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잔 올 스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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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잔 올 스타즈는 1974년 결성된 일본의 밴드로, 멤버는 구와타 케이스케(보컬, 기타), 세키구치 가즈유키(베이스), 마쓰다 히로시(드럼), 하라 유코(키보드), 노자와 히데유키(타악기)로 구성되어 있다. 1978년 데뷔 싱글 "Katte ni Sindbad"를 발매했으며, "Tsunami"는 일본 역대 싱글 판매량 3위를 기록했다. 198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4개 시대에 걸쳐 앨범 1위를 기록했으며, 사회적 영향력과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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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잔 올 스타즈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Southern All Stars |
다른 이름 | 사잔, SAS |
로마자 표기 | Sazan Ōrusutaazu |
일본어 표기 | サザンオールスターズ (사잔 오루 스타즈) |
약칭 | サザン (사잔) |
결성지 | 가나가와 현 |
장르 | 서던 록 소프트 록 포크 록 블루스 록 뉴 웨이브 가요곡 (초기) |
활동 기간 | 1977년–1985년 1988년–2000년 2003년–2008년 2013년–현재 |
레이블 | 빅터 엔터테인먼트/타이시타 레이블 Invitation (1978년 - 1983년) 타이시타 레이블 (1983년 - 현재) 스피드스타 (1992년 -) |
소속사 | 아뮤즈 (1978년 - 현재) |
유튜브 채널 | 사잔올스타즈 공식 유튜브 채널 |
구성원 | |
현재 구성원 | 구와타 게이스케 (보컬, 기타) 세키구치 가즈유키 (베이스) 마쓰다 히로시 (드럼) 하라 유코 (키보드, 보컬) 노자와 히데유키 (퍼커션) |
이전 구성원 | 오모리 다카시 (기타) |
관련 인물 | |
협업 아티스트 | 고가키 겐 닛타 이치로 야기 마사오 후지이 다케시 고바야시 다케시 시마 겐 사이토 마코토 가타야마 아쓰오 야마모토 다쿠오 소가 준이치 미나미다니 세이코 오구라 히로카즈 |
2. 멤버
이름 | 성별 | 생년월일 | 혈액형 | 출신지 | 담당 | 비고 |
---|---|---|---|---|---|---|
구와타 게이스케 | 남성 | 1956년 2월 26일 | A형 | 가나가와현 지가사키시 | 보컬, 기타 | 리더[85] |
세키구치 가즈유키 | 남성 | 1955년 12월 21일 | O형 | 니가타현 | 베이스 | |
마쓰다 히로시 | 남성 | 1956년 4월 4일 | O형 | 미야자키현 | 드럼 | |
하라 유코 | 여성 | 1956년 12월 11일 | B형 |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 키보드, 보컬 | |
노자와 히데유키 | 남성 | 1954년 10월 19일 | A형 | 도쿄도 | 퍼커션 | |
출처:[86][87] |
; 전 멤버
구와타 게이스케가 밴드 마스터로서 악곡의 작사, 작곡, 보컬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57] 거의 모든 싱글 곡들의 작사, 작곡, 편곡을 구와타 게이스케가 맡았다. 하라 유코는 곡에 따라 코러스나 카운터 멜로디(주 멜로디를 보완하는 또 다른 멜로디, 오블리가토라고도 한다[58])를 구상하는 역할도 하며,[22] 구와타는 하라를 "사잔 올 스타즈의 나침반이며, 구와타 게이스케에게 있어 등대"라고 표현했다.[59] 또한 다케우치 마리야나 구사노 마사무네(스피츠) 등 동료 뮤지션들 사이에서도 하라 유코는 "사잔 올 스타즈의 주체"라는 평가를 받는다.[60][61] 구와타 게이스케와 하라 유코는 부부이다.
구와타는 사잔다움의 요인으로 마쓰다 히로시의 존재를 언급하며, 하라와의 음악적 궁합이 좋음을 칭찬하거나[62] "사잔의 진짜 리더는 그(마쓰다)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요"[63]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구와타는 세키구치 가즈유키에 대해서는 "독특한 발상을 한다", "아티스틱하다", "사잔의 핵심"이라고 평가하며,[64] 음악 평론가 스지 스즈키는 저서 『사잔 올 스타즈 1978-1985』에서 마쓰다와 세키구치의 리듬 파트의 훌륭함을 언급했다.[65] 구와타는 노자와 히데유키에 대해서도 "노자와가 치는 콩가와 봉고는 세상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털게 소리는 털게만이 낼 수 있다", "퍼커션의 중요성을 나는 거의 그에게서 배웠다"[66] "이 사람이 없었다면 사잔은 3년 전에 해산했을 것 같다"[22],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의 일밖에 말하지 않고, 분수에 맞지 않는 타입은 아니지만, 털게가 있어서야 인간 관계가 유지된다"라고 말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67]
모든 멤버가 코러스를 담당하며, 노자와 히데유키를 제외한 멤버들은 각자 메인 보컬을 맡은 곡도 있고 작사, 작곡도 가능하다. 구와타는 사잔의 사운드는 멤버 5명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스태프를 포함한 총칭이며,[22] 밴드라는 단위가 아니라 모두가 즐거운 일을 공유하는 '음악 예능 집단'이라는 대규모 집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22] 그는 사잔의 멤버가 아니면 낼 수 없는 고유의 음상이 있으며, 어머니의 카레라이스처럼 어떤 요소를 빼도 그 맛이 나지 않는다고 비유했다.
구와타는 사잔을 이끌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으로 "자신을 포함한 멤버 전원의 밴드맨으로서의 기개와 프라이드"를 꼽으며,[69] 멤버 전원이 남 모르게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고 말한다.[70] 또한 영화감독 경험을 통해 "리더는 아무리 곤란해도 약한 얼굴이나 망설임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리더십 철학을 배웠다고 한다.
사잔의 관계에 대해 구와타는 "젊었을 때는 험악한 면도 있었지만, 여러 번 밴드 활동을 쉬는 동안 모난 부분이 없어지고 서로의 빛나는 부분을 찾아내기 쉬워졌다"고 말한다.[22] 그는 하라를 비롯한 가족과의 관계나 멤버 간의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며,[22] 2008년 활동 중단을 발표할 때도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이 있어서 사잔입니다", "멤버 5명이 있고, 저는 이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평생의 파트너로서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습니다"라며 멤버들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77] 2018년 인터뷰에서는 사잔이 가족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78] 구와타·하라 부부를 비롯한 멤버들이 스캔들 없이 착실하게 가정과 음악에 임하는 모습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79] 솔로 활동이 활발해져도 멤버들을 버리지 않는 구와타의 자세는 다케다 테쓰야(가이엔타이) 등과 비교되며 높이 평가받기도 한다.[80] 음악 프로듀서 사카이 마사토시는 "하라 유코는 물론이고, 멤버도 스태프도 그런 구와타의 인품에 매료되어 사잔 올 스타즈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했다.[81] 스지 스즈키 역시 "원맨 밴드는 대개 빨리 망하는 경향이 있는데, 구와타 게이스케라는 리더 아래 40년(2018년 기준)을 이어온 것은 대단한 일"이라며, "멤버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면 구와타는 리더이면서도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는 분위기 메이커일 것"이라고 분석했다.[22]
사잔은 활동 집중 시기와 멤버 각자의 솔로 활동 시기를 번갈아 가지며, 세키구치는 이를 "좋든 싫든, 뭔가 구실을 마련하지 않으면 움직이기 힘든 밴드"라고 표현했다.[22] 구와타 역시 "(활동 계획 같은) 대본영 발표가 있는 편이 움직이기 쉽다"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22] 세키구치는 사잔이 오래 지속된 비결을 "쉬엄쉬엄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답했다.[74] 스지 스즈키는 멤버 각자의 뛰어난 연주력과 실력이 밴드 장수의 이유 중 하나라고 언급하며 사잔을 "테크니션 밴드"라고 평했다.[75][76]
; 서포트 멤버
- 키보드·피아노·신시사이저: 오쿠 게이이치, 구니모토 요시히로, 고바야시 다케시, 후지이 다케시, 가도쿠라 사토시, 소가 준이치 (토네이도 타츠마키)
- 기타: 오구라 히로카즈, 사하시 요시유키, 사이토 마코토
- 베이스: 네기시 다카시, 미쿠즈키 치하루
- 퍼커션: 미사와 마타로
- 코러스: EPO, 히라마츠 야치요, 시미즈 미에, 사토 요시카제, TIGER
- 브라스·호른·스트링스: 스펙트럼, 닛타 이치로, 야마모토 타쿠오, 무라타 요이치, 가네하라 지에코
- 편곡가: 야기 마사오, 구와노 세이, 나카니시 토시히로, 미야가와 야스시, 시마 켄
- 기타: Z단, 고바야시 카츠야, 하기와라 켄타, 토미 스나이더, 이와모토 에리코, 미야지 준이치, 나카니시 마사키
3. 역사
1978년 6월 25일 싱글 "캇테니 신드바드"로 메이저 데뷔한 이래[36], 30년 이상 일본 음악계의 선두에 서 있는 밴드이다. 록 음악, 발라드, 민족 음악, 향토 음악, 테크노, 디지털 록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사랑, 섹스, 향토애, 유머, 사회 풍자 등 폭넓은 소재를 다룬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넓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으며, 여러 분야의 유명 인사 중에도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많다.
주요 히트곡은 다음과 같다.
연대 | 대표곡 | 판매량 (오리콘 기준) |
---|---|---|
1970년대 | 캇테니 신드바드 | 51.6만 장 |
1970년대 | 이토시노 엘리 | 72.9만 장[37] |
1980년대 | 차코의 해안 이야기 | 58.5만 장[38] |
1980년대 | 미스 브랜뉴 데이 | 30.3만 장[38] |
1980년대 | Bye Bye My Love (U are the one) | [39] |
1990년대 | 한여름의 과실 | [40] |
1990년대 | 눈물의 키스 | 154.9만 장 (밀리언 셀러)[41] |
1990년대 | 에로티카 세븐 | 174.3만 장 (밀리언 셀러)[41] |
1990년대 | 너만을 〜Summer Heartbreak〜 | (밀리언 셀러)[41] |
1990년대 | 사랑의 영혼 〜Spiritual Message〜 | 139.6만 장 (밀리언 셀러)[41] |
2000년대 | TSUNAMI | 293.6만 장 (더블 밀리언)[41] |
2000년대 | HOTEL PACIFIC | [42] |
2000년대 | 눈물의 바다에서 안기고 싶어 〜SEA OF LOVE〜 | 74.2만 장[43] |
2000년대 | I AM YOUR SINGER | 52만 장[44] |
2010년대 | 피스와 하이라이트 | 35만 장[546] |
2010년대 | 도쿄 VICTORY | [45] |
2010년대 | 싸우는 전사들에게 사랑을 담아 | [46] |
사잔 올 스타즈는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4개 연대에서 오리콘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546]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에서 결성되어 1974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으며[311], 1978년 데뷔 이후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하며 일본 대표 밴드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 "TSUNAMI"로 제42회 일본 레코드 대상 대상을 수상했고[390], 2008년부터 5년간의 활동 중단 기간을 거쳐 2013년 복귀하여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정규 앨범은 1978년 『뜨거운 가슴 설렘』부터 2015년 『포도』까지 총 15장을 발매했으며, 베스트 앨범은 1998년 『바다의 Yeah!!』, 2018년 『바다의 Oh, Yeah!!』 등 총 7장을 발매했다.[47]
음악적으로는 러브송이나 에로틱한 내용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풍자, 반전, 일본에 대한 애정, 세계 평화 등의 메시지를 담은 곡들도 다수 발표했다.[22] 쿠와타 케이스케 특유의 창법이 특징으로 꼽히지만[22], 일본어의 와비 사비 감각을 담아내려는 의지를 보이며[48], 다양한 스타일의 곡을 발표해왔다.[22][49][50] 쿠와타는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어를 더욱 소중히 다루게 되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51]
또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부흥 지원 자선송 "Let's try again" 참여[22] 및 앨범 수익금 기부 등 음악 활동을 통한 사회 공헌에도 힘쓰고 있다.[52][53][54]
3. 1. 결성 및 초기 활동 (1974년 ~ 1978년)

1974년,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의 음악 동아리 "Better Days" 소속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쿠와타 케이스케가 밴드의 전신을 결성했다. 초기에는 "온천 안마 모모히키 밴드", "피스톤 쿠와타 앤 더 실린더스", "쿠와타 케이스케 앤 더 히치콕 게키조" 등 밴드 이름을 자주 변경했다.[311][312] 1975년, 오모리 타카시와 하라 유코가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에 입학하여 같은 동아리에 가입했고, 키보디스트 하라 유코가 합류하면서 밴드 이름은 "아오가쿠 도미노스", "뇌졸중", "쿠와타 케이스케와 히치콕 극장" 등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다.[311][312] 최종적으로 쿠와타의 친구 미야지 준이치가 닐 영의 앨범 『애프터 더 골드 러시』에 수록된 곡 '서던 맨'(Southern Maneng)과 라디오에서 들은 파니아 올스타즈의 일본 공연 광고에서 영감을 받아 "사잔 올 스타즈"라는 이름을 제안했고, 이것이 밴드의 정식 명칭이 되었다.[91][311][312]
여러 차례 멤버 교체를 거친 후, 1977년 3월 쿠와타, 오모리, 하라, 세키구치 카즈유키, 마츠다 히로시의 구성으로 야마하가 주최한 아마추어 음악 경연 대회 "야마하 이스트웨스트 '77"에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쿠와타는 최우수 보컬상을 수상했다. 대회 본선 직후, 오모리의 권유로 퍼커셔니스트 노자와 히데유키가 합류하여 현재의 6인조 구성이 갖춰졌다.[311][312][315][316][317] 당시 멤버 대부분은 시모키타자와 로프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영업 종료 후 가게 안에서 연습을 이어갔다.[318]
레코드 회사는 빅터 음악 산업으로 결정되었지만, 연예 기획사는 신생 회사였던 아뮤즈와 계약을 맺었다. 아뮤즈의 사장 오사토 요시키치는 빅터의 디렉터 타카가키 켄이 가져온 데모 테이프를 듣고 연습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캇테니 신드바드"를 듣고 계약을 결정했다고 밝혔다.[320] 한편, 버닝 프로덕션 사장 스오 후미오는 자신이 먼저 사잔을 발굴하여 호리프로 계열 기획사로부터 5000만엔에 권리를 사들인 뒤 아뮤즈에 소개했다고 주장하며, 이 때문에 초기 5곡("캇테니 신드바드"부터 "이토시노 엘리"까지)의 판권은 버닝 퍼블리셔즈가 소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321] 데뷔를 준비하던 중, 멤버 전원이 다른 레코드 회사의 계약서에 서명하는 해프닝이 있었으나 빅터 관계자들이 나서서 수습했다.[322] 당시 쿠와타는 아직 리더는 아니었지만, 멤버 전원이 대졸 초임 수준의 연봉을 받을 수 있도록 소속사와 협상했다.[323]
1978년 6월 25일, 데뷔 싱글 "캇테니 신드바드"가 빅터에서 메이저 데뷔를 했다.[324] 곡 제목은 당시 일본에서 크게 히트했던 사와다 켄지의 "Katte ni Shiyagare"와 핑크 레이디의 "Nagisa no Sindbad"에서 따온 것이다. 발매일은 공교롭게도 사와다 켄지의 29번째 생일이었다. 사잔 올 스타즈는 이 곡을 홍보하기 위해 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독특한 의상과 기이한 퍼포먼스는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329] 특히 쿠와타 특유의 일본어를 영어처럼 굴려서 부르는 듯한 창법은 음악 팬들과 관계자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며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330] "캇테니 신드바드"는 점차 인기를 얻어 같은 해 가을 오리콘 싱글 차트에서 3위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329]
같은 해 8월에는 첫 번째 정규 앨범 ''뜨거운 가슴 설렘''을 발매했다.[325][326] 또한 8월에는 인기 음악 프로그램 『더 베스트텐』의 스포트라이트 코너에 처음 출연하여 "주목받고 싶어하는 연예인입니다"라고 발언하며 인지도를 높였다.[327][328] (이 발언은 나중에 대본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329]) 11월에는 두 번째 싱글 "기분에 따라 꾸짖지 말아줘"를 발표했고, 같은 해 12월부터 1979년 1월까지 첫 공식 콘서트 투어 "가슴 설렘"을 개최했다.[331] 데뷔 초기의 파격적인 모습 때문에 일각에서는 이들을 노벨티 송 밴드나 일회성 인기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333]
3. 2. 1980년대: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성장
1980년, 밴드는 매달 싱글을 발매하는 '파이브 록 쇼(FIVE ROCK SHOW)' 연작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나, 홍보 부족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339][340] 하지만 1970년대 후반 싱글들의 인기에 힘입어 팬덤은 견고했고, 앨범 판매량은 높았다. 같은 해 3월 발매된 세 번째 정규 앨범 『타이니 버블스』는 밴드 최초로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했으며[329][342], 이후 발매된 모든 정규 앨범이 연속으로 1위에 오르는 기록의 시작이 되었다. 이 앨범에는 멤버 하라 유코가 보컬을 맡은 '나는 피아노'와 마츠다 히로시의 '마츠다의 자장가(松田の子守唄)'가 수록되었는데, 특히 '나는 피아노'는 같은 해 가수 다카다 미즈에가 리메이크하여 10위권에 드는 히트를 기록했다. 1980년 11월에는 첫 양 A면 싱글인 '샤・라・라/고멘네 찰리'가 발매되었다.[343] 1981년 7월에는 4번째 앨범 『스테레오 태양족』이 발매되었다.[344]1982년 1월 24일, 밴드는 14번째 싱글 차코의 해안 이야기를 발매했다. 쿠와타 케이스케는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이 곡을 전형적인 일본 가요 스타일로 작곡했으며, 당시 인기 아이돌 가수였던 타하라 토시히코의 발음을 흉내 내기도 했다. 이는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어 이토시노 엘리 이후 밴드의 가장 큰 히트 싱글이 되었다.[329] 싱글의 인기에 힘입어 같은 해 7월 발매된 다섯 번째 정규 앨범 『NUDE MAN』은 당시까지 밴드 앨범 중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며 밀리언 셀러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고[389], 오리콘 연간 앨범 차트 3위를 기록했으며, 최종적으로는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앨범 수록곡 '여름을 단념하고(夏をあきらめて)'는 같은 해 가수 켄 나오코가 커버하여 30만 장 이상 판매되는 히트를 기록했다. 차코의 해안 이야기 히트 후, 쿠와타는 26번째 생일에 멤버 하라 유코와 결혼했으며, 결혼식에는 팬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10월에는 16번째 싱글 Ya Ya (그 시절을 잊지 않아)가, 12월에는 이 곡을 포함한 발라드 곡 중심의 첫 번째 베스트 앨범 『발라드 '77〜'82』가 발매되었다.[346] 연말에는 두 번째로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는데[347], 이때 쿠와타가 미나미 하루오를 패러디한 퍼포먼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347][348]
한편, 쿠와타는 활동 기간 동안 에로틱한 표현을 자주 사용했는데, 1981년 하라 유코의 첫 솔로 싱글로 발매된 쿠와타 작곡의 'I Love You는 혼잣말(I Love Youはひとりごと)'은 가사에 포함된 '모텔'이라는 단어 때문에 방송 금지를 당하기도 했으며, 1983년 발매된 싱글 'Body Special II'의 앨범 커버에는 상반신을 노출한 여성의 가슴 사진이 사용되어 논란이 되었다.
1983년에는 앨범 『Kirei』, 1984년에는 앨범 『인기인이 되자』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들은 성인 취향의 록 음악을 주로 담고 있었으며, 특히 『인기인이 되자』에 수록된 히트 싱글 미스 브랜뉴 데이는 밴드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38]
1985년에는 더블 앨범 『KAMAKURA』를 발매했는데, 이 앨범은 현재까지도 밴드의 최고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코미디언 아카시야 산마가 출연한 TV 광고 등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졌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해체설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녹음 과정에서 쿠와타와 베이시스트 세키구치 카즈유키 사이에 갈등이 있었으며, 1,800시간 이상이 소요될 정도로 작업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앨범은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히트곡 Bye Bye My Love (U are the one)도 발표되었다.[39] 또한, 하라 유코의 임신으로 밴드는 이 앨범 발매 후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
1986년부터 멤버들은 각자 솔로 활동에 들어갔으며, 쿠와타는 쿠와타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1987년, 쿠와타는 코바야시 타케시가 프로듀스 및 편곡한 싱글 '슬픈 기분 (Just a Man in Love)'으로 솔로 데뷔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코바야시와의 협력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코바야시는 이후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사잔 올 스타즈의 많은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1988년 6월 25일, 데뷔 10주년을 맞은 사잔 올 스타즈는 코바야시 타케시가 프로듀스한 싱글 모두의 노래를 발표하며 그룹 활동을 재개했다. 1989년 발매된 싱글 안녕 베이비는 밴드 최초로 오리콘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발매된 4CD 박스 세트 컴필레이션 앨범 『수이카』 역시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앨범 차트 1위에 오르며 3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 이로써 사잔 올 스타즈는 1980년대에도 꾸준한 활동과 히트곡을 통해 일본 음악계 최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3. 3. 1990년대: 전성기와 밀리언셀러
1990년대는 일본 음악 산업이 다른 시대보다 더욱 번성했던 시기였다. 사잔 올 스타즈는 이 시기에도 상업적인 성공을 이어가며 일본 대중음악의 주류 그룹 중 하나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대표적인 밀리언셀러 싱글로는 "涙のキッス"(154.9만 장), "EROTICA SEVEN"(174.3만 장), "愛の言霊 〜Spiritual Message〜"(139.6만 장) 등이 있다.[41]1990년, 쿠와타는 영화 ''이나무라 제인''을 감독했다. 영화 자체는 평가는 좋지 않았지만, 사운드트랙은 일본 차트 1위를 기록하고 100만 장 이상 판매되어 큰 성공을 거뒀으며,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일본 사운드트랙 앨범 중 하나가 되었다. 쿠와타가 작곡한 "한여름의 과실"은 리드 싱글로 발매되어 차트 상위 5위 안에 들었다.[40] 이 곡은 1991년 홍콩 가수 장학우가 중국어로 리메이크해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고, 이후 아시아와 유럽 등지에서 수십 개의 커버 버전이 나왔다. 사운드트랙에는 또 다른 대표곡인 "希望の轍"(희망의 바퀴)도 수록되었는데, 앨범 수록곡임에도 불구하고 사잔 올 스타즈의 중요한 곡 중 하나로 널리 알려졌다. 같은 해, 동명의 정규 앨범 ''Southern All Stars''를 발매했고, 이 앨범 역시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1991년, 베이시스트 세키구치 카즈유키는 건강 문제로 잠시 밴드를 떠났다가 1995년에 복귀했다. 1992년, 나머지 멤버들은 싱글 "Shulaba-La-Bamba"와 "涙のキッス"를 동시에 발매했다. 후자인 "涙のキッス"는 오리콘 싱글 차트에서 7주 동안 1위를 차지하고 150만 장 이상 판매되며 밴드 최초의 밀리언셀러 싱글이 되었다.[41] 이 곡은 1992년 일본 연간 싱글 차트 5위 안에 들었다. 이 성공적인 싱글 발매 두 달 후, 10번째 정규 앨범 ''世に万葉の花が咲くなり''가 발매되었다. 쿠와타는 처음에는 이 앨범을 더블 앨범으로 구상했으나, 최종적으로는 1991년 1위 히트 싱글 "Neo Bravo!!"를 포함한 일부 곡을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이 앨범은 약 180만 장 판매되었다.
1993년에는 "Z-Dan"이라는 가명 프로젝트로 리믹스 EP ''Enoshima''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90만 장 이상 판매되었고, 제8회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에서 '올해의 컴필레이션 앨범' 상을 받았다. 같은 해, 밴드는 두 번째 밀리언셀러 싱글 "EROTICA SEVEN"을 발매했다.[41] 또한 연말 곡인 "Christmas Love (涙のあとには白い雪が降る)"를 싱글로 발매했으며, 이 곡을 마지막으로 코바야시 타케시와의 공동 작업은 일단 마무리되었다.[362] 쿠와타는 코바야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밴드 멤버 외의 인물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362][376]
1994년 한 해 동안 쿠와타는 솔로 활동에 집중했고, 사잔 올 스타즈는 새로운 음반을 발매하지 않았다. 그해 12월 일본 무도관에서 열린 Act Against AIDS(AAA) 이벤트에 사잔이 출연하며 세키구치가 복귀하여 오랜만에 멤버 6명이 함께 무대에 섰다.[377]
1995년 5월, 밴드는 싱글 "만피의 G★SPOT"을 발매하며 6인조로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6월에는 수량 한정 박스 세트 앨범 ''HAPPY!''가 발매되어 2일 만에 70만 장이 완판되었다. 7월에는 후지 TV 드라마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어''의 주제가로 사용된 싱글 "너만을 〜Summer Heartbreak〜"를 발매하여 "EROTICA SEVEN" 이후 약 2년 만에 세 번째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389][378] 쿠와타는 후에 이 곡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 중 하나로 언급하기도 했다. 8월에는 요코하마에서 이틀간의 라이브 ''반딧불이 캘리포니아''를 개최했으며, 사이조 히데키가 게스트로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다.[379] 또한, 쿠와타는 Mr. Children과 함께 자선 싱글 "奇跡の地球"을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96년에는 싱글 "사랑의 언령 〜Spiritual Message〜"와 "太陽は罪な奴"를 발매했으며, 전자는 155만 장 이상 판매되며 네 번째 밀리언셀러 싱글이 되었다.[41][380][381] 이 곡들을 포함하여 클래식 록 스타일을 도입한 12번째 정규 앨범 ''Young Love''는 250만 장 가까이 판매되어 1996년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가 되었으며, 현재까지 밴드의 가장 성공적인 정규 앨범으로 남아 있다.[389] 앨범 발매 후 전국 투어와 연말 라이브를 개최했다.[382]
1997년에는 곧바로 13번째 앨범 ''벚꽃'' 제작에 착수하여 당시 유행하던 디지털 록 요소를 융합하는 등 현대적인 사운드를 시도했다.[383] 8월에는 싱글 "01MESSENGER 〜전자광의 시〜", 11월에는 싱글 "BLUE HEAVEN"을 발매했고, 12월에는 연말 라이브를 개최했다.[384]
1998년 2월에는 싱글 "LOVE AFFAIR 〜비밀의 데이트"를 발매했다. 데뷔 20주년을 맞이한 6월 25일에는 베스트 앨범 ''바다의 Yeah!!''를 발매하여 누적 판매량 480만 장을 기록, 밴드 자체 최고 히트작이 되었다.[380][385] 8월에는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의 나기사엔에서 이틀간의 대규모 야외 라이브 ''슈퍼 라이브 in 나기사엔 "모로다시 축제"''를 개최했다. 10월에는 전년도부터 작업해 온 앨범 ''벚꽃''을 발매하여 12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380][386]
1999년 3월에는 싱글 "옐로우 맨 〜별의 왕자님〜"을 발매하고, 첫 아레나 및 돔 투어인 ''Se O no Luja na Quites 〜멋진 봄날의 만남〜''을 개최했다. 9월에는 도쿄도 신주쿠구 가부키초에서 시크릿 라이브 '''99 SAS 사건부 in 가부키초''를 열었고,[387] 12월에는 연말 라이브를 개최하며 1990년대를 마무리했다.[382]
3. 4. 2000년대 이후: 활동 중단과 재개, 그리고 현재
2000년 1월 26일, 44번째 싱글 "TSUNAMI"가 발매되었다. 이 곡은 TBS 프로그램 ''운난의 혼토코!''의 코너 ''미래일기 III''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12][388] 싱글 차트에서 5주 동안 1위를 차지했고, 최종적으로 290만 장 이상 판매되어[389] 당시 오리콘 역대 싱글 판매량 3위를 기록했다.[549] 이 곡으로 제42회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390], 사잔 올 스타즈가 국민적 밴드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391] 8월에는 쿠와타의 고향인 지가사키시 주민들의 서명 운동[392]으로 지가사키 라이브가 개최되었고,[393] 라이브에 맞춰 발매된 45번째 싱글 "HOTEL PACIFIC"도 8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389][394] 11월에는 46번째 싱글 "이 푸른 하늘, 초록 〜BLUE IN GREEN〜"과 발라드 베스트 앨범 3탄 『발라드 3 〜the album of LOVE〜』가 발매되었는데, 앨범은 290만 장 이상 판매되며 발라드 시리즈 중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395][389]"TSUNAMI"의 큰 성공 이후, 밴드는 활동에 더욱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2000년 콘서트 투어 후 기타리스트 오모리 타카시가 활동 중단을 발표했고, 2001년 8월 공식적으로 밴드를 탈퇴했다.[88] 오모리 부부가 독실한 창가학회 신도라는 점 때문에 멤버 간 종교적 갈등이 원인이 아니냐는 추측이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제기되기도 했다.[13][14] 쿠와타는 이를 "사잔에게 고통을 수반하는 시련, 정신적 구조 개혁"이라고 표현했다.[397] 이후 멤버 보충 없이 5인 체제로 활동하게 되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멤버들은 밴드의 발전을 위해 각자 솔로 활동에 집중했다.[399][88]
2003년 6월 25일, 데뷔 25주년을 맞아 데뷔 싱글 복각반 CD 「캇테니 신드바드 가슴 설레는 스페셜 박스」를 발매하여 25년 만에 오리콘 주간 랭킹 1위를 차지했다.[398] 7월에는 47번째 싱글 「눈물의 바다에서 안기고 싶어 〜SEA OF LOVE〜」를 발매하고 대규모 야외·스타디움 투어를 개최하며 그룹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399][43] 2004년에는 싱글 「아야 〜Aja〜」, 「키미코소 스타다/유메니 키에타 줄리아」, 「아이토 요쿠보노 히비/LONELY WOMAN」 3곡을 연달아 발매하여 모두 오리콘 1위를 기록했다.[399][400]
2005년 6월, 데뷔 싱글부터 "TSUNAMI"까지의 싱글 44곡을 12cm CD로 재발매했는데, 7월 4일자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00위 안에 44곡 전부가 진입하는 진기록을 세웠다.[401] 8월에는 ROCK IN JAPAN FESTIVAL에 처음 출연했고,[402] 10월에는 14번째 정규 앨범 『킬러 스트리트』를 발매하여 110만 장 이상 판매고를 올리며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389][399] 이후 두 번째 돔 투어를 개최했다.[399] 2006년 8월에는 52번째 싱글 「DIRTY OLD MAN 〜안녕 여름이여〜」를 발매했다.[399] 2007년 1월에는 빅터 엔터테인먼트와 아뮤즈가 합작하여 사잔 및 멤버 솔로 활동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회사 타이시타 레이블 뮤직을 설립했다.[403]
2008년 5월 19일, 데뷔 30주년을 맞아 53번째 싱글 "I AM YOUR SINGER" 발매와 기념 라이브 개최를 발표하는 동시에, 2009년부터 멤버 각자의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위해 그룹 활동을 무기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404][405] 이 발표는 큰 파장을 일으켜 소속사 아뮤즈의 주가가 폭락하는 등 "사잔 쇼크"로 불렸으며,[406][407] 일부 언론의 '해산설' 보도에 대해 쿠와타는 라디오를 통해 "해산은 절대 없다"고 직접 부인했다.[22][409]
활동 중단 기간 동안 멤버들은 솔로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쿠와타는 2010년 식도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기도 했다.[22]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발생 후에는 피해 지역 부흥 지원을 위해 결성된 프로젝트 그룹 팀 아뮤즈!!에 멤버 전원이 참여하여 자선 싱글 "Let's try again"을 발표했고,[22][412] 쿠와타는 개인적으로도 미야기현에서 부흥 지원 라이브(미야기 라이브 〜내일을 향한 행진!!〜)를 개최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52][53][54][413] 이러한 경험들과 더불어 35주년을 계기로 팬들과 함께 즐기자는 멤버들의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활동 재개로 이어졌다.[22][410][411]
데뷔 35주년인 2013년 6월 25일, 5년간의 공백을 깨고 활동 재개를 공식 발표했다.[414] 8월에 발매된 54번째 싱글 「피스와 하이라이트」는 오리콘 1위를 차지하며,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걸쳐 4개의 연대(decade)에서 싱글 1위를 기록한 최초의 일본 그룹이 되었다.[546] 같은 해 여름 전국 투어를 개최했고, 투어 영상 작품 역시 4개 연대 1위라는 기록을 세웠다.[415] 2014년 9월에는 55번째 싱글 「도쿄 VICTORY」를 발매했고,[45] 12월에는 사잔 올 스타즈의 전곡(당시 266곡)이 아이튠즈 스토어 등 주요 음원 사이트를 통해 전 세계 111개국에 디지털 음원으로 발매되기 시작했다.[416] 연말에는 31년 만에 NHK 홍백가합전에 출연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417]
2015년 3월, 약 10년 만의 정규 앨범인 15집 『포도』를 발매하여[551] 앨범 차트에서도 4개 연대 1위를 달성했다.[418] 4월부터 8월까지 대규모 전국 투어 『맛있는 포도 여행』을 개최했다.[419] 2016년과 2017년에는 그룹 명의의 신곡 발표나 라이브는 없었지만,[417] 멤버 전원이 미츠야 사이다 광고에 출연했다.[420]
데뷔 40주년을 맞이한 2018년에는 6월과 7월에 각각 디지털 싱글 「싸우는 전사들에게 사랑을 담아서」와 「장년 JUMP」를 발표했다.[421][422] 8월에는 베스트 앨범 『바다의 Oh, Yeah!!』를 발매하여 오리콘 주간 1위를 차지, 데뷔 40년 이상 활동한 그룹 최초의 1위 기록을 세웠다.[423][551] 같은 달, 13년 만에 ROCK IN JAPAN FESTIVAL 무대에 섰으며,[22] 연말에는 제69회 NHK 홍백가합전에 특별 출연하여 「희망의 행로」와 「캇테니 신드바드」를 부르며 쇼의 대미를 장식, 해당 방송 최고 시청률(45.3%)을 기록했다.[425][426][427][428]
2019년에는 3월부터 6월까지 6대 돔을 포함한 전국 투어 『“너는 꼴이 엉망이니까, 바보처럼 마이크를 잡고 있어!!”라고!? 웃기지 마!!』를 개최했고,[423] 투어에서 선보인 신곡 「사랑은 천천히 조금씩」을 8월에 디지털 싱글로 발매했다.[429] 12월에는 사잔 및 멤버 솔로곡을 포함한 총 972곡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다.[430]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공연계가 위축되자, "Keep Smilin’〜“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이라는 슬로건 아래 데뷔 42주년인 6월 25일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무관객 온라인 라이브 『Keep Smilin’〜여러분, 감사합니다!!〜』를 개최했다.[431] 이 라이브는 팬들과 스태프, 의료진에 대한 감사를 주제로 했으며, 철저한 방역 수칙 하에 진행되었다.[436][432][433][434] 약 18만 장의 티켓이 판매되어 50만 명 이상이 시청한 것으로 추산되며, 수익금 일부는 의료기관에 기부되었다.[435][436] 연말에도 사전 녹화 방식의 무관객 라이브를 개최했다.[437]
2021년과 2022년에는 그룹 활동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으나, 공식적인 활동 휴지 발표는 없었다.[438][439]
데뷔 45주년인 2023년 6월 24일, 쿠와타는 자신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7월부터 3개월 연속 신곡 디지털 발매와 가을에 10년 만의 지가사키 공원 야구장 라이브 『지가사키 라이브 2023』 개최를 발표했다.[440][441] 신곡 「봉오도리 연가」, 「노래하라 일본의 하늘」 등에는 고향과 일본에 대한 애정이 담겼다.[440][442] 9월 말과 10월 초에 열린 지가사키 라이브는 4일간 7만 2천 명을 동원했고, 전국 영화관 라이브 뷰잉을 포함해 총 27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444] 이 공연의 경제 파급 효과는 전국적으로 약 179.57억엔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445] 45주년 당일인 6월 25일에는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과거 라이브 영상을 편집한 특별 방송을 진행했는데, 동시 접속자 수 18만 명을 넘기며 큰 호응을 얻었다.[446][447]
2024년에는 신곡 「사랑의 부기우기 나이트」와 「잔 다르크에게 잘 부탁해」를 발표했다.[448] 9월 23일에는 마지막 여름 페스티벌 출연으로 ROCK IN JAPAN FESTIVAL에 참가했다.[449] 2025년 3월 발매 예정인 새 정규 앨범 『THANK YOU SO MUCH』와 1월부터 시작되는 동명의 전국 투어 계획을 발표했다.[450]
4. 음악성
1978년에 데뷔한 이래 30여 년 동안 일본 음악계의 선두에 서 있는 밴드이다. 록, 발라드, 민족 음악, 향토 음악, 테크노, 디지털 록 등 매우 폭넓은 장르의 음악을 선보이며, 가사 또한 사랑, 섹스, 고향에 대한 애정, 유머, 사회 풍자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룬다. 이러한 폭넓은 음악 스펙트럼 덕분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두터운 팬층을 확보하고 있으며, 각계의 유명 인사 중에서도 사잔 올 스타즈의 팬임을 공언하는 사람이 많다.
대표곡으로는 1970년대 '멋대로 신밧드'(勝手にシンドバッド, 51.6만 장), '사랑스러운 엘리'(いとしのエリー, 72.9만 장), 1980년대 'チャコの海岸物語'(58.5만 장), '미스 브랜뉴 데이'(MISS BRAND-NEW DAY, 30.3만 장), 1990년대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눈물의 키스'(涙のキッス, 154.9만 장), '에로티카 세븐'(EROTICA SEVEN, 174.3만 장), '사랑의 언령 ~Spiritual Message~'(愛の言霊~Spiritual Message~, 139.6만 장) 등이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TSUNAMI'(293.6만 장)가 더블 밀리언셀러를 달성했고, '涙の海で抱かれたい~SEA OF LOVE~'(74.2만 장), 'I AM YOUR SINGER'(52만 장), 2010년대 '피스와 하이라이트'(ピースとハイライト, 35만 장) 등 꾸준히 히트곡을 발표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걸쳐 4개의 다른 연대에서 오리콘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4. 1. 주요 작품
사잔 올 스타즈의 악곡은 일반적으로 록적인 색채가 강한 것, 팝스, 발라드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하드 록, 힙합, 재즈, 레게[97], 라틴[98], 펑크[98], 일렉트로, 포크, 민족 음악, 향토 음악, 가요, 응원가[99], 코믹송[100] 등 매우 폭넓은 장르를 아우른다. 이러한 다양성은 리더인 쿠와타 케이스케가 매너리즘을 싫어하는 성향에서 비롯된다[22]는 평가가 있다. 때로는 마츠다가 "생각지도 못한 악곡"이나 "의외의 악곡"이라고 표현할 만큼 실험적인 시도도 이루어지며, 이러한 "자신의 틀을 깨나가는 혁신성"이 사잔의 매력으로 꼽힌다[138]。 하드 록 풍의 곡을 만들 때는 단순히 강렬하게 연주하는 것을 넘어, 약간의 유머를 가미하는 것을 "사잔의 록에 대한 매너"라고 쿠와타는 설명한다[139]。
악곡의 소재 역시 다양하다. 초기에는 바다[101]("차코의 해안 이야기", "바다" 등[101][102])나 여름[103]("한여름의 과실", "TSUNAMI" 등[103])을 주제로 한 곡이나 연애를 다룬 곡[104]이 많았지만, 점차 봄("채 ~Aja~"[105]), 가을("NEVER FALL IN LOVE AGAIN"[106]), 겨울("샤·라·라", "크리스마스 러브 (눈물 뒤에는 하얀 눈이 내린다)", "LONELY WOMAN"[107][108][109]) 등 다른 계절을 묘사하거나[112][113], 한 곡 안에서 사계절을 모두 담아내기도 한다("토리앙세", "싫은 일 투성이 세상에서"[110][111]). 그 외에도 정사("LOVE AFFAIR ~비밀 데이트"[114]), 섹스[115], 여성기, 성인 비디오("여신들에게 바치는 정가 (보도되지 않는 Y형의 저편으로)"[116]), 생리("사랑하는 먼슬리 데이"[97]), 고교 시절("석양에 작별을 고하고 ~ 회전목마"[117]), 대학 시절("Ya Ya (그 시절을 잊지 않아)"[19]), 아이돌("장년 JUMP", "DING DONG (나만의 아이돌)"[281][118]), 크리스마스("CHRISTMAS TIME FOREVER", "크리스마스 러브 (눈물 뒤에는 하얀 눈이 내린다)"[118][22]), 올림픽("너야말로 스타다", "도쿄 VICTORY"[119][120]), 일본에 대한 사랑[22]("피스와 하이라이트", "도쿄 VICTORY"[121][122]), 향토애, 교토("싫은 일 투성이 세상에서"[126]), 오키나와("나치카사누 사랑 노래", "평화의 류카", "신의 섬 아득한 나라"[127][128][129]), 세계 평화[22], 반전("네오 브라보!!"[130]), 시사 문제("Missing Persons"[131]), 사회 풍자, 유머, 하나모게라("마이 페라 레이디", "파리의 추태"[132][133]), 네오 재패니스크[135](새로운 일본 양식[134]), 서스펜스[145], 죽음("살인의 키스 ~Kiss Me Good-Bye~", "와카레"[136][137]) 등 실로 다양한 테마를 의욕적으로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곡은 쿠와타가 멜로디와 사운드를 먼저 만드는 곡 선행 방식으로 제작된다[140]。 쿠와타가 곡의 기초나 핵심 단어를 구상해 오면, 스튜디오에서 멤버, 서포트 뮤지션, 스태프, 엔지니어 등과 함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가이드 보컬과 반주를 녹음한다. 이 과정과 병행하여 쿠와타가 작사를 진행하고, 노래를 녹음한 뒤 세부적인 어레인지 작업을 거쳐 곡을 완성한다[141][142][143]。 곡의 도입부(인트로)는 주로 쿠와타가 만들지만, 하라가 참여하거나 처음부터 하라가 만드는 경우("바다", "미스·브랜뉴·데이" 등)도 있다[144]。 때로는 쿠와타가 세키구치 대신 베이스를 연주하거나[145], 세키구치가 만든 베이스 프레이즈를 뮤직 시퀀서로 입력하기도 한다[145][146]。 최근에는 라이브 공연을 염두에 두고 곡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과거에는 너무 완벽하게 만들어 라이브에서 재현하기 어려운 곡도 있었다고 쿠와타는 말한다[22]。
초기에는 가사에 대해 "의미는 아무래도 좋다", "요리로 치면 접시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22], 활동을 이어가며 팬들의 반응[148]과 서포트 뮤지션(고바야시 타케시, 오구라 히로카즈 등)의 영향을 받아 가사의 중요성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149]。 1990년대부터는 불교 용어나 숙어가 가사에 등장하기 시작했으며[150], 서양 음악의 영향으로 1980년대에는 영어 가사로만 된 곡("달려라!! 도쿄 타운"[151], "Tarako", "Japaneggae (Sentimental)"[152] 등)도 있었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영어를 줄이고 일본어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졌다[153]。 최근(2021년 기준)에는 "가능한 한 평이한 단어를 선택하여, 솔직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는 가사, 다가가 함께 걷는 듯한 템포감으로, 상냥함과 힘이 넘치는 작풍"이라는 평가를 받는다[154]。 쿠와타는 작사를 위해 철저한 사전 조사를 하며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는데, 이것이 곡의 아이디어로 이어진다고 노자와는 말한다[155]。 가사는 관련 인물이나 전문가에게 취재하여 쓰기도 하고[156], 거의 상상만으로 쓰기도 한다[157]。 가사 속 화자가 쿠와타 자신과는 다른 인물이나 페르소나[158]로 설정되는 경우도 많다[159]。 멜로디나 음절 배분을 우선하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어색하거나[160], 착각해서 쓴 가사가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며[22][22], 스태프가 수정을 제안해도 부르기 편하다는 등의 이유로 쿠와타의 의향에 따라 그대로 남는 경우가 많다[22][161]。

사잔의 레코딩은 주로 빅터 스튜디오의 "401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다[162]。 1992년경부터는 쿠와타의 자택에 마련된 "고양이에게 돈(猫に小判) 스튜디오"에서도 멤버들이 모여 곡 작업을 하기도 한다[163][164]。 레코딩 장비로는 마이크는 U-47, 컴프레서는 GML8900, 이퀄라이저도 GML 제품을 사용한다[165]。
대부분의 곡은 쿠와타가 작사, 작곡, 가창하지만, 세키구치("호리박에서 콩이 나온다"[166]), 마츠다("그대에게 보내는 LOVE SONG"[167]), 하라("스케치북"[168]), 오모리("LOVE SICK CHICKEN"[169]) 등 다른 멤버가 제작하거나 가창한 곡도 일부 있다. 특히 쿠와타가 곡을 쓰고 하라가 부른 곡("나는 피아노", "흐르는 구름을 쫓아서", "그런 히로시에게 속아서", "비누", "가마쿠라 이야기", "나치카사누 사랑 노래", "포칸포칸하고 비가 내린다 (레이니 나이트 인 블루)", "사랑의 노래를 부릅시다", "당나라 이야기 (라샤멘의 노래)", "산은 옛날 그대로", "리본의 기사", "인생의 산책길", "와인 잔에 사라진 사랑", "기타카마쿠라의 추억" 등[170][171][172][173][174][175][176][177][178][179][180][22][181][182])이 다수 존재하며[183], 쿠와타는 "사잔의 앨범에는 하라보(하라 유코의 애칭)가 보컬을 맡는 곡이 절대로 빠질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184]。 멤버 전원이 함께 만들거나("블루스로 어서 오세요"[185], "삿포"[186]), 멤버끼리 공동 작업한 곡(세키구치와 하라의 "차이나 문과 비픈 아가씨"[187], 쿠와타와 하라의 "인생의 산책길"[188] 등)도 있다.
=== 주요 테마 ===
==== 일본에 대한 사랑·국민을 향한 응원 ====
쿠와타의 고향인 가나가와현지치부시나 그 주변 지역은 "가마쿠라를 등지고", "라치엔 거리의 시스터", "HOTEL PACIFIC", "희망의 궤적", "멋대로 신밧드", "차코의 해안 이야기", "비가 그치고 다시 한번 키스를 하고", "8월의 시 (세레나데)", "노래해 일본의 하늘" 등 많은 곡의 배경이 되었다[193][194][195][22][196][197][198][22]。 특히 "노래해 일본의 하늘"은 2023년 지치부시에서 열린 라이브의 테마송으로 사용되었고, 쿠와타는 이 곡을 부르기 전 "여기(지치부시)에서 태어나서 좋았다는, 정말 사소한 신곡을 부르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199]。
단순히 고향뿐만 아니라, "도쿄 VICTORY"에서는 일장기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동일본 대지진을 비롯한 재해에 대한 염려, 미래를 향한 희망을 담은 가사가 등장한다[200][201]。 이 곡과 "노래해 일본의 하늘" 등에는 자신의 고향이나 멀리 떨어진 곳을 생각하는 일본인의 마음에 다가가고, 각자의 고향에 대한 생각을 담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204][200][202]。 이처럼 태어나 자란 일본에 대한 애정이나 국민들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를 담은 곡들이 사잔 음악의 특징 중 하나이다[203][204]。 쿠와타는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일본 국민 여러분은 멋지고 상냥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본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평화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희망의 묘목을 심어가자, 지상에 사랑을 심어가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발언한 바 있으며[123][124], 2014년 자수포장 수훈 시에는 "일본이, 그리고 세계가 평화롭기를"이라고 코멘트했다[125]。 2023년에 발표된 "본 기리 사랑 노래", "노래해 일본의 하늘", "Relay〜숲의 시"는 공통적으로 "고향"을 모티브로 한 3부작으로 불리기도 한다[22][205][206][22]。
"너야말로 스타다", "도쿄 VICTORY", "잔 다르크에게 안부를"처럼 올림픽을 의식하고 선수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곡들도 있으며, 실제로 이 곡들에서 용기를 얻었다는 일본 선수들도 많다[207][208][209][210][211]。
이러한 사잔의 음악은 듣는 이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주며 스스로를 고무시키는 힘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211]。 『주간문춘』은 "사잔 사운드가 국민적인 것은 단순히 인기가 높기 때문만이 아니라,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앞을 향하려는 '일본의 현재'가 모든 곡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평했으며[212], 팬을 자처하는 오타 히카루(폭소 문제)는 "쿠와타 케이스케가 얼마나 일본을 밝게 했는가, 얼마나 일본인에게 용기를 주었는가"라고 강조했고[213], 배우 사카이 와카나는 "쿠와타 씨의 목소리와 소리와 말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은 나의 자랑", "어째서 그렇게 사람들을 기운차게 만들 수 있는 걸까, 게다가 일본 전국을, 게다가 이렇게 오랫동안"이라며 극찬했다[214]。
==== 일본풍 ====
쿠와타는 일본어의 정서가 "어떤 면에서 사잔이 하고 있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며, "단어의 의미 자체보다 옛날부터 일본어가 가진 정서, '멋' 같은 것으로 자신의 감성을 직접 표현하고 싶다", "비틀즈나 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역시 일본의 '와비', '사비'의 감각을 음악으로 더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다[215]。 또한 일본적인 것, 평화를 포함한 "화(和)"라는 단어를 좋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216][217]。
메이지 대학 교수인 사이토 타카시는 쿠와타의 가사가 "일본어의 가능성을 최대한 넓히고 있다"고 평가하며, 문어체와 구어체를 섞어 쓰는 것을 큰 특징으로 꼽았다[218]。 쿠와타가 자주 사용하는 아테지(当て字, 한자의 음이나 훈을 빌려 본래의 의미와 다른 말을 표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사이토는 "에도나 메이지 시대에 자주 보이던 표현"이라며 "히라가나는 몸에 스며들고 한자는 머리에 들어오는 것인데,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머리와 몸 양쪽에서 파악하는 효과가 생긴다"고 분석했다[22]。 TOKIO의 나가세 토모야는 "싸우는 전사들에게 사랑을 담아"의 '들러봐 거대 도시(寄っといで デッかい マッチ)'라는 구절에 대해 "그런 건 절대 생각나지 않는다"며 쿠와타의 아테지 센스에 감탄했다[219]。 음악 프로듀서 카메다 세이지는 쿠와타를 "'일본인임'을 최고의 무기로 삼아 음악을 만드는 분"이라 평하며, 가사에 "굉장히 일본적인 키워드를 많이 사용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가진 문화나 일본 민족의 역사 같은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음악의 가사로 녹여내는 것 같다"고 높이 평가했다[220]。 초기 작품의 영문 가사 감수를 맡았던 고바야시 카츠야는 쿠와타를 "일본인의 양악 콤플렉스를 해방시켜준 남자", "메이지나 다이쇼 시대의 문호와 맥이 닿아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221]。
초기 악곡에 등장한 '조이토' 등의 구절은 나가우타나 라쿠고, 에리 치에미가 부른 '사노사' 등의 어감에 영향을 받았다고 쿠와타는 말한다[22]。 "JAPANEGGAE (자파네게에)", "사랑의 영혼 〜Spiritual Message〜", "CRY 슬픔 CRY", "토랸세" 등 고사를 인용한 곡도 존재한다[22][22][222][223]。 11번째 정규 앨범 《세상에 만엽의 꽃이 피어나리》는 특히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대한 경의를 담고 있으며, 수록곡 "모정"의 가사는 이러한 콘셉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224][225]。 쿠와타는 제작 과정에서 《만엽집》을 다시 읽으며 일본어 특유의 정서와 정보량에 흥미를 느끼고, "이 단어를 우리는 없애도 괜찮은 걸까"라는 위기감을 느끼며 의욕적으로 일본어와 마주했다고 한다[22]。 악곡뿐 아니라 라이브 연출이나 상품, DVD 등에도 일본풍 요소를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226]。
==== 화양절충 ====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이나 개그맨 겸 뮤지션 마키타 스포츠 등은 사잔의 멜로디나 코드 진행 등을 화양절충(和洋折衷)이라고 평한다[227][228]。 특히 "JAPANEGGAE (자파네게에)"를 좋아하는 곡으로 꼽는 마츠다는 이러한 화양절충 노선을 "우리 나름의 와모노(和物, 일본풍) 노선이랄까, 양악과 와모노의 절충을 우리는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하며 쿠와타의 곡 밸런스 감각을 높이 평가했다[229]。
일본어 가사를 중시하면서도 일본어와 영어의 절충 또한 쿠와타 가사의 특징이다. "JAPANEGGAE (자파네게에)"의 '아이쿠네바(逢い口)'와 'I could never'[230], "Missing Persons"의 '아칸!!(アカン!!)'과 'I CAN'T'[22]처럼 말장난을 사용하거나, "Brown Cherry"처럼 에로틱한 표현을 영어식으로 하거나[231], "요도미 시들고, 말라 흩날려라"에 나오는 '아이린 부케 쇼(愛倫浮気症)'라는 조어처럼 영어에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의미보다는 영어적인 울림을 우선하며 글자 자체로 이미지를 넓히는 구절도 있다[232]。
쿠와타는 과거에 미스매치 방식, 즉 다소 정형화된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은 꽃처럼 (Olé!)"이나 "LOVE KOREA"처럼 스페인어나 한글 등 이국적인 정취가 있는 모티브를 악곡이나 영상에 도입하기도 했다[233][234][235]。 하지만 이러한 요소가 계기가 되어 쿠와타의 출생이나 사상, 민족적 입장에 관한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했다
5. 사회적 영향
1978년 데뷔 이래 30여 년 동안 일본 음악계의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밴드이다. 록, 발라드, 민족 음악, 향토 음악, 테크노, 디지털 록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사랑, 섹스, 향토애, 유머, 사회 풍자 등 폭넓은 소재를 다룬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폭넓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으며,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중에서도 팬을 자처하는 이들이 많다.
대표곡으로는 1970년대 勝手にシンドバッド|가테니 신도밧도일본어(51.6만 장), いとしのエリー|이토시노 에리일본어(72.9만 장), 1980년대 チャコの海岸物語|자코노 가이간 모노가타리일본어(58.5만 장), MISS BRAND-NEW DAY일본어(30.3만 장), 1990년대에는 涙のキッス|나미다노 키스일본어(154.9만 장), EROTICA SEVEN일본어(174.3만 장), 愛の言霊~Spiritual Message~|아이노 고토다마 ~Spiritual Message~일본어(139.6만 장)등이 밀리언셀러를 달성하였고, 2000년대에 와서도 TSUNAMI일본어(293.6만 장), 涙の海で抱かれたい~SEA OF LOVE~|나미다노 우미데 다카레타이 ~SEA OF LOVE~일본어(74.2만 장), I AM YOUR SINGER일본어(52만 장), ピースとハイライト|피스토 하이라이토일본어(35만장)가 대히트 하였다.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4개 연대에 걸쳐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
; 일본에 대한 사랑·국민을 향한 응원
鎌倉物語|가마쿠라 모노가타리일본어, ラチエン通りのシスター|라치엔도리노 시스터일본어, HOTEL PACIFIC, 희망의 궤적, 멋대로 신밧드, 차코의 해안 이야기, 涙の海で抱かれたい 〜SEA OF LOVE〜#수록곡|雨上がりにもう一度キスをして|아메아가리니 모 이치도 키스오 시테일본어, キラーストリート#Disc 2|八月の詩 (セレナーデ)|하치가츠노 세레나데일본어, 노래해 일본의 하늘 등 많은 곡에서 쿠와타의 고향인 가나가와현 지가사키시와 그 주변 지역이 가사의 배경으로 등장한다[193][194][195][22][196][197][198][22]。 특히 歌えニッポンの空|우타에 닛폰노 소라일본어는 茅ヶ崎ライブ2023|지가사키 라이브 2023일본어의 테마송으로 사용되었고, 라이브에서 쿠와타는 "여기(지가사키)에서 태어나서 좋았다는, 정말 사소한 신곡을 부르게 해주세요"라고 말한 뒤 노래했다[199]。
지가사키 외에도 도쿄 VICTORY에서는 일장기에 대한 존경심과 동일본 대지진을 포함한 재해에 대한 염려, 미래를 향한 희망을 담은 가사가 등장하며[200][201], 이 곡과 歌えニッポンの空|우타에 닛폰노 소라일본어에서는 자신의 고향이나 멀리 떨어진 곳을 생각하는 일본인의 마음에 다가가려는 의도와 국민 각자의 고향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204][200][202]。 이처럼 곡에 따라 일본에 대한 사랑이나 국민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를 담는 것이 특징이다[203][204]。 2023년에 발표된 본 기리 사랑 노래, 歌えニッポンの空|우타에 닛폰노 소라일본어, Relay〜숲의 시는 공통된 테마를 가진 3부작으로 불리며[22], 모두 지가사키나 녹음 장소인 도쿄 아오야마를 배경으로 '고향'을 핵심 키워드로 삼고 있다[205][206][22]。
君こそスターだ/夢に消えたジュリア|君こそスターだ|기미코소 스타다일본어, 도쿄 VICTORY, 잔 다르크에게 안부를처럼 올림픽을 염두에 두고 선수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곡들도 발표했으며, 실제로 이 곡들에서 용기를 얻은 일본 선수들이 많다[207][208][209][210][211]。
사잔 올 스타즈의 곡들은 듣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스스로를 격려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211]。 이 때문에 『주간문춘』은 "사잔 사운드가 국민적인 이유는 단순히 넓은 인기를 자랑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어떻게든 앞을 향하려는, 그런 '일본의 현재'가 모든 곡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으며[212], 팬임을 공언하는 오타 히카루(폭소 문제)는 "쿠와타 케이스케가 얼마나 일본을 밝게 했는가. 얼마나 일본인에게 용기를 주었는가"라고 강조했고[213], 사카이 와카나는 "쿠와타 씨의 목소리와 소리와 말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것은 나의 자랑", "어째서 그렇게 사람들을 기운차게 만들 수 있는 걸까, 게다가 일본 전국을, 게다가 이렇게 오랫동안"이라며 높이 평가했다[214]。
; 일본풍
쿠와타는 일본어의 정서가 "어떤 면에서 사잔이 하고 있는 것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며, "단어의 의미 자체보다 옛날부터 일본어가 가진 정서, '멋' 같은 것으로 자신의 감성을 직접 표현하고 싶다", "비틀즈나 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역시 일본의 '와비', '사비'의 감각을 음악으로 더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215]。 또한 일본적인 것에서 평화를 포함한 "'
교육자이자 메이지 대학 문학부 교수인 사이토 타카시는 쿠와타의 가사에 대해 "일본어의 가능성을 최대한 넓히고 있다"고 평가하며, 문어체와 구어체의 혼용을 특징으로 꼽았다[218]。 쿠와타가 자주 사용하는 아테지(当て字, 단어에 본래 뜻과 다른 한자를 붙여 읽는 방식)에 대해서도 사이토는 "에도나 메이지 시대에 자주 보이던 표현"이라며 "히라가나는 몸에 스며들고, 한자는 이지적이며 머리에 들어온다.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머리와 몸 양쪽에서 파악하는 효과가 생긴다"고 분석했다[22]。 스스로도 작사 작곡을 하는 나가세 토모야는 싸우는 전사들에게 사랑을 담아의 寄ってらっしゃい 巨大都市(デっかいまち)へ|욧테랏샤이 데카이마치에일본어(들러봐 거대 도시로)라는 구절에 대해 "그런 건 절대 생각나지 않아"라고 코멘트하며, 쿠와타의 아테지 센스에 놀라고 있다[219]。 음악 프로듀서 카메다 세이지는, 쿠와타에 대해 "'일본인이다'라는 것을 최고의 무기로 음악을 만들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평하고, 가사에 대해 "굉장히 일본스러운 키워드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가진 문화나 일본 민족의 역사 같은 것을, 쿠와타 씨는 아주 자연스럽게 음악의 가사로 정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등 높이 평가하고 있다[220]。 주로 초기의 작품에서 영문 가사의 감수를 담당했던 고바야시 카츠야는 쿠와타에 대해 "일본인의 양악 콤플렉스를 해방시켜준 남자", "메이지나 다이쇼 시대의 문호와 이어진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221]。
초기의 악곡에 등장한 じょいんと|조인토일본어 등의 구절에 관해서는, 나가우타나 라쿠고나 에리 치에미가 부르는 さのさ|사노사일본어 등의 어감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쿠와타가 말하고 있다[22]。 人気者で行こう#수록곡|JAPANEGGAE (ジャパネゲエ)|자파네게에일본어, 사랑의 영혼 〜Spiritual Message〜, PARADISE (サザンオールスターズの曲)#수록곡|CRY 哀 CRY|크라이 아이 크라이일본어, TSUNAMI|通りゃんせ|토랸세일본어 등 고사를 도입한 악곡도 존재한다[22][22][222][223]。 또한, 11번째 오리지널 앨범 《세상에 만엽의 꽃이 피어나리》는 특히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대한 경의가 담겨 있으며, 특히 수록곡의 世に万葉の花が咲くなり#수록곡|慕情|보조일본어의 가사는 그 콘셉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한다[224][225]。 쿠와타는 제작 과정에서 《만엽집》을 다시 읽고, 일본어 특유의 정서와 정보량의 많음에 흥미를 느끼면서 "이 단어를 우리는 없애도 괜찮은 걸까"라는 위기감을 느끼며, 의욕적으로 일본어와 마주했다[22]。 악곡뿐만 아니라 라이브 연출이나 굿즈・DVD 등에도 일본풍 요소를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226]。
; 화양절충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이나 개그맨이자 뮤지션인 마키타 스포츠처럼 멜로디나 코드 진행 등을 화양절충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많다[227][228]。 특히 JAPANEGGAE (ジャパネゲエ)|자파네게에일본어를 좋아하는 악곡으로 꼽고 있는 마츠다 히로시는 이러한 화양절충 노선을 "우리 나름대로의 와모노(일본풍) 노선이라고 할까, 양악과 와모노의 절충을, 우리는 촌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라고 말하며, 쿠와타의 악곡에 대한 밸런스 잡는 방식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229]。
일본어 가사를 중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본어와 영어의 절충도 쿠와타의 가사의 특징 중 하나이며, JAPANEGGAE (ジャパネゲエ)|자파네게에일본어에서의 逢い(あい)くれば|아이쿠레바일본어와 I could never영어[230]나 葡萄 (アルバム)#수록곡|Missing Persons일본어에서의 アカン!!|아칸!!일본어과 I CAN'T영어 등의 말장난이 사용되거나[22], KAMAKURA#Disc 2|Brown Cherry일본어처럼 에로틱한 표현을 영어식으로 하거나[231], 人気者で行こう#수록곡|よどみ萎え、枯れて舞え|요도미나에, 가레테마에일본어에 나오는 愛輪浮気症(アイリーン・ブーケ・ショウ)|아이린 부케 쇼일본어이라는 조어처럼 영어에 존재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없고, 의미보다 영어적인 울림을 우선시하고, 글자 면으로 이미지를 넓혀가는 구절도 존재한다[232]。
쿠와타는 과거에 미스 매치의 방식이, 다소 정형화된 것과 어긋나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Southern All Stars (アルバム)#수록곡|愛は花のように (Olé!)일본어나 君だけに 〜Summer Heartbreak〜#수록곡|LOVE KOREA일본어처럼 스페인어나 한글 등의 이국적인 정취가 있는 모티브를 악곡이나 영상에 도입한 적도 있다[233][234][235]。 하지만, 이러한 요소가 계기가 되어 출생이나 사상・민족적 입장에 관한 유언비어가 흐르기도 했다[235]。 재일 한국인이 테마인 악곡 LOVE KOREA일본어를 발표했을 때 쿠와타를 재일 한국인으로 여기는 등의 유언비어가 흘렀다[236][235]。 쿠와타는 일본인이며, 2021년의 저서 ポップス歌手の耐えられない軽さ|팝스 가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일본어 속의 하라 유코에 의한 후기 女房の日記|아내의 일기일본어에서 정확한 출생이 기재되어 있다[237]。
; 에로틱
シュラバ★ラ★バンバ|슈라바★라★밤바일본어, エロティカ・セブン|에로티카 세븐일본어, マンピーのG★SPOT|만피노 G★SPOT일본어은 팬이나 식자 등 일부 사이에서 "에로스 3부작"이라고 칭해지는 경우가 있으며[238][239], 또한 Brown Cherry일본어, さくら (サザンオールスターズのアルバム)#수록곡|マイ フェラ レディ|마이 페라 레이디일본어, 涙の海で抱かれたい 〜SEA OF LOVE〜#수록곡|経験II|게이켄 II일본어, BOHBO No.5/神の島遥か国 |BOHBO No.5일본어, 東京VICTORY#수록곡|天国オン・ザ・ビーチ|덴고쿠 온 더 비치일본어등처럼 제목이나 가사에 에로틱한 단어가 포함된 악곡도 많이 존재한다[231][240][241][242]。 이러한 악곡도 조어와 비유, 숨겨진 메시지가 다용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243][244]。 쿠와타는 이러한 에로틱한 악곡을 제작하는 이유에 대해 "음악은, 역시 섹스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중략) 그런 쪽이 솔직하게 가사에 쓰기 쉽죠. 이건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아, 쌓여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웃음)"라고 말하고 있다[22]。 또한, 진지한 악곡이나 아래의 반전이나 사회 풍자가 테마인 악곡으로 앨범이 시리어스해지기 쉬우므로, 에로틱한 작풍의 악곡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밸런스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22]。
쿠와타의 에로틱한 표현에 대해, 사이토 타카시는 "일본인이 명백하게 성을 웅가(謳歌)하고 있던 에도 시대의 문학 작품과 통하는 점이 있다"[245], 도쿠미츠 마사유키는 "쿠와타 씨는 정신적인 '영원한 동정' 같은 점이 좋다", "에로 전개의 곡도 있고, 사소설 같은 아름다운 에로도 있다"[246], 밋츠 망그로브는 "섹스를 동경하고 있는 중학생의 망상 같은 느낌이 가사에 나온다", "생생함이 없다", "이게 생생한 에로였다면, 남녀노소에게 지지받을 리가 없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카야마 유조는 쿠와타에 대해 "정말 좋은 녀석. 마음이 훌륭하니까, 저렇게 음란한 곡을 만들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247]。 카메다 세이지는, 하라 유코의 존재가 쿠와타의 에로틱한 표현의 품격을 올리고 있다고 평가하며, "'쿠와타 씨의 에로는, 귀여운 에로예요. 용서해 주세요, 모두 함께 파티 즐기자!'라는 분위기를, 하라 유코 씨의 존재가 자아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248]。
; 사회 풍자・반전・평화
사회 풍자나 반전 등을 테마로 한 악곡에 대해서는 1982년 발매의 5번째 앨범 《NUDE MAN》 무렵부터 제작되었으며, NUDE_MAN#수록곡|流れる雲を追いかけて|나가레루 구모오 오이카케테일본어, KAMAKURA|Computer Children일본어, 怪物君の空|가이부쓰쿤노 소라일본어, Southern All Stars (アルバム)|政治家|세이지카일본어, 世に万葉の花が咲くなり#수록곡|日本のヒール|니혼노 히루일본어, Young Love#수록곡|汚れた台所|요고레타 다이도코로일본어, 01MESSENGER 〜전자광의 시〜, LOVE AFFAIR 〜秘密のデート#수록곡|私の世紀末カルテ|와타시노 세이키마쓰 카르테일본어, 平和の琉歌 〜Stadium Tour 1996 "ザ・ガールズ 万座ビーチ" in 沖縄〜#平和の琉歌|平和の琉歌|헤이와노 류카일본어, PARADISE일본어, さくら (サザンオールスターズのアルバム)#수록곡|爆笑アイランド|바쿠쇼 아이란도일본어, 피스와 하이라이트, 蛍, 平和の鐘が鳴る|헤이와노 가네가 나루일본어, Missing Persons일본어, 싸우는 전사들에게 사랑을 담아, Relay〜杜の詩|Relay〜모리노 우타일본어 등이 있으며[249][250][251][252][22][22][253][254][255][22][256][257], 내용은 블랙 기업이나 인터넷 사회, 일본 정치의 혼란, 보편적인 평화를 바라는 마음,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문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 메이지 신궁 외원의 재개발 계획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258][22][22][22]。 이러한 테마의 악곡을 제작하는 것에 대해 쿠와타는 "빛을 그리려고 하면, 아무래도 그 반대편에 있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도 그려야 한다"[22], "밝기만 한 노래는 별로 재미없다", "어른이라면 괴로운 일이 많이 있다", "세상이 불안하고 왜곡되어 있으면, 노래도 저절로 왜곡된다고 생각한다"[22], "저도 제 일상이 있으니, 모든 문제에 대해 매일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중략) 다만, 그래도 이상한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우연히 그것이 계기로 음악이 태어났다면, 그걸 노래할 수 없는 공기도, 거기서 노래할 수 없는 저도 저는 싫습니다"[272]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편, 인터뷰에서는 "어려운 일은 잘 모르겠다"라고도 말하고 있다[22]。 SWITCH에 의한 특집에서 "때때로 쿠와타 씨에게는, 잊어서는 안 되는 일, 퇴색시켜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저널한 시점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인터뷰어인 우치다 마사키에게 평해졌을 때, 쿠와타는 "그런 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잘난 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259]。 또한, 쿠와타는 사회 풍자의 면에서는 마키 신지의 만담이나 하나 하지메와 크레이지 캣츠가 출연했던 『어른의 만화』를 좋아했던 점을[22], 반전의 면에서는 비틀즈나 밥 딜런을 계기로 전쟁과 평화를 의식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22]。 음악 평론가 시부야 요이치는, 이러한 테마로 제작한 악곡을 "자신의 말의 메시지로 사회를 바꾸자, 정치에 물러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쿠와타 케이스케도 키요시로도, 노래로 한 동기는 하나, 노래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평하고 있으며, 쿠와타도 이 주장에 찬동하고 있다[22]。
쿠와타는 풍자는 과도하게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예를 들어 직접적으로 '○×반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멋있고 싶고, ○과 × 사이에 다양한 그라데이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260]라는 생각을 말하고 있다. 사실, 쿠와타가 풍자나 반전을 테마로 제작한 악곡은, 단순히 평화를 희구하거나, 세상을 비판하거나, 뒤쳐진 일을 그릴 뿐만 아니라, 악곡에 따라 뒤쳐진 일을 그린 뒤에 긍정적인 가사를 쓰거나[261], 앞서 말한 일본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국민의 생활에 다가가 응원을 보내거나(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2011년에 고베시에서 개최된 라이브에서는 私の世紀末カルテ|와타시노 세이키마쓰 카르테일본어의 개사로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피해자에게 다가가는 가사를 선보였다[262]), 평화로운 바보짓을 하는 자신들에게 자계를 담거나[263], 전사자나 유족의 심정에 다가가거나[22],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나 2009년 위구르 소요 등의 중대한 인권 문제의 피해자의 심정에 다가가거나(특히 납치 문제에 언급한 桑田さんのお仕事 07/08 〜魅惑のAVマリアージュ〜#DVD|漫画ドリーム07|만화 드림 07일본어에서는 "국교 정상화 같은 미담으로 사실을 퇴색시키지 말아줘"[22], 위구르에서의 사건에 언급한 桑田佳祐の音楽寅さん 〜MUSIC TIGER〜#第21回 「最終回・寅さんは永遠に不滅ですスペシャル」|漫画ドリーム09|만화 드림 09일본어에서는 "中华人民共和国|중화인민공화국중국어의 통제와 탄압 아래 눈물 넘치는 민족(타미)", "'신장'이라는 의미('신장'이란 새로운 땅을 의미하는 말이다[264])…이마저도, 이상하잖아!?"라고 노래하고 있다[266])[265][266], 해석을 듣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나[267], 온화한 커뮤니케이션을 호소하는 것도 존재한다[268] 등, 취향을 다듬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과거에는 가사에 과격한 구절을 넣은 적도 있었지만[269], 후년에는 "역시
6. 음반 목록
사잔 올 스타즈는 1978년 데뷔 이후 수많은 히트 싱글과 앨범을 발표하며 일본 대중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데뷔 싱글인 캇테니 신드바드와 첫 정규 앨범 뜨거운 가슴 설렘을 시작으로, 이토시노 엘리, TSUNAMI 등 시대를 대표하는 곡들을 꾸준히 선보였다.[324][325][326][380][22][329][381]
자세한 음반 목록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1. 정규 음반
2008년 12월 3일, 1집부터 13집까지의 정규 음반과 이나무라 제인 사운드트랙이 CD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발매되었다.발매일 | 타이틀 | 의미 | 최고 순위 | 판매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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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 1978년 8월 25일 | 熱い胸さわぎ|아쓰이 무나사와기일본어 | 뜨거운 가슴 두근거림 | ||
2집 | 1979년 4월 5일 | 10ナンバーズ・からっと|텐 넘버즈 가랏토일본어 | 10 Numbers Carat | ||
3집 | 1980년 3월 21일 | 타이니・바블스 タイニイ・バブルス|타이니 바부루스일본어 | Tiny Bubbles | 1위 | |
4집 | 1981년 7월 21일 | 스테레오 태양족 ステレオ太陽族|스테레오 다이요조쿠일본어 | 스테레오 태양족 | 1위 | |
5집 | 1982년 7월 22일 | 누드 맨 NUDE MAN영어 | 1위 | ||
6집 | 1983년 7월 5일 | 키레이 綺麗|기레이일본어 | 아름다움 | 1위 | |
7집 | 1984년 7월 7일 | 인기쟁이로 가자 人気者で行こう|닌키모노데 이코일본어 | 인기인이 되자 | 1위 | |
8집 | 1985년 9월 14일 | 가마쿠라 KAMAKURA영어 | 1위 | ||
9집 | 1990년 1월 13일 | SOUTHERN ALL STARS SOUTHERN ALL STARS영어 | 1위 | ||
10집 | 1992년 9월 26일 | 세상에 만엽의 꽃이 피어나다 世に万葉の花が咲くなり|요니 만요노 하나가 사쿠나리일본어 | 세상에 무수한 꽃들이 피는 모양 | 1위 | 179.4만장 |
11집 | 1996년 7월 20일 | 영 러브 Young Love영어 | 1위 | 249.4만장 | |
12집 | 1998년 10월 21일 | 사쿠라 さくら|사쿠라일본어 | 벚꽃 | 1위 | 96.9만장 |
13집 | 2005년 10월 5일 | 킬러 스트리트 キラーストリート|키라 스토릿토일본어 | Killer Street | 1위 | 113.3만장 |
14집 | 2015년 3월 1일 | 부도 葡萄|부도일본어 | 포도 | 1위 | 54.5만장 |
6. 2. 베스트 음반
발매 연도 | 음반 제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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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 《발라드 77~82》 | ||
1987년 | 《발라드 2 83~86》 | ||
1989년 | 《스이카 SOUTHERN ALL STARS SPECIAL 61SONGS》 | ||
1995년 | 《Happy!》 | ||
1998년 | 《우미노 Yeah | 》 | |
2000년 | 《발라드 3 ~the album of LOVE~》 | ||
2018년 | 《우미노 Oh | Yeah | 》 |
6. 3. 싱글
1978년 데뷔 싱글 '''캇테니 신드바드'''(勝手にシンドバッド)는 50만 장 이상 판매되며 큰 주목을 받았고[329], 이듬해 발표한 '''이토시노 엘리'''(いとしのエリー)는 70만 장 이상 판매되며 밴드의 입지를 굳혔다[380][22][329][381]。 이후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4개의 연대에 걸쳐 오리콘 싱글 차트 1위를 달성하는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90년대에는 '''눈물의 키스'''(涙のキッス), '''EROTICA SEVEN''', '''사랑의 영혼 〜Spiritual Message〜'''(愛の言霊~Spiritual Message~) 등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2000년대에 발표된 '''TSUNAMI'''는 약 293만 장이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발매일 | 타이틀 | 최고순위 | 판매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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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 1978년 6월 25일 | 캇테니 신드바드 | 3위 | 51.6만장 |
2집 | 1978년 11월 25일 | 키분 시다이데 세메나이데 | 10위 | 27.8만장 |
3집 | 1979년 3월 25일 | 이토시노 엘리 | 2위 | 72.8만장 |
4집 | 1979년 7월 25일 | 오모이 스고시모 코이노 우치 | 7위 | 22.8만장 |
5집 | 1979년 10월 25일 | C조 말에 어서오세요 | 2위 | 37.7만장 |
6집 | 1980년 2월 21일 | 나미다노 아베뉴 | 16위 | 10.1만장 |
7집 | 1980년 3월 21일 | 코이스루 먼슬리 데이 | 23위 | 6.9만장 |
8집 | 1980년 5월 21일 | 이나세나 로코모션 | 16위 | 11.2만장 |
9집 | 1980년 6월 21일 | 재즈 맨 (JAZZ MAN) | 32위 | 5.2만장 |
10집 | 1980년 7월 21일 | 와스레지노 레이드 백 | 28위 | 4.9만장 |
11집 | 1980년 11월 21일 | 샤 라 라/고멘네 찰리 | 29위 | 7.9만장 |
12집 | 1981년 6월 21일 | 빅 스타 블루스 (빅 스타의 비극) | 49위 | 4.6만장 |
13집 | 1981년 9월 21일 | 시호노 테마 | 35위 | 5.5만장 |
14집 | 1982년 1월 21일 | 챠코의 해안 이야기 | 2위 | 58.4만장 |
15집 | 1982년 5월 21일 | 니오이엔 THE NIGHT CLUB | 8위 | 30만장 |
16집 | 1982년 10월 5일 | Ya Ya (아노 시대를 잊지 않아) | 10위 | 34만장 |
17집 | 1983년 3월 5일 | 바디 스페셜 II (BODY SPECIAL) | 10위 | 32.5만장 |
18집 | 1983년 7월 5일 | EMANON | 24위 | 7.4만장 |
19집 | 1983년 11월 5일 | 도쿄 셔플 | 23위 | 12.3만장 |
20집 | 1984년 6월 25일 | 미스 브랜뉴 데이 (MISS BRAND-NEW DAY) | 6위 | 30.2만장 |
21집 | 1984년 10월 21일 | Tarako | 11위 | 12.5만장 |
22집 | 1985년 5월 29일 | Bye Bye My Love (U are the one) | 4위 | 38.6만장 |
23집 | 1985년 8월 21일 | 멜로디 (Melody) | 2위 | 26.6만장 |
24집 | 1988년 6월 25일 | 모두의 노래 | 2위 | 31.8만장 |
25집 | 1989년 4월 12일 | 여신들에게의 정가 (보도되지 않는 Y형의 저편으로) | 4위 | 11.3만장 |
26집 | 1989년 6월 7일 | 사요나라 베이비 | 1위 | 25.8만장 |
27집 | 1989년 11월 21일 | ''후리후리 65''' | 2위 | 18.2만장 |
28집 | 1990년 7월 25일 | 진 여름의 과실 | 4위 | 54.9만장 |
29집 | 1991년 7월 10일 | 네오 브라보!! | 1위 | 43.1만장 |
30집 | 1992년 7월 18일 | 슈라바★라★밤바 SHULABA-LA-BAMBA | 2위 | 97만장 |
31집 | 1992년 7월 18일 | 눈물의 키스 | 1위 | 155만장 |
32집 | 1993년 7월 21일 | 에로티카 세븐 EROTICA SEVEN | 1위 | 174만장 |
33집 | 1993년 7월 21일 | 멋진 버디 (NO NO BIRDY) | 3위 | 51.3만장 |
34집 | 1993년 11월 20일 | 크리스마스 러브 (눈물 뒤에는 하얀 눈이 내린다) | 3위 | 66.7만장 |
35집 | 1995년 5월 22일 | 만피의 G★SPOT | 4위 | 51.4만장 |
36집 | 1995년 7월 17일 | 너만을 〜Summer Heartbreak〜 | 1위 | 113만장 |
37집 | 1996년 5월 20일 | 사랑의 영혼 〜Spiritual Message〜 | 1위 | 140만장 |
38집 | 1996년 6월 25일 | 태양은 죄 많은 녀석 | 5위 | 38.6만장 |
39집 | 1997년 8월 21일 | 01MESSENGER 〜전자 광시〜 | 5위 | 23.9만장 |
40집 | 1997년 11월 6일 | BLUE HEAVEN | 5위 | 21.5만장 |
41집 | 1998년 2월 11일 | LOVE AFFAIR 〜비밀 데이트 | 4위 | 58.8만장 |
42집 | 1998년 7월 29일 | PARADISE | 4위 | 20만장 |
43집 | 1999년 3월 25일 | 옐로우 맨 〜별의 왕자님〜 | 10위 | 10.6만장 |
44집 | 2000년 1월 26일 | TSUNAMI | 1위 | 293.6만장 |
45집 | 2000년 7월 19일 | HOTEL PACIFIC | 2위 | 82.3만장 |
46집 | 2000년 11월 1일 | 이 푸른 하늘, 미도리 〜BLUE IN GREEN〜 | 3위 | 35.4만장 |
47집 | 2003년 7월 23일 | 눈물의 바다에서 안기고 싶어 〜SEA OF LOVE〜 | 1위 | 74.2만장 |
48집 | 2004년 4월 14일 | 채 〜Aja〜 | 1위 | 28.0만장 |
49집 | 2004년 7월 21일 | 너야말로 스타다/꿈에 사라진 줄리아 | 1위 | 45.8만장 |
50집 | 2004년 11월 24일 | 사랑과 욕망의 나날/LONELY WOMAN | 1위 | 37.2만장 |
51집 | 2005년 7월 20일 | BOHBO No.5/신의 섬 아득한 나라 | 3위 | 25.9만장 |
52집 | 2006년 8월 9일 | DIRTY OLD MAN 〜잘 있거라 여름〜 | 1위 | 22.5만장 |
53집 | 2008년 8월 6일 | I AM YOUR SINGER | 1위 | 52.0만장 |
54집 | 2013년 8월 7일 | 피스와 하이라이트 | 1위 | 35.0만장 |
55집 | 2014년 9월 10일 | 도쿄 VICTORY | 1위 | 15.0만장 |
'''배포 싱글'''
- 2018년: 싸우는 전사들에게 사랑을 담아
- 2018년: 장년 JUMP
- 2019년: 사랑은 느리게 조금씩
- 2023년: 본기리 사랑 노래
- 2023년: 노래해 일본의 하늘
- 2023년: Relay〜숲의 노래
- 2024년: 사랑의 부기우기 나이트
- 2024년: 잔 다르크에게 잘 부탁해
- 2025년: 벚꽃, 휘날리다
7. 수상 경력
'82 앨범 베스트 10
'83 앨범 베스트 10
록 골드 디스크상
우수 앨범상
우수 작품상[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