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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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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도 대전은 후한 말 조조와 원소 간에 벌어진 대규모 전투로, 조조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후한은 군웅 할거 시대였으며, 조조는 헌제를 옹립하고 주변 군벌을 제압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원소는 명문가 출신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며 조조와 대립했다. 유비가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원소와 연합하자 조조는 유비를 격파하고 관도에 주둔했다. 원소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조를 공격했지만, 조조는 허유의 투항을 통해 원소군의 군량 수송로를 기습하여 승리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원소는 세력이 약화되어 사망하고, 조조는 화북 지역을 장악하며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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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 대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후한 말기
시기200년 9월 ~ 11월
장소현재 허난성 중무현 북동쪽
결과조조의 결정적인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조
교전국 2원소
지휘관 및 지도자
조조군 지휘관조조
조홍
곽가
순욱
정욱
순유
관우
장료
허저
악진
서황
우금
하후연
원소군 지휘관원소
순우경
곽도
전풍
저수
심배
안량
문추
장합
원담
유비
병력 규모
조조군 병력약 40,000명
원소군 병력약 110,000명
피해 규모
조조군 피해약 8,000명
원소군 피해약 80,000명
관련 전투
관련 전투 목록두시진 전투
백마 전투
연진 전투
관도 전투
창정 전투
기타
전투 지도
전투 지도. 백마 전투, 연진 전투 당시의 이동 경로를 보여준다. 측면 공격 시도는 표시되지 않았다. 황하는 수세기에 걸쳐 흐름이 바뀌었고, 묘사된 장소는 더 이상 강을 기준으로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

2. 배경

당시 후한은 황제의 권위가 유명무실해지고, 각지에서 군웅들이 할거하는 혼란의 시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조원소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조조와 원소는 어린 시절 친구 사이였다.[1]

조조는 환관 가문 출신이었지만, 아버지 조숭삼공(三公) 중 하나인 태위(太尉)까지 올랐다. 조조 자신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헌제(献帝)를 옹립하고, 여포(呂布), 원술(袁術), 장수 등을 차례로 격파하며 하남(河南)에서 강소성(江蘇省) 장강(長江) 이북에 걸친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원소는 4대에 걸쳐 삼공을 배출한 명문가 출신으로, 뛰어난 인물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원소는 한복, 공손찬(公孫瓚), 장연, 공융(孔融) 등의 군벌들을 격파하고 하북, 산서, 산동 지역을 장악하여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조조는 처음에는 원소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웠고, 이후에도 원소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조조가 독단적으로 헌제를 옹립하면서 둘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지고 대립이 심화되었다. 원소는 공손찬을 격파한 후 정예병 10만을 선발하여 조조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1]

이때 원소의 참모 전풍(田豊)과 저수(沮授)는 백성들이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고, 천자를 옹립한 조조를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원소의 출정을 만류했다. 그러나 곽도(郭圖) 등은 조조의 국력이 약하고, 황실이 아닌 역신 조조를 공격하는 것이므로 명분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반박하며 저수의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소는 곽도 등의 주장을 받아들여 저수의 권한을 셋으로 나누고, 저수, 곽도, 순우경(淳于瓊)에게 각각 권력을 분배했다.

199년, 유비가 서주(徐州)에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원소와 손을 잡았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격파했고, 유비는 원소에게 의탁했다.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그의 객장이 되었다. 전풍은 이 틈을 타 조조의 배후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으나,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는 원소가 의심이 많아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우금전에 따르면, 원소는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는 틈을 타 연주를 공격했다. 당시 우금은 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원소군의 공격을 굳게 막아냈다. 또한 악진 등과 함께 황하 서쪽으로 이동하여 원소군의 수비 초소 30여 개를 불태우고 하무(何茂), 왕마(王摩) 등을 항복시켰다. 그러나 다른 기록들에서는 원소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어, 원소의 움직임은 견제 수준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3. 전개

조조원소는 어린 시절 친구였으나, 후한 말 군웅할거 시대에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며 대립하게 되었다. 조조는 헌제를 옹립하여 정당성을 확보하고 하남과 강소성 장강 이북 지역을 지배했다. 반면 원소는 명문 출신으로 하북, 산서, 산동 지역을 지배하며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다.

199년 유비가 서주에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원소와 손을 잡았다. 조조는 유비를 격파했고, 유비는 원소에게 의탁했다.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혀 객장으로 지내게 되었다. 이때 원소의 참모 전풍은 조조의 배후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으나,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다만, 다른 기록에는 원소가 의심이 많아 움직이지 않았다고도 한다. 우금전에 따르면 원소는 연주를 공격했으나, 우금이 연진을 굳게 지키며 막아냈고, 오히려 하무, 왕마 등을 항복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200년 원소는 조조에게 선전 포고를 하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원소는 진림에게 조조를 비난하는 격문을 작성하게 하였고, 주력 부대를 리양(黎陽)으로 진군시켰다. 당시 원소의 군대는 기병 1만 명을 포함하여 최대 11만 명에 달했다.

3. 1. 백마 전투와 연진 전투

200년, 원소는 격문을 돌려 조조의 부정을 성토하고 10만 대군을 편성해 조조와의 결전을 시작했다. 전풍은 지구전을 주장했으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풍을 투옥했다.[14]

원소는 안량을 보내 백마를 공격하게 했다. 조조 측은 순유의 계책에 따라 연진에서 황하를 건너는 척하며 원소군을 분산시켰다. 이후, 장료관우를 보내 안량을 공격했고, 관우는 안량의 목을 베었다.[15]

조조는 백마의 백성들을 철수시켰고, 원소는 문추를 보내 추격하게 했다. 그러나 조조는 다시 순유의 계책에 따라 수송대를 미끼로 사용해 문추군의 대열을 어지럽힌 뒤 서황 등이 습격해 문추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16]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문추를 죽인 것으로 나온다.

3. 2. 관도 대전

조조군은 관도로 물러났고, 원소 진영에서는 저수가 지구전을 주장했으나, 원소는 이를 듣지 않았다.[17] 원소는 조조군을 압박하며 토산과 지하도를 파는 등 공격했으나, 조조는 이에 맞서 방어했다. 원소는 망루를 만들어 화살을 쏘았으나, 조조는 발석차를 만들어 대응했다.

전황이 지구전 양상을 띠자, 조조는 순욱에게 철수를 상담했으나, 순욱은 기회를 노리면 승리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4] 여남에서 유벽이 원소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키자, 원소는 유비를 파견했으나, 조조는 조인을 보내 이들을 격파했다. 조조는 서황사환에게 원소군의 수송대를 공격하게 하여 수천 대의 곡물 수송차를 불태웠다.

원소 진영의 허유는 가족의 투옥과 계책 거절에 불만을 품고 조조에게 투항하여 오소의 군량고 위치를 알렸다.[19] 조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오소를 기습하여 군량과 군수 물자를 소각하고, 순우경을 참수했다.[20] 원소는 장합고람에게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게 했으나, 오소의 패배 소식을 들은 장합과 고람은 조조에게 투항했다.[21] 원소는 800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도망쳤고,[6] 나머지 군사들은 대혼란에 빠져 무너졌다.

4. 관도 대전 이후

원소는 관도 대전에서 패배한 후, 기주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패잔병을 수습했다(201년 4월).[1] 이 과정에서 전풍을 처형했는데, 이는 원소에 대한 주요 비판점 중 하나이다.[1]

조조는 사로잡은 원소의 군사들을 모두 생매장했다.[1] 생매장된 병사의 수는 7만 또는 8만 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조 군의 병력이 1만 명이었다는 기록과 함께 조조의 승리를 부각하기 위한 과장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1]

조조 역시 원소의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어 내부 정리에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따라서 관도 대전 이후 약 1년간 원소와 조조는 황하를 경계로 대치했다.[1]

202년 5월, 원소는 관도 대전의 패배로 건강이 악화되어 피를 토하며 사망했다.[1] 원소의 아들 원상이 뒤를 이었으나, 원소의 조카이자 장남인 원담이 후계 자리를 주장하며 불복했다. (원담은 원소의 장남이지만, 원소가 그를 죽은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호적상으로는 원소의 조카이다.) 이로 인해 원소 세력은 크게 흔들렸다.[1] 조조는 기주를 공격했으나, 203년 4월 여양에서 원상에게 패배하여 철수했다.[1]

이후 원담과 원상 간의 내전이 발발했고, 조조는 원담과 연합하여 원상을 공격해 멸망시켰다.[1] 원소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조조는 원담마저 죽이고 기주를 평정했다(205년 1월).[1] 이로써 조조는 당대 최대 세력으로 부상했다.[1]

5. 의문점

진수가 쓴 삼국지 본문에는 원소군 10여만, 조조군 1만에 불과하다고 적혀 있으나, 배송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의문을 제기했다.[22]

# 조조가 세력을 일으켰을 때 5천의 병사를 갖고 있었고, 그 후 황건적 잔당 30만을 항복시키고, 기타 수많은 세력을 병합하였다. 그런데도 겨우 1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적다.

# 원소는 수십 리에 걸쳐 둔영을 연결하며 군대를 진군시켰는데, 조조가 원소군의 1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전력으로 이에 똑같이 대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원소군이 조조군의 10배였다면 이치상 포위하고 출입을 단절해야 하나, 조조가 별군을 나눠 원소군을 공격할 때도 이것이 저지된 일이 없었던 것은 원소의 군사 수가 조조를 완전히 압도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 원소군이 붕괴한 후 원소군의 병사 8만을 붙잡았다고 하는데, 고작 1만에 불과한 병사로 8만 명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배송지는 조조의 군략을 돋보이기 위해 과장된 기록이 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 국연전에서는 도적 무리를 격파한 상황에서 이를 보고할 때 상주문에 1을 10으로 과장해서 기재하는 것이 그 시대 통례라고 일지에 기술되어 있다.[22] 다만 타이완 삼군대학의 『중국 역대 전쟁사』는 순욱의 "조공의 병력은 원소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편지를 그대로 싣고 있으며, 원소군이나 조조군의 수에 대해서는 과장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사료도 있다.

196년부터 둔전제를 실시하고 있는 조조군이 1만 명의 병사가 먹을 식량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고, 병력이 많은 원정군인 원소군이 식량 부족에 대한 걱정을 그다지 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 동탁, 이각, 조조, 탁융 등이 관도 대전 시점에서의 조조의 지배지(연주, 예주, 사예, 서주)에서 학살·약탈을 자행하여 조조의 지배지는 매우 황폐했다. 반면 원소의 본거지인 기주는 중국 북부에서 으뜸가는 풍요로운 주였다.[23]

# 이민족을 회유하면 외부의 위협이 줄어드는 원소에 비해, 산서나 남방에 아직 유표, 손책, 마등 등이 남아 있어 함부로 군사를 낼 수 없는 조조군의 실정은 상당히 다르다. 게다가 전쟁 전에 유비가 서주에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킨 점이나, 전쟁 중에는 원가의 근거지인 여남에서도 반란이 일어난 점, 더 나아가 허창 주변까지 적이 침입한 점 등으로 미루어, 전격적으로 하남을 제압한 조조의 치세에 대한 구심력은 200년에는 아직 확고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등을 고려하면 단정하기 어려우며, 정설을 보기는 어렵다. 덧붙여 후한 중기 무렵에는 연주·예주·사례·서주(관도 대전 당시 조조 지배 지역)의 총 인구가 기주·청주·병주·유주(관도 대전 당시 원소 지배 지역)의 총 인구보다 많았지만[24], 관도 대전 시점에서는 잇따른 전란으로 인해 후한의 호적 인구는 7분의 1 이하로 줄어들었다.[25]。 『삼국지』 장제전에 따르면, 경초 연간에 장제는 "의 호적 인구는 후한(치안이 안정되었던) 시대의 큰 군 하나 정도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영천은 선제(조조)가 군사를 일으킨 곳이다. 관도 대전에서는 주변 지역이 와해되어 멀리 있는 자나 가까이 있는 자나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지만, 이 군만은 절의를 지켜 젊고 튼튼한 자는 창을 들고 싸웠고, 늙고 약한 자는 군량을 짊어졌다"라고 "문제기"의 조비의 조칙에 있는 것처럼, 조조는 안팎으로 아직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 위협을 수없이 안고 있었던 것도 분명하며, 쉽게 대전에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군은 10만, 원소군은 70여만"으로 묘사된다.

6. 평가 및 영향

송나라의 역사가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원소가 관대하고 유능했지만, 완고하고 자만심이 강해 합리적인 조언을 따르지 않아 패배했다고 평가했다.[7]

국민당은 전통적인 역사 서술 방식에 따라 조조는 유능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로, 원소는 평범하고 오만한 인물로 평가했다.[9] 반면,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은 성고 전투, 곤양 전투, 적벽 대전, 소정 전투, 비수 대전과 함께 관도 대전을 전략적 후퇴의 예시로 들었다. 약한 쪽이 먼저 물러서서 강한 쪽을 지연 작전으로 묶어두고 격파했다는 것이다.[8] 마오주의적 관점에서는 원소의 판단 오류를 주목하며, 강한 적도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므로 약한 쪽은 기다리면 된다고 주장한다.[9]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는 원소를 대지주 관료 계급, 조조를 중소 지주 계급의 대표로 보아, 이 전투를 계급 투쟁의 산물로 해석한다.[10]

역사학자 칼 레반은 조조가 지형, 군수, 전술 간의 관계를 원소보다 잘 이해했기 때문에 관도를 방어 지점으로 선택하여 승리했다고 본다. 조조는 원소를 관도 남쪽으로 유인하여 보급선을 늘려 군사적 불리함을 이용해 승리했다.[11]

호주의 중국학자 라페 드 크레스피니는 원소가 조조보다 우위에 있었다는 전통적인 관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원소는 조조만큼 영토를 안정적으로 장악하지 못했고, 공손찬을 제거하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점을 들어, 원소가 조조의 약점을 이용하지 못한 것은 병력 부족 때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원소는 조조의 위협에 맞서 본거지를 직접 공격했지만, 조조에게 속아 패배했다.[12]

7. 기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도 대전이 거의 나오지 않는 듯이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서술 관점이 관도 대전 자체가 아니라 유비원소에게서 벗어나는 일이나, 관우의 오관참장(五關斬將, 또는 오관육참(五關六斬)이나 단기주천리(單騎走千里))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읽고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1]

적벽대전에 비해 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의 중요한 전투임에도 《삼국지연의》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2]

참조

[1] 서적 Leban, p. 342
[2] 서적 Leban, p. 360
[3] 서적 Variously recorded as Han Xun (韓荀) or Han Ruo (韓若). Leban, p. 364
[4] 서적 Leban, p. 365
[5] 서적 Leban, p. 366
[6] 서적 Pei Songzhi wrote in an annotation in Cao Cao's biography in ''Sanguozhi'' that the sources he have seen wrote that Cao killed either 70000 or 80000 of Yuan's troops (裴松之注:“诸书皆云公坑绍众八万,或云七万。”) Pei Songzhi's annotation in ''Sanguozhi'', vol.01
[7] 서적 de Crespigny (1996), Jian'an 5: HH
[8] 서적 ''Selected Works of Mao Zedong'', I, pp. 197–98. Cited in Leban, p. 377
[9] 서적 Leban, p. 378
[10] 서적 Leban, p. 379
[11] 서적 Leban, p. 380
[12] 서적 de Crespigny (2010), pp. 147–152
[13] 서적 裴松之らはもっと多かったとしており、中国の教科書『九年義務教育三年制初級中学教科書 中国歴史第1冊』では40,000とする。
[14] 문서 田豊の策を袁紹が聞き入れず、田豊に苛烈な処遇を施したのは、袁紹が幕僚の[[逢紀]]の讒言を信じていたためと言われる
[15] 문서 沮授が顔良を単独起用するのは良くないと諌めたが、袁紹は聞き入れなかったという説があるが、事態と合致しない
[16] 문서 『三国志演義』では関羽が顔良に続いて文醜も討ち取ったこととなっているが、これは創作である
[17] 문서 [[荀彧]]は「袁紹軍は兵は多いが、軍法が整っていない」と語っている。
[18] 문서 「武帝紀」には、曹操は戦後にこれらの文章を見つけたがあえて咎めず握りつぶしたとある
[19] 문서 荀彧は「袁紹は審配・逢紀に留守を任せているが、彼らは許攸の家族が法を犯しても許せないだろう。許さなければ許攸は袁紹を裏切るだろう」と語っている。「武帝紀」には、許攸の強い物欲を袁紹が満足させ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ので、許攸は袁紹を裏切ったとある
[20] 문서 「楽進伝」の記述。一方で『曹瞞伝』によれば、淳于瓊は捕らえられ鼻を削がれ、曹操はこれを帰服させようとしたが、先に帰服した許攸が「鏡を見る度に淳于仲簡は我らに恨みを抱くでしょう」と讒言したため、淳于瓊は斬首されたとしている
[21] 문서 この時、荀攸は「張郃が降伏したのは自分の計略が採用されなかったことを怒って降伏したのです」と曹洪に言っている。張郃が降伏した理由は諸説あり、郭図が責任追及を恐れて張郃のことを讒言したとも言われるが、[[裴松之]]はこの説を疑っている(詳しくは張郃・[[郭図]]の項目を参照)
[22] 문서 『三国志』の本文には、袁紹が持っている総兵力は十数万とも書かれている。官渡の戦いでの袁紹軍の兵力は諸説あるが、歴史家の[[孫盛]]は10万くらいだろうと推測している。
[23] 문서 『三国志』[[崔琰]]伝によれば、曹操は冀州を制圧した後、曹操は「冀州(官渡の戦いの時、袁紹の支配地だった)の戸籍を調べたところ、30万人の軍勢を手に入れられそうだ。従って、冀州は大州と言えるだろう。」と言っている
[24] 문서 「[[漢代の地方制度]]」参照
[25] 문서 「[[三国時代 (中国)#人口減少]]」参照
[26] 문서 연의에서는 순우경에게 업무태만죄를 적용해 그의 코와 귀와 손가락을 베어 추하게 만든 뒤 원소에게 돌려보낸 것으로 나온다。 참고로 조조는 처음부터 순우경의 재능을 아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순우경은 "내가 진 건 다 하늘의 뜻이다"라며 거절하자 어쩔 수 없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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