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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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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싱가포르 전략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이 미국과 일본의 해군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구상한 해상 방어 계획이다. 이 전략은 싱가포르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함대를 배치하여, 태평양 지역에서 영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20년대에는 호주, 뉴질랜드 등 자치령의 지지를 받았지만, 1930년대 후반에는 유럽의 정세 악화와 영국의 방어 약속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싱가포르에 배치된 영국 함대는 일본의 공격에 취약했고, 1942년 싱가포르는 함락되었다. 싱가포르 함락은 대영 제국의 위신에 큰 타격을 입혔으며, 전쟁 이후에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8년에는 핵무기를 장착한 V 폭격기를 싱가포르에 배치하는 매머드 작전이 실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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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전략
지도
개요
명칭싱가포르 전략
다른 명칭극동 전략
유형군사 전략
목표동남아시아 방어
설계자영국 정부
시행 국가영국
관련 전투싱가포르 전투
배경
주요 요인일본의 확장,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지정학적 변화
주요 내용
핵심 요소싱가포르 요새화, 영국 해군 기지 건설, 동남아시아 방어선 구축
가정일본의 공격은 있을 수 없거나 늦춰질 것이다.
결과
주요 결과싱가포르 전투에서의 영국군 패배, 전략의 실패
영향동남아시아에서의 영국 영향력 감소, 일본의 점령
비판
주요 비판과도한 의존, 자원 부족, 일본의 능력 과소평가
관련 인물
주요 인물윈스턴 처칠, 아서 퍼시벌

2. 기원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해상 패권을 놓고 영국 해군에 도전했던 독일 제국 해군의 공해 함대는 스카파 플로에서 자침되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은 이미 세계 최강의 함대 지위를 놓고 미국 해군일본 제국 해군으로부터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3] 미국이 해군 원수 조지 듀이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해군"이라고 칭했던 해군을 창설하려는 결의는 새로운 해상 군비 경쟁을 예고했다.[4]

1921년의 대영 제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남아프리카는 자치령이었다.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은 영국, 미국, 일본 해군의 주력함 비율을 5:5:3으로 규정했고,[16] 1930년 런던 해군 조약은 해군 건설을 제한하여 영국 조선 산업의 쇠퇴를 초래했다.[18] 1934년 제1 해군 경 어늘리 채트필드 제독은 일본 및 가장 강력한 유럽 강대국과 싸우기에 충분한 새로운 해군 증강을 요구했지만, 재무부는 8800만파운드에서 1.04억파운드에 이르는 프로그램의 잠재적 비용을 우려했다.[20] 1938년까지 재무부는 재무장을 막는 데 실패했고, 정치인과 대중은 먼 미래의 주요 재정 위기보다 독일 및 일본과의 전쟁에 대한 준비 부족을 더 두려워했다.[21]

2. 1. 해군 군비 경쟁 심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제국 해군의 공해 함대는 스카파 플로에서 자침했지만, 영국 해군은 미국 해군일본 제국 해군의 도전에 직면했다.[3] 미국은 해군 원수 조지 듀이가 언급한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해군" 건설을 추진하며 새로운 해상 군비 경쟁을 예고했다.[4]

미 해군은 1919년 영국 해군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신규 함선들은 기술적 우위를 점했다.[23] 1889년 2강 기준은 영국 해군이 다른 두 강대국 해군력과 맞먹는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1909년에는 전함의 60% 우위로 기준이 완화되었다.[5]

1919년, 제1 해군 경 해군 원수(Royal Navy) 로슬린 웨미스와 해군 작전 참모 해군 원수(United States) 윌리엄 S. 벤슨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그러나 1909년부터 영국 정부는 미국을 잠재적 적으로 간주하지 말라고 지시했고,[6] 1919년 8월 영국 내각은 이를 재확인하여, 미 해군 건조 계획을 영국 해군 자체 계획의 명분으로 삼지 않았다.[7] 1920년 제1 해군 경 월터 롱은 "1강 기준"을 발표하여 해군력을 "다른 어떤 강대국의 해군보다 열등하지" 않게 유지했다.[5]

1921년 제국 회의에서 영국과 자치령 총리들은 통일된 국제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만났고,[9] 영일 동맹 갱신 여부가 주요 쟁점이었다.[10]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빌리 휴즈와 뉴질랜드 총리 빌 마세이는 갱신을 지지했지만,[11] 캐나다 총리 아서 메이건은 미국과의 관계를 우려하여 반대했다.[14] 결국 동맹은 갱신되지 않았다.[15]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은 영국, 미국, 일본 해군의 주력함 비율을 5:5:3으로 규정했다.[16] 1920년대 영국 해군은 세계 최대 규모였고, 일본을 가장 유력한 적대국으로 간주했다.[17]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은 싱가포르를 제외한 태평양 섬 요새화를 금지했다.[16] 1930년 런던 해군 조약은 해군 건설을 제한하여 영국 조선 산업의 쇠퇴를 초래했다.[18] 1935년 영독 해군 협정은 독일의 해군 규모 제한 의사를 나타냈지만,[19] 1934년 제1 해군 경 어늘리 채트필드는 일본 및 유럽 강대국에 대응하기 위한 해군 증강을 요구했다.[20] 재무부는 8800만파운드에서 1.04억파운드에 이르는 비용을 우려했지만,[20] 1938년까지 재무장을 막지 못했고, 정치인과 대중은 미래의 재정 위기보다 독일 및 일본과의 전쟁 대비 부족을 더 두려워했다.[21]

2. 2. 1강 기준 정책과 영일 동맹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제국 해군의 공해 함대는 스카파 플로에서 자침되었지만, 영국 해군은 미국 해군일본 제국 해군의 도전에 직면했다.[3] 미국은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해군"을 건설하려 했고, 이는 새로운 해상 군비 경쟁을 예고했다.[4]

1889년의 2강 기준은 영국 해군이 다른 두 강대국과 맞설 수 있을 만큼 강력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1909년에는 전함의 60% 우위로 축소되었다.[5] 1920년 제1 해군 경 월터 롱 경은 "1강 기준"을 발표했는데, 이는 해군력을 "다른 어떤 강대국의 해군보다 열등하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었다.[5] 1강 기준은 1921년 제국 회의에서 공포되었다.[8]

1921년 제국 회의에서 영국과 자치령 총리들은 영일 동맹 갱신 여부를 논의했다.[9]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빌리 휴즈와 뉴질랜드 총리 빌 마세이는 갱신을 지지했지만,[11] 캐나다 총리 아서 메이건은 미국과의 관계를 우려하여 반대했다.[14] 결국 동맹은 갱신되지 않았다.[15]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은 영국, 미국, 일본 해군의 주력함 비율을 5:5:3으로 규정했다.[16] 1930년 런던 해군 조약은 해군 건설을 제한하여 영국 조선 산업의 쇠퇴를 초래했다.[18] 1935년 영독 해군 협정은 독일의 해군 규모 제한 의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19]

2. 3.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과 런던 해군 조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제국 해군의 공해 함대는 스카파 플로에서 자침하여 해상 패권을 둘러싼 영국 해군의 경쟁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영국 해군은 미국 해군일본 제국 해군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해상 군비 경쟁으로 이어졌다.[3][4]

미 해군은 1919년 영국 해군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전시 건조 계획에 따라 건조된 함선들이 계속 진수되었고, 더 최근에 건조된 미국 함선들은 기술적 우위를 점했다.[23] 1889년의 2강 기준은 영국 해군이 다른 두 강대국과 맞설 수 있을 만큼 강력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1909년에는 전함의 60% 우위로 축소되었다.[5]

1920년 제1 해군 경 월터 롱 경은 "1강 기준"을 발표했는데, 이 정책은 해군력을 "다른 어떤 강대국의 해군보다 열등하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었다.[5] 1강 기준은 1921년 제국 회의에서 공포되었다.[8]

영국과 자치령의 총리들은 1921년 제국 회의에서 통일된 국제 정책, 특히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를 결정하기 위해 만났다.[9]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영일 동맹의 갱신 여부였는데,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빌리 휴즈와 뉴질랜드 총리 빌 마세이는 갱신을 강력하게 지지한 반면, 캐나다 총리 아서 메이건은 미국과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11][14] 결국 동맹 갱신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고, 동맹은 만료되었다.[15]

1922년의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은 영국, 미국, 일본 해군의 주력함에 대해 5:5:3의 비율을 규정했다.[16] 이 조약은 또한 싱가포르를 제외한 태평양의 섬 요새화를 금지했다.[16] 1930년의 런던 해군 조약은 해군 건설을 제한하여 영국 조선 산업의 심각한 쇠퇴를 초래했다.[18]

3. 계획

1919년 8월, 존 러쉬워스 젤리코 제독은 호주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일본 제국 해군에 대항하기 위한 영국 태평양 함대 창설을 제안했다. 이 함대는 전함 8척, 순양전함 8척, 항공모함 4척, 순양함 10척, 구축함 40척, 잠수함 36척 및 지원 부대로 구성될 예정이었다.[23] 젤리코는 이 함대가 극동 지역 어딘가에 주요 도크를 필요로 할 것이라고 보았다.

1920년 해군성은 ''전시 각서 (동부) 1920''을 발행하여 싱가포르 방어가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고 명시했다.[23] 이 문서를 바탕으로 일본과의 전쟁은 세 단계로 계획되었다. 첫째, 싱가포르 주둔군이 요새를 방어하는 동안 함대가 본국에서 싱가포르로 이동한다. 둘째, 함대가 싱가포르에서 출항하여 홍콩을 구원하거나 재탈환한다. 셋째, 함대가 일본을 봉쇄하여 항복을 강요한다.[34]

1919년 4월, 해군성 계획부는 미국 또는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태평양에 해군 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 위치를 검토했다. 홍콩은 너무 취약하고, 시드니는 안전하지만 일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싱가포르를 최적의 위치로 선정했다.[25] 함대가 싱가포르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예상 시간은 초기 42일에서 점차 늘어나, 1939년 9월에는 180일에 달했다.[26]

지브롤터, 몰타, 포트사이드, 포트수단, 아덴, 콜롬보, 트링코말리, 랑군, 싱가포르, 홍콩 등지에 유류 저장 시설이 건설되었다.[27] 싱가포르는 약 1270058750.00kg의 석유를 저장할 예정이었다.[29] 카마란 만, 아두 환초, 난코리 섬에는 비밀 기지가 설치되었다.[30] 함대는 매달 약 111765170.00kg의 석유를 필요로 했고, 이는 60척의 유조선으로 수송될 예정이었다.[31] 석유는 아바단 정유소와 랑군의 정유 공장에서 공급되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모든 생산량을 구매하여 보충했다.[32]

1941년 9월 싱가포르 해군 기지의 제독 IX 부유식 드라이 도크 내부의 영국 군함


해군 계획자들은 싱가포르가 일본 근해 작전에 적합한 기지가 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4] 미국의 지원이 있다면 마닐라를 전진 기지로 사용할 가능성도 있었다.[33] 영국 계획자들은 일본이 불리한 상황에서 해상 전투를 벌일 의사가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봉쇄를 통해 경제적 압박을 가하는 방안을 구상했다.[34]

무역 위원회와 도쿄 주재 해군 무관의 정보를 바탕으로, 계획자들은 대영 제국이 일본 수입의 약 27%를 차지한다고 추정했다. 금속, 기계, 화학 물질, 석유, 고무 등 일본이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핵심 자재들은 대부분 영국의 통제하에 있었다.[35]

그러나 해상 봉쇄는 함선이 항공기와 잠수함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37] 또한 일본 함대를 격파하거나 무력화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일본 함대가 전투를 위해 어떤 위치에 배치될지는 불확실했다.[35] 동인도 기지 사령관 허버트 리치먼드 제독은 봉쇄를 통해 일본의 항복을 강요한다는 논리가 순환 논리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38]

1919년 계획에는 전진 기지를 건설하고 방어하기 위한 이동 해군 기지 방어 조직(MNBDO)이 포함되었다.[39] MNBDO는 7,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대공포 여단, 해안 포병 여단, 왕립 해병대 보병 대대로 구성되었다.[40] 1930년대에 해군성은 상륙 작전 분야에서 영국이 미국과 일본에 비해 뒤처져 있다는 점을 우려하여, 1938년 7월 육해공군 합동 훈련 개발 센터를 설립했다. 초대 사령관 로벤 에드워드 해롤드 마운드 대위의 지휘 아래 상륙정 설계를 포함한 상륙 작전 관련 문제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42]

1920년대에 셈필 경 대령은 셈필 미션을 이끌고 일본 제국 해군이 항공대를 설립하는 것을 지원했다. 왕립 해군은 장갑 비행 갑판을 개발했지만, 이는 항공모함이 운용할 수 있는 항공기 수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았다.[46] 또한 왕립 해군은 함선 대공포의 성능을 과신하여 고성능 전투기의 필요성을 간과했고,[47] 해군 항공대 항공기는 일본 항공기에 비해 성능이 떨어졌다.[48]

1939년 6월 톈진 사건은 독일이 극동 지역에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보여주었다.[49]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영국은 이탈리아를 최대한 빨리 전쟁에서 제외시키는 방안을 고려했다.[50] 전 제1해군 장관 레지널드 드랙스 경은 항공모함 1척, 순양함 몇 척, 구축함과 함께 전함 4~5척으로 구성된 "비행 전대"를 싱가포르에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시 국방 조정 장관이었던 채트필드는 이 비행 전대가 일본 함대의 표적이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51]

3. 1. 젤리코 보고서와 영국 태평양 함대 구상

1918년 11월, 호주 해군 장관 조셉 쿡 경은 존 러쉬워스 젤리코 제독에게 대영 제국의 해군 방어 계획 수립을 요청했다. 젤리코는 1919년 2월 순양전함을 타고 대영 제국을 순방했다.[25] 1919년 8월 호주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의 기밀 부분에서 젤리코는 대영 제국과 일본의 이익이 충돌할 것이라고 조언하며, 일본 제국 해군에 대항할 영국 태평양 함대 창설을 요구했다. 그는 전함 8척, 순양전함 8척, 항공모함 4척, 순양함 10척, 구축함 40척, 잠수함 36척 및 지원 부대가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다.[23]

젤리코는 함대가 극동 지역 어딘가에 주요 도크가 필요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1919년 10월 제국 방위 위원회에서 검토된 "극동의 해군 상황"이라는 논문에서 해군 참모들은 영일 동맹 유지가 대영 제국과 미국 간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20년, 해군성은 일본과의 전쟁 발발 시 지침인 ''전시 각서 (동부) 1920''을 발행, 싱가포르 방어를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고 묘사했다.[23] 이 전략은 1923년 제국 회의에서 자치령에 제시되었다.[24] 각서 작성자들은 일본과의 전쟁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싱가포르 주둔군이 요새를 방어하는 동안 함대가 본국에서 싱가포르로 이동하는 단계, 두 번째는 함대가 싱가포르에서 출항하여 홍콩을 구원하거나 재탈환하는 단계, 마지막은 함대가 일본을 봉쇄하고 항복을 강요하는 단계였다.[34]

대부분의 계획은 싱가포르 요새화와 관련된 첫 번째 단계에 집중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함대를 지원할 수 있는 해군 기지가 필요했다. 미국은 1909년부터 1919년 사이에 건선거를 건설하여 전함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영국 해군은 몰타 동쪽에 그러한 기지가 없었다.[23] 1919년 4월, 해군성 계획부는 미국 또는 일본과의 전쟁 시 태평양에 해군 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한 위치를 검토한 논문을 발표했다. 홍콩은 너무 취약하고, 시드니는 안전하지만 일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판단, 싱가포르가 최적의 절충 지점으로 부상했다.[25]

전시 각서 (동부), 동방으로 가는 길


함대가 적대 행위 발발 후 싱가포르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 추정치는 다양했다. 여기에는 함대 집결, 항해 준비 및 싱가포르 이동이 포함되어야 했다. 첫 번째 추정치는 42일이었으나, 1938년에는 70일, 식량 공급에 14일이 추가되었고, 1939년 6월에는 90일과 식량 공급에 15일, 1939년 9월에는 180일로 늘어났다.[26]

3. 2. 싱가포르 방어와 해군 기지 건설

1918년 11월, 호주 해군 장관 조셉 쿡 경은 존 러쉬워스 젤리코 제독에게 대영 제국의 해군 방어 계획 수립을 요청했다. 젤리코는 1919년 8월 호주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일본 제국 해군에 대항할 영국 태평양 함대 창설을 요구했다. 이 함대는 전함 8척, 순양전함 8척, 항공모함 4척, 순양함 10척, 구축함 40척, 잠수함 36척 및 지원 부대로 구성될 예정이었다.[23]

젤리코는 함대에 극동 지역 주요 도크가 필요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1919년 10월 제국 방위 위원회는 "극동의 해군 상황"이라는 논문을 검토했는데, 해군 참모들은 영일 동맹 유지가 대영 제국과 미국 간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20년, 해군성은 일본과의 전쟁 발발 시 지침인 ''전시 각서 (동부) 1920''을 발행, 싱가포르 방어를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고 묘사했다.[23] 1923년 제국 회의에서 이 전략이 제시되었다.[24]

대부분의 계획은 싱가포르 요새화에 집중했다. 함대를 지원할 해군 기지가 필요했는데, 영국 해군은 몰타 동쪽에 전함을 수용할 건선거가 없었다.[23] 1919년 4월, 해군성 계획부는 태평양 해군 기지 건설 가능 위치를 검토, 홍콩은 취약하고 시드니는 너무 멀어 싱가포르가 최적지로 부상했다.[25]

함대가 싱가포르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 추정치는 다양했다. 초기 42일에서 1938년 70일, 1939년 6월 90일, 1939년 9월에는 180일까지 늘어났다.[26]

지브롤터, 몰타, 포트사이드, 포트수단, 아덴, 콜롬보, 트링코말리, 랑군, 싱가포르, 홍콩에 유류 저장 시설이 건설되었다.[27] 전함이 완전히 적재된 상태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어 반대편에서 급유해야 했다.[28] 싱가포르는 약 1270058750.00kg의 오일을 저장할 예정이었다.[29] 카마란 만, 아두 환초 및 난코리 섬에 비밀 기지가 설립되었다.[30] 함대는 매달 약 111765170.00kg의 오일을 필요로 했으며, 60척의 유조선으로 운송될 예정이었다.[31] 오일은 아바단 정유소와 랑군의 정유 공장에서 운송되었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모든 생산량을 구매하여 보충했다.[32]

3. 3. 봉쇄 전략과 이동 해군 기지 방어 조직

싱가포르 전략은 전쟁과 전쟁 사이에 진화해 온 일련의 전쟁 계획으로, 싱가포르에 함대를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부 계획은 일본을 격파하기 위해 설계되었고, 다른 계획은 침략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22] 1919년 10월 제국 방위 위원회에서 검토된 "극동의 해군 상황"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해군 참모들은 영일 동맹을 유지하면 대영 제국미국 간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20년, 해군성은 일본과의 전쟁 발발 시 지침인 ''전시 각서 (동부) 1920''을 발행했다. 이 문서에서 싱가포르 방어는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고 묘사되었다.[23] 이 전략은 1923년 제국 회의에서 자치령에 제시되었다.[24]

각서 작성자들은 일본과의 전쟁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싱가포르 주둔군은 요새를 방어하는 동안 함대는 본국에서 싱가포르로 이동할 것이다. 함대는 싱가포르에서 출항하여 홍콩을 구원하거나 재탈환할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함대가 일본을 봉쇄하고 항복을 강요할 것이다.[34]

대부분의 계획은 싱가포르 요새화와 관련된 첫 번째 단계에 집중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함대를 지원할 수 있는 해군 기지가 필요했다. 1919년 4월, 해군성 계획부는 미국 또는 일본과의 전쟁 시 태평양에 해군 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 가능한 위치를 검토한 논문을 발표했다. 홍콩은 고려되었지만 너무 취약하다고 여겨졌고, 시드니는 안전하다고 여겨졌지만 일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싱가포르는 최적의 절충 지점으로 부상했다.[25]

함대가 적대 행위 발발 후 싱가포르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추정치는 다양했다. 여기에는 함대 집결, 항해 준비 및 싱가포르 이동이 포함되어야 했다. 첫 번째 추정치는 42일로, 적절한 경고를 가정했다. 1938년에는 70일로 늘어났고, 식량 공급에 14일이 더 걸렸다. 1939년 6월에는 90일과 식량 공급에 15일이 더 걸렸고, 1939년 9월에는 180일로 더 늘어났다.[26]

지브롤터, 몰타, 포트사이드, 포트수단, 아덴, 콜롬보, 트링코말리, 랑군, 싱가포르, 홍콩에 유류 저장 시설이 건설되었다.[27] 한 가지 복잡한 요인은 전함이 완전히 적재된 상태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대편에서 급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8] 싱가포르는 약 1270058750.00kg의 오일을 저장할 예정이었다.[29] 카마란 만, 아두 환초 및 난코리 섬에 비밀 기지가 설립되었다.[30] 함대는 매달 약 111765170.00kg의 오일을 필요로 할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이는 60척의 유조선으로 운송될 것이었다.[31] 오일은 아바단 정유소와 랑군의 정유 공장에서 운송되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모든 생산량을 구매하여 보충했다.[32]

1919년 계획에는 전진 기지를 건설하고 방어할 수 있는 이동 해군 기지 방어 조직(MNBDO)이 포함되었다.[39] MNBDO는 7,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대공포 여단, 해안 포병 여단 및 왕립 해병대의 보병 대대가 포함되었다.[40] 1920년대에는 MNBDO 개념을 테스트하기 위해 지중해에서 함대 훈련이 실시되었다.[41] 왕립 해병대는 상륙 작전에 큰 관심이 없었고 조직적인 지원이 부족하여 상륙 작전의 기술과 전술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해군성은 미국과 일본이 이 분야에서 영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을 우려했고, 육군과 공군을 설득하여 1938년 7월에 개설된 육해공군 합동 훈련 개발 센터를 설립했다. 초대 사령관인 로벤 에드워드 해롤드 마운드 대위의 지휘하에 상륙정 설계를 포함하여 상륙 작전의 문제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42]

3. 4. 해군 항공력 발전과 한계

1919년 11월, 호주 해군 장관 조셉 쿡 경은 존 러쉬워스 젤리코 제독에게 대영 제국의 해군 방어 계획 수립을 요청했다. 젤리코는 1919년 8월 호주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일본 제국 해군에 대항할 영국 태평양 함대 창설을 요구했다. 이 함대는 전함 8척, 순양전함 8척, 항공모함 4척 등으로 구성될 예정이었다.[23] 젤리코는 함대의 주요 도크가 극동 지역 어딘가에 필요하다고 언급했다.[23]

1920년, 해군성은 ''전시 각서 (동부) 1920''을 발행하여 싱가포르 방어를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라고 묘사했다.[23] 함대는 본국에서 싱가포르로 이동 후, 홍콩을 구원하거나 재탈환하고, 일본을 봉쇄하여 항복을 강요하는 3단계 전략이 제시되었다.[34]

대부분의 계획은 싱가포르 요새화에 집중되었으며, 함대 지원을 위한 해군 기지가 필요했다. 1919년 4월, 해군성 계획부는 태평양 해군 기지 건설 가능 위치로 홍콩, 시드니, 싱가포르를 검토했고, 싱가포르가 최적의 절충점으로 부상했다.[25]

함대가 싱가포르에 도착하는 데 걸리는 시간 추정치는 초기 42일에서 1939년 9월에는 180일까지 늘어났다.[26] 지브롤터, 몰타 등지에 유류 저장 시설이 건설되었고,[27] 싱가포르는 약 1270058750.00kg의 오일을 저장할 예정이었다.[29] 카마란 만 등에는 비밀 기지가 설립되었다.[30]

해군 계획자들은 일본 근처 작전을 위해 싱가포르가 너무 멀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34] 미국의 지원이 있다면 마닐라를 전진 기지로 사용할 가능성이 있었다.[33] 영국 계획자들은 일본이 불리한 상황에서 해상 전투를 벌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여 봉쇄를 통한 경제적 압박을 구상했다.[34]

무역 위원회 등의 정보를 바탕으로, 계획자들은 대영 제국이 일본 수입의 약 27%를 차지한다고 추정했다. 금속, 기계, 석유 등 일본이 수입에 의존하는 핵심 자재는 영국의 통제하에 있었다.[35]

해상 봉쇄는 항공기 및 잠수함 공격에 취약했고,[37] 일본 함대를 파괴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35] 동인도 기지 사령관 허버트 리치먼드 제독은 봉쇄를 통한 항복 강요 논리가 순환적이라고 지적했다.[38]

1919년 계획에는 전진 기지 건설 및 방어를 위한 이동 해군 기지 방어 조직(MNBDO)이 포함되었다.[39] 1930년대, 해군성은 상륙 작전 분야에서 영국이 뒤처짐을 우려하여 육해공군 합동 훈련 개발 센터를 설립했다.[42]

1920년대 셈필 경 대령은 셈필 미션을 이끌고 일본 제국 해군의 항공대 설립을 도왔다.[43] 왕립 해군은 장갑 비행 갑판을 개척했지만, 항공기 수가 제한되었다.[46] 함선 대공포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고성능 전투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47] 해군 항공대 항공기는 일본 항공기에 맞설 수 없었다.[48]

1939년 6월 톈진 사건은 독일이 극동 전쟁을 이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49]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의 전쟁 시, 이탈리아를 먼저 전쟁에서 몰아내는 방안이 고려되었다.[50] 레지널드 드랙스 경은 전함 4~5척의 "비행 전대"를 싱가포르로 보낼 것을 요구했으나, 국방 조정 장관 채트필드는 비행 전대가 일본 함대의 표적이 될 것이라며 반대했다.[51]

4. 기지 개발

싱가포르의 15인치 해안 방어포가 발사되도록 높이 쳐올려져 있다.


셈바왕이 해군 기지 부지로 선정되었다.[52] 해협 식민지는 부지 제공을 위해 2845에이커의 토지를 기증했고, 1925년 홍콩에서 기지 건설을 위해 25만파운드를 기부했다.[53] 말레이 연방에서 200만파운드를, 뉴질랜드에서 100만파운드를 기부했다.[55]

해군 기지 방어를 위해 15인치 해군포 (381.0 mm)가 조호르 배터리, 창이, 부오나 비스타에 배치되었다. 더 작은 배들을 상대하기 위해 중형 BL 9.2인치 포 (233.7 mm)가 제공되었다. 소구경 대공포대와 기습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포는 실로소 요새, 캐닝 요새 및 라브라도에 배치되었다.[58] 1903년에서 1919년 사이에 제조된 잉여 해군포 5문 중[104] 3문은 전방위(360°) 회전과 지하 탄약고를 갖추었다.[59]

영국 공군 비행장은 RAF 텐가와 RAF 셈바왕에 설립되었다.[60] 영국 공군 참모 총장인 로드 트렌차드는 30대의 어뢰 폭격기가 15인치 포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비티 경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포를 설치하되 더 나은 어뢰기가 사용 가능해지면 문제를 재검토하는 타협안이 도출되었다.[61] 1926년 몰타포츠머스에서 15인치와 9.2인치 포의 시험 발사 결과, 전함을 맞히려면 획기적으로 개선된 포탄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타났다.[62]

1938년 2월 14일, 조지 6세 드라이 도크가 공식적으로 개장되면서, 미 해군 순양함 3척을 포함한 42척의 선박이 참석한 가운데 해군, 공군, 육군 합동 훈련이 실시되었다. HMS 이글 항공모함은 싱가포르에서 약 217.26km 이내까지 탐지되지 않고 접근하여 RAF 비행장에 기습 공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HMS 노퍽에서 온 상륙 부대는 래플스 호텔을 점령했다. 이 훈련을 통해 지역 공군 사령관과 육군 사령관은 대공 방어 성능에 실망했으며, 섬에 레이더 설치를 권고했지만 1941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참모 총장 위원회는 일본군이 말라야 동해안에 상륙하여 북쪽에서 싱가포르로 진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결론지었다.[63]

4. 1. 셈바왕 해군 기지 건설

조사 결과에 따라 해군 기지 부지로 셈바왕이 선정되었다.[52] 해협 식민지는 부지 제공을 위해 2845에이커의 토지를 기증했고, 1925년 홍콩에서 기지 건설을 위해 250000GBP를 기부했다.[53] 말레이 연방에서 200만파운드를, 뉴질랜드에서 100만파운드를 기부했다.[55] 해군 조선소 건설 계약은 최저 입찰자인 Sir John Jackson Limited에게 3700000GBP로 낙찰되었다.[56]

약 6000000cuyd의 흙이 땅을 평평하게 하는 데 사용되었고, 8000000cuyd의 늪이 매립되었다. 부유식 도크는 영국에서 건설되어 네덜란드 예인선에 의해 싱가포르로 예인되었다. 길이 약 304.80m, 너비 약 396.24m로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였다. 창고, 작업장, 병원을 포함한 약 1524.00m의 깊은 물을 위한 부두와 기반 시설이 갖춰질 예정이었다.[57]

해군 기지를 방어하기 위해, 전함에 대항하기 위한 15인치 해군포 (381.0 mm)가 조호르 배터리, 창이, 부오나 비스타에 배치되었다. 더 작은 배들을 상대하기 위해 중형 BL 9.2인치 포 (233.7 mm)가 제공되었다. 소구경 대공포대와 기습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포는 실로소 요새, 캐닝 요새 및 라브라도에 배치되었다.[58] 5문의 15인치 포는 1903년에서 1919년 사이에 제조된 잉여 해군포였다.[104] 그 비용의 일부는 조호르 술탄 이브라힘이 조지 5세 대관식의 은혼식을 위해 기증한 500000GBP로 충당되었다. 3문의 포는 전방위(360°) 회전과 지하 탄약고를 갖추었다.[59]

계획에 따르면, 18대의 비행정, 18대의 정찰 전투기, 18대의 어뢰 폭격기 및 18대의 단좌 전투기로 구성된 공군이 이를 보호하도록 했다. 영국 공군 비행장은 RAF 텐가와 RAF 셈바왕에 설립되었다.[60] 영국 공군 참모 총장인 로드 트렌차드는 30대의 어뢰 폭격기가 15인치 포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1해군경이자 해군 원수인 비티 경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포를 설치하되 더 나은 어뢰기가 사용 가능해지면 문제를 재검토하는 타협안이 도출되었다.[61] 1926년 몰타포츠머스에서 15인치와 9.2인치 포의 시험 발사 결과, 전함을 맞히려면 획기적으로 개선된 포탄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타났다.[62]

조지 6세 드라이 도크는 1938년 2월 14일 해협 식민지 총독인 Sir 션턴 토마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개장되었다. 해상 항공대 소속 비행대 2대가 저공 비행을 선보였다. 참석한 42척의 선박 중에는 미 해군 순양함 3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함대의 존재는 일련의 해군, 공군 및 육군 훈련을 수행할 기회를 제공했다. 항공모함 HMS 이글은 싱가포르에서 약 217.26km 이내까지 탐지되지 않고 항해하여 RAF 비행장에 일련의 기습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지역 공군 사령관인 아서 윌리엄 테더는 매우 당황했다. 지역 육군 사령관인 윌리엄 도비 역시 대공 방어의 성능에 실망했다. 보고서는 섬에 레이더 설치를 권고했지만, 이는 1941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군 방어는 더 잘 작동했지만, HMS 노퍽에서 온 상륙 부대는 여전히 래플스 호텔을 점령할 수 있었다. 도비와 테더가 가장 우려한 것은 태국에서 말라야로 침공하여 함대가 완전히 우회될 가능성이었다. 도비는 말라야 남부에서 훈련을 실시하여 정글이 통과할 수 없는 곳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입증했다. 참모 총장 위원회는 일본군이 말라야 동해안에 상륙하여 북쪽에서 싱가포르로 진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결론지었다.[63]

4. 2. 해안 방어 시설 구축

조사 결과에 따라 셈바왕이 해군 기지 부지로 선정되었다.[52] 해협 식민지는 부지 제공을 위해 2845에이커의 토지를 기증했고, 1925년 홍콩에서 기지 건설을 위해 25만파운드를 기부했다.[53] 말레이 연방에서 200만파운드, 뉴질랜드에서 100만파운드를 기부했다.[55] 해군 조선소 건설 계약은 최저 입찰자인 Sir John Jackson Limited에게 370만파운드로 낙찰되었다.[56]

해군 기지를 방어하기 위해, 전함에 대항하기 위한 15인치 해군포 (381.0 mm)가 조호르 배터리, 창이, 부오나 비스타에 배치되었다. 더 작은 배들을 상대하기 위해 중형 BL 9.2인치 포 (233.7 mm)가 제공되었다. 소구경 대공포대와 기습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포는 실로소 요새, 캐닝 요새 및 라브라도에 배치되었다.[58] 5문의 15인치 포는 1903년에서 1919년 사이에 제조된 잉여 해군포였다.[104] 그 비용의 일부는 조호르 술탄 이브라힘이 조지 5세 대관식의 은혼식을 위해 기증한 50만파운드로 충당되었다. 3문의 포는 전방위(360°) 회전과 지하 탄약고를 갖추었다.[59]

4. 3. 공군 기지 건설과 방어 논쟁

조사 결과에 따라 셈바왕이 해군 기지 부지로 선정되었다.[52] 해협 식민지는 부지 제공을 위해 2845에이커의 토지를 기증했고, 1925년 홍콩에서 기지 건설을 위해 25만 파운드를 기부했다.[53] 말레이 연방은 2백만 파운드를, 뉴질랜드는 1백만 파운드를 기부했다.[55]

해군 기지를 방어하기 위해 15인치 해군포(381.0 mm)가 조호르 배터리, 창이, 부오나 비스타에 배치되었다. 더 작은 배들을 상대하기 위해 중형 BL 9.2인치 포(233.7 mm)가 제공되었다. 소구경 대공포대와 기습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포는 실로소 요새, 캐닝 요새, 라브라도에 배치되었다.[58] 5문의 15인치 포는 1903년에서 1919년 사이에 제조된 잉여 해군포였다.[104]

영국 공군 비행장은 RAF 텐가와 RAF 셈바왕에 설립되었다.[60] 영국 공군 참모 총장인 로드 트렌차드 에어 마셜은 30대의 어뢰 폭격기가 15인치 포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1해군경이자 해군 원수인 비티 경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포를 설치하되 더 나은 어뢰기가 사용 가능해지면 문제를 재검토하는 타협안이 도출되었다.[61]

4. 4. 훈련과 방어 능력 평가

조사 결과에 따라 셈바왕이 해군 기지 부지로 선정되었다.[52] 해군 기지를 방어하기 위해 15인치 해군포 5문이 조호르 배터리, 창이, 부오나 비스타에 배치되었다. 이 포들은 1903년에서 1919년 사이에 제조된 잉여 해군포였다.[104] 그 중 3문은 전방위(360°) 회전과 지하 탄약고를 갖추었다.[59] 더 작은 배들을 상대하기 위해 중형 BL 9.2인치 포가 제공되었다. 소구경 대공포대와 기습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포는 실로소 요새, 캐닝 요새 및 라브라도에 배치되었다.[58]

영국 공군 비행장은 RAF 텐가와 RAF 셈바왕에 설립되었다.[60] 1926년 몰타와 포츠머스에서 15인치와 9.2인치 포의 시험 발사 결과, 전함을 맞히려면 획기적으로 개선된 포탄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타났다.[62]

1938년 2월 14일, 조지 6세 드라이 도크가 공식적으로 개장되면서, 미 해군 순양함 3척을 포함한 42척의 선박이 참석한 가운데 해군, 공군, 육군 합동 훈련이 실시되었다. 이 훈련에서 HMS 이글 항공모함은 싱가포르에서 약 217.26km 이내까지 탐지되지 않고 접근하여 RAF 비행장에 기습 공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HMS 노퍽에서 온 상륙 부대는 래플스 호텔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 훈련을 통해 지역 공군 사령관과 육군 사령관은 대공 방어 성능에 실망했으며, 섬에 레이더 설치를 권고했지만 1941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참모 총장 위원회는 일본군이 말라야 동해안에 상륙하여 북쪽에서 싱가포르로 진격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결론지었다.[63]

5. 호주

1920년대 호주에서는 스탠리 브루스가 이끄는 보수적인 국민당 정부가 싱가포르 전략을 지지했다. 이 전략은 호주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해군 전대를 지원받아 영국 해군에 의존하는 것을 의미했다.[67] 그러나 브루스와 그의 전임자 빌리 휴즈는 군수 지원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휴즈의 고문 퍼시 그랜트는 1921년 이른 시기부터 싱가포르의 전략적 약점과 영국 및 호주로부터의 상대적인 고립을 지적했다.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왕립 호주 해군(RAN)에는 2000만파운드가 사용된 반면, 호주 육군과 군수 산업은 1000만파운드, 왕립 호주 공군(RAAF)은 단 240만파운드를 받았다.[67] 이 정책은 호주 방어에 대한 책임을 영국에 떠넘기는 이점이 있었다. 뉴질랜드와는 달리 호주는 싱가포르 기지 건설 비용에 기여하는 것을 거부했다.[64]

반바지와 슬라우치 모자를 쓰고 소총을 어깨에 메고, 더플백을 들고 부두를 따라 행진하는 남자들. 배경에는 유람선이 있다.
1941년 8월 15일 싱가포르 항구에서 하선하는 호주 제8사단의 병사들.


1923년, 야당이었던 호주 노동당은 다른 정책을 제시했다. 이 정책은 호주가 강력한 공군과 함께 침략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잘 갖춰진 육군에 의존하고 대규모 군수 산업을 필요로 할 것을 요구했다. 노동당 정치인들은 윌리엄 프리랜드 풀럼 제독과 같은 비평가들을 인용했는데, 그는 항공기에 대한 군함의 취약성, 해군 기뢰 및 잠수함에 주목했다. 노동당의 앨버트 그린은 1923년에 당시 전함 한 척의 가격이 700만파운드, 항공기 한 대의 가격이 2,500GBP였을 때, 항공기가 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다면 전함이 수백 대의 항공기보다 더 나은 투자인지에 대한 진정한 우려가 있다고 언급했다.[66]

1934년, 존 라담 부총리는 호주 동부 사절단의 일환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그는 캐비닛에 보낸 비밀 보고서에서 해군 기지의 상태를 비판하며 "혼란스럽다"고 묘사했다. 1933년 리치몬드가 영국 ''육군 분기보''에 기고한 기사에서 노동당의 입장을 공격했을 때 존 라바락 대령은 반박문을 썼다.[70] 1936년, 야당 대표인 존 커틴은 하원에서 헨리 윈터의 기사를 읽었다. 싱가포르 전략에 대한 윈터의 노골적인 비판은 그를 하위 직위로 전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70]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라이언스 정부는 싱가포르 전략과 전반적인 호주 안보에 대한 영국의 약속에 대해 점점 더 회의적이 되었다. 조셉 라이언스 총리는 RAAF 비행대 두 개를 싱가포르에 배치하라는 영국의 요청을 거부했다. 1938년, 라이언스는 영국 고등 판무관인 제프리 위스카드에게 "영국이 호주에 실질적인 방어 지원을 제공하지 않거나 제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5. 1. 호주의 싱가포르 전략 지지와 해군력 의존

1920년대 국민당 소속 스탠리 브루스 정부는 싱가포르 전략을 지지했다. 이 전략은 호주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해군 전대를 지원받아 영국 해군에 의존하는 방식이었다.[67] 그러나 브루스와 그의 전임자 빌리 휴즈는 군수 지원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67]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왕립 호주 해군(RAN)에는 2천만 파운드가 투입된 반면, 호주 육군과 군수 산업에는 1천만 파운드, 왕립 호주 공군(RAAF)에는 240만 파운드만이 지원되었다.[67] 뉴질랜드와 달리 호주는 싱가포르 기지 건설 비용 분담을 거부했다.[64]

1926년 9월, 헨리 윈터 중령은 빅토리아주 연합 서비스 연구소 강연에서 영국이 유럽 문제에 집중하느라 싱가포르에 충분한 자원을 투입하지 못할 때 태평양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싱가포르가 육상 및 공중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해군력 의존 대신 육군과 공군력 증강을 통한 균형 잡힌 정책을 옹호했다.[67] 1934년 존 라담 부총리는 호주 동부 사절단 자격으로 싱가포르를 방문, 해군 기지 상태를 "혼란스럽다"고 비판했다.

프레데릭 셰든은 싱가포르 전략 옹호 논문을 발표했으나, 제국 방위 대학 1928년 과정 동기였던 존 라바락 대령은 호주의 광대한 해안선과 내부 자원이 경제적 압박에 대한 저항력을 제공한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69] 1936년 야당 대표 존 커틴은 하원에서 윈터의 기사를 낭독했다. 윈터는 싱가포르 전략 비판으로 인해 하위 직위로 전출되었다.[70]

1930년대 후반, 라이언스 정부는 싱가포르 전략과 영국 측 약속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다. 조셉 라이언스 총리는 영국이 호주에 실질적인 방어 지원을 제공하지 않거나 제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1938년 4월, 라이언스는 정부 재무장 계획을 확대하고 공군 지원 예산을 증액했다. 1938년 12월, 제프리 스트리트 국방장관은 노던 테리토리 다윈포트모르즈비에 "미니 싱가포르"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5. 2. 호주 노동당의 비판과 대안 제시

1920년대 호주에서는 스탠리 브루스가 이끄는 보수적인 국민당 정부가 싱가포르 전략을 지지했다. 이 전략은 호주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해군 지원을 받아 영국 해군에 의존하는 것을 의미했다.[67] 그러나 브루스와 그의 전임자 빌리 휴즈는 군수 지원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고, 휴즈의 고문 퍼시 그랜트는 싱가포르의 전략적 약점과 고립을 지적했다.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왕립 호주 해군(RAN)에 2천만 파운드가 사용된 반면, 호주 육군과 군수 산업은 1천만 파운드, 왕립 호주 공군(RAAF)은 240만 파운드만 지원받았다.[67] 뉴질랜드와 달리 호주는 싱가포르 기지 건설 비용 지원을 거부했다.[64]

1923년, 야당이었던 호주 노동당은 다른 정책을 제시했다. 이 정책은 강력한 공군과 잘 갖춰진 육군, 그리고 대규모 군수 산업을 통해 침략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노동당 정치인들은 윌리엄 프리랜드 풀럼 제독과 같은 비평가들을 인용하며 군함이 항공기, 해군 기뢰, 잠수함에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앨버트 그린은 항공기가 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다면 전함이 수백 대의 항공기보다 나은 투자인지 의문을 제기했다.[66]

1926년 9월, 헨리 윈터 중령은 빅토리아주의 연합 서비스 연구소에서 강연을 통해 영국이 유럽 문제에 집중하여 싱가포르에 충분한 자원을 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싱가포르가 육지와 공중 공격에 취약하며, RAN에 의존하기보다 육군과 RAAF를 강화하는 균형 잡힌 정책을 지지했다.[67] 호주 공식 역사가 라이오넬 위그모어는 "호주 육군 주요 사상가들은 결정적인 시기에 충분한 함대가 싱가포르로 보내질 것이라는 영국 측의 보장에 대해 '우리는 당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지만, 솔직히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입장이었다"라고 기록했다.[68]

1934년, 존 라담 부총리는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해군 기지 상태를 비판했다. 프레데릭 셰든은 싱가포르 전략을 옹호했지만, 존 라바락 대령은 호주의 광대한 해안선과 내부 자원이 경제적 압력에 저항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69] 1936년, 야당 대표 존 커틴은 하원에서 윈터의 기사를 읽었다. 윈터의 비판은 그를 하위 직위로 전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70] 1939년, 로버트 멘지스 총리는 어니스트 스콰이어스 중장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71]

1930년대 후반, 라이언스 정부는 싱가포르 전략과 영국의 약속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조셉 라이언스 총리는 RAAF 비행대 두 개를 싱가포르에 배치하라는 영국의 요청을 거부했다. 1938년, 라이언스는 영국 고등 판무관에게 영국이 호주에 실질적인 방어 지원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RAAF에 대한 자금 지원을 늘리고, 노던 테리토리의 다윈포트모르즈비에 "미니 싱가포르"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등 지역 방위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5. 3. 싱가포르 전략에 대한 논쟁 심화

1920년대 국민당스탠리 브루스 정부는 싱가포르 전략을 선호했지만, 전임자 빌리 휴즈는 군수 지원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휴즈의 고문 퍼시 그랜트는 싱가포르의 전략적 약점과 고립을 지적했다.[67]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왕립 호주 해군(RAN)에 2천만 파운드가 사용된 반면, 호주 육군과 군수 산업은 1천만 파운드, 왕립 호주 공군(RAAF)은 240만 파운드만 받았다.[67] 호주 육군은 싱가포르 전략을 반박해야 했다.[65]

1923년 호주 노동당은 강력한 공군과 잘 갖춰진 육군, 대규모 군수 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대안 정책을 제시했다. 노동당 정치인들은 항공기에 대한 군함의 취약성을 지적한 윌리엄 프리랜드 풀럼 제독과 같은 비평가들을 인용했다. 앨버트 그린은 항공기가 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다면 전함이 수백 대의 항공기보다 더 나은 투자인지 의문을 제기했다.[66]

1926년 헨리 윈터 중령은 강연에서 영국이 유럽 문제에 연루될 경우 싱가포르에 충분한 자원을 보낼 수 없을 가능성을 주장하며, 육군과 RAAF 증강을 옹호했다.[67] 호주 공식 역사가 라이오넬 위그모어는 호주 육군 주요 사상가들이 영국 측의 보장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고 기록했다.[68] 1934년 존 라담 부총리는 싱가포르 해군 기지의 상태를 비판했다.

프레데릭 셰든은 싱가포르 전략을 옹호했지만, 존 라바락 대령은 호주의 광대한 해안선과 내부 자원이 경제적 압력에 저항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69] 1936년 야당 대표 존 커틴은 하원에서 윈터의 기사를 읽었다. 윈터는 하위 직위로 전출되었다.[70] 1939년 로버트 멘지스 총리는 어니스트 스콰이어스 중장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71] 공군 참모총장도 영국 장교로 교체되었다.[72]

1930년대 후반 라이언스 정부는 싱가포르 전략과 영국의 약속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조셉 라이언스 총리는 RAAF 비행대 두 개를 싱가포르에 배치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1938년 라이언스는 영국이 호주에 실질적인 방어 지원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으로 약속을 요구했다. 1938년 4월, 라이언스는 RAAF에 대한 자금 지원을 늘리는 재무장 계획을 발표했다. 1938년 12월, 제프리 스트리트 국방부 장관은 노던 테리토리의 다윈포트모르즈비에 "미니 싱가포르"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지역 방위"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5. 4. 호주 정부의 싱가포르 전략에 대한 회의감 증가

1920년대국민당스탠리 브루스 정부는 싱가포르 전략을 선호했지만, 빌리 휴즈와 퍼시 그랜트는 이 전략의 군수 지원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67]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왕립 호주 해군(RAN)에 2000만파운드가 사용된 반면, 호주 육군과 군수 산업은 1000만파운드, 왕립 호주 공군(RAAF)은 단 240만파운드를 받았다.[67] 호주 육군은 "제국 의사 결정의 최고위층에서 승인받은 명백히 논리적이고 근거가 탄탄한 전략적 교리"인 싱가포르 전략을 반박해야 했다.[65]

호주 노동당은 강력한 공군과 잘 갖춰진 육군, 대규모 군수 산업을 통해 침략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정책을 제시했다. 노동당 정치인들은 윌리엄 프리랜드 풀럼 제독과 같은 비평가들을 인용하며 항공기에 대한 군함의 취약성을 지적했다. 앨버트 그린은 항공기가 전함을 격침시킬 수 있다면 전함이 수백 대의 항공기보다 더 나은 투자인지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66]

1926년 헨리 윈터 중령은 강연에서 영국이 유럽의 위기에 연루되어 싱가포르에 충분한 자원을 보낼 수 없는 시기에 태평양에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싱가포르가 육지와 공중 공격에 취약하다고 주장하며, RAN에 의존하기보다는 육군과 RAAF를 증강하는 정책을 옹호했다.[67] 호주 공식 역사가인 라이오넬 위그모어는 "호주 육군 내 주요 사상가들의 입장은 '우리는 당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지만, 솔직히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라고 적었다.[68]

프레데릭 셰든은 호주 방어 수단으로서 싱가포르 전략을 옹호하는 논문을 썼지만, 존 라바락 대령은 호주의 광대한 해안선과 내부 자원이 경제적 압력에 저항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반박했다.[69] 1936년, 야당 대표인 존 커틴은 하원에서 윈터의 기사를 읽었다. 윈터의 비판은 그를 하위 직위로 전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70]

1930년대 후반, 라이언스 정부는 싱가포르 전략과 영국의 약속에 대해 회의적이 되었다. 조셉 라이언스 총리는 RAAF 비행대 두 개를 싱가포르에 배치하라는 영국의 요청을 거부했다. 1938년, 라이언스는 제프리 위스카드에게 "영국이 호주에 실질적인 방어 지원을 제공하지 않거나 제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1938년 4월, 라이언스는 정부의 재무장 계획을 확대하고 RAAF에 대한 자금 지원을 늘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1938년 12월, 제프리 스트리트 국방부 장관은 노던 테리토리의 다윈포트모르즈비에 "미니 싱가포르"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지역 방위"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6. 뉴질랜드

1912년부터 1949년까지 뉴질랜드의 여러 정부는 싱가포르 전략을 지지했다. 뉴질랜드는 재정적으로 기여했으며, 데본포트 해군 기지 확장도 제안되었다. 1935년 집권한 노동당은 초기에는 공군을 중시했으나, 이후 월터 내시는 해상 수송로 유지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1936년경 뉴질랜드 군은 싱가포르 전략에 대한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1]

6. 1. 뉴질랜드의 싱가포르 전략 지지와 재정 지원

1912년부터 1928년까지 개혁 정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연합 정부,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연합-개혁 연립 정부, 그리고 1935년부터 1949년까지 제1노동당 정부는 싱가포르 전략을 지지했다.[1] 뉴질랜드는 영국 해군성이 매년 제안한 225000GBP 대신 총 100만파운드를 8년에 걸쳐 연간 125000GBP씩 지급했다.[1] 뉴질랜드 데본포트 해군 기지 확장 또한 제안되었으며, 1926년에는 세 번째 순양함 건조 방안이 고려되었다.[1] 1935년 집권한 노동당은 자국 공군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했지만, 이후 월터 내시는 해상 수송로 유지 필요성을 받아들였다.[1] 호주와의 연락은 거의 없었다. 1938년 뉴질랜드 참모총장 서류는 런던으로 보내졌지만 호주로는 보내지지 않았다.[1] 1936년까지 뉴질랜드 군은 싱가포르 전략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었으며,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독일과 일본이 적이 될 가능성이 있어 영국 역시 지중해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았다.[1]

6. 2. 싱가포르 전략에 대한 신뢰 약화

1936년까지 뉴질랜드군은 싱가포르 전략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독일일본이 적이 될 가능성이 있어 영국 역시 지중해에 투입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1]

7.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싱가포르 전략은 중대한 기로에 놓였다. 1939년,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영국으로부터 싱가포르 방어와 극동 지역 안보를 보장받았다.[74] 그러나 유럽 전황이 악화되면서 영국의 해군력은 분산되었고, 싱가포르 방어는 취약해졌다.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1941년 12월 8일 싱가포르 출항


HMS 리펄스 1941년 12월 8일 싱가포르 출항


1940년, 이탈리아 왕국의 참전과 프랑스의 항복은 영국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영국 참모총장 위원회는 싱가포르에 함대를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유럽 해역의 전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함대 파견이 어렵다고 판단했다.[77]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1941년 참모 회의에서 미국 해군이 대서양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좌절되었다.[80]

1941년 7월, 일본 제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깜라인 만을 점령하면서 싱가포르는 더욱 위험에 처했다.[81]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소규모 함대로 일본을 억제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HMS 리펄스를 싱가포르에 파견했다.[83] 그러나 항공모함 HMS 인도미터블은 좌초되어 합류하지 못했다.[84]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상하이 국제 조계를 점령하고 말라야에 상륙했으며,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다.[90] 이틀 뒤,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가 일본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면서[91] 싱가포르 방어는 더욱 약화되었다. 결국 1942년 2월 15일, 말레이 작전의 결과로 싱가포르는 일본 제국에 항복했다.[92]

싱가포르 방어는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1940년에 영국 참모총장 위원회와 싱가포르 방위 회의에서는 충분한 항공기와 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지만, 실제로는 턱없이 부족했다.[85][86][87] 일본은 이러한 싱가포르 방어의 취약성을 파악하고 있었고,[89] 이는 공격을 감행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7. 1. 유럽 전황 악화와 싱가포르 전략의 위기

독일과의 전쟁이 현실화되자 리처드 케이시는 호주군이 유럽이나 중동으로 파견될 경우 호주 방어에 대한 재보장을 요구하기 위해 런던에 파견되었다.[73] 1939년 11월, 호주와 뉴질랜드는 싱가포르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며 일본과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극동 방어가 지중해보다 우선시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다.[74] 당시 영국 주재 호주 고등 판무관이었던 브루스와 케이시는 11월 20일 영국 내각 장관들과 회동했고, 이러한 보장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은 유럽, 지중해, 극동에서 동시 다발적인 위기에 대처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75]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독일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여했고 프랑스가 패배했다.[76] 1939년 6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비밀 회담에서 윌리엄 D. 리히 제독은 미국 함대를 싱가포르로 보낼 가능성을 제기했다.[78] 1940년 4월, 런던 주재 미국 해군 무관 앨런 커크 대위는 해군 참모 차장 토마스 필립스 부제독에게 미국 함대가 극동으로 파견될 경우 수빅 만의 시설이 부적절하므로 싱가포르의 계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그렇게 하겠다는 보장을 받았다.[79] 그러나 1941년 2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참모 회의에서 미국 해군은 대서양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러한 기대는 좌절되었다.[80]

1941년 7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깜라인 만을 점령했는데, 이는 일본이 싱가포르에 훨씬 더 가까워졌음을 의미했다.[81]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면서 1941년 8월, 해군성과 참모총장은 함선 파견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참모총장은 바함을 지중해에서 극동으로 보낸 다음, 본국과 미국에서 개조 중인 4척의 리벤지급 전함을 보내는 것을 권고했다. ''Barham''은 1941년 11월 독일 유보트에 의해 격침되었고, 알렉산드리아에 남아 있던 2척의 전함 퀸 엘리자베스와 밸리언트는 이탈리아의 인간 어뢰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해군성은 소형 항공모함인 ''Eagle''을 보낼 수 있다고 결정했다.[83]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독일 전함 ''티르피츠''가 우세한 영국 함대를 묶어두고 있으므로 싱가포르의 소규모 영국 함대가 일본에 비슷한 불균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외무부는 싱가포르에 현대적인 전함이 주둔하면 일본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82] 1941년 10월, 해군성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싱가포르로 출항하라고 명령했고, 그곳에서 리펄스와 합류할 예정이었다.[83] 인도미터블도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11월 3일 자메이카 해안에서 좌초되었고, 다른 항공모함은 사용할 수 없었다.[84]

1940년 8월, 참모총장 위원회는 함대가 없는 상황에서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지키는 데 필요한 병력은 336대의 1선급 항공기와 9개 여단 규모의 수비대라고 보고했다. 처칠은 호주와 뉴질랜드의 총리에게 만약 그들이 공격을 받으면 영국 제도 다음으로 방어를 우선시할 것이라고 확신했다.[85] 1940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방위 회의에는 제프리 레이턴 부제독(중국 사령관), 말라야 사령부 사령관 라이오넬 본드 중장, 극동 주둔 RAF 공군 사령관 존 트레메인 바빙턴 공군 원수를 포함한 세 군의 대표가 참석했다. 호주는 부참모장인 조셉 버넷 대위, 존 노스코트 소장, 윌리엄 보스톡 공군 준장이 대표로 참석했다. 그들은 극동의 상황에 대해 논의했고, 버마와 말라야의 항공 방어에 최소 582대의 항공기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86] 1941년 12월 7일, 말라야와 싱가포르에는 164대의 1선급 항공기만 있었고, 전투기는 구식 브루스터 F2A 버팔로였다.[87] 필요한 보병 대대 48개 중 31개 대대만 있었고, 2개 전차 연대가 있어야 했지만 전차는 없었다. 많은 부대가 훈련과 장비가 미흡했고, 1941년 영국은 676대의 항공기와 446대의 전차를 소련으로 보냈다.[88]

일본은 싱가포르 방어 상태를 알고 있었다. 패트릭 스탠리 본 히넌 대위와 같은 스파이가 싱가포르에 있었고, 참모총장의 1940년 8월 평가 사본은 1940년 11월 11일 아틀란티스가 오토메돈에서 노획한 비밀 문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는 일본에 전달되었고, 싱가포르 방어에 대한 상세한 지식은 일본이 공격을 감행하도록 유도했을 수 있다.[89]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상하이 국제 조계를 점령했다. 몇 시간 후, 말라야의 코타바루에서 상륙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일본 제국 해군은 진주만 공격을 시작했다.[90] 12월 10일, 말라야 침공군을 만나기 위해 항해하던 ''Prince of Wales''와 ''Repulse''는 일본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다.[91] 재앙적인 말레이 작전 이후, 싱가포르는 1942년 2월 15일에 항복했다.[92]

7. 2. 미국의 지원 기대와 좌절

독일과의 전쟁이 현실화되자 호주는 자국군이 유럽이나 중동으로 파견될 경우 호주 방어에 대한 재보장을 요구했다.[73] 1939년 11월, 호주와 뉴질랜드는 싱가포르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며 일본과의 전쟁 발발 시 극동 방어가 우선시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다.[74] 그러나 영국 해군은 유럽, 지중해, 극동에서 동시 다발적인 위기에 대처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75]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참전하고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전략적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76] 영국 참모총장 위원회는 극동에서의 제국 이익의 안전은 싱가포르에 충분한 함대를 배치하는 것에 달려있지만, 프랑스 패배로 인해 유럽 해역에 충분한 해군력을 유지해야 하므로 함대를 극동으로 보낼 수 없다고 보고했다.[77]

1939년 6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비밀 회담에서 미국은 자국 함대를 싱가포르로 보낼 가능성을 제기했다.[78] 1940년 4월, 런던 주재 미국 해군 무관은 미국 함대가 극동으로 파견될 경우 싱가포르의 계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그렇게 하겠다는 보장을 받았다.[79] 그러나 1941년 2월 참모 회의에서 미국 해군은 대서양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미국의 지원 기대는 좌절되었다.[80]

1941년 7월, 일본이 깜라인 만을 점령하면서 싱가포르는 일본에 더 가까워졌다.[81]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자 1941년 8월, 영국 해군성과 참모총장은 함선 파견을 검토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싱가포르에 소규모 함대를 주둔시켜 일본을 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82] 외무부도 싱가포르에 현대적인 전함이 주둔하면 일본의 전쟁 참여를 억제할 수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82] 1941년 10월, 해군성은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싱가포르로 출항하라고 명령했고, HMS 리펄스와 합류할 예정이었다.[83] 그러나 항공모함 HMS 인도미터블은 좌초되었고, 다른 항공모함은 사용할 수 없었다.[84]

1940년 8월, 참모총장 위원회는 함대가 없는 상황에서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지키려면 336대의 항공기와 9개 여단 규모의 수비대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85] 1940년 10월 싱가포르 방위 회의에서는 최소 582대의 항공기가 필요하다고 추산했다.[86]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말라야와 싱가포르에는 164대의 1선급 항공기만 있었고, 전투기는 구식 브루스터 F2A 버팔로였다.[87] 필요한 보병 대대 48개 중 31개 대대만 있었고, 전차는 없었다. 많은 부대가 훈련과 장비가 미흡했고, 영국은 소련에 많은 항공기와 전차를 보냈다.[88]

일본은 싱가포르 방어 상태를 알고 있었고, 이는 일본이 공격을 감행하도록 유도했을 수 있다.[89]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상하이 국제 조계를 점령하고 말라야의 코타바루에 상륙했으며, 진주만 공격을 시작했다.[90] 12월 10일,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HMS 리펄스는 일본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다.[91] 재앙적인 말레이 작전 이후, 싱가포르는 1942년 2월 15일에 항복했다.[92]

7. 3. 영국 함대 파견과 한계

독일과의 전쟁이 현실화되면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자국 군대가 유럽이나 중동으로 파견될 경우를 대비해 영국에 방위 보장을 요구했다. 1939년 11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싱가포르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며, 일본 제국과의 전쟁 발발 시 극동 방어가 우선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다.[74] 그러나 영국 해군은 유럽, 지중해, 극동의 동시 위기에 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75]

1940년 6월, 이탈리아 왕국이 독일에 가담하고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76] 영국 참모총장 위원회는 극동에서의 제국 이익을 위해 싱가포르에 함대를 배치해야 하지만, 유럽 해역의 전력 균형 때문에 함대 파견이 어렵다고 보고했다.[77]

미국은 1939년 비밀 회담에서 함대 파견 가능성을 제기했고,[78] 1940년에는 싱가포르 계류 시설 이용에 대한 보장을 제공했다.[79] 그러나 1941년 참모 회의에서 미국 해군이 대서양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미국의 지원 기대는 좌절되었다.[80]

1941년 7월,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깜라인 만을 점령하면서 싱가포르는 더욱 위태로워졌다.[81] 영국은 함선 파견을 검토했지만, 지중해와 본국 함대의 전함 손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83]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소규모 함대로도 일본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82] 1941년 10월, 해군성은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를 싱가포르로 파견하여 HMS 리펄스와 합류시켰다.[83] 그러나 항공모함 HMS 인도미터블은 좌초되어 합류하지 못했다.[84]

1940년 8월, 참모총장 위원회는 함대 없이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지키려면 336대의 항공기와 9개 여단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85] 1940년 10월 싱가포르 방위 회의에서는 최소 582대의 항공기가 필요하다고 추산했다.[86] 그러나 1941년 12월, 말라야와 싱가포르에는 164대의 1선급 항공기만 있었고, 전투기는 구식 브루스터 F2A 버팔로였다.[87] 필요한 보병 대대도 부족했고, 전차는 아예 없었다.[88]

일본은 싱가포르 방어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으며,[89] 1941년 12월 8일 상하이 국제 조계를 점령하고 말라야와 진주만 공격을 시작했다.[90] 12월 10일, 일본 항공기에 의해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가 격침되었다.[91] 결국 말레이 작전 이후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는 항복했다.[92]

7. 4. 싱가포르 방어의 취약성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싱가포르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며, 일본과의 전쟁 발발 시 극동 방어가 지중해보다 우선시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다.[74] 독일 해군(크리그스마린)이 비교적 소규모였고 프랑스가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이는 가능한 것으로 보였다.[49] 그러나 당시 영국 주재 호주 고등 판무관이었던 브루스와 케이시는 영국 내각 장관들과 회동했고, 이러한 보장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은 유럽, 지중해, 극동에서 동시 다발적인 위기에 대처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75]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독일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여했고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76] 참모총장 위원회는 극동에서의 제국 이익의 안전은 싱가포르에 충분한 함대를 배치하는 능력에 달려 있지만, 프랑스 패배로 인해 유럽 해역에 독일 함대와 이탈리아 함대를 모두 감시하기에 충분한 해군력을 유지해야 하므로 함대를 극동으로 보낼 수 없다고 보고했다.[77]

1939년 6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비밀 회담에서 윌리엄 D. 리히 제독은 미국 함대를 싱가포르로 보낼 가능성을 제기했다.[78] 1940년 4월, 런던 주재 미국 해군 무관 앨런 커크 대위는 토마스 필립스 부제독에게 미국 함대가 극동으로 파견될 경우 싱가포르의 계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그렇게 하겠다는 보장을 받았다.[79] 그러나 1941년 2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참모 회의에서 미국 해군은 대서양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미국의 지원은 어려워졌다.[80]

1941년 7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깜라인 만을 점령하여 싱가포르에 더욱 가까워졌다.[81]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싱가포르에 소규모 영국 함대가 일본에 불균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언급했고, 외무부는 싱가포르에 현대적인 전함이 주둔하면 일본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82] 이에 1941년 10월, 해군성은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싱가포르로 출항하라고 명령했고, 그곳에서 HMS 리펄스와 합류할 예정이었다.[83] 하지만 항공모함 HMS 인도미터블은 자메이카 해안에서 좌초되었고, 다른 항공모함은 사용할 수 없었다.[84]

1940년 8월, 참모총장 위원회는 함대가 없는 상황에서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지키는 데 336대의 1선급 항공기와 9개 여단 규모의 수비대가 필요하다고 보고했다.[85] 1940년 10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방위 회의에서 극동의 상황을 논의한 결과, 버마와 말라야의 항공 방어에 최소 582대의 항공기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되었다.[86]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말라야와 싱가포르에는 164대의 1선급 항공기만 있었고, 전투기는 구식 브루스터 F2A 버팔로였다.[87] 필요한 보병 대대 48개 중 31개 대대만 있었고, 전차는 없었다. 많은 부대가 훈련과 장비가 미흡했고, 1941년 영국은 676대의 항공기와 446대의 전차를 소련으로 보냈다.[88]

일본은 싱가포르 방어 상태를 알고 있었으며, 이는 일본이 공격을 감행하도록 유도했을 수 있다.[89]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상하이 국제 조계를 점령하고 말라야의 코타바루에 상륙했으며, 진주만 공격을 시작했다.[90] 12월 10일,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HMS 리펄스는 일본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다.[91] 재앙적인 말레이 작전 이후, 싱가포르는 1942년 2월 15일에 항복했다.[92]

7. 5. 일본의 싱가포르 공격과 함락



독일과의 전쟁이 현실화되자 리처드 케이시는 런던에 파견되어 호주군 파견 시 호주 방어에 대한 재보장을 요구했다.[73] 1939년 11월, 호주와 뉴질랜드는 싱가포르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며 일본과 전쟁 시 극동 방어가 우선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다.[74] 당시 영국 주재 호주 고등 판무관이었던 브루스와 케이시는 영국 내각 장관들과 회동했고, 영국 해군이 유럽, 지중해, 극동에서 동시 위기에 대처할 만큼 강력하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75]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독일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여했고 프랑스가 패배했다.[76] 1940년 4월, 런던 주재 미국 해군 무관 앨런 커크 대위는 해군 참모 차장 토마스 필립스 부제독에게 미국 함대가 극동으로 파견될 경우 싱가포르의 계류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지 문의했고, 보장을 받았다.[79]

1941년 7월,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깜라인 만을 점령했는데, 이로 인해 일본은 싱가포르에 훨씬 더 가까워졌다.[81]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싱가포르의 소규모 영국 함대가 일본에 비슷한 불균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외무부는 싱가포르에 현대적인 전함이 주둔하면 일본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82] 1941년 10월, 해군성은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싱가포르로 출항하라고 명령했고, 그곳에서 HMS 리펄스와 합류할 예정이었다.[83] 항공모함 HMS 인도미터블도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11월 3일 자메이카 해안에서 좌초되었고, 다른 항공모함은 사용할 수 없었다.[84]

1940년 8월, 참모총장 위원회는 함대가 없는 상황에서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지키는 데 필요한 병력은 336대의 1선급 항공기와 9개 여단 규모의 수비대라고 보고했다. 처칠은 호주와 뉴질랜드 총리에게 만약 그들이 공격을 받으면 영국 제도 다음으로 방어를 우선시할 것이라고 확신했다.[85]

일본은 싱가포르 방어 상태를 알고 있었다. 패트릭 스탠리 본 히넌 대위와 같은 스파이가 싱가포르에 있었고, 참모총장의 1940년 8월 평가 사본은 1940년 11월 11일 아틀란티스가 오토메돈에서 노획한 비밀 문서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는 일본에 전달되었고, 싱가포르 방어에 대한 상세한 지식은 일본이 공격을 감행하도록 유도했을 수 있다.[89]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상하이 국제 조계를 점령했다. 몇 시간 후, 말라야의 코타바루에서 상륙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일본 제국 해군은 진주만 공격을 시작했다.[90] 12월 10일, 말라야 침공군을 만나기 위해 항해하던 ''Prince of Wales''와 ''Repulse''는 일본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다.[91] 재앙적인 말레이 작전 이후, 싱가포르는 1942년 2월 15일에 항복했다.[92]

8. 여파

아서 퍼시벌 중장(오른쪽)이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에서 연합군 항복 협상을 벌이고 있다. 가운데 일본 장교는 스기타 이치지 중령이다.


싱가포르 해군 기지는 전투에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아, 일본 본토 외 가장 중요한 일본 해군 기지가 되었다.[103] 싱가포르 함락 전 영국군에 의해 15인치 포가 파괴되었는데, 그중 4문은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일본군에 의해 고철 처리되었다.[104] 부유식 드라이 독은 영국군에 의해 자침되었으나 일본군에 의해 다시 떠올랐다. 1945년 2월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의 공습으로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고, 결국 1946년에 바다로 예인되어 침몰했다.[105] 영국 해군은 1945년에 싱가포르 기지를 되찾았다.[95]

1958년, 작전명 매머드(Operation Mastodon)를 통해 싱가포르 전략이 부활했다. 이는 영국 공군 폭격사령부의 V 폭격기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하에 이 지역 방어에 대한 영국의 기여로 핵무기를 장착하여 싱가포르에 배치하는 계획이었다. V 폭격기는 싱가포르까지 한 번에 비행할 수 없었기에 몰디브의 RAF 간 기지에 새로운 중간 기지가 개발되었다. RAF 텐가 기지의 활주로는 V 폭격기에 비해 너무 짧아 활주로가 연장될 때까지 RAF 버터워스 기지를 사용해야 했다. 핵무기 탑재 항공기 배치와 현지 당국과의 협의 없는 핵무기 저장은 곧 정치적 문제에 직면했다.[106]

매머드 작전은 텐가 기지에 8대의 핸들리 페이지 빅터로 구성된 두 비행대와 버터워스 기지에 8대의 아브로 벌컨으로 구성된 한 비행대를 배치할 것을 요구했다. 1958년 영국의 핵 비축량은 53개였는데, 대부분은 구형 블루 다뉴브(핵무기)형이었지만, 새로운 경량 레드 비어드(핵무기) 전술 핵무기 48기가 텐가 기지에 배치될 계획이었다. 각 V 폭격기마다 2기씩 배치될 예정이었다.[107] 1962년과 1971년 사이에 최대 48기의 레드 비어드가 RAF 텐가 기지에 비밀리에 보관되었다.[108]

영국 해군은 1960년에 레드 비어드와 핵 탑재 가능한 슈퍼마린 스키미터를 장착한 항공모함을 극동 지역에 배치했다.[109] 초기 싱가포르 전략과 마찬가지로, 특히 1964년 중국의 핵무기 획득 이후, 24대의 V 폭격기가 위기 상황에서 투입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110]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치가 있었던 1963년 동안 폭격 사령부는 빅터와 벌컨 부대를 극동 지역에 파견했다. 이후 3년 동안 4대의 V 폭격기가 영구 배치되었으며, 영국 내 비행대에서 파견대가 교대로 파견되었다. 1965년 4월, 제33 비행대는 8대의 벌컨을 RAAF 버터워스와 RAF 텐가 기지로 신속하게 배치했다.[111] 공군 원수 경 존 그랜디는 V 폭격기가 "대규모로 수행되는 대치에 대한 귀중한 억지력을 제공했다"고 보고했다.[112]

1965년, 인종적, 정치적, 개인적 긴장으로 인해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되어 독립 국가가 되었다.[113] 대치가 종료되면서 마지막 V 폭격기는 1966년에 철수했다.[112]

8. 1. 싱가포르 함락의 충격과 영향

싱가포르 함락은 윈스턴 처칠에 의해 "영국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자 최대의 항복"이라고 묘사되었다.[2] 이는 대영 제국의 위신과 사기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약속했던 함대는 파견되지 않았고, "난공불락"이라고 선언했던 요새는 순식간에 함락되었다.[74] 약 13만 9천 명의 병력이 손실되었으며, 그중 약 13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영국군 사상자 3만 8천 명에는 1월에 말라야로 파견된 제18 보병 사단의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제8 호주 사단의 대부분을 포함하여 호주군 1만 8천 명, 현지 병력 1만 4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비군의 대다수(약 6만 7천 명)는 영국령 인도 출신이었다.[94] 인도군 전쟁 포로 약 4만 명이 일본이 지원하는 인도 국민군에 합류했다.[95]

리치몬드는 1942년 ''더 포트나이트리 리뷰'' 기사에서 싱가포르 함락은 "2차 대전에서 해상 지휘를 적절히 제공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보여주었다고 비난했다.[96] 그는 싱가포르 전략이 비현실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사적으로 그는 영국의 해상력을 쇠퇴시킨 정치가들을 비난했다.[96] 말라야 방어를 위해 제공된 자원은 싱가포르를 지키기에 부적절했으며, 자원 활용 방식은 빈번하게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이며 효과적이지 않았다.[97]

이 재앙은 정치적, 군사적 차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의회에서 처칠은 이 재앙에 대한 공식 조사가 전쟁 후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2] 1946년에 이 전쟁 중 연설이 출판되었을 때, 호주 정부는 영국 정부가 여전히 조사를 실시할 의향이 있는지 질문했다. 합동 기획 참모부는 이 문제를 검토하고 싱가포르 함락과 관련된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고, 싱가포르 전략의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상황을 수년에 걸쳐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조사를 실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새로운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는 이 조언을 받아들였고, 조사는 한 번도 실시되지 않았다.[98]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수년간의 확약 이후 배신감을 느꼈다.[74] 싱가포르 전략은 호주가 제2 호주 제국 원정군과 최신 함선, 수천 명의 공군을 영국을 돕기 위해 파견하는 것을 허용했다. 호주 해외 파병 군인의 거의 4분의 1(영국 10만 명, 미국 30만 명에 해당)의 손실은 호주를 충격에 빠뜨렸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결국, 어떻게 보든 영국은 그들을 실망시켰다".[99] 이 패배는 수십 년 동안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 1992년 호주 하원 연설에서 폴 키팅 총리는 배신감을 언급했다.

일본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함대가 필요했고, 결국 상당한 규모의 영국 태평양 함대가 극동으로 파견되어 미국 태평양 함대와 함께 싸웠다.[101] 전쟁 발발 전 두 해군 간에 발전한 긴밀한 관계와 그 이후 형성된 동맹은 싱가포르 전략의 가장 긍정적이고 전략적인 유산이 되었다.[102]

싱가포르 해군 기지는 전투에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본토 외 가장 중요한 일본 해군 기지가 되었다.[103] 15인치 포는 싱가포르 함락 전에 영국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중 4문은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일본군에 의해 고철 처리되었다.[104] 부유식 드라이 독은 영국군에 의해 자침되었지만 일본군에 의해 다시 떠올랐다. 1945년 2월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의 공습으로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고, 결국 1946년에 바다로 예인되어 침몰했다.[105] 영국 해군은 1945년에 싱가포르 기지를 되찾았다.[95]

8. 2. 싱가포르 전략에 대한 비판과 반성

아서 퍼시벌 중장이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에서 연합군 항복 협상을 벌였다. 윈스턴 처칠은 싱가포르 함락을 "영국 역사상 최악의 재앙이자 최대의 항복"이라고 묘사했다.[2] 이는 대영 제국의 위신과 사기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약속했던 함대는 파견되지 않았고, "난공불락"이라고 선언했던 요새는 순식간에 함락되었다.[74] 약 13만 9천 명의 병력이 손실되었으며, 그중 약 13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중 다수는 영국령 인도 출신이었고,[94] 약 4만 명의 인도군 전쟁 포로는 일본이 지원하는 인도 국민군에 합류했다.[95]

리치몬드는 1942년 ''더 포트나이트리 리뷰'' 기사에서 싱가포르 함락은 "2차 대전에서 해상 지휘를 적절히 제공하지 못한 어리석음"을 보여주었다고 비난했다.[96] 그는 싱가포르 전략이 비현실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말라야 방어를 위해 제공된 자원은 싱가포르를 지키기에 부적절했으며, 자원 활용 방식은 낭비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97]

이 재앙은 정치적, 군사적 차원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윈스턴 처칠은 의회에서 이 재앙에 대한 공식 조사가 전쟁 후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2] 그러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는 조사를 실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고, 조사는 한 번도 실시되지 않았다.[98]

호주와 뉴질랜드는 수년간의 확약 이후 배신감을 느꼈다.[74] 싱가포르 전략은 호주가 제2 호주 제국 원정군과 최신 함선, 수천 명의 공군을 영국을 돕기 위해 파견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호주 해외 파병 군인의 거의 4분의 1의 손실은 호주를 충격에 빠뜨렸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결국, 어떻게 보든 영국은 그들을 실망시켰다".[99] 1992년 호주 하원 연설에서 폴 키팅 총리는 배신감을 언급하며, 호주에 대한 자존심을 강조했다.[100]

일본을 격파하기 위해서는 함대가 필요했고, 결국 상당한 규모의 영국 태평양 함대가 극동으로 파견되어 미국 태평양 함대와 함께 싸웠다.[101] 전쟁 발발 전 두 해군 간에 발전한 긴밀한 관계와 그 이후 형성된 동맹은 싱가포르 전략의 가장 긍정적이고 전략적인 유산이 되었다.[102]

싱가포르 해군 기지는 전투에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본토 외 가장 중요한 일본 해군 기지가 되었다.[103] 15인치 포는 싱가포르 함락 전에 영국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그중 4문은 수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일본군에 의해 고철 처리되었다.[104] 부유식 드라이 독은 영국군에 의해 자침되었지만 일본군에 의해 다시 떠올랐다. 1945년 2월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의 공습으로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고, 결국 1946년에 바다로 예인되어 침몰했다.[105] 영국 해군은 1945년에 싱가포르 기지를 되찾았다.[95]

8. 3. 핵무기 배치와 매머드 작전 (Operation Mastodon)

1958년, 싱가포르 전략은 작전명 매머드(Operation Mastodon)의 형태로 부활했다. 이는 영국 공군 폭격사령부의 V 폭격기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하에서 이 지역 방어에 대한 영국의 기여의 일환으로 핵무기를 장착하여 싱가포르에 배치하는 계획이었다. V 폭격기는 싱가포르까지 한 번에 비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몰디브의 RAF 간 기지에 새로운 중간 기지가 개발되었다. RAF 텐가 기지의 활주로는 V 폭격기에 비해 너무 짧았기 때문에 활주로가 연장될 때까지 RAF 버터워스 기지를 사용해야 했다. 핵무기 탑재 항공기의 배치와 현지 당국과의 협의 없이 핵무기를 저장하는 것은 곧 정치적 문제에 직면했다.[106]

매머드 작전은 텐가 기지에 8대의 핸들리 페이지 빅터로 구성된 두 비행대와 버터워스 기지에 8대의 아브로 벌컨으로 구성된 한 비행대를 배치할 것을 요구했다. 1958년 영국의 핵 비축량은 53개의 핵무기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은 구형 블루 다뉴브(핵무기)형이었지만, 새로운 경량 레드 비어드(핵무기) 전술 핵무기 48기가 텐가 기지에 배치될 계획이었다. 각 V 폭격기마다 2기씩 배치될 예정이었다.[107] 최대 48기의 레드 비어드가 1962년과 1971년 사이에 RAF 텐가 기지에 비밀리에 보관되었다.[108]

영국 해군은 1960년에 레드 비어드와 핵 탑재 가능한 슈퍼마린 스키미터를 장착한 항공모함을 극동 지역에 배치했다.[109] 초기 싱가포르 전략과 마찬가지로, 특히 1964년 중국의 핵무기 획득 이후, 24대의 V 폭격기가 위기 상황에서 투입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110]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대치(Indonesia–Malaysia confrontation)가 있었던 1963년 동안 폭격 사령부는 빅터와 벌컨 부대를 극동 지역에 파견했다. 그 다음 3년 동안 4대의 V 폭격기가 영구적으로 배치되었으며, 영국 내 비행대에서 파견대가 교대로 파견되었다. 1965년 4월, 제33 비행대는 8대의 벌컨을 RAAF 버터워스와 RAF 텐가 기지로 신속하게 배치했다.[111] 공군 원수 경 존 그랜디는 V 폭격기가 "대규모로 수행되는 대치에 대한 귀중한 억지력을 제공했다"고 보고했다.[112]

1965년, 인종적, 정치적, 개인적 긴장으로 인해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되어 독립 국가가 되었다.[113] 대치가 종료되면서 마지막 V 폭격기는 1966년에 철수했다.[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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