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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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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독 학생운동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독의 정치, 사회,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개혁을 요구하며 일어난 사회 운동이다. 냉전, 경제 성장, 베이비 붐으로 인한 대학생 수 증가, 그리고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학생들은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베트남 전쟁 반대, 제국주의 비판, 교육 개혁 등을 주장했다. 1960년대 후반, 베노 오네조르크 피살 사건과 루디 두치케 피습 사건을 계기로 시위가 격화되었으나, 긴급조치법 제정으로 인해 학생 운동은 위축되었다. 이후 지하 조직화된 극좌 세력은 테러를 감행하기도 했지만, 학생 운동은 정치적 변화, 나치 과거 청산, 교육 개혁, 여성 및 노동 권익 신장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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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학생운동
개요
1968년 서독 시위 행진
1968년 서독 시위 행진
일부1968년 사회운동
날짜1968년
장소서독
원인
목표
방법
상태
결과
교전 세력
주요 인물
규모
사상자
영향
상세 정보
사건 개요
날짜1967년 6월 2일 ~ 1998년 4월 21일
지역서독 전역
원인
목표
종류
결과
주요 인물 (시위대)
주요 인물 (옹호)
주요 인물 (반대)
사상자
시위대2명 사망, 500명 체포

2. 배경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미국마셜 플랜과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유럽의 정치 질서를 재편하려 시도했다. 전후 세계 질서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 체제로 굳어지자 유럽 국가들은 유럽의 부흥을 위한 전 유럽적 통합을 시도한다.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서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 1967년 유럽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군사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샤를 드골의 주장이 수용되면서 유럽공동체가 출범한다.[20]

패전국이던 독일은 동독서독으로 나뉘며 서독의 국시는 반공주의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공산권과 대립하여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면서 냉전이 고착화되었다. 경제적으로는 1949년부터 1963년까지 14년간 총리로 재임했던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에 의해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을 이뤄내면서 물질적으로 풍부해졌다. 미국의 마셜 플랜으로 1951년에는 산업 생산과 수출량이 독일의 경제 상황은 갈수록 호전되었다. 반면 유럽의 정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장기 독재와 싸우고 북아일랜드는 반가톨릭 교도들에 대한 탄압에 저항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선 프라하의 봄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에서도 베트남 전쟁과 강압적인 교육 체제에 반발하는 크고 작은 시위가 잇따랐다.[21]

또한 60년대 후반부터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유럽은 경기 침체기를 경험한다. 경공업개발도상국의 추격을 받아 더 이상 경쟁이 불가능했고 석탄 산업과 철강 산업도 몰락했다. 직물, 광업, 제철업, 조선업 부문의 일자리가 줄어든 1967년부터 실업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고 지역간의 불균형과 여성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저임금 문제도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전후의 베이비 붐으로 인해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독일의 대학생 수는 1950년 11만 명에서 1965년 25만 7천 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고등교육 분야의 양적인 팽창과 더불어 질적 수준이 재고되어야 했으나 교육 시설은 낙후되었고 주입식 교수법, 불리한 유급제도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22]

2. 1. 전후 독일의 상황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동독서독으로 분단되었고, 서독은 반공주의를 국시로 삼았다. 베를린 장벽 건설로 냉전이 고착화되는 가운데,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시기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21] 미국마셜 플랜 덕분에 1951년부터 산업 생산과 수출량이 증가하는 등 경제 상황이 호전되었다.[21] 그러나 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기 독재, 북아일랜드의 반가톨릭 교도 탄압, 체코슬로바키아프라하의 봄 사건 등 유럽의 정치 상황은 악화되었다.[21]

1960년대 후반부터 제조업 쇠퇴로 유럽은 경기 침체기를 겪었다. 경공업개발도상국에 밀려 경쟁력을 잃었고, 석탄 및 철강 산업도 몰락했다.[22] 직물, 광업, 제철업, 조선업 등에서 실업 문제가 발생했고, 지역 불균형, 여성 및 외국인 노동자 저임금 문제도 대두되었다.[22] 전후 베이비 붐으로 1950년 11만 명에서 1965년 25만 7천 명으로 대학생 수가 급증하면서, 낙후된 교육 시설, 주입식 교수법, 불리한 유급제도 등 교육 문제도 심각했다.[22]

2. 2. 국제 정세의 영향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마셜 플랜과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유럽의 정치 질서를 재편하려 했다.[20] 전후 세계 질서가 미국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냉전 체제로 굳어지면서, 유럽 국가들은 유럽의 부흥을 위한 전 유럽적 통합을 시도하였다.[20]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에서 1957년 유럽경제공동체, 1967년 유럽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샤를 드골의 주장이 수용되면서 유럽공동체가 출범하였다.[20]

패전국 독일은 동독서독으로 나뉘었고, 서독의 국시는 반공주의였다.[21] 정치적으로는 공산권과 대립하여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면서 냉전이 고착화되었다.[21] 알제리, 쿠바, 콩고 등지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매스컴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특히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 패배 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에서 네이팜탄 폭격을 한 미국에 대한 매스컴 보도는 유럽 젊은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전 세계적인 반전 운동을 촉발시켰고, 이는 유럽의 학생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21] 또한, 제3세계 국가들의 독립 투쟁은 학생들에게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심어주었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에서도 베트남 전쟁과 강압적인 교육 체제에 반발하는 크고 작은 시위가 잇따랐다.[21]

2. 3. 정치적 분위기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은 반공주의를 국시로 삼았으며, 베를린 장벽 건설로 냉전이 고착화되었다.[21]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21] 1960년대 후반부터 제조업 쇠퇴로 경기 침체를 겪으며 실업 문제가 대두되었다.[22] 1950년 11만 명에서 1965년 25만 7천 명으로 2배 이상 증가한 대학생 수는[22] 낙후된 교육 시설과 주입식 교수법 등의 문제를 야기했다.

알제리, 쿠바, 콩고 등지에서 벌어진 전쟁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만행은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었고, 특히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 패배 이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에 네이팜탄 폭격을 가한 미국의 행태는 유럽 젊은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23]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베트남 전쟁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게 만들었다.[23]

많은 학생들은 이상적으로 현실을 비판하며 기성 권위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나치 정권 하에서 유년기를 보냈거나 패전 후 태어난 세대는 기성세대가 과거의 죄를 망각하고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다.[24] 이러한 비판적 전후 세대와 보수적 기성세대 간의 갈등은 1966년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독일 사회민주당대연정을 계기로 심화되었다.[24]

1962년 《슈피겔》 사건은 언론인들이 체포 및 구금되면서 서독인들에게 권위주의 정부 부활에 대한 우려를 안겨주었다.[2] 이 사건으로 기독교민주연합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사회민주당대연정이 구성되었다.[2] 그러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가 과거 나치당 당원이었기에, 그를 서독 총리로 임명한 의회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3]

2. 4. 새로운 정치 운동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마셜 플랜과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유럽의 정치 질서를 재편하려 했다.[20] 패전국 독일동독서독으로 나뉘었고, 서독은 반공주의를 국시로 삼았다.[21] 베를린 장벽 건설은 냉전을 고착화시켰다.[21]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21] 1960년대 후반 제조업 쇠퇴와 함께 경기 침체를 겪으며 실업 문제가 대두되었다.[22]

1954년부터 1965년까지 알제리, 쿠바, 콩고 등에서 전쟁이 이어졌고, 매스컴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만행을 고발했다.[23] 특히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 패배 이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에 네이팜탄 폭격을 감행한 미국에 대한 보도는 유럽 젊은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23] 이에 따라 젊은이들은 베트남 전쟁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23]

나치 정권 하에서 유년기를 보냈거나 패전 후 태어난 세대는 기성세대가 과거의 죄를 망각하고 경제적 이익만 추구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24] 1966년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독일 사회민주당대연정은 이러한 세대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24]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독일 학생 연맹(SDS)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은 정치 기득권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사회 운동을 전개했다.[2] 서베를린은 징병을 피하기 위해 좌파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회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2] 이들은 베트남 전쟁 반대, 소비 문화 반대, 제3세계 해방, 중산층의 도덕적 가치 비판 등을 주장했다.[4] 일부는 공동체 생활 방식과 성적 해방을 옹호하기도 했다.[4] 이러한 다양한 사회 운동과 비의회 조직들은 의회 외 야당으로 묶였다.[5]

1965년, 루디 두치케는 서베를린 SDS의 정치 평의회에 선출되었다.[6] 그는 미국의 SDS (민주 사회를 위한 학생회)와 뉴 레프트의 직접 행동, 시민 불복종과 같은 아이디어를 도입했다.[7]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에게 영향을 받은 두치케는 소외된 정체성 집단을 연합하여 사회주의 운동의 선봉을 구축하려 했다.[8] 그는 독일 학생 운동이 스스로를 억압받는 소수 집단으로 인식하도록 만들고자 했고, 이를 위해 정부 당국과의 폭력적인 대결을 유도하는 전략을 추구했다.[8]

3. 전개

3. 1. 대연정과 학생 운동의 시작

1966년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독일 사회민주당 사이의 대연정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가진 전후 세대와의 갈등을 악화시켰다.[24] 사회 경험이 없는 많은 학생들은 이상적으로 현실을 비판했고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했으며, 권위주의를 비판하고 민주적 평등 관계를 요구했다.[24]

1954년부터 1965년까지 알제리, 쿠바, 콩고에서 전쟁이 연이어 발발하고 매스컴이 이들의 투쟁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만행을 고발했다. 특히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한 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 지역에서 네이팜탄 폭격을 행한 미국에 대한 매스컴 보도는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23]

루디 두치케는 사회주의를 위한 선봉대가 되기 위해 소외된 정체성 집단의 연합을 구축하고자 했고, 학생 운동이 스스로를 억압받는 소수 집단으로 인식하도록 했다.

3. 2. 베노 오네조르크 피살 사건과 시위 확산

1967년 이란 팔레비 2세의 독일 방문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베를린 대학교 학생 베노 오네조르크가 경찰의 발포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3][1] 이 사건은 학생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루디 두치케가 학생 대표로 등장하며 시위가 격화되었다.

자유 베를린 대학교 학생들은 대학 개혁 과정 참여와 대학의 민주적 운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3][9] SDS는 팔레비 2세의 방문에 항의하는 시위를 조직했는데, 이 시위는 경찰과 이란 요원들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베노 오네조르크가 사망했다.[3][1]

오네조르크를 살해한 경찰관 카를-하인츠 쿠라스는 정당방위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3][1] 경찰의 폭력에 대한 항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베를린 시장과 경찰청장이 사임했다. 2009년에는 쿠라스가 슈타지 정보원이었음이 밝혀졌고, 검찰은 오네조르크가 계획적인 행위로 살해되었다고 결론 내렸지만, 쿠라스가 공식 명령에 따라 행동했는지 평가할 충분한 증거는 남아 있지 않았다.[12]

오네조르크의 장례식을 계기로 열린 컨퍼런스에서 루디 두치케는 직접 행동을 주장했고,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를 ''린크스파쇼이즘''("좌익 파시즘")이라고 비판했다.[13][14][15] 이후 1967년 9월, 두치케와 한스-위르겐 크라흘은 "도시 게릴라"를 조직하기 위해 대학에 "행동 센터"를 만들 것을 촉구했다.[13]

3. 3. 프랑크푸르트 백화점 방화 사건

1968년 4월 2일, 저널리스트였던 안드레아스 바더, 독문학도 군드룬 엔슬린, 영화배우 오르스트 죈라인과 대학생 토발드 프롤은 프랑크푸르트의 슈나이더 백화점과 카우프호프 백화점에 불을 질렀다.[27]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 내의 선량한 소비자들이 광고나 선전에 오도된 맹목적 소비 사회의 피해자이며, 소비 사회의 상징물인 백화점에 불을 지름으로써 소비 중심적 자본주의의 전복을 시도했다고 주장했다.[27]

3. 4. 루디 두치케 피습과 학생 운동의 격화

1968년 4월 11일, 뮌헨 출신의 도장공 요제프 바흐만이 학생운동 지도자 루디 두치케를 저격하여 뺨과 머리, 가슴에 총상을 입혔다.[28]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우익 신문인 《독일 민족신문》, 《빌트 차이퉁》을 읽었던 바흐만은 두치케를 제거해야 할 공공의 적으로 확신했고, 우익 언론이 이러한 생각에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28] 학생 운동가들은 이 총격이 악셀 슈프링거 소유의 타블로이드 신문인 ''빌트 차이퉁''에서 두치케를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은 것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슈프링거 사무실 밖에서 격렬한 시위와 충돌을 일으켰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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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일 학생 시위대는 서베를린,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뮌헨, 에센, 하노버, 에스링엔의 슈프링어 사무실을 공격하여 신문 공급을 차단했다.[29] 서베를린에서는 철조망과 경찰 차단선으로 둘러싸인 슈프링어 본사 빌딩을 향해 행진했고, 경찰이 물대포를 발사하자 50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본사로 진입했다.[29] 부활절 기간 동안의 시위로 2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부상당했으며 1,000명이 체포되었다.[29] 1968년 5월에는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사건에 대해 국가가 비상대권을 가진다는 《긴급조치법》이 사회민주당의 협조 아래 제정되었고, 이에 6만여 명의 학생들과 진보 세력이 항의 시위에 참여했다.[29]

3. 5. 긴급조치법 반대 투쟁과 한계

1968년 5월, 독일 정부는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사건에 대해 국가가 비상대권을 가지는 긴급조치법 제정을 추진했다.[3] 학생들과 진보 세력은 이에 항의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나,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의 제의를 노동계가 받아들이지 않아 노동계는 학생 운동에 대대적으로 동참하지 못했다.[30] 이는 프랑스에서 5월 초에 시작되어 5월 말 또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종료된 6월 10일에 완료된 운동이었던 것[30]과는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노동계의 지원을 받지 못해 정부 변화나 시민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했다.[3][30]

5월 11일, 시위대는 긴급조치법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서독의 수도 에 모였다.[3] 정부는 시위에 참여한 노동조합과의 협의를 통해 제한적인 양보만을 하기로 합의하고, 5월 30일 해당 법안을 통과시켰다.[3] 이 합의는 성장하는 학생 운동에 타격을 입혔으며, 쇠퇴를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3] 5월 이후에는 간헐적인 시위가 잇달았다. 11월 4일에는 서베를린의 테겔 거리에서 슈프링어 출판사에 대한 시위가, 12월 3일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는 프랑크푸르트 대학 학생들의 강의 거부 사태가 일어났다.[30] 처음에는 긴급조치법에 반대하기 위해 모였던 대학생들은 권위주의 체제를 타파하고 이상적인 대학을 건설한다는 목표를 제안했다.[30] 이들은 강의 거부, 수업 방해, 회의 방해, 시위 등을 조직적으로 전개했고 아헨 공과대학교, 보훔 루르 대학교, 본 대학교, 도르트문트 대학교, 에센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등 거의 모든 대학교들도 행동을 통일했다. 대학생들은 기초 학문에 대한 지원 확대, 교수의 동등한 지위 보장, 권위적인 교수법의 철폐, 새로운 해방 이론 연구의 확대, 실습 과목의 폐지 등을 요구했다.[30]

독일 사회주의 학생 연맹(SDS)은 1970년 3월 21일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17]

3. 6. 지하 조직화와 적군파의 등장

1968년 5월 30일 긴급조치법 발효로 정부가 조직적인 시위를 금지하자, 극좌 계열은 점차 지하 조직화되기 시작했다.[31] 겉으로는 서독 정부가 1968년 9월 22일 독일 공산당의 창당을 허락하였으나, 학생 운동 참가자들이 함께 살던 코뮌을 수색하는 등 재야 세력과 극좌파의 움직임에 대해서 감시했다.[31]

프랑크푸르트의 백화점을 방화하여 3년 징역형에 처해진 안드레아스 바더울리케 마인호프1970년 출옥하여 무기, 자동차, 집, 자금을 조달하여 또 다른 폭력 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바더-마인호프를 결성했다.[31] 안드레아스 바더는 다시 체포되어 모아비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황달로 인해 테겔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던 중 울리케 마인호프는 《콘크레트》(konkret)라는 좌파 잡지의 편집장으로 텔레비전에 출연해 안드레아스 바더와의 공동 저술을 위해 사회문제연구소로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고 이틈을 타 안드레아스 바더를 탈옥시켰다. 학생이나 재야의 운동에서는 한계가 있으며 투쟁만이 사회 전복의 꿈을 실현해줄 것이라는 취지의 선언서를 작성함으로써 독일 적군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다.[31]

1972년부터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항의로 서독 내의 미국 군사시설을,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슈프링어 출판사를 공격했고, 1975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독일 대사관을 점거했다.[32] 1977년 가을에는 나치 친위대 출신의 전국경영인협회 회장이던 한스 마르틴 슐라이어를 납치했으며, 법원이나 법조인에게도 테러를 가하며 나치즘파시즘이라는 청산되지 않은 역사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폭력 투쟁을 감행했다.[32]

한편 적군파가 활발히 활동하던 1975년 독일 정부가 학생운동 전력자를 공직 채용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고, 1976년 6월에 반테러법을 연방 의회가 제정함으로써 극단주의자들의 행동 반경은 더욱 좁아졌다.[32] 이러한 상황에서 70년대 말들어 독일학생운동에 참가했던 거의 대부분들이 이탈하고 소수만이 남은 조직으로 전락한 적군파는, 1998년 4월 21일 자진 해산했다.[33]

4. 영향

4. 1. 정치적 변화

독일은 냉전체제 아래에서 반공주의를 악용하여 비판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고 독일 사회는 공산주의 이념이나 정당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된 사회가 되었다고 평가된다.[34] 좌파 계열의 사민당은 1959년 바트고메스베르크 전당 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민주주의를 버리고 노동자의 정당에서 국민의 정당이 되기로 의견을 모으면서 보수화되었고 이런 사민당은 1966년 보수 정당과 연정을 구성하게 된다.[34]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민련과 긴급조치법을 제정하고 1969년 자민당과 연정을 만들어 집권 정당이 되었다.[34]

녹색당의 위르겐 트리틴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한 뒤 구속된 요슈카 피셔, 환경부 장관을 지냈던 위르겐 트리틴, 보건부 장관을 지낸 안드레아 피셔와 같은 독일학생운동 세대가 주축이 되어 1980년 독일 녹색당을 창당했고 보수 성향의 자연보호주의자들에서 반자본주의적 급진혁명세력으로 이뤄진 다양한 이념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녹색당을 구성했던 많은 인물들이 정계로 진출하여 제도권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35]

학생 운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치 의식의 변화는 전국적으로 지속되었다. 서독 관리들의 구 나치당과의 연계에 대한 비판은 과거 극복의 개념을 정치적 논의의 전면으로 끌어냈다.[18] 그 외 다양한 좌파적 대의명분들 또한 인기를 얻었고, 독일 내 시위 문화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18]

1968년 서독의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1968년 세대"로 알려지게 되었다.[4] 일부는 독특한 정치적 길을 개척하여 정부에서 역할을 찾았지만, 다른 이들은 의회 외 야당의 테러 활동을 받아들였다.[4]

4. 2. 나치 과거 청산

68혁명은 나치 과거사 청산 문제를 독일 사회의 주요 의제로 부각시켰다.[18] 1960년 5월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모사드에게 납치되어 1962년 6월 1일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는 사건을 통해, 독일인들은 이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치욕의 역사와 윗세대가 저지른 만행을 반성했다.[36]

슈테른지는 1968년 2월 25일 나치 독일의 포로수용소 건설 계획에 서명했던 설계자가 기민련의 당대표인 하인리히 뤼브케라고 고발했고, 학생들은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는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반박했지만 결국 자신이 서명자임을 인정하고 1969년 6월 30일 당대표직에서 사임했다.[36]

1969년 집권한 사민당콘라트 아데나워 당시부터 남아 있던 나치 협력자들을 강제 퇴직시키고 나치 전범에 대한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법을 제정하여, 독일학생운동이 제기했던 나치 청산 요구를 수용했다.[37] 서독 관리들의 구 나치당과의 연계에 대한 비판은 과거 극복의 개념을 정치적 논의의 전면으로 끌어냈다.[18]

4. 3. 교육 개혁

68혁명은 독일 교육 시스템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다.[38] 폴크스슐레가 그룬트슐레로 바뀌고, 하우프트슐레, 게잠트슐레가 만들어지는 등 교육 개혁이 시행되었다.[38] 9학년제, 10학년제가 도입되고 교내 체벌이 금지되었으며, 그룹별 강의, 대화 동아리, 조별 공동학습 등 새로운 강의 형식이 등장했다.[38]

김나지움, 하우프트슐레, 레알슐레를 묶은 대안적인 통합학교가 설립되어, 초등학교 5학년부터 학생들의 진로를 확정하는 기존 교육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학생들의 자율권을 보장하고자 했다.[38]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이 제안한 통합대학이 헤센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나타났으며, 아비투어 응시권이 없는 실업계 고등학생들에게도 입학을 허용하고, 적절한 학습 과정과 교수법을 개발했으며, 학자와 교수자, 연구자가 유기적으로 교육과 연구를 수행한다는 기본 목표를 설정했다.[39] 비판대학이 베를린 자유 대학교 안에 설립되어 기존 대학의 이론적, 이데올로기적 학문 기초가 해체되는 계기를 마련했다.[39]

4. 4. 여성권 신장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에 명시된 것과는 다르게 서독 노동자의 30%를 차지하던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40] 기술직이나 고위직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 훈련 및 실무 교육에서 배제되어 있던 여성들은 보수적이던 사회적 인식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40] 남성들이 기피하는 직종에서 일을 했으나 남성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40] 민법은 주부가 직업을 갖기 위해선 남편의 동의를 규정하는 등 남녀 불평등이 존재했다.[40] 이는 1977년 민법 1356조가 부부가 각자 가계를 꾸릴 수 있고 주부도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개정된 이후로 고쳐졌다.[40] 68혁명은 주부와 직장인에서 벗어난 새로운 여성상을 추구하는 여성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40]

4. 5. 노동권 신장

68혁명은 노동 조건 개선과 노동자의 권익 향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 노동자들은 1956년부터 주 5일 근무, 40시간 근무를 위해 독일노동조합연맹의 <토요일에 아빠는 내 것> 캠페인으로 투쟁했다.[41] 당시 독일 노동자들은 주 6일, 주당 48.8시간 근무하는 등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41] 사민당 정부는 근로시간을 꾸준히 감소시키고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했으며, 노동조합 평의회와 근로자 문제를 위한 노동단체 조직을 허용하고, 1969년 9월 파업부터 이 조직들이 노동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41] 1976년 3월 18일 새로운 공동결정법으로 노동자 권익을 확대했다.[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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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Time It Was: 1968 Around the World http://origins.osu.e[...] 2020-05-21
[3] 웹사이트 German students campaign for democracy, 1966–68 https://nvdatabase.s[...] 2012-11-16
[4] 웹사이트 Germany in 1968 https://www.mtholyok[...]
[5] 논문 The Student Protest Movement in West Berlin 1969
[6] 웹사이트 LeMO Biografie: Rudi Dutschke https://www.hdg.de/l[...] Lebendiges Museum Online, Stiftung Haus der Geschichte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2022-07-28
[7] 논문 The SDS, a Transatlantic Alliance, Red and Black Panthers https://www.jstor.or[...] 2011
[8] 서적 Foreign Front: Third World Politics in Sixties West Germany Duke University Press 2012-03-21
[9] 웹사이트 GHDI – Document http://germanhistory[...]
[10] 서적 Foreign Front: Third World Politics in Sixties West Germany Duke University Press 2012-03-21
[11] 서적 Rudi Dutschke Munich, Droemer 2018
[12] 뉴스 Police Covered Up Truth Behind Infamous Student Shooting http://www.spiegel.d[...] Spiegel Online International. spiegel.de 2012-01-23
[13] 서적 Student Protest: the Sixties and After Taylor & Francis 2014-09-25
[14] 서적 Screening the Red Army Faction Bloomsbury Publishing 2018-07-12
[15] 논문 From 'Left-Fascism' to Campus Anti-Semitism: Radicalism as Reaction https://www.dissentm[...]
[16] 간행물 'Antiamerikanismus und Antiimperialismus um 1968:Proteste gegen die US-Außenpolitik'
[17] 웹사이트 Hans-Jürgen Krahl: New Emancipative Desires (1943–1970) https://viewpointmag[...] Viewpoint Magazine 2022-02-13
[18] 웹사이트 Explained: What sparked the protest culture of modern Germany? https://www.thelocal[...] 2019-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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