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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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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유대사는 하스몬 왕조의 내분과 로마 공화정의 개입으로 시작되어,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점령과 유대인들의 로마 이주로 이어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고, 로마 내 유대인 공동체는 상업, 수공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성장했다. 이후 로마와 유대인의 관계는 칼리굴라 황제 시대의 위기, 유대-로마 전쟁, 디아스포라 형성, 랍비들의 활동, 힐렐 2세의 히브리력 개편, 율리아누스 황제의 유대인 정책, 비잔틴-사산 전쟁 등 다양한 사건들을 겪으며 변화했다. 로마 제국 내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기독교의 부상으로 인해 사회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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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유대사
로마 제국의 유대인
유대 속주
서기 125년 로마 제국의 유대 속주
역사적 배경
시기기원전 1세기 ~ 서기 7세기
위치로마 제국
인구
기원후 1세기로마 제국 인구의 약 10%, 약 700만 명 (이 중 약 250만 명이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에 거주)
역사
헤로데 왕조기원전 37년 ~ 기원후 92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기원후 66년 ~ 73년
키토스 전쟁기원후 115년 ~ 117년
바르 코크바의 난기원후 132년 ~ 136년
관련 인물
주요 인물헤로데 대왕
폰티우스 필라투스
티투스
바르 코크바
종교 및 문화
언어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라틴어
종교유대교
기타
관련 항목디아스포라
할라카
미슈나
탈무드

2. 역사적 배경

유대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다른 어느 유럽 도시들보다 오랜 기간인 2,000년이 넘게 로마에서 살아왔다.[41] 이들은 본래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이들로, 두 도시 간의 활발한 상업 교류에 이끌렸다. 유대인들은 이르면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에서 지역 사회를 이루며 살았을 수도 있으며, 기원전 139년에 로마의 법무관 히스파누스는 로마 시민이 아닌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키는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다.[41]

로마가 유대를 속주로 합병하기 이전에도, 로마인들은 1세기 반 동안 디아스포라로 로마에 정착한 유대인들과 교류하였다. 지중해 동쪽 지역의 많은 로마 속주 도시들도 기원전 6세기 때부터 퍼져나가던 커다란 유대인 지역 사회들을 품고 있었다.[42]

동지중해 지역에 로마가 개입한 것은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종전 이후 로마가 시리아 속주를 설치한 기원전 63년부터이다.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격퇴시킨 뒤, 프로콘술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유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남아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기도 했다. 히르카노스 2세는 기원전 48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유대인들의 에트나르히스 (지방관)로 승인받았다.[43] 기원전 37년, 헤로데 왕국이 로마의 위성국으로 설치되었고 서기 6년에는 유대 속주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영토가 되었다.[44]

로마 제국 동방 영토에 있던 그리스 도시들에서는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긴장 사태가 종종 일어났다. 서기 90년경, 유대인 저술가 요세푸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등이 반포한, 유대인 지역 사회에 다수의 권리들을 부여하던 칙령들을 인용하였다.[45] 중요한 특권들로는 폴리스의 종교 의식에서 제외되는 권리와 '자신들의 선조들의 법률, 관습, 종교'를 따를 수 있는 허용 등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또한 군 복무와 로마군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에서 면제되었다.[46] 그러나 요세푸스가 독자들에게 믿게 하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서 '렐리기오 리키타'라는 지위가 없었고 유대인에 관한 로마 제국의 모든 법령들이 긍정적이지 않았기에, 요세푸스가 말한 이러한 권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에 대한 규정은 황제의 개인적 요구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어졌다.[47] 요세푸스는 부정적인 결정들을 생략하고 그 판결이 보편적인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이야기의 한쪽 면만 제시했다.[15]

칼리굴라 재위 (서기 37년-41년) 당시 경제 위기는 '로마와 유대인 사이 최초의 전면적인 단절'이라고 제시되는데, 그럼에도 서기 6년 퀴리니우스의 인구 조사 시기와 세야누스 (서기 31년 이전) 시기에 로마와 유대인 간의 문제가 이미 존재는 했었다.[52]

2. 1. 초기 정착과 공동체 형성

유대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다른 어느 유럽 도시들보다 2,00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로마에서 살아왔다.[41] 이들은 본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두 도시 간의 활발한 상업 교류에 이끌려 로마로 이주해 왔다. 유대인들은 이르면 기독교 세기가 시작되기 2세기 전, 즉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에서 지역 사회를 이루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39년에는 로마의 법무관 히스파누스가 로마 시민이 아닌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키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41]

2. 2. 하스몬 왕조 내전과 로마 공화정 내전

하스몬 왕조의 형제인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사이의 내전, 그리고 로마 공화정에서 벌어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내전은 로마 내 유대인 인구 증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5] 전쟁 포로로 로마에 끌려온 많은 유대인들은 동족들에 의해 몸값을 지불받고 자유를 얻거나, 로마 주인에 의해 해방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테베레 강 오른편에 상인으로 정착하면서 로마의 유대인 거주 지역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5]

2. 3. 로마의 유대 속주 합병 이전의 교류

로마가 유대 지방을 속주로 합병하기 전에도, 로마인들은 1세기 반 동안 로마에 정착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교류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동부 지중해에 있는 많은 도시에는 기원전 6세기부터 흩어진 매우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습니다.[6]

유대 백과사전의 로마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2,000년 이상 로마에서 살아왔으며, 이는 다른 유럽 도시보다 더 긴 기간입니다. 그들은 원래 알렉산드리아에서 왔는데, 두 도시 사이의 활발한 상업 교류에 이끌렸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기원전 2세기 초에 그곳에 공동체를 설립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기원전 139년에 히스파누스 집정관은 로마 시민이 아닌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5]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는 매우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포로로 로마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동족에 의해 몸값을 치르거나 로마 주인에 의해 풀려났는데, 그들의 특이한 관습이 혐오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테베레 강의 오른쪽에 상인으로 정착했고, 이로 인해 로마의 유대인 구역이 시작되었습니다.[5]

로마의 동지중해 개입은 로마가 시리아를 속주로 만든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끝난 기원전 63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패배한 후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폼페이우스 대제)는 그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남아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습니다. 전 왕 히르카누스 2세는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유대인의 민족 지도자로 확인되었습니다.[7]

로마 제국 동부의 그리스 도시에서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인구 사이에 종종 긴장이 발생했습니다. 서기 90년경에 유대인 작가 요세푸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의 칙령을 인용하여 유대인 공동체에 많은 권리를 부여했습니다.[9] 주요 특권으로는 폴리스 종교 의식에서 면제받을 권리와 "조상들의 법, 관습, 종교를 따를" 권리가 포함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또한 군 복무와 로마 군대 제공에서 면제되었습니다.[10] 그러나 요세푸스가 독자들에게 믿게 하려는 것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존재하지 않았고 유대인에 관한 모든 로마 칙령이 긍정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공인된 종교''(허용된 종교)의 지위를 갖지 못했습니다. 대신, 규정은 황제에게 개별적으로 요청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만들어졌습니다.[11] 요세푸스는 부정적인 결정들을 생략하고 그 판결이 보편적인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이야기의 한쪽 면만 제시했습니다.[15]

3. 로마 제국과 유대인의 관계

로마인들에 의한 예루살렘 포위와 파괴. 1504년경 작.


유대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다른 어느 유럽 도시들보다 오래도록, 2,000년이 넘게 로마에서 살아왔다.[41] 이들은 본래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이들로, 두 도시 간의 활발한 상업 교류에 이끌렸다. 기원전 139년에 로마의 법무관 히스파누스는 로마 시민이 아닌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키는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로마의 유대인 지역사회는 급속도로 불어났다. 로마에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같은 종교를 가진 자들이 몸값을 지불해주거나 자신들의 기이한 풍습을 불쾌해 하던 로마인 주인들이 풀어주기도 하였다. 이들은 테베레강 오른쪽 강변에 무역상들로 정착했고, 이것이 로마의 유대인 지구의 기원이 되었다.

로마가 유대를 속주로 합병시키기 이전에도, 로마인들은 한 세기 하고도 반 세기 동안 디아스포라로 로마에 정착한 유대인들과 교류하였다. 지중해 동쪽 지역의 많은 로마 속주 도시들도 기원전 6세기 때부터 퍼져나가던 커다란 유대인 지역 사회들을 품고 있었다.[42]

로마 제국의 동방 영토에 있던 그리스 도시들에서는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긴장 사태가 종종 일어났다.

3. 1. 로마의 동지중해 개입과 유대 지역 확보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종전 후, 기원전 63년 로마는 시리아 속주를 설치하며 동지중해 지역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격퇴한 프로콘술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유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남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기도 했다.[43] 히르카누스 2세는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유대인의 에트나르히스(지방관)로 임명되었다.[43]

기원전 37년, 헤로데 왕국이 로마의 위성국으로 설치되었고,[44] 서기 6년에는 유대 속주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영토가 되었다.[44]

3. 2. 유대인에 대한 로마의 칙령

유대인들은 다른 어느 유럽 도시들보다 오래도록, 2,000년이 넘게 로마에서 살아왔다. 이들은 본래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이들로, 이 두 도시간의 활발한 상업 교류에 이끌렸다. 유대인들은 이르면 기독교 세기가 오기 두 세기 전부터 로마에서 지역 사회를 이루며 살았을 수도 있으며, 기원전 139년에 로마의 법무관 히스파누스는 로마 시민이 아닌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키는 칙령을 내기도 하였다.[41]

서기 90년경에 지필을 했던 유대인 저술가 요세푸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등이 반포한 칙령들을 인용하였는데, 이 칙령들은 유대인 지역 사회에 다수의 권리들을 부여하였다.[45] 주요 특권들로는 폴리스의 종교 의식에서 제외되는 권리와 '자신들의 선조들의 법률, 관습, 종교를 따를 수 있는' 허용 등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또한 군 복무와 로마군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에서 면제되었다.[46] 요세푸스가 독자들에게 믿게 하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서 '렐리기오 리키타'라는 지위를 갖지 못했고, 유대인에 관한 로마 제국의 모든 법령들이 긍정적이지 않았기에 요세푸스가 말한 이러한 권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에, 유대인들에 대한 규정은 황제의 개인적 요구에 대한 반응으로 만들어졌다. 이 법령들은 요세푸스가 "지위를 위한 정치적 투쟁의 도구"로 사용하였다.[47]

이들의 편파적인 시각 때문에, 칙령들의 진실성은 오랜 기간 의심되어 왔지만, 현재는 대게 사실인 것으로 여겨진다.[48][49][47][50] 더욱이, 요세푸스는 부정적인 결정들을 생략하고 이 결정들이 보편적인 척하면서 한쪽의 이야기 만을 내놓았다.[51] 그는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유의 관습과 종교 의식을 허락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보여주었는데, 유대인들은 과거에 보호를 받았고 자신의 시대에도 이 칙령에 따라 여전히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3. 3. 칼리굴라 황제 시대의 위기

칼리굴라 재위 (37년-41년) 당시 경제 위기는 '로마와 유대인 사이 최초의 전면적인 단절'이라고 제시되지만, 서기 6년 퀴리니우스의 인구 조사 시기와 세야누스 (31년 이전) 시기에 로마와 유대인 간의 문제가 이미 존재했었다.[52]

칼리굴라가 성전에 자신의 조각상을 설치하려는 시도(37–41년)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헤로데 아그리파의 개입으로 막을 수 있었다.[16]

4. 유대-로마 전쟁



유대-로마 전쟁은 서기 66년부터 135년까지 유대인과 로마 제국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대규모 반란이다. 주요 전쟁으로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66년-73년), 키토스 전쟁(115년-117년), 바르 코크바의 난(132년-136년)이 있다.

이 전쟁들의 결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수많은 유대인이 사망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다. 로마는 유대 지역의 이름을 시리아 팔라이스티나로 바꾸고, 예루살렘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하여 유대인의 역사적 흔적을 지우려 했다.

4. 1. 제1차 유대-로마 전쟁

로마 개선식 중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온 메노라와 그 외 물품들을 묘사한, 로마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의 부조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은 서기 66년에 발발했다. 이 반란은 미래의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가 진압하였다.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공방전 때, 로마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많은 곳을 파괴했으며, 일부 기록들에 의하면, 성전에서 메노라 등의 유물들을 약탈했다고 한다.

전쟁에 반대했던 요하난 벤 자카이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협상하여 그와 그의 지지자들의 안전을 보장받았다.[17] 요하난의 용기와 베스파시아누스가 언젠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궁극적으로 정확한) 예측에 감명을 받은 그는 그들에게 안전한 통행을 허용하고 야브네에 정착할 권리를 주었는데, 그 결과 야브네는 제국 내 유대교 생활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115년–117년의 키토스 전쟁에도 불구하고 율리우스 세베루스가 132년-136년에 바르 코크바의 난을 진압하며 유대 지역을 파괴할 때까지 상당 수가 자기들 땅에서 계속 살았다.[53] 985개 마을이 파괴되었고 유대 중부 지역의 유대인 인구 대다수가 근본적으로 사라졌으며, 이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로 팔리고, 도망쳤다.[53]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이름이 바뀐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이 시기부터 야브네가 있는 갈릴리에 집중되었다.[54]

4. 2. 키토스 전쟁과 바르 코크바의 난

키토스 전쟁 (115년-117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땅에서 상당수 거주했다. 그러나 율리우스 세베루스가 132년-136년의 바르 코크바 반란을 진압하면서 유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985개의 마을이 파괴되었고, 유대 중부 지역의 유대인 인구 대다수는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리거나, 도망쳐야 했다.[53]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개명된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처음에는 야브네에 정착했다.[54]

4. 3. 하드리아누스의 정책

유대-로마 전쟁 (66년–135년) 이후, 하드리아누스는 유대 속주의 이름을 시리아 팔라이스티나로, 예루살렘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었다. 이는 유대인들의 역사적 연관성을 지워버리기 위한 시도였다.[55] 하드리아누스가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개명한 것은 새로운 속주의 면적이 지리적 유대아보다 훨씬 넓다는 점에 따라 이 이름을 합리화한 것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21]

70년 이후, 유대인들과 유대교 개종자들은 유대세를 내야만 자신들의 종교를 믿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20] 135년 뒤에는 티샤 베아브 날 외에는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되었다.[20]

5. 유대인 디아스포라



유대 대백과사전 로마 부분에 따르면,[41] 유대인들은 다른 어느 유럽 도시들보다 오래도록, 2,000년이 넘게 로마에서 살아왔다. 이들은 본래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이들로, 두 도시 간의 활발한 상업 교류에 이끌렸다. 유대인들은 이르면 기독교 세기가 오기 두 세기 전부터 로마에서 지역 사회를 이루며 살았을 수도 있으며, 기원전 139년에 로마의 법무관 히스파누스는 로마 시민이 아닌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키는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유대 대백과사전'은 기원전 1세기 말 하스몬 왕조 형제 히르카노스 2세아리스토불로스 2세 간의 유대 지역의 내전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로마 공화정 시기의 내전을 연관시키며, 로마에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같은 종교를 가진 자들이 몸값을 지불해주거나 자신들의 기이한 풍습을 불쾌해 하던 로마인 주인들이 풀어주어 테베레강 오른쪽 강변에 무역상들로 정착했고, 이것이 로마의 유대인 지구의 기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로마가 유대를 속주로 합병하기 이전에도, 로마인들은 한 세기 하고도 반 세기 동안에 디아스포라로 로마에 정착한 유대인들과 교류하였다. 지중해 동쪽 지역의 많은 로마 속주 도시들도 기원전 6세기 때부터 퍼져나가던 커다란 유대인 지역 사회들을 품고 있었다.[42]

동지중해 지역의 로마의 개입은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종전 이후 로마가 시리아 속주를 설치한 기원전 63년부터이다.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격퇴시킨 뒤, 프로콘술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유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남아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히르카노스 2세는 기원전 48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유대인들의 에트나르히스 (지방관)으로 승인해주었다.[43] 기원전 37년에, 헤로데 왕국이 로마의 위성국으로 설치되었고 서기 6년에는 유대 속주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영토가 되었다.[44]

로마 제국 동방 영토에 있던 그리스 도시들에서,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긴장 사태가 종종 일어났다. 서기 90년경 유대인 저술가 요세푸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폼페이우스,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등이 반포한 유대인 지역 사회의 다수의 권리들을 부여하던 칙령들을 인용하였다.[45] 중요한 특권들로는 폴리스의 종교 의식에서 제외되는 권리와 '자신들의 선조들의 법률, 관습, 종교'를 따를 수 있는' 허용, 군 복무와 로마군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에서 면제 등이 있었다.[46]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서 '렐리기오 리키타'라는 지위가 없었고 유대인에 관한 로마 제국의 모든 법령들이 긍정적이지 않았기에 요세푸스가 말한 이러한 권리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에 대한 규정은 황제의 개인적 요구에 대한 반응이었고, 요세푸스는 이 법령들을 "지위를 위한 정치적 투쟁의 도구"로 사용하였다.[47]

칙령들의 진실성은 오랜 기간 의심되어 왔지만, 현재는 대게 사실인 것으로 여겨진다.[48][49][47][50] 요세푸스는 부정적인 결정들을 생략하고 이 결정들이 보편적인 척하면서 한쪽의 이야기 만을 내놓았다.[51]

칼리굴라 재위 (서기 37년-41년) 당시 경제 위기는 '로마와 유대인 사이 최초의 전면적인 단절'이라고 제시되는데, 서기 6년 퀴리니우스의 인구 조사 시기와 세야누스 (서기 31년 이전) 시기에 로마와 유대인 간의 문제가 이미 존재는 했었다.[52]

5. 1. 디아스포라의 기원과 확산

유대교 종교 의식을 묘사한, 로마에서 출토된 2세기 골드샌드위치유리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제2성전이 멸망하기 여러 세기 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다른 국가에서의 그들의 거주가 대부분 강제적인 이주의 결과만은 아니었다.[22] 기원전 63년 예루살렘 포위전 이후, 하스몬 왕조가 로마의 보호국이 되면서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서기 1세기 중반 이전에 유대, 시리아, 바빌로니아 외에도 로마 제국의 이집트, 크레테와 키레나이카, 로마 자체에도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다.[23]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의 시민이 되었다. 요세푸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포함한 신약 성경에는 로마 세계의 도시에 있는 대규모의 헬레니즘 유대교 유대인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디아스포라가 로마가 유대 민족의 열망을 두 번이나 분쇄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데이비드 아버바흐는 유럽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상당 부분이, 그가 말하는 추방 또는 자발적 이주가 서기 66년에서 135년 사이에 발생한 유대 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24] 마틴 굿맨은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야 유대인들이 북유럽과 서부 지중해 연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25] 이러한 널리 퍼진 대중적 믿음은 유대/시리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이 갑작스럽게 추방되었고 이것이 디아스포라의 형성에 결정적이었다고 본다.[26] 이스라엘 바르탈은 슐로모 샌드가 이 견해를 대부분의 유대교 연구 학자들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27] 오히려 이 견해가 진지한 유대교 연구 학자들 사이에서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고 주장한다.[28] 이 학자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의 성장이 수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과정이라고 주장하며, 그 시작은 아시리아의 이스라엘 파괴, 바빌로니아의 유다 파괴, 로마의 유대 파괴, 그리고 그 이후의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통치였다고 본다. 반란 이후 유대교 종교 및 문화 중심지는 바빌로니아 유대인 공동체와 그 학자들로 이동했다. 그 이후 세대들에게 제2성전의 파괴 사건은 유대인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력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그들은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박해받고 쫓겨난 사람들이 되었다.[29] 바르 코흐바의 반란 이후 유대인들은 주로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전락했다.[30]

에리히 S. 그룬은 성전 파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 이전에도 디아스포라가 이미 잘 정착되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제적인 인구 이동은 결국 일어난 디아스포라의 극히 일부만을 설명할 수 있다.[31] 아브룸 에를리히 또한 서기 70년 성전 파괴 훨씬 전부터 이스라엘보다 디아스포라에 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32] 조나단 아델만은 제2성전 시대에 약 60%의 유대인이 디아스포라에 살고 있었다고 추정했다.[33]

미쉬나와 탈무드에서 발견되는 토라 해석의 발전은 유대교 전통을 성전 기반의 종교에서 디아스포라의 전통으로 재편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5. 2. 디아스포라에 대한 다양한 관점

기원 1세기의 메노라 부조 기둥 상세, 오스티아 시나고그


유대인 디아스포라제2성전이 멸망하기 여러 세기 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다른 국가에서의 거주가 대부분 강제 이주의 결과는 아니었다.[22] 서기 1세기 중반 이전에 유대, 시리아, 바빌로니아 외에도 로마 제국의 이집트, 크레테와 키레나이카, 로마 자체에도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다.[23] 기원전 63년 예루살렘 포위전 이후, 하스몬 왕조가 로마의 보호국이 되면서 이주가 가속화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 시민이 되었다. 요세푸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포함한 신약 성경에는 로마 세계 도시에 있는 대규모 헬레니즘 유대교 유대인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디아스포라가 로마가 유대 민족의 열망을 두 번이나 분쇄하면서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데이비드 아버바흐는 유럽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상당 부분이 서기 66년에서 135년 사이에 발생한 유대 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24] 마틴 굿맨은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야 유대인들이 북유럽과 서부 지중해 연안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25] 이러한 대중적 믿음은 유대/시리아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이 갑작스럽게 추방되었고 이것이 디아스포라 형성에 결정적이었다고 본다.[26]

이스라엘 바르탈은 슐로모 샌드가 이 견해를 대부분의 유대교 연구 학자들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27] 오히려 이 견해가 진지한 유대교 연구 학자들 사이에서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고 주장한다.[28] 이 학자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의 성장이 수 세기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과정이라고 주장하며, 그 시작은 아시리아의 이스라엘 파괴, 바빌로니아의 유다 파괴, 로마의 유대 파괴, 그리고 그 이후의 기독교인과 무슬림의 통치였다고 본다. 반란 이후 유대교 종교 및 문화 중심지는 바빌로니아 유대인 공동체와 그 학자들로 이동했다.

이후 세대들에게 제2성전의 파괴 사건은 유대인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력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그들은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박해받고 쫓겨난 사람들이 되었다.[29] 바르 코크바의 반란 이후 유대인들은 주로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전락했다.[30]

에리히 S. 그룬은 성전 파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 이전에도 디아스포라가 이미 잘 정착되어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제적인 인구 이동은 결국 일어난 디아스포라의 극히 일부만을 설명할 수 있다.[31] 아브룸 에를리히 또한 서기 70년 성전 파괴 훨씬 전부터 이스라엘보다 디아스포라에 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32] 조나단 아델만은 제2성전 시대에 약 60%의 유대인이 디아스포라에 살고 있었다고 추정했다.[33] 유대교 전통을 성전 기반의 종교에서 디아스포라의 전통으로 재편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미쉬나와 탈무드에서 발견되는 토라 해석의 발전이었다.

5. 3.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삶과 문화

로마 제국 내 유대인들은 알렉산드리아와의 활발한 상업 교류에 이끌려 일찍부터 로마에 정착했다. 기원전 2세기 초,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히스파누스는 로마 시민이 아닌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지만,[41]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는 하스몬 왕조와 로마 공화정 간의 내전 이후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이 몸값을 지불받거나 로마인 주인에 의해 풀려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이들은 테베레강 오른쪽에 정착하여 로마의 유대인 지구를 형성했다.[41]

로마 제국 동부의 그리스 도시들에서는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긴장이 종종 발생했다. 유대인 저술가 요세푸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등이 유대인들에게 폴리스 종교 의식 면제, '선조들의 법, 관습, 종교' 준수 허용, 군 복무 면제 등의 특권을 부여했다고 기록했다.[45] 그러나 이러한 칙령들은 황제의 개인적 요청에 대한 반응이었고, 요세푸스는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했다.[47]

많은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시민이 되었으며, 신약성경사도행전바울로 서신에는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도시들에 많이 거주했다고 언급된다.

미슈나탈무드에서 발견되는 토라 해석의 발전은 성전 중심의 종교에서 디아스포라의 전통으로 유대교 전통을 재편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6. 후기 로마 시대

바르 코크바의 난 실패 이후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이 땅의 점령자들에 대항하여 수많은 무력 충돌을 겪었다. 이 시기 이스라엘 도시들에서는 예루살렘 탈무드, 미슈나 완성본, 니쿠드 체계와 같은 중요한 유대교 문서들이 편찬되었다.

2~3세기 부조의 모형에 있는 푸토 한 쌍이 메노라를 들고 있음(원래는 로마 국립 박물관에 있음)


메노라 모티프, 비냐 란다니니 카타콤


황제 하드리아누스 치세의 유대인 추방(서기 135년): ''헤라클리우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내쫓는 모습''. (파리 아르세날 도서관 소장, 15세기 필사본 ''황제들의 역사'' 삽화의 복제).


1세기 대반란과 2세기 바르 코흐바의 난 이후, 유대 지역의 파괴는 세계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예배의 중심이 제2성전에서 랍비 권위로 이동했다.

일부 유대인들은 유대 멸망 후 노예로 팔리거나 포로로 끌려갔고, 다른 이들은 기존의 디아스포라에 합류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유대에 남아 예루살렘 탈무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에 받아들여졌지만, 기독교의 부상과 함께 제약이 증가했다. 강제 추방과 박해로 인해 유대인 생활의 국제적인 중심지가 크게 이동하게 되었고, 멀리 떨어진 공동체들은 이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대인 공동체는 유대에서 대거 추방되어 중동, 유럽, 북아프리카의 다양한 로마 속주로 보내졌다. 로마 유대인들은 현대 도시 중산층과 관련된 특징을 갖게 되었다.[36]

6. 1. 이스라엘 땅의 유대인

바르 코크바의 난 실패 이후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이 땅을 점령한 세력에 맞서 싸우며 여러 경험과 무력 충돌을 겪었다. 이 시기 이스라엘 도시들에서는 예루살렘 탈무드, 미슈나 완성본과 같은 중요 유대교 문서들이 편찬되었다.[56]

이 시기 활동한 랍비들인 '타나임'과 '아모라임'은 유대교의 구전 율법을 정리하고 토론했다. 이 시기 유대교의 주요 인물은 유다 하나시였다. 그는 부유한 랍비이자 최후의 타나임 중 한 명으로, 구전 율법의 해석자였다. 그는 로마 당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팔레스타인 유대인 지역사회의 대표가 되었다. 유다 하나시의 결정은 미슈나, 바라이타, 토세프타, 여러 미드라시 모음집에 포함되었다. 미슈나는 서기 200년경에 완성되었는데, 그가 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슈나에 대한 아모라임의 해설은 서기 400년경 티베리아스에서 완성된 예루살렘 탈무드에 기록되었다.

351년, 세포리스의 유대인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처남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갈루스의 장군 우르시키누스에게 진압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359년에 힐렐 2세가 히브리력을 만들었다. 이 달력은 관찰이 아닌 수학 계산을 기반으로 한 태음태양력이었다. 이 시기까지 이스라엘 땅 밖의 모든 유대인 지역사회는 산헤드린이 허가한 관측 달력에 의존했는데, 이는 유대교 휴일을 제대로 지키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위협이 산헤드린 판관들과 먼 지역사회에 결정을 전달하는 전달자들을 위협했다. 종교적 박해가 지속되면서, 힐렐은 예루살렘의 관찰에 의존하지 않는, 언제나 쓸 수 있는 공인된 달력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이후 기독교를 거부한 유일한 황제인 율리아누스는 유대인들이 '오랜 기간 재건하기를 바라던 신성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복구하는 것을 허락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서 363년 6월 26일에 전사했고, 제3성전은 재건되지 않았다.

비잔티움-사산 전쟁 (602년-628년) 기간, 많은 유대인들은 이라클리오스의 유대 반란 당시 동로마 제국에 맞서며, 사산조가 로마의 이집트와 시리아 영토를 정복하는 데 성공적으로 협조했다. 이 사태에 대한 반응으로, 더욱 많은 반유대적 조치들이 동로마 영토 전역과 메로빙거 왕조 프랑스 영토에서 벌어졌다.[57] 얼마 안 되어, 634년에 무슬림 정복이 시작됐고, 이 기간 많은 유대인들은 동로마 지배자들에 맞서 다시 들고 일어났다.

6. 2. 랍비들의 활동과 유대교 발전

바르 코크바의 난 실패 이후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이스라엘 땅을 점령한 세력에 맞서 여러 차례 무력 충돌을 겪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도시들에서는 예루살렘 탈무드, 미슈나 완성본, 니쿠드 체계와 같이 중요하고 유명한 유대교 문서들이 편찬되었다.

이 시기에는 '''타나임'''과 '''아모라임''' 랍비들이 유대교 불문법을 조직하고 논의하는 활동을 했다. 이 시기 유대교의 주요 인물은 유다 하나시였다. 그는 부유한 랍비이자 최후의 타나임 중 한 명으로, 불문법의 해석자였다. 그는 로마 당국과 좋은 관계를 맺어 팔레스타인 유대인 지역사회의 대표가 되었다. 유다 하나시의 결정은 미슈나, 바라이타, 토세프타, 여러 미드라시 모음집에 포함되었다. 미슈나는 서기 200년경에 그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슈나에 대한 아모라임의 해설은 서기 400년경 티베리아스에서 완성된 예루살렘 탈무드에 기록되었다.

6. 3.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의 유대인 반란

351년, 세포리스의 유대인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의 처남인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의 통치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파트리키우스의 지도 하에 시작되었으나, 결국 갈루스의 장군 우르시키누스에게 진압되었다.[56]

6. 4. 힐렐 2세와 히브리력

전승에 따르면, 359년에 힐렐 2세가 히브리력을 만들었다. 이 히브리력은 관찰보다는 수학 계산을 기반으로 한 태음태양력 달력이다.[56] 이 시기까지, 이스라엘 땅 밖의 모든 유대인 지역사회는 산헤드린이 허가한 관측 달력에 의존했는데, 이 달력은 유대교 휴일을 적절하게 지키는 데 필수적이었다.[56] 그러나 산헤드린의 판관들과 먼 지역사회에 이들의 결정을 전하던 전달자들이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했다.[56] 종교적 박해가 지속되면서, 힐렐 2세는 예루살렘의 관찰에 의존하지 않고, 언제나 쓸 수 있는 공인된 달력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56]

6. 5. 율리아누스 황제의 유대인 정책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개종 이후 기독교를 거부한 유일한 로마 황제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오랜 기간 재건하기를 바라던 신성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했다.[56] 이는 유대인들에게 큰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363년 6월 26일 사산 제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고,[56] 그의 죽음으로 제3성전 재건은 무산되었다.

6. 6. 비잔틴-사산 전쟁과 유대인

602~628년의 비잔틴-사산 전쟁 동안 많은 유대인들은 헤라클리우스에 반대하는 유대인 반란에서 동로마 제국에 맞섰으며, 이는 사산 왕조가 로마의 이집트와 시리아 영토를 정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동로마 제국 전역은 물론 메로빙거 왕조 치하의 프랑스 지역에서도 반유대적 조치가 시행되었다.[56] 얼마 지나지 않아 634년에 무슬림 정복이 시작되었고, 이 시기에 많은 유대인들은 동로마 통치자들에게 다시 저항하였다.[57]

7. 로마 제국 내 유대인 확산

1세기 대반란과 2세기 바르 코브바의 난 이후, 유대 지역의 파괴는 전 세계로 유대인들이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대교 예배의 중심은 성전에서 랍비의 권위로 이동하게 되었다.[58]

몇몇 유대인들은 유대 정복 이후 노예로 팔리거나 포로로 끌려갔으며, 다른 이들은 기존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합류했다. 그러나 유대에 남아 있던 이들은 예루살렘 탈무드 작업을 시작했다. 로마 제국은 점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받아들였으나, 기독교의 성장에 따라 제한 사항들도 커졌다. 강제 추방과 박해는 유대인들의 삶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다. 유대인 지역사회들은 유대에서 추방당해 중동, 북아프리카, 유럽 등 로마의 여러 속주들로 보내졌다. 로마 유대인들은 근대에 도시 중산층과 연관된 성격을 발달시켰다.[58]

로마가 유대 지방을 속주로 합병하기 전에도, 로마인들은 1세기 반 동안 로마에 정착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교류했다. 로마 제국의 동부 지중해에 있는 많은 도시에는 기원전 6세기부터 흩어진 매우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6]

유대 백과사전의 로마에 관한 기사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2,000년 이상 로마에서 살아왔으며, 이는 다른 유럽 도시보다 더 긴 기간이다.[5] 그들은 원래 알렉산드리아에서 왔는데, 두 도시 사이의 활발한 상업 교류에 이끌렸다. 기원전 2세기 초에 히스파누스 집정관은 로마 시민이 아닌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5]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는 유대에서 하스몬 왕조 형제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 사이의 내전과 로마 공화국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내전을 거치면서 매우 빠르게 성장했다. 포로로 로마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동족에 의해 몸값을 치르거나 로마 주인에 의해 풀려났는데, 그들의 특이한 관습이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테베레 강의 오른쪽에 상인으로 정착했고, 이로 인해 로마의 유대인 구역이 시작되었다.[5]

로마의 동지중해 개입은 로마가 시리아를 속주로 만든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끝난 기원전 63년부터 시작되었다.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패배한 후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폼페이우스 대제)는 그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남아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다. 히르카누스 2세는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유대인의 민족 지도자로 확인되었다.[7] 기원전 37년에 헤로데 왕국은 로마의 속국으로 설립되었고, 서기 6년에는 일부가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어 유대 속주로 명명되었다.[8]

로마 제국 동부의 그리스 도시에서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인구 사이에 종종 긴장이 발생했다. 서기 90년경에 유대인 작가 요세푸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의 칙령을 인용하여 유대인 공동체에 많은 권리를 부여했다.[9] 주요 특권으로는 폴리스 종교 의식에서 면제받을 권리와 "조상들의 법, 관습, 종교를 따를" 권리가 포함되었다. 유대인들은 또한 군 복무와 로마 군대 제공에서 면제되었다.[10] 요세푸스가 독자들에게 믿게 하려는 것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존재하지 않았고 유대인에 관한 모든 로마 칙령이 긍정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공인된 종교'' (허용된 종교)의 지위를 갖지 못했다. 대신, 규정은 황제에게 개별적으로 요청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만들어졌다. 칙령은 요세푸스에 의해 "지위 획득을 위한 진행 중인 정치 투쟁의 도구"로 사용되었다.[11]

이러한 칙령의 진위 여부는 여러 번 의문을 제기했지만, 현재는 대체로 진실된 것으로 여겨진다.[12][13][1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는 부정적인 결정들을 생략하고 그 판결이 보편적인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이야기의 한쪽 면만 제시했다.[15]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이 그들만의 관습과 의식을 수행하도록 허용했고, 유대인들은 과거에 보호받았고 그의 시대에도 이러한 결정에 의해 보호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념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7. 1. 대반란과 바르 코흐바의 난 이후

대반란(1세기)과 바르 코흐바의 난(2세기) 이후, 유대 지역의 파괴는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유대교 예배의 중심지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의 권위로 이동하게 되었다.[53]

로마 개선식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온 메노라와 그 외 물품들을 묘사한,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 부조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율리우스 세베루스가 132년-136년에 바르 코크바의 난을 진압하면서 유대 지역을 파괴할 때까지,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에서 계속 살았다. 그러나 985개 마을이 파괴되고 유대 중부 지역의 유대인 인구 대다수가 살해당하거나 노예로 팔리거나, 도망치면서 유대인들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이름이 바뀐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다. 이들은 야브네가 있는 갈릴리에 집중되었다.[54]

몇몇 유대인들은 유대 정복 뒤에 노예로 팔리거나 포로로 운송되었으며, 다른 이들은 기존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합류했다. 그러나 유대에 남아 있던 이들은 예루살렘 탈무드 작업을 시작했다. 로마 제국은 점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받아들였으나, 기독교의 성장에 따라 제한 사항들도 커졌다. 강제 추방과 박해는 국제 중심지의 유대인들의 삶에 상당한 변화를 일으켰다. 유대인 지역사회들은 유대에서 추방당해 중동, 북아프리카, 유럽 등 로마의 여러 속주들로 보내졌다. 로마 유대인들은 근대에 도시 중산층과 연관된 성격을 발달시켰다.[58]

7. 2.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삶

대반란과 바르 코흐바의 난 이후, 유대 지역이 파괴되면서 흩어진 유대인들은 예배 중심지를 성전에서 랍비 권위로 이동시켰다.[58]

몇몇 유대인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포로로 끌려갔지만, 다른 이들은 기존의 디아스포라에 합류했다. 유대에 남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탈무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점차 받아들여졌지만, 기독교가 성장하면서 제한이 커졌다. 강제 추방과 박해는 유대인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대인 지역사회들은 유대에서 추방되어 중동, 유럽, 북아프리카 등 로마의 여러 속주로 보내졌다. 로마 유대인들은 도시 중산층과 비슷한 성격을 발전시켰다.[58]

로마 제국 내 유대인들은 2천년 이상 로마에서 거주하며, 이는 유럽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 오래된 역사이다. 이들은 본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두 도시 간의 활발한 상업 교류에 이끌려 로마로 이주했다. 기원전 2세기 초, 히스파누스는 로마 시민이 아닌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41]

로마의 유대인 공동체는 하스몬 왕조 형제 히르카노스 2세아리스토불로스 2세 간의 유대 지역 내전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로마 공화정 시기 내전을 거치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도움으로 풀려나거나, 로마인 주인들이 그들의 풍습을 불쾌하게 여겨 풀어주기도 했다. 이들은 테베레강 오른쪽에 정착하여 상업에 종사하며 로마 유대인 지구의 기원이 되었다.[41]

로마가 유대를 속주로 합병하기 이전에도, 로마인들은 이미 150년 동안 디아스포라로 로마에 정착한 유대인들과 교류했다. 지중해 동쪽 지역의 많은 로마 속주 도시들은 기원전 6세기부터 흩어져 살던 큰 유대인 지역 사회들을 포함하고 있었다.[42]

동지중해 지역에 대한 로마의 개입은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이후 로마가 시리아 속주를 설치한 기원전 63년부터 시작되었다.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물리친 후, 프로콘술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유대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다.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히르카노스 2세를 유대인들의 에트나르히스(지방관)로 승인했다.[43] 기원전 37년, 헤로데 왕국이 로마의 위성국으로 설치되었고, 서기 6년에는 유대 속주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영토가 되었다.[44]

로마 제국의 동방 영토에 있던 그리스 도시들에서는 그리스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긴장이 잦았다. 서기 90년경, 유대인 저술가 요세푸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등이 유대인 지역 사회에 많은 권리를 부여한 칙령들을 인용했다.[45] 중요한 특권으로는 폴리스의 종교 의식에서 제외되는 권리와 '자신들의 선조들의 법률, 관습, 종교'를 따를 수 있는 허용 등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군 복무와 로마군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에서도 면제되었다.[46] 그러나 요세푸스가 말한 이러한 권리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서 '렐리기오 리키타'라는 지위도 없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규정은 황제의 개인적 요구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요세푸스는 이러한 칙령들을 "지위를 위한 정치적 투쟁의 도구"로 사용했다.[47]

이러한 칙령들의 진실성은 오랫동안 의심받았지만, 현재는 대체로 사실로 여겨진다.[48][49][47][50] 요세푸스는 부정적인 결정들을 생략하고, 이 결정들이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한쪽의 이야기만 제시했다.[51] 그는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유의 관습과 종교 의식을 허락했고, 유대인들이 과거에 보호받았으며 자신의 시대에도 여전히 보호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참조

[1] 서적 Spectrum–Times Atlas van de Wereldgeschiedenis Het Spectrum
[2] 서적 A Concis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21-05-27
[3] 서적 "Population and proselytism: how many Jews were there in the ancient world?" Rout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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