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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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4세는 카페 왕조 출신으로, 1285년부터 1314년까지 프랑스 왕국을 통치했다. 그는 1284년 나바라 여왕 잔 1세와 결혼하여 나바라 왕국과 샹파뉴 백작령을 통합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필리프 4세는 중앙 집권 정책을 추진하고,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갈등을 겪으며 아나니 사건을 통해 교황권을 굴복시켰다. 그는 또한 템플 기사단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잉글랜드와의 전쟁과 플랑드르와의 분쟁을 겪었다. 필리프 4세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폐 개주를 실시했으나, 이는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말년에 불행한 사건들을 겪고, 1314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뒤는 아들 루이 10세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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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프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통치 | 프랑스 국왕 |
| 추가 정보 | (더 보기...) |
| 재위 | 1285년 10월 5일 – 1314년 11월 29일 |
| 대관식 | 1286년 1월 6일, 랭스 대성당 |
| 대관식 종류 | 프랑스 |
| 선임자 | 필리프 3세 |
| 후임자 | 루이 10세 |
| 통치2 | 나바라 국왕 |
| 추가 정보2 | (여왕의 권리) |
| 재위2 | 1284년 8월 16일 – 1305년 4월 4일 |
| 선임자2 | 호아나 1세 |
| 후임자2 | 루이 1세 |
| 섭정2 | 호아나 1세 |
| 섭정 종류2 | 공동 군주 |
| 출생일 | 1268년 4월 – 6월 |
| 출생지 | 퐁텐블로 궁전, 프랑스 |
| 사망일 | 1314년 11월 29일 (향년 46세) |
| 사망지 | 퐁텐블로, 프랑스 |
| 매장일 | 1314년 12월 3일 |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
| 배우자 | 나바라의 호아나 1세 (1284년 8월 16일 결혼, 1305년 4월 4일 사망) |
| 자녀 |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 잉글랜드의 이사벨라, 로베르 |
| 자녀 정보 | 더 보기... |
| 왕가 | 카페 왕조 |
| 아버지 | 필리프 3세 |
| 어머니 | 아라곤의 이사벨라 |
| 이름 | |
| 프랑스어 | Philippe le Bel |
| 별칭 | 철왕 |
| 추가 정보 | |
| 프랑스어 인용구 | '인간도 짐승도 아니다. 조각상이다.' |
| 프랑스어 명칭 | Philippe IV |
| 바스크어 명칭 | Filipe I.a |
2. 생애
필리프 4세는 1268년 퐁텐블로 궁전에서 필리프 3세와 아라곤의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났다. 1284년 나바라 여왕 잔 1세와 결혼하여 나바라 왕국과 샹파뉴 백작령을 지배하면서 왕의 직할령을 크게 강화했다. 1285년 아버지 필리프 3세가 아라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사망하자,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20]
어린 시절, 필리프는 어머니 이사벨 다라곤의 죽음, 계모 마리아 판 브라반트와의 갈등, 형의 죽음 등으로 정서적 불안을 겪었다.[33] 이는 훗날 그가 범죄자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34]
필리프 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부르주아지나 하위 귀족 출신의 지식인들을 등용하여 중앙 집권적 관료제와 기구를 정비했다. 그의 치세는 국왕 평의회, 파르르망, 감사원 등이 등장하거나 통합되면서 중앙 집권적인 행정부로 전환되는 시기였으며, 이는 근대성을 향한 움직임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대외적으로 필리프 4세는 잉글랜드, 플랑드르, 몽골 등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잉글랜드와는 가스코뉴 전쟁을 벌였으나 결정적인 승리 없이 끝났고,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었다. 플랑드르와는 금마자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몽상페벨 전투에서 승리하여 가혹한 평화 조약을 강요했다. 몽골과는 맘루크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을 추진했으나 실제 군사 협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대립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교회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했고, 이는 교황과의 갈등을 야기했다. 1302년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삼부회를 소집하여 국민적 지지를 얻어냈고, 1303년 아나니 사건을 일으켜 교황을 체포하려 했다. 1305년 프랑스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옹립하고, 1309년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이전시켜 아비뇽 유수를 초래했다.
또한, 필리프 4세는 성전기사단을 해체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는 왕권 강화와 재정 확보를 위한 조치였으며, 1307년 프랑스 내 성전기사단원들을 체포하고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을 강요했다. 1312년 교황은 기사단 해산령을 내렸고, 1314년 성전기사단의 마지막 단장 자크 드 몰레를 화형에 처했다.
필리프 4세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화폐 개주를 실시했지만, 이는 통화 질서의 혼란을 야기하여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314년, 필리프 4세는 사냥 중 뇌경색으로 쓰러져 퐁텐블로 궁전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2. 1. 초년과 즉위
카페 왕조의 일원인 필리프는 1268년 중세 요새인 퐁텐블로 (센에마른)에서 필리프 3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아라곤의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루이 9세의 장남으로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였다.
1270년 8월, 필리프가 두 살이었을 때, 그의 할아버지가 십자군 원정 중에 사망했고, 그의 아버지가 왕이 되었으며, 그의 형인 루이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271년 1월, 필리프의 어머니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당시 그녀는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고 남편과 함께 여왕으로 즉위하지 못했다. 몇 달 후, 필리프의 남동생 중 한 명인 로베르도 사망했다. 필리프의 아버지는 1271년 8월 15일 랭스에서 왕으로 즉위했다. 6일 후, 그는 재혼했다. 필리프의 새어머니는 브라반트 공작의 딸인 마리였다.
1276년 5월, 필리프의 형 루이가 사망했고, 8살의 필리프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루이가 독살되었고 그의 새어머니인 브라반트의 마리가 살인을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었다.[2] 이러한 소문의 한 가지 이유는 여왕이 루이가 사망한 달에 자신의 첫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리프와 그의 유일한 친형제인 샤를은 성인이 될 때까지 건강하게 살았고, 각자 대가족을 이루었다.
1271년 모후 이사벨 다라곤이 사망하였고 필리프가 6살 무렵에 부왕과 재혼한 계비 마리아 판 브라반트는 이사벨의 자식들에게 그다지 좋은 새모후가 아니었다. 8살때 친형 루이가 죽었는데 이 죽음에 마리아가 관련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33] 때문에 도팽이 된 후에는 늘 죽음에 대한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어린시절 이런 경험은 훗날 도팽이 왕위에 오른 후 정서적 불안과 화폐위조범을 끓는 물에 집어넣어 죽이는 등[34] 범죄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가한 것에 대한 원인으로 보여진다.
필리프의 학문 교육은 그의 아버지의 자선가인 기욤 데르퀴에게 맡겨졌다.[3]
1284년에 나바라 여왕 잔 1세(나바라의 조안 1세)와 결혼하여, 나바라 왕국과 샹파뉴 백작령을 지배하게 되었다. 샹파뉴 백작령은 본령인 일 드 프랑스와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양자를 통합함으로써 왕의 직할령은 매우 강화되었다.
1285년, 아라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병사한 아버지 필리프 3세의 뒤를 이어 17세의 나이로 즉위했다.[20] 도팽 시절에는 제왕학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다. 즉위후 신하들 앞에서 조금도 흐트러짐도 없는 엄숙하고도 권위 있는 태도를 유지하였다. '무쇠왕' '대리석왕'이라 불릴 정도로 철두철미하고 융통성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35] 아라곤과의 분쟁은 나폴리 왕 카를로 2세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으며, 1291년에 조약을 맺어 종결되었다.
1285년 10월에 끝난 아라곤 십자군이 실패한 후, 필리프는 십자군 군대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페테르 3세와 협상했을 수 있다. 이 조약은 카탈루냐 연대기 작가들이 증언한다. 조셉 스트레이어는 그러한 거래가 아마도 불필요했을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왜냐하면 페테르는 철수하는 프랑스군과의 전투를 도발하거나, 그의 어머니를 통해 아라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젊은 필리프를 화나게 함으로써 얻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필리프는 1284년 8월 16일에 여왕 나바라의 조안 1세(1271–1305)와 결혼했다. 둘은 서로 애정을 느끼고 헌신했으며, 필리프는 1305년 조안이 사망한 후,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 재정적으로 큰 보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혼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결혼의 주요 행정적 이점은 조안이 샹파뉴와 브리를 상속받았다는 것이었는데, 이 지역은 프랑스 왕실령과 인접해 있었고, 따라서 효과적으로 왕의 영토와 통합되어 그의 왕국을 확장했다. 부유한 샹파뉴의 합병은 왕실 수입을 상당히 증가시키고, 반독립적인 대규모 봉건 영주의 자치를 제거했으며, 왕실 영토를 동쪽으로 확장했다. 필리프는 또한 1312년에 프랑스를 위해 리옹을 얻었다.
나바라는 1284년 필리프와 조안 아래에서 시작하여 44년 동안 프랑스와의 개인적 연합을 유지했다. 피레네 산맥의 나바라 왕국은 가난했지만 어느 정도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1328년 카페 왕가가 단절되었을 때, 새로운 발루아 왕인 필리프 6세는 합법적인 청구자인 필리프 4세의 선임 상속인인 나바라의 조안 2세에게 프랑스 내의 다른 지역을 보상하면서 이 영토를 프랑스에 영구적으로 병합하려 했다. 그러나 조안 2세 가족의 압력으로 인해 필리프 6세는 1329년 조안에게 영토를 넘겨주었고, 나바라와 프랑스의 통치자는 다시 다른 개인이 되었다.
2. 2. 중앙집권 정책과 왕권 강화
필리프 4세는 부르주아지나 하위 귀족 출신의 지식인들을 등용하여 중앙 집권적 관료제와 기구를 정비했다. 이런 노력은 왕실 재정을 악화시키기도 했지만, 중앙 집권을 통한 국왕 중심의 새로운 국가 체제 정비라는 시대적 사명을 수행하는 데 기여했다.1286년 1월 6일, 17세의 나이로 프랑스 왕위에 오른 필리프 4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전의 왕들과 달리 전문적인 법률가 관료에 의존했으며, 대중과 거리를 두었다. 인기 없는 정책은 대신들에게 맡겼기 때문에 '쓸모없는 올빼미'에 비유되기도 했지만, 기욤 드 노가레와 같은 사람들은 그의 경건함과 교회 지원을 칭찬했다.[20] 그의 치세는 국왕 평의회, 파르르망, 감사원 등이 등장하거나 통합되면서 중앙 집권적인 행정부로 전환되는 시기였으며, 이는 근대성을 향한 움직임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필리프 4세의 치세는 중세 유럽 왕권의 전환기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로마 교황의 권위가 쇠퇴하던 시기였다.[20] 필리프 4세는 군주권 강화를 꾀하고, '레지스트'라 불리는 세속 법조가를 관료로 채용하는 등 관료 제도를 강화하여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고 근대적인 국가 형성을 앞당겼다.[20]
교황의 아비뇽 유수(교황의 바빌론 유수)와 템플 기사단 해산 등을 통해 교회 권력에 대한 프랑스 왕권의 강대함을 과시했지만, 말년에는 봉건 제후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잉글랜드 왕국과의 영토 문제도 해결하지 못해 후대에 과제를 남겼다.[20]
2. 3. 대외 관계와 전쟁
필리프 4세는 잉글랜드, 플랑드르, 몽골 등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고 전쟁을 벌였다.1293년 영국과 프랑스 선원들 간의 충돌 이후, 필리프 4세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를 소환했지만, 에드워드 1세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복잡한 협상과 배신 끝에 1294년부터 1303년까지 가스코뉴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결정적인 승리 없이 끝났지만,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었고, 잉글랜드는 플랑드르를 지원하는 결과를 낳았다. 1308년, 양국 간의 평화를 위해 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라와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2세의 결혼이 이루어졌지만, 이는 훗날 백년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필리프 4세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플랑드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1297년부터 플랑드르와 갈등을 빚었다. 1302년 금마자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플랑드르군에게 대패했지만, 1304년 몽상페벨 전투에서 승리하여 1305년 가혹한 평화 조약을 강요했다.
필리프 4세는 맘루크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과의 동맹을 추진하기도 했다. 위구르족 출신 승려 라반 바르 사우마를 통해 몽골 일 칸국의 아르군과 동맹을 제안받고,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실제 군사 협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몽골의 올제이투가 다시 군사 협력을 제안했지만, 십자군은 지연되었고 필리프 4세는 십자군 참여를 맹세했으나 사냥 사고로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필리프 4세는 이러한 대외 관계와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프랑스 최초로 전국적인 과세를 실시했고, 가톨릭 교회에도 세금을 부과했다.[20]
2. 3. 1. 잉글랜드와의 관계
아키텐 공작이었던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는 필리프 4세의 봉신으로서 경의를 표해야 했다. 그러나 1291년 아크 몰락 이후, 이전의 동맹 관계는 불화로 바뀌었다.[4]1293년, 영국과 프랑스 선원 간의 싸움으로 여러 척의 배가 나포되고 라 로셸이 약탈당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에드워드 1세를 프랑스 궁정으로 소환했으나, 에드워드 1세는 대사들을 통해 협상하려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필리프 4세는 에드워드 1세를 단순한 공작이자 봉신으로만 대했다.

에드워드 1세는 필리프 4세의 사촌이자 계부인 에드먼드 크라우치백을 통해 프랑스 왕가와 협상하여 전쟁을 막으려 했다. 또한, 에드워드 1세는 필리프 4세의 여동생인 마가렛과 대리 약혼을 맺었으며, 협상이 성공하면 에드먼드가 마가렛을 잉글랜드로 데려갈 예정이었다.
합의에 따라 에드워드 1세는 복종의 표시로 가스코뉴를 일시적으로 필리프 4세에게 양도하고, 필리프 4세는 에드워드 1세를 용서하고 유예 기간이 지난 후 가스코뉴를 돌려주기로 했다. 가스코뉴는 필리프 4세가 계속 보유하기로 합의되었으며, 결혼 날짜는 프랑스 영토를 에드워드 1세에게 격리하고 재양도하는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 군주에게 땅을 돌려줄 의사가 없었다. 필리프 4세는 에드워드 1세가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에드워드 1세의 봉토를 완전히 몰수하고, 잉글랜드와 전쟁을 시작했다.[4]
1294~1303년의 가스코뉴 전쟁은 경쟁적인 팽창주의 군주제의 불가피한 결과였지만, 아키텐과 플랑드르에서의 직접적인 전투는 결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했다. 더 큰 결과는 과세와 동맹에서 비롯되었다.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오래된 동맹을 맺고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의 상당 부분을 지원했다. 한편, 잉글랜드는 플랑드르가 프랑스에 대항하는 프랑스-플랑드르 전쟁을 지원했다. 황금 박차 전투에서 프랑스 귀족이 몰락하면서 필리프 4세는 아키텐 점령을 포기해야 했다.
1299년 몽트뢰유 조약에 따라, 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라와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2세의 결혼식이 1308년 1월 25일 불로뉴쉬르메르에서 거행되었다. 이는 지속적인 평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 프랑스 왕위 계승자를 배출하여 백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1294년, 필리프 4세는 프랑스 남서부 가스코뉴와 북동부 플랑드르로 세력을 뻗치려 하여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와 전쟁을 시작했다.[20]
1294년부터 1299년까지 이어진 기옌(아키텐) 전쟁에서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에 관심을 집중했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키텐 공으로서 프랑스 왕에게 신종하는 것과 가스코뉴 확보로 강화를 꾀했다.
필리프 4세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플랑드르에 관심을 가졌다. 1297년부터 플랑드르 도시 시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잉글랜드 왕과 격렬하게 다퉜다. 플랑드르는 모직물 생산으로 유럽 경제의 중심지 중 하나였지만, 원료인 양모를 잉글랜드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플랑드르 백작은 원래 프랑스의 봉건 신하였지만 자주 대립했다. 당시 플랑드르 백작 기 드 담피에르는 딸을 잉글랜드 왕세자 에드워드(에드워드 2세)와 결혼시키려 은밀히 움직였고, 필리프 4세는 이를 파혼하도록 강요했지만, 기는 이를 거부하고 잉글랜드 왕과 결탁하여 반항했다. 1300년 화해 교섭 중에 붙잡혀 유폐되었지만,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 왕에게 저항했다. 1302년 코르트레이크에서 벌어진 "금마刺 전투"에서는 프랑스 왕군이 플랑드르군에게 패했지만, 1305년 릴 근처 몽 앙 페벨 전투에서는 프랑스가 우세했다. 이후에도 양측의 항쟁은 강화와 전투를 반복하면서 1314년 필리프 4세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들 전역에서는 왕제 샤를 (발루아 백작)가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이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필리프 4세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전국적 과세를 실시했고, 세금은 가톨릭 교회에도 부과되었다.[20]
2. 3. 2. 플랑드르와의 전쟁
1294년, 필리프 4세는 프랑스 남서부 가스코뉴와 북동부 플랑드르로 세력을 뻗치려 하여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다.[20] 1294년부터 1299년까지 이어진 기옌(아키텐) 전쟁에서는 에드워드 1세의 관심이 스코틀랜드로 향했고, 프랑스에서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키텐 공으로서 프랑스 왕에게 신종하는 것과 가스코뉴 확보로 강화했다.필리프 4세의 관심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플랑드르에 있었다. 1297년부터는 플랑드르의 도시 시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잉글랜드 왕과 격렬하게 다퉜다. 플랑드르는 모직물 생산으로 유럽 경제의 중심 중 하나가 되었지만, 원료인 양모를 잉글랜드에서 수입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과의 관계가 깊었다.
플랑드르 백작은 원래 프랑스의 봉건 신하이지만, 자주 대립했고, 당시 플랑드르 백작 기 드 담피에르는 딸을 잉글랜드 왕세자 에드워드(에드워드 2세)와 결혼시키려고 은밀히 움직였다. 필리프 4세는 이를 파혼하도록 기에게 강요했지만, 기는 최종적으로 이를 거부하고 잉글랜드 왕과 결탁하여 반항했다. 1300년에 화해 교섭 중에 붙잡혀 그 후 유폐되었지만, 플랑드르의 여러 도시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 왕에게 저항했다.
1302년 7월 11일 코르트레이크 인근에서 일어난 금마자 전투에서 필리프 4세는 플랑드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한 2,500명의 귀족 기사(기사 및 종자)와 4,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가 패배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1302년의 금마자 전투에서는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우세한 프랑스 왕군은 시민 보병이 중심인 플랑드르군에게 패했지만, 필리프는 2년 후 몽상페벨 전투에서 강력하게 대응하여 결정적인 프랑스 승리로 이끌었다. 그 결과, 1305년 필리프는 플랑드르인들에게 가혹한 평화 조약을 강요하여 막대한 배상금과 벌금을 부과하고, 주요 직물 시장이 열리던 릴, 두에, 베튄 등 부유한 직물 도시를 왕실 영토에 추가했다. 플랑드르 도시 중 가장 먼저 항복한 베튄은 아르투아 여백작 마호에게 주어졌으며, 그녀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두 딸은 필리프의 두 아들과 결혼했다.
1305년의 릴 근처 몽상페벨 전투에서는 미묘하게 우세했고, 그 후에도 양측의 항쟁은 강화와 전투를 반복하면서 필리프 4세가 붕어하는 1314년까지 이어졌다. 이들 전역에서는 왕제 샤를 (발루아 백작)가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이 전쟁에서 필요했던 막대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필리프 4세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전국적 과세를 실시했고, 세금은 가톨릭 교회에도 부과되었다.[20]
2. 3. 3. 몽골과의 외교
필리프 4세는 중동의 몽골 세력과 다양한 접촉을 가졌는데, 여기에는 원래 중국 원나라 출신의 위구르 승려 라반 바르 사우마의 사절단 접견이 포함된다.[5] 바르 사우마는 바그다드의 몽골 일 칸국의 아르군과 프랑코-몽골 동맹을 맺자는 제안을 했다. 아르군은 공통의 적인 무슬림 맘루크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과 유럽 간의 연합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대가로 아르군은 예루살렘을 무슬림으로부터 탈환하면 기독교도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필리프는 바르 사우마를 몽골 영토로 동행하도록 그의 귀족 중 한 명인 고베르 드 엘르빌을 파견함으로써 사절단의 요청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것으로 보인다.[6] 1288년과 1289년에는 아르군과 필리프 사이에 잠재적인 군사 협력을 개략적으로 설명하는 서신이 오갔다. 그러나 필리프는 실제로 그러한 군사 계획을 추진하지 않았다.1305년 4월, 새로운 몽골 통치자 올제이투는 필리프,[7] 교황, 그리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는 다시 유럽의 기독교 국가와 몽골 간의 군사 협력을 맘루크에 대항하여 제안했다. 유럽 국가들은 또 다른 십자군을 시도했지만 지연되었고,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1312년 4월 4일, 또 다른 십자군이 비엔 공의회에서 선포되었다. 1313년, 필리프는 교황 클레멘스 5세의 요청에 응하여 레반트로 십자군에 참여하겠다는 맹세를 하며 "십자가를 짊어졌"다. 그러나 그는 앵게랑 드 마리니로부터 출정을 만류받았고,[8] 곧 사냥 사고로 사망했다.
2. 4. 교황과의 갈등과 아비뇽 유수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급작스럽게 사망한 후, 교황 베네딕토 11세가 선출되었으나 8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이후 1년 동안 새 교황이 선출되지 못했는데, 이는 추기경들이 필리프 4세와의 화해를 모색하는 친프랑스파와 복수를 요구하는 반프랑스파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1305년이 되어서야 친프랑스파의 의견이 관철되어 프랑스 출신 베르트랑이 교황 클레멘스 5세로 선출되었다.새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실의 지지를 받던 대주교 출신으로, 프랑스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리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후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왕의 강력한 간섭을 받았으며, 로마로 들어가지 못한 채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다. 1309년에는 필리프 4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후 1377년까지 70년간 교황청은 아비뇽에 머무르며 7명의 교황을 배출하였다. 이 시기를 아비뇽 유수라고 부르며,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왕의 영향 속에서 프랑스에 의존하게 되었고 교황권은 쇠퇴하게 되었다.
2. 4. 1. 보니파시오 8세와의 대립
필리프 4세는 1294년부터 1303년까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 1302년부터 1304년까지는 플랑드르 공국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1296년 프랑스 교회와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했다.[37]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세속 군주의 교회나 성직자에 대한 세금 징수를 금지하는 칙서를 발표했다. 이에 맞서 필리프 4세는 교황령과의 모든 교역을 차단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고, 이는 교황청의 수입을 크게 감소시켰다.[37] 결국 교황이 한발 물러서면서 갈등은 봉합되었다.1301년, 필리프 4세가 프랑스 성직자를 반역죄로 체포하여 투옥시키면서 갈등이 재현되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즉시 석방을 요구하며 필리프 4세에게 부여했던 프랑스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임시세 징수 권리를 철회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1302년 4월 10일,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삼부회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소집하여 국민적 지지를 얻어냈다.[20] 교황은 로마에서 공의회를 개최한 후 1302년 11월 18일, 세속 권력에 대한 교황권의 절대 우위를 주장하는 '우남상탐'이라는 칙서를 발표하며 파문도 불사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그러자 필리프 4세는 교황 칙서를 불태우고 의회를 열어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이단 혐의와 전임 교황 첼레스티노 5세 암살 혐의 등으로 고발하는 등 공격을 퍼부었다.
분노한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를 파문했지만,[21] 필리프 4세는 1303년 자신의 대리인 기욤 드 노가레를 아나니로 보내 보니파시오 8세를 체포하려 했다.([21]아나니 사건) 노가레는 교황을 체포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교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23] 1305년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를 새 교황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한다.[23]
2. 4. 2. 아나니 사건과 교황권 굴복
1301년 필리프 4세가 프랑스 성직자를 반역죄로 체포하여 투옥하면서 교황과의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즉시 성직자 석방을 요구하며 필리프 4세에게 부여했던 프랑스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임시세 징수 권리를 철회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1302년 4월 10일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삼부회를 소집하여 국민적 지지를 얻어냈다. 교황은 로마에서 공의회를 개최한 후 1302년 11월 18일 세속 권력에 대한 교황권의 절대 우위를 주장하는 우남상탐(Unam Sanctam)이라는 칙서를 발표하며 파문도 불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필리프 4세는 교황 칙서를 불태우고 의회를 열어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이단 혐의와 전임 교황 첼레스티노 5세 암살 혐의 등으로 고발하며 공격했다.
교황과의 갈등이 지속되던 중, 1303년 9월 8일 교황이 필리프 4세를 파문하는 교서를 발표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필리프 4세는 '기욤 드 노가레'[38]에게 명하여 프랑스 군인들을 교황이 머물고 있는 아나니로 급파, 1303년 9월 7일 교황을 생포하는 아나니 사건을 일으켰다. '기욤 드 노가레'는 교황에게 폭언과 함께 자진 사퇴를 종용했으나, 교황은 끝까지 사임을 거부했다. 아나니 습격에 가담한 로마 귀족 콜로나의 시아라[39]는 교황의 뺨을 때리는 등 폭행을 가하고 즉결 처형을 주장했다. 그러나 기욤 드 노가레는 교황을 프랑스로 압송하여 재판에 회부하고자 했다. 주장이 대립되자 교황을 3일 동안 감옥에 가둔 후 사후 처리 방법을 조율하던 중 아나니 시민들이 봉기하자 교황을 풀어주고 퇴각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아나니 사건의 충격으로 한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보르도의 대주교였던 새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처음부터 필리프 4세의 강한 영향 아래에 있었으며, 그의 즉위도 필리프가 임석한 가운데 리옹에서 거행되었다[24]。클레멘스 5세는 한 번도 로마에 들어가지 않고 1309년 교황청을 프랑스 남동부 아비뇽으로 옮겼다(아비뇽 유수)[24]。아비뇽은 당시 나폴리 왕국 소유였지만, 프랑스의 강한 영향 아래에 있었으며, 이를 역사상 "아비뇽 유수"라고 부른다[24]。이후 약 70년 동안 교황청은 아비뇽에 머물렀고, 교황권은 프랑스 왕의 강한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24][25]。
2. 5. 성전기사단 해체
아비뇽 유수를 통해 교황권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게 되자, 필리프 4세는 왕권 신장에 이를 활용하였다. 중앙집권을 위해 영토와 재정 확보에 전력하며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을 적극적으로 제거했는데, 당시 성전기사단은 기부와 대부업을 통해 상당한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다.[11] 이들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국제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어 중앙집권에 방해가 되었으며, 필리프 4세는 전비 조달을 위해 이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프랑스 내 성전기사단의 조직을 해체하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되고 왕권 강화에도 도움이 되었다. 해체의 명분은 십자군 전쟁이 종료되어 본래의 설립 목적과 달리 상업 활동과 금융업에 지나치게 치중한다는 비판이 팽배했고, 난립하는 기사단으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었다.교황 클레멘스 5세(재위 1305년-1314년)에게 해산 압력을 넣었고, 1307년 3,000여 명의 프랑스 단원을 체포하였다.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을 강요하고 죄를 뒤집어씌운 후 화형에 처했다. 1312년 교황은 기사단 해산령을 내렸다. 성전기사단의 재산은 성 요한 기사단이 승계했으나, 성 요한 기사단을 장악하고 있었던 필리프 4세가 전용하였다. 필리프 4세는 대부업에 종사하던 유태인들에게도 많은 빚을 졌는데,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박해 정책을 펼치고 빚을 갚지 않기 위해 유태인을 국외로 추방한 후 재산을 몰수하였다.

필리프 4세는 템플 기사단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11] 템플 기사단은 원래 성지의 기독교 순례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던 수도 기사단이었다. 13세기 말에는 은행업과 기타 상업 활동이 주된 역할이 되었다. 십자군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군사 기사단에 대한 지지도 약해졌고, 필리프는 템플 기사단에 대한 불만을 핑계 삼아 프랑스에 존재하던 기사단 전체에 대항하기 시작했는데, 부분적으로는 빚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최근 연구들은 필리프 4세와 그의 장관들(특히 기욤 드 노가레)의 정치적, 종교적 동기를 강조한다. "템플 기사단의 이단" 발견과 탄압을 통해 카페 왕가는 교황 테오크라시의 신비로운 토대를 스스로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템플 사건은 보니파시오 8세 시대에 시작된 프랑스-교황 분열과 함께 이러한 토대를 차지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가톨릭 신앙의 궁극적인 옹호자로서, 카페 왕은 교황 위에 군림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기능을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템플 기사단의 재판에서 쟁점이 된 것은 "왕실 신정 정치"의 수립이었다.[12]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새벽, 프랑스에 있던 수백 명의 템플 기사단원들이 필리프 4세의 요원들에 의해 동시에 체포되었고, 이후 기사단 내의 이단을 자백하도록 고문을 받았다. 템플 기사단은 교황에게만 복종해야 했지만, 필리프는 그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던 클레멘스 5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기사단을 해산시켰다. 교황 클레멘스는 적절한 재판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필리프는 이전에 강요된 자백을 이용하여 많은 템플 기사단원들이 제대로 방어하기도 전에 화형에 처하게 했다.

1314년 3월, 필리프는 템플 기사단의 마지막 그랜드 마스터인 자크 드 몰레와 노르망디의 지휘관인 조프루아 드 샤르네를 화형에 처했다.
1307년 10월 13일에 프랑스로 소환한 템플 기사단 총장 자크 드 몰레를 포함한 프랑스 내 템플 기사단 멤버들을 일제히 체포했다. 고문을 통한 이단 심문을 실시한 후,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템플 기사단을 해산시키고 프랑스 내 자산을 몰수했다. 1314년에는 몰레 등 기사단의 최고 간부들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했다.
템플 기사단 해체는 프랑스 등 각지에 광대한 영토와 권력을 가진 범유럽적인 기사단의 존재가 중앙 집권을 목표로 하는 왕권의 장애가 되었던 점 외에도 기사단의 자산과 금융 시스템 획득이 목적이었다고 여겨진다.[26]
화형 당시 몰레는 필리프 4세와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저주의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필리프 4세는 사냥 중 뇌경색으로 쓰러져 몇 주 후 출생지인 퐁텐블로 궁전에서 붕어했다. 같은 해에 클레멘스 5세 또한 사망했다.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에 매장되었다.
2. 6. 화폐 개주와 경제 정책
필리프 4세는 재정 문제를 다른 어떤 정책보다 우선시했다. 재정적 어려움은 개인적인 낭비벽[36]도 있었지만, 행정 조직 정비, 잉글랜드 및 플랑드르와의 전쟁, 그리고 할아버지 루이 9세로부터 물려받은 왕실 재정 문제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루이 9세는 7차와 8차 십자군 원정을 주도했으나, 두 차례 모두 실패로 끝났다. 7차 원정에는 1년 왕실 수입 총액의 8배가 넘는 비용이 들었고, 루이 9세는 포로로 잡혀 막대한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8차 원정 중에는 생 루이가 하프스(지금의 튀니지 튀니스)에서 사망했고, 막대한 전비 지출은 필리프 4세 시대까지 왕실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왕실 재정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필리프 4세는 조세를 늘리고 화폐 개주를 실시했다. 화폐 개주는 화폐의 순도를 조절하여 명목 가치와 실질 가치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35] 이 차액으로 왕실 재정을 충당했지만, 너무 잦은 화폐 개주는 통화 질서의 혼란을 야기하여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필리프 4세 치하에서 프랑스 왕실 정부의 연간 일반 수입은 대략 86만 리브르 투르누아였으며, 이는 46 톤의 은에 해당했다. 총 수입은 일반 수입의 약 두 배였다. 수입의 약 30%는 왕실 영지에서 징수되었다. 왕실 재정 행정에는 약 3,000명이 고용되었으며, 이 중 약 1,000명이 정식 관료였다.
필리프 4세는 즉위 후 아버지의 아라곤과의 전쟁으로 발생한 상당한 부채를 물려받았다. 1286년 11월까지 이 부채는 주요 금융업자였던 템플 기사단에게 8톤의 은에 달했는데, 이는 정부 수입의 17%에 해당했다. 이 부채는 빠르게 상환되었고, 1287년과 1288년에는 예산 흑자를 기록했다.
1289년 이후, 작센의 은 생산량 감소와 필리프 4세의 아라곤, 잉글랜드, 플랑드르와의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정부는 재정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아라곤과의 전쟁에는 약 15.240699999999999억kg(리브르 투르누아)가, 가스코뉴를 두고 벌어진 1294–99년 잉글랜드와의 전쟁에는 약 17.5776억kg가 소요되었다. 아라곤 전쟁에서 발생한 대출은 1306년까지 상환되었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 교황 니콜라우스 4세는 1289년 필리프 4세에게 프랑스 내 교회 토지에서 152000LP(리브르 파리시)의 십일조를 징수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의 수입을 올린 프랑스 교회는 1289년 일반 수입이 595318LP, 총 수입이 120만 LP였던 왕실 정부보다 더 큰 재정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1290년 11월까지 적자는 수입의 6%에 달했다. 1291년에는 예산이 흑자로 돌아섰지만, 1292년에 다시 적자로 돌아섰다.
끊임없는 적자로 인해 필리프 4세는 롬바르디 상인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롬바르디 상인들의 자산은 정부 요원들에게 압수되었고, 왕실은 롬바르디 상인들에게 프랑스 국적을 구매하도록 강요하여 약 254011750.00kg를 징수했다. 이러한 가혹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적자는 1293년에도 계속 쌓였다. 1295년까지 필리프 4세는 템플 기사단을 피렌체의 프란체시 은행가로 교체했다. 이탈리아인들은 템플 기사단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막대한 대출을 할 수 있었고, 필리프 4세는 그들에게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왕실 보물은 파리 템플에서 루브르로 옮겨졌다.

1294년,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전쟁을 벌였고, 1297년에는 플랑드르 백국이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 갈등은 프랑스 군주의 재정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전쟁이 계속되고 재정 적자가 지속되면서 필리프 4세는 군사 지출을 충당하기 위한 대안으로 화폐 평가 절하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사람들은 왕실 조폐창에 동전을 가져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대신 강세 통화로 교환하기 위해 은을 해외로 가져가는 것을 선호했다. 이로 인해 1301년경에는 프랑스에서 은이 급격하게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화폐 가치 하락으로 왕실은 1296년 11월부터 1299년 크리스마스까지 를 벌어들였으며, 이는 같은 기간 동안의 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귀족과 교회를 포함한 채권자들의 실질 소득을 악화시켰다. 이들은 더 강한 통화로 대출을 제공했지만, 약한 통화로 돌려받았기 때문이다. 채무를 지고 있는 하류 계층은 평가 절하의 혜택을 받지 못했는데, 높은 인플레이션이 그들의 돈의 구매력을 잠식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적 불안이 발생했다. 1303년 8월 22일까지 이 관행으로 인해 유통되는 ''리브르'', ''수'', ''데니에'' 가치의 3분의 2가 손실되었다.
1302년 황금 박차 전투에서의 패배는 프랑스 재정에 치명타를 입혔다. 이 전투 이후 15개월 동안 통화 가치가 37% 하락했으며, 금과 은의 해외 수출을 금지하는 새로운 법령이 발표되었다. 왕실 정부는 관리와 백성들에게 각각 모든 또는 절반의 은제 그릇을 동전 주조에 제공하도록 명령해야 했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었다.[9] 사람들은 비화폐 형태로 재산을 국외로 옮기려 했고, 필리프 4세는 왕실의 승인 없이 상품 수출을 금지했다. 국왕은 교황으로부터 또 다른 십자군세를 얻었고, 템플 기사단을 다시 채권자로 삼기 위해 왕실 보물을 템플로 돌려보냈다.
이러한 결정들은 그 결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군주의 용인된 권리였고, 전쟁과 같은 특별한 상황이 이를 정당화하면 이 권한은 광범위하게 행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은 함량이 낮은 동전을 발행하는 것은 진행 중인 상업 혁명으로 인해 은 인플레이션이 심각한 통화 부족을 초래하는 상황에서 통화를 유지하는 데 필요했다.
2. 7. 불행한 말년
1314년 필리프 4세의 장남과 삼남의 부인이 젊은 기사 두 명과 간통을 하다가 적발되었다. 두 기사는 대역죄 판결을 받고 산 채로 사지가 절단된 후 효수되었다. 두 며느리는 삭발당한 후 감옥에 유폐되었다. 며느리들의 간통으로 고통받던 필리프 4세는 추가 징세에 대한 국민들의 거센 반발을 접하고 매우 힘들어했다.필리프 4세의 죽음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진다. 필리프 4세는 1314년 3월 19일, 성전기사단의 23대 단장 자크 드 몰레에게 누명을 씌워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그를 화형에 처했다. 자크 드 몰레는 죽는 순간까지 결백을 주장하였고 "필리프 4세를 신의 법정으로 소환하겠다"고 외치면서 죽었다.
교황 클레멘스 5세 역시 성전기사단 해체에 동의했는데, 화형식이 있은 후 한 달이 못되어 1314년 4월 10일에 죽었다. 필리프 4세는 그해 말 1314년 11월 29일에 사냥 중에 낙마하여 죽었다.

필리프는 퐁생트막상스(알라트 숲)에서 사냥을 하던 중 뇌졸중을 겪었고 몇 주 후인 1314년 11월 29일 퐁텐블로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드니 대성당에 묻혔다. 필리프의 뒤는 그의 아들인 루이 10세가 이었다.
3. 가족
나바라의 여왕 조안 1세(후아나 1세)와의 사이에서 7명의 자녀를 두었다. 조안과 사별했을 당시 필리프 4세는 37세로 젊었지만, 재혼하지 않고 아내와의 추억 속에 살았다.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 마르가레트 | 1288년경 | 1294년 | 카스티야의 인판테 페르디난드와 약혼 |
| 루이 10세 | 1289년 10월 4일 | 1316년 6월 5일 |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 |
| 블랑슈 | 1290년 | 1294년 4월 13일 이후 | 생드니 대성당에 묻힘, 인판테 페르디난드와 약혼 |
| 필리프 5세 | 1291년경 | 1322년 1월 3일 |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 |
| 샤를 4세 | 1294년 | 1328년 2월 1일 |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 |
| 이자벨라 | 1295년경 | 1358년 8월 23일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와 결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
| 로베르 | 1296년 | 1308년 8월 | 생 제르맹 앙 레 사망, 키프로스 여왕 콩스탕스와 약혼 |
성인이 된 세 아들 모두 잇달아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이 되었지만, 그들의 자녀 대부분, 특히 남자들이 모두 요절했기 때문에 남계는 끊어졌고, 최종적으로 카페 왕조는 단절되었다. 딸 이자벨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의 왕비가 되어, 훗날 잉글랜드 왕가가 프랑스 왕위를 청구하는 백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29] 1328년에 아들 없이 샤를 4세가 사망했을 때, 필리프 4세의 자녀 중 이자벨만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여자 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의 관습에 따르면, 이자벨의 아들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넘어간다고 생각되었다.[30][31]
나바라 왕위는 루이 10세(나바라 왕 루이스 1세)의 딸 잔(후아나 2세)에 의해 계승되었다.
4. 평가와 유산
종종 합리적이지만 탐욕스럽고 냉혹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바라 왕국과 샹파뉴 백국을 확보하기 위해 왕비 잔 드 나바르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한편으로, 왕으로서는 필리프 2세나 루이 9세와 함께 중세 프랑스의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는다.[27] 프랑스에서는 성스러운 "성유(聖油) 넣는 그릇", "백합", "왕기(王旗)"가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대항의 상징이었으며, 필리프 2세, 루이 9세 뿐만 아니라 필리프 4세 역시 일관되게 "지극히 경건한 왕"임을 주장하며 자신의 왕권을 권위있게 만들었다.[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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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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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Historical Sketch of Sacerdotal Celibacy", "Superstition and Force", "Studies in Church History"; A History of the Inquisition of the Middle Ages, Vol III, by Henry Charles Lea, NY: Hamper & Bros, Franklin Sq. 1888 p.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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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A History of the Inquisition Vol. 3, Henry Charles Lea, Ch. 326, "Political Heresy – The State", p. 2. Not in copy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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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Portable Dante
https://books.google[...]
Penguin Publishing Group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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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Estetica Dantesca del Dualismo
Giuliano Ladolfi Edi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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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ial website: Les Rois maudits (2005 miniseries)
http://les-rois-maud[...]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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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Les Rois maudits': Casting de la saison 1"
http://www.allocine.[...]
AlloCiné
2005
[20]
문서
藤田(1995)pp.106-109
[21]
문서
鶴岡(2012)pp.62-64
[22]
문서
聖年を定めたのは、1300年のボニファティウス8世が最初である。
[23]
문서
佐藤&池上(1997)pp.258-259
[24]
문서
ロバーツ(2003)pp.162-16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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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ことに反発した神聖ローマ皇帝やイングランド王は、反教皇(庁)的な政策を次々に打ち出した。ロバーツ(2003)p.163
[26]
문서
ロバーツ(2003)p.226
[27]
문서
鶴岡(2012)p.38
[28]
문서
佐藤&池上(1997)pp.328-329
[29]
문서
ロバーツ(2003)p.182
[30]
문서
佐藤&池上(1997)pp.338-339
[31]
문서
池上俊一は、この、いわば「正当な要求」がフランスで退けられた理由について、当時のフランス人のあいだに一定の「国民意識」ないし「国家意識」と称すべき観念がすでに存在していたためではないか、と指摘している。佐藤&池上(1997)pp.338-339
[32]
문서
별칭인 ‘미왕(le Bel, the Fair)’은 그의 실제 외모를 평한 것이 아니라 필리프 4세의 치세기에 프랑스가 풍요로웠기에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중세에 ‘아름다움’이란 표현은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33]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필리프 4세 [Philippe IV] - 프랑스 카페왕조 11대왕 (인물세계사, 김정미)'
https://terms.naver.[...]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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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 기린원 1998.11.10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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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필리프 4세 [Philip IV] -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향하여 (프랑스 왕가, 홍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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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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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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