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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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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루아 왕조는 카페 왕조의 단절 이후 프랑스를 통치한 왕조이다. 필리프 4세의 후손들이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고, 필리프 4세의 조카인 필리프 드 발루아가 필리프 6세로 즉위하며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발루아 왕조는 백년 전쟁, 종교 전쟁 등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는 이탈리아 영토를 잃었고, 종교 전쟁으로 인해 왕조는 쇠퇴했다. 앙리 3세의 사망으로 발루아 왕조는 단절되었고, 부르봉 왕가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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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가 - [인물]에 관한 문서
개요
필리프 드 발루아의 문장
발루아 백작의 문장
가문 명칭발루아 가
국가프랑스 왕국 (1328년 - 1589년)
부르고뉴 공국 (1363년-1482년)
나폴리 왕국 (1389년-1399년, 1435년-1442년, 1501년-1504년)
밀라노 공국 (1499년-1512년, 1515년-1521년)
브르타뉴 공국 (1514년-1547년)
뇌샤텔 공국 (1543년-1707년, 서자 가문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1573년-1575년)
모가카페 왕조
창시자샤를 드 발루아 백작
마지막 통치자앙리 3세, 마리 드 뇌무르
설립 년도1284년
분가
명칭 정보
발루아 (Valois) 의미문자 그대로 "계곡의" 또는 "계곡에서 온"을 의미

2. 카페 왕조의 단절과 발루아 왕조의 성립

카페 왕조필리프 4세는 세 아들(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과 딸 이자벨라를 두어 왕조가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세 아들은 모두 프랑스의 왕이 되었지만, 젊어서 죽거나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딸만 두었다. 1328년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은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다.

결국 필리프 4세의 조카인 필리프 6세가 즉위하여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으나, 이 문제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백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2. 1. 예상치 못한 왕위 계승 문제

카페 왕조필리프 4세가 세 아들(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과 딸 이자벨라를 남겨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세 아들은 차례로 프랑스의 왕이 되었지만, 모두 젊어서 죽거나 아들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딸들만 남겼다. 1328년 샤를 4세가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은 문제가 되었다.

당시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세 명의 후보는 다음과 같다.

후보자가계주장 근거
필리프 드 발루아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샤를 4세의 사촌필리프 4세의 조카, 샤를 4세의 섭정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이자벨라의 아들, 샤를 4세의 조카필리프 4세의 외손자
나바라 왕 펠리페 3세루이 데브뢰의 아들, 루이 10세의 사위샤를 4세의 사촌이자 처남, 조카사위



프랑스는 이사벨라가 여성으로서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어떤 권리도 양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발루아의 필리프를 새로운 왕으로 선택했다. 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되었다. 나바라 왕위루이 10세의 딸인 잔에게로 넘어가 나바라 여왕 잔 2세가 되었다.

외교와 협상이 실패하자, 에드워드 3세는 무력으로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하다가, 결국 두 국왕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필리프 6세가 아키텐 공작령을 몰수했다(1337년). 에드워드는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신 자신이 정당한 프랑스 국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백년 전쟁 (1337년–1453년)을 촉발하는 데 기여했다.[3]

2. 2. 왕위 계승 후보들과 살리카법

필리프 4세는 아들 셋(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과 딸 하나(이자벨라)를 두어 카페 왕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세 아들은 모두 프랑스의 왕이 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죽거나 아들을 남기지 못했다. 1328년 샤를 4세가 사망하자 프랑스 왕위 계승은 복잡해졌다.

당시 왕위 계승 권리를 주장한 세 명은 다음과 같다.

후보관계비고
필리프 6세필리프 4세의 동생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 샤를 4세의 사촌샤를 4세가 죽기 전 섭정으로 선택
에드워드 3세샤를 4세의 누나 이자벨라의 아들, 샤를 4세의 조카어머니 이사벨라를 통해 왕위 주장
나바라 왕 펠리페 3세필리프 4세의 동생 루이 데브뢰의 아들, 루이 10세의 사위샤를 4세에게 사촌이자 처남, 조카사위



프랑스는 여성의 왕위 계승 불가를 이유로 이사벨라의 주장을 거부했다. 결국 프랑스 유력자들은 필리프 6세를 왕으로 선택했다. 나바라 왕국루이 10세의 딸 잔에게 넘어갔다.

외교와 협상이 실패하자, 에드워드 3세는 무력으로 왕위를 주장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불안정한 평화를 유지하다가, 결국 갈등이 고조되어 필리프 6세가 아키텐 공작령을 몰수했다(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백년 전쟁(1337년–1453년)을 일으켰다.

살리카법에 따라, 1589년 앙리 3세 사망으로 발루아 왕가의 남계가 단절되자, 부르봉 가문의 수장이자 카페 왕조의 장자 방계였던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이 되었다.[4]

3. 백년전쟁 (1337-1453)

백년 전쟁은 발루아 왕가와 플랜태저넷 왕가 간의 긴 왕위 계승 전쟁이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6세의 초기 통치는 프랑스에 희망적이었다. 필리프 6세는 자신의 봉신인 플랑드르 백작을 위해 플랑드르인들과 싸웠고, 백작을 권력에 복귀시켰다. 프랑스의 동맹국인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공격은 필리프 6세가 기옌을 몰수하도록 자극했다. 과거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 왕에게 복종해야 했으나, 프랑스 왕의 후손인 에드워드 3세는 스스로 왕위를 주장했다. 당시 프랑스는 국력의 절정에 있었고,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에드워드 3세의 초기 전략은 플랑드르와 제국 제후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었으나, 이 동맹은 비용이 많이 들고 비생산적이었다. 휴전 상태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브르타뉴 계승 전쟁에 개입했다. 1346년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침공하여 영토 점령보다는 약탈을 감행했다.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잉글랜드군에게 처참하고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고, 에드워드 3세는 칼레를 점령했다.

1350년 프랑스의 장 2세는 필리프 6세의 뒤를 이었다. 그는 카페 왕가의 에브뢰 분가 출신인 나바라의 샤를 2세에게 위협받았다. 샤를 2세는 어머니의 권리로 프랑스 왕위를 দাবি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프랑스의 필리프 4세의 선배 후손이었다. 샤를 2세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쉽게 편을 바꿨기 때문에 프랑스와 잉글랜드 양측 모두에게 소외당했다. 1356년, 에드워드 3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는 프랑스에서 슈보슈를 이끌었다. 장 2세는 흑태자를 추격했으나, 흑태자는 우세한 프랑스군과의 전투를 피하려 했다. 협상이 결렬된 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는 또다시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고, 장 2세는 포로로 잡혔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침공하여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려 했으나, 도팽 프랑스의 샤를 5세는 전투를 피했고, 랭스 시는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브레티니 조약에서 잉글랜드는 완전한 주권을 가진 확대된 아키텐을 얻었고, 투렌 공작령, 앙주와 메인의 백작령, 브르타뉴와 플랑드르의 종주권을 포기했으며, 프랑스 왕위 주장도 포기했다.

1364년 프랑스의 샤를 5세는 왕이 되었다. 그는 카스티야 내전에서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를 지원했고, 흑태자는 카스티야의 페드로를 지원했다. 흑태자가 승리했지만 페드로는 경비를 지불하지 않았다. 흑태자는 아키텐에서 세금을 인상하여 손실을 회복하려 했고, 이는 아키텐 주민들이 프랑스 왕에게 호소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재개되었고, 프랑스는 영토를 회복했다. 1380년 샤를 5세가 사망했을 때 잉글랜드에게는 칼레, 보르도, 바욘만 남았다.

봉건 귀족 가문들은 왕족 제후들로 대체되었다. 기옌 몰수 후 유일하게 남은 비(非) 카페티안 귀족은 플랑드르 백작이었다. 몽포르 브르타뉴 공작, 에브뢰 가문, 부르봉 가문, 발루아 가문 제후들이 왕국의 주요 귀족을 구성했다.

11세에 왕위에 오른 프랑스의 샤를 6세의 통치는 1226년 루이 9세 이후 최초의 미성년 통치였다. 권력은 그의 삼촌들(앙주, 베리, 부르고뉴 공작)에게 넘어갔다. 공작들은 군주의 자원을 낭비했다. 샤를 6세는 21세에 섭정을 종결시켰지만, 광기로 인해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부르고뉴 공작이 권력을 잡았으나, 왕의 형제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이에 도전했다. 이들의 경쟁은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으로 이어졌다.

1415년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프랑스를 침공,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르마냑 파를 궤멸시켰다. 오를레앙과 부르봉 공작이 포로로 잡혔고, 부르고뉴 파가 파리에서 우위를 점했다. 헨리 5세는 노르망디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아르마냑 파는 공포 없는 자 요한 부르고뉴 공작을 암살했는데, 이는 루이 1세 암살에 대한 복수였다. 새로운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다. 트루아 조약에서 헨리 5세는 프랑스 섭정 및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했다. 도팽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상속권을 잃었다. 이 조약은 삼부회에서 비준되었다.

트루아 조약은 발루아 가문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대체로 왕을 고수했기에 이 조약은 프랑스 북부의 잉글랜드 통치 영토와 부르고뉴, 브르타뉴 동맹 공작들만이 인정했다. 헨리 5세는 샤를 6세보다 먼저 사망하여, 랭커스터 프랑스 왕국의 미래는 잉글랜드의 헨리 6세와 베드퍼드 공작 존에게 맡겨졌다.

베드퍼드의 지도력은 샤를 7세의 프랑스 북부 탈환을 막았다. 1429년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포위전을 해제하고 랭스에서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랑스의 선전 승리를 이끌었다. 베드퍼드 형제와 삼촌 간의 권력 투쟁은 잉글랜드의 전쟁 노력을 방해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1435년 아라스 회의에서 프랑스 왕과 화해했고, 베드퍼드는 그해 사망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긴 휴전을 맺었다. 프랑스는 전쟁 재개를 준비했고, 잉글랜드는 휴식을 취했다. 1450년 프랑스는 노르망디를, 이듬해에는 기옌을 되찾았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잉글랜드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칼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발루아 가문의 계승이 유지, 확인되었다.

3. 1. 전쟁의 발발

필리프 4세의 세 아들(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은 모두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328년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에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왕위를 주장한 세 명은 다음과 같다.

결국 필리프 드 발루아가 필리프 6세로 즉위하여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으나, 이 문제는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백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백년 전쟁은 발루아 가문과 플랜태저넷 가문 간의 긴 왕위 계승 전쟁으로 볼 수 있다.

3. 2. 프랑스의 위기와 극복

필리프 6세의 초기 통치는 프랑스에 희망적이었다. 백년 전쟁은 발루아 왕가와 플랜태저넷 왕가 간의 긴 왕위 계승 전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새로운 왕은 자신의 봉신인 플랑드르 백작을 위해 플랑드르인들과 싸웠고, 그 백작을 권력에 복귀시켰다. 프랑스의 동맹국인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공격은 필리프 6세가 기옌을 몰수하도록 자극했다. 과거에는 잉글랜드 왕들이 프랑스 왕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의 후손인 에드워드는 스스로 왕위를 주장했다. 당시 프랑스는 국력의 절정에 있었다. 아무도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초기 전략은 플랑드르와 제국 제후들과 동맹을 맺는 것이었다. 이 동맹은 비용이 많이 들었고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았다. 휴전 상태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 왕은 브르타뉴 계승 전쟁에 개입했다. 1346년 에드워드는 프랑스를 침공하여 영토를 점령하기보다는 시골을 약탈했다.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크레시 전투에서 에드워드 3세와 맞붙었고, 이 전투는 프랑스에게 처참하고 굴욕적인 패배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가 자신의 승리에서 얻을 수 있었던 최대 이득은 칼레의 점령이었다.

프랑스의 장 2세는 1350년 아버지 필리프 6세의 뒤를 이었다. 그는 카페 왕가의 에브뢰 분가 출신인 나바라의 샤를 2세에게 위협을 받았다. 그는 어머니의 권리에 따라 프랑스 왕위를 갈망했는데, 어머니는 프랑스의 필리프 4세의 선배 후손이었다. 샤를의 성격은 결국 프랑스와 잉글랜드 군주 모두를 소외시켰는데, 그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할 때마다 쉽게 편을 바꿨기 때문이다. 1356년,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이자 상속자인 흑태자 에드워드는 프랑스에서 슈보슈를 이끌었다. 장은 흑태자를 추격했는데, 그는 프랑스 왕의 우세한 군대와의 전투를 피하려 했다. 협상이 결렬되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는 또 한 번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고, 그들의 왕은 포로로 잡혔다. 에드워드는 프랑스를 침공하고 랭스에서 스스로 대관식을 치르면서 승리를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새로운 지도자인 도팽 프랑스의 샤를 5세는 또 다른 격렬한 전투를 피했고, 랭스시는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브레티니 조약에서 잉글랜드 왕은 완전한 주권을 가진 확대된 아키텐을 얻었고, 투렌 공작령, 앙주와 메인의 백작령, 브르타뉴와 플랑드르의 종주권을 포기했으며,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도 포기했다.

프랑스의 샤를 5세는 1364년 왕이 되었다. 그는 카스티야 내전에서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를 지원했고, 흑태자는 당시 국왕인 카스티야의 페드로를 지원했다. 흑태자가 승리했지만 페드로는 그의 경비를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다. 흑태자는 아키텐에서 세금을 인상하여 손실을 회복하려 했고, 이는 그들이 프랑스 왕에게 호소하도록 자극했다. 전쟁이 재개되었다. 프랑스는 지역 곳곳에서 영토를 회복했다. 샤를이 1380년에 사망했을 때 잉글랜드에게는 칼레, 보르도, 바욘만 남았다.

봉건 귀족의 고대하고 위대한 가문들은 대체로 동등하게 강력한 계급, 즉 왕족의 제후들로 대체되었다. 기옌의 몰수로 인해 유일하게 남은 비 카페티안 귀족은 플랑드르 백작이었다. 몽포르 브르타뉴 공작, 에브뢰 가문과 부르봉 가문, 발루아 가문의 제후들이 왕국의 위대한 귀족을 구성했다.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프랑스의 샤를 6세의 통치는 1226년 루이 9세 이후 처음으로 미성년 통치였다. 권력은 그의 삼촌들인 앙주, 베리, 부르고뉴 공작의 손으로 넘어갔다. 공작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주의 자원을 낭비했다. 앙주는 나폴리 왕국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추구했고, 베리는 랑그독에서 자신의 대규모 영지를 통치했으며, 부르고뉴는 플랑드르의 상속녀와 결혼하여 파리에서 자신의 광대한 영지를 통치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샤를은 21세에 삼촌의 섭정을 종결시켰는데, 그는 14세 때부터 자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초기 통치는 유망했지만, 어머니를 통해 부르봉 공작에게서 물려받았을지도 모르는 광기는 프랑스에 재앙이 될 것으로 드러났다. 제후와 귀족 중 가장 강력한 부르고뉴는 자연스럽게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조카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즉 왕의 형제는 그의 권위에 도전했다. 두 제후와 그들의 후손 간의 경쟁은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으로 이어졌다.

1415년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에드워드 3세의 증손으로 프랑스를 침공했다.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르마냑 파는 잉글랜드와 싸워 궤멸되었다. 오를레앙과 부르봉 공작이 포로로 잡혔고, 부르고뉴 파는 파리에서 우위를 점했다. 헨리는 노르망디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아르마냑은 공포 없는 자 요한, 부르고뉴 공작을 암살했는데, 이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암살에 대한 늦은 복수였다. 새로운 공작인 선량공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다. 트루아 조약에서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섭정이자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며, 프랑스 왕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했다. 도팽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사실상 상속권을 잃었다. 더 큰 법적 외관을 갖추기 위해 그해 말 삼부회에서 비준되었다.

트루아 조약을 받아들이는 것은 발루아 가문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잉글랜드는 왕을 바꾸는 데 익숙했지만 프랑스는 대체로 왕을 고수했다. 이 조약은 프랑스 북부의 잉글랜드 통치 영토와 부르고뉴와 브르타뉴의 동맹 공작들만이 인정했다. 헨리 5세는 병약한 장인 샤를 6세보다 먼저 사망하여 랭커스터 프랑스 왕국의 미래를 갓난아들 잉글랜드의 헨리 6세와 그의 형제 베드퍼드 공작 존의 손에 맡겼다.

베드퍼드의 유능한 지도력은 샤를 7세가 프랑스 북부를 되찾는 것을 막았다. 1429년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포위를 성공적으로 해제하고 랭스에서 왕의 대관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중요한 프랑스 선전 승리였다. 베드퍼드, 그의 형제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 삼촌 보퍼트 추기경 간의 권력 투쟁은 잉글랜드의 전쟁 노력을 방해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글로스터의 실망으로 인해 1435년 아라스 회의에서 프랑스 왕과 화해했다. 베드퍼드는 그해에 사망했다.

전쟁 당사자들은 긴 휴전을 맺었는데, 그 동안 프랑스 왕은 전쟁 재개를 준비했고 잉글랜드는 휴식을 취하고 새로운 세금에서 벗어났다. 1450년까지 프랑스는 노르망디를, 이듬해에는 기옌을 되찾았다. 잉글랜드가 손실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시도는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로 끝났다. 이 승리로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발루아 가문의 계승이 유지되고 확인되었다.

3. 3. 잔 다르크의 등장과 프랑스의 승리

백년 전쟁은 발루아 왕가와 플랜태저넷 왕가 간의 왕위 계승 전쟁이었다. 필리프 6세의 초기 통치는 프랑스에 희망적이었으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의 후손으로서 왕위를 주장했다. 당시 프랑스는 국력의 절정에 있었기에 잉글랜드가 프랑스 왕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칼레 점령이 최대 성과였다. 장 2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 후 포로가 되었다. 브레티니 조약에서 잉글랜드는 프랑스 왕위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완전한 주권을 가진 확대된 아키텐을 얻었다.

샤를 5세는 전쟁을 재개하여 프랑스 영토를 회복했다. 1380년 그가 사망했을 때 잉글랜드에게는 칼레, 보르도, 바욘만 남았다.

샤를 6세는 미성년 통치로 즉위했고, 권력은 삼촌들에게 넘어갔다. 그는 광기로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고,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이 발발했다.

1415년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프랑스를 침공,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했다. 트루아 조약으로 헨리 5세는 프랑스 섭정 및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도팽 샤를 7세는 상속권을 잃었다.

잔 다르크는 1429년 오를레앙 포위전을 풀고 랭스에서 샤를 7세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랑스의 선전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프랑스는 아라스 회의로 부르고뉴 공작과 화해하고,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승리하여 잉글랜드를 칼레 제외 프랑스 전역에서 몰아냈다. 이로써 발루아 가문의 왕위 계승이 확정되었다.

4. 중앙집권화와 절대왕정 강화

샤를 7세는 프랑스 왕국을 서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재건했다. 그는 프랑스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했고, 부르주 실용 제재를 통해 교황의 권한을 제한했다. 루이 11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뒤집어 제재를 폐지했고, 상비군 대신 스위스 용병을 고용했다. 그는 용담공 샤를과 평생 대립했으며, 1465년 공익 동맹이 결성되어 왕권에 도전했다. 루이 11세는 이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척하며 타협했다.

루이 11세는 전쟁보다는 음모와 외교에 의존했다. 그는 봉신과 주변 국가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며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그는 형제에게서 노르망디를 되찾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에게 뇌물을 주어 프랑스 공격을 중단시켰으며, 부르고뉴 영토 내 반란을 조장했다. 1477년 용담공 샤를이 사망하자, 그는 부르고뉴 공작령을 강제로 빼앗았다. 그러나 용담공 샤를의 상속녀인 부르고뉴의 마리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은 이후 프랑스에 큰 위협이 되었다. 1481년, 앙주 가문의 마지막 남성이 사망하면서 앙주 영토 전부가 국왕에게 귀속되었다. 루이 11세의 통치 말기, 프랑스 왕권은 절대적인 권력을 확립하게 되었다.[1]

4. 1. 샤를 7세의 개혁

샤를 7세는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낸 후 프랑스 왕국을 서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재건했다. 그는 로마 시대 이후 프랑스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했고, 부르주 실용 제재를 통해 갈리아 교회 내 교황의 권한을 제한했다. 그러나 그의 만년은 장남이자 상속자인 도팽 루이와의 불화로 얼룩졌는데, 루이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했다. 도팽은 음모 혐의로 궁정에서 추방되었고, 아버지의 죽음 전까지 프랑스로 돌아오지 않았다.

4. 2. 루이 11세의 권력 강화

루이 11세는 1461년 아버지 샤를 7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통치 초기, 루이 11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일부 변경했는데, 교황을 기쁘게 하기 위해 부르주 실용 제재를 폐지하고, 상비군 대신 스위스 용병을 고용했다. 왕자 시절 아버지에게 대항했던 귀족들과 동맹을 맺었으나, 왕이 된 후에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그들을 굴복시켜야 했다.[1]

루이 11세는 평생 용담공 샤를과 대립했다. 1465년, 공익 동맹이 결성되어 왕권에 도전했는데, 이 동맹에는 국왕의 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 용담공 샤를, 브르타뉴 공작, 부르봉 공작, 로렌 공작 등이 참여했다. 루이 11세는 이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척하며 노르망디 공작령을 동생에게 양도하기도 했다.[1]

그러나 루이 11세는 전쟁보다는 음모와 외교를 통해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봉신과 주변 국가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며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또한, 기회를 틈타 동생에게서 노르망디를 되찾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에게 뇌물을 주어 프랑스 공격을 중단시켰으며, 부르고뉴 영토 내 반란을 조장했다.[1]

1477년 용담공 샤를이 사망하자, 루이 11세는 부르고뉴 공작령을 강제로 빼앗았다. 그러나 용담공 샤를의 상속녀 부르고뉴의 마리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은 이후 프랑스에 큰 위협이 되었다. 1481년, 앙주 가문의 마지막 남성이 사망하면서 앙주 영토 전부가 국왕에게 귀속되었다. 루이 11세의 통치 말기, 프랑스 왕권은 절대적인 권력을 확립하게 되었다.[1]

5. 이탈리아 전쟁 (1494-1559)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은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까지 이어지며 16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정세를 뒤흔든 주요 분쟁이었다. 루이 12세는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후손으로서 밀라노 공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이탈리아 전쟁을 이어갔고, 프랑수아 1세는 마리냐노 전투에서 승리하며 밀라노를 장악하기도 했다. 그러나 1519년 황제 선거에서 카를 5세가 선출되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잡히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프랑스-오스만 동맹을 맺는 등 외교적 노력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에 맞섰다. 앙리 2세는 메츠, , 베르됭을 점령하며 프랑스의 영토를 확장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556년 카를 5세가 퇴위하고 합스부르크 영토가 분할된 후, 프랑스는 칼레를 탈환하며 오랜 숙원을 풀었다. 결국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 전쟁은 막을 내렸고, 프랑스는 살루초를 제외한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지만 칼레와 세 주교령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반면, 펠리페 2세는 프랑슈콩테를 비롯한 이탈리아 내 주요 영토를 확고히 하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로 자리매김했다.[4]

5. 1. 전쟁의 배경

샤를 8세는 1483년 13세의 나이로 부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샤를은 안과 결혼하여 프랑스를 향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완전한 포위를 막았다. 앙주 가문의 상속자로서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로 결정했고, 이것이 이탈리아 전쟁의 시작이었다. 1494년 9월, 샤를은 25,000명의 병력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1495년 2월 22일까지 사실상 저항 없이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빠른 진격과 강력한 힘은 이탈리아 강대국들을 두렵게 했다.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 만토바 공국, 스페인과 나폴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으로 구성된 베네치아 동맹이 프랑스에 대항하여 연합했다. 나폴리에 갇히고 싶지 않았던 샤를은 포르노보 전투에서 그들과 싸워야 했다. 샤를은 프랑스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지만, 모든 정복지와 전리품을 잃었다. 그는 캠페인으로 인해 발생한 부채로 인해 전쟁을 재개할 수 없었고, 1498년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발루아 가문의 주요 계통은 단절되었다. 그의 사촌이자 오를레앙 공작이 그 뒤를 이었고, 그는 루이 12세가 되었다.

루이 12세는 프랑스를 위해 브르타뉴 지방을 유지하고자 선임자의 미망인인 브르타뉴의 안과 결혼했다.[1] 새로운 왕은 또한 선임자의 이탈리아 정책을 이어갔다.[1] 오를레앙 공작들은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후손이었으며, 그녀를 통해 밀라노 공국을 주장했다.[1] 1499년부터 1512년까지 루이 12세는 1500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밀라노 공작이었다.[1] 프랑스의 군사 활동은 이탈리아에서 계속되었고, 지배적인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동맹이 결성되었다.[1] 루이는 아들 없이 사망했고, 그의 사촌이자 사위인 앙굴렘 백작 프랑수아가 뒤를 이었다.[1]

프랑수아 1세는 오를레앙 가문의 방계 가문에 속했다.[2]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수아는 선임자를 밀라노에서 몰아낸 스위스군을 격파하고 공작령을 장악했다.[2] 1519년 황제 선거에서 스페인, 프랑스, 잉글랜드의 왕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싸웠다.[2] 스페인 왕은 사망한 황제의 손자였지만, 선거인들은 그를 프랑스 왕만큼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2] 왕들은 뇌물을 사용했고, 스페인 왕은 카를 5세가 되었다.[2]

스페인 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선출되면서 그는 명실상부한 유럽 최초의 군주가 되었다.[3] 분노한 프랑스 왕은 황제에게 플랑드르와 아르투아에 대한 경의를 표할 것을 요구했고, 황제는 부르고뉴 공국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재확인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3] 프랑스 왕실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쟁은 16세기 나머지 기간을 지배했다.[3] 황제는 1521년 프랑스군으로부터 밀라노를 빼앗았다.[3] 잉글랜드 왕과 교황은 황제를 지원했다.[3] 프랑스는 사방에 적들에게 둘러싸였다.[3] 국내 문제로 인해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와 프랑스 원수가 황제에게 전향했다.[3]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는 패배했고, 왕 자신도 포로로 잡혔다.[3] 프랑수아는 마드리드 조약을 통해 석방되었는데, 이 조약에서 그는 나폴리와 밀라노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부르고뉴를 스페인에 넘겨주고, 플랑드르와 아르투아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고, 두 아들을 인질로 내주었다.[3] 프랑수아는 조약을 파기했다.[3] 황제와의 투쟁에서 종종 고립된 것을 발견한 프랑수아는 기독교 유럽에서 비판을 받을만한 술탄과 프랑스-오스만 동맹을 맺었다.[3] 프랑수아는 독일 군주들의 개신교 개종을 지원했는데, 이는 황제에 대항할 잠재적 동맹국을 늘렸기 때문이다.[3] 그의 영토에서는 개신교도들이 억압받았다.[3]

앙리 2세는 1547년 왕위에 올랐다.[4] 그는 그의 후계자들처럼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갔다.[4] 그는 자신의 왕국에서 개신교도를 박해했지만, 해외의 개신교도는 그의 동맹이었다.[4] 앙리는 메츠, , 베르됭을 점령했다.[4] 프랑스의 공세는 이탈리아에서 실패했다.[4] 1556년 카를 5세는 퇴위하여 합스부르크 영토를 그의 아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분할했는데, 그는 스페인과 저지대를 얻었고, 그의 형제 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가 되었다.[4] 잉글랜드가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후 프랑스는 칼레를 탈환했다.[4] 카토-캉브레지 조약 (1559)은 이탈리아 전쟁을 종식시켰다.[4] 프랑스는 살루초를 제외한 모든 이탈리아 영토를 잃었고, 칼레와 세 주교령의 소유를 확인받았다.[4] 그것은 자신에게 속한 것을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펠리페 2세의 외교적 승리였다.[4] 스페인 왕은 프랑슈콩테를 유지했고,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프레시디의 소유를 확인받아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되었다.[4]

5. 2.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립

샤를 8세는 안과 결혼하여 프랑스를 향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완전한 포위를 막았다. 앙주 가문의 상속자로서 샤를 8세는 나폴리 왕국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1494년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1495년 목표를 달성했으나, 베네치아 동맹의 연합으로 포르노보 전투를 치르고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모든 정복지와 전리품을 잃었다. 샤를 8세는 전쟁으로 인한 부채와 1498년 사고로 사망하면서 발루아 가문의 주요 계통은 단절되었다. 그의 사촌 루이 12세는 브르타뉴의 안과 결혼하여 프랑스를 위해 그 지방을 유지하고 이탈리아 정책을 이어갔다.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후손으로서 밀라노 공작령을 주장, 1499년부터 1512년까지(1500년 제외) 밀라노 공작이었다. 루이 12세는 아들 없이 사망했고, 그의 사촌이자 사위인 프랑수아 1세가 1515년에 즉위했다.

프랑수아 1세는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을 격파하고 밀라노 공작령을 장악했다. 1519년 황제 선거에서 스페인 왕 카를 5세가 황제가 되면서 프랑스 왕실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경쟁은 16세기 나머지 기간을 지배했다. 황제는 1521년 프랑스군으로부터 밀라노를 빼앗았고, 부르봉 공작 샤를 3세는 황제에게 전향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프랑수아 1세는 포로로 잡혔다. 마드리드 조약으로 석방되었으나 조약을 파기했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오스만 동맹을 맺고 독일 군주들의 개신교 개종을 지원했다.

앙리 2세는 1547년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갔다. 그는 메츠, , 베르됭을 점령했다. 1556년 카를 5세는 퇴위하여 합스부르크 영토를 펠리페 2세와 페르디난트 1세에게 분할했다. 잉글랜드가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후 프랑스는 칼레를 탈환했다. 카토-캉브레지 조약 (1559)으로 이탈리아 전쟁이 종식되었고, 프랑스는 살루초를 제외한 모든 이탈리아 영토를 잃었으나 칼레와 세 주교령의 소유를 확인받았다. 스페인 왕은 프랑슈콩테를 유지했고,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의 소유를 확인받아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되었다.

5. 3. 카토-캉브레지 조약

앙리 2세는 메츠, , 베르됭을 점령했지만, 이탈리아에서의 공세는 실패했다. 1556년 카를 5세가 퇴위하고 합스부르크 영토를 분할하여, 그의 아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스페인과 저지대를, 그의 형제 페르디난트 1세는 황제가 되었다. 잉글랜드가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후, 프랑스는 칼레를 탈환했다.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이탈리아 전쟁이 종식되었다. 프랑스는 살루초를 제외한 모든 이탈리아 영토를 잃었지만, 칼레와 세 주교령의 소유는 확인받았다. 이 조약은 자신에게 속한 것을 포기하지 않은 펠리페 2세의 외교적 승리였다. 스페인 왕은 프랑슈콩테를 유지했고,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프레시디 국가의 소유를 확인받아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가 되었다.

6. 종교 전쟁 (1562-1598)

프랑스 종교 전쟁은 발루아 왕조 후반기 프랑스를 뒤흔든 일련의 내전이다. 가톨릭개신교(위그노) 간의 종교적 갈등뿐만 아니라, 기즈 가문과 부르봉 가문 등 유력 귀족 가문 간의 권력 투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562년 바시 학살을 계기로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가톨릭 세력이 위그노 예배자들을 학살한 것으로, 이후 30여 년간 프랑스는 종교적 분열과 폭력 사태에 휩싸였다. 초기에는 기즈 가문이 가톨릭 세력을 주도하며 위그노에 대한 강경한 탄압을 이끌었다.

전쟁은 여러 차례의 전투와 평화 협정을 거치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나바라 왕 앙투안, 콩데 공 루이, 모트모렌시 앤 등 주요 인물들이 전쟁 중에 사망하거나 암살당했다. 위그노는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끈질기게 저항하며 세력을 유지했다.

1572년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은 종교 전쟁 중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였다. 샤를 9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위그노 지도자 나바라의 앙리의 결혼식을 위해 파리에 모인 수천 명의 위그노들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전역에 걸쳐 종교적 증오와 폭력을 더욱 심화시켰다.

1584년 이후에는 앙리 3세, 나바라의 앙리, 기즈 공작 앙리 1세 사이의 세 앙리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결국 앙리 3세와 기즈 공작 앙리 1세가 암살되고, 나바라의 앙리가 앙리 4세로 즉위하면서 종결되었다.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종교 전쟁을 종식시키고 프랑스의 안정을 되찾았다.

6. 1. 종교 갈등의 심화

프랑스 종교 전쟁으로 특징지어지는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시기에 종교 갈등은 심화되었다. 앙리 2세가 1559년 마상 시합 사고로 사망하고, 그의 맏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왕비의 외가 친척인 기즈 가문은 어린 국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1]

기즈 가문은 부르봉 가문을 천적으로 여겼다. 부르봉 가문의 지도자인 나바라 왕 앙투안과 콩데 공 루이는 프로테스탄트였다. 기즈 가문은 스스로를 가톨릭의 챔피언으로 여겼다. 그들은 콩데를 처형하려던 찰나, 젊은 국왕이 사망했다.[1]

1560년, 어린 아들 샤를 9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메디치 가문은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바시 학살은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첫 번째" 종교 전쟁을 촉발했다. 나바라와 기즈는 이 전쟁에서 사망했다. 모트모렌시 앤 프랑스 대원수는 두 번째 전쟁의 주요 사상자였다. 콩데는 세 번째 전쟁에서 사망했다. 위그노는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야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1]

나바라 왕 앙리는 1572년, 샤를 9세의 여동생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했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을 화해시키기 위한 것으로 기대되었던 이 결혼은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이라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모인 위그노들이 대량 학살당했다. 나바라와 콩데는 목숨을 건졌지만, 개종을 강요받고 억류되었다. 1573년, 국왕의 동생인 앙주 공작 앙리는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되었다.[1]

1574년, 앙리가 폴란드 왕으로 즉위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그는 프랑스의 앙리 3세로서 프랑스 왕위를 계승했다. 이듬해, 국왕의 유일한 남은 동생인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는 궁정을 탈출하여 콩데와 나바라에 합류했다. 알랑송은 앙주 공작이 되었다. 위그노에 대한 양보는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게 했다. 동맹은 로렌 가문의 공작들이 이끌었으며, 스페인의 지원을 받았다. 위그노는 남서부를 장악했고 잉글랜드와 독일의 제후들과 동맹을 맺었다. 1584년, 국왕의 동생이 사망하면서, 위그노인 나바라 왕은 프랑스 왕위의 유력한 상속자가 되었다. 가톨릭 동맹의 압력으로, 국왕은 뇌무르 조약을 발표하여 프로테스탄트교를 불법화하고, 프로테스탄트가 왕실 관직을 맡는 것을 금지했다.[1]

세 앙리의 전쟁이 일어났다. 국왕이 이끄는 왕당파, 나바라의 앙리가 이끄는 위그노, 그리고 기즈 공작 앙리 1세가 이끄는 가톨릭 동맹이 프랑스의 지배권을 놓고 삼파전을 벌였다. 바리케이드의 날 이후, 앙리 3세는 파리에서 도망쳤다. 기즈는 국왕의 명시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파리에 입성했고, 국왕은 기즈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기즈의 암살은 가톨릭 동맹의 비난을 샀다. 앙리 3세는 나바라와의 동맹을 모색했다. 두 국왕은 대군을 이끌고 파리를 점령하려던 찰나, 프랑스 국왕이 암살자의 손에 의해 사망했다. 그의 죽음으로, 발루아 가문의 남계는 프랑스에서 261년 동안 통치한 후 완전히 단절되었다.[1]

6. 2.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나바라 왕 앙리는 1572년 샤를 9세의 여동생 프랑스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간의 화해를 목표로 했으나,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나면서 기대와는 달리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에 모인 위그노들이 대량 학살당했으며, 나바라와 콩데는 목숨을 건졌지만, 개종을 강요받고 억류되었다. 샤를 9세는 학살을 허용한 죄책감에 평생 시달렸다.

6. 3. 세 앙리 전쟁과 발루아 왕조의 종말

프랑스 종교 전쟁으로 특징지어지는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시기, 앙리 2세는 1559년 마상 시합 사고로 사망했고, 그의 맏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기즈 가문은 어린 국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1560년 샤를 9세가 즉위하자 메디치 가문은 권력 균형을 위해 노력했다. 바시 학살은 가톨릭과 위그노 간의 종교 전쟁을 촉발시켰다.

1572년 나바라 왕 앙리는 프랑스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했으나,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이 벌어져 파리에 모인 위그노들이 대량 학살당했다. 1574년 앙주 공작 앙리는 프랑스의 앙리 3세로 즉위했다. 위그노에 대한 양보는 가톨릭 동맹 결성을 초래했고, 이들은 스페인의 지원을 받았다. 1584년 국왕의 동생이 사망하면서 위그노인 나바라 왕이 유력한 상속자가 되었다.

세 앙리의 전쟁에서 왕당파, 위그노, 가톨릭 동맹이 프랑스의 지배권을 놓고 삼파전을 벌였다. 바리케이드의 날 이후 앙리 3세는 파리에서 도망쳤고, 기즈 공작 앙리 1세를 암살했다. 앙리 3세는 나바라와 동맹을 맺었으나, 프랑스 국왕이 암살당하면서 발루아 가문의 남계는 261년 만에 단절되었다.[1]

7. 발루아 왕조의 분가

샤를 5세의 차남 루이를 시조로 하는 발루아-오를레앙 가문과, 오를레앙 공 루이의 아들 장을 시조로 하는 발루아-앙굴렘 가문이 있다. 발루아-앙굴렘 가문 출신 프랑수아 1세는 1515년 루이 12세의 사망으로 프랑스 왕위에 즉위했다. 1589년 앙리 3세가 암살될 때까지 5명의 왕이 이 가문에서 나왔다.

오를레앙 공 루이의 서자 장 드 뒬누아를 시조로 하는 오를레앙-롱게빌 가문은 롱게빌 백작에서 롱게빌 공작으로 승작되었고, 17세기 말까지 가계가 이어졌다. 앙리 2세의 서자 앙리 드 생 레미를 시조로 하는 가계는 19세기 말까지 존속했는데, 목걸이 사건으로 유명한 잔 드 라 모트 발루아가 이 가문 출신으로 여겨진다.

샤를 2세를 시조로 하는 발루아-아랑송 가문은 잔 다르크의 전우로 알려진 장 2세를 배출했다. 서자 계통을 제외하면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된 가문이었지만, 1525년 샤를 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

앙주 공작 루이 1세를 시조로 하는 발루아-앙주 가문은 나폴리 왕위 및 프로방스 백작령을 두고 트라스타마라 가문 등과 다투었다. 1481년 샤를 5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앙주 가문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했다.

장 2세의 셋째 아들 장을 시조로 하는 발루아-베리 가문은 베리 공 장이 아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남계 계승자가 없어 단절되었다.

필리프 2세 (담대한 공)를 시조로 하는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부르고뉴파를 형성하여 프랑스에서 세력을 가졌으나, 샤를 (돌격공)이 루이 11세와의 항쟁에서 패배하여 멸망했다. 그 후, 유지를 둘러싼 싸움이 계기가 되어, 프랑스 왕가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항쟁이 발발했다.

7. 1. 발루아-오를레앙 가문

샤를 5세의 차남 루이가 오를레앙 공에 서임된 것이 이 가문의 시작이다. 루이의 아들 샤를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과 결혼하여 아르마냐크파를 형성했다. 그의 아들 루이 12세는 발루아 가 적통의 단절로 1498년 프랑스 왕위에 올랐으나, 1대 만에 단절되었다.

필리프는 프랑스에서 처음 오를레앙 공에 서임되었으나, 자식이 없어 1대 만에 공작위는 소멸되었다.

7. 1. 1. 발루아-앙굴렘 가문

장, 앙굴렘 백작 (comte d'Angoulême프랑스어)은 루이 1세 도를레앙 공작의 아들이다.

앙리 3세를 마지막으로 발루아 왕가 방계의 대가 완전히 끊기게 되면서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가 프랑스의 왕권을 이어받았다.

'''발루아-오를레앙-앙굴렘 가문'''

  • 장, 앙굴렘 백작 (1399–1467),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차남
  • 샤를, 앙굴렘 백작 (1459–1496)
  • 프랑수아, 앙굴렘 백작 (1494–1547), 이후 프랑스 국왕으로도 즉위, '''프랑수아 1세'''


오를레앙 공 루이의 아들 장이 앙굴렘 백작으로 서임된 것이 시작이다. 그의 손자 프랑수아 1세가 1515년 루이 12세의 사망으로 프랑스 왕위에 즉위했다. 1589년 앙리 3세가 암살될 때까지 5명의 왕이 이어졌다. 앙리 3세는 짧은 기간 동안 폴란드 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을 겸임했다.

앙굴렘 공작위는 샤를 9세의 서자샤를이 상속했고, 그 가계는 17세기 전반까지 존속했다.

7. 2. 발루아-알랑송 가문

샤를 1세의 차남 샤를 2세(1325–1346)가 아랑송 백작 작위를 상속했다. 발루아-알랑송 가문은 다음과 같다.

  • 샤를 2세, 백작 (1325–1346)
  • 샤를 3세, 백작 (1346–1361)
  • 피에르 2세, 백작 (1361–1391)
  • 장 1세, 백작 (1391–1414)
  • 장 1세, 공작 (1414–1415)
  • 장 2세, 공작 (1415–1424 및 1449–1474)
  • 르네 1세, 공작 (1478–1492)
  • 샤를 4세, 공작 (1492–1525)


샤를 2세의 증손자 장 2세는 잔 다르크의 전우로 알려져 있다. 발루아-알랑송 가문은 서자 계통을 제외하면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었지만, 1525년 샤를 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 샤를 4세의 여동생 프랑수아즈는 부르봉 왕가의 시조 앙리 4세의 부계 조모이다.

7. 3. 발루아-앙주 가문


  • 루이 1세 (1360–1383), 공작 (예루살렘 및 나폴리 왕으로도, '''루이 1세'''), 프랑스 국왕 존 2세의 차남
  • 루이 2세 (1377–1417), (나폴리 왕으로도, '''루이 2세''')의 아들
  • 루이 3세 (1403–1434), (나폴리 왕으로도, '''루이 3세''')의 아들
  • 르네 1세 (1409–1480), (예루살렘 및 나폴리 왕으로도, '''르네 1세''')의 형제
  • 샤를 4세 (1436–1481), (예루살렘 및 나폴리 왕으로도, '''샤를 4세''')의 조카


발루아 백작 샤를은 세 번 결혼했지만, 필리프 6세와 알랑송 백작 샤를 2세의 어머니인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앙주-시칠리아 가문의 나폴리 왕카를로 2세의 딸 마르그리트였다. 장 2세의 차남인 앙주 공작 루이 1세는 이 두 사람의 증손으로,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의 양자가 되었다. 이 루이의 가계를 발루아-앙주 가문이라고 부른다. 이 일족은 앙주-시칠리아 가문의 다른 계통이나 트라스타마라 가문과 나폴리 왕위 및 프로방스 백작령을 다투었다. 또한 결혼을 통해 로렌 공 지위를 획득했다. 프랑스 왕 샤를 7세의 왕비 마리 당주는 루이 1세의 손녀 중 한 명이며, 백년 전쟁 시기에는 일족이 샤를 7세에게 협력하여 잉글랜드와 적대했지만, 후에 평화의 일환으로 마리의 조카 마거릿 오브 앙주가 잉글랜드 왕헨리 6세에게 시집갔다.

1481년에 샤를 5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후, 마리 당주의 손자인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앙주 가문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한다.

7. 4. 발루아-베리 가문

장 2세의 셋째 아들 장이 베리 공에 서임된 것이 시작이다. 장수했던 베리 공 장은 발루아 가문의 원로로서 권세를 자랑했지만, 아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남계 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과 함께 가계는 단절되었다. 유령의 일부는 부르봉 왕가에 상속되었지만, 베리 공작위는 그때그때 왕의 근친자에게 수여되는 것이 되었다.

7. 5.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장 2세의 아들인 필리프에게 부르고뉴 공작 작위가 주어진 이후로 시작된 왕가를 뜻한다.

  • 필리프 2세 용담공(1363–1404):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넷째 아들
  • 장 1세 무상공(1404–1419)
  • 필리프 3세 선량공(1419–1467)
  • 샤를 1세 용담공(1467–1477)
  • 마리 1세 부유공(1477–1482)


장 2세의 막내아들 필리프 2세 (담대한 공)는 단절된 카페 가문의 부르고뉴 가문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 그의 아들 장 1세 (무구공)는 부르고뉴파로서 프랑스에서 세력을 갖게 되었다. 3대 공작 필리프 3세 (선량공)은 관심을 프랑스에서 네덜란드로 돌렸다. 사실상 마지막 당주 샤를 (돌격공)은 루이 11세와의 항쟁에서 패배하여 멸망한다. 그 후, 유지를 둘러싼 싸움이 계기가 되어, 프랑스 왕가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항쟁이 발발한다.

8. 발루아 왕조의 역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카페 왕조의 적통이 단절되자 1328년에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고, 이후 7명의 국왕이 계승했다. 샤를 8세1498년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발루아 직계는 단절되었다.

1589년, 프랑스 국왕 앙리 3세가 사망하면서 발루아 왕가는 남성 혈통이 단절되었다. 살리카법에 따라, 부르봉 왕가의 수장이자 카페 왕조의 방계였던 앙리 4세가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4]

8. 1. 발루아 직계

이름재위 기간
필리프 6세1328년 ~ 1350년
장 2세1350년 ~ 1364년
샤를 5세1364년 ~ 1380년
샤를 6세1380년 ~ 1422년
샤를 7세1422년 ~ 1461년
루이 11세1461년 ~ 1483년
샤를 8세1483년 ~ 1498년



필리프 6세카페 왕조의 적통이 단절되자 1328년에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고, 이후 7명의 국왕이 계승했다. 마지막 왕인 샤를 8세가 1498년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적통이 단절되었다.

8. 2. 발루아-오를레앙 가문

샤를 5세의 차남인 루이가 오를레앙 공에 서임된 것이 시작이다. 루이의 아들 샤를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의 딸과 결혼하여 아르마냐크파를 형성했다. 그 아들인 루이 12세는 발루아 가문의 적통이 단절되자 1498년에 프랑스 왕위에 올랐지만 1대 만에 단절되었다.

루이의 숙부인 필리프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오를레앙 공에 서임되었지만, 자식이 없어 1대 만에 공작위는 소멸되었다.

8. 3. 발루아-앙굴렘 가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아들 장이 앙굴렘 백작으로 서임된 것이 발루아앙굴렘 가문의 시작이다. 그의 손자 프랑수아 1세가 1515년 루이 12세의 사망으로 프랑스 왕위에 즉위했다. 1589년 앙리 3세가 암살될 때까지 5명의 왕이 이 가문에서 나왔다. 앙리 3세는 짧은 기간 동안 폴란드 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을 겸임했다.

발루아앙굴렘 가문 출신 프랑스 국왕은 다음과 같다.

  • 프랑수아 1세 (1515년 ~ 1547년)
  • 앙리 2세 (1547년 ~ 1559년)
  • 프랑수아 2세 (1559년 ~ 1560년)
  • 카트린 드 메디시스 섭정
  • 샤를 9세 (1560년 ~ 1574년)
  • 앙리 3세 (1574년 ~ 1589년)


앙리 3세를 마지막으로 발루아 왕가 방계의 대가 완전히 끊기게 되면서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가 프랑스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샤를 9세의 서자샤를이 앙굴렘 공작위를 상속했고, 그 가계는 17세기 전반까지 존속했다.

참조

[1] 간행물 cite LPD; cite EPD
[2] 문서 Empress Matilda had claimed the English throne in the early 12th century. However, Stephen of Blois contested her claim, occasioning The Anarchy|a lengthy civil war
[3] 서적 Britain's Royal Families: The Complete Genealogy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4] 서적 Histoire de la Maison Royale de France Editions du Palais-Royal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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