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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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묘진은 "신라의 밝은 신"을 의미하며, 9세기 일본 승려 엔닌의 호법신으로 등장하여 일본 덴다이 승려들과 사찰을 보호하는 신으로 숭배받았다. 초기에는 해상 여행의 수호신으로 여겨졌으나, 몽골의 일본 침략 이후에는 일본을 지키는 신으로 변화했다. 숭배는 온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스사노오, 문수보살 등 다양한 신들과 연관되어 숭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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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묘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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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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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신라명신 |
일본어 이름 | (신라묘진) |
유형 | 호법 항해 와카 역병의 신 |
신앙 중심지 | 온조지 |
2. 명칭 및 기원
신라묘진(新羅明神)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밝은 신"으로 번역될 수 있다.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존재했던 한반도의 역사적인 왕국이었다. 일본어로 그 이름을 표기하는 데 사용된 한자 조합, 新羅는 일반적으로 시라기 또는 시라키로 읽히지만, 신라는 고유명사에서 전형적인 읽기 방식이다. "밝은 신"이라는 용어인 ''묘진''은 신의 한 종류를 지정한다. 이 이름은 원래 "신라의 신"이라는 일반적인 명칭이었고 나중에 고유명사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묘진이 한국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역사적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장보고의 신격화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통일신라 시대 해상 무역을 장악했던 장보고가 일본에서 신으로 추앙받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진보적 관점에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맥락과 연결된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가 "숭산의 왕"으로 불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제안은 그가 한국에서 유래했지만, 중국이 일본으로의 전파 과정에서 매개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김수정은 일본의 역사적인 오미국을 그의 "탄생지"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를 일본 신이나 한국 신으로 쉽게 묘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신라묘진의 정확한 기원과 관계없이, 일본에서의 초기 발전이 재일 한국인 집단의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
2. 1. 명칭
신라묘진(新羅明神)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밝은 신"으로 번역될 수 있다.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존재했던 한반도의 역사적인 왕국이었다. 일본어로 그 이름을 표기하는 데 사용된 한자 조합, 新羅는 일반적으로 시라기 또는 시라키로 읽히지만, 신라는 고유명사에서 전형적인 읽기 방식이다. "밝은 신"이라는 용어인 ''묘진''은 신의 한 종류를 지정한다. 이 이름은 원래 "신라의 신"이라는 일반적인 명칭이었고 나중에 고유명사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신라묘진이 한국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역사적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장보고의 신격화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가 "숭산의 왕"으로 불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제안은 그가 한국에서 유래했지만, 중국이 일본으로의 전파 과정에서 매개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김수정은 일본의 역사적인 오미국을 그의 "탄생지"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를 일본 신이나 한국 신으로 쉽게 묘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신라묘진의 정확한 기원과 관계없이, 일본에서의 초기 발전이 재일 한국인 집단의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
2. 2. 기원
신라묘진(新羅明神)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밝은 신"으로 번역될 수 있다.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존재했던 한반도의 역사적인 왕국이었다. 일본어로 그 이름을 표기하는 데 사용된 한자 조합, 新羅는 일반적으로 시라기 또는 시라키로 읽히지만, 신라는 고유명사에서 전형적인 읽기 방식이다. "밝은 신"이라는 용어인 ''묘진''은 신의 한 종류를 지정한다. 이 이름은 원래 "신라의 신"이라는 일반적인 명칭이었고 나중에 고유명사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신라묘진이 한국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역사적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장보고의 신격화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가 "숭산의 왕"으로 불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제안은 그가 한국에서 유래했지만, 중국이 일본으로의 전파 과정에서 매개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김수정은 일본의 역사적인 오미국을 그의 "탄생지"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를 일본 신이나 한국 신으로 쉽게 묘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신라묘진의 정확한 기원과 관계없이, 일본에서의 초기 발전이 재일 한국인 집단의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
3. 역사
858년, 당나라에서의 유학을 마친 일본의 승려 엔닌이 귀국할 때 배에서 신라묘진이 나타나 그의 호법신이 되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그 모습을 묘진상으로 온조사(園城寺) 경내의 신라선신당에 안치했다.
초기 자료들은 신라묘진을 덴다이 승려들과 그들의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 도착한 신으로 묘사한다. 덴다이종 조상인 엔친이 858년 중국에서 5년간의 체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위험을 감지하고 기도를 시작했고, 이에 신라묘진이 배를 탄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에게 자신이 신라의 신이며 "미륵불이 세상에 올 때까지" 그의 불교 수행을 보호할 것이라고 알렸다. ''타이헤이키''(太平記)의 변형에서는 그가 신라묘진과 부동명왕을 모두 만났다고 묘사한다.
마타라진과 세키잔묘진에 대한 유사한 이야기도 알려져 있는데, 신라묘진 버전이 그들의 원형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 엔친은 송산(Mount Song)의 신사를 방문하여 폭풍우 속에서 노인의 머리와 뱀의 몸을 가진 존재를 만났는데, 이는 신라묘진의 현현으로 확인되었다. 엔친 시대의 현존하는 자료에는 신라묘진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그들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10세기 말이나 11세기에야 비로소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몽골의 일본 침략 이후, 신라묘진이 신라를 정복한 일본의 ''가미''라는 믿음이 생겨났으며, 이는 ''온조지 덴키''(園城寺伝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그가 "일본의 힘을 전 세계에 행사하기 위해 신라의 왕이 되었다"고 말한다. 베르나르 포레는 ''온조지 덴키''와 이 전통을 기록한 또 다른 자료인 ''하치만 구도킨''(八幡愚童訓)에서 신라묘진의 특징이 변화한 것을 반한 편견의 표현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이는 진구 황후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나는 적대적인 태도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김수정은 이러한 변화를 원래 가마쿠라 시대에 발전하여 불교의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의 전파라는 개념과 연결하는데, 이는 그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을 주변화시켰다. 그녀는 또한 660년 전통적 동맹국인 백제의 정복, 해적 행위, 반도에서 발생한 전염병 및 기타 요인으로 인해 이미 9세기에 일본에 반한(또는 구체적으로 반신라) 감정이 있었지만, 한국 해군을 활용한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고 지적하는데, 고려 왕조는 분쟁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몽골의 종속국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이러한 사건들에서 영감을 얻은 두려움 때문에 신라묘진을 일본을 대신하여 행동하는 신으로 재정의할 필요성이 생겨났다고 제안한다.
3. 1. 초기 역사 (엔닌과의 만남)
858년, 당나라에서의 유학을 마친 일본의 승려 엔닌이 귀국할 때 배에서 신라묘진이 나타나 그의 호법신이 되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그 모습을 묘진상으로 온조사(園城寺) 경내의 신라선신당에 안치했다.초기 자료들은 신라묘진을 덴다이 승려들과 그들의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 도착한 신으로 묘사한다. 덴다이종 조상인 엔친이 858년 중국에서 5년간의 체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위험을 감지하고 기도를 시작했고, 이에 신라묘진이 배를 탄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에게 자신이 신라의 신이며 "미륵불이 세상에 올 때까지" 그의 불교 수행을 보호할 것이라고 알렸다. ''타이헤이키''(太平記)의 변형에서는 그가 신라묘진과 부동명왕을 모두 만났다고 묘사한다.
마타라진과 세키잔묘진에 대한 유사한 이야기도 알려져 있는데, 신라묘진 버전이 그들의 원형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 엔친은 송산(Mount Song)의 신사를 방문하여 폭풍우 속에서 노인의 머리와 뱀의 몸을 가진 존재를 만났는데, 이는 신라묘진의 현현으로 확인되었다. 엔친 시대의 현존하는 자료에는 신라묘진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그들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10세기 말이나 11세기에야 비로소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몽골의 일본 침략 이후, 신라묘진이 신라를 정복한 일본의 ''가미''라는 믿음이 생겨났으며, 이는 ''온조지 덴키''(園城寺伝記)에 기록되어 있다. 베르나르 포레는 ''온조지 덴키''와 ''하치만 구도킨''(八幡愚童訓)에서 신라묘진의 특징이 변화한 것을 반한 편견의 표현으로 보았다.
3. 2. 중세 시대 (일본 수호신으로의 변화)
초기 자료들은 신라묘진을 덴다이 승려들과 그들의 사찰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 온 신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오래된 언급은 1062년의 ''온조지 류게-에 엔기''(園城寺龍華会縁起)에서 발견된다. 덴다이 종의 조상인 엔친이 858년 중국에서 5년간의 체류를 마치고 귀국할 때 위험을 감지하고 기도를 하자, 신라묘진이 배를 탄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이 신라의 신이며 "미륵불이 세상에 올 때까지" 그의 불교 수행을 보호할 것이라고 알렸다. ''타이헤이키''(太平記)의 변형에서는 그가 신라묘진과 부동명왕을 모두 만났다고 묘사한다.몽골의 일본 침략 이후, 신라묘진이 신라를 정복한 일본의 ''가미''라는 믿음이 생겨났으며, 이는 ''온조지 덴키''(園城寺伝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그가 "일본의 힘을 전 세계에 행사하기 위해 신라의 왕이 되었다"고 말한다. 베르나르 포레는 ''온조지 덴키''와 ''하치만 구도킨''(八幡愚童訓)에서 신라묘진의 특징이 변화한 것을 반한 편견의 표현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진구 황후의 이야기에서도 나타나는 적대적인 태도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김수정은 이러한 변화를 원래 가마쿠라 시대에 발전하여 불교의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의 전파라는 개념과 연결하는데, 이는 그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을 주변화시켰다고 보았다. 또한 660년 전통적 동맹국인 백제의 정복, 해적 행위, 반도에서 발생한 전염병 및 기타 요인으로 인해 이미 9세기에 일본에 반한(또는 구체적으로 반신라) 감정이 있었지만, 한국 해군을 활용한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고 지적한다.
4. 성격 및 역할
신라묘진은 지몬 천태종 분파와 관련이 있다. 역사적으로 그는 최고 신이 되는 것 외에도 기관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그는 "불교 달마의 수호신"인 ''고호진''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인물들은 불교 사찰과 가르침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그는 ''혼지 스이자쿠'' 내에서 만들어진 ''가미''와 불교 인물 사이의 구별에서 발생하는 두 범주 중 하나에 속한다고 쉽게 분류할 수 없다. 때때로 그는 도교 신선 (神仙, ''신선'')으로 묘사되었다. 현대 학문에서 그는 소위 "괴짜 신" (異神, ''이신'')의 예 중 하나로 간주되며, 중세 형태의 밀교와 관련된 신이다.
''엔기'' 이야기에서 신라묘진의 주요 역할은 해상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수호신이다. 그러나 바닷길의 수호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로 내륙에서 숭배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는 산신으로도 발전했다. 그는 온조지 근처에 위치한 나가라 산(長等)의 수호신이다. 그는 주변 지역의 ''genius loci'', 즉 소위 "지주신" (地主; ''진누시'')으로 여겨진다. 이 두 역할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바다 신과 산 신 사이의 밀접한 기능적 연결은 일본 역사 전반에 걸쳐 잘 입증되었으며, 바다를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해 산 신에게 드리는 기도는 천태종 전통에서 잘 기록되어 있다.
11세기 신라묘진은 지몬 전통에서 ''와카'' 시의 신의 역할을 발전시켰다. 이 역할에서 그는 "미이데라의 시선" (三井の歌仙, ''미이노 카센'')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발전은 궁중 생활에서 그 역할이 커짐에 따라 밀교에 ''와카''를 통합하는 더 광범위한 패턴을 반영했다. 이 맥락에서 시는 다라니의 일본식 대응으로 이해되었다. 지몬 승려들은 신라묘진이 그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믿었고, 예를 들어 교손과 같은 승려들은 시와 이 신에 대한 헌신으로 유명했다.
신라묘진은 또한 역병의 신으로 여겨진다.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그는 유행병을 일으키고 질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는 많은 설명에서 축복과 저주를 모두 내릴 수 있는 신인 ''타타리가미/祟り神일본어'' (祟り神)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지몬 덴키 호로쿠''에 따르면, 1184년 유행병이 돌았을 때 황실에서 신라묘진에게 기도를 올렸다. 버나드 포르는 그의 성격의 역병과 관련된 측면이 초기에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정 김은 이것이 신라와 일본의 상상 속에서 유행병 사이의 연관성에서 파생된 것으로 결론지으며, 이는 헤이안 시대 자료에서는 아직 문서화되지 않았고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일반적인 견해가 되었다.
4. 1. 수호신
신라묘진은 지몬 천태종 분파와 관련이 있으며, 기관의 상징이자 "불교 달마의 수호신"인 ''고호진''으로 여겨진다. 불교 사찰과 가르침의 수호신 역할을 하며, ''혼지 스이자쿠''에서 ''가미''와 불교 인물 사이의 구별에서 발생하는 두 범주 중 하나로 쉽게 분류할 수 없다. 때때로 도교 신선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현대 학문에서는 소위 "괴짜 신" (異神, ''이신'')의 예 중 하나로, 중세 형태의 밀교와 관련된 신으로 간주된다.신라묘진의 주요 역할은 해상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수호신이다. 바닷길의 수호신임에도 불구하고 주로 내륙에서 숭배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산신으로도 발전했다. 온조지 근처 나가라 산(長等)의 수호신이자 주변 지역의 ''genius loci''인 "지주신" (地主; ''진누시'')으로 여겨진다. 바다 신과 산 신 사이의 밀접한 기능적 연결은 일본 역사 전반에 걸쳐 잘 입증되었으며, 바다를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해 산 신에게 드리는 기도는 천태종 전통에서 잘 기록되어 있다.
11세기 신라묘진은 지몬 전통에서 ''와카'' 시의 신의 역할을 발전시켰다. 이 역할에서 "미이데라의 시선" (三井の歌仙, ''미이노 카센'')으로 알려졌다. 지몬 승려들은 신라묘진이 그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믿었고, 교손과 같은 승려들은 시와 이 신에 대한 헌신으로 유명했다.
신라묘진은 역병의 신으로도 여겨지며, 유행병을 일으키고 질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축복과 저주를 모두 내릴 수 있는 신인 ''타타리가미/祟り神일본어'' (祟り神)의 특징을 보인다. ''지몬 덴키 호로쿠''에 따르면, 1184년 유행병이 돌았을 때 황실에서 신라묘진에게 기도를 올렸다.
4. 2. 와카(和歌)의 신
신라묘진은 지몬 천태종 분파와 관련이 있으며, 역사적으로 기관의 상징이자 "불교 달마의 수호신"인 ''고호진''으로 여겨진다. 불교 사찰과 가르침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그는 ''혼지 스이자쿠'' 내에서 만들어진 ''가미''와 불교 인물 사이의 구별에서 발생하는 두 범주 중 하나에 속한다고 쉽게 분류할 수 없다. 때때로 도교 신선 (神仙)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현대 학문에서는 소위 "괴짜 신" (異神)의 예 중 하나로, 중세 형태의 밀교와 관련된 신으로 간주된다.11세기 신라묘진은 지몬 전통에서 ''와카'' 시의 신의 역할을 발전시켰다. 이 역할에서 그는 "미이데라의 시선" (三井の歌仙)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발전은 궁중 생활에서 그 역할이 커짐에 따라 밀교에 ''와카''를 통합하는 더 광범위한 패턴을 반영했다. 이 맥락에서 시는 다라니의 일본식 대응으로 이해되었다. 지몬 승려들은 신라묘진이 그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믿었고, 교손과 같은 승려들은 시와 이 신에 대한 헌신으로 유명했다.
신라묘진은 또한 역병의 신으로도 여겨지며, 유행병을 일으키고 질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는 많은 설명에서 축복과 저주를 모두 내릴 수 있는 신인 ''타타리가미/祟り神일본어'' (祟り神)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지몬 덴키 호로쿠''에 따르면, 1184년 유행병이 돌았을 때 황실에서 신라묘진에게 기도를 올렸다.
4. 3. 역병신
신라묘진은 지몬 천태종 분파와 관련이 있으며, 기관의 상징이자 ''고호진''으로 여겨진다. 불교 사찰과 가르침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그는 ''혼지 스이자쿠''에서 ''가미''와 불교 인물 사이의 구별에서 발생하는 두 범주 중 하나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 때로는 도교 신선 (神仙, ''신선'')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현대 학문에서는 "괴짜 신" (異神, ''이신'')의 예 중 하나로, 중세 밀교와 관련된 신으로 간주된다.''엔기'' 이야기에서 신라묘진의 주요 역할은 해상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수호신이다. 바닷길의 수호신임에도 불구하고 주로 내륙에서 숭배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산신으로도 발전했다. 온조지 근처 나가라 산(長等)의 수호신이자 주변 지역의 ''genius loci''인 "지주신" (地主; ''진누시'')으로 여겨진다. 바다 신과 산 신의 기능적 연결은 일본 역사 전반에 걸쳐 잘 입증되었으며, 천태종 전통에서 바다의 안전한 통과를 위해 산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이 잘 기록되어 있다.
11세기 신라묘진은 지몬 전통에서 ''와카'' 시의 신의 역할을 발전시켰다. "미이데라의 시선" (三井の歌仙, ''미이노 카센'')으로 알려진 그는 다라니의 일본식 대응으로 이해되는 시를 통해 밀교에 통합되었다. 지몬 승려들은 신라묘진이 교손과 같은 승려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신라묘진은 역병의 신으로도 여겨지며, 유행병을 일으키고 질병을 치료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축복과 저주를 모두 내릴 수 있는 ''tatarigami/祟り神일본어'' (祟り神)의 특징을 보여준다. ''지몬 덴키 호로쿠''에 따르면, 1184년 유행병이 돌았을 때 황실에서 신라묘진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의 역병 관련 측면은 초기에 발전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신라와 일본의 상상 속 유행병 사이의 연관성에서 파생되어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일반적인 견해가 되었다는 결론도 있다.
5. 도상학 (Iconography)
신라묘진은 전형적으로 삼지창 형태의 중국식 두건과 붉은 가사를 착용하고 지팡이와 두루마리를 든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머리카락은 보통 흰색이지만, 어두운 머리카락을 가진 모습도 오쓰시 역사 박물관 소장품에서 발견되었다. 마크 테우웬에 따르면, 한국 기원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모는 "뚜렷하게 비한국적"이다. 김수정은 그를 전형적으로 당나라 시대 관료의 모습으로 묘사하며, 그의 도상은 세키잔 묘진과 같은 다른 유사한 신들에 비해 다양성이 떨어진다고 언급한다. 이는 만슈리 오존(五尊)에 속하는 인물인 타이쇼 로닌(大聖老人; 최승노인, 最勝老人)을 부분적으로 기반으로 했을 수 있다. 그의 이름은 그를 노인으로서의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지정하며, 문수보살의 전체 중국어 이름(大聖文殊師利, Dasheng Wenshu Shili)과 일본어로 '로닌'으로 발음되는 '노인'(老人家)이라는 용어의 조합이다. 따라서 그의 도상은 신라묘진을 불교적 인물로써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채택되었을 수 있다.
신라묘진의 묘사가 비교적 드문 반면, 그를 대표하는 잘 알려진 조각상은 미이데라에 보관되어 있으며, 신라 선신당(新羅善神捨堂)에 모셔져 있다. 이는 "비밀 불상" (秘仏, ''hibutsu'') 중 하나로,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12세기 이전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제작 시기는 논쟁의 대상이며, 1052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는 ''고호진''의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묘사이며, 국보로 지정되었다. 단일 나무 블록 기법(''ichiboku-zukuri'')을 활용한 전형적인 헤이안 시대 조각상의 예로 간주될 수 있다. 얼굴은 과장되었으며, 특히 눈은 불균형적으로 크고 기울어져 있는데, 이는 중국 숫자 八 (8)을 모방하기 위한 것이지만, 부자연스럽게 큰 두건을 제외하고는 옷은 사실적 방식으로 묘사되며, 8세기와 9세기에 전형적인 스타일을 따른다. 크리스틴 구스는 이 조각상의 얼굴 특징이 현대 관객에게는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원래는 묘사된 신의 "타자성"과 그의 초월적인 힘을 나타내는 방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이 예술적 관습은 특히 1천년 말 동아시아에서 널리 퍼졌으며, 조각상의 개별적인 얼굴과 의복 요소는 가르침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Bugaku 드라마에 사용된 가면을 의미하는 역사적 붓다의 외국인 제자들에 대한 중국 묘사와 비교할 수 있다. 1150년으로 추정되는 ''삼국초서영'' 두루마리에 묘사된 도교 현자의 묘사가 또 다른 유사점으로 간주된다.
미이데라 조각상은 날씬한 반면, 신라묘진을 뚱뚱하게 묘사한 그림은 교토의 쇼고인에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신라묘진의 묘사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시대의 온조지에서 발견된 그림으로, 중국 문인의 복장을 하고 선불교 초상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들 간의 유사점은 구마노 고도 지역에서 텐다이 종의 지몬 전통이 수험도에 미친 영향의 결과일 수 있다.
5. 1. 주요 작품
신라묘진은 삼지창 형태의 중국식 두건과 붉은 가사를 착용하고 지팡이와 두루마리를 든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머리카락은 보통 흰색이지만, 어두운 머리카락을 가진 모습도 오쓰시 역사 박물관 소장품에서 발견되었다. 마크 테우웬에 따르면, 한국 기원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모는 "뚜렷하게 비한국적"이다. 김수정은 그를 전형적으로 당나라 시대 관료의 모습으로 묘사하며, 그의 도상은 세키잔 묘진과 같은 다른 유사한 신들에 비해 다양성이 떨어진다고 언급한다. 이는 만슈리 오존(五尊)에 속하는 인물인 타이쇼 로닌(大聖老人; 최승노인, 最勝老人)을 부분적으로 기반으로 했을 수 있다. 그의 이름은 그를 노인으로서의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지정하며, 문수보살의 전체 중국어 이름(大聖文殊師利, Dasheng Wenshu Shili)과 일본어로 '로닌'으로 발음되는 '노인'(老人家)이라는 용어의 조합이다. 따라서 그의 도상은 신라묘진을 불교적 인물로써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채택되었을 수 있다.신라묘진의 묘사가 비교적 드문 반면, 그를 대표하는 잘 알려진 조각상은 미이데라에 보관되어 있으며, 신라 선신당(新羅善神捨堂)에 모셔져 있다. 이는 "비밀 불상" (秘仏, ''hibutsu'') 중 하나로,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12세기 이전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제작 시기는 논쟁의 대상이며, 1052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는 ''고호진''의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묘사이며, 국보로 지정되었다. 단일 나무 블록 기법(''ichiboku-zukuri'')을 활용한 전형적인 헤이안 시대 조각상의 예로 간주될 수 있다. 얼굴은 과장되었으며, 특히 눈은 불균형적으로 크고 기울어져 있는데, 이는 중국 숫자 八 (8)을 모방하기 위한 것이지만, 부자연스럽게 큰 두건을 제외하고는 옷은 사실적 방식으로 묘사되며, 8세기와 9세기에 전형적인 스타일을 따른다. 크리스틴 구스는 이 조각상의 얼굴 특징이 현대 관객에게는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원래는 묘사된 신의 "타자성"과 그의 초월적인 힘을 나타내는 방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이 예술적 관습은 특히 1천년 말 동아시아에서 널리 퍼졌으며, 조각상의 개별적인 얼굴과 의복 요소는 가르침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Bugaku 드라마에 사용된 가면을 의미하는 역사적 붓다의 외국인 제자들에 대한 중국 묘사와 비교할 수 있다. 1150년으로 추정되는 ''삼국초서영'' 두루마리에 묘사된 도교 현자의 묘사가 또 다른 유사점으로 간주된다.
미이데라 조각상은 날씬한 반면, 신라묘진을 뚱뚱하게 묘사한 그림은 교토의 쇼고인에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신라묘진의 묘사는 아시카가 다카우지 시대의 온조지에서 발견된 그림으로, 중국 문인의 복장을 하고 선불교 초상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들 간의 유사점은 구마노 고도 지역에서 텐다이 종의 지몬 전통이 수험도에 미친 영향의 결과일 수 있다.
6. 다른 신들과의 연관성
신라묘진은 역사적으로 온조지에서 미오묘진(三尾明神)과 함께 숭배받았는데, 《곤자쿠모노가타리슈》에 따르면 미오묘진은 엔친이 이 지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물고기를 먹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이었다.
어떤 시점에서 신라묘진은 스사노오와 동일시되었는데, 이는 1210년 온조지 승려들 사이에서 이미 잘 확립되어 있었다. 신불습합의 한 예로, 덴다이 승려들과 신토 학자들, 특히 우라베 씨/卜部氏일본어의 신학적 사색을 통해 발전했다. 신라묘진과 스사노오의 동일시는 후자가 어떤 시점에 한반도를 여행했다는 전통과 와카와의 공통된 관련성, 신라묘진이 축제 기간 동안 칼을 공물로 받았다는 사실 등이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묘진과 스사노오 사이의 연관성은 온조지에서 열린 축제 기간 동안 장려되었다. 《온조지 덴키》에 열거된 신라묘진의 여러 이명은 스사노오의 음성 변형이다. 《지몬 덴키 호로쿠》는 신라묘진이 스사노오와 동일하며, 이자나미를 그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그가 아들 이사타케루/五十猛神일본어와 함께 신라를 여행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신라묘진과 스사노오를 모두 소민 쇼라이로 식별한다.
신라묘진은 고즈 텐노와 관련된 신들의 네트워크에 속했으며, 고즈 텐노와 스사노오를 모두 그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전자의 두 신 사이의 동일화를 이끄는 요인 중 하나였다.
베르나르 포레는 세키잔묘진을 신라묘진의 "히에이산에 대응하는 존재"로 간주하며, 수정 킴은 두 신이 원래 같은 신이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들은 덴다이의 두 라이벌 분파인 지몬과 산몬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신라묘진의 두 하인인 한냐 도지(般若童子, 붉은 피부로 묘사됨)와 슈쿠오 도지(宿王童子, 푸른 피부로 묘사됨)는 부모가 사찰에 맡긴 아이들을 보호하는 존재로 숭배받았으며, 그들의 주인 근처에 작은 사당(호코라)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략기》(新羅略記)에 따르면, 그들은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에게 준 창의 두 부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원 설화들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신라묘진의 화신이거나 그와 함께 신라에서 온 하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보살 문수보살(般若, 한냐)은 신라묘진의 ''혼지''로 여겨진다. 이 연결은 《온조지 덴키》에 언급되어 있으며, 그는 또한 사가라의 아들이라고 진술한다.
신라묘진은 고쿠조나 묘켄과 같은 별의 형상과 동일시될 수 있었으며, 손조오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온조지의 역사적인 승려인 라이고/頼豪일본어의 영혼은 ''온료''로 여겨지며, 신라묘진과 동일시될 수도 있었다.
6. 1. 미오묘진 (三尾明神)
신라묘진은 역사적으로 온조지에서 미오묘진(三尾明神)과 함께 숭배받았다. 《곤자쿠모노가타리슈》에 따르면 미오묘진은 엔친이 이 지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물고기를 먹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이었다.어떤 시점에서 신라묘진은 스사노오와 동일시되었는데, 이는 1210년 온조지 승려들 사이에서 이미 잘 확립되어 있었다. 신불습합의 한 예로, 덴다이 승려들과 신토 학자들, 특히 우라베 씨/卜部氏일본어의 신학적 사색을 통해 발전했다. 신라묘진과 스사노오의 동일시는 후자가 어떤 시점에 한반도를 여행했다는 전통과 와카와의 공통된 관련성, 신라묘진이 축제 기간 동안 칼을 공물로 받았다는 사실 등이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묘진과 스사노오 사이의 연관성은 온조지에서 열린 축제 기간 동안 장려되었다. 《온조지 덴키》에 열거된 신라묘진의 여러 이명은 스사노오의 음성 변형이다. 《지몬 덴키 호로쿠》는 신라묘진이 스사노오와 동일하며, 이자나미를 그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그가 아들 이사타케루/五十猛神일본어와 함께 신라를 여행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신라묘진과 스사노오를 모두 소민 쇼라이로 식별한다.
신라묘진은 고즈 텐노와 관련된 신들의 네트워크에 속했으며, 고즈 텐노와 스사노오를 모두 그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전자의 두 신 사이의 동일화를 이끄는 요인 중 하나였다.
베르나르 포레는 세키잔묘진을 신라묘진의 "히에이산에 대응하는 존재"로 간주하며, 수정 킴은 두 신이 원래 같은 신이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들은 덴다이의 두 라이벌 분파인 지몬과 산몬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보살 문수보살(般若)은 신라묘진의 ''혼지''로 여겨진다. 이 연결은 《온조지 덴키》에 언급되어 있으며, 그는 또한 사가라의 아들이라고 진술한다.
신라묘진은 고쿠조나 묘켄과 같은 별의 형상과 동일시될 수 있었으며, 손조오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온조지의 역사적인 승려인 라이고/頼豪일본어의 영혼은 ''온료''로 여겨지며, 신라묘진과 동일시될 수도 있었다.
6. 2. 한냐 도지 (般若童子) & 슈쿠오 도지 (宿王童子)
신라묘진의 두 하인인 한냐 도지(般若童子, 붉은 피부로 묘사됨)와 슈쿠오 도지(宿王童子, 푸른 피부로 묘사됨)는 부모가 사찰에 맡긴 아이들을 보호하는 존재로 숭배받았으며, 그들의 주인 근처에 작은 사당(호코라)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략기》(新羅略記)에 따르면, 그들은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에게 준 창의 두 부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원 설화들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신라묘진의 화신이거나 그와 함께 신라에서 온 하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어떤 전승에 따르면 니조 천황이 히에이 산의 승려들을 지지하여 신라묘진이 두 조력(아마도 한냐도지와 슈쿠오도지)을 보내 천연두를 유발하게 했다고 전해진다.
6. 3. 스사노오 (素戔嗚)
신라묘진은 특정 시점에 스사노오와 동일시되었다. 이 연관성은 1210년 온조지 승려들 사이에서 이미 잘 확립되어 있었다. 이것은 신불습합 현상의 한 예이다. 이는 덴다이 승려들과 신토 학자들, 특히 우라베 씨/卜部氏일본어의 신학적 사색을 통해 발전했다. 그러나 이 연관성은 지몬 전통과 관련된 자료에는 잘 기록되어 있지만, 사이몬과 관련된 텍스트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스사노오는 후자의 맥락에서 마타라진과 유사한 관계를 맺었다.
신라묘진과 스사노오의 동일시는 후자가 어떤 시점에 한반도를 여행했다는 전통의 존재에 의해 촉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와카와의 공통된 관련성 또한 또 다른 요인이었을 것이다. 신라묘진이 축제 기간 동안 칼을 공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그와 스사노오 사이의 관계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관습은 처음에는 신라에서 유래된 전통에서 파생되었을 수 있다. 그와 스사노오 사이의 연관성은 온조지에서 열린 축제 기간 동안 장려되었다.
《온조지 덴키》(園城寺伝記)에 열거된 신라묘진의 여러 이명은 스사노오의 음성 변형이다. 여기에는 수고쿠(崧嶽), 수시스(菘崧), 슈산오(朱山王), 시텐후진(四天夫人 또는 天夫人), 수하츠 호시카시(素髮ホシカシ, 수정 킴에 따르면 "아마도 '별의 신'을 의미하는 ''호시카미'' 星神의 오타일 가능성이 있다")가 포함된다. 《지몬 덴키 호로쿠》(寺門伝記補録), 즉 초기 《온조지 덴키》에 대한 15세기의 보충 자료는 신라묘진이 스사노오와 동일하며, 이자나미를 그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그가 아들 이사타케루/五十猛神일본어와 함께 신라를 여행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신라묘진과 스사노오를 모두 소민 쇼라이로 식별한다.
신라묘진은 또한 고즈 텐노와 관련된 신들의 네트워크에 속했다. 고즈 텐노와 스사노오를 모두 그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전자의 두 신 사이의 동일화를 이끄는 요인 중 하나였다.
6. 4. 세키잔묘진 (赤山明神) & 마타라진 (摩多羅神)
신라묘진은 온조지에서 미오묘진(三尾明神)과 함께 숭배받았으며, 미오묘진은 엔친이 이 지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물고기를 먹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이었다. 신라묘진의 두 하인인 한냐 도지(般若童子, 붉은 피부)와 슈쿠오 도지(宿王童子, 푸른 피부)는 사찰에 맡긴 아이들을 보호하는 존재로 숭배받았으며, 그들의 주인 근처에 작은 사당(祠)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에게 준 창의 두 부분에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신라묘진의 화신이거나 그와 함께 신라에서 온 하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신라묘진은 스사노오와 동일시되었는데, 이는 1210년 온조지 승려들 사이에서 이미 잘 확립된 신불습합의 한 예이다. 덴다이 승려들과 신토 학자들, 특히 우라베 씨/卜部氏일본어의 신학적 사색을 통해 발전했다. 그러나 이 연관성은 지몬 전통 자료에는 잘 기록되어 있지만, 사이몬 관련 텍스트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스사노오는 후자의 맥락에서 마타라진과 유사한 관계를 맺었다. 신라묘진과 스사노오의 동일시는 후자가 한반도를 여행했다는 전통, 와카와의 공통된 관련성, 축제 기간 동안 칼을 공물로 받았다는 사실 등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온조지 축제 기간 동안 이러한 연관성이 장려되었다. 《온조지 덴키》(園城寺伝記)에 열거된 신라묘진의 여러 이명은 스사노오의 음성 변형이다. 여기에는 수고쿠(崧嶽), 수시스(菘崧), 슈산오(朱山王), 시텐후진(四天夫人 또는 天夫人), 수하츠 호시카시(素髮ホシカシ, "아마도 '별의 신'을 의미하는 ''호시카미'' 星神의 오타")가 포함된다. 《지몬 덴키 호로쿠》(寺門伝記補録)는 신라묘진이 스사노오와 동일하며, 이자나미를 그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이사타케루/五十猛神일본어와 함께 신라를 여행했다고 명시한다. 또한 신라묘진과 스사노오를 모두 소민 쇼라이로 식별한다. 신라묘진은 고즈 텐노와 관련된 신들의 네트워크에 속했으며, 고즈 텐노와 스사노오를 모두 그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전자의 두 신 사이의 동일화를 이끄는 요인이었다.
베르나르 포레는 세키잔묘진을 신라묘진의 "히에이산에 대응하는 존재"로 간주하며, 수정 킴은 두 신이 원래 같은 신이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들은 덴다이의 두 라이벌 분파인 지몬과 산몬의 수호신으로 여겨졌고, 이 경쟁은 신들에게도 전이되었다. 신라묘진과 마타라진(摩多羅神) 사이에도 많은 연결고리가 있었으며, 늙은이(''오키나'')로 묘사되는 유사한 상징성과 문수보살과의 공통된 연관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마타라진은 ''묘진''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보살 문수보살(般若, ''한냐'')은 신라묘진의 ''혼지''로 여겨진다. 이 연결은 《온조지 덴키》에 언급되어 있으며, 그는 사가라의 아들이라고 진술한다. 《신라묘진기》에서 그는 셋째 아들로 묘사되지만, 다른 신들은 사가라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 료헨의 《일본 서기 제1권 기키가키》에서 신라묘진은 여성으로 묘사되며 둘째 딸로 묘사된다.
신라묘진은 고쿠조나 묘켄과 같은 별의 형상과 동일시될 수 있었다. 그는 손조오(尊星王)와 밀접하게 연관되었으며, 《케이란 슈요슈》에 따르면, 신라묘진은 다키니텐과 동일시되는 손조오의 "자취"였으며, "신성한 여우"(''신코'')가 그의 메신저였다. 손조오는 묘켄과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케이한(慶範, 1155–1221)에 따르면 두 이름은 각각 하늘과 땅에 있는 같은 신을 지칭했다.
라이고/頼豪일본어의 영혼은 ''온료''로 여겨지며, 신라묘진과 동일시될 수도 있었다. 이 연결은 《온조지 덴키》에 언급되어 있으며, 라이고는 고산조 천황을 처벌해 달라고 신라묘진에게 간청했고, 신은 후자를 죽임으로써 응답했다. 고산조의 죽음에 대한 이 전통은 《지몬 덴키 호로쿠》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라묘진은 니조의 죽음에도 기인했는데, 히에이 산 승려들을 지지하여 두 조력을 보내 천연두를 유발하게 했다고 한다.
6. 5. 문수보살 (文殊菩薩)
신라묘진은 문수보살(般若, 한냐)의 '''혼지'''로 여겨진다. 이 연결은 《온조지 덴키》에 언급되어 있으며, 그는 또한 사가라의 아들이라고 진술한다. 《신라묘진기》에서 그는 특히 그의 셋째 아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다른 신들은 결코 사가라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 료헨의 《일본 서기 제1권 기키가키》에서 신라묘진은 대신 여성으로 묘사되며 같은 신의 둘째 딸로 묘사된다.신라묘진은 마타라진(摩多羅神)과 늙은이(''오키나'')로 묘사되는 유사한 상징성과 문수보살과의 공통된 연관성을 포함하여 많은 연결고리가 있었다.
6. 6. 별의 형상 (고쿠조, 묘켄, 손조오)
신라묘진은 고쿠조나 묘켄과 같은 별의 형상과 동일시될 수 있었으며, 손조오(尊星王)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케이란 슈요슈》에 따르면, 신라묘진은 이 맥락에서 다키니텐과 동일시되는 손조오의 "자취"였으며, 그 결과 "신성한 여우"(''신코'')가 그의 메신저였다. 다른 곳에서 손조오는 대신 묘켄과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케이한(慶範, 1155–1221)에 따르면 두 이름은 각각 하늘과 땅에 있는 같은 신을 지칭했다.어떤 시점에서 신라묘진은 스사노오와 동일시되었다. 이 연관성은 1210년 온조지 승려들 사이에서 이미 잘 확립되어 있었다. 이것은 신불습합 (神仏習合) 현상의 한 예이다. 이는 덴다이 승려들과 신토 학자들, 특히 우라베 씨/卜部氏일본어의 신학적 사색을 통해 발전했다. 그러나 이 연관성은 지몬 전통과 관련된 자료에는 잘 기록되어 있지만, 사이몬과 관련된 텍스트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스사노오는 후자의 맥락에서 마타라진과 유사한 관계를 맺었다. 신라묘진과 스사노오의 동일시는 후자가 어떤 시점에 한반도를 여행했다는 전통의 존재에 의해 촉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와카와의 공통된 관련성 또한 또 다른 요인이었을 것이다. 신라묘진이 축제 기간 동안 칼을 공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그와 스사노오 사이의 관계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관습은 처음에는 신라에서 유래된 전통에서 파생되었을 수 있다. 그와 스사노오 사이의 연관성은 온조지에서 열린 축제 기간 동안 장려되었다. 《온조지 덴키》(園城寺伝記)에 열거된 신라묘진의 여러 이명은 스사노오의 음성 변형이다. 여기에는 수고쿠(崧嶽), 수시스(菘崧), 슈산오(朱山王), 시텐후진(四天夫人 또는 天夫人), 수하츠 호시카시(素髮ホシカシ, 수정 킴에 따르면 "아마도 '별의 신'을 의미하는 ''호시카미'' 星神의 오타일 가능성이 있다")가 포함된다. 《지몬 덴키 호로쿠》(寺門伝記補録), 즉 초기 《온조지 덴키》에 대한 15세기의 보충 자료는 신라묘진이 스사노오와 동일하며, 이자나미를 그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그가 아들 이사타케루/五十猛神일본어와 함께 신라를 여행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신라묘진과 스사노오를 모두 소민 쇼라이로 식별한다. 신라묘진은 또한 고즈 텐노와 관련된 신들의 네트워크에 속했다. 고즈 텐노와 스사노오를 모두 그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전자의 두 신 사이의 동일화를 이끄는 요인 중 하나였다.
베르나르 포레는 세키잔묘진을 신라묘진의 "히에이산에 대응하는 존재"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수정 킴은 두 신이 원래 같은 신이었을 수도 있다고 직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들은 덴다이의 두 라이벌 분파, 즉 지몬과 산몬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이 학교들 간의 경쟁은 상응하는 신들에게도 전이되었다. 즉, 그들 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하인인지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있었고, 고산조 천황에 대한 이야기에서 두 신이 그의 꿈에 나타나서 미이데라에 수계단을 지을 것인지에 대해 상반된 지침을 내렸다. 신라묘진과 마타라진(摩多羅神) 사이에도 많은 연결고리가 있었으며, 예술에서 늙은이(''오키나'')로 묘사되는 유사한 상징성과 문수보살과의 공통된 연관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와 세키잔묘진 사이의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마타라진은 결코 ''묘진'' 자신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보살 문수보살(般若, ''한냐'')은 신라묘진의 ''혼지''로 여겨진다. 이 연결은 《온조지 덴키》에 언급되어 있으며, 그는 또한 사가라의 아들이라고 진술한다. 《신라묘진기》에서 그는 특히 그의 셋째 아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다른 신들은 결코 사가라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 료헨의 《일본 서기 제1권 기키가키》에서 신라묘진은 대신 여성으로 묘사되며 같은 신의 둘째 딸로 묘사된다.
역사적으로 온조지에서 미오묘진(三尾明神)과 함께 숭배받았는데, 《곤자쿠모노가타리슈》에 따르면 미오묘진은 엔친이 이 지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물고기를 먹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이었다. 또한 신라묘진의 두 하인인 한냐 도지(般若童子, 붉은 피부로 묘사됨)와 슈쿠오 도지(宿王童子, 푸른 피부로 묘사됨)는 부모가 사찰에 맡긴 아이들을 보호하는 존재로 숭배받았으며, 그들의 주인 근처에 작은 사당(호코라)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략기》(新羅略記)에 따르면, 그들은 아마테라스가 원래 스사노오에게 준 창의 두 부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원 설화들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신라묘진의 화신이거나 그와 함께 신라에서 온 하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온조지의 역사적인 승려인 라이고/頼豪일본어의 영혼은 전통적으로 ''온료''로 여겨지며, 신라묘진과 동일시될 수도 있었다. 그들 사이의 연결은 《온조지 덴키》에 언급되어 있으며, 라이고는 새로운 수계단의 건설을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한 고산조 천황을 처벌해 달라고 신라묘진에게 간청했고, 그 신은 후자를 죽임으로써 응답했다. 고산조의 죽음에 대한 이 전통은 《지몬 덴키 호로쿠》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라묘진의 죽음에 기인한 또 다른 천황은 니조였는데, 그는 미이데라보다 히에이 산의 승려들을 지지하여 후자의 위치와 관련된 신이 두 조력을 보내 그에게 천연두를 유발하게 했다고 한다.
6. 7. 라이고 (頼豪)
신라묘진은 온조지에서 미오묘진과 함께 숭배받았으며, 엔친이 이 지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물고기를 먹는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은 미오묘진이었다. 신라묘진의 두 하인인 한냐 도지(붉은 피부)와 슈쿠오 도지(푸른 피부)는 부모가 사찰에 맡긴 아이들을 보호하는 존재로 숭배받았으며, 그들의 주인 근처에 작은 호코라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략기》에 따르면, 그들은 아마테라스가 스사노오에게 준 창의 두 부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원 설화들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은 신라묘진의 화신이거나 그와 함께 신라에서 온 하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어떤 시점에서 신라묘진은 스사노오와 동일시되었다. 이 연관성은 1210년 온조지 승려들 사이에서 이미 잘 확립되어 있었다. 이것은 신불습합의 한 예이다. 이는 덴다이 승려들과 신토 학자들, 특히 우라베 씨의 신학적 사색을 통해 발전했다. 그러나 이 연관성은 지몬 전통과 관련된 자료에는 잘 기록되어 있지만, 사이몬과 관련된 텍스트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스사노오는 후자의 맥락에서 마타라진과 유사한 관계를 맺었다. 신라묘진과 스사노오의 동일시는 후자가 어떤 시점에 한반도를 여행했다는 전통과, 와카와의 공통된 관련성 또한 또 다른 요인이었을 것이다. 신라묘진이 축제 기간 동안 칼을 공물로 받았다는 사실도 그와 스사노오 사이의 관계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 관습은 처음에는 신라에서 유래된 전통에서 파생되었을 수 있다. 그와 스사노오 사이의 연관성은 온조지에서 열린 축제 기간 동안 장려되었다. 《온조지 덴키》에 열거된 신라묘진의 여러 이명은 스사노오의 음성 변형이다. 여기에는 수고쿠(崧嶽), 수시스(菘崧), 슈산오(朱山王), 시텐후진(四天夫人 또는 天夫人), 수하츠 호시카시(素髮ホシカシ, "아마도 '별의 신'을 의미하는 ''호시카미'' 星神의 오타일 가능성이 있다")가 포함된다. 《지몬 덴키 호로쿠》는 신라묘진이 스사노오와 동일하며, 이자나미를 그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그가 아들 이사타케루와 함께 신라를 여행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신라묘진과 스사노오를 모두 소민 쇼라이로 식별한다. 신라묘진은 고즈 텐노와 관련된 신들의 네트워크에 속했으며, 고즈 텐노와 스사노오를 모두 그와 동일시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전자의 두 신 사이의 동일화를 이끄는 요인 중 하나였다.
베르나르 포레는 세키잔묘진을 신라묘진의 "히에이산에 대응하는 존재"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수정 킴은 두 신이 원래 같은 신이었을 수도 있다고 직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들은 덴다이의 두 라이벌 분파, 즉 지몬과 산몬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이 학교들 간의 경쟁은 상응하는 신들에게도 전이되었다. 즉, 그들 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하인인지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있었고, 고산조 천황에 대한 이야기에서 두 신이 그의 꿈에 나타나서 미이데라에 수계단을 지을 것인지에 대해 상반된 지침을 내렸다. 신라묘진과 마타라진 사이에도 많은 연결고리가 있었으며, 예술에서 늙은이(''오키나'')로 묘사되는 유사한 상징성과 문수보살과의 공통된 연관성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와 세키잔묘진 사이의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마타라진은 결코 ''묘진'' 자신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문수보살은 신라묘진의 ''혼지''로 여겨진다. 이 연결은 《온조지 덴키》에 언급되어 있으며, 그는 또한 사가라의 아들이라고 진술한다. 《신라묘진기》에서 그는 특히 그의 셋째 아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다른 신들은 결코 사가라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는다. 료헨의 《일본 서기 제1권 기키가키》에서 신라묘진은 대신 여성으로 묘사되며 같은 신의 둘째 딸로 묘사된다.
신라묘진은 고쿠조나 묘켄과 같은 별의 형상과 동일시될 수 있었다. 그는 손조오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케이란 슈요슈》에 따르면, 신라묘진은 이 맥락에서 다키니텐과 동일시되는 손조오의 "자취"였으며, 그 결과 "신성한 여우"(''신코'')가 그의 메신저였다. 다른 곳에서 손조오는 대신 묘켄과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케이한에 따르면 두 이름은 각각 하늘과 땅에 있는 같은 신을 지칭했다.
온조지의 역사적인 승려인 라이고의 영혼은 전통적으로 ''온료''로 여겨지며, 신라묘진과 동일시될 수도 있었다. 그들 사이의 연결은 《온조지 덴키》에 언급되어 있으며, 라이고는 새로운 수계단의 건설을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한 고산조 천황을 처벌해 달라고 신라묘진에게 간청했고, 그 신은 후자를 죽임으로써 응답했다. 고산조의 죽음에 대한 이 전통은 《지몬 덴키 호로쿠》에도 기록되어 있다. 신라묘진의 죽음에 기인한 또 다른 천황은 니조였는데, 그는 미이데라보다 히에이 산의 승려들을 지지하여 후자의 위치와 관련된 신이 두 조력을 보내 그에게 천연두를 유발하게 했다고 한다.
7. 숭배
신라묘진은 온조사(미이데라)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사찰이 위치한 역사적인 오미국(近江国)은 신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따라서 신라묘진의 존재는 한국 이민자의 정착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오토모 씨(大友氏)는 초기부터 이 신의 숭배를 장려하는 데 관여했다. 그러나 오토모 씨가 실제로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는지, 아니면 백제에서 건너왔는지, 또는 중국 황제(中國皇帝) 한나라 헌제(漢獻帝)의 후손인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불확실하다. 신라묘진의 초기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무로마치 시대와 에도 시대 이전의 온조사 기록이 적어 복잡하다.
사찰의 전설에 따르면, 신라묘진을 나타내는 조각상은 이미 9세기에 엔친(圓珍)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다른 증거는 없다. 그에 대한 가장 오래된 언급은 971년의 문서에서 나타난다. 그의 신사의 최초의 알려진 승려는 10세기에 살았던 오토모 씨 출신의 키요무라(淸村)였다. 11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다양한 의식이 정기적으로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열렸다. 그 중 하나는 단순히 "신라묘진 축제(新羅明神祭礼, ''Shinra Myōjin sairei'')"으로 알려졌으며, 1052년에 묘손(妙孫)에 의해 처음 열렸다. 신라묘진은 이 승려에게 신탁을 통해 그가 지역 성직자의 수호신으로 활동할 것이라고 전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승려들만 그의 축제에 참여했지만, 결국 온조사에서 열리는 가장 큰 공개 행사 중 하나가 되었으며, 특히 1210년에는 11개의 가마(神輿, ''미코시'')를 동반하는 잘 기록된 행렬이 열렸다.
신라묘진을 중심으로 한 다른 의식의 예로는 1202년에 처음 열린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강좌였을 가능성이 있는 ''신라 삼십강''(新羅三十講, ''Shinra sanjūkō'')이 있다. 또한 1109년에 처음 열린 ''신라 염불(新羅念仏)''은 치유와 장수를 위해 그를 부르기 위해 신라묘진의 이름을 암송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이며, 장수를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춘 다양한 ''엔넨''(延年) 축제도 있었다.
15세기까지 오토모 씨는 신라묘진의 신사를 유지하는 유일한 사람들이었고, ''신라명신기''(新羅明神記)는 그들에게 그의 비밀 의식의 지속적인 전수를 공헌했다. 그러나 11세기부터 그들의 권력은 쇠퇴했고, 세이와 겐지(清和源氏) 분파의 미나모토 씨(源氏)가 텐다이의 지몬 전통과도 연관되게 되었다. 신라묘진은 고(古) 9년 전쟁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頼義)(988-1075)의 생애 동안 그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는 이 분쟁에서 승리하면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온조사에 헌신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 후 신라묘진의 신사는 셋째 아들인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의 성인식(元服)이 열리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별명 신라 사부로(新羅三郎)는 종종 그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들의 가문의 영향으로 신라묘진에 대한 숭배는 오미 밖으로 퍼져 홋카이도까지 미쳤다. 그를 새로운 지역에 소개할 수 있게 한 또 다른 요인은 지몬 전통이 구마노 순례(熊野古道)에 참여한 것이었다. 이 경로를 통해 전해졌기 때문에 그는 기이 반도의 다양한 종교 단체, 즉 황실의 순례자, 수험도 수행자 등을 포함한 사람들의 관습에 통합되었다.
에도 시대에도 신라묘진에 대한 숭배는 계속되었지만 그 범위는 축소되었다. 17세기부터 홋카이도의 마쓰마에에 거주한 마쓰마에 씨(松前氏)는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를 그들의 조상으로 여겼고, 마쓰마에 카게히로의 ''신라의 기록(新羅之記録)''(1646)에서 마찬가지로 신라묘진을 그들의 수호신으로 여겼다. 그는 오늘날까지 숭배되고 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재배치로 인해 그에게 헌정된 신사는 이제 온조사 단지와 분리되어 있지만, 그를 위한 의식은 1367년에 처음 편찬되어 1615년에 승려 엔신(圓親)에 의해 복사된 ''삼사법회법칙''(三社法会法則, ''Sansha hōe hōsoku'')을 따른다. 그들은 "신에게 바치는 심경의 암송"으로 시작하며, 추가적으로 "엔친과의 신의 관계; 법화경의 제목 암송; 깨달음을 얻기 위한 서약; 신라묘진의 시종; 다양한 종류의 축복을 위한 기도"가 마지막을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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