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태평양 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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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태평양 함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해군이 태평양 전선에 투입한 함대로, 1944년 창설되어 1948년 해산되었다.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의 해군으로 구성되었으며, 미국 해군의 지휘를 받았다. 주요 작전으로는 팔렘방 정유소 공격, 오키나와 전투 지원, 일본 본토 공격 등이 있으며,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에도 참여했다. 함대는 6척의 항공모함, 4척의 경항공모함, 5척의 전함 등 다양한 함선과 항공기를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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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도 함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인도양에서 활동하며 통상 보호 임무를 수행하다 일본군 참전 후 전력 증강을 거쳐 태평양 진출 기지로 활용되었고, 종전 후 극동 함대로 개칭되었다. - 1944년 설립 - 골든 글로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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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태평양 함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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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영국 태평양 함대 |
원어 명칭 | British Pacific Fleet (BPF) |
창설 | 1944년~1945년 |
소속 국가 |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
군종 | 영국 해군 |
작전 | |
주요 작전 | 메리디언 작전 오키나와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의 일본 해군 포격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브루스 프레이저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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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2년 인도양 공습 이후 영국 해군은 1944년 5월 17일 자와섬 수라바야에 공습을 가한 트랜섬 작전이 수행될 때까지 남서 태평양 전역에 참전하지 못했다. 미국이 태평양 지역의 영국 식민지를 점령하고 영향력을 넓히자 영국 정부는 이 지역 내 영향력 재확보와 일본에 맞서 영국군을 주둔시키려는 목적으로 정치적·군사적 필요성을 느꼈다. 영국 정부는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옛 식민지들을 영국군의 손으로 탈환하기로 결심했다.[53]
영국 정부는 초기부터 영국 태평양 함대 구성에 만장일치로 찬성하지는 않았다. 특히 윈스턴 처칠은 미국과의 전투에서 소외되어 미미한 동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반대했다. 그는 영국군의 주둔이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며 미얀마와 영국령 말라야에 전투력을 집중시키려 했다. 그러나 장교회의의 지지를 받은 해군 계획장교들은 태평양 함대가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그들의 의견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53]
해군성은 1944년 초 태평양 지역에서 영국군의 역할을 제안했지만, 미국 해군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미국 해군 사령관이자 해군 작전 사령관인 어니스트 킹은[54]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꺼렸고, 영국 태평양 함대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5] 1942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일본군의 오스트레일리아 침략 가능성에 직면하자 미국군의 주둔을 요청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태평양 전쟁에 크게 기여했지만, 전략적으로 미국과 동등한 동반자가 될 수 없었다. 이는 영국군의 주둔이 불균형을 초래해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견해를 낳았다.[56]
1942년 실론 해전에서 동양 함대가 인도양 서쪽 지역까지 후퇴한 후, 영국 해군은 북극해에서 북대서양, 지중해, 인도양에 이르는 광범위한 전장에 전력을 투입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 함대가 무력화된 시점에서는 영국 해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여 극동 해역에서 존재감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킹 제독의 답변은 좋지 않았다. 미국 해군은 영국의 지원 없이도 이미 단독으로 일본 함대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도 당초에는 태평양 함대 창설에 난색을 표했지만, 대일본 전쟁에 참가하여 태평양에서 영국의 존재감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앨런 브룩 원수 등 참모본부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44] 1944년 9월 28일, 처칠은 의회에서 이 “새로운 국면”에 대해 연설했다.[45] I have offered to the President, on behalf of the British Government, to send every scrap of force and ship we can get to the other end of the world to share in the final struggle against Japan. As I declared in my previous speech in the House of Commons, Japan has a debt to pay to the United States, and to Britain, at least as great as, or even greater than, that which she has already paid in such an ample manner. We owe it to Australia and New Zealand to help them remove for ever the Japanese menace to their homelands, and as they have helped us on every front in the fight against Germany, we will certainly not be behindhand in giving them effective aid.|영국 의회에서 윈스턴 처칠 수상의 연설 (1944년 9월 28일)영어
2. 1. 창설 배경
1942년 인도양 공습 이후 영국 해군은 1944년 5월 17일까지 남서 태평양 전역에 참전하지 못했다. 1944년 5월 17일은 자와섬의 수라바야에 공습을 가한 트랜섬 작전이 수행된 날이었다. 미국이 태평양 지역의 영국 식민지를 점령하고 영향력을 넓히자 영국 정부는 지역 내 영향력 재확보와 일본에 맞서 영국군을 주둔시키려는 목적으로 정치적·군사적 필요성을 느꼈다. 영국 정부는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은 영국의 옛 식민지들을 영국군의 손으로 탈환하기로 결심했다.[53]영국 정부는 초기부터 영국 태평양 함대에 만장일치로 찬성하지는 않았다. 특히 윈스턴 처칠은 미국과의 전투에서 소외되어 미미한 동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반대했다. 그는 영국군의 주둔이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며 미얀마와 영국령 말라야에 전투력을 집중시키려 했다. 그러나 해군 계획장교들은 장교회의의 지지를 바탕으로 태평양 함대가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자신들의 의견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53]
해군성은 1944년 초 태평양 지역에서 영국군의 역할을 제안했지만, 미국 해군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미국 해군 사령관이자 해군 작전 사령관인 어니스트 킹은[54]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꺼렸고, 영국 태평양 함대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5] 1942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일본군의 오스트레일리아 침략 가능성에 직면하여 미국군의 주둔을 요청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태평양 전쟁에 크게 기여했지만, 전략적으로 미국과 동등한 동반자가 될 수 없었다. 이는 영국군의 주둔이 불균형을 초래해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다는 견해를 낳았다.[56]

1944년 9월 제2차 퀘벡 회담에서 처칠이 대일전쟁에 대한 영국 해군의 참전을 제기했고, 두 달 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외교적 배려에서 처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44] 그러나 "영국 혐오자"로 불린 미국 해군 작전 부장 얼니스트 킹 제독은 영국 함대와의 연계에 난색을 보였다.[42][46] 킹 제독은 영국 태평양 함대가 보급을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는 영국 해군이 미국 해군에 기여하기는커녕, 영국 해군이 독립적으로 극동 지역에서 병참과 보급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본국으로부터의 지원은 부족했고, 수년간 해상 보급에 대한 대응을 쌓아온 미군과 비교하여, 해상 보급을 전제로 하지 않은 영국 함대는 탱커의 선미에 있는 호스를 사용하여 연료를 이동시키는 데 매우 긴 시간이 걸렸다.[47][48] 영국 태평양 함대의 대부분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메리카 등 영국 연방의 해군으로부터 원활하게 구성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신함대의 사령관으로는 동양 함대 사령관이었던 브루스 프레이저 제독이 임명되었다. 뛰어난 지도력과 전술가적 자질뿐만 아니라, 병참상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프레이저의 외교관적인 자질이 발휘되었다.[49] 영국 태평양 함대는 미국 해군의 지휘하에 들어갔고, 미국 해군의 연락 장교를 각 함선에 배치했다.[48] 미영 해군의 긴밀한 연계를 피해야 한다는 상층부의 판단은 실제 해상에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급자족" 원칙에 관하여 많은 미국 해군 장교가 "전력을 다하여 그것을 무시했다"고 할 정도로,[48] 양 함대의 관계는 존중심에 찬 좋은 것이었다. 미국 해군 장교들은 사령관 더글러스 피셔 소장에게 "킹 제독이 모르는 사이에 주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48]
2. 2. 미 해군과의 관계
해군성은 1944년 초 태평양에서 영국군의 역할을 제안하였지만, 미국 해군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미국 해군 사령관이자 해군 작전 사령관인 어니스트 킹은,[54]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꺼리고 수많은 방해 공작을 통해 영국 태평양 함대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5]1942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일본군의 오스트레일리아 침략 가능성에 직면하자 미국군의 주둔을 추구하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태평양 전쟁에 지대한 기여를 했으나 전략적으로 미국과 동등한 동반자가 될 수 없었다. 이는 영국군의 주둔이 불균형을 초래해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견해를 대두시켰다.[56]
영국 해군은 1942년부터 1943년에 걸쳐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겸 해군 작전 부장 얼니스트 킹 제독으로부터의 지원 요청을 거듭 거절했다. 1942년 실론 해전에서 동양 함대가 인도양 서쪽 지역까지 후퇴를 강요당한 후, 영국 해군은 북극해에서 북대서양, 지중해, 인도양에 이르는 광범위한 전장을 확대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의 함대가 무력화된 시점에서는 영국 해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여 극동 해역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킹 제독의 답변은 좋지 않았다. 미국 해군은 영국의 지원 없이도 이미 단독으로 일본 함대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44년 9월 12일부터 4일간 열린 제2차 퀘벡 회담에서 처칠이 대일전쟁에 대한 영국 해군의 참전을 제기했고, 두 달 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외교적 배려에서 처칠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44] “영국 혐오자”라고 불린 미국 해군 작전 부장 얼니스트 킹 제독은 영국 함대와의 연계에 난색을 표했다.[42][46] 킹 제독은 영국 태평양 함대가 보급을 “자급자족”한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는 영국 해군이 미국 해군에 기여하기는커녕, 영국 해군이 독립적으로 극동 지역에서 병참과 보급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을 수반하는 상황에서, 동양 함대 사령관이었던 브루스 프레이저 제독이 신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영국 태평양 함대는 미국 해군의 지휘하에 들어가고, 미국 해군의 연락 장교를 각 함선에 배치했다.[48] 미영 해군의 긴밀한 연계는 피해야 한다는 상층부의 판단은 실제 해상에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급자족” 원칙에 관하여 많은 미국 해군 장교가 “전력을 다하여 그것을 무시했다”[48]고 할 정도로, 양 함대의 관계는 존중심에 찬 좋은 것이었다. 미국 해군 장교들은 사령관 더글러스 피셔 소장에게 “킹 제독이 모르는 사이에 주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48]
2. 3. 연합군 협력
1942년 인도양 공습 이후 영국 해군은 1944년 5월 17일 트랜섬 작전으로 자와섬 수라바야에 공습을 가할 때까지 남서 태평양 전역에 참전하지 못했다.[53] 미국이 태평양 지역의 영국 식민지를 점령하고 영향력을 넓히자, 영국 정부는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회복하고 일본에 맞서기 위해 영국군을 주둔시키는 것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영국 정부는 홍콩 등 과거 식민지들을 영국군의 손으로 탈환하고자 했다.[53]영국 정부 내에서는 영국 태평양 함대 투입에 대한 만장일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특히 윈스턴 처칠은 미국이 주도하는 전투에서 영국이 부차적인 역할에 머무르는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그는 영국군의 주둔이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며 미얀마와 영국령 말라야에 전투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해군 계획장교들은 장교회의의 지지를 바탕으로 태평양 함대가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53]
해군성은 1944년 초 태평양에서 영국군의 역할을 제안했지만, 미국 해군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미국 해군 사령관이자 해군 작전 사령관인 어니스트 킹은[54] 영국 태평양 함대의 참전을 꺼리며, 함대가 독자적으로 செயல்படும்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55] 1942년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직면하여 미군 주둔을 요청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태평양 전쟁에 크게 기여했지만, 미국과 동등한 전략적 동반자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군 주둔이 불균형을 초래하여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낳았다.[56]
영국과 미국은 정치적 목표가 달랐다. 영국은 '국기 게양(show the flag)'을 통해 영향력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던 반면, 미국은 태평양에서 자국의 확고한 지위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국 함대와 해군 사령관들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되었다. 킹 제독이 영국 태평양 함대의 완전한 자급자족을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물자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3. 함대 구성
영국 태평양 함대는 노스 케이프 남작 1대 브루스 프레이저 제독이 트린코말리에서 영국 동부 함대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HMS 타란툴라에서 영국 태평양 함대(British Pacific Fleet, BPF) 사령관으로서 기를 게양하면서 창설되었다. 프레이저 제독은 이후 HMS 하우로 기함을 옮겼다.[42]
동부 함대는 실론(현 스리랑카)에 주둔하며 영국 동인도 함대로 재편성되었고, 이후 BPF가 되었다. BPF는 수마트라를 상대로 작전 로브슨과 작전 메리디안을 수행하며 경험을 쌓은 후, 1945년 초 트린코말리에서 시드니로 출항했다.[42]
함대의 주요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함종 | 함명 | 비고 |
---|---|---|
항공모함 | 일러스트리어스(R87), 빅토리어스(R38), 포미더블(R67), 인도미터블(R92), 임플래커블(R86), 인디파티거블(R10) |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
전함 | 킹 조지 5세(41), 하우(32) | |
순양함 | 6척 | |
구축함 | 12척 | |
영국 연방 해군 | 우간다(캐나다), 아킬레스, 감비아(뉴질랜드), 퀴베론, 퀸버러, 니잠, 네이피어, 네팔, 노먼(호주) | |
함재기 | 콜세어, 어벤저, 헬캣, 시파이어 | 영국, 캐나다, 남아프리카, 뉴질랜드 해군 인원 운용[42] |
1945년 주요 작전:
- 1월 24일~29일, 작전 메리디안
- 3월 15일~5월 21일, 오키나와 전투 선섬(先島) 제도 봉쇄, 제57기동부대
- 7월 17일~8월 11일, 일본 본토에 대한 함포 사격
- 8월 12일, 제57기동부대 해산[43]
- 9월 14일, 영국 태평양 함대 해산
3. 1. 구성 부대
영국 태평양 함대(BPF)는 왕립 해군(Royal Navy)이 함대의 대부분과 주력함을 제공했지만, 왕립 보조 함대(Royal Fleet Auxiliary, RFA)뿐만 아니라 호주 왕립 해군(RAN), 캐나다 왕립 해군(RCN), 뉴질랜드 왕립 해군(RNZN)을 포함한 영연방 국가들의 요소와 인원도 포함되었다. 1942년 이후 미국 해군(USN) 편대와 대형 함선이 통합되면서 RAN의 기여는 제한적이었다. 해군 조종사의 상당수는 뉴질랜드인과 캐나다인이었다. USN도 BPF에 기여했으며, 남아프리카 해군(SAN)의 인원도 참여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항만 시설도 영국 태평양 함대를 지원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42]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함대는 브루스 프레이저 제독이 지휘했다. 실제 전투에서 함대 지휘는 버나드 롤링스 중장에게 맡겨졌으며, 필립 비안 중장이 왕립 해군 함대 항공대(FAA)의 공중 작전을 담당했다. 함대의 전투 부대는 1945년 5월 28일부터 제37 특수 임무 부대(Task Force 37)로(이전에는 제57 특수 임무 부대(Task Force 57)) 불렸으며, 함대 수송대는 제113 특수 임무 부대(Task Force 113)였다. 제1 항공모함 전대(1st Aircraft Carrier Squadron)가 주력 항공모함 편대였다.
제300 비행대대(No. 300 Wing RAF)는 1944년 말 호주에 설립되어 BPF을 지원하는 수송기를 운항했으며, 프레이저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이 비행대대는 1945년에 그룹으로 확장되어 시드니에서 함대의 전방 기지까지 정기적으로 비행했다.
항공대대는 1945년 6월부터 함대 항공대 그룹(Fleet Air Arm groups)으로 편성되어 각 항공모함에 탑재된 비행대대를 관리했다.

이 함대는 6척의 항공모함, 4척의 경항공모함, 2척의 항공기 정비함, 9척의 호위항공모함(총 750대 이상의 항공기), 5척의 전함, 11척의 순양함, 35척의 구축함, 14척의 프리깃함, 44척의 소형 군함, 31척의 잠수함, 그리고 54척의 대형 보조함으로 구성되었다.
;항공모함
- 포미더블(HMS Formidable, R67): 코르세어 약 36대, 어벤저 15대 (제1항공모함전대 기함)
- 일러스트리어스(HMS Illustrious, R87): 코르세어 약 36대, 어벤저 15대
- 빅토리어스(HMS Victorious, R38): 코르세어 36대, 어벤저 15대, 슈퍼마린 월러스 수륙양용기 포함
- 인도미터블(HMS Indomitable, R92): 그루만 F6F 헬캣 39대, 어벤저 21대
- 임플래커블(HMS Implacable, R86): 슈퍼마린 시파이어 48대, 어벤저 21대, 페어리 파이어플라이 12대
- 인디페티거블(HMS Indefatigable, R10): 시파이어 40대, 어벤저 18대, 파이어플라이 12대
;경항공모함
- 콜로서스(HMS Colossus, R05): 보트 F4U 코르세어 24대, 페어리 바라쿠다 18대
- 글로리(HMS Glory, R62): 코르세어 21대, 바라쿠다 18대
- 베너러블(HMS Venerable, R63): 코르세어 21대, 바라쿠다 18대
- 벤전스(HMS Vengeance, R71): 코르세어 24대, 바라쿠다 18대
;정비함
- 파이오니어(HMS Pioneer, R76)
- 유니콘(HMS Unicorn, I72)
;호위항공모함
- 스트라이커(HMS Striker, D12) (제30항공모함전대 기함)[18][19]
- 아비터(HMS Arbiter, D31)
- 체이서(HMS Chaser, D32)
- 펜서(HMS Fencer, D64)
- 룰러(HMS Ruler, D72)
- 리퍼(HMS Reaper, D82)
- 슬링거(HMS Slinger, D26)
- 스피커(HMS Speaker, D90)
- 빈덱스(HMS Vindex, D15)
;전함
- 하우(HMS Howe, 32) (제1전함전대 기함)
- 킹 조지 5세(HMS King George V, 41)
- 듀크 오브 요크(HMS Duke of York, 17) (1945년 7월 도착)
- 앤슨(HMS Anson, 79) (1945년 7월 도착)
- 넬슨(HMS Nelson, 28) (1945년 7월 도착)
;순양함
- 아킬레스(HMNZS Achilles, 70)
- 아르고넛(HMS Argonaut, 61)
- 벨파스트(HMS Belfast, C35)
- 버뮤다(HMS Bermuda, C52)
- 블랙 프린스(HMS Black Prince, 81)
- 실론(HMS Ceylon, C30)
- 유리알루스(HMS Euryalus, 42)
- 감비아(HMNZS Gambia, 48)
- 뉴펀들랜드(HMS Newfoundland, C59)
- 뉴캐슬(HMS Newcastle, C76)
- 온타리오(HMCS Ontario, C53)
- 스위프트슈어(HMS Swiftsure, 08) (제4순양함전대 기함)
- 우간다(HMCS Uganda, C66)
;순양함급 기뢰부설함
- 아폴로(HMS Apollo, M01)
- 아리아드네(HMS Ariadne, M65)
- 먼크스맨(HMS Manxman, M70)
;보조 대공 순양함
- 프린스 로버트(HMCS Prince Robert)
;구축함
- 알곤퀸(HMCS Algonquin, R17)
- 바플뢰르(HMS Barfleur, D80)
- 그렌빌(HMS Grenville, R97) (U급 구축함 전대장함)
- 켐펜펠트(HMS Kempenfelt, R03) (W급 구축함 전대장함)
- 네이피어(HMAS Napier, G97)
- 네팔(HMAS Nepal, G25)
- 니잠(HMAS Nizam, G38)
- 노먼(HMAS Norman, G49)
- 쿼드런트(HMS Quadrant, G11)
- 퀄리티(HMS Quality, G62)
- 퀸보로(HMAS Queenborough, G70)
- 퀴베론(HMAS Quiberon, G81)
- 퀵매치(HMAS Quickmatch, G92)
- 티저(HMS Teazer, R23)
- 테네셔스(HMS Tenacious, R45)
- 테르마건트(HMS Termagant, R89)
- 테르프시코레(HMS Terpsichore, R33)
- 트러브리지(HMS Troubridge, R00)
- 튜멀트(HMS Tumult, R11)
- 투스칸(HMS Tuscan, R56)
- 티리안(HMS Tyrian, R67)
- 얼스터(HMS Ulster, R83)
- 율리시스(HMS Ulysses, R69)
- 언도운티드(HMS Undaunted, R53)
- 언딘(HMS Undine, R42)
- 우라니아(HMS Urania, R05)
- 어친(HMS Urchin, R99)
- 우르사(HMS Ursa, R22)
- 웨이저(HMS Wager, R98)
- 웨이크풀(HMS Wakeful, 1943)
- 웨섹스(HMS Wessex, R78)
- 웰프(HMS Whelp, R37)
- 휘르윈드(HMS Whirlwind, R87)
- 위저드(HMS Wizard, R72)
- 랭글러(HMS Wrangler, R48)
;프리깃함
- HMS 에어(HMS Aire)
- HMS 에이번(HMS Avon)
- HMS 바를(HMS Barle)
- 빅버리 베이(HMS Bigbury Bay, K606)
- HMS 더그(HMS Derg)
- HMS 핀드혼(HMS Findhorn)
- HMS 헬퍼드(HMS Helford)
- 오자니(HMS Odzani, K356)
- HMS 패럿(HMS Parret)
- 플림(HMS Plym, K271)
- HMS 어스크(HMS Usk)
- 베리안 베이(HMS Veryan Bay, K651)
- 화이트샌드 베이(HMS Whitesand Bay, K633)
- 와이드마우스 베이(HMS Widemouth Bay, K615)
;슬루프함
- 앨러크리티(HMS Alacrity, U60)
- 애미시스트(HMS Amethyst, U16)
- 블랙 스완(HMS Black Swan, L57)
- HMS 크레인(HMS Crane)
- HMS 시그넷(HMS Cygnet)
- 인챈트리스(HMS Enchantress, L56)
- 어니(HMS Erne, U03)
- 플라밍고(HMS Flamingo, L18)
- 하트(HMS Hart, U58)
- HMS 힌드(HMS Hind)
- HMS 오포섬(HMS Opossum)
- 피전트(HMS Pheasant, U49)
- HMS 레드폴(HMS Redpole)
- 스타링(HMS Starling, U66)
- 스토크(HMS Stork, L81)
- 윔브럴(HMS Whimbrel, U29)
- HMS 우드콕(HMS Woodcock)
- 렌(HMS Wren, U28)
;코르벳함
- 아버터스(HMNZS Arbutus, K403)
- 발라랫(HMAS Ballarat, J184)
- 벤디고(HMAS Bendigo, J187)
- 버니(HMAS Burnie)
- 케언스(HMAS Cairns, J183)
- 세스녹(HMAS Cessnock, J175)
- 고울러(HMAS Gawler, J188)
- 제럴턴(HMAS Geraldton, J178)
- 굴번(HMAS Goulburn)
- 입스위치(HMAS Ipswich, J186)
- 칼구를리(HMAS Kalgoorlie)
- 론세스톤(HMAS Launceston, J179)
- 리스모어(HMAS Lismore, J145)
- 메리보로(HMAS Maryborough, J195)
- 파이리(HMAS Pirie, J189)
- 탬워스(HMAS Tamworth, J191)
- 투움바(HMAS Toowoomba, J157)
- 와이알라(HMAS Whyalla, J153)
- 울롱공(HMAS Wollongong, J172)
;잠수함
- 포포이스(HMS Porpoise, N14) 기뢰부설함
- 로어퀄(HMS Rorqual, N74) 기뢰부설함
- 샌구인(HMS Sanguine, P266)
- 스코츠맨(HMS Scotsman, P243)
- 씨 데빌(HMS Sea Devil, P244)
- 씨 님프(HMS Sea Nymph, P223)
- 씨 스카우트(HMS Sea Scout, P253)
- 셀린(HMS Selene, P254)
- 시돈(HMS Sidon, P259)
- 슬루스(HMS Sleuth, P261)
- 솔런트(HMS Solent, P262)
- 스파크(HMS Spark, P236)
- 스피어헤드(HMS Spearhead, P263)
- 스터번(HMS Stubborn, P238)
- 스티지언(HMS Stygian, P249)
- 슈프림(HMS Supreme, P252)
- 태시턴(HMS Taciturn, P334)
- 태피어(HMS Tapir, P335)
- 타우러스(HMS Taurus, P399)
- 텔레머커스(HMS Telemachus, P321)
- 소로(HMS Thorough, P324)
- 슐레(HMS Thule, P325)
- 팁토(HMS Tiptoe, P332)
- 토템(HMS Totem, P352)
- 토베이(HMS Torbay, N79)
- 트렌찬트(HMS Trenchant, P331)
- 트럼프(HMS Trump, P333)
- 튜더(HMS Tudor, P326)
- 터핀(HMS Turpin, P354)
- HMS 버추(HMS Virtue) 대잠 훈련
- HMS 보레이셔스(HMS Voracious) 대잠 훈련
- 복스(HMS Vox, P73) 대잠 훈련
;상륙함
- HMS 글린언(HMS Glenearn) – 대형 상륙함, 보병
- HMS 로시안(HMS Lothian) – 대형 상륙함, 지휘함
;함대 보급선
- 아다먼트(HMS Adamant, A164) 잠수함 정비함
- 아오랑이(MV Aorangi, 1924) 숙소함
- 아티펙스(HMS Artifex, F28) 수리함
- 어시스턴스(HMS Assistance, F173) 수리함
- RFA 바커스(RFA Bacchus, A103) 증류수함
- 보나벤처(HMS Bonaventure, F139) 잠수함 정비함
- HMS 베리 헤드(HMS Berry Head) 수리함
- HMS 디어 사운드(HMS Deer Sound, F99) 수리함
- 딜리전스(HMS Diligence, F174) 수리함
- HMS 덜리스크 코브(HMS Dullisk Cove) 수리함
- SS 엠파이어 클라이드(SS Empire Clyde) 병원선
- SS 엠파이어 크레스트(SS Empire Crest) 급수함
- HMS 펀모어(HMS Fernmore) 부표 운반함
- HMS 플램버러 헤드(HMS Flamborough Head) 수리함
- HMS 포트 콜빌(HMS Fort Colville) 항공기 보급함
- 포트 랭리(RFA Fort Langley, A230) 항공기 보급함
- 예루살렘(HMHS Gerusalemme) 병원선
- HMS 가디언(HMS Guardian, 1932) 그물 설치함
- 켈란탄(HMNZS Kelantan) 수리함
- 킹 샐버(RFA King Salvor, A291) 구조함
- HMS 랭커셔(HMS Lancashire) 숙소함
- HMS 레오니안(HMS Leonian) 부표 운반함
- 메이드스톤(HMS Maidstone, 1937) 잠수함 정비함
- 마웅가누이(NZHS Maunganui) 병원선
- 메네스테우스(HMS Menestheus) 휴양함
- 몽클레어(HMS Montclare, F85) 구축함 정비함
- 옥스퍼드셔(HMHS Oxfordshire) 병원선
- 리소스(HMS Resource, F79) 수리함
- 샐베스터(RFA Salvestor, A499) 구조함
- 샐빅터(RFA Salvictor, A500) 구조함
- HMS 쉴레이(HMS Shillay) 해저지뢰 제거함
- HMS 스프링데일(HMS Springdale) 수리함
- HMS 스태그풀(HMS Stagpool) 증류수함
- 티탈렝카(RNH Tjitalengka) 병원선
- HMS 트로데이(HMS Trodday) 해저지뢰 제거함
- 타인(HMS Tyne, F24) 구축함 정비함
- HMS 벡포트(HMS Vacport) 급수함
- 바스나(RNH Vasna) 병원선
;유조선
- 아룬데일(RFA Arndale, A133)
- 비숍데일(RFA Bishopdale, A128)
- 브라운 랜저(RFA Brown Ranger, A169)
- 세더데일(RFA Cederdale, A380)
- 이글스데일(RFA Eaglesdale, A104)
- 그린 랜저(RFA Green Ranger, A152)
- 올나(RFA Olna, A216)
- 래피돌(RFA Rapidol)
- 서볼(RFA Serbol)
- 웨이브 엠페러(RFA Wave Emperor, A100)
- RFA 웨이브 가버너(RFA Wave Governor)
- 웨이브 킹(RFA Wave King, A264)
- RFA 웨이브 모나크(RFA Wave Monarch)
- 아세 마에르스크(MV Aase Maersk, 1930)
- 카렐리아(Carelia)
- 다스트 크릭(Darst Creek)
- 골든 메도우(Golden Meadow)
- 이에르(Iere)
- 로마 노바(Loma Nova)
- 산 아돌포(San Adolpho)
- 산 아마도(San Amado)
- 산 암브로시아(San Ambrosia)
- 세븐 시스터스(Seven Sisters)
;보급함
- 보스포러스(Bosporus)
- 시티 오브 디에프(City of Dieppe)
- 코린다(Corinda)
- 다벨(Darvel)
- 에드나(Edna)
- 포트 알라바마(Fort Alabama)[20]
- 포트 콘스탄틴(Fort Constantine) 식량 보급함[20]
- 포트 던베간(Fort Dunvegan) 식량 보급함[20]
- 포트 에드먼턴(Fort Edmonton) 식량 보급함[20]
- 포트 프로비던스(Fort Providence) 군수품 보급함[20]
- 포트 랭글(Fort Wrangell) 군수품 보급함[20]
- 구드룬 마에르스크(Gudrun Maersk)
- 헤르멜린(Hermelin)
- 헤론(Heron)
- 히코리 번(Hickory Burn)
- 히코리 데일(Hickory Dale)
- 히코리 글렌(Hickory Glen)
- 히코리 스팀(Hickory Steam)
- 야르스트롬(Jaarstrom)
- 케티(Kheti)
- 키스트나(Kistna)
- 콜라(Kola)
- 마루두(Marudu)
- 파체코(Pacheco)
- 프린스 드 리에주(Prince de Liege)
- 프린세스 마리아 피아(Princess Maria Pia)
- 프로메(Prome)
- 로버트 마에르스크(Robert Maersk)
- 산 안드레스(San Andres)
- 슐레스비히(Sclesvig)
- 티라 S(Thyra S)
3. 2. 보급 문제
영국 태평양 함대(BPF)는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요구 조건 때문에 수 주 또는 수개월 동안 해상에서 해군력을 지원할 수 있는 함대 수송대(fleet train)를 설립해야 했다. 영국 해군은 영국, 지중해 및 인도양의 기지 근처에서 작전하는 데는 익숙했지만, 태평양 연안에는 관련 인프라와 전문 지식이 부족했다.[1] 북대서양과 지중해에서는 잠수함과 공중 공격의 위험 때문에 해상에서 정기적인 연료 보급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BPF의 경우 "미국 물류 당국은... 자급자족을 매우 관대한 의미로 해석했다."[1] 미군 장교들은 영국 함대 수송대 사령관인 더글러스 피셔(Douglas Fisher) 소장에게 킹 제독(Admiral King)이 모르는 사이에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했다.[2]영국 해군성은 함대의 보급과 행정에 대한 협의를 위해 C. S. 다니엘(Charles Daniel) 중장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그는 이후 호주로 이동하여 영국 태평양 함대의 행정 담당 부사령관이 되었는데, 이 직책은 "전투 비행대의 지휘와 비교하면 화려하지는 않지만, 전쟁 기간 동안 영국 기함 장교에게 할당된 가장 힘든 역할 중 하나였다."[1]
1944년 2월, 해군성은 함대 수송대에 약 150만 총톤수의 상선 134척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적절한 시기에" 20척만 제공 가능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미국, 해군성의 자원(560척의 상선 중 "소수"만 실제로 사용 가능), 또는 일반적인 상선 풀(많은 요구가 있었음)에서 충당해야 했다. 해군성의 요구 사항은 1월 80척(총 59만 톤)에서 3월 말에는 158척으로 늘어났다. 수상은 처음 80척 요구에 놀랐고, 4월 9일 "올해" 최소 2400만 톤의 수입을 기준으로 함대 수송대의 한계를 정의하는 서한을 발표했다. 그는 해군이 약 1년 안에 23만 톤의 새로운 상선을 확보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해군성은 단시간 내에 많은 새로운 장비와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전문 선박이 부족하여 영국 해군, 왕립 함대 보조함대(RFA) 및 상선으로 함대 수송대를 임시로 구성해야 했다. 1944년 2월 8일, 제1해군경(First Sea Lord)이자 해군원수(Admiral of the Fleet)인 앤드류 커닝햄(Andrew Cunningham) 경은 국방위원회에 BPF 지원에 91척의 선박이 필요할 것이라고 알렸다. 3월까지 전쟁 지역이 북쪽으로 이동했고 미국은 영국이 필리핀에 시설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인식에 따라 추산치는 158척으로 증가했다. 1945년 1월, 전시 내각(War cabinet)은 선박 부족으로 함대 배치를 두 달 연기해야 했다.[3]
BPF는 유조선이 너무 적고, 너무 느리며, 경우에 따라서는 해상 보급 임무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류 장비, 호스 및 피팅은 설계가 잘못된 경우가 많았다. 영국 선박은 대부분 선미를 통해 해상에서 연료를 보급했는데, 이는 미국의 병렬 연료 보급 방법에 비해 안전하지만 덜 효율적이었다. 장비 부족과 연습 부족은 연료 보급 중 일정한 항로를 유지하는 동안 호스 파열이나 잠수함 공격 위험에 과도한 시간을 소비하게 했다.[4]
호주 해군이 발견했듯이 영국산 선박은 비슷한 미국 선박의 냉장 공간의 약 3분의 1만 가지고 있었다.[5] 또한 연료 탱크 용량이 제한적이고 기계 효율이 낮았는데, 특히 주력함의 경우 그러했다.[6] 따라서 영국 함선은 미국 함선보다 더 자주 보급해야 했다. 어떤 경우에는 미국산 장비조차 호환되지 않았다. FAA 항공기는 영국 무전기와 산소 마스크를 설치하여 "영국식"으로 개조되었고, 보트 콜세어는 영국 항공모함의 좁은 격납고에 맞추기 위해 날개 접는 장치가 수정되었다. 따라서 교체 항공기는 영국에서 가져와야 했다.[7]
영국 참모총장들은 일찍부터 BPF를 인도가 아닌 호주에 기지를 두기로 결정했다. 호주 정부는 BPF 지원에 기여하기로 동의했지만, 호주 경제는 전쟁 노력에 완전히 집중되어 있었고 BPF를 위한 인력과 물자는 일본과 싸우는 미국군과 호주군으로부터 가져와야만 했다.
1944년 9월 12일부터 4일간 열린 제2차 퀘벡 회담에서 처칠이 대일전쟁에 대한 영국 해군의 참전을 제기했고, 두 달 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외교적 배려에서 처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44] 그러나 “영국 혐오자”로 불린 미국 해군 작전 부장 얼니스트 킹 제독은 영국 함대와의 연계에 난색을 표했다.[42][46] 킹 제독은 영국 태평양 함대가 보급을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는 영국 해군이 미국 해군에 기여하기는커녕, 영국 해군이 독립적으로 극동 지역에서 병참과 보급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본국으로부터의 지원은 부족했고, 수년간 해상 보급에 대한 대응을 쌓아온 미군과 비교하여, 해상 보급을 전제로 하지 않은 영국 함대는 탱커의 선미에 있는 호스를 사용하여 연료를 이동시키는 데 매우 긴 시간이 걸렸다.[47][48]
미국 해군은 연락 장교를 각 함선에 배치했다.[48] 미영 해군의 긴밀한 연계는 피해야 한다는 상층부의 판단은 실제 해상에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자급자족” 원칙에 관하여 많은 미국 해군 장교가 “전력을 다하여 그것을 무시했다”[48]고 할 정도로, 양 함대의 관계는 존중심에 찬 좋은 것이었다. 미국 해군 장교들은 더글러스 피셔 소장에게 “킹 제독이 모르는 사이에 주어지는 것은 무엇이든”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48]
대일 작전과 관련하여 항상 병참 보급 문제가 영국 태평양 함대의 골칫거리였지만, 영국 해군은 함내 알코올 반입을 허용했기 때문에 주류는 상비되어 있었다. 한편 미국 해군은 1914년 일반 명령 제99호에서 함내 및 군 시설 내 모든 알코올 반입 및 음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미국 해군 장교 중에는 영국 함대 방문을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제3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 주니어는 영국 태평양 함대에 가능한 모든 보급을 제공했다. 그는 기함 요크 공작과 조지 5세의 양쪽 장교 회의 명예 회원이 되었고, 롤링스의 기함 조지 5세가 미국의 유조선으로부터 연료를 공급받는 동안 "건배"하기 위해 공중 트롤리로 승선했던 것을 회상하며 이야기하고 있다.[51]
레이더 예비 부품이 부족했던 조지 5세가 근처에 있던 미국 해군 구축함에 신호를 보내 필요한 부품을 위스키 병과 교환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확성기의 대답은 "이봐, 위스키 한 병과 교환이라면 이 망할 배를 통째로 주겠다"는 것이었다. 영국 해군의 독주 전통은 보급에 어려움을 겪는 영국 태평양 함대의 하나의 자산이 되었다.[51]
4. 주요 작전
영국 태평양 함대(BPF)는 1945년 1월 수마트라섬 팔렘방의 석유 시설을 공격한 메리디안 작전을 시작으로, 오키나와 전투 지원, 일본 본토 공격 등 태평양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5년 3월 15일, 미 해군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 지휘하의 제5함대에 BPF 전투 부대를 편입하여 제57기동부대(TF-57)로 명명했다.[11] 1945년 5월 27일에는 윌리엄 홀시 제독의 제3함대에 편입되어 제37기동부대(TF-37)가 되었다.[12]
1945년 4월, 영국 왕립 해군 제4잠수함전대는 BPF의 일원으로 서호주 프리맨틀의 연합군 잠수함 기지로 이동했다. 1945년 6월 8일, HMS 트렌찬트와 HMS 스티지안 잠수함이 수마트라 앞 바랑카 해협에서 일본 중순양함 아시가라를 격침시켰다. 1945년 7월 31일, 스트러글 작전에서 이안 프레이저 중위가 지휘하는 영국 소형 잠수함 XE3는 싱가포르에서 일본 중순양함 타카오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14] 이 공로로 프레이저와 매기니스는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스미스는 훈공훈장(DSO)을, 리드는 용감 무공훈장(CGM)을 받았다.
영국 함대의 전함과 항공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 대한 연합군 해군 폭격에도 참여했다. HMS 킹 조지 5세 전함은 도쿄도 북동쪽 약 약 128.75km 지점에 있는 이바라키현 히타치와 도요하시 근처의 하마마쓰를 폭격했는데, 이는 영국 전함이 마지막으로 실전에서 발포한 순간이었다.
BPF는 다운폴 작전에서 주요 역할을 할 예정이었지만,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은 취소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해상 공중전은 VJ-Day에 영국 항공모함 항공기가 일본 제로센 전투기를 격추했을 때였다.
1948년 8월, 함대는 런던 순양함, 서섹스(96), 코삭(R57), 코머스(R43), 콘코드, 콘소트, 콘스턴스(R71), 알라크리티(U60), 아메시스트, 하트(U58), 블랙 스완 구축함, 에네아스, 애프레이, 오리가 잠수함, 알러트(K647) 척후함, 앙코르(Encore) 함대 예인선, RFA 킹 살버(A291), RFA 프린스 살버(A292) 구난선, 댐피어 측량선, 댑칙 자기제어 기뢰제거함, 마이클, 플라잉 피시 등 7척의 기뢰제거함으로 축소되었다.[17]
4. 1. 메리디안 작전 (1945년 1월)
영국 태평양 함대(BPF)가 참여한 주요 작전 중 하나는 1945년 1월 수마트라 팔렘방(Palembang)의 석유 생산 시설을 공격한 메리디안 작전(Operation Meridian)이다. 악천후 속에서 실시된 이 공습은 일본 해군의 석유 공급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총 48대의 함대 항공대(FAA) 항공기가 손실되었지만, 그 대가로 도그파이트에서 30대, 지상에서 38대의 일본 항공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한다.[11]; 메리디안 작전 (1945년 1월 24일과 29일)
1944년 말, 프레이저는 진주만의 미국 해군 니미츠 제독으로부터 수마트라섬 팔렘방 부근의 정유소를 공습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는 일본군의 항공 연료 공급원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고, 니미츠가 자신의 지휘하에 들어오게 될 영국 태평양 함대의 공격 작전 실행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월 24일 플라조에 정유소, 악천후로 인한 지연을 거쳐 29일 소엥기게론 시설을 공격하여 일시적이었지만 정유소 가동을 완전히 중단시켰다.

4. 2. 오키나와 전투 지원 (1945년 3월 ~ 5월)
1945년 3월, 영국 태평양 함대(BPF)는 오키나와 침공을 지원하는 동안 사키시마 제도에서의 작전을 단독으로 수행했다. 이들의 역할은 오키나와에서 작전 중인 미국 해군 함정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가미카제 출격 기지를 향해 함포 사격과 공중 공격을 통해 일본의 공중 활동을 억제하는 것이었다.[13] 강화된 비행 갑판(armoured flight deck)을 갖춘 영국 함대 항공모함들은 집중적이고 반복적인 가미카제 공격을 받았지만, 높은 저항력을 보이며 비교적 빠르게 작전에 복귀했다.[13]
; 아이스버그 I 작전 (1945년 3월 27일~4월 20일)



1945년 3월 15일, 영국 태평양 함대는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 지휘하의 미국 제5함대에 합류하여 제57기동부대(TF57)에 배속되었다.[11] 그 임무는 미국군이 오키나와 상륙 작전 아이스버그 작전을 실행하는 데 큰 위협이 되는 대만과 사키시마 제도의 가미카제 특공대 비행장 기지를 필리핀 해상에 정박한 영국 함대가 차단하고 봉쇄하는 것이었다.[50]
사키시마 제도 봉쇄에는 보급 문제 외에도, 이시가키섬과 미야코섬의 비행장이 강력한 대공포로 방비되어 있다는 점과, 폭격에 의한 활주로 손상을 일본군이 24시간 체제로 수리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수리 상황을 정찰하면서 매일 폭격하는 것이 반복되었고, 시가지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확대되었다. 일본군은 비행장과 참호 건설에 주민들을 징용했고, 공습 사이의 위험한 탄흔 매립에 주민들을 투입했다.[50]
1945년 4월 2일, 일본 특공기 수 기가 함대를 공격했다. 1기가 중장갑 항공모함 인디파티거블의 지휘 관제부를 직격하여 폭발, 승무원 14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영국의 항공모함은 가미카제 공격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수 분 이내에 운용을 개시할 수 있었다.[47]
4월 20일 작전 종료까지 영국 태평양 함대는 보급 기간을 포함한 26일 중 12일간 총 2,444기의 출격을 실시했다. 항공기는 비행장에 412톤의 폭탄을 투하하고, 여러 표적에 315발의 로켓탄을 발사했다. 일본 항공기 134기를 파괴하고, 100척 이상의 소형 보트를 파괴하거나 손상시켰다. 이 작전에서 영국 태평양 함대는 68기의 항공기를 잃고, 34명의 승무원이 희생되었다.[47]
; 아이스버그 II 작전 (5월 4일~25일)
제57기동부대는 레이테 섬에서의 수리와 보수를 마치고 출항하여 5월 4일 사키시마 제도 해상에서 제2차 공습 작전을 개시했다. 히라라 비행장(해군 미야코섬 비행장)과 노하라 비행장(육군 미야코섬 중부 비행장)에 포격을 가하기 위해 여러 척의 전함과 순양함이 출격하고, 10시 30분경, 1기가 항공모함 포미더블의 갑판을 습격하여 폭발을 일으켜 함의 장갑 갑판을 관통하고, 갑판 위의 다수의 항공기를 대파시켰다. 이 폭발로 8명이 사망하고 47명이 부상했으며, 철제 갑판에 직경 7m의 움푹 들어간 곳과 60cm 정도의 구멍이 생겼다. 수 분 후에 다시 특공기 2기가 항공모함 인도미터블을 향해 공격했고, 1기는 격추했지만, 다른 1기는 갑판을 가로질러 폭발했다. 피해는 경미하게 끝났다. ''포미더블''의 화재 진압에는 90분이 걸렸지만, 6시간 이내에 갑판은 강판과 시멘트로 수리되었고, 중장갑 항공모함의 내성을 강력하게 보여주었다.
5월 9일, 빅토리어스의 전방 엘리베이터가 공격받아 갑판이 손상되었다. 또 특공기 2기가 포미더블을 공격했고, 갑판은 파괴되지 않았지만 함재기 25기를 소실시키고 1명이 희생되었다. 표적이 된 두 척은 그날 중에 운용을 재개했다.
제57기동부대는 5월 26일 아이스버그 II 작전을 완료할 때까지 4,893회의 출격을 실시했고, 그중 2,073회의 공격을 실시하여 958톤의 폭탄을 투하하고 950발의 로켓탄을 발사했다. 함대는 160기의 항공기를 상실했고, 그중 격추된 것이 26기, 운항 사고로 손상된 것이 72기였다. 항공 승무원 41명과 함상의 장병 4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47][49]
4. 3. 일본 본토 공격 (1945년 7월 ~ 8월)
영국 태평양 함대(BPF)는 1945년 3월 15일 미 해군 제5함대에 편입되어 제57기동부대(TF-57)로 불렸고, 5월 27일에는 제3함대에 편입되어 제37기동부대(TF-37)가 되었다.[11][12]1945년 7월, 영국 태평양 함대는 윌리엄 홀시 제독이 지휘하는 미 해군 제3함대의 일부로 일본 본토 공격에 참여했다. 영국 전함 킹 조지 5세(41)는 이바라키현 히타치와 시즈오카현 하마마쓰를 폭격했는데, 이는 영국 전함이 마지막으로 실전에서 발포한 사례였다.[15] 그러나 윌리엄 홀시 제독은 1945년 7월 구레 군항 폭격에서 영국군을 배제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일본 함대를 무너뜨린 최후의 일격에 영국이 참여했다고 주장할 가능성을 막는 것이 필수적이었다"고 밝혔다.[15]
영국 해군 항공모함 함재기들은 1945년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구레와 내해의 육상 및 항구 목표물을 공격했다. 오사카 항구와 비행장을 공격하여 일본 호위항공모함 시마네 마루를 격침시키고 일본 항공모함 가이요를 무력화했다. 또한 2척의 D형 호위함과 여러 척의 소형 선박을 침몰시켰다.[16]

일본 본토 공습 제1차 (7월 17일~19일)7월 17일, 항공모함 포미더블(HMS Formidable)과 제37 특별 임무 부대는 혼슈의 비행장과 철도를 공습했다. 35대의 콜세어, 11대의 어벤저, 6대의 헬캐트로 미야기현 마쓰시마(松島), 미야기현 센다이(仙台), 사이타마현 하스다(蓮田) 비행장을 공격했다. 항공모함 빅토리어스(HMS Victorious)는 12대의 콜세어로 니가타현 니가타(新潟) 비행장을 공격했다.
7월 18일, 악천후 속에서 포미더블은 지바현 모하라(茂原), 지바현 나루토(鳴門), 사이타마현 하스다(蓮田) 비행장을, 임플래커블(HMS Implacable)은 이바라키현 고노이케(鴻池) 비행장을 공격했다. 오후에는 포미더블이 지바현 가토리(香取), 이바라키현 고노이케(鴻池), 이바라키현 기타우라(北浦) 비행장을, 임플래커블은 도쿄도 다치카와(立川)와 지바현 나루토(鳴門) 비행장을 공격했다.
7월 19일은 아침에도 악천후로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 본토 공격 제2차 (7월 24일~8월 2일)7월 24일부터 25일까지, 항공모함 포미더블은 콜세어 34대, 어벤저 12대, 헬캐트 6대를 배치하여 오카야마현 구라시키(倉敷), 오카야마현 오카야마(岡山), 가가와현 다카마쓰(高松) 비행장을 공격했고, 한 명이 포격을 받아 사망했다. 항공모함 임플래커블은 12대의 시파이어로 가가와현 다카마쓰(高松)와 도쿠시마현 도쿠시마(徳島) 비행장을, 빅토리어스는 가가와현 다카마쓰(高松) 비행장을 공격했다.
7월 28일부터 30일까지는 기이 수도의 선박을 공격하고, 효고현 하리마 조선소(播磨造船所)와 효고현 아카시(明石) 비행장, 히로시마현 후쿠야마(福山) 비행장 등을 공격했다. 공격 기간 동안 제37 특별 임무 부대는 출격한 399대의 항공기 중 공격 작전에 260대, 방어 작전에 135대, 사진 정찰 비행에 4대를 사용했다. 7월 29일에는 계획된 항공 작전은 실시하지 않았고, 제37 특별 임무 부대는 미국군 제38 특별 임무 부대와 합류하여 해안 목표물에 대한 포격을 실시했다.
7월 30일의 비행 계획은 28일과 같았으며, 내해의 선박, 효고현 아카시(明石) 비행장, 나고야만을 표적으로 삼았다. 또한 교토부 마이즈루(舞鶴)와 시즈오카현 아키하바라(秋葉原) 비행장, 미에현 요카이치 항(四日市港) 등을 폭격했다. 이번에도 공격 기간 동안 공격 작전에 212대, 방어 작전에 130대, 사진 정찰 비행에 4대를 사용했다.
일본 본토 공격 제3차 (8월 8일~12일)당초 8월 5일에 예정되었으나, 악천후 등의 이유로 연기되었다. 8월 9일부터 10일까지 혼슈 북부의 연안 선박과 비행장인 미야기현 시오가마(塩釜), 미야기현 마쓰시마(松島), 미야기현 기센누마 항(気仙沼港), 미야기현 오나가와 만(女川湾), 미야기현 마쓰시마(松島) 비행장, 아오모리현 하치노헤(八戸) 비행장, 후쿠시마현 고리야마(郡山) 비행장 등을 공격했다.
4. 4. 함재기 운용
함대 항공대(FAA)의 시파이어는 태평양 전역에서 활약했다. 시파이어는 고고도 성능이 우수했지만 사정거리가 짧고 무장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함대 상공의 전투 공중 순찰(CAP) 방어 임무를 맡았다. 시파이어는 이오지마 상륙 작전 이후 가미카제 공격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파이어의 최고의 날은 1945년 8월 15일로, 1대의 손실로 8대의 공격기를 격추했다.[13]강화된 비행 갑판(armoured flight deck)을 갖춘 영국 함대 항공모함들은 집중적이고 반복적인 가미카제 공격을 받았지만, 높은 저항력을 보이며 비교적 빠르게 작전에 복귀했다. HMS 인디패티거블에 있던 미국 해군 연락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가미카제가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하면 진주만에서 6개월간 수리해야 합니다. 가미카제가 영국 항공모함을 공격하면 그냥 ‘청소부, 빗자루를 잡아!’라고 하는 겁니다.”[13]
영국, 캐나다, 남아프리카, 뉴질랜드 해군으로 구성된 인원에 의해, 콜세어, 어벤저, 헬캣, 슈퍼마린 시파이어(슈퍼마린 스핏파이어 해군형) 등의 함재기가 운용되었다.[42]
비행대대 번호 | 항공기 기종 | 모함 | 기간 | 비고 |
---|---|---|---|---|
801 | 시파이어 L.III | 임플래커블 | 1945년 5월 이후 | 제8 항공모함 항공대 소속. 1945년 5월 제8 항공모함 항공대의 일원으로서 영국 태평양 함대에 합류하여 트럭 섬과 일본 주변 목표물에 대한 공격을 호위하며 종전 후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23] |
812 | 바라쿠다 II | 벤전스 | 1945년 7월 이후 | 제11 항공모함 비행대대의 제111.2 특별전대 소속으로 종전 당시 대만으로 이동 중이었으며, 8월 29일 홍콩에 도착하였다. |
814 | 바라쿠다 II | 베너러블 | 1945년 6월 이후 | 제15 항공모함 항공대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
820 | 어벤저 I | 인데퍼티거블 | 1944년 11월 849 비행대대와 함께 탑승, 참가 | 제2 폭격 비행단 소속으로 수마트라 팔렘방의 정유소와 사키시마 군도 공격에 참가; 1945년 6월부터 제7 항공모함 항공대 소속으로 도쿄 주변 공격에 참가 |
827 | 바라쿠다 II | 콜로서스 | 1945년 1월 영국 태평양 함대에 탑승 | 1945년 6월부터 종전까지 인도양에서 작전(영국 태평양 함대 복무는 불명확) |
828 | 바라쿠다 I, II & III 어벤저 II | 임플래커블 | 1945년 6월부터 | 제8 항공모함 항공대 소속으로 트럭과 일본 공격에 참가 |
837 | 바라쿠다 II | 글로리 | 1945년 4월 탑승 | 제16 항공모함 항공대 소속이었으나 종전 전까지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고; 라바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감시하였다. |
848 | 어벤저 I | 포미더블 | 1945년 4월 이후 | 사키시마 군도의 비행장 및 해안 목표물과 타이완에 대한 공격에 참가; 1945년 6월 초 제2 항공모함 항공대에 합류하여 7월 일본 공격에 참가 |
849 | 어벤저 I & II | 빅토리어스 | 1944년 12월 이후 | 제2 해군 폭격 비행단 소속으로 1945년 1월 수마트라 팡칼란 브란단과 팔렘방 정유소 폭격; 사키시마 군도와 타이완 공격, 1945년 7월 도쿄 근처 일본 공격, 849 비행대대 소속 항공기가 가이요에 최초로 폭탄을 명중시켰다. |
854 | 어벤저 I, II & III | 일러스트리어스 | 1944년 12월 이후 | 벨라완 델리와 팔렘방 공격에 참가; 그 후 사키시마 군도 공격에 참가; 1945년 7월 제3 항공모함 항공대에 합류하여 추가 작전 없이 종전 |
857 | 어벤저 I & II | 인도미터블 | 1944년 11월 이후 | 1944년 12월과 1945년 1월 벨라완 델리, 팡칼란 브란단, 팔렘방 공격에 참가; 그 후 2개월간 사키시마 군도와 타이완 공격; 종전 전까지 추가 작전 없었으나, 그 후 1945년 8월 31일과 9월 1일 홍콩 근처에서 일본 자살정과 교전 |
880 | 시파이어 L.III | 임플래커블 | 1945년 3월 탑승 | 1945년 6월 트럭 섬 공격 호위; 6월 말 새로운 제8 항공모함 항공대에 합류; 일본 공격에 참가 |
885 | 헬캣 I & II | 룰러 | 1944년 12월 탑승 | 함대에 대한 전투기 호위 제공; 1945년 6월 항공기 재장비했으나 종전 전까지 추가 작전 없음 |
887 | 시파이어 F.III & L.III | 인데퍼티거블 | 1944년 11월 탑승 | 1945년 1월 수마트라 팔렘방 정유소 공격에 참가; 사키시마 군도 공격; 종전 직전 도쿄 주변 공격 |
888 | 헬캣 | 인데퍼티거블 | 1945년 1월까지 | 수마트라 상공 작전 수행 후 영국 태평양 함대가 출발할 때 실론에 남음 |
894 | 시파이어 L.III | 인데퍼티거블 | 1944년 11월 탑승 | 1945년 1월 수마트라 팔렘방 정유소 공격에 참가; 1945년 3월과 4월 사키시마 군도 공격, 종전 직전 일본 본토 공격 |
899 | 시파이어 L.III | 체이서 | 1945년 2월 | 작전 훈련 비행대대로 종전 당시 HMS 아비터에 있었다.[24] |
1770 | 파이어플라이 | 인데퍼티거블 | 1944년 11월 HMS 인데퍼티거블에 탑승 | 1944년 11월 HMS 인데퍼티거블에 탑승하여 극동으로 이동하여 1945년 1월 수마트라 팔렘방 정유소 공격에 참가하였다. 그 후 사키시마 군도와 타이완 공격에 참가하였다.[25] |
1771 | 파이어플라이 | 임플래커블 | 1945년 3월~9월 | 제8 항공모함 항공대의 일원으로 재탑승하여 1945년 6월 트럭 섬 공격과 그 후 일본 본토 공격에 참가하였다.[26] |
1772 | 파이어플라이 | 인데퍼티거블 | 1945년 7월부터 종전까지 | 일본 본토 공격[27] |
1790 | 파이어플라이 NF | 빈덱스 | 1945년 8월부터 | VJ-Day 전까지 작전 지역에 없었다.[28] |
1830 | 콜세어 | 일러스트리어스 | 1943년 12월 | 제5 해군 전투 비행단 소속으로 1944년 1월 동부 함대를 위해 실론으로 이동하였다. 1944년 3월 벵골 만 상공에서 순찰을 실시하였고, 1944년 4월 사방의 적 해안 시설을 공격하였으며, 1944년 5월 수라바야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1944년 6월 안다만 제도를 공격하였고, 7월 사방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후 1944년 8월 수리를 위해 더반으로 이동하였고, 비행대대는 10월까지 윙필드에 주둔하면서 항공기 18대를 추가 배치하였다. 1944년 12월과 1945년 1월 수마트라 팔렘방 정유소 공격에 참가한 후, 영국 태평양 함대에 합류하였다. 1945년 3월과 4월 사키시마 군도 공격 작전을 수행하였으나, 일본의 가미카제 공격으로 함선이 피해를 입어 1830 비행대대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비행대대는 1945년 7월 해산되었다.[29] |
1831 | 콜세어 | 글로리 | 1945년 6월 | 작전 없음.[30] |
1833 | 콜세어 | 일러스트리어스 | 1944년 3월 | 1944년 3월 벵골 만 상공에서 순찰을 실시하였고, 1944년 4월 사방의 적 해안 시설을 공격하였으며, 1944년 5월 수라바야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1944년 6월 안다만 제도를 공격하였고, 7월 사방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그 후 1944년 8월 수리를 위해 더반으로 이동하였고, 비행대대는 10월까지 윙필드에 주둔하면서 항공기 18대를 추가 배치하였다. 1944년 12월과 1945년 1월 수마트라 팔렘방 정유소 공격에 참가한 후, 영국 태평양 함대에 합류하였다. 1945년 3월과 4월 사키시마 군도 공격 작전을 수행하였으나, 일본의 가미카제 공격으로 함선이 피해를 입어 1833 비행대대 조종사들은 항공기 없이 영국으로 돌아와 1945년 7월 해산되었다.[31] |
1834 | 콜세어 | 빅토리어스 | 1944년 8월 | 1945년 1월 수마트라 팔렘방 정유소를 포함한 수마트라 일대에 대한 일련의 공격에 참가하였다. 그 후 영국 태평양 함대에 합류하여 1945년 3월과 5월 사이에 사키시마 군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6월 스콜필즈에서 제1 항공모함 항공대에 합류하여 7월 도쿄 지역의 일본 본토에 대한 일련의 공격을 위해 HMS 빅토리어스에 탑승하였다.[32] |
1836 | 콜세어 | 빅토리어스 | 1944년 7월부터 종전까지 | 1944년 7월 수마트라 사방의 석유 저장 시설과 비행장을 공격하였다. 1945년 1월 수마트라 팔렘방의 석유 시설 공격까지 해당 지역에서 작전을 계속 수행하였다. 그 후 사키시마 군도 공격에 참가하였고, 제1 항공모함 항공대에 합류하였다. 본 비행대대는 같은 달 말에 HMS 빅토리어스에 재탑승하여 종전까지 1945년 7월 도쿄 근처 일본 본토에 대한 공격에 참가하였다.[33] |
1839 | 헬캣 | 인도미터블 | 1944년 7월~1945년 6월 | 1944년 7월 HMS 인도미터블에 탑승하여 수마트라 공격 중 호위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4년 12월과 1945년 1월 수마트라 팔렘방 정유소 공격에 참가하였고, 함선과 함께 사키시마 군도를 공격하기 위해 영국 태평양 함대에 합류하였다. 1945년 1월 24일 1839 비행대대의 R.F. 매키 중위(RNZN)는 헬캣 JV141 "116/W"를 조종하여 팔렘방에서 일본 기-44기를 격추시켰다. 1945년 4월 1840 비행대대를 흡수하였고, 그 후 제5 해군 전투 비행단은 1945년 6월 제11 항공모함 항공대에 해산되었다. 8월 초 HMS 인도미터블에 탑승하였으나 종전 전까지 작전 없이 종전을 맞이하였다.[34] |
1840 | 헬캣 | 스피커 | 1944년 12월 | 본 비행대대는 에글링턴에서 제3 해군 전투 비행단에 합류하였고, 그 후 1944년 12월 태평양으로 향하는 HMS 스피커에 탑승하여 영국 태평양 함대의 호위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1945년 4월 1839 비행대대에 흡수되어 해산되었다.[35] |
1841 | 콜세어 | 포미더블 | 1944년 12월 | 태평양으로 향하는 HMS 스피커에 탑승하여 영국 태평양 함대의 호위 임무를 수행하였으나, 1945년 4월 1839 비행대대에 흡수되어 해산되었다.[36] |
1842 | 콜세어 | 포미더블 | 1944년 9월 | 1945년 3월 콜세어 IV로 재장비하였다. 1945년 4월과 5월 사키시마 군도에 대한 작전에 참가하였고, 6월 제6 해군 전투 비행단은 제2 항공모함 항공대에 합류하였다. 종전 직전 도쿄 근처 일본 본토 공격에 참가하여 2대의 항공기가 손실되었으나, 조종사들은 미국 잠수함에 의해 구조되었다.[37] |
1844 | 헬캣 | 인도미터블 | 1944년 10월 | 1944년 10월부터 12월까지 차이나 베이에서 육상에 주둔하였고, 그 후 수마트라 벨라완 델리의 석유 시설 공격을 위해 HMS 인도미터블에 재탑승하여 1945년 1월 팡칼란 브란단의 비행장 및 해안 목표물과 팔렘방의 정유소를 공격하였다. 그 후 호주로 이동하여 노라에 상륙하여 헬캣 II 18대를 재장비하였다. 재탑승 후 사키시마 군도와 타이완 공격에 참가하였다. 1945년 8월에 계획된 추가 작전은 종전으로 취소되었다.[38] |
1846 | 콜세어 | 콜로서스 | 1944년 9월 | 1944년 9월 제6 해군 전투 비행단에 합류하여 HMS 포미더블과 함께 극동으로 이동하였고, 1945년 1월까지 지브롤터 노스프런트, 데케일라, 콜롬보에 파견대가 상륙하였다가 같은 달 중순에 HMS 포미더블에 재탑승하여 2월 푸탈람에 도착하였다. 1945년 3월 콜세어 IV로 재장비하였다. 1945년 4월과 5월 사키시마 군도에 대한 작전에 참가하였고, 6월 제6 해군 전투 비행단은 제2 항공모함 항공대에 합류하였다. |
1850 | 콜세어 | 벤전스 | 1945년 7월 이후 | 제11 항공모함 비행대대의 제111.2 특별전대 소속으로 종전 당시 대만으로 이동 중이었으며, 8월 29일 홍콩에 도착하였다.[40] |
1851 | 콜세어 | 베너러블 | 1945년 3월 | 제15 항공모함 항공대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41] |
5. 종전 이후
1945년 9월 2일, 프레이저 제독은 도쿄 만의 전함 미주리에서 영국을 대표하여 일본의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49] 그날 밤, 인근에 정박한 그의 기함 듀크 오브 요크에서는 다른 연합군 지도자들을 맞이하여 기념식이 거행되었다.[49] 이후 영국 태평양 함대는 홍콩 재점령, 병사 귀환 사업, 일본군에 억류되었던 전쟁 포로의 호주, 캐나다, 미국으로의 이송 등 전후 긴급 업무를 수행했다.[49] 빅토리어스는 600명이 넘는 호주 출신 전쟁 신부들을 영국의 새 보금자리까지 안전하게 수송했다.[49]
영국 태평양 함대는 1948년 9월 14일까지 평시 함대로 활동하다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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