사망일1888년 12월 23일
사망지요크 하우스, 트위크넘, 런던, 잉글랜드
국적
국적영국
직업
직업작가
여행가
외교관
정보 요원
영국 의회 의원
배우자
배우자앨리스 르 스트레인지 올리펀트 (1872-1886)
로즈먼드 올리펀트 (1888)

2. 생애

로런스 올리펀트는 19세기 영국의 작가이자 여행가, 외교관, 신비주의자로 활동하며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스코틀랜드 지주 계급 출신인 아버지 앤서니 올리펀트 경이 케이프 식민지에서 법무장관으로 재직 중이던 1829년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실론(현 스리랑카)의 대법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어린 시절을 콜롬보에서 보냈다.[3]

젊은 시절부터 네팔, 러시아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경험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카트만두 여행』(''A Journey to Katmandu'', 1852년), 『흑해의 러시아 해안』(''The Russian Shores of the Black Sea'', 1853년) 등의 저서를 출간하며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4][31] 이후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캐나다, 미국, 청나라, 일본 등지에서 근무했고, 잠시 하원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 미국기독교 공동체에 합류했으며, 말년에는 기독교 시온주의자였던 부모의 영향[6] 등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추진하는 데 힘썼다. 그의 삶은 당대 영국 사회에서 큰 관심을 받았으며, 모험과 탐구, 종교적 신념 추구로 점철된 독특한 궤적을 남겼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로런스 올리펀트는 1829년 케이프타운, 케이프 식민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지주 계급 출신인 앤서니 올리펀트 경(Sir Anthony Oliphant, 1793년–1859년)이었고, 어머니는 마리아였다. 로런스는 부부의 외동아들이었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앤서니 경은 케이프 식민지의 법무장관(attorney-general)이었으나, 곧 실론(현 스리랑카)의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3][18]

로런스는 8살 때 어머니와 함께 잠시 영국으로 귀국했다가, 1841년 말 아버지가 있는 실론으로 가서 어린 시절을 콜롬보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콜롬보에서 '알코브'(Alcove)라는 집을 구입했는데, 이 집은 나중에 마하 누제 가든스(Maha Nuge Gardens)로 알려지게 되었다. 올리펀트 부자는 중국 에서 차나무 30그루를 실론으로 들여와 누와라 엘리야(Nuwara Eliya)에 있는 자신들의 농장에서 재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0][3][18]

1846년부터 1848년까지 부모님과 함께 유럽을 여행했다. 처음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할 생각이었지만, 결국 실론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개인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다.[18]

1851년, 올리펀트는 당시 네팔의 재상이었던 정 바하두르 라나(Jung Bahadur Rana, 또는 장 바하두르 쿤와르)를 따라 콜롬보에서 네팔로 여행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카트만두 여행''』(''A Journey to Katmandu'', 1852년)을 썼다.[31][4][19]

이후 실론을 떠나 영국으로 가서 법학을 공부하려 했으나, 곧 중단하고 러시아 제국을 여행했다. 이 여행의 결과물로 『''흑해의 러시아 해안''』(''The Russian Shores of the Black Sea'', 1853년)을 출간했다. 이를 계기로 올리펀트는 블랙우드 매거진, 타임스, 데일리 뉴스 등 여러 유력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가 되었다.[31][19]

올리펀트의 부모는 기독교 시온주의자였다.[6]

2. 2. 외교관 경력

1851년 말, 첫 저서 출판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다음 책 출판을 위해 러시아로 여행을 떠났고, 변장 후 크림반도세바스토폴에 잠입한 경험을 바탕으로 『흑해의 러시아 연안』(''The Russian Shores of the Black Sea'', 1853년)을 출판했다.

1853년부터 1861년까지는 간헐적으로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의 비서로 일하며 캐나다미국 방문에 동행했다.[31][19] 첫 임무로 워싱턴 D.C.에서 캐나다-미국 상호 조약 협상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링컨과 만나기도 했다.[19] 1855년 1월 영국으로 귀국한 뒤에는 뉴캐슬 공작과 함께 크림 전쟁이 벌어지던 터키로 가서 체르케스 해안을 방문했다.[4]

1856년 말부터 1857년까지는 미국용병이자 모험가인 윌리엄 워커가 추진한 환카리브해 제국 건설 계획에 잠시 참여했으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엘긴 백작이 제2차 아편 전쟁(1856년-1860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올리펀트는 그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청나라로 향했다. 원정 도중 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 임무를 맡아, 일행은 1858년 7월 30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8월 3일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8월 12일에는 시나가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8월 26일에는 영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약 한 달 전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이미 체결된 상태였기 때문에 협상은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올리펀트는 이때의 경험을 정리하여 《엘긴 경의 일본사절록》(''Narrative of the Earl of Elgin's Mission to China and Japan'')[32][20]을 출판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남아프리카네덜란드인이 많았던 덕분에 네덜란드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과의 소통에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31][19]

제1차 도젠지 사건 당시 승마용 채찍으로 저항하는 올리펀트(왼쪽). 문 뒤에 숨은 인물은 동료 모리슨이다. 1861년 10월 12일자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게재. 그림을 그린 찰스 워그먼 역시 사건 현장에 있었다.


엘긴 백작과의 극동 방문 후, 올리펀트는 외무장관 존 러셀 경에게 일본 근무를 자원하여 1861년(분큐 원년) 31세의 나이로 러더퍼드 올콕 휘하의 주일본 영국 공사관 제1서기관으로 임명되었다.[19] 올콕이 휴가로 영국에 가 있는 동안 대리 공사직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올리펀트는 1861년 6월 말 에도에 도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5일(음력 5월 28일) 새벽, 공사관이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낭인 무리의 습격을 받는 사건(제1차 도젠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그의 권총은 여행 가방 안에 잠겨 있었기에, 그는 침대 옆에 있던 승마용 채찍을 들고 맞섰다. 어둠 속에서 카타나를 든 낭인의 공격을 받았으나, 천장의 들보 덕분에 치명상은 피했지만 여러 곳에 심한 부상을 입고 치료를 위해 배로 옮겨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올리펀트는 결국 귀국하게 되었지만,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당시 에도 막부존왕양이 운동의 압력 속에서 니가타, 효고, 에도, 오사카의 개항 및 개시 연기를 영국 측에 요청하고 있었다. 올콕은 처음에는 반대 입장이었으나, 8월 14일8월 15일 양일간 올콕, 올리펀트, 영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호프, 로주 안도 노부마사, 와카도시요리 사카이 다다아키 등이 참석한 비밀 회담을 통해 일본의 내부 사정을 이해하고 개항 연기에 찬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귀국길에 오른 올리펀트에게는 이러한 영국의 정책 변경을 본국 정부에 전달하고 동의를 얻어내는 역할이 주어졌다.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리펀트는 조선에 잠시 들렀는데, 그곳에서 러시아 군함이 인적이 드문 만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철수시키는 데 관여했다. 한편, 도젠지 사건 때 입은 팔 부상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영구적인 후유증을 남겼다.

1863년에는 1월 봉기가 일어난 폴란드에 영국 정부 관찰자 자격으로 파견되어 상황을 보고했다.[6] 이후 올리펀트는 외교관 경력을 마무리하고 영국으로 돌아와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2. 3. 하원 의원 활동 및 신비주의

1865년 영국으로 돌아와 스코틀랜드의 스털링 버러 선거구에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4] 의정 활동이 두드러지지는 않았다.[4] 그러나 1867년 4월 11일, 당시 외무 장관이었던 스탠리 경에게 "일본에서의 프랑스 공사와 막부 간 상거래"에 관한 동의안 제출을 예고한 바 있다. 이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오구리 다다마사가 프랑스와 협의하던 600만달러 규모의 차관 도입 계획에 영향을 미쳐, 막부의 군사 근대화 추진에 차질을 빚게 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동의안은 최종적으로 제출되지 않았고, 올리펀트 본인이 이 문제에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하다.[21]

의원 재직 중, 그는 심령주의 예언자로 알려진 토머스 레이크 해리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해리스는 1861년미국 이리호 인근의 브록턴에 "신생 동포 교단"(eng)이라는 작은 기독교 유토피아 공동체를 설립했다.[4][22] 올리펀트는 1860년 런던에서 열린 해리스의 설교회에 참석했던 어머니를 통해 그를 처음 알게 되었다.[23]

해리스는 점차 올리펀트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결국 올리펀트는 1867년 의원직을 사임하고[6] 1868년 해리스를 따라 브록턴 공동체에 합류했다.[6] 이러한 결정은 당시 영국 사회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한편, 런던 체류 시절 올리펀트는 사쓰마 번에서 온 비밀 유학생들과 교류했다. 당시 그는 일종의 친일 인사로 여겨졌으며, 이들 유학생에게 해리스의 사상을 소개했다. 올리펀트는 이들 유학생에게 당시 유럽 문명의 문제점과 제국주의적 착취를 비판하며 아시아 고유의 정신적 가치를 강조했고, 이를 통해 근대 문명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그의 영향으로 모리 아리노리를 포함한 6명의 유학생이 해리스의 공동체로 향하기도 했다.[24]

의원직 사임 후 발표한 소설 ''피카딜리: 현대 전기 단편''(eng, 1870년)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후기 소설로는 ''알티오라 페토''(eng, 1883년)와 ''마솔람: 시대의 문제''(eng, 1886년)가 있다.

브록턴 공동체에서 올리펀트는 해리스가 '사용'(eng)이라고 칭한 방침에 따라 농업 노동 등 육체노동에 종사하며 공동체의 이상 실현에 참여했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금 마련을 위해 외부 세계로 나가 일하는 것이 허용되기도 했다. 약 3년 후, 올리펀트도 유럽으로 돌아가 더 타임스의 특파원으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취재했으며, 이후 몇 년간 파리에서 활동했다.

파리 체류 중 어머니를 통해 앨리스 르 스트레인지(eng)를 만나 1872년 6월 8일 런던의 세인트 조지 교회에서 결혼했다.[5] 1873년 올리펀트는 아내 앨리스 및 어머니와 함께 브록턴으로 돌아갔지만,[4] 해리스의 지침에 따라 가족들은 분리되어 생활해야 했다. 올리펀트는 공동체의 재정 관리 역할을 맡아 뉴욕이나 런던으로 출장을 다니기도 했다.

2. 4. 팔레스타인 정착촌 건설 노력

1878년, 올리펀트는 러시아중동을 정복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서방의 우려 속에서,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북부와 더 비옥한 지역"에 유대인 농업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길르앗 계획"을 구상했다. 이 계획은 시온주의 지지자인 벤자민 디즈레일리 총리, 샐즈베리 외무부 장관, 웨일스 왕자, 소설가 조지 엘리엇 등의 지지를 받았다.[6] 그는 나중에 유대인 농업 정착촌 건설을 동유럽 유대인의 고통을 완화하는 수단으로 보게 되었다.[7]

영국 정부의 신임을 얻은 올리펀트는 1879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농업 정착촌을 건설하기 위한 조건을 조사하기 위해 현지로 떠났다.[6] 같은 해 5월, 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성지에 유대인 농업 식민지를 건설하고 수많은 유대인을 정착시킬 수 있도록 고귀한 문(오스만 제국 정부)에 청원했다. 이는 시온주의자들이 1882년 제1차 알리야를 시작하기 전의 일이었다.[6] 올리펀트는 미국과 영국에 이 계획을 지지하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것이 불가능한 과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6] 실제로 크리스타델피안을 비롯한 영국의 여러 기독교 신자들과 유대인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올리펀트는 갈릴리 지역에 유대인 난민을 위한 토지를 구입하고 정착시키기에 충분한 자금을 모았다.[8][25][26]

고귀한 문과의 면담을 기다리는 동안, 올리펀트는 루마니아로 가서 현지 유대인 공동체와 자신이 제안한 농업 정착촌에 대해 논의했다.[6] 그러나 1880년 4월에 이루어진 고귀한 문과의 만남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고, 올리펀트와 그의 계획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 당시 오스만 제국 주재 영국 대사였던 헨리 레이어드는 올리펀트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이 예수의 재림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는 등, 술탄이 탐탁지 않게 여기는 종교적 언어와 논리를 사용했기 때문에 노력이 실패했다고 보았다.[6]

1881년 키예프 포그롬을 포함한 포그롬의 물결이 러시아 제국을 휩쓸자, 런던에서는 맨션 하우스 위원회가 결성되어 유대인 난민을 돕기 위한 자선 기금이 모금되었다. 위원회가 기금을 미국 재정착 지원에 사용하겠다고 발표하자, 올리펀트는 1881년 2월 15일 더 타임스에 기고하여 팔레스타인 정착을 선택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신념이 보호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폴란드와 러시아 유대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고, 맨션 하우스 위원회는 그를 갈리시아 지역 담당 위원으로 임명했다.[6] 1882년, 다시 만난 올리펀트 부부는 비엔나와 갈리시아를 방문하여 동유럽 유대인 대표들을 만나 "러시아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조상의 땅에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다는 확신이 영국에 있는 기독교 지지자들에게 들면, 그들은 이 위대한 목적을 추진하기 위해 수천, 아니 수십만 파운드를 기부할 것"이라고 약속했다.[6]

이 시기 올리펀트는 동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6] 그는 "또 다른 키루스" 또는 "구세주"로 불렸으며, 그의 정착 계획은 초기 시온주의 신문 하마기드와 페레츠 스몰렌스킨이 편집한 ''하샤하르''에 실렸다. 모세 릴리엔블룸은 올리펀트가 "이스라엘의 메시아"가 되기를 희망하기도 했다.[6] 역사가 나단 마이클 겔버에 따르면, "가난한 유대인들의 집에서는 위대한 박애주의자 모세 몬테피오레와 허쉬 남작의 사진 옆에 올리펀트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6]

하이파의 올리펀트 하우스


올리펀트 하우스, 달리야트 알 카르멜


고귀한 문이 유대인 농업 정착촌 건설을 허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리펀트 부부는 1882년 5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부다페스트를 거쳐 몰다비아로 가서, 올리펀트가 "세계 유대인의 지도자"로 여겼던 아브로함 야코브 프리드먼 랍비를 만나 오스만 술탄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구입할 자금을 모으도록 설득하려 했다.[6]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부부는 하이파의 독일 식민지와 카르멜 산의 드루즈 마을 달리야트 알 카르멜에 집을 마련하고 시간을 나누어 보냈다.[9] 올리펀트는 달리야 마을의 미술과 공예를 장려하여 지역 경제에 기여하기도 했다.[27] 1882년에는 훗날 이스라엘국가인 하티크바의 가사를 쓴 나프탈리 헤르츠 임버를 비서로 고용했다.[10] 올리펀트 부부는 성지에서 제1차 알리야의 유대인 개척자들과 교류하며 예수드 하마알라의 창립 정착민들에게 1,000 루블을 기부하는 등[6], 로쉬 피나와 지크론 야아코브의 "설립과 생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6]

2. 5. 말년과 죽음

1887년 11월, 올리펀트는 『''과학적 종교(Scientific Religion)''』 출판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1888년 성령강림절까지 책 작업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같은 해 미국 말번에서 초기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웬의 손녀 로자먼드와 재혼했다. 부부는 하이파로 돌아갈 계획이었으나, 올리펀트는 영국 트위크넘의 요크 하우스에서 병을 얻었고, 결국 1888년 12월 23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부고는 ''더 타임스''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그처럼 낭만적이고 충만한 삶은 드물었고, 그보다 더 기이하고 모순적인 인물도 없었을 것이다."

2014년 트위크넘 묘지에 있는 올리펀트의 묘

3. 저술 활동

로런스 올리펀트는 아내 앨리스와 함께 비전 기독교 사상에 기반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1885년 부부가 공동 집필한 ''Sympneumata, or Evolutionary Forces Now Active in Man''(숨결, 혹은 인간 내부에서 활동하는 진화적 힘)은 미국의 신비주의자 토마스 레이크 해리스, 안나 킹스포드, 에드워드 메이틀랜드 등의 영향을 받아 쓰였다. 이 책은 인간의 영혼이 본래 양성(兩性)이었으나 육체에 갇히면서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되었다는 독특한 타락 해석을 바탕으로 하며, 호흡법과 '진동'을 통해 내면의 양성을 해방하고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짝을 찾는 방법을 강조했다.[11]

1886년 1월 아내 앨리스가 사망하자[5], 올리펀트는 그녀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자신과 소통하며 영감을 준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1887년 ''Scientific Religion: Or, Higher Possibilities of Life and Practice Through the Operation of Natural Forces''(과학적 종교: 자연력의 작용을 통한 삶과 실천의 더 높은 가능성)를 저술했다.[4]

그의 초기 저작 중 하나인 ''카트만두 여행기''(A Journey to Kathmandu)는 1852년에 출간된 여행기이다.[15] 당시 21세였던 올리펀트는 영국에서 네팔로 돌아가던 장 바하두르 라나 총리의 일행에 합류하여 네팔의 문화적 상황을 묘사했으나, 이 책의 과학적 가치는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16]

이 외에도 올리펀트는 신비주의 저술 외에 팔레스타인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여행기 ''하이파 또는 현대 팔레스타인에서의 삶''(Haifa or Life in Modern Palestine, 1885년)[2][13], 중국 및 일본 방문 경험을 담은 보고서, 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저술을 남겼다.

3. 1. 주요 저서 목록


4. 평가와 유산

2000년, 이스라엘 국립 해양 박물관에서는 로런스 올리펀트의 아내인 앨리스 올리펀트가 19세기 말 하이파를 그린 수채화들을 모아 "올리펀트 부인의 응접실"이라는 제목의 특별 전시회를 열었다.[2][12] 이 전시회에는 앨리스의 여동생인 제임시나 월러가 성지 순례 중에 그린 그림들도 함께 전시되었다.[2][12] ''예루살렘 포스트''의 미술 평론가 앤젤라 레빈은 앨리스 올리펀트의 수채화에 대해 "매력적이지만 아마추어적"이라고 평가했다.[13]

2003년에는 예루살렘의 티코 하우스에서 앨리스 올리펀트와 그녀의 여동생 제사민 월러의 성지 그림 전시회가 열렸다.[14]

5. 가족 관계

로런스 올리펀트는 케이프타운, 케이프 식민지에서 스코틀랜드 지주 계층 출신인 앤서니 올리펀트 경(1793–1859)과 그의 아내 마리아 사이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 시온주의자였다.[6] 그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설명
아버지앤서니 올리펀트 경 (Anthony Oliphant, 1793-1859)스코틀랜드 퍼스셔의 귀족 올리펀트 가문 출신.[28] 법률가로, 로렌스 출생 당시 케이프 식민지의 법무 장관이었고 이후 실론의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839년 스리랑카 총독 다음가는 고위직인 실론 판사를 역임했다.[19] 아들과 함께 청나라에서 가져온 차나무 30그루를 누와라 엘리야의 올리펀트 농장에 심어 실론에 차를 도입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금욕적인 스코틀랜드 감독교회파(복음주의)의 독실한 신자였다.[19]
어머니마리아 올리펀트 (Maria Oliphant, ? - 1880)군인의 딸로, 아버지는 케이프 식민지에 주둔한 스코틀랜드 제72 연대 지휘관 캠벨 대위였다.[19] 이스라엘 작가 람 오렌에 따르면, 부모가 정한 사랑 없는 결혼으로 인해 외로움 속에서 아들 로렌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쏟았다고 한다.[29] 엄격한 복음주의 전도사였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 읽기에 보냈다고 전해진다.[29] 엘긴 백작의 어머니 등 엘긴 가문과 친분이 있었다.[19]
첫 번째 아내앨리스 올리펀트 (Alice Oliphant, ? - 1889)영국 노퍽[28]의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마리아를 통해 로렌스를 알게 되어 1872년 6월 결혼했다. 로렌스가 의원 시절(1865-1868) 앓았던 매독을 알고도 결혼했다고 한다.[29] 이스라엘 작가 람 오렌은 그의 저서에서 앨리스가 올리펀트의 팔레스타인 시대 비서였던 나프탈리 헤르츠 임베르와 연애 관계였다고 주장했다.[29]
후처로자먼드 올리펀트 (Rosamund Oliphant, ? - ?)사회주의적 경영으로 알려진 로버트 오언의 손녀. 1888년 5월 로렌스와 결혼했으나, 신혼여행 중 로렌스가 사망했다.[19]
삼촌로렌스 올리펀트스코틀랜드 국회의원. 그의 아들 로렌스 올리펀트는 20세기 초 영국 육군 대장을 역임했다.
삼촌제임스 올리펀트영국 동인도 회사 대표이자 둘립 싱의 시종이었다.
삼촌토마스 올리펀트음악가.



로렌스는 어린 시절을 부모와 함께 콜롬보에서 보냈으며, 1848년과 1849년에는 유럽을 여행했다. 1851년에는 정 바하두르를 따라 네팔 왕국으로 여행했으며, 이는 그의 첫 저서 ''카트만두 여행기''(1852)의 바탕이 되었다.[4]

참조

[1] 뉴스 Book review: The Land of Gilead The Observer 1881-01-02
[2] 뉴스 A Scottish Laird Jerusalem Post 2008-05-16
[3] 웹사이트 Reference to Sir Anthony Oliphant and the introduction of Tea to Ceylon http://artandtea.wor[...] 2009-08-07
[4] EB1911 Oliphant, Laurence
[5] 서적 Laurence Oliphant Open University Press 1982
[6] 뉴스 British Christian Zionism (Part 2): the work of Laurence Oliphant http://fathomjournal[...] Fathom Journal 2020-01-23
[7] 논문 Thomas Laurence Oliphant: Financial Sources for his Activities in Palestine in the 1880s 2007-11
[8] 간행물 The Christadelphian Magazine Birmingham 1884, 1886
[9] 서적 Zeal for Zion: Christians, Jews, & the Idea of the Promised Land, Shalom Goldman https://books.google[...]
[10] 뉴스 Streetwise: Rehov Oliphant, Haifa http://www.jpost.com[...] Jerusalem Post
[11] 논문 Alice and Laurence Oliphant's Divine Androgyne and "The Woman Question" 2016
[12] 뉴스 Alice in the Holy Land Opens in Jerusalem https://artdaily.cc/[...] Art Daily 2020-01-31
[13] 뉴스 In the Frame Jerusalem Post 2000-01-28
[14] 뉴스 Painting Palestine - in the steps of a Christian Zionist Jerusalem Post 2003-08-22
[15] 논문 Nepal-Then and Now: A Critical Appraisal of the Ethnography of Nepal 1998
[16] 웹사이트 n 'Oddball' in 'The Camp of Jung Bahadoor' http://ecs.com.np/sp[...] 2020-08-29
[17] 서적 A Journey to Katmandu (the Capital of Napaul), with the Camp of Jung Bahadoor Including a Sketch of the Nepaulese Ambassador at Home https://www.gutenber[...] 2020-08-29
[18] 웹사이트 Reference to Sir Anthony Oliphant and the introduction of Tea to Ceylon http://artandtea.com[...] 2012-12-01
[19] 논문 幕末日本と英国・スコットランド交流史 : L. オリファント研究 https://soka.repo.ni[...] 創価大学経済学会 2013-03
[20] 문서 数年後、[[アーネスト・サトウ]]はこの本を読んで、日本行きを決意した。
[21] 서적 外国交際 遠い崖5 アーネスト・サトウ日記抄 朝日新聞社 2007
[22] 문서 教団は1875年に[[カリフォルニア州]]の[[サンタローザ (カリフォルニア州)|サンタローザ]]に移り、そこでワイン農園を経営する。
[23] 서적 スピリチャリズムの歴史 http://gutenberg.net[...] 1924
[24] 문서 ロンドンからブロックトンへ向かった6名の薩摩留学生は、森有礼、[[鮫島尚信]]、[[長澤鼎]]、[[吉田清成]]、[[畠山義成]]、[[松村淳蔵]]である。さらに、薩摩藩からの[[薩摩藩第二次米国留学生|第二次留学生]]の[[谷元道之|谷元兵右衛門(道之]])、野村一介(高文)、[[仁礼景範]]、江夏蘇助、[[湯地定基]]の5名が合流し、薩摩藩士総勢11名による共同生活が始まったが、その異常性のため森、鮫島、長沢、野村以外の者はすぐにハリスの元を去った。森、鮫島はハリスのコミューンで1年近く生活し、ハリスから多大な感化を受け、1868年、日本国家の再生を命ぜられ帰国したが、長沢、野村は残った。
[25] 간행물 The Christadelphian Magazine Birmingham 1884,1886
[26] 문서 "Abstract: Laurence Oliphant's interest in the development of Jewish settlement in Ottoman Palestine preceded his interest in the plight of Jewish communities in Eastern Europe. While his intensive involvement in these matters is well known, especially in modern Israel, the fact that the funds for his largesse were contributed by the Christadelphian Brotherhood has not previously been published. The present article brings to light material from the archives of this sect, and thus, too, the motivation behind these efforts. Amit, Thomas Laurence Oliphant: Financial Sources for his Activities in Palestine in the 1880s Palestine Exploration Quarterly, Volume 139, Number 3, November 2007 , pp. 205-212(8)"
[27] 뉴스 Streetwise: Rehov Oliphant, Haifa http://www.jpost.com[...] The Jerusalem Post 2008-05-15
[28] 웹사이트 Sir Anthony Oliphant http://www.thepeerag[...]
[29] 웹사이트 Alice, her husband, her lover and 'Hatikva' http://www.haaretz.c[...] 2012-02-09
[30] 웹인용 Reference to Sir Anthony Oliphant and the introduction of Tea to Ceylon http://artandtea.com[...] 2012-12-01
[31] 논문 幕末日本と英国・スコットランド交流史 : L. オリファント研究 http://libir.soka.ac[...] 創価大学経済学会 2013-03-31
[32] 문서 몇년 후, [[어니스트 사토우]]는 이 책을 읽고 일본행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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