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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공방전 (12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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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그다드 공방전(1258년)은 몽골 제국의 훌라구 칸이 아바스 칼리파국을 침공하여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한 사건이다. 몽골군은 1258년 1월 바그다드를 포위 공격하여 2월에 함락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대규모 학살과 도시 파괴가 자행되었다. 바그다드 함락은 500년 동안 이어진 아바스 왕조의 종말을 가져왔고, 이슬람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슬람 황금 시대의 쇠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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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공방전 (1258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훌레구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는 모습 (1430년경)
훌레구 칸의 군대가 바그다드를 포위하는 모습, 1430년경
전투명바그다드 공방전
분쟁몽골 제국의 이슬람 정복
날짜1258년 1월 29/30일 – 2월 10일 (13일)
장소이라크 바그다드
결과몽골 제국의 승리
영향메소포타미아의 몽골 제국 합병
아바스 칼리파국의 쇠퇴
바그다드의 약탈 및 파괴
지혜의 집 파괴
교전 세력
교전국 1일 칸국 (몽골 제국)
교전국 2아바스 칼리파국
지원군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
조지아 왕국
중국
기타 지역
지휘관 및 지도자
일 칸국훌레구 칸
바이주
키트부카
구오 칸
자카레 3세 자카리안
프록시 카그바키안 왕자
아바스 칼리파국알-무스타심
무함마드 이븐 알-알카미
병력 규모
일 칸국138,000–300,000명 (보조 병력 포함)
아바스 칼리파국50,000명
사상자 및 피해
일 칸국미미한 피해
아바스 칼리파국군인 50,000명 사망
민간인 200,000–2,000,000명 사망
바그다드 파괴

2. 배경

바그다드무함마드의 숙부 아바스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였다. 751년,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칼리프의 거처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20] 바그다드는 전성기에 인구가 거의 100만 명에 육박했고 6만 명의 병사가 도시를 지켰으나, 13세기 중엽 튀르크 및 맘루크 군벌들이 칼리프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쇠퇴하였다.[20]

바그다드는 여전히 큰 상징적 중요성을 지닌 부와 문화의 도시였다. 12세기와 13세기의 칼리프들은 동방에서 팽창하던 몽골 제국과 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안나시르 일디니일라흐(재위 1180년 ~ 1225년)는 화레즘의 무함마드 2세가 아바스 왕조를 위협했을 때 칭기즈 칸과 동맹을 시도했을 것으로 보이며,[20] 일부 십자군 포로들이 몽골의 칸에게 조공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다.[21]

몽골비사에 따르면, 칭기즈 칸과 오고타이 칸은 초르마칸에게 바그다드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22] 1236년, 초르마칸은 아르빌로 몽골군 한 개 사단을 이끌고 갔다.[23] 아르빌과 그 외 지역들에 대한 약탈은 거의 매년 정기적으로 일어났고,[24] 일부는 바그다드에 이르렀다고도 하지만,[25] 1238년[26]과 1245년[27]에는 아바스 병력이 격퇴하기도 했다.

아바스 왕조는 몽골군과 강화를 맺고 싶어했고, 1241년경 몽골 궁정에 매년 공물을 보내는 것을 받아들였다.[25] 칼리프 사절단은 1246년 귀위크 칸의 대관식[28]과 1251년 몽케 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29] 귀위크 칸은 알무스타심이 몽골에 굴복하고 직접 카라코룸에 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칼리프의 거절 및 저항에 대해 칸들은 바이주 노얀을 탓했다.

검은색과 흰색 사진, 요새화된 커다란 탑
알-나시르가 1220년에서 1221년에 걸쳐 건설한 부적의 문(Talisman Gate)은 공방전 당시 바그다드의 동쪽 성벽을 보호했다.


10세기 동안 압바스 왕조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945년 부와이 왕조, 1055년 셀주크 제국에 의해 바그다드는 점령되었고, 칼리프는 지역적인 권위만 가졌다. 그러나 바그다드는 카이펑, 항저우와 함께 1000년에서 1200년 사이에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알-나시르 치하에서 칼리프국은 마지막 셀주크 통치자와 호라즘 제국의 위협을 물리치고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호라즘의 무함마드 2세의 1217년 침공은 실패했고, 그의 왕국은 곧 칭기즈 칸의 군대에 의해 침략받았다.

1221년 호라즘 제국에 대한 몽골 침공이 끝난 후, 1230년 오고타이 칸의 장군 초르마칸이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하여 잘랄 앗딘을 제거했다. 이후 이란 북서부와 트란스 코카서스에서 몽골의 헤게모니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1236년 이스파한을 점령한 후, 몽골군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칼리프의 권위에 대한 시험을 시작하여 1237년 에르빌을 포위하고 이듬해 바그다드 성벽까지 약탈했다. 초르마칸과 바이지는 거의 매년 이 지역을 약탈했다. 몽골의 지배가 근동의 다른 지역에서는 확보되었지만, 바그다드는 정복되지 않았고, 1245년에는 몽골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알보르즈 산맥의 암살단은 1240년대에 몽골 지휘관을 죽였고, 칸을 죽이기 위해 400명의 암살자를 카라코룸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1253년경부터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몽케의 동생 훌라구를 선봉으로 하는 몽골 제국의 대규모 훌라구의 서정이 시작되었다.

2. 1. 아바스 칼리파국의 쇠퇴

무함마드의 숙부인 아바스의 후손들이 지배하는 아바스 칼리파국은 세 번째 칼리프 왕조로, 수 세기 동안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았다. 751년,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칼리프의 거처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 바그다드는 번영의 정점에 달했을 때 인구가 거의 백만 명에 육박했고, 6만 명의 병사가 도시를 지켰다. 그러나 13세기 중엽, 아바스 왕조의 힘은 쇠퇴했고, 튀르크 및 맘루크 군벌들이 칼리프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20]

바그다드는 여전히 큰 상징적 중요성을 유지하며 부와 문화의 도시로 남아 있었다. 12세기와 13세기에 칼리프들은 동방에서 팽창하던 몽골 제국과 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180년부터 1225년까지 재위한 칼리프 안나시르 일디니일라흐는 화레즘의 무함마드 2세가 아바스 왕조를 위협했을 때 칭기즈 칸과 동맹을 맺으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0] 일부 십자군 포로들이 몽골 칸에게 조공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다.[21]

몽골비사에 따르면,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 오고타이 칸은 장군 초르마칸에게 바그다드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22] 1236년, 초르마칸은 아바스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아르빌로 몽골군 한 개 사단을 이끌고 갔다.[23] 아르빌과 그 외 지역에 대한 약탈은 거의 매년 정기적으로 일어났다.[24] 일부 약탈은 바그다드까지 이르렀다고 하지만,[25] 몽골군의 침입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어서, 아바스 군대는 1238년[26]과 1245년에[27] 침입을 격퇴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어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바스 왕조는 몽골군과 강화를 맺고 싶어했고, 1241년경에는 몽골 칸의 궁정에 매년 공물을 바치는 것을 받아들였다.[25] 칼리프가 보낸 사절단은 1246년 귀위크 칸의 대관식[28]과 1251년 몽케 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29]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귀위크 칸은 칼리프 알무스타심에게 몽골의 지배에 완전히 굴복하고 직접 카라코룸으로 올 것을 요구했다. 칼리프가 이를 거절하고 몽골의 세력 확장에 저항하자, 칸들은 바이주 노얀을 탓했다.

762년 압바스 왕조의 두 번째 칼리프인 알 만수르는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수도로 바그다드를 건국했다. 그는 새로운 압바스 칼리파국이 잠재적 위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자 대이란의 왕조 권력 기반 근처에 위치하기를 원했다. 무역로와 세금을 통제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바그다드는 빠르게 세계 도시가 되었고 이슬람 황금기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혜의 집 및 천문대와 같은 학습 센터를 포함하여, 바그다드는 "지구의 지적 수도"였다.

10세기 동안 압바스 왕조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바그다드는 945년 부와이 왕조에 의해, 그리고 1055년 셀주크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때 칼리프는 지역적인 권위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바그다드 자체에 관심을 집중했고, 바그다드는 세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바그다드는 카이펑 및 항저우와 함께 1000년에서 1200년 사이에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알-나시르 (1180년 ~ 1225년) 치하에서 칼리프국은 마지막 셀주크 통치자와 호라즘 제국의 위협을 물리치고 중요한 세력으로 다시 부상했다. 호라즘의 무함마드 2세의 1217년 압바스 왕조 침공은 실패했고, 그의 왕국은 곧 몽골 제국칭기즈 칸 군대에 의해 침략받았다.

호라즘 제국에 대한 몽골 침공이 1221년 말에 끝난 후, 1230년에 오고타이 칸의 주요 장군인 초르마칸이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하여 잘랄 앗딘을 제거했다. 그 후, 초르마칸은 이란 북서부와 트란스 코카서스에서 몽골의 헤게모니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1236년 이스파한을 점령한 후, 몽골군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칼리프의 권위에 대한 시험을 시작하여 1237년 에르빌을 포위하고 이듬해 바그다드 성벽까지 약탈했다. 초르마칸과 그의 1241년 대체자인 바이지는 그 후 거의 매년 이 지역을 약탈했다. 몽골의 지배가 근동의 다른 지역에서는 확보되었지만 바그다드는 정복되지 않았고, 심지어 1245년에는 몽골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또 다른 문제는 알보르즈 산맥에 있는 니자리 이스마일파였다. 그들은 1240년대에 몽골 지휘관을 죽였고, 칸 자신을 죽이기 위해 400명의 암살자를 카라코룸으로 보냈다고 한다.

당시 현재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아바스 왕조의 제37대 칼리프인 알무스타심이 통치하고 있었다. 최전성기 이 도시는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산업 혁명 이전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되어 100만 명 이상의 거주민과 6만 명의 정예 군대를 자랑했다. 그러나 1200년대 중반 무렵에는 그 힘과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1253년경부터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당시 카안인 몽케의 동생이었던 훌라구를 선봉으로 하는 몽골 제국의 대규모 훌라구의 서정이 시작되었다.

2. 2. 몽골 제국의 팽창과 위협

바그다드무함마드의 숙부 아바스의 후손들이 지배하는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였다. 751년,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칼리프의 거처를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겼다. 바그다드는 번영의 정점에 달했을 때 인구가 거의 100만 명에 육박했고 6만 명의 병사가 도시를 지켰다. 그러나 13세기 중엽, 아바스 왕조의 힘은 쇠퇴했고, 튀르크 및 맘루크 군벌들이 칼리프에 대한 권력을 행사했다.[20]

바그다드는 여전히 큰 상징적 중요성을 지녔고, 부와 문화의 도시로 남아 있었다. 12세기와 13세기의 칼리프들은 동방에서 팽창하던 몽골 제국과 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180년부터 1225년까지 재위한 칼리프 안나시르 일디니일라흐는 화레즘의 무함마드 2세가 아바스 왕조를 위협했을 때 칭기즈 칸과 동맹을 시도했을 것으로 보인다.[20] 일부 십자군 포로들이 몽골의 칸에게 조공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다.[21]

몽골비사에 따르면, 칭기즈 칸과 그의 후계자 오고타이 칸은 휘하 장군 초르마칸에게 바그다드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22] 1236년, 초르마칸은 아바스 왕조의 지배 하에 있던 아르빌로 몽골군 한 개 사단을 이끌고 갔다.[23] 아르빌과 그 외 지역들에 대한 약탈은 거의 매년 정기적으로 일어났다.[24] 일부 약탈은 바그다드에 이르렀다고도 하지만,[25] 몽골군의 침입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아바스 병력은 1238년[26]과 1245년에 침입을 격퇴하기도 했다.[27]

이러한 방어 성공에도, 아바스 왕조는 몽골군과 강화를 맺고 싶어했고, 1241년경 몽골의 칸 궁정에 매년 공물을 보내는 것을 받아들였다.[25] 칼리프가 보낸 사절단은 1246년 귀위크 칸의 대관식[28]과 1251년 몽케 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29] 귀위크 칸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칼리프 알무스타심이 몽골의 지배에 완전히 굴복하고 직접 카라코룸에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들은 칼리프의 제의 거절 및 몽골의 세력 확장에 대한 아바스 왕조의 저항에 대해 바이주 노얀을 탓했다.

10세기 동안 압바스 왕조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바그다드는 945년 부와이 왕조, 1055년 셀주크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칼리프는 지역적인 권위만 가졌다. 그러나 바그다드는 카이펑, 항저우와 함께 1000년에서 1200년 사이에 1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 칼리프국은 알-나시르 치하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그는 마지막 셀주크 통치자와 호라즘 제국의 위협을 물리쳤다. 호라즘의 무함마드 2세의 1217년 압바스 왕조 침공은 실패했고, 그의 왕국은 곧 칭기즈 칸의 군대에 의해 침략받았다.

1221년 호라즘 제국에 대한 몽골 침공이 끝난 후, 몽골군은 1230년까지 이 지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해에 오고타이 칸의 주요 장군인 초르마칸이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하여 호라즘 왕자 잘랄 앗딘을 제거했다. 그 후, 초르마칸은 이란 북서부와 트란스 코카서스에서 몽골의 헤게모니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1236년 이스파한을 점령한 후, 몽골군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칼리프의 권위에 대한 시험을 시작하여 1237년 에르빌을 포위하고 이듬해 바그다드 성벽까지 약탈했다. 초르마칸과 그의 1241년 대체자인 바이지는 그 후 거의 매년 이 지역을 약탈했다. 몽골의 지배가 근동의 다른 지역에서는 확보되었지만, 바그다드는 정복되지 않았고, 심지어 1245년에는 몽골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또 다른 문제는 알보르즈 산맥에 있는 암살단이었다. 그들은 1240년대에 몽골 지휘관을 죽였고, 칸 자신을 죽이기 위해 400명의 암살자를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으로 보냈다고 한다.

당시 현재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는 아바스 왕조의 제37대 칼리프인 알무스타심이 통치하는 아바스 왕조의 수도였다. 최전성기 이 도시는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으며, 산업 혁명 이전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되어 100만 명 이상의 거주민과 6만 명의 정예 군대를 자랑했다. 그러나 1200년대 중반 무렵에는 그 힘과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1253년경부터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당시 카안인 몽케의 동생이었던 훌라구를 선봉으로 하는 몽골 제국의 대규모 훌라구의 서정이 시작되었다.

3. 훌라구의 군사 활동

몽케 칸은 1251년 톨루이드 혁명을 통해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 톨루이 가문을 몽골 제국 내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고 칸으로 즉위했다. 몽케는 동생들인 쿠빌라이 칸과 훌레구 칸에게 대규모 군사 원정을 맡겼다. 쿠빌라이는 다리 왕국을 복속시키고 남송과의 전쟁을 재개하는 임무를, 훌레구는 이스마일파 암살단을 제거하고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항복을 받아내는 임무를 맡았다.[1] 훌레구는 이 임무를 위해 제국 인력의 5분의 1을 할당받았는데, 학자들은 이 병력 규모를 138,000명에서 300,000명 사이로 추정한다.[1]

훌레구의 군대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헤툼 1세를 포함한 아르메니아 봉신, 구오 칸이 이끄는 1,000명 규모의 군사 공병 부대, 제국 각지의 보조병, 금장 칸국과 차카타이 칸국의 왕자 테구데르, 칭기즈 칸의 외손자 등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되었다.[2]

훌레구의 진군은 1253년 10월 카라코룸에서 시작되어 트란스옥시아나를 거쳐 1255년 11월 샤흐리사브즈의 아르군 아가 등 지역 통치자들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1256년 초, 훌레구는 암살단의 중심지인 쿠히스탄에 진입했다.[3] 키트부카 장군이 이끄는 선봉대는 여러 이스마일파 요새를 점령하고 페르도우스 시를 약탈했다.[4] 1255년 12월 암살단의 최고 지도자 알라 앗딘 무하마드가 사망하고, 훌레구는 그의 후계자 루크 알 딘 후르샤에게 사절을 보냈다. 루크 알 딘은 시간을 벌려 했으나 결국 1256년 11월 19일 마이문-디즈에서 항복했고, 12월 15일에는 알라무트 요새마저 함락되었다.[5][6]

훌레구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무스타심에게 군사 지원을 기대했으나, 칼리프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수니파 작가들은 바그다드의 재상이자 시아파였던 무함마드 이븐 알-알카미가 훌레구와 비밀 협상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1256년, 바그다드는 홍수 이후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파 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9]

1257년 9월, 훌레구는 알-무스타심에게 평화적 항복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알-무스타심은 몽골 지도자를 얕잡아 보며 이슬람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훌레구의 사절단이 바그다드에서 모욕을 당하자, 훌레구는 인내심을 잃고 바그다드 공격을 결심했다. 천문학자 후삼 알-딘은 파멸을 예언했지만, 나시르 알딘 알-투시는 훌레구가 칼리프를 대신해 통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30]

3. 1. 훌라구의 원정 계획

1257년, 몽케는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페르시아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는 훌라구에게 일 칸국과 그 병력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고, 아바스 칼리파국을 포함한 여러 이슬람 국가들을 복속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30] 몽케는 알무스타심 정권의 전복을 바라지 않았지만, 알무스타심이 훌라구에게 직접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라는 제안을 거부할 경우에만 바그다드를 파괴하라고 명령하였다.

침공 준비 과정에서 훌라구는 대규모 원정 병력을 모집하였다. 몽골 제국 전역에서 징병 연령의 남성 10분의 1을 징집하였는데, 이는 150,000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이었다.[30] 이 병력의 지휘관으로는 오이라트족의 통치자 아르군 아카, 바이주, 부카 테무르, 구오 칸, 키트부카, 그리고 훌라구의 형제인 수니타이 등이 있었다.[31]

몽골군은 아르메니아 왕과 그의 병력, 안티오키아 공국의 프랑크인 부대,[10] 조지아 병력 등 기독교인 병력도 포함하였다.[9] 약 1,000명의 중국인 공성 기술자들과[32] 아타 말릭 주베이니에 따르면 페르시아와 튀르크의 보조병들도 함께 했다.

훌레구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무스타심이 군대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칼리프는 거부했다. 수니파 작가들은 바그다드의 재상인 무함마드 이븐 알-알카미라는 시아파를 훌레구와 비밀 협상을 벌여 칼리프를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1256년, 파괴적인 홍수 이후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파 폭력이 발생하여 바그다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졌다.

훌레구는 1257년 9월 알-무스타심에게 평화적으로 항복하고 세 명의 주요 대신을 보낼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알-무스타심의 답장은 몽골 지도자를 젊고 무지하다고 칭하며, 이슬람 전체에서 군대를 소집할 수 있다고 자처했다. 훌레구의 사절들을 모욕하는 행동은 적대적인 과장이었다. 맘루크 술탄국은 칼리프에 적대적이었고, 아이유브 시리아의 소규모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집중하고 있었다.

인내심을 잃은 훌레구는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실용성에 대해 고문들과 상의했다. 천문학자 후삼 알-딘은 파멸을 예언했지만, 나시르 알딘 알-투시는 이러한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훌레구가 칼리프 대신 통치할 것이라고 답했다.

3. 2. 니자리 이스마일파 정벌

훌라구는 군대를 이끌고 페르시아로 가서 루르인, 부하라, 화레즘샤 왕조의 잔당들을 성공적으로 정복하였다. 이 지역들을 복속시킨 뒤, 훌라구는 니자리 이스마일파와 그들의 수장 알라 알딘 무함마드에게 관심을 돌렸다. 알라 알딘 무함마드는 몽케와 훌라구의 친우이자 부하인 키트부카를 암살하려 했었다. 아사신 교단의 암살 시도는 실패했지만, 훌라구는 아사신의 강력한 요새인 알라무트로 진격하여 함락시켰다. 이후 몽골군은 알라 알딘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1255년부터 1256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아사신의 수장이었던 루큰 알딘 쿠르샤를 처형하였다.

몽케 칸은 1251년,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 톨루이 가문을 몽골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만든 톨루이드 혁명의 일환으로 칸으로 선포되었다. 몽케는 그의 동생들인 쿠빌라이 칸과 훌레구 칸을 반란을 일으킨 봉신들과 문제적인 적들을 제압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 원정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쿠빌라이는 다리 왕국을 복속시키고 남송과의 전쟁을 재개하기 위해 파견된 반면, 훌레구는 이스마일파 암살단을 파괴하고 아바스 왕조 칼리프들의 항복을 확보하기 위해 서쪽으로 파견되었다.[1] 이 임무를 위해 그는 제국의 인력의 5분의 1을 할당받았으며, 현대 학자들은 이 수치를 138,000명, 거의 200,000명 또는 300,000명으로 다양하게 계산했다.[1] 이 군대에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포함한 아르메니아의 봉신들과 그 왕 헤툼 1세, 구오 칸이 이끄는 1,000명 규모의 군사 공병 부대, 제국 전역에서 온 보조병, 금장 칸국, 차카타이 칸국의 왕자 테구데르, 칭기즈 칸의 딸 체체이켄을 통한 그의 손자 중 한 명을 포함한 몽골 제국 가문의 모든 지부에서 온 장군들이 포함되었다.[2]

훌레구 군대의 규모 때문에 카라코룸에서 그의 진격은 몽골의 기준으로는 매우 느렸다. 1253년 10월에 출발하여 그는 다음 몇 년 동안 트란스옥시아나를 지나갔고 1255년 11월 샤흐리사브즈의 아르군 아가를 포함한 지역 통치자들로부터 경의를 받았다. 이듬해 초 그는 암살단의 중심지인 쿠히스탄에 들어섰다.[3] 장군 키트부카 휘하의 선발 선봉대는 수많은 이스마일파 요새를 점령했고 게르드쿠의 요새를 포위하려다 실패했으며 1253년부터 1256년 사이에 페르도우스 시를 약탈했다.[4] 암살단의 최고 지도자 알라 앗딘 무하마드는 1255년 12월에 사망했고 훌레구는 그의 젊은 후계자 루크 알 딘 후르샤에게 사절을 보냈다. 새로운 최고 지도자는 시간을 벌려고 시도했지만, 그의 요새는 몽골군에게 꾸준히 함락되었고, 그는 1256년 11월 19일에 마이문-디즈에서 항복했다.[5] 루크 알 딘은 12월 15일에 알라무트 요새가 항복하도록 설득했다.[6]

4. 바그다드 공방전

훌레구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무스타심에게 암살자들에 대한 작전에 군대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지만, 알무스타심과 그의 대신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수니파 작가들은 바그다드의 재상인 무함마드 이븐 알알카미라는 시아파가 훌레구와 비밀 협상을 벌여 칼리프를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1256년, 파괴적인 홍수 이후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파 폭력이 발생하여 바그다드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알무스타심과 그의 대신들은 여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31][2]

1257년 9월, 훌레구는 알무스타심에게 평화적으로 항복하고 그의 세 주요 대신을 보낼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으나, 이들은 모두 거절하고 대신 덜 중요한 관리들이 보내졌다.

알무스타심의 답장은 몽골 지도자를 젊고 무지하다고 칭하며, 이슬람 전체에서 군대를 소집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허풍이었다. 맘루크 술탄국은 칼리프에게 적대적이었으며, 아이유브 시리아의 소규모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집중하고 있었다.[30] 알알카미는 많은 양의 조공을 바칠 것을 주장했지만, ''dawatdar''(잉크통 지기)는 알알카미가 재무부를 비우고 훌레구의 호의를 얻으려 한다고 주장했다.

인내심을 잃은 훌레구는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고문들과 상의했다. 천문학자 후삼 알딘은 파멸을 예언했지만, 나시르 알딘 알투시는 재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훌레구가 칼리프 대신 통치할 것이라고 답했다.

무스타으심은 바그다드를 공격하면 알라의 복수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항복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증강하거나 바그다드의 성벽을 강화하지 않았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 데이비드 니콜은 "무스타으심은 전쟁 준비를 게을리했을 뿐만 아니라, 훌레구의 요구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바그다드의 멸망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4. 1. 바그다드 진격과 포위

아사신에 대한 승리 후, 훌라구는 알무스타심에게 서신을 보내 몽케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알무스타심은 고문이자 재상인 이븐 알알카미의 영향으로 이를 거절했다. 역사가들은 알알카미가 항복에 반대한 이유를 불신[33]과 무능[34]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칼리프에게 몽골군 침입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수도가 위험에 처하면 이슬람 세계가 도울 것이라고 장담했다.[34]

훌라구는 협상을 중단할 만큼 위협적인 방식으로 답했음에도,[35] 알무스타심은 바그다드의 병력을 보충하거나 성벽을 강화하지 않았다. 1월 11일경, 몽골군은 도시에 근접하여[34] 티그리스강 양쪽에 진을 쳐 도시를 포위했다. 알무스타심은 몽골군에 맞서 기병 2만 명을 보냈으나, 이들은 패배했다. 몽골군 공병들은 티그리스강 수로에 구멍을 뚫어 아바스 군대 후방을 물에 잠기게 하여 이들을 가두었다.[34]

훌레구는 몽골군 주력을 지휘하며 12월 6일 케르만샤를 약탈했고, 12월 중순 군사 회의 이후 지휘관들은 흩어져 각자 임무를 수행했다. 바이주는 에르빌 선봉대로 돌아가 모술에서 티그리스강을 건너 남쪽으로 바그다드를 향했다.[1] 1월 중순 나르 이사 운하에 도착한 바이주의 부관 수궁차크는 도시에서 약 40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1월 16일, 수궁차크는 2만 명의 보병과 대치하여 후퇴했지만, 칼리프 군대가 추격하자 바이주의 군대는 제방을 부수고 두자일 운하를 범람시켜 아바스 군대를 물에 잠기게 했다. 많은 이들이 익사했고, 다음 날 바이주의 군대는 남은 병력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한편, 키트부카는 티그리스강을 건너 남쪽으로 진격하여 카르크 교외에 접근했고, 훌레구는 1월 22일 동쪽 교외에 도착하여 현지 시아파의 환영을 받았다. 몽골군은 도시 전체를 둘러싼 울타리해자를 만들어 바그다드를 완전히 포위했다. 이 요새화는 하루 만에 완료되었다. 몽골군은 투석기발리스타를 위한 벽돌 더미와 탄약을 준비했고, 제벨 하므린산에서 돌을 구해 사용했다. 또한 나프타를 태우는 등 화약도 사용했다. 훌레구는 티그리스강에 부교를 건설하여 도시 양쪽을 연결하고 탈출을 막았다. 바그다드 성벽은 약했지만 보수되지 않았고, 수비대는 훈련되지 않아 무능했다.

15세기 라시드 알딘의 ''자미 알타와리크'' 사본에 묘사된 공성전; 부교에 있는 병사들은 ''다왓다르''가 티그리스강을 따라 도망가는 것을 막고 있다.


바그다드 성벽 공격은 1월 29일 또는 30일에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안전 보장을 약속하는 메시지를 화살에 매달아 도시 안으로 보냈다. 2월 1일, 남동쪽 아자미 탑에서 첫 번째 틈새가 생겼지만 몽골군은 격퇴되었다. 이후 이틀 동안 더 많은 틈새를 통해 2월 4일까지 동쪽 성벽을 장악했다. 패배를 감지한 ''다왓다르''는 티그리스강을 따라 도망치려 했지만 훌레구의 준비로 세 척의 배를 잃고 도시로 돌아갔다.

칼리프 알무스타심은 알알카미와 마키키하 2세, 동방교회 총대주교를 포함한 사절단을 보냈지만, 훌레구는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다. ''다왓다르''와 바그다드 수비대 사령관은 항복 후 처형되었다. 2월 7일, 무장하지 않은 병사와 주민들이 도시를 나와 시리아로 가려 했지만, 대신 학살당했다.

알무스타심은 제한된 선택 속에서 항복을 준비했다. 아들 아흐메드를 포함한 사절단을 보내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은 후, 2월 10일 항복했고, 가족과 3,000명의 고위 인사가 따랐다. 훌레구는 알무스타심에게 무기를 버리고 도시를 떠나라고 명령했고, 이를 따른 사람들은 학살당했다. 칼리프와 가족은 키트부카 군대 근처에 수용되었다.

프레그와 곽간이 이끄는 몽골군은 1257년 11월 바그다드를 포위했다. 몽골군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를 이끌었다고 전해지는 프레그는 몽케의 명령에 따라 전체 몽골군 병력의 10분의 1을 편성했다. 공격 부대에는 그루지야인 등 대규모 기독교도 파견대가 있었다. 프랑스 역사가 알랭 드뮈르제에 따르면, 안티오키아 공국의 프랑크인 부대도 참전했다. 중국인 총 전문가 1,000명[4]도 합류했다.

훌레구는 항복을 거부한 무스타으심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무스타으심은 바그다드를 공격하면 복수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항복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스타으심은 군대를 증강하거나 바그다드의 성벽을 강화하지 않았다. 영국의 중동 전사가 데이비드 니콜은 "무스타으심은 전쟁 준비를 게을리했을 뿐만 아니라, 훌레구의 요구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바그다드의 멸망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14세기의 페르시아에서 그려진 훌레구 군대의 포위 공격 모습


바그다드 포위 공격 전, 니자리파 교주 후르샤가 귀순하면서 많은 산성이 몽골군에 함락되었고, 알라무트 요새도 함락되었다. 훌레구는 하마단을 경유하여 바그다드로 서진하며, 여러 장군들에게 자그로스 산맥 주변 세력들을 공략하도록 했다.

훌레구는 티그리스 강 부근에서 군대를 동서로 분할했다. 아바스 왕조군은 서안에서 공격하는 몽골군은 격퇴했지만, 동안에서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몽골군은 아바스 왕조군의 후방 제방을 파괴하여 수공을 가했고, 아바스 왕조군의 대부분은 학살당하거나 익사했다.

곽간의 명령으로 몽골군의 중국인 부대가 울타리와 해자를 건설하고, 공성 무기와 투석기로 바그다드를 포위했다. 공격은 1월 29일에 시작되었다. 몽골군의 공격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2월 5일, 바그다드의 성벽은 무너졌다. 무스타으심은 훌레구와 협상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거절당했다.

과거 바그다드에는 만수르가 건설한 난공불락의 "원성"이 있었지만, 사마라 천도 시 버려졌고, 사마라에서 바그다드로 다시 천도할 때쯤에는 황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아바스 왕조는 티그리스 강 동안에 새로운 칼리프 궁전과 시가지 성벽을 다시 건설했다. 이로 인해 티그리스 강 동안에서 쇄도하는 세력으로부터의 압력을 직접 받기 쉬워졌고, 칼리프 권력 약화를 가속화했으며, 바그다드가 쉽게 함락된 원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2월 10일, 아바스 왕조는 항복했다. 몽골군은 2월 13일에 바그다드로 들이닥쳐, 1주일간 학살, 강간, 약탈, 파괴를 자행했다.

4. 2. 공성전과 함락



아바스 칼리파 측은 수도 방어를 위해 알무스타심 휘하의 기병 20,000명을 포함해 군사 50,000명을 동원했을 것이나, 급하게 소집되어 장비 및 훈련이 부실하였다. 칼리프는 형식 상으로는 다른 이슬람 제국들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나, 이를 도외시하거나 그러한 능력이 부족하였다. 그의 저항은 맘루크, 그리고 그가 지원을 해줬던 시리아의 에미르들의 충성심을 상실하게 했다.[36]

1258년 1월 29일, 몽골군은 도시 주변으로 말뚝을 세우고 해자를 세우며 바그다드 포위를 개시하였다. 공성 장비와 투석기를 동원한 몽골군은 도시 성벽을 돌파하려 시도했고, 2월 5일 경, 방어 시설의 상당 부분을 점거해냈다. 알무스타심은 자신의 병력들이 성벽을 탈환할 기회가 희박해진 것을 깨달아 훌라구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훌라구는 이를 거절했다. 바그다드의 유력 인사 3,000여 명 역시도 훌라구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살해당했다.[37]

2월 10일, 바그다드는 항복하였으나, 몽골군은 2월 13일까지 도시에 진입하지 않다가 일주일간 학살과 파괴를 시작하였다.

훌레구는 티그리스 강 부근에서 군대를 동서로 분할했다. 아바스 왕조군은 서안에서 공격하는 몽골군은 격퇴했지만, 동안에서의 공격은 견뎌내지 못했다. 몽골군은 아바스 왕조군의 후방 제방을 파괴하여 수공을 가했고, 아바스 왕조군의 대부분은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하거나 익사했다.

곽간(Guo Kan)의 명령으로 몽골군의 중국인 부대가 울타리와 해자를 건설하고, 공성 무기와 투석기로 바그다드를 포위했다. 공격은 1월 29일에 시작되었고, 2월 5일, 바그다드의 성벽은 몽골군에 의해 무너졌다. 무스타으심은 훌레구와 협상하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거절당했다.

과거 바그다드에는 만수르가 건설한 난공불락의 "원성"이 있었으나, 사마라로 천도했을 때 버려졌고, 사마라에서 바그다드로 다시 천도할 때쯤에는 황폐해져 있었다. 아바스 왕조는 티그리스 강 동안에 새로운 칼리프의 궁전과 시가지의 성벽을 다시 건설했으나, 이로 인해 티그리스 강 동안에서 쇄도하는 세력으로부터의 압력을 직접 받기 쉬워졌고, 칼리프 권력의 약화를 가속화했으며, 바그다드가 쉽게 함락된 원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5. 파괴와 학살

많은 사료들은 몽골 정복자들의 잔혹성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바그다드는 수십 년간 인구가 급감하였고, 황폐화된 도시였으며[38][39] 과거의 영광의 일부를 서서히 회복했을 뿐이었다.[40]

동시대 기록물들은 몽골군 병사들이 약탈을 벌이고, 그 뒤에 모스크, 궁전, 도서관, 병원 시설들을 파괴했다고 전한다. 바그다드의 36개에 달하는 공공 도서관들의 값어치 없던 서적들은 해체되어, 약탈자들은 샌들처럼 자신들의 가죽 덮개로 사용하였다.[41] 수 세대에 걸쳐 일궈진 대규모 건물들은 불에 탔다. 수 없이 귀중한 역사적 기록물들과 의학에서부터 천문학에 이르는 주제들에 대한 서적들을 소장하던 지혜의 집(바그다드 대도서관)도 파괴되었다. 살해당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피로 붉어진 티그리스강이 흘렀다는 주장들이 있기도 하였다.[42][43] 서적에 대한 폭력성의 모습들은 14세기에 등장하는데, 티그리스강으로 던져진 책들 때문에 티그리스강이 잉크의 검은색으로 바뀌었다는등 서적 파괴에 대한 이야기는 16세기부터 생긴 것으로 보인다.[44][45] Michal Biran은 이 이야기가 몽골의 야만성을 표현하기 위한 문학적 비유일 것이라 주장하였다.[46]

바그다드 거주민들은 탈출을 시도했으나, 몽골 병사들에게 가로막혀 대규모로 학살당했으며, 살아남은 이는 없었고,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Martin Sicker는 90,000명에 가까운 이들이 사망했다고 하였다.[47][48] 1262년에 몽골 측은 프랑스의 루이 9세에게 자신들이 바그다드에서 2백만 명을 살해했다고 자랑하였는데, 분명히 과장된 수치일 것이다.[49]

칼리프인 알무스타심은 생포되어 그의 백성들이 살해당하고 그의 보물들이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보게 하였다. 대부분의 기록들에 따르면, 칼리프는 짓밟혀 죽었다고 한다. 몽골인들은 칼리프를 양탄자에 싼 다음, 말을 끌고 그 위에 올라가 짓밟히게 하였는데, 몽골인들은 왕족의 피가 땅에 닿을 시에 대지가 분노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훌라구는 주둔지를 바그다드 쪽의 맞바람이 치는 것으로 옮겨야만 했는데, 파괴된 도시에서부터 날라오는 부패 악취 때문이었다.[50]

역사가 데이비드 모건은 바그다드 파괴를 묘사하는 데 있어 와사프(1265년 출생으로, 바그다드 파괴가 일어난 지 7년 후에 태어났다)를 인용하였다.

> "굶주린 매가 비둘기를 공격하거나, 맹렬한 늑대 무리가 양을 공격하듯이 몽골인들은 말 고삐를 늘어트리고 수치심 없는 얼굴로 도시를 휩쓸었으며, 살인을 벌이고 공포심을 퍼트렸다...황금으로 만들어지고 보석들이 장식된 침구류들은 칼로 조각나 갈기갈기 찢겼다. 거대한 하렘의 장막 뒤로 숨은 이들은 거리와 골목으로 끌어당겨져...하나씩 하나씩, 노리개가 되었다...침입자들의 손에 바그다드인들은 사망하였다."[51]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과한 반몽골적인 중세 사료들에 대해 의심을 표하고 있다.[52] 예시로 George Lane(SOAS)은 몽골인들이 바그다드 대도서관를 파괴했다는 것에 대해 나시르 알딘 투시 같은 몽골 지휘관의 학식있는 인물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았을 거라는 점과 질병이 대규모 사망 원인이라며 의문을 제기하였다.[53] 1차 자료들은 투시가 수천 권의 서적들을 지켜내 마라게에 있는 한 건물로 옮겼다고 전한다.[54][55][56]

1258년 2월 13일, 바그다드 약탈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흔히 묘사되는 것처럼 무자비한 파괴 행위가 아니라 몽골 제국에 저항하는 행위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계산된 결정이었다. 사예드(Sayyid), 몽골과 교역하던 학자, 상인, 그리고 훌레구의 아내인 도쿠즈 하툰(Doquz Khatun)이 기독교 신자였기에 그녀의 도움을 받은 도시의 기독교인들은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져 집을 표시하도록 지시받아 그들의 집은 안전하게 보존되었다. 도시의 나머지 지역은 일주일 동안 약탈과 살육의 대상이 되었다. 키라코스 간자케치(Kirakos Gandzaketsi)에 따르면, 13세기 아르메니아 역사가, 훌레구 군대의 기독교인들은 바그다드 약탈에 특별한 즐거움을 느꼈다. 얼마나 많은 주민이 사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후대의 이슬람 작가들은 80만에서 2백만 명의 사망자를 추산했고, 훌레구는 프랑스의 루이 9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군대가 20만 명을 살해했다고 언급했다. 생존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후의 전염병으로 인해 수치가 부풀려졌을 수 있다. 학자들은 이것이 흑사병의 전조였는지, 아니면 흑사병의 발병이었는지 논쟁해 왔다.

약탈 이틀째인 2월 15일, 훌레구는 칼리프 궁전을 방문하여 알-무스타심에게 그의 보물을 공개하도록 강요했다. 일부는 궈칸(Guo Kan)과 같은 지휘관에게 분배되었지만, 대부분은 마차에 실려 카라코룸의 몽케 칸에게 또는 훌레구가 매장될 아제르바이잔의 샤히 섬으로 운송되었다. 궁전을 마키카에게 교회로 사용하도록 허가한 후, 훌레구는 칼리프를 조롱하며 연회를 열었다. 당시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나시르 알딘 알투시(Nasir al-Din al-Tusi)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기록했다.

> [훌레구]가 칼리프 앞에 금쟁반을 놓고 말했다. "드시오!"

>

>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칼리프가 말했다.

>

> "그렇다면 왜 그것을 가지고 있었고, 군인들에게 주지 않았는가? 그리고 왜 이 쇠 문들을 화살촉으로 만들어서 내가 강을 건널 수 없도록 강둑으로 가지 않았는가?"라고 칸이 물었다.

>

>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라고 칼리프가 대답했다.

>

> "너에게 일어날 일도 신의 뜻일 것이다."라고 칸이 말했다.

Painting of a man being forced into a building with lots of gold inside
15세기 묘사: 훌레구 ''(왼쪽)''는 칼리프 알-무스타심을 그의 보물로 둘러싸인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한다.


이 사건은 마르코 폴로와 같은 기독교 작가들의 저술에 재현된 민담의 출처일 가능성이 높다. 훌레구는 알-무스타심을 그의 보물로 둘러싸인 감옥에 가두었고, 그는 4일 만에 굶어 죽었다. 실제로는 2월 20일, 훌레구가 약탈과 살인을 중단하고 점점 더 악취가 나는 공기를 피하기 위해 도시에서 야영지를 옮긴 후, 알-무스타심은 그의 가족과 측근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몽골에게 큰 금기였던 왕족의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칼리프는 말린 양탄자에 싸여 말에 짓밟혀 죽었다. 훌레구는 알-무스타심을 처형할지 여부를 놓고 논쟁했지만, 결국 칼리프 국가가 전능하고, 무적이며, 침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신화를 깨기 위해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후대의 작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알-알카미가 몽골에게 바그다드를 배신했다면, 훌레구는 그를 처형했을 것이다. 이것이 모든 배신자에 대한 몽골의 정책이었다. 대신, 칼리프가 어리석은 길을 가지 않도록 설득하려는 그의 노력 때문에, 그는 재상으로 재임명되었지만,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사망했다. 또한 호라즘(Khwarazm) 출신의 ''다루야치(daruyachi)'' (감독관)인 알리 바아타르를 그 지역에 임명하고, 3,000명의 군인을 도시에 주둔시킨 훌레구는 바그다드를 재건하고 바자르를 열라는 지시를 내렸다. 3월 8일, 그는 이 지역을 떠나 북쪽으로 하마단을 거쳐 아제르바이잔으로 이동하여 1년 동안 머물렀다.

> “몽골군은 비둘기의 비행을 공격하는 굶주린 매처럼 도시를 관통하고, 사나운 늑대가 양을 덮치는 것처럼 시민을 덮쳤다. 금으로 만든 보석으로 덮인 침대와 쿠션은 칼로 파괴되었고, 조각조차 부서졌다. 하렘의 베일에 숨은 자는 골목으로 끌려가 능욕당했다. 일방적인 살육으로 시민은 죽어갔다.”

> ―――와싸프 (역사가 베르톨트 슈풀러에 의한 인용[5])

많은 역사적 기록이 몽골군의 잔학 행위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바그다드의 시민들은 도망치려 했지만 몽골군에게 붙잡혀, 여자는 유아부터 노파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강간당하고,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살되었다. 14세기 역사가 와싸프는 "사망자는 수십만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뉴요커지의 이안 프레이저는 "20만 명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집계했다"고 기록했다[6]。20만에서 80만 명[2], 또는 200만 명[3]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몽골군은 시가지를 유린하고, 모스크, 궁전, 도서관, 병원을 약탈하고 파괴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보존되어 온 웅대한 건축물은 소실되었다. 약학에서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귀중한 서적을 소장하고 있던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은 파괴되었다[7]。 생존자는 "몽골군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의 피로 티그리스 강이 붉게 물들었고, 이어서 버려진 서적의 잉크로 티그리스 강물이 검게 변했다"고 증언했다.

알무스타심은 곽간에게 붙잡혀 몽골군에 의한 시민 학살과 재보 약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후 무스타심은 융단에 말려 몽골군 군마에게 밟혀 죽었다. 이는 귀족에게 죽음을 내릴 때의 몽골식 예법이었다. 몽골군은 무스타심의 아이들도 살해했고, 『집사』에 따르면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은 몽골로 보내졌다.

몽골군이 진지를 일부러 바그다드의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옮길 정도로, 대량의 시체에서 풍기는 부패 냄새가 심했다고 한다. 몽골군은 항복을 거부한 도시는 본보기로 철저하게 파괴했지만, 항복한 도시는 파괴하지 않았다. 이것이 몽골군의 전술이었다.

> “1258년 당시 이라크는 현재의 이라크와 달랐다. 농업은 도시의 운하에 의해 수천 년 동안 지켜졌고, 바그다드는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지적 중심지였다. 몽골군에 의한 바그다드의 파괴는 이슬람교에 회복 불가능한 심리적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미 이슬람교는 보수적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이 바그다드의 유린으로 인해, 이슬람교의 지적 개화는 꺾여버렸다. 아리스토텔레스페리클레스가 있는 아테네핵무기에 의해 소멸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몽골군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몽골군은 관개 운하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와 살육에 의한 인구 감소로 인해 이라크는 더 이상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져,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 ―――스티븐 더치(위스콘신-그린베이 대학교)[8]

6. 결과 및 영향

바그다드 함락 이후, 훌라구는 바그다드 재건을 위해 3,000명의 몽골 병사를 남겨두었다. 아타 말릭 주베이니쿠빌라이 칸을 돕기 위해 원나라로 돌아간 구오 칸의 뒤를 이어 바그다드, 하메소포타미아, 후제스탄의 총독이 되었다.[58] 훌라구의 정교회 신자 아내 도쿠즈 카툰의 중재로 바그다드의 기독교도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59] 훌라구는 네스토리우스파 가톨리코스 마르 마키카에게 왕궁을 하사하고 성당을 지을 것을 명했다.[59]

바그다드 함락 초기에는 이슬람 세계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바그다드는 점차 경제 중심지로 성장하여 국제 무역, 화폐 주조, 종교 활동이 활발해졌다.[60] 이후 몽골의 고위 다루가치가 바그다드에 상주하게 되었다.[61]

1252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칭기즈 칸의 손자 베르케는 훌라구의 바그다드 파괴에 분노했다. 무슬림 역사가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에 따르면, 베르케 칸은 몽케 칸에게 (몽케가 중국에서 사망한 것을 모르고) "그 (훌라구)는 무슬림들의 모든 도시들을 약탈하였습니다. 신의 도움으로 저는 너무나 많은 무고한 피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항의 서신을 보냈다. 킵차크 칸국의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베르케는 몽골 형제인 훌라구와의 전쟁을 망설였음에도 불구하고 일 칸국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 분쟁은 베르케-훌라구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62]

바그다드 함락은 500년간 지속된 아바스 왕조 칼리프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비록 왕조의 일원이 카이로에서 맘루크 왕조에 의해 알-무스탄시르 2세로 즉위했지만, 그와 그의 후손들은 맘루크의 꼭두각시였으며, 더 넓은 무슬림 세계에서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들은 훗날 오스만 제국에 의해 찬탈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20세기까지 칼리프 칭호를 유지했다. 또한, 바그다드에서 타브리즈와 같은 도시로 권력 이동이 일어났으며, 타브리즈는 훌라구가 포위 공격 이후 건국한 일 칸국의 수도였다.

바그다드 함락이 시대 규정적인 사건으로 제안된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칼리프 시대의 종말은 이슬람 세계에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무슬림 작가들은 전통적으로 이슬람 황금 시대의 쇠퇴와 결과적으로 서구 세계의 부상을 이 사건 하나로 돌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단순하고 게으르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16세기 역사가의 자주 인용되는 설명에 따르면 바그다드의 도서관에서 너무 많은 책들이 티그리스 강에 던져져서 "강의 색깔이 그들의 무리 때문에 검게 변했다"고 기록했지만, 역사학자 미칼 비란은 포위 공격 후 2년 이내에 대규모 도서관이 학습과 교육을 위해 다시 문을 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훌라구와 일 칸국의 통치자로서 그의 후계자들은 음악 및 문학 전통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장려했다. 1393년과 1401년 티무르에 의해, 그리고 1534년 오스만인에 의한 점령과 같은 후속 포위 공격이 도시의 장기적인 주변화를 확실히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몽골의 침입이 수천 년 동안 메소포타미아를 유지해 온 관개 시설의 대부분을 파괴했다고 주장한다. 관개 수로는 군사 전략으로 끊겼고 복구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떠났고, 관개 시설을 유지할 인력이나 조직이 부족하여 시설은 고장 나거나 토사가 쌓였다. 이 이론은 2000년 'A History of Inner Asia'에서 역사가 스바트 소우체크가 제시했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농업 쇠퇴의 주된 원인으로 염류집적을 지목한다.[57]

6. 1. 바그다드의 몰락과 이슬람 세계의 충격

훌라구는 바그다드 재건을 위해 몽골 병력 3,000명을 남겨두었다. 아타 말릭 주베이니는 구오 칸이 쿠빌라이 칸송나라 정복을 돕기 위해 원나라로 돌아가자 바그다드, 하 메소포타미아, 후제스탄의 총독이 되었다.[58] 훌라구의 정교회 교도 아내인 도쿠즈 카툰은 바그다드의 기독교도 거주민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중재했다.[59] 훌라구는 네스토리우스 가톨리코스 마르 마키카에게 왕궁을 수여했고, 그를 위해 성당을 지으라 명령하였다.[59]

초기에 바그다드 함락은 이슬람 세계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바그다드는 점차 경제 중심지가 되었고 국제 무역, 화폐 주조, 종교 업무가 번성하였다.[60] 몽골의 고위 다루가치가 그 이후에 바그다드에 상주했다.[61]

칭기즈 칸의 손자로 1252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베르케는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파괴한 것에 분노하였다. 무슬림 역사가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는 베르케 칸이 몽케 칸에게 (몽케가 중국에서 사망한 것을 모르고) 바그다드 공격을 항의하는 서신을 보냈다고 인용하였다. "그 (훌라구)는 무슬림들의 모든 도시들을 약탈하였습니다. 신의 도움으로 저는 너무나 많은 무고한 피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몽골 형제인 훌라구와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해 주저했음에도, 킵차크 칸국의 경제적 상황이 일 칸국과 전쟁을 선포하도록 이끌었다. 이 분쟁은 베르케-훌라구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62]

1258년 2월 13일, 바그다드 약탈이 시작되었다. 이는 몽골 제국에 저항하는 행위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계산된 결정이었다. 사예드(Sayyid), 몽골과 교역하던 학자, 상인, 그리고 훌라구의 아내 도쿠즈 카툰이 기독교 신자였기에 그녀의 도움을 받은 도시의 기독교인들은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져 집을 표시하도록 지시받았고, 그들의 집은 안전하게 보존되었다. 도시의 나머지 지역은 일주일 동안 약탈과 살육의 대상이 되었다. 13세기 아르메니아 역사가 키라코스 간자케치에 따르면, 훌라구 군대의 기독교인들은 바그다드 약탈에 특별한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후대의 이슬람 작가들은 80만에서 200만 명의 사망자를 추산했고, 훌라구는 프랑스의 루이 9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군대가 20만 명을 살해했다고 언급했다. 생존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전염병으로 인해 수치가 부풀려졌을 수 있으며, 학자들은 이것이 흑사병의 전조였는지, 아니면 흑사병의 발병이었는지 논쟁해 왔다.

약탈 이틀째인 2월 15일, 훌라구는 칼리프 궁전을 방문하여 알-무스타심에게 그의 보물을 공개하도록 강요했다. 일부는 궈칸과 같은 지휘관에게 분배되었지만, 대부분은 마차에 실려 카라코룸의 몽케 칸에게 또는 훌라구가 매장될 아제르바이잔의 샤히 섬으로 운송되었다. 궁전을 마키카에게 교회로 사용하도록 허가한 후, 훌라구는 칼리프를 조롱하며 연회를 열었다. 당시 자리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나시르 알딘 알투시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기록했다.

이 사건은 마르코 폴로와 같은 기독교 작가들의 저술에 재현된 민담의 출처일 가능성이 높다. 훌라구는 알-무스타심을 그의 보물로 둘러싸인 감옥에 가두었고, 그는 4일 만에 굶어 죽었다. 실제로는 2월 20일, 훌라구가 약탈과 살인을 중단하고 점점 더 악취가 나는 공기를 피하기 위해 도시에서 야영지를 옮긴 후, 알-무스타심은 그의 가족과 측근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몽골에게 큰 금기였던 왕족의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칼리프는 말린 양탄자에 싸여 말에 짓밟혀 죽었다. 훌라구는 알-무스타심을 처형할지 여부를 놓고 논쟁했지만, 결국 칼리프 국가가 전능하고, 무적이며, 침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신화를 깨기 위해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후대의 작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알-알카미가 몽골에게 바그다드를 배신했다면, 훌라구는 그를 처형했을 것이다. 이것이 모든 배신자에 대한 몽골의 정책이었다. 대신, 칼리프가 어리석은 길을 가지 않도록 설득하려는 그의 노력 때문에, 그는 재상으로 재임명되었지만,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사망했다. 호라즘 출신의 다루야치(다루야치|감독관mn)인 알리 바아타르를 그 지역에 임명하고 3,000명의 군인을 도시에 주둔시킨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재건하고 바자르를 열라는 지시를 내렸다. 3월 8일, 그는 이 지역을 떠나 북쪽으로 하마단을 거쳐 아제르바이잔으로 이동하여 1년 동안 머물렀다.

바그다드의 함락은 500년 된 아바스 왕조 칼리프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비록 왕조의 한 구성원이 결국 카이로에 도착하여 맘루크 왕조에 의해 알-무스탄시르 2세로 즉위했지만, 그와 그의 후손들은 맘루크 국가의 꼭두각시였으며 더 넓은 무슬림 세계에서 큰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나중에 오스만 제국에게 찬탈당했고, 오스만 제국은 20세기까지 칼리프 칭호를 유지했다. 또한 바그다드에서 타브리즈와 같은 도시로 권력 이동을 나타냈으며, 타브리즈는 일 칸국의 수도였고, 일 칸국은 훌라구가 포위 공격 이후에 건국한 칸국이었다.

바그다드의 함락은 시대 규정적인 사건으로 제안된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칼리프 시대의 종말은 이슬람 세계에 중대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무슬림 작가들은 전통적으로 이슬람 황금 시대의 쇠퇴와 결과적으로 서구 세계의 부상을 이 사건 하나로 돌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단순하고 게으르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16세기 역사가의 자주 인용되는 설명에 따르면 바그다드의 도서관에서 너무 많은 책들이 티그리스 강에 던져져서 "강의 색깔이 그들의 무리 때문에 검게 변했다"고 기록했지만, 역사학자 미칼 비란은 포위 공격 후 2년 이내에 대규모 도서관이 학습과 교육을 위해 다시 문을 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훌라구와 일 칸국의 통치자로서 그의 후계자들은 음악 및 문학 전통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장려했다. 1393년과 1401년 티무르에 의해, 그리고 1534년 오스만인에 의한 점령과 같은 후속 포위 공격이 도시의 장기적인 주변화를 확실히 했다.

많은 역사적 기록이 몽골군의 잔학 행위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바그다드의 시민들은 도망치려 했지만 몽골군에게 붙잡혀, 여자는 유아부터 노파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강간당하고,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살되었다. 14세기 역사가 와싸프는 "사망자는 수십만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 뉴요커의 이안 프레이저는 "20만 명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집계했다"고 기록했다.[6] 20만에서 80만 명[2], 또는 200만 명[3]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몽골군은 시가지를 유린하고, 모스크, 궁전, 도서관, 병원을 약탈하고 파괴하여, 여러 세대에 걸쳐 보존되어 온 웅대한 건축물은 소실되었다. 약학에서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귀중한 서적을 소장하고 있던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은 파괴되었다.[7] 생존자는 "몽골군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의 피로 티그리스 강이 붉게 물들었고, 이어서 버려진 서적의 잉크로 티그리스 강물이 검게 변했다"고 증언했다.

무스타심은 곽간에게 붙잡혀 몽골군에 의한 시민 학살과 재보 약탈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후 무스타심은 융단에 말려 몽골군 군마에게 밟혀 죽었다. 이는 귀족에게 죽음을 내릴 때의 몽골식 예법이었다. 몽골군은 무스타심의 아이들도 살해했고, 집사에 따르면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은 몽골로 보내졌다.

몽골군이 진지를 일부러 바그다드의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옮길 정도로, 대량의 시체에서 풍기는 부패 냄새가 심했다고 한다. 몽골군은 항복을 거부한 도시는 본보기로 철저하게 파괴했지만, 항복한 도시는 파괴하지 않았다. 이것이 몽골군의 전술이었다.

그 후, 몽골군은 시리아에 침공했지만, 무스타심의 삼촌을 칼리프로 옹립한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상대로 1260년의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대로 중동에서 철수했다.

6. 2. 베르케의 분노와 베르케-훌라구 전쟁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1252년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베르케는 훌라구바그다드를 파괴한 것에 분노하였다. 무슬림 역사가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는 베르케 칸이 몽케 칸에게 (몽케가 중국에서 사망한 것을 모르고) 바그다드 공격을 항의하는 다음 서신을 보냈다고 인용하였다. "그 (훌라구)는 무슬림들의 모든 도시들을 약탈하였습니다. 신의 도움으로 저는 너무나 많은 무고한 피에 대해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62]

처음에는 몽골 형제인 훌라구와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해 주저했음에도, 킵차크 칸국의 경제적 상황이 일 칸국과 전쟁을 선포하도록 이끌었다. 이 분쟁은 베르케-훌라구 전쟁으로 알려져 있다.[62]

6. 3. 농업 쇠퇴 논쟁

일부 역사가들은 몽골의 침입이 수천 년간 메소포타미아를 유지해온 관개 시설의 대부분을 파괴했다고 믿는다. 관개 수로들은 군사적 전략의 일환으로 끊겼고 수리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떠나서 관개 시설을 유지할 충분한 인력이나 조직을 갖추지 못하였고, 시설은 고장나거나 토사가 쌓이고 말았다. 이 이론은 2000년 서적 'A History of Inner Asia'에서 역사가 스바트 소우체크가 제시한 것이다(그가 처음인 것은 아니다).

다른 역사가들은 농업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염류집적을 제시한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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