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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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트비아 유대인은 16세기 리보니아 전쟁 이후 라트비아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17~18세기에는 쿠를란트 공국과 라트갈레 지역을 중심으로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18세기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이후 라트비아 유대인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성장했고, 1918년 라트비아 독립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으로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7만 5천 명의 유대인이 희생되었고, 소련의 점령과 추방으로 공동체는 큰 피해를 입었다. 1991년 라트비아 독립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미국으로의 이민이 이어지며 인구가 감소했지만, 현재도 라트비아에는 유대인 사회가 존재하며, 종교 시설과 문화 단체가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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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트비아 유대인 | |
|---|---|
| 기본 정보 | |
| 그룹 명칭 | 라트비아 유대인 |
| 현지 명칭 | Latvijas ebreji יהדות לטביה |
| 사용 언어 | 히브리어 러시아어 라트비아어 독일어 (역사적으로) 이디시어 |
| 종교 | 유대교 |
| 관련 집단 | 유대인 아슈케나즈 유대인 벨라루스 유대인 러시아 유대인 리투아니아 유대인 에스토니아 유대인 폴란드 유대인 |
| 거주 지역 | 라트비아 |
| 인구 | 8,094명 (2021년, 카라임 및 크림차크인 포함) |
| 라트비아 유대인 역사 | |
| 관련 문서 | 라트비아의 유대인 역사 |
2. 라트비아 유대인의 역사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라트비아 영토에는 약 19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35] 전쟁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러시아 내륙으로 추방되거나 전쟁 지역을 탈출하면서, 1920년에는 유대인 수가 79,644명으로 감소했다.[36] 소련과의 평화 조약 체결 이후 유대인들이 귀환하면서 1925년에는 95,675명으로 증가하여 독립 국가 시기 최대 유대인 인구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유대인 인구는 점차 감소하여 1935년에는 93,479명이 되었다. 이는 젊은 세대의 이민과 출산율 감소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라트비아에는 거의 10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홀로코스트에서 학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라트비아의 유대인 인구는 1970년 거의 37,000명으로 정점을 찍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특히 1990년대 공산주의 붕괴 이후 많은 라트비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과 미국(특히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으로 이주했다.
1993년 6월 11일부터 17일까지 라트비아 유대인들의 제1차 세계 회의가 리가에서 열렸으며, 이스라엘, 미국 등 여러 나라의 대표들이 참석했다.[21] 같은 해 옐가바와 비에르니에키 숲에서 홀로코스트 기념식이 열렸는데, 비에르니에키 기념비에 새겨진 "유덴프라이"라는 단어는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라트비아 민족주의 언론에는 반유대주의적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2. 1. 초기 정착과 발전 (16세기~18세기)

16세기 후반 리보니아 전쟁 이후, 라트비아 영토가 덴마크,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유대인들이 라트비아에 도착하기 시작했다.[4] 최초의 유대인 공동체는 1570년 이후 오늘날의 필테네와 아이즈푸테 근처에 형성된 쿠를란트 공국이었다. 17세기에는 폴란드 왕의 봉신이었던 쿠를란트 공국에 많은 유대인들이 도착했다. 유대인들은 세금 징수, 환전, 상업 업무를 담당했고, 야콥 공작(1610–1681)의 경제 개혁을 지원했다. 보수적인 지주들이 유대인을 추방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18세기에는 에른스트 요한 폰 비론 공작과 그의 아버지 페테르 폰 비론이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쿠를란트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금융 보좌관 궁정 유대인 아론 레비 립만(1741년까지 재직)이었는데, 그의 요청에 따라 많은 유대인 출신 상인, 의사, 교사들이 쿠를란트로 왔다.[5][6] 그들은 유대인 해방 사상인 하스칼라를 가져왔다. 유대인들은 룬달레 궁전과 옐가바 궁전 건설에도 참여했다. 1793년, 옐가바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보호와 종교적 관용에 대해 페테르 폰 비론 공작에게 감사를 표했다.[7][8]
라트비아 동부 지역인 라트갈레에서는 17세기와 18세기에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에서 유대인들이 왔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이디시 문화권에 속했다. 그들의 공동체 생활은 상당 부분 "카할"(자치 정부)에 의해 관리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유대인들이 리가 또는 비제메에 체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예카테리나 2세 통치 기간(1766년 이후) 동안 유대인 상인들은 특정 구역에 거주한다는 조건하에 6개월 동안 리가에 체류할 수 있었다. 1785년에는 슬로카의 유대인들이 리가에 더 오랫동안 임시 체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9]
2. 2. 러시아 제국 편입과 변화 (18세기~20세기 초)
18세기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발트해 연안의 리보니아와 쿠를란트 공국 유대인들이 라트비아 유대인의 핵심을 형성했다. 1721년 러시아는 대북방 전쟁을 통해 스웨덴으로부터 리가를 포함한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정복했다. 1795년에는 폴란드 분할로 인해 폴란드의 종주권 하에 있던 자치 쿠를란트 공국이 러시아에 병합되었다.[4] 이 두 지역은 정착 지역 밖에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일부가 되기 전 법적으로 거주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유대인만 거주가 허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졸업생이나 "유용한" 직업 종사자 등 특별한 "특권"을 가진 유대인들이 정착 권한을 받으면서 발트해 지역의 유대인 인구는 점차 증가했다. 19세기 중반, 리보니아 주에는 약 9,000명의 유대인이 있었다.1897년까지 유대인 인구는 26,793명(인구의 3.5%)으로 증가했으며, 그중 약 3/4이 리가에 거주했다. 19세기 중반 쿠를란트에는 22,734명의 유대인이 있었으며, 1897년 러시아 제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약 51,072명의 유대인(인구의 7.6%)이 거주했다. 쿠를란트 유대인들은 러시아 유대인 역사 내에서 특별한 집단을 형성했는데, 한편으로는 독일 문화의 영향을,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 리투아니아 유대인의 영향을 받았다. 하스칼라는 리보니아와 쿠를란트 공동체에 일찍 침투했지만, 서유럽만큼 동화가 크게 진전되지는 않았다.[5][6]
쿠를란트 유대인은 동유럽과 독일 유대인의 특징을 결합하여 독특한 성격을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4월, 러시아군이 쿠를란트에서 철수할 때 러시아 군 당국은 수천 명의 유대인을 내륙 지방으로 추방했다.[35] 독립 공화국 수립 후 상당수가 라트비아로 귀환했다.
2. 3. 라트비아 독립과 유대인 사회 (1918년~1940년)
1918년 라트비아 독립 이후, 유대인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큰 변화와 발전을 겪었다.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라트비아 영토에는 약 19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했으나,[10] 전쟁으로 인해 많은 수가 러시아 내륙으로 추방되거나 전쟁 지역을 탈출했다. 1920년 라트비아 유대인 인구는 79,644명(전체 인구의 5%)으로 감소했다.[11] 그러나 소련과의 평화 조약 체결 이후 유대인들의 귀환이 시작되어 1925년에는 95,675명으로 증가, 독립 국가 시기 최대 유대인 인구를 기록했다. 1935년 기준 주요 유대인 거주 지역은 리가 (43,672명), 다우가프필스 (11,106명), 리에파야 (7,379명)이었다.
유대인들은 라트비아의 산업, 상업, 은행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35] 특히 목재, 린넨 원자재 수출, 석유, 석탄, 섬유 수입 무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미국 유대인 공동 분배 위원회와 유대인 식민 협회의 지원을 받아 대출 은행 네트워크와 협동 신용 단체를 설립, 운영했다. 그러나 유대인 은행과 협동 사회는 공공 신용 분야에서 차별을 받았다.[35] 유대인들은 주로 목재, 성냥, 맥주, 담배, 가죽, 섬유, 통조림 식품(특히 생선), 제분 산업에 종사했다.
라트비아 의회에서 유대인들은 다양한 정당을 통해 대표되었다. 라트비아 인민 위원회에는 7명의 유대인 대표가 있었으며, 그중에는 Pauls Mincs|폴 민츠lv와 모르데하이 두빈이 포함되었다. 제헌 의회에는 9명의 유대인 대표가 선출되었으며, 이후 의회에서도 유대인 대표들은 꾸준히 활동했다. 주요 유대인 의원으로는 모르데하이 두빈(아구다스 이스라엘), 모르데하이 누로크(미즈라히), 마티자후 막시스 라제르손(Ceire Cion), 노이즈 마이젤(번드) 등이 있었다.
| 정당 | 제헌 의회 (1920) | 제1 사이마 1922 | 제2 사이마 1925 | 제3 사이마 1928 | 제4 사이마 1931 | |
|---|---|---|---|---|---|---|
| 아구다스 이스라엘 | – | 2 | 2 | 1 | 2 | |
| 번디스트 | – | 1 | 1 | 1 | – | |
| 유대 민주 블록 | – | – | – | 0 | – | |
| 유대 경제 블록 | – | – | – | 0 | – | |
| 유대 민족 블록 | 히스타드루스-하시오니트 | 5 | 2 | 0 | – | – |
| 유대 민족 민주당 | 0 | – | – | |||
| 미즈라히 | 1 | 2 | 1 | |||
| 유대 인민당 | – | 0 | – | – | – | |
| 유대 진보 협회 | – | – | – | – | 0 | |
| 루자 유대인 | 0 | – | – | – | – | |
| Ceire Cion | 1 | 1 | 1 | 1 | – | |
| 젬갈레 유대인 연합 명부 | – | – | – | – | 0 | |
1919년 라트비아 인민 평의회는 소수 민족의 문화적 자율성에 관한 법안을 통과시켰다.[12] 교육부 내에는 유대인 부서가 설치되었고, 야콥 란다우가 이를 이끌었다. 유대인 아이들을 위한 히브리어, 이디시어, 러시아어, 독일어 학교가 설립되었다. 1933년에는 98개의 초등학교, 18개의 중등학교, 4개의 직업 학교가 운영되었다. 유대인들을 위한 정부 교육 기관, 대중 대학교, 음악 아카데미, 야간 학교, 이디시어 극장, 문화 클럽 등 다양한 문화 시설 및 활동이 존재했다.
2. 4. 울마니스 정권과 유대인 사회의 위기 (1934년~1940년)
1934년 5월 15일, 칼리스 울마니스 총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 정치를 수립했다. 울마니스는 대통령으로 선포되었고, 그의 정부는 중립(국제 관계)을 지향했다.[10]울마니스 쿠데타 이후, 소수 민족의 "문화와 소수 민족" 교육과 모국어 교육에 제한이 가해졌다.[13] 이는 학교 및 전문, 정부 부문에서 라트비아어 사용을 표준화하려는 광범위한 움직임의 일부였다. 그 결과, 유대인 학교는 계속 운영되었지만 세속적인 이디시어 학교는 폐쇄되었다.[13]
이로 인해 시인 하임 나흐만 비알리크(Haims Nahmans Bjaliks|하임 나흐만 비알릭lv)와 역사가 시몬 두브노우(Šimons Dubnovs|시몬 두브노프lv)와 같은 저명한 유대인 작가들의 작품이 유대인 교육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특히 두브노우는 1938년 독일에서 라트비아로 안전을 위해 피신한 유대인 중 한 명이었다. (라트비아는 1938년 가을까지 난민을 계속 받아들였다.)[13]
모든 정당과 조직도 폐지되었다. 유대인 단체 중에서는 ''아구닷 이스라엘''만이 계속 운영되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사회생활은 활력을 유지했다. 유대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에 대한 제한의 영향으로 종교와 시오니즘의 영향력이 증가하여 일부는 팔레스타인으로 이민을 가도록 자극했다. 이는 또한 금지된 사회 민주당의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유대 지식인들은 시오니즘으로 기울었다.[13]
2. 5.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 (1940년~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라트비아에는 약 1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나,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대부분 학살당했다.1941년 7월, 독일-소련 전쟁 발발 직후 라트비아는 나치 독일에 점령되어 Reichskommissariat "Ostland"의 일부인 "Generalbezirk Lettland"가 되었다. 오토 하인리히 드렉슬러가 총판으로, 힌리히 로제가 리가에 본부를 둔 오스트란트 제국 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7월 말, 독일은 군정을 민정으로 대체하고 반유대주의 조례를 공포했다. 지역 협력자들로 구성된 민정부와 라트비아 장관들이 임명되었으며, 명목상 수장은 오스카르 단케르스였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 직전, 소련 당국은 14,000명의 라트비아 시민(수천 명의 유대인 포함)을 시베리아 등으로 추방했다. 나치 점령 기간 동안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소련 내부로 피신했으나, 약 75,000명의 라트비아 유대인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Einsatzgruppen ("특수 부대")은 라트비아 유대인 학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SS-여단 지도자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가 지휘하는 Einsatzgruppe A는 북부 러시아 전선과 점령된 발트해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슈탈레커의 보고서(1941년 6월 말~10월 15일)에 따르면, 1941년 10월 말까지 리가, 옐가바, 리예파야, 발미에라, 다우가프필스에서 30,025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1941년 12월 말까지 총 35,238명의 라트비아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라트비아 보조 경찰과 아라이스 코만도는 포그롬과 룸불라 학살 등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헤르베르츠 추쿠르스를 포함한 아라이스 코만도 주요 인물들은 잔혹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추쿠르스는 게토 청소 당시 유대인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리가 회당 방화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있다.
리가 게토에는 2,500명, 다우가프필스 게토에는 950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었다. 1941년 말부터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라트비아로 이송되었다. 약 15,000명의 "제국 유대인"이 "대 리가 게토"에 정착했고, 많은 수송선이 룸불라 및 비케르니에키 숲의 처형장으로 이송되었다. 1942년에는 카우나스 게토에서 온 약 800명의 유대인이 리가로 이송되어 일부는 리가 게토 지하 조직에 참여했다.
독일 점령군은 유대인들을 강제 노동 장소 근처의 "막사 수용소"에 수용했다. 살라스필스와 카이저발트 강제 수용소가 대표적이었다. 살라스필스 강제 수용소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많은 수감자들이 사망했다. 1943년 여름에 설립된 카이저발트 강제 수용소에는 리가, 다우가프필스, 리예파야 등 게토 생존자와 비유대인이 수용되었다. 1943년 9월 말 빌나 게토 유대인들이 카이저발트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4년 여름 소련군의 진격으로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카이저발트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은 슈투트호프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5년 4월 7일, 소련 언론은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점령 기간 동안 독일-파시스트 침략자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조사 임무를 맡은 특별 정부 위원회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 문서는 유대인 박해와 살해에 대한 장을 할애하고 있으며, 독일 점령하 라트비아에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나치들을 열거하고 있다.
2. 5. 1. 소련 점령과 유대인 탄압 (1940년~1941년)
소련은 1940년 6월 16일 라트비아를 침공했고, 8월에 유대인 시민 및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14] 가장 먼저 체포된 사람들은 시온주의 지도자 다비드 바르하프티그와 마하누드 알페린이었고,[14] 베타르(Betar)의 지도부도 추방되었다.[14]1941년, 소련은 누로크스, 두빈스 등 유대인 시민 지도자, 시온주의자, 보수주의자, 우익 사회주의자들을 체포했다.[14] 이들의 체포 명령은 S. 슈스틴이 승인했다.[14] 1941년 6월 13~14일 밤, 소련은 대규모 발트해 추방을 실행했고, 수천 명의 라트비아 유대인들이 라트비아인들과 함께 추방되었다. 추방된 모든 민족 집단 중에서 유대인이 다른 어떤 집단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었고, 특히 가혹한 환경으로 추방되었다.[15]
1,212명의 유대인 라트비아 시민(소련의 외진 곳으로 추방된 사람들의 12.5%)의 추방 기록이 보존되어 있지만, 추방된 유대인의 실제 수는 첫 번째 소련 점령 기간 동안 5,000명에서 6,000명 정도로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4][16][17] 나치 독일이 발트해를 침공하기 불과 일주일 전에 유대인 시민 지도자, 랍비, 국회의원, 전문직 및 상인 계급을 추방한 것은 유대인 공동체가 침공과 즉각적인 홀로코스트에 직면하여 조직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게 만들었다.
추방된 사람들 중에는 헌법 제정 의회 의원인 Īzaks Rabinovičs|이자크스 라비노비치lv, Īzaks Berss|이자크스 베르스lv, 제1 및 제3 세이마 부대표이자 분트(Bund)의 수장이었던 노이스 마이젤(Noijs Maizels), 그리고 다른 유대인 국회의원들이 포함되었다. 남성들은 가족과 분리되어 솔리캄스크 (페름), 뱌트카, 보르쿠타의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고,[14][18] 아내와 자녀들은 노보시비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등으로 보내졌다.[14] 추방의 결과로 약 절반이 사망했으며, 일부는 두 번 이상 추방되었다. M. 두빈스(M. Dubins)는 1956년에 두 번째 추방된 후 사망했다.[14]
2. 5. 2. 나치 독일 점령과 홀로코스트 (1941년~1944년)
1941년 7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소련 전쟁 발발 직후 라트비아는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 라트비아는 Reichskommissariat "Ostland"의 일부인 "Generalbezirk Lettland"로 지정되었고, 오토 하인리히 드렉슬러가 총판으로 임명되었다. 힌리히 로제는 리가에 본부를 둔 오스트란트 제국 판무관이었다. 독일은 1941년 7월 말 군정을 민정으로 대체하고 반유대주의 조례를 공포했다. 지역 협력자들로 구성된 민정부와 라트비아 장관들이 임명되었으며, 명목상 수장은 오스카르 단케르스였다.히틀러의 소련 침공 직전, 소련 당국은 14,000명의 라트비아 시민(수천 명의 유대인 포함)을 시베리아 등으로 추방했다. 나치 점령 기간 동안 상당수 유대인들이 소련 내부로 피신했으나, 약 75,000명의 라트비아 유대인들이 나치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Einsatzgruppen ("특수 부대")은 라트비아 유대인 학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SS-여단 지도자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가 지휘하는 Einsatzgruppe A는 북부 러시아 전선과 점령된 발트해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슈탈레커의 보고서(1941년 6월 말~10월 15일)에 따르면, 1941년 10월 말까지 리가, 옐가바, 리예파야, 발미에라, 다우가프필스에서 30,025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1941년 12월 말까지 총 35,238명의 라트비아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라트비아 보조 경찰과 아라이스 코만도는 포그롬과 룸불라 학살 등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헤르베르츠 추쿠르스를 포함한 아라이스 코만도 주요 인물들은 잔혹 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추쿠르스는 게토 청소 당시 유대인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리가 회당 방화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있다.
리가 게토에는 2,500명, 다우가프필스 게토에는 950명의 유대인이 남아 있었다. 1941년 말부터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이 라트비아로 이송되었다. 약 15,000명의 "제국 유대인"이 "대 리가 게토"에 정착했고, 많은 수송선이 룸불라 및 비케르니에키 숲의 처형장으로 이송되었다. 1942년에는 카우나스 게토에서 온 약 800명의 유대인이 리가로 이송되어 일부는 리가 게토 지하 조직에 참여했다.
독일 점령군은 유대인들을 강제 노동 장소 근처의 "막사 수용소"에 수용했다. 살라스필스와 카이저발트 강제 수용소가 대표적이었다. 살라스필스 강제 수용소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많은 수감자들이 사망했다. 1943년 여름에 설립된 카이저발트 강제 수용소에는 리가, 다우가프필스, 리예파야 등 게토 생존자와 비유대인이 수용되었다. 1943년 9월 말 빌나 게토 유대인들이 카이저발트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4년 여름 소련군의 진격으로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카이저발트 강제 수용소 생존자들은 슈투트호프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2. 5. 3. 독일 후퇴와 소련 재점령 (1944년)
약 1,000명의 라트비아 유대인이 강제 수용소 억류에서 살아남았다. 이들 대부분은 송환을 거부하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난민 수용소에 머물렀다. 나머지 생존자들은 결국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고, 대부분 이스라엘에 정착했다.[20] 리가 해방 며칠 후, 생존 유대인 60~70명이 참여한 공개 시위가 열렸다. 점차적으로 소련으로 피난 갔던 유대인들 중 일부가 돌아왔다. 수천 명의 라트비아 유대인들이 소련군 라트비아 사단, 제201 사단(제43 근위대)과 제304 사단에서 복무했으며, 많은 이들이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20]2. 6. 전후 라트비아 유대인 사회 (1945년~1991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라트비아의 유대인 인구는 1970년 약 37,000명으로 정점을 찍었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1959년 소련 인구 조사에 따르면,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는 36,592명의 유대인이 있었으며, 이 중 약 48%가 이디시어를 모국어로 사용했다. 나머지는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했고, 라트비아어 사용자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 전체 유대인 중 30,267명(5/6)이 리가에 거주했으며, 나머지는 다우가프필스 등지에 거주했다. 1970년 라트비아 유대인은 약 50,000명으로 추정되었으며, 이들 중 대다수는 리가에 거주했다. 리가는 소련 유대인들 사이에서 민족적 선동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지하 종교 및 시오니스트 활동은 당국의 감시를 받았다.1979년에는 28,300명, 1989년에는 22,900명으로 유대인 인구가 감소했는데, 이는 이스라엘로의 높은 이민율 때문이었다. 소련은 매년 제한된 수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떠나는 것을 허용했으며, 1968년과 1980년 사이에 라트비아 유대인 인구의 35.8%인 13,153명이 이스라엘 또는 다른 서방 국가로 이민을 갔다.[21] 높은 동화 및 혼인율, 출생률보다 높은 사망률도 인구 감소의 주요 요인이었다. 1988–89년 유대인 출생률은 1,000명당 7.0명, 사망률은 1,000명당 18.3명이었다. 1987년,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의 39.7%는 비유대인 아버지를 두었다.
1989년, 라트비아에는 22,900명의 유대인이 있었고, 이는 전체 인구의 약 0.9%를 차지했다. 그해 소련은 무제한 유대인 이민을 허용했고, 1990년에는 3,388명, 1991년에는 1,087명의 라트비아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 1991년, 소련은 붕괴되었고, 라트비아는 독립을 되찾았다. 유대인 기구에 따르면, 1989년과 2000년 사이에 12,624명의 유대인과 유대인의 비유대인 가족 구성원이 라트비아에서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 일부 라트비아 유대인들은 다른 서방 국가로도 이민을 갔으며, 이민자 중 다수는 라트비아 시민권을 유지했다.[21]
1991년 소련 붕괴와 라트비아 독립 이후, 1940년 라트비아의 소련 점령까지 라트비아 시민이 아니었거나 그 후손이 아닌, 소련에서 온 많은 유대인들은 자동적으로 라트비아 시민권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는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자녀와 손주들도 포함되었는데, 라트비아 법에 따르면 시민권은 출생지가 아니라 국가의 국민 또는 시민인 조상을 둔 사람에게 주어졌다. 공립학교에서 라트비아어의 의무 사용은 러시아어를 주로 사용하는 많은 유대인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라트비아가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1990년대에 시민권 요건이 점차 완화되어 전후 거주자들이 라트비아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라트비아 민족 운동은 독립을 위해 노력하면서 공화국의 유대인들과 협력하려 했다. 7월 4일은 라트비아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2. 6. 1. 전범 재판
소련 당국은 1945년 4월 7일 "독일-파시스트 침략자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조사 임무를 맡은 특별 정부 위원회의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유대인 박해와 학살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독일 점령 하 라트비아에서 범죄를 저지른 나치 전범들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었다. 명단에는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 로제, 오스트란트 경찰청장 프리드리히 예켈른, 라트비아 총독 드렉슬러, 보안경찰 청장 루돌프 랑에, 리가 게토 책임자이자 살라스필스 강제 수용소 사령관 쿠르트 크라우스, 그의 조수 막스 김니히, 카이저발트 강제 수용소 사령관 자우어 등이 포함되었다.1946년 1월 26일, 발트 군관구 군사 재판소는 룸불라 학살에 책임이 있는 예켈른을 포함한 나치 전범 그룹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예켈른과 다른 6명은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1946년 2월 3일 리가에서 처형되었다. 전후 라트비아 SSR에서 다른 재판들이 열렸지만, 라트비아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독일인과 라트비아인 중 소수만이 처벌받았다.
1944년 여름 독일이 후퇴할 당시, 유대인 박해와 학살에 협력한 많은 라트비아인들이 독일로 도망갔다. 전쟁 후, 이들은 실향민으로 간주되어 UNRRA, 국제 난민 기구(IRO) 등 나치 피해자 구호 단체의 도움을 받았으며, 일부는 미국 등 해외로 이민을 갔다.
반면, 야니스 립케와 같이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라트비아인들도 있었다. 립케는 리가 게토의 수십 명의 유대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여 그들을 구출했다.
3. 독립 이후 라트비아 유대인 사회 (1991년~현재)
1991년 소련 붕괴와 라트비아 독립 이후, 소련에서 온 많은 유대인들은 자동적으로 라트비아 시민권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는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자녀와 손주들도 포함되었는데, 라트비아 법에 따르면 시민권은 출생지가 아니라 국가의 국민 또는 시민인 조상을 둔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공립학교에서 라트비아어를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점은 러시아어를 주로 사용하는 많은 유대인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라트비아가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1990년대에 시민권 요건이 점차 완화되어 전후 거주자들이 라트비아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라트비아 민족 운동은 독립을 위해 노력하면서 공화국의 유대인들과 협력하려 했다. 7월 4일은 라트비아에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많은 유대인 단체들이 라트비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1993년 6월 11일부터 17일까지 제1회 라트비아 유대인 세계 회의가 리가에서 개최되었다. 이스라엘, 미국, 스웨덴, 스위스, 독일, 영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호주에서 온 대표들이 참석했다.
1993년에는 옐가바와 비에르니에키 숲에서 홀로코스트 기념물 두 곳에 대한 훼손 사건이 발생했다. 46,500명의 라트비아 유대인이 총살당한 비케르니에키를 기념하기 위해 온 라트비아 유대인 세계 회의 대표들은 기념물에 만자와 "Judenfrei"(유대인 없음)라는 단어가 낙서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반유대주의 내용의 기사가 라트비아 민족주의 극우 언론에 게재되었다.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은 유대인의 소련 시대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 유대인이 라트비아의 서방 국가에서의 명성을 훼손하는 행위, 그리고 유대인 사업가들이 라트비아 경제를 통제하려는 노력 등이었다.[21]
2000년대 초, 약 9,000명의 유대인이 라트비아에 남아 있었고, 대부분은 리가에 거주했다. 리가에서는 Ohr Avner 하바드 학교와 오헬 메나헴 유치원 및 주간 학교가 운영되었다. 리가의 구시가지에서는 페이타브 시나고그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리가의 주요 홀로코스트 기념물은 1993년 파괴된 그랜드 코랄 시나고그 부지에 세워졌으며, 비케르니에키의 사건을 기념하는 다른 기념물(2001년 건립), 룸불라 학살(2002년 건립) 및 카이저발트 강제 수용소는 사르칸다우가바에 세워졌다(2005년 건립). 주요 유대인 묘지인 신(슈멜리스) 묘지는 리가의 동쪽, 유글라의 리주마 거리에 위치해 있다. 라트비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다우가프필스 시나고그가 여전히 운영되고 있으며, 유르말라에 새로운 시나고그가 문을 열었고 레제크네와 루드자의 시나고그는 박물관으로 복원되었다.[22][23] 리가 외곽에서 가장 큰 기념물 중 하나는 리에파야의 슈케데 사구에 위치해 있다.[24]
리가 구시가지의 오래된 시나고그(페이타브 슐)는 정기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오늘날 시나고그의 랍비는 엘리야후 크레이머 랍비이다. 이 시나고그는 리트바크 계열에 속한다.
하바드 랍비는 1992년부터 라트비아의 하바드 특사로, 모르데차이 글라스만 랍비이다. 그는 1998년부터 슈네르 코트 랍비, 2016년부터 아키바 크레이머 랍비와 합류했다. 2021년 9월, 시나고그, 커뮤니티 센터, 코셔 상점을 포함하는 하바드 하우스가 리가 중심가 디르나부 거리 29번지에 문을 열었다.
2018년 8월 말, 사업가 [https://www.linkedin.com/in/emmanuil-grinshpun-59198412/ 에마누엘 그린스푼]의 집에 있는 유르말라의 주거 지역에 "베이트 이스라엘" 시나고그가 문을 열었다. 이 시나고그는 볼데라야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도시에서 유일하게 운영되는 시나고그이다. 이 도시의 랍비는 라트비아 레제크네 출신인 시몬 코트노프스키-리아크 랍비이다. 그는 이 나라 출신이다. 2006년 IDF에서 학업과 군 복무를 마친 후, 그는 미국과 러시아의 유대인 공동체에 파견되었으며, 2018년부터 라트비아와 유럽에서 주로 활동해 왔다. 코트노프스키-리아크 랍비는 유럽 랍비 회의 회원이며, 라트비아의 동유럽 대표이다. 그의 멘토는 우리 아모스 체르키 랍비와 핀차스 골드슐미트 랍비이다. 그는 정치학 및 유대교 복수 학위를 가지고 있다.
2021년 인구 조사에서 인구는 6,454명에서 8,094명으로 증가했다. 여기에는 4명의 카라임과 3명의 크림차크인이 포함되었다. 유대인의 약 4분의 3은 라트비아 시민이며, 이는 라트비아의 소수 민족에게 높은 비율이다.
2023년에는 1941년 나치에 의해 살해된 수십 명의 유대인의 집단 묘지가 리에파야에서 발견되었다.[25]
4. 역사적 인구 통계
| 연도 | 인구 |
|---|---|
| 1925 | 95,675 |
| 1939 | 95,600 |
| 1941 | 70,000 |
| 1959 | 50,000 |
| 1970 | 43,000 |
| 1979 | 28,338 |
| 1989 | 22,925 |
| 2002 | 9,600 |
| 2011 | 6,454 |
| 2021 | 8,094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라트비아 영토에는 약 19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전체 인구의 7.4%).[35] 전쟁 기간 동안,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내륙으로 추방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전쟁 지역에서 탈출했다. 1920년에는 라트비아의 유대인 수는 79,644명 (인구의 5%)이었으며, 리가에만 4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36] 1925년까지 유대인 인구는 95,675명으로 증가하여 라트비아가 독립 국가였던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유대인 수를 기록했다.
그 이후 유대인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1935년에는 93,479명(전체의 4.8%)으로 감소했다. 이러한 감소의 원인은 젊은 세대의 일부가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등으로 이민을 가고, 대다수는 한두 자녀로 가족을 제한했기 때문이다. 1935년 기준 유대인은 리가에 43,672명 (전체의 11.3%), 다우가프필스에 11,106명 (25%), 리에파야에 7,379명 (13%)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라트비아에는 거의 10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 대부분의 라트비아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라트비아의 유대인 인구는 1970년 거의 37,000명으로 정점을 찍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1990년대에 많은 라트비아 유대인들이 알리야를 통해 이스라엘과 미국(특히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으로 이주하면서 라트비아의 유대인 인구는 크게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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