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샤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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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샤구지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일본에서 숭배되는 신 또는 정령으로, 그 기원과 기능에 대해 여러 설이 존재한다. 이름의 어원은 불확실하며, 땅을 개척하는 것, 토지 측량, 수확과 관련하여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미샤구지는 바위, 나무, 대나무 잎 등 다양한 곳에 깃든다고 여겨지며, 다산, 풍작, 질병 치유와 관련되어 마을의 수호신 또는 특정 혈족 집단의 수호신으로 숭배되었다. 스와 지역에서는 스와 대사의 신화와 융합되어 뱀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타케미나카타와 모레야노카미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스와 대사의 제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겨울부터 봄에 걸쳐 행해지는 신사 제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샤구지의 실체에 대해서는 돌의 신, 나무의 신, 술의 신, 사슴의 태아 등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현재는 신으로 여겨지지만, 정령이나 자연 에너지로 이해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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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샤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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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
'미샤구지'는 '미샤구치', '미사구치', '미사구지', '미샤쿠지', '미사쿠지(n)', '오미샤구지' 등 다양한 형태로 불린다.[1][2][3][4][5][6][7] 한자 표기로는 御左口神, 御作神, 御社宮神, 御社宮司 등이 있으며, 중세 시대 스와 신사 사제들의 문서에는 御左口神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8] 스와 이외 지역에서는 '(오)샤구지', '(오)샤고지', '(오)상구지', '사(n)고지', '사구지', '샤갓산', '샤곳탄', '조구-산', '오상구-산', '오샤모쓰-사마', '오샤모지-사마' 등 미샤구지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신들이 발견되며, 이들에 대한 한자 표기도 다양하다.[1][9]
1950년대에 지역 역사가 이마이 노기쿠가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나가노현에 미샤구지(또는 유사한 이름의 신)를 모시는 신사가 총 780개 있으며, 그 중 109개가 지노, 스와, 오카야, 시모스와, 후지미, 하라를 포함하는 스와 지역에 위치해 있다.[19][20]
미샤구지는 바위, 나무, 대나무 잎에 깃드는 정령으로 여겨지며,[4][27][28] 남근 형태의 돌 막대(세키보)[29][30][31], 멧돌 (이시자라) 또는 절구 (이시우스)와 같은 다양한 인공 물체에도 깃든다고 여겨진다.[32][33]
1950년대에 지역 역사가 이마이 노기쿠가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나가노현에 미샤구지(또는 유사한 이름의 신)를 모시는 신사가 총 780개 있으며, 그 중 109개가 지노, 스와, 오카야, 시모스와, 후지미, 하라를 포함하는 스와 지역에 위치해 있다.[19][20]
이름의 어원은 불확실하다. 가미 시나노 지방의 상궁 신사인 다케미나카타의 신성한 아이들(''미코가미'')과 혼동되던 근세 초, 이 이름은 '땅을 개척하다/개발하다'라는 뜻의 '사쿠치'(闢地)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되었으며, 이는 시나노 지방을 형성하고 개발했다는 다케미나카타 자손들의 전설과 연관되었다.[10][11] '돌 신'을 뜻하는 ''샤쿠진'' / ''이시가미'' (石神)에서 유래했다는 해석도 있는데, 이는 신성한 돌이나 바위(''신체'')를 숭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미샤구지 관련 신사에서 돌이나 돌 관련 물품이 ''신체''로 사용됨). 샤쿠진(尺神)에서 유래했다는 설은 토지 측량과 경계 표시에 사용되는 도구와의 연관성을 제시한다.[7][12]
'수확/농작물 신'을 의미하는 '사쿠진'(作神)도 가능한 기원으로 제시되었다.[13] 오와 이와오 (1990)는 '미사쿠치'(존칭 접두사 御 ''mi-'' + 作霊, 咲霊 ''사쿠치'')가 어원이며, 이는 토양이나 여성의 자궁에 있는 잠재적 생명력을 개방하는(''saku'', 咲く '피어나다', 裂く '찢다', 作 '하다/만들다/경작하다/자라다'; ''sakuru''/''shakuru'' '파다/떠내다'[14][15][16]) 영(''chi''; ''ikazu-chi'', ''오로치'', ''미즈치'')이라고 주장했다.[17][18]
이름은 다양한 표기와 발음 변형이 있으며, 만엽가나와 한자 조합도 200개 이상이다(스와 지역 내외 표기 예시).
모리야 씨 고문서에는 "미사구치 신"(히라가나 "미사쿠우시"[41]), 『스와 대명신 화사』(1356)에는 "미사쿠리 신"으로 나타난다. "미샤구지 신" 표기 문헌도 있다. 현재 스와에서는 "미샤구지", "미샤구지", "미샤구 신"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42][43] "미사쿠치 신", "미벽지 신" 표기도 사용되었다.[44] "미샤구지" 외에 "미샤구치[45]", "사구지[49][46]", "미사쿠지[47]", "미사구치[48]" 등으로 표기·발음된다.
지노시 출신 향토사학자 이마이 노기쿠의 "미샤구지의 답사 집성"에는 스와군 내와 인접 군의 미샤구지 신사를 현지 주민들이 "(오)미샤구지" (스와에서 주류. 가미이나군에도 몇 예가 있다.[50]) 또는 "(오)샤구지", "(오)샤고지(사마)"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49][51]
다른 지역에서는 "사쿠", "샤구", "사구", "사코", "사고", "쇼고"를 포함한 신명이나 신사명이 보이며, "수호신", "사군신", "사군신", "적구신", "참궁신", "사자신", "곡구", "사구", "산호신", "석호자" 등으로 표기된다. "(오)상구지", "(오)상고지(상)", "사고지", "사구진", "(오)상구상", "조구상", "오샤모츠사마", "샤곳차응", "샤곳탄", "샤쿠진", "슈쿠진", "슈쿠지", "슈쿠시", "시키진", "시키지" 등 다양한 발음이 있다. "오주걱님", "오샤진님", "오야쿠시사마"처럼 변형된 호칭도 있다.[49] 검지의 신으로 "척신(샤쿠진)"을 쓰고 검지 막대나 밧줄을 헌납하는 곳도 있다.[52] 이마이는 이들이 스와의 미샤구지와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
야나기타 구니오의 『이시가미 문답』(1910)에는 "이시가미", "이시호신", "이시가미이", "숙신"이라는 신도 언급된다.[52] 곤파루 젠치쿠의 『명숙집』(1465년경)은 "숙신"과 "옹"을 동일시하고, 옹(숙신)을 스와 명신, 쓰쿠바 산 암석 등과 동일시한다. 이시가미(샤쿠지)와 이시가미(이시가미)를 동일시하는 사전이 여럿 있지만,[53] 『일본 민속 대사전 상』은 "이시가미(이시가미)와는 다르다"라고 한다.[54]
이름 유래는 벼 수호의 "작(사쿠) 신",[43] 토지 개척(=사쿠)으로 생명력을 표출시키는 "어작(피)령(미사쿠치)",[55] "어적사"(뱀신[56]) 등 여러 설이 있다.
3. 분포
'S(h)aguji' 또는 'S(h)agoji'와 같은 이름을 가진 ''카미''에 대한 숭배는 인접 지역, 특히 간토와 주부 전역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신을 모시는 신사는 시즈오카현 (233개 신사), 아이치현 (229개 신사), 야마나시현 (160개 신사), 미에현 (140개 신사) 및 기후현 (116개 신사)과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다.[21][22] 반면에, 이러한 신사는 나가노 북쪽에 위치한 니가타현과 도야마현 두 현에서는 눈에 띄게 찾아볼 수 없다.[21]
스와 지역 미샤구지 신사 네트워크의 본사는 지노에 있는 모리야 가문의 부지 내에 위치한 온토 미샤구지 소샤(御頭御社宮司総社)이다.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모리야(守矢氏)가 상사(上社)에서 ''칸노오사''(神長) 또는 ''진초칸''(神長官)으로 알려진 제사장으로 봉사했다. ''진초칸''은 스와 대사의 신인 타케미나카타의 후손이자 살아있는 그릇 또는 ''신타이''로 존경받는 신사의 고위 제사장인 ''오호리''(大祝)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으며, 신사의 종교 의식을 수행할 책임이 있었다. 의식에서 미샤구지를 소환하고 해산하는 것은 이 제사장의 특권으로 여겨졌다.[23][24]
이마이 노기쿠에 따르면, 나가노현에는 750여 개의 "(미)샤구지" 계열 신사가 존재하며, 그중 스와 109개, 가미이나 105개, 시모이나 36개, 고모치 104개 등이 많은 군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는 야마나시현 160개, 시즈오카현 233개, 아이치현 229개, 미에현 140개, 기후현 116개, 시가현 228개 외에도 간토 각 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49][52]
쇼와 9년 (1934년)에 쓰여진 "지명과 역사"에서 야나기타 구니오는 "샤구지"라는 신의 연원에 대해 언급했다.[58] 쇼와 10년, 『이시가미 문답』의 재판 서문에서 야나기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야나기타의 설에 자극받은 이마이는 "미샤구지"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민간 신앙의 신・신사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것 외에도, 이것이 스와 신앙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으므로, 간토・중부에 퍼지는 이 "샤구지", "샤고지" 등의 근본은 스와의 미샤구지라는 전제로 연구를 진행했다.[61][62]
그러나 최근에는 전국에서 보이는 "미샤구지적인 것"과 미샤구지스러운 석신이 모두 스와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이며, 스와 대사에서 특화된 미샤구지 신앙과, 스와에서 분리된 스와 유래로 보이는 미샤구지 신앙, 또는 다른 곳에서 보이는 "미샤구지적 신앙"을 각각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64]
4. 기능
미샤구지가 깃드는 정령이라는 개념은, 스와 대사의 종교 의식에서 미샤구지를 부를 독점적 권한을 가진 사제인 모리야 진초칸에 의해 '내려오게'(오로시-모우스, 즉 인간이든 물건이든 용기에 소환되는 것) 또는 '올라가게'(아게-모우스, 즉 그릇에서 쫓겨나는 것) 된다고 묘사하는 글에 반영되어 있다.[35]
민간 신앙에서 미샤구지는 다산과 수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20] 감기나 백일해와 같은 질병의 치유자로도 여겼다.[36][37] 미샤구지는 마을 전체의 수호신(우부스나-가미)으로 숭배되었으며, 특정 혈족 집단(이와이-가미)의 수호신으로도 숭배되었다.[38] 미샤구지와 지역 사회 간의 이러한 관계는 미샤구지가 마을을 세우는 행위를 주관한다고 믿어지는 것과, 널리 유사한 개념인 사이카미(경계 또는 국경의 수호신)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39]
5. 스와 지역의 미샤구지
'S(h)aguji' 또는 'S(h)agoji'와 같은 이름을 가진 ''카미''에 대한 숭배는 간토와 주부 전역에 걸쳐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신을 모시는 신사는 시즈오카현 (233개 신사), 아이치현 (229개 신사), 야마나시현 (160개 신사), 미에현 (140개 신사) 및 기후현 (116개 신사)과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다.[21][22] 반면에, 나가노 북쪽에 위치한 니가타현과 도야마현 두 현에서는 눈에 띄게 찾아볼 수 없다.[21]
스와 지역 미샤구지 신사 네트워크의 본사는 지노에 있는 모리야 가문의 부지 내에 위치한 온토 미샤구지 소샤(御頭御社宮司総社)이다.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모리야 씨가 상사(上社)에서 ''칸노오사''(神長) 또는 ''진초칸''(神長官)으로 알려진 제사장으로 봉사했다. ''진초칸''은 신사의 종교 의식을 수행할 책임이 있었으며, 의식에서 미샤구지를 소환하고 해산하는 것은 이 제사장의 특권으로 여겨졌다.[23][24]
지역 역사가들은 상사(上社)의 마에미야(前宮)가 지역 미샤구지 숭배의 원래 중심지였으며, '대 미샤구지'(大御社宮神 ''Ō-Mishaguji'')로 알려졌다고 믿는다.[25] 중세 기록에는 "마에미야의 20 미샤구지"(前宮廿ノ御社宮神)에 대한 언급이 있다.[26]
5. 1. 모리야 씨와 신 씨
스와 대사는 가미샤(上社)와 시모샤(下社)라는 두 개의 신사로 이루어져 있다. 스와 호 남쪽에 위치한 가미샤에는 최고위 신관인 오호리(大祝)와 그 아래에 배치된 5명의 신직이 있었다. 스와 씨(신씨) 출신의 가미샤 오호리는 옛날에는 제신 다케미나카타노카미(스와 명신)의 살아있는 신체로 여겨져 현인신으로 숭배받았다.
오호리를 보좌하여 신사를 주관한 것은 모리야 씨 출신의 칸노오사(神長, 후에 진초칸(神長官)이라고도 함)였다. 칸노오사는 오호리의 즉위식을 포함하여 가미샤의 신사 비전을 전하고, 신사에서 미샤구지를 강림시키거나 올리거나, 또는 의대가 되는 사람이나 물건에 "부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66][67]
스와 지역에 전해지는 신화에 따르면, 스와 명신이 스와에 들어왔을 때 지주신인 모로야 신과 싸웠다. 모로야 신은 싸움에서 져서 명신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 모리야 씨는 모로야 신의 후예이고, 신씨는 스와 명신의 후예로 여겨졌다.[68][69][70][71]
향토 사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입수 신화"는 스와에서 일어난 제정권의 교체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설에 따르면, 외래 씨족(신씨)이 스와 분지를 통솔하던 재지 호족(모리야 씨)을 제압하여 스와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지만, 모리야 씨는 제사를 주관하는 씨족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이 사건이 스와 가미샤의 제사 체제의 시작으로 여겨진다.[72][73][74] (최근에는 이 견해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입수 신화는 고고학적 지견과 연결해야 한다[75], 또는 이 신화 자체가 중세에 널리 유포되었던 쇼토쿠 태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다툼(정미의 난)에 얽힌 전승의 영향을 받고 있다[76], 또는 그 전설을 바탕으로 중세에 창작된 것으로, 고대 신화가 아니다[77]라는 주장도 있다.) 권력 교체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스와에 유입된 신씨를 벼농사 기술을 가져온 이즈모 계 민족(야요이 시대 사람들)으로 보는 설[78][79], 가네사시 씨(시나노 국조 가문, 후에 스와 시모샤의 오호리 가문)의 분가[80][81], 또는 오오미와 씨의 일파 또는 동족[82][83]으로 보는 설이 있다. 후자의 경우, 정권 교체를 시모이나 지방에 개화한 말갖춤 부장 고분 문화가 스와 지역에 출현한 시기(6세기 말~7세기 초)와 연결짓기도 한다.[84][85]
5. 2. 미샤구지와 타케미나카타
스와 지역 내에서 다른 신화와의 혼합주의는 미샤구지를 뱀으로 묘사하고, 타케미나카타노카미와 모레야노카미의 이야기와 연결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레야노카미는 타케미나카타노카미가 대표하는 새로운 신에 대한 숭배와 융합된 미샤구지에 대한 토착 신앙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40]
스와 대사는 가미샤(上社)와 시모샤(下社)라는 두 개의 신사로 이루어져 있다. 스와 호 남안에 위치한 가미샤에는 과거 오호리(大祝)라고 불리는 최고위 신관과, 그 아래에 배치된 5명의 신직이 봉사했다. 스와 씨(신씨)에서 나온 가미샤의 오호리는 옛날에는 제신·다케미나카타노카미(스와 명신)의 살아있는 신체로 여겨져 현인신으로 숭배받았다. 그 오호리를 보좌하여 신사를 주관한 것은 모리야 씨 출신의 칸노오사(神長, 후에 진초칸(神長官)이라고도 함)이다. 신장은 오호리의 즉위식을 포함하여 가미샤의 신사 비전을 전하고, 신사 시에 미샤구지(御左口神)를 강림시키거나 올리거나, 또는 의대가 되는 사람이나 물건에 "부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겨졌다.[66][67]
스와 지역에 전해지는 신화에 따르면, 스와 명신이 스와에 들어왔을 때 지주신인 모로야 신과 싸웠다. 모로야 신이 싸움에서 져서 명신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 모리야 씨는 모로야 신의 후예이고, 신씨는 스와 명신의 후예로 여겨졌다.[68][69][70][71]
지방 향토 사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입수 신화"는 스와에서 일어난 제정권의 교체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설에서는, 외래 씨족(신씨)이 스와 분지를 통솔한 재지 호족(모리야 씨)을 제압하여, 스와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지만, 모리야 씨가 제사를 주관하는 씨족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이 사건이 스와 가미샤의 제사 체제의 시작으로 여겨진다.[72][73][74] (참고로, 이 견해는 최근 의문시되고 있으며, 입수 신화는 고고학적 지견과 연결해야 한다[75], 또는 이 신화 자체는 중세에 널리 유포되었던 쇼토쿠 태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다툼(정미의 난)에 얽힌 전승의 영향을 받고 있다[76], 또는 그 전설을 바탕으로 중세에 창작된 것으로, 고대 신화가 아니다[77]라는 주장도 있다.) 권력 교체극이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스와에 유입된 신씨를 벼농사 기술을 가져온 이즈모 계 민족(야요이 시대 사람들)으로 보는 설[78][79], 가네사시 씨(시나노 국조 가문, 후에 스와 시모샤의 오호리 가문)의 분가[80][81], 또는 오오미와 씨의 일파 또는 동족[82][83]으로 보는 설이 있다. 후자의 경우, 정권 교체극을 시모이나 지방에 개화한 말갖춤 부장 고분 문화가 스와 지역에 출현한 시기(6세기 말~7세기 초)에 잘 맞춰진다.[84][85]
국사에서는 스와의 신이 "타케미나카타노카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고지키』나 『선대구사본기』의 국양의 장면에서 타케미카즈치노카미와의 힘 겨루기에서 패배하는 오쿠니누시노카미의 차남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나, 이즈모 지방의 고문헌인 『이즈모국 풍토기』와 『이즈모 국조 신하사』에는 이 타케미나카타노카미가 등장하지 않고, 『고지키』에서도 오쿠니누시노카미의 아들이면서 그 계보에 이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타케미나카타노카미는 국양 신화에 삽입되었다는 설을 주장하는 연구자가 많다.
스와에도 타케미나카타노카미(정확히 말하면 『고지키』 등에 나오는 타케미나카타노카미)의 그림자가 옅다고 할 수 있다. 중세의 축문에는 신명이 나오지 않고[86], "타케미나카타노카미"라는 신명도 거의 침투하지 않아, 제신을 단순히 "스와 묘진", "스와 대명신", "오묘진님" 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고지키』의 설화와는 다른 신화와 전승(입수 신화나, 스와 묘진을 뱀(용)으로 하는 민화 등)이 현지에 전해지고 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타케미나카타노카미는 "미샤구지 신앙을 야마토 왕권의 신통기에 짜넣은 결과 태어난 신명"(오와 이와오, 1990년)[88] 또는 "조정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서 스와에 강요된 겉으로 드러난 신"(테라다 시즈코·와시오 테츠타, 2010년)[89]이며, 스와의 본래의 신은 오히려 미샤구지라는 설이 종종 제기되고 있다.
『일본서기』의 지토 천황 5년(681년) 8월의 조에는 "사자를 보내어, 류타 풍신, 시나노의 스와(스와)·미즈우치 등의 신을 제사하게 한다"라고 있으며, 스와에 모셔져 있는 신은 나라 시대 이전에 이미 조정에 바람의 신·물의 신으로서 숭경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90] 타케미나카타노카미를 후세에 창작된 신으로 하는 연구자는 이 "스와 신"을 미샤구지[91] 또는 모리야 신(모리야 신)[92]으로 보고 있다.
또한,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중세의 상사에서는 미샤구지(미사구치 신·미야시로 신)와 스와 묘진은 각각 별개의 신으로 이해되고 있었음이 명백하다.
5. 3. 미샤구지와 오호리
스와 대사는 가미샤(上社)와 시모샤(下社)라는 두 개의 신사로 이루어져 있다. 스와 호 남쪽에 위치한 가미샤에는 오호리(大祝)라고 불리는 최고위 신관과 그 아래에 배치된 5명의 신직이 봉사했다. 스와 씨(신씨)에서 나온 가미샤의 오호리는 옛날에는 제신·다케미나카타노카미(스와 명신)의 살아있는 신체로 여겨져 현인신으로 숭배받았다.
그 오호리를 보좌하여 신사를 주관한 것은 모리야 씨 출신의 칸노오사(神長, 후에 진초칸(神長官)이라고도 함)이다. 신장은 오호리의 즉위식을 포함하여 가미샤의 신사 비전을 전하고, 신사 시에 미샤구지(御左口神)를 강림시키거나 올리거나, 또는 의대가 되는 사람이나 물건에 "부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겨졌다.[66][67]
스와 지역에 전해지는 신화에 따르면, 스와 명신이 스와에 들어왔을 때 지주신인 모로야 신과 싸웠다. 모로야 신은 싸움에서 져서 명신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 모리야 씨는 모로야 신의 후예이고, 신씨는 스와 명신의 후예로 여겨졌다.[68][69][70][71]
상사의 오호리(대축)는 칸나가가 거행하는 취임 의식(즉위식·직위식)을 거행했다. 이때, 오호리가 되기 위해 선택된 자(어린 남자아이에게 해당되는 경우가 많음)는 호랑가시나무 또는 단풍나무가 있는 게이칸샤(상사 전궁 경내)의 돌 위에 서서 오호리의 복장을 입는다. 이 의식을 받음으로써 소년이 스와 명신의 "어정체"(신체)가 된다고 여겨졌다.[93][94][95]
오호리에게 깃드는 신은 실체가 없는 영적인 존재로 여겨지므로, 향토사학가 미야사카 미츠아키와 조몬 연구가 다나카 모토이는 이 신이 타케미나카타노카미가 아닌 미샤구지라는 설을 주장했다. 이 설에 따르면, 오호리는 일종의 미샤구지의 강신무(요리마시)이다.[98][99] 다나카는 "외래 혼·미사구지를 장착했기에 오호리가 된 어린이는 살아있는 신·현인신으로 여겨졌다"고 말했고,[100] 봄에 행해지는 고토제에서 오호리의 대리를 맡는 6명의 '''신사'''(오코, "코노토"[101] "칸즈카이"[102]라고도 함)에게는 미샤구지(미사구치신)가 붙는다는 점을 지적하며, "신사는 구조상 어떻게 보아도 임시 오호리이며, 신사가 미사구치신이라면 오호리는 대미사구치신이며 타케미나카타가 아니다"라고 논했지만,[103] 최근에는 "미샤구지를 오호리에게 붙이지 않았다"는 의견으로 바뀌었다.
모리야 씨의 고문서에는 즉위식 때 칸나가가 미사구치신을 오호리에게 붙였다고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오호리와 같은 의식을 받고 역할을 수행하는 자에게는 붙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05]
5. 4. 신불습합
헤이안 시대 말기에 스와에 불교가 들어와, 가미샤 혼구에는 진구지·뇨호인·렌치인·홋케지가 세워졌다.[106][107] 혼지스이쟈쿠 설이 퍼지면서, 가미샤의 남신은 후겐 보살, 시모샤의 여신은 센쥬 칸논의 수적(垂迹)으로 여겨졌다.[108]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자, 료부 신토를 배운 신장·모리야 미쓰자네가 밀교 요소를 도입하여 독특한 "스와 신토"를 만들려고 했다. 천황의 즉위관정과 신도관정을 참고하면서 오호리베를 즉위식의 밀교풍으로 하고, 신사에 밀교적 해석을 부여했다.[109]
미쓰자네가 저술한 비전서 『스와다이묘진 신비어본사 대사(諏訪大明神神秘御本事大事)』[110]에는 료부 신토·진언 밀교의 영향이 보인다.
普天率土にまします諸神等、殊には諏訪両社・十三所、上中下二十の御左口神の王子部類眷属、九万八千五百七十二神、軍神마리시텐・愛染、降臨影向して我が身を護り給へ|보편적인 토지에 있는 모든 신들, 특히 스와 양사·13소 상중하·20의 오사구치 신의 왕자 부류 권속, 9만 8천 5백 72신, 군신 마리시텐·아이젠, 내림하여 내 몸에 영험하게 하사 보호를 내려주소서일본어[110][111]
오사구치 신을 "붙여 말할" 때의 의례에는 인상과 진언이 사용된 것이 그 한 예이다.
一、御左口神を付て申時の作法、四方を礼し左右の御手を内縛に乄右頭指を立、加礼し
南無二十の御左口神、降臨影向御守護を垂れ給へ 三遍
唵阿利也羽彌利多扇支利波羅陀雲多羅蘇婆訶 三遍|하나, 오사구치 신을 붙여 말할 때의 작법, 사방을 례(礼)하고 좌우 손을 안박(内縛)으로 乄 오른쪽 머리 손가락을 세워, 가래하고
나무 20의 오사구치 신, 내림하여 영험하게 하사 보호를 내리소서 세 번
옹 아리나 우미리다 센키리 하라다운 타라소와카 세 번일본어[110][112]
무로마치 시대에 필사된 『스와가미샤 물기령지사(諏訪上社物忌令之事)』(1237년 성립)의 사본(신장본)에 실려 있는 "수파 육제일 정진의 일기"[113]에서는, "스와난궁 호쇼 다이묘진·13소 왕자·오사구치 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6개의 재일에 육도의 주인으로서 육관음과 습합된 6체의 오사구치 신이 배정되었다.[116]
南無帰命頂礼、大日本正一位諏訪南宮法性大明神上下両宮。十三所王子御左口神。懺悔六根罪障。|나무 귀명 정례, 대일본 정일위 스와난궁 법성 대명신상하 양궁. 13소 왕자 오사구치 신. 참괴 참회 육근 죄장.일본어
六斎日、同六道、菩提、御左口神御本地六観音。|육제일, 동육도, 보리, 오사구치 신 어본지육관음.일본어5. 5. 미코가미(御子神)로서의 미샤구지
스와 대사는 가미샤(上社)와 시모샤(下社) 두 신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와 호 남쪽에 위치한 가미샤에는 과거 오호리(大祝)라는 최고위 신관과 그 아래 5명의 신직(神職)이 있었다. 스와 씨(신씨) 출신 가미샤 오호리는 예전에는 제신(祭神) 다케미나카타노카미(스와 명신)의 살아있는 신체로 여겨져 현인신으로 숭배받았다.[66]
오호리를 보좌하여 신사를 주관한 것은 모리야 씨 출신 칸노오사(神長, 후에 진초칸(神長官)이라고도 함)였다. 신장은 가미샤의 신사 비전을 전하고, 신사에서 미샤구지(御左口神)를 강림시키거나 올리는 등 의대(依代)가 되는 사람이나 물건에 "부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67]
스와 지역 신화에 따르면, 스와 명신이 스와에 들어왔을 때 지주신인 모로야 신과 싸웠고, 모로야 신은 져서 명신을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모리야 씨는 모로야 신, 신씨는 스와 명신의 후예로 여겨졌다.[68][69][70][71]
향토 사학자들은 이 "입수 신화"가 스와에서 일어난 제정권 교체를 반영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 설에 따르면, 외래 씨족(신씨)이 스와 분지를 통솔한 재지 호족(모리야 씨)을 제압하여 스와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지만, 모리야 씨는 제사를 주관하는 씨족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이것이 스와 가미샤 제사 체제의 시작으로 여겨진다.[72][73][74] (최근 이 견해는 의문시되고 있다.[75])
미샤구지(미사구치신)를 스와묘진의 권속신·미코가미로 보는 견해는 중세부터 나타난다. 예를 들어, 모리야 미쓰자네는 "당사 미신의 왕자"에 대해 언급했다. 미쓰자네는 미사구치신을 스와묘진의 왕자신으로 이해했다. 이는 『가미샤 물기령』 "수파 육제일"에 기록된 "다이묘진·13소 왕자·미사구치신"과 통한다.[118]
『모리야 신장 고서』에는 "당사에서 미샤구지신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미자손의 일이다"라고 적혀 있다.[119] 『스와대명신화사』에도 "13소의 왕자"가 스와묘진을 수호하는 권속신으로 등장한다.[120] 다케다 신겐의 하지장 『스와 상하궁 제사 재흥 차례』(1565년)에도 "정진옥에 있어서 신사 30일의 정진, 미사구치신 작립, 왕자 태내의 표체이다"라고 적혀 있다.[121][122]
근대 스와에서는 "미사구치신"(여기서는 "토지 개발의 신"으로 해석)은 국토 개발에 공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13신 미코가미의 총칭으로 여겨졌다.[123][124] 메이지 시대 신사 명세장에서는 스와에 있던 약 40개 미샤구지 신사 대부분이 다케미나카타노미코토(스와다이신) 미코가미를 모시는 신사로 기록되었고, 그중 하나는 "다케미나카타노미코토 미코"로서 "미샤구지신"의 이름을 든다.[125] 나가노현(구 시나노국) 전체에서 스와미코가미를 단독 주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사자신", "미사쿠지" 등으로 부르는 예도 있다.[126]
미야지 나오이치 (1937년)는 중세 미사구치신과 스와묘진 미코가미의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5. 6. 마에미야 20의 미샤구지
스와 대사는 가미샤(上社)와 시모샤(下社)라는 두 개의 신사로 이루어져 있다. 스와 호 남쪽에 있는 가미샤에는 과거 오호리(大祝)라고 불리는 최고위 신관과 그 아래에 배치된 5명의 신직이 봉사했다. 스와 씨(신씨) 출신의 가미샤 오호리는 옛날에는 제신 다케미나카타노카미(스와 명신)의 살아있는 신체로 여겨져 현인신으로 숭배받았다.[66]
오호리를 보좌하여 신사를 주관한 것은 모리야 씨 출신의 칸노오사(神長, 후에 진초칸(神長官)이라고도 함)였다. 신장은 오호리의 즉위식을 포함하여 가미샤의 신사 비전을 전하고, 신사 의식에서 미샤구지(御左口神)를 강림시키거나 올리거나, 또는 의대가 되는 사람이나 물건에 "부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겨졌다.[67]
스와 지역에 전해지는 신화에 따르면, 스와 명신이 스와에 들어왔을 때 지주신인 모로야 신과 싸웠다. 모로야 신이 싸움에서 져서 명신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 모리야 씨는 모로야 신의 후예이고, 신씨는 스와 명신의 후예로 여겨졌다.[68][69][70][71]
지방 향토 사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입수 신화"는 스와에서 일어난 제정권의 교체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설에서는, 외래 씨족(신씨)이 스와 분지를 통솔한 재지 호족(모리야 씨)을 제압하여, 스와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지만, 모리야 씨가 제사를 주관하는 씨족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이 사건이 스와 가미샤의 제사 체제의 시작으로 여겨진다.[72][73][74] (참고로, 이 견해는 최근 의문시되고 있으며, 입수 신화는 고고학적 지견과 연결해야 한다[75], 또는 이 신화 자체는 중세에 널리 유포되었던 쇼토쿠 태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다툼(정미의 난)에 얽힌 전승의 영향을 받고 있다[76], 또는 그 전설을 바탕으로 중세에 창작된 것으로, 고대 신화가 아니다[77]라는 주장도 있다.) 권력 교체극이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스와에 유입된 신씨를 벼농사 기술을 가져온 이즈모 계 민족(야요이 시대 사람들)으로 보는 설[78][79], 가네사시 씨(시나노 국조 가문, 후에 스와 시모샤의 오호리 가문)의 분가[80][81], 또는 오오미와 씨의 일파 또는 동족[82][83]으로 보는 설이 있다. 후자의 경우, 정권 교체극을 시모이나 지방에 개화한 말갖춤 부장 고분 문화가 스와 지역에 출현한 시기(6세기 말~7세기 초)에 잘 맞춰진다.[84][85]
스와 가미샤(上社)의 '''마에미야(前宮)'''는 이름 그대로 가미샤(上社)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이다. 그 주변은 원래 모리야 씨(守矢氏)의 본거지였으며, 진 씨(神氏)에게 양도되었다고 한다.[130] 근세까지는 살아있는 신 오오호리(大祝)가 이 일대에 거주했다는 점에서 ''''고바라(神原)''''라고도 불렸다. 또한 다케미나카타노카미(建御名方神)와 그 비신(妃神)인 야사카토메노카미(八坂刀売神)가 이곳에 묻혔다는 지역 전승도 있다.
고바라(神原) 일대는 옛날부터 제사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미샤구지(ミシャグジ)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테이 3년(1237년)의 『제신권청단(諸神勧請段)』에 기록된 신락가(神楽歌)로부터 마에미야(前宮)에는 옛날에는 "스무(二十)의 미샤구지(ミシャグジ)"가 모셔져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131][132]
『스와 다이묘진 신비 어본사 대사(諏訪大明神神秘御本事大事)』에도 "스무(二十) 미사구치신(御左口神)의 왕자"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시노 미치호(石埜三千穂)는 오오호리(大祝)의 즉위식 기록과 고(古) 그림을 바탕으로 마에미야(前宮)의 미샤구지(미샤구지(ミシャグジ) 신사, 마에미야(前宮)에 부속)와 마에미야(前宮) 그 자체(마에미야(前宮) 사, 마에미야(前宮) 다이묘진(大明神))는 각각 다른 사당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시노(石埜)의 설에 따르면, 마에미야(前宮)에 원래 모셔져 있던 것은 "사람으로서의 오오호리(大祝) 일족의 조령"이며, 그것과 대조하여 우치미타마덴(内御霊殿)에 모셔져 있는 것은 스와묘진(諏訪明神)의 사치미타마와 쿠시미타마, 즉 "현인신으로서의 오오호리(大祝)의 신격"이다.[134] 이시노(石埜)는 "스무(二十)의 미샤구지(御社宮神)"(=마에미야(前宮)를 수호하는 어자신의 사당)를 22명의 어자신을 모시는 와카미코사(若御子社)에 비정하고 있다.[135]
5. 7. 철탁(사나기 방울)
동탁과 매우 유사한 쇠로 된 鐸|방울일본어은 스와 대사 가미샤(上社)에 신보(神寶)로서 남아 있다. 이 철탁은 절두 원추형(소위 메가폰 형)으로 얇은 철판으로 만들어졌으며, 내부에는 쇠 혀가 매달려 있다. 현재 가미샤 혼구(本宮)에는 같은 형식의 철탁 6개가 1련으로 3조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원래 모리야 씨가 관리했다.[136][137]
"어보령(御宝鈴)", "대령(大鈴)", 사나기|さなぎ일본어령" 등으로 불리는 이 철탁은 서약의 방울로서, 토지 경계나 전쟁의 화해 등의 경우에 사용되었다. 또한, 봄 경작기 직전, 철탁을 가진 신사|おこう일본어들이 각지의 담(湛)에 사람들을 모아 이것을 울려 신사(神事)를 행했다. 이를 통해 미샤구지가 풍요를 가져다주고, 그 대신 향촌 주민이 답례로 농산물을 공상(貢上)한다는 계약을 성립시켰다. 가을 수확 후, 공납을 정리할 때도 비슷한 신사가 행해진다.[136][137][138]
철탁 사용에는 례전이 정해져 있었고, 신장의 수입원 중 하나였다. 군외(郡外) 불출(不出)의 것으로 여겨졌으며, 보령의 금기를 범하면 계약이 파탄된다고 여겨졌다. 또한, 위약이 있을 때는 미샤구지의 재앙이 있다고 믿어졌다.[136][137]
1535년(덴분 4년), 다케다 노부토라와 스와 요리미쓰의 화해 때, 신장인 모리야 요리자네가 철탁을 울렸다고 한다.[139]
시오지리시에 있는 오노 신사에도 12개 1련의 철탁이 보관되어 있다. 가미샤의 철탁과는 달리, 원형 그대로 창에 매달려 있다. 다수의 마폐(麻幣)가 묶여 있으며, 고주 축제가 열리는 해에 하나씩 묶는 관습이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140][141]
5. 8. 재앙신으로서의 미샤구지
스와 대사 가미샤(上社)의 제사에서는 모리야 씨 출신의 신장관(神長官)만이 미샤구지를 강림시키거나 올릴 수 있었다.[66][67] 스와 지역 신화에 따르면, 스와 명신이 모로야 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모로야 신을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68][69][70][71]
『화사(画詞)』(스와 축제 권 제1 춘상)에 따르면, 미샤구지는 "만약 부정함이 있으면, 이 신은 반드시 재앙을 내린다. 새와 개에 이르기까지 그 벌을 받는다"라고 하여, 부정이 있으면 재앙을 내리는 신으로 여겨졌다.[142]
향토사학자 미야사카 미츠아키는 다음과 같은 사건들을 "미샤구지의 재앙"이라고 보았다.
6. 중세 가미샤의 신사
스와 대사 상사에서 미샤구지는 스와 명신을 모시는 제례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단독으로 모셔지는 일은 없었다. 미샤구지가 주로 활약한 것은 겨울부터 봄에 걸쳐 행해지는 신사 제례였다.
6. 1. 미무로 신사 (12월 하순)
구력 12월 22일이 되면 스와 군의 백성들이 스와 대사 가미샤 마에미야(前宮)의 신원(神原) 일부에 미무로(御室)라고 불리는 커다란 수혈 주거를 짓고, 오호리(大祝), 신장(神長) 이하 신직(神職)들이 穴始|아나스하지메일본어라고 불리는 의식을 시작한다.[147][148] 미무로 안에는 "하기조의 좌"와 "우다쓰"라고 불리는 특별한 신좌(神座)가 있는데, 이곳에는 오호리, 신장, 神使|오코일본어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박풍에는 갈대로 벽을 만들고 거기에 미샤구지 신을 모셨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것이 미무로 자체의 박풍을 가리키는 것인지, "하기조의 좌"의 박풍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147][148]『스와 대명신 화사(諏訪大明神画詞)』(1356년)에 따르면, 22일의 제사 때 "제1의 어체"(마에미야에 모셔져 있는 "20의 미샤구지 신")가 미무로에 들어갔다.[117][149][150] 그 다음 날(23일), 상사 신앙권의 3구분인 내현(우치아가타), 외현(소토아가타), 대현(오오아가타)에서 1체씩 새(카야)로 만든 3개의 소형 뱀을 미무로 안에 넣었다. 작은 뱀에 장식의 삼과 종이를 붙여 신령을 담았다.[151][152][153]
24일 밤(대사제)에는 미샤구지 신을 붙인 "어사"("우다쓰의 미샤구지 신"이라고도 한다)가 "하기조의 좌"의 왼쪽에서, "어정체"(위의 3체의 소뱀)가 그 오른쪽에서 들어간다.[147] "하기조의 좌" 안에서 무엇이 행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오호리가 사사를 들고 주문을 외운 것 같다.[154]
25일의 대야명제에는 새와 오리나무 가지로 만들어진 길이 5장 5척 (약 16m), 굵기 1척 5촌(약 45cm)의 뱀 3체가 미무로에 들어간다. "어신체" 또는 "무사테"라고 불리는 이 대형 뱀은 작은 뱀과 마찬가지로 소소 신을 나타낸다고 한다. 다나카 모토이는 이것이 소뱀이 동면에 들어가, 미샤구지 신의 힘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대뱀으로 변신하는 모습, 즉 "신령의 증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았다. 미샤구지 신이 깃든 사사와 "소소 신"이 깃든 크고 작은 뱀은 3월까지 "하기조의 좌"에 모셔진다.[147][149][151][154][155]
6. 2. 개구리 사냥 신사 (정월 초하루)
정초 아침에 상사 본궁에서 행해지는 '''개구리 사냥 신사'''에서는 본궁 앞 미타라이 강에서 잡은 개구리를 작은 활과 화살로 쏘아 생물 제물로 삼는다.[156] 옛날에는 개구리를 "쏘아 잡는" 것이 신사의 역할이었으며, 6마리를 잡은 것은 6명의 신사가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개구리의 수도 줄어 현재는 평균 2마리이다. 강에는 반드시 개구리가 나타난다고 믿어져, 이것이 스와 대사 7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쏘아 잡은 개구리는 대주 앞 상에 올려져 통구이로 구워진 후 신약으로 배포되었다.중세의 전승에서는 스와 묘진에 의한 두꺼비 신의 퇴치를 본뜬 신사로 여겨지지만, 개구리를 공양하는 진짜 이유는 수수께끼에 싸여 있으며, 여러 설이 제시되고 있다.[157][158] 일설에는 이 이야기가 뱀신으로서의 스와 신과 토지신(미샤구지 또는 모레야 신)에 의한 신권 쟁탈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159][160]
6. 3. 어점 신사 (정월)
정초 밤에 신장이 어실 안에서 당번으로서 1년간 상사에 봉사하는 어두향과 를 추첨하는 '''어두어점신사'''(신사어두어점, 신사전어두정이라고도 함)를 행한다.6명의 와 14명의 '''촌대신주'''(무라시로코누시, 칸다를 경영하여 상사의 신사 비용을 부담하는, 스와군 내의 향촌 대표)를 위해 신장은 "20개의 어좌구신"을 강림시킨다. 그 신체는 칼 모양의 판('''켄사키반''')으로, 이것이 짚말에 꽂혀, 어두의 역명("내현개(우치아가타노스케)" 등)이 적힌 종이를 소칼로 꽂아 고정시킨다. 어좌구신을 강림시키면 신장은 대축에게 주문을 외우고, 억새의 심을 던져 丁半(도박의 일종)의 점으로 (내현개・, 외현개・궁부, 대현개・궁부)를 선택했다. 새로운 가 결정되면 전년도의 는 퇴하한다[161][162][163]。
지금도 어두향을 선택하는 점은 스와대사의 궁사에 의해 행해지지만, 스와 요리스이가 1614년(게이초 19년)에 스와의 향촌을 15조로 나누면서 윤번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형식적인 신사가 되었다.
6. 4. 신사의 정진 (2월)
오른쪽에는 미니에바시라, 중앙에는 헤이구시, 왼쪽에는 미니에구시가 그려져 있다.]]오토(御頭) 마을에 해당하는 마을에는 가미샤(上社)의 신[164]이 찍힌 신찰인 '''어부'''(미후)가 수여되고, 마을 경계에는 경계 매듭의 헤이하쿠가 세워진다. 칸나가를 위해 새로 지은 '''정진옥'''('''오니에바''' 또는 '''오토야'''라고도 함)에 고사구신(御左口神)을 강림시키고, 신관과 그 종자, 사슴인(사슴을 다루는 사람, 요리인) 등이 2월 상순부터 30일 동안 엄격한 정진과 정결 의식을 치른다. 물금기 기간 중 여성과의 성교나 촉예는 금지된다[166][167]。
정진을 시작하는 날에는 칸나가가 사슴 가죽을 깔고 사슴 발을 놓은 도마를 놓고, 신관들에게 고사구신을 붙이는 의식을 한다. 투명한 에보시·카리기에를 입은 신관들은 칸나가로부터 "극의의 대사"의 인상과 진언을 받는다. 심신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10일마다 복장과 정진옥에 있는 다다미나 조도구 등이 모두 교체되고, 불도 매일 3번 고쳤다. 행수는 처음 10일 동안은 1일 1회, 그 다음 10일 동안은 1일 2회, 그리고 마지막 10일 동안은 1일 3회를 했다. 오토 마을 전체에도 금기가 정해져, 스와사의 사당 조영(현재의 오미하시라 축제)과 마찬가지로 봉사 기간 중에는 축하 행사(원복·결혼 등)나 장례식이 금지되었다[167]。
정진옥 앞에 설치된 도리이형의 '''미니에바시라'''('''온네바시라''')에 붙어 있는 25개의 꼬치에는 니에의 사슴 고기가 대량으로 걸려 있었다[167][168]。
한편, 14명의 촌대 신주에게도 신관과 마찬가지로 고사구신이 붙여져 정진을 부과받았다[169]。
정진 기간이 끝나는 2월 그믐날 신관이 정진옥에서 나와, 전궁 부근에 있는 아라타마샤에서 신사가 행해진다. 붉은 긴 소매의 포를 입은 신관들은 본궁에 참배하고, 어린 싹의 카와야나기의 폐를 4묶음씩 헌납한 후, 정식으로 오호리의 대리인이 되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다[170]。
경계 매듭은 지금도 오토 마을이 되는 지역의 경계에 세워져 있다. 어실이나 신관 관련 신사의 대부분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스와 대사의 신사 중에서 미샤구지가 등장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6. 5. 봄의 회담, 오토 축제 (3월)
스와 대사 가미샤(上社)에서는 매년 3월에 봄맞이 축제와 풍년을 기원하는 '오토 축제'(御頭祭)가 열렸다.[169] 이 축제는 가미샤에서 가장 성대한 행사로, 오호리(大祝)가 겨울을 끝내고 오무로(御室)에서 나오는 날이기도 하다.[175]축제의 주요 의식은 '마와리타타에'(廻湛) 또는 '신시온토'(神使御頭)라고 불리는 순례 행사였다.[169] 칸나가(神長)에게 미샤구지 신을 부여받고 정진 기간을 마친 신사(神使, 오코)들이 오호리를 대표하여 가미샤 신앙권 내의 '타타에'(たたえ)라고 불리는 신성한 나무들을 방문하여 현지 촌장, 신주와 함께 풍작을 기원했다.
순례는 3월 초 오(午)의 날에 외현(上伊那)으로 가는 2인 1조(외현개, 미야츠키)의 출발식을 시작으로, 3일 뒤 유(酉)의 날에 나머지 4인 2조(내현개, 미야츠키 / 다이켄개, 미야츠키)가 출발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유(酉)의 날 출발식은 '오미타테마시 신지'(大御立座神事), '오토사마이'(御頭祭), '토리노마츠리'(酉の祭)라고 불렸다.[169]

유(酉)의 날 저녁, 마에미야(前宮)의 짓켄로(十間廊)에서는 오토고(御頭郷)가 준비한 75마리의 사슴(오니에지카)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바쳐진 멧돼지, 토끼, 기러기, 새우, 미역 등 산해진미가 준비되어 신인공식(神人共食) 연회가 열렸다.[176] 이때 바쳐진 사슴 머리 중에는 귀가 찢어진 것이 반드시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칸노노 미미사케지카'(神野の耳裂鹿)라 불리며 스와 대사 7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다.[176]
연회 중에는 신사(오코)들이 칸나가로부터 미츠에(御杖)와 철탁(御宝鈴)을 받고, 오호리가 후지시라나미(藤白波)의 타마카즈라(玉鬘)를 신사(오코)에게 걸어주었다. 오호리는 축사를 읊고, 신사(오코)는 이를 복창했다. 이후 신사(오코)들은 말을 타고 오테바라이미치(御手祓道)를 돌며 타타에로 향했다.
3월 축(丑)의 날에는 외현과 내현의 신사(오코)가, 다음 날 인(寅)의 날에는 다이켄의 신사(오코)가 마와리타타에에서 돌아왔다.[182] 칸나가는 신사(오코)에게 붙였던 미샤구지 신을 '올리고', 정진옥은 철거되었다. 인(寅)의 날에는 가미샤 본궁에서 봄의 대제가 열리고, 진(辰)의 날에는 습소 신사에서 신사(오코) 6명 전원이 참여하는 신사가 열렸다.[184]
6. 6. 에도 시대의 오토 축제, 신사에 얽힌 소문
에도 시대에 들어서면서 신사(神使)가 활약하는 장면은 오토가시라 축제에 한정되었고, 그 수는 6명에서 2명, 최종적으로 1명으로 줄었다. 廻湛(회담)도 폐지되어, 신사가 앞 궁궐의 御手祓道(어테바라이도)를 돌면 그대로 신사가 끝나는 형태가 되었다.[185][186] 신사가 손에 들고 있던 御杖(어츠에)도 거대화되어, '''御杖柱(어츠에바시라)'''로서 십간랑 안에 상주하게 되었다.또한, 신사가 형해화된 에도 시대 이후에는 신사는 의식에서 학대를 받았거나, 살해되었다(생제물로 바쳐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마쓰모토 번주의 명령에 의해 편찬된 『신부통기』(1724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또 그 해의 두촌에서 10세 이하의 남자를 세워 御公殿(어공전)이라고 한다, (이것은 대축부의 輿舁(여가)의 종류로 가벼운 신직의 자녀이다)앞 궁궐 안에 넣어 7일 동안 통야시키고, 축제의 날 내보내어, 칡넝쿨로 얽어 말에 태워 앞 궁궐의 서남쪽 마장을 끌어 돌리고, 매질하는 모습을 한다.(이때 御公殿(어공전)의 앞에는 명신의 신검을 가지고 이것은 근곡리라고 하는 御太刀다. 이 사람은 신직 양 봉행 이외다. 이 검으로 등나무를 자른다. 모든 신사에 사용하는 등나무는 田部村(다베무라)에 藤島(토지마)라고 하는 곳의 등나무를 정하여 사용한다) 그 후 석 간 정도의 큰 횃불을 대에 세우고 불을 지펴 타오르자 참배하는 군중이 소리를 질러 흥을 돋운다. 횃불이 다 타면 御手ハラヒ(어테하라이)라고 하여 축제의 끝으로 한다.[187]
후지모리 에이이치가 상사의 옛 신악 대부인 치노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사로 선택된 15세의 동남 중, 축제 후에 다시 그 모습을 본 예가 적지 않게 있어, 은밀하게 살해된 듯하며, 그 선택을 두려워하여 도망치거나,
걸인 또는 방랑자의 아이를 얻어 길러, 이에게 대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188]
이마이 노기쿠는 이 풍문을 사실로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드디어, '신사'(오코사마)를 선두로 한 삼소(三そう) 돌기가 시작되는데, 이때에는 주변이 어두워지고, 75마리의 사슴 머리가 놓인 십 간 랑이나, 불을 지피는 사람이 모여 식사나 술잔치를 하는 내 어혼 전, 중방 御殿(고텐) 등의 처마에는, 일제히 매달린 등롱이 켜지고, 횃불이 타올라, 횃불의 불빛이 바람에 흔들리고, 분위기는 더욱 고조됩니다.(중략)
'신사'를 숭배하는 씨족들 사이를, 말 위의 '오코사마'는, 꽹과리를 치며 달리는 사람들과 함께 세 바퀴 돌며, 밤 축제는 절정에 달합니다.
이 제전의 한가운데에서, '신사'(오코사마)는, 신에게 소환된다고 합니다.[189]
그 외에 "신사를 등나무로 뒤로 묶어 말에 태웠다. 등나무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아, 3년 후에 죽는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188]。
>御こう(어코)라고 하는 것 御まな板(어마나이타) 나오시 등도 속세에서 사람을 희생으로 삼았다고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데, 등나무 끈으로 옛날에는 묶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아 3년 안에 죽는다고 말해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렸다고 고로(古老)는 말한다. 또まな板(마나이타)를 고치는 자도 명이 길지 않다고 한다. 그まな板(마나이타)는 두 사람이 간신히 받쳐드는 정도의 것이다(중략) 열셋, 넷의 아이 적색 포를 입고 人牲(인생)의まな板(마나이타)에 세워졌다고 하는 것은 옛날의 소설에도 보였다고 생각한다.[190]
미야지 나오이치는 근세 신사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사 그 사람의 신분에 이르러서도, 선출 모태의 변화와 시세의 추이에 따라, 정통한 신예의 광화를 버리고 차츰 가벼운 쪽으로 기울어짐에, 불과 한 사람을 신장(원문 그대로)의 역할로 내는 데 그쳤지만, 내려와 유신 당시에는, 겨우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인신공양으로 빨리 죽는다는 미신에서 혐오의 풍조를 낳아 다시 신분을 묻지 않게 되었다."[191]
이러한 소문이 떠도는 가운데, 안에이 7년(1778년) 8월에 "마쓰다이라 도오토미노카미"(셋쓰국아마가사키번 주・마쓰다이라 다다아키로 추정)의 문의에 대해 상사가 낸 회신 『스와 신사 신사 차례 개략』[192]에서는 상사 측이 신사가 생제물로 바쳐지거나 등나무로 묶였다는 풍문을 부정했다.
>이 날 오코우 이와사,
>오른쪽 대로 문자라고 쓴다. 그러나 속칭이다. 라고 한다. 이 일은 아래에 적혀 있다. 15세 미만의 어린이를 한 명, 두촌에서 가리킨다.
>
>백 일의 행을 시킨다고 한다.
>백 일의 행은 없다. 삼십 일의 정결이다. 천의(千早)는 입지 않고, 붉은 물수건을 입고, 립카라스(立烏帽子)를 에 싸서 카우후르가 된다.
>
>등나무 끈으로 로 묶어 말에 태운다고 한다.
> 등나무의 허리띠를 걸고, 말에는 타지 않는다. (중략)
>
>사테 오코우를 다시 말에 태워, 그 焚火(다키비)를 돈다. 이렇게 신사가 끝난다고 한다.
>다시는 돌지 않고 한 번이다. 신사를 말에 태워 돌는 것은 앞에 적혀 있다. 위에 적는다. 를 돈다. 불이 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라고 한다. 당연히 신사가 끝난다.[193]
야마모토 히로코(2018년)는 "등나무 끈의 흔적"을 "돌아가는 신이 된 징표(표시)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 즉 성별된 메타포"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면직된 신사가 평범한 생활에 적응하는 데 직면한 어려움이 "신사는 몰래 살해되었다"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194]
"오토가시라 축제에 신사는 살해되었다"라는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지고 있으며, 일반 서적에 나오는 경우도 있다.[195]
6. 7. 겨울의 회담 (11월)
神使|신시|오코일본어들은 11월 말에 다시 회담을 했다. 이번에는 수확이 끝난 각지를 돌며 봄에 담에 내려 보낸 어좌구신을 올리고 풍작에 대한 감사의 공물을 사람들에게서 받았다고 여겨진다.[196][197] 에도 시대에는 쇠퇴하여 오호리의 관에서 연회가 열렸을 뿐이다.[198]7. 증거
스와 대사는 가미샤(上社)와 시모샤(下社) 두 신사로 이루어져 있다. 스와 호 남쪽에 있는 가미샤에는 오호리(大祝)라는 최고위 신관과 그 아래 5명의 신직이 봉사했다. 스와 씨(신씨) 출신 가미샤 오호리는 제신 다케미나카타노카미(스와 명신)의 신체로 여겨져 현인신으로 숭배받았다.
모리야 씨 출신 칸노오사(神長, 진초칸(神長官))는 오호리를 보좌하여 신사를 주관했다. 칸노오사는 오호리 즉위식을 포함해 가미샤 신사 비전을 전하고, 제사 때 미샤구지(御左口神)를 강림시키거나 올리거나, 의대가 되는 사람이나 물건에 "부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66][67]
스와 지역 전설에 따르면, 스와 명신이 스와에 들어왔을 때 지주신 모로야 신과 싸워 이겼고, 모로야 신은 명신을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모리야 씨는 모로야 신의 후예이고, 신씨는 스와 명신의 후예로 여겨졌다.[68][69][70][71]
향토 사학자들은 이 "입수 신화"가 스와에서 일어난 제정권 교체를 반영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 설에 따르면, 외래 씨족(신씨)이 스와 분지를 통솔한 재지 호족(모리야 씨)을 제압하고 스와의 새 지배자가 되었지만, 모리야 씨는 제사를 주관하는 씨족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이 사건은 스와 가미샤 제사 체제의 시작으로 여겨진다.[72][73][74] (최근에는 이 견해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75])
7. 1. 미샤구지의 실체
미샤구지는 바위, 나무, 대나무 잎 등에 깃드는 정령으로 여겨진다.[4][27][28] 남근 모양의 돌 막대(세키보)[29][30][31], 멧돌(이시자라)나 절구(이시우스) 같은 인공물에도 깃든다고 알려져 있다.[32][33] 이 외에도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에 내려앉거나,[34] 종교 의식 중에 사람에게 깃들기도 한다.[32][28]미샤구지가 깃드는 정령이라는 개념은 스와 대사의 종교 의식에서 미샤구지를 부를 독점적 권한을 가진 사제인 모리야 ''진초칸''이 미샤구지를 '내려오게'(오로시-모우스, 즉 인간이나 물건에 소환)하거나 '올라가게'(아게-모우스, 즉 그릇에서 쫓겨나는 것) 한다고 묘사하는 텍스트에 반영되어 있다.[35]
민간 신앙에서는 미샤구지를 다산과 수확과 관련지어 생각했으며,[20] 감기나 백일해 같은 질병을 낫게 하는 치유자로 여기기도 했다.[36][37] 미샤구지는 마을 전체의 수호신(우부스나-가미)이자 특정 혈족 집단의 수호신(이와이-가미)으로 숭배되었다.[38] 미샤구지가 마을을 세우는 것을 주관하고, 사이카미(경계 또는 국경의 수호신)와 관련되어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39]
미샤구지라는 이름은 다양한 표기와 발음으로 나타나는데, 만엽가나와 한자를 조합한 방식도 매우 많다. 스와 지역 안팎에서 확인된 표기 예시를 모두 합하면 20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모리야 씨의 고문서에서는 '미사구치 신'이라는 표기가 주로 사용되었고(히라가나로 '미사쿠우시'라고 표기된 예도 있다[41]), 『스와 대명신 화사』(1356년)에는 '미사쿠리 신'으로 한 번 등장한다. 현재 스와 지역에서는 '미샤구지', '미샤구지', '미샤구 신'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42][43] 스와 지역의 미샤구지를 가리켜 '미사쿠치 신', '미벽지 신'이라는 표기도 사용된 적이 있었다.[44] '미샤구지' 외에도 '미샤구치[45]', '사구지[49][46]', '미사쿠지[47]', '미사구치[48]' 등으로 표기하거나 발음하기도 한다.
지노시 출신 향토사학자 이마이 노기쿠가 쓴 "미샤구지의 답사 집성"에서는, 스와군 안과 인접한 군에 흩어져 있는 미샤구지 신사를 현지 주민들이 주로 "(오)미샤구지" 또는 "(오)샤구지" "(오)샤고지(사마)"라고 불렀다고 추정했다.[49][51]
다른 지역에서는 "사쿠", "샤구", "사구", "사코", "사고", "쇼고"를 포함한 신명이나 신사명이 보이며, "수호신", "사군신[49]", "사군신[49]", "적구신[49]", "참궁신[49]", "사자신[49]", "곡구[43]", "사구[43]", "산호신[49]", "석호자[49]" 등으로 표기된다. 발음도 다양하며, "(오)상구지[49]", "(오)상고지(상)[49]", "사고지[49]", "사구진[49]", "(오)상구상[49]", "조구상[49]", "오샤모츠사마[49]", "샤곳차응[49]", "샤곳탄[49]", "샤쿠진", "슈쿠진", "슈쿠지", "슈쿠시", "시키진", "시키지" 등이 있다. 그중에는 "오주걱님", "오샤진님", "오야쿠시사마"와 같이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된 호칭까지 있다.[49] 또한, 검지의 신이라고 하여 "척신(샤쿠진)"을 적용하고, 검지 막대기나 검지 밧줄을 헌납하는 곳도 있다.[52] 이마이는 이것들은 모두 스와의 미샤구지와 관련이 있다는 설을 주장했다.
야나기타 구니오의 『이시가미 문답』(1910년)에는 "이시가미", "이시호신", "이시가미이", "숙신"이라는 명칭의 신도 언급되어 있다.[52] 곤파루 젠치쿠의 『명숙집』(1465년경)은 "숙신"과 "옹"을 동일한 존재로 보고, 옹(숙신)을 스와 명신이나 쓰쿠바 산의 암석 등과 동일시하고 있다. 참고로, 이시가미(샤쿠지)와 이시가미(이시가미)를 동일시하는 사전은 여러 개 있지만,[53] 『일본 민속 대사전 상』은 "이시가미(이시가미)와는 다르다"라고 하고 있다.[54]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벼를 수호하는 것에서 "작(사쿠) 신"으로 보는 설,[43] 토지를 개척하는(=사쿠) 것으로 그 안에 숨겨진 생명력을 표출시키는 것에서 "어작(피)령(미사쿠치)"으로 보는 설,[55] "어적사"로 보는 설(여기서는 미샤구지는 원래 뱀신이었다고 한다)[56] 등이 있다.
스와 대사는 가미샤(上社)와 시모샤(下社)라는 두 개의 신사로 이루어져 있다. 스와 호 남쪽에 위치한 가미샤에는 오호리(大祝)라고 불리는 최고위 신관과 그 아래 5명의 신직이 봉사했다. 스와 씨(신씨) 출신의 가미샤 오호리는 옛날에는 제신 다케미나카타노카미(스와 명신)의 살아있는 신체로 여겨져 현인신으로 숭배받았다. 모리야 씨 출신의 칸노오사(神長, 후에 진초칸(神長官)이라고도 함)는 오호리를 보좌하여 신사를 주관했다. 신장은 오호리의 즉위식을 포함하여 가미샤의 신사 비전을 전하고, 신사 때 미샤구지(御左口神)를 강림시키거나 올리거나, 또는 의대가 되는 사람이나 물건에 "부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66][67]
스와 지역에 전해지는 신화에 따르면, 스와 명신이 스와에 들어왔을 때 지주신인 모로야 신과 싸웠고, 모로야 신은 싸움에서 져서 명신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 모리야 씨는 모로야 신의 후예이고, 신씨는 스와 명신의 후예로 여겨졌다.[68][69][70][71]
국사에서는 스와 신이 "타케미나카타노카미"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고지키』나 『선대구사본기』의 국양의 장면에서 타케미카즈치노카미와의 힘 겨루기에서 패배하는 오쿠니누시노카미의 차남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나 이즈모 지방의 고문헌인 『이즈모국 풍토기』와 『이즈모 국조 신하사』에는 이 타케미나카타노카미가 등장하지 않고, 『고지키』에서도 오쿠니누시노카미의 아들이면서 그 계보에 이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타케미나카타노카미는 국양 신화에 삽입되었다는 설이 있다.
스와 지역에서도 타케미나카타노카미(『고지키』 등에 나오는 타케미나카타노카미)의 모습은 옅다. 중세 축문에는 신명이 나오지 않고,[86] "타케미나카타노카미"라는 신명도 거의 알려지지 않아, 제신을 단순히 "스와 묘진", "스와 대명신", "오묘진님" 등으로 불렀다. 또한, 『고지키』의 설화와는 다른 신화와 전승(입수 신화, 스와 묘진을 뱀(용)으로 하는 민화 등)이 현지에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타케미나카타노카미는 "미샤구지 신앙을 야마토 왕권의 신통기에 짜넣은 결과 태어난 신명"(오와 이와오)[88] 또는 "조정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서 스와에 강요된 겉으로 드러난 신"(테라다 시즈코·와시오 테츠타)[89]이며, 스와 지역의 본래 신은 오히려 미샤구지라는 설이 있다.
『일본서기』 지토 천황 5년(681년) 8월 기록에는 "사자를 보내어, 류타 풍신, 시나노의 스와(스와)·미즈우치 등의 신을 제사하게 한다"라고 적혀 있어, 스와에 모셔져 있는 신은 나라 시대 이전에 이미 조정에서 바람의 신, 물의 신으로서 숭배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90] 타케미나카타노카미를 후세에 창작된 신으로 보는 연구자는 이 "스와 신"을 미샤구지[91] 또는 모리야 신[92]으로 보고 있다.
상사의 오호리(대축)는 칸나가가 거행하는 취임 의식(즉위식·직위식)을 거행했다. 이때, 오호리가 되기 위해 선택된 자(어린 남자아이)는 호랑가시나무 또는 단풍나무가 있는 게이칸샤(상사 전궁 경내)의 돌 위에 서서 오호리의 복장을 입는다. 이 의식을 받음으로써 소년은 스와 명신의 신체가 된다고 여겨졌다.[93][94][95] 전승에 따르면, 스와 명신이 8세 남자아이에게 자신의 옷을 입힌 후 "나는 몸이 없으니, 호리로 몸을 삼는다"고 말했다고 하며, 그것이 신씨와 오호리 직의 시작이라고 한다.[96][97]
헤이안 시대 말기에 스와에 불교가 들어와, 가미샤 혼구에는 진구지, 뇨호인, 렌치인, 홋케지가 세워졌다.[106][107] 혼지스이쟈쿠 설이 퍼지면서, 가미샤의 남신은 후겐 보살, 시모샤의 여신은 센쥬 칸논의 수적(垂迹)으로 여겨졌다.[108]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자, 료부 신토를 배운 신장 모리야 미쓰자네가 밀교 요소를 도입하여 독특한 "스와 신토"를 만들려고 했다. 천황의 즉위관정과 신도관정을 참고하면서 오호리베를 즉위식의 밀교풍으로 하고, 신사에 밀교적 해석을 부여했다.[109]
미쓰자네가 저술한 비전서 『스와다이묘진 신비어본사 대사(諏訪大明神神秘御本事大事)』[110]에는 료부 신토·진언 밀교의 영향이 보인다. 오사구치 신을 "붙여 말할" 때의 의례에는 인상과 진언이 사용된 것이 그 한 예이다.
무로마치 시대에 필사된 『스와가미샤 물기령지사(諏訪上社物忌令之事)』(1237년 성립)의 사본(신장본)에 실려 있는 "수파 육제일 정진의 일기"[113]에서는, "스와난궁 호쇼 다이묘진·13소 왕자·오사구치 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6개의 재일에 육도의 주인으로서 육관음과 습합된 6체의 오사구치 신이 배정되었다.[116]
미샤구지(미사구치신)를 스와묘진의 권속신·미코가미로 위치시키는 견해는 이미 중세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모리야 미쓰자네는 "당사 미신의 왕자"에 대해 언급했다. 미쓰자네는 미사구치신을 6명의 오코나 "13소(왕자)"와 같이 스와묘진의 왕자신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가미샤 물기령』 "수파 육제일"에 기록된 "다이묘진·13소 왕자·미사구치신"과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118] 또한, 『모리야 신장 고서』에는 "당사에서 미샤구지신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미자손의 일이다"라고 있다.[119] 『스와대명신화사』에도 "13소의 왕자"가 스와묘진을 수호하는 권속신으로 등장하고 있다.[120] 다케다 신겐에 의한 하지장 『스와 상하궁 제사 재흥 차례』(1565년)에도 "정진옥에 있어서 신사 30일의 정진, 미사구치신 작립, 왕자 태내의 표체이다"라고 적혀 있다.[121][122]
근대 스와 지역에서는 "미사구치신"(여기서는 "미벽지신", 즉 "토지 개발의 신"이라는 뜻으로 해석)이라는 명칭은 국토 개발에 공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13신 미코가미의 총칭으로 여겨졌다.[123][124] 메이지 시대 신사 명세장에서는 스와에 있던 약 40개의 미샤구지 신사 대부분이 다케미나카타노미코토(스와다이신)의 미코가미를 모시는 신사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중에는 "다케미나카타노미코토 미코"로서 "미샤구지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신사가 한 곳 있다.[125] 나가노현(구 시나노국) 전체에서 보이는 스와미코가미를 단독으로 주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사자신", "미사쿠지" 등으로 칭하는 예도 있다.[126]
7. 1. 1. 돌의 신인가 나무의 신인가
스와 대사는 가미샤(上社)와 시모샤(下社)라는 두 개의 신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스와 호 남쪽에 있는 가미샤에는 최고위 신관인 오호리(大祝)와 그 아래 5명의 신직이 봉사했다. 스와 씨(신씨) 출신의 가미샤 오호리는 옛날에 제신·다케미나카타노카미(스와 명신)의 살아있는 신체로 여겨져 현인신으로 숭배받았다.[66][67]모리야 씨 출신의 칸노오사(神長, 후에 진초칸(神長官)이라고도 함)는 오호리를 보좌하여 신사를 주관했다. 신장은 오호리의 즉위식을 포함하여 가미샤의 신사 비전을 전하고, 신사 시에 미샤구지(御左口神)를 강림시키거나 올리거나, 또는 의대가 되는 사람이나 물건에 "부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66][67]
스와 지역에 전해지는 신화에 따르면, 스와 명신이 스와에 들어왔을 때 지주신인 모로야 신과 싸웠고, 모로야 신은 싸움에서 져서 명신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 모리야 씨는 모로야 신의 후예이고, 신씨는 스와 명신의 후예로 여겨졌다.[68][69][70][71]
향토 사학자들은 이 "입수 신화"가 스와에서 일어난 제정권의 교체를 반영하고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 설에 따르면, 외래 씨족(신씨)이 스와 분지를 통솔한 재지 호족(모리야 씨)을 제압하여 스와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지만, 모리야 씨는 제사를 주관하는 씨족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이 사건이 스와 가미샤의 제사 체제의 시작으로 여겨진다.[72][73][74] (최근에는 이 견해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75])
막부 말기에 쓰여진 『수와구취적지(諏訪旧蹟誌)』는 미샤구지에 대해 "여러 나라에서 제사 지내지만 신체는 일정하지 않다. 어떤 곳은 삼궁신(三宮神)이라고, 어떤 곳은 사궁사(社宮司)라고, 어떤 곳은 사자사(社子司) 등으로 쓴 것을 볼 수 있지만 명확한 뜻을 알 수 없어 기록도 일정하지 않다. (...) 대개는 그 촌락의 진수 대사의 술해에 있을 것이다. 이는 곧 돌의 신이다. 이것을 오음으로 샤쿠진이라고 부르면서, 음은 같지만 쓰는 방식은 혼란스러워졌다."라고 언급하고 있다.[199]
『슨가신풍토기(駿河新風土記)』에도 마을의 척량 후에 간관(間竿)을 묻은 다음 이 신을 모셨다는 설이 있으며,[54] 『화한삼재도회』는 "사야구노미야(志也具之宮)"를 도조신(새의 신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54]
야나기타 구니오는 1910년에 일본에서 보이는 각종 돌의 신에 대한 야마나카 쇼 등과의 서간 왕래를 『석신문답(石神問答)』[200]으로 출판했다. 신체가 돌이라는 점에서 미샤구지를 돌의 신으로 보는 야마나카에 대해, 야나기타는 돌을 모시지 않는 미샤구지도 있고, 돌을 모셔도 미샤구지라고 하지 않는 예가 있다고 지적하며, 척량에 사용되는 간관이 그 신체로서 모셔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미샤구지는 토지 척량의 신이라고 주장했다.[201][202] 또한, 미샤구지는 야마토 민족에 대한 선주민에 의해 모셔지던 새의 신(경계의 신)으로, 야마토 민족과 선주민이 각자의 거주지에 세운 일종의 표지라고도 고찰했다.[203] 야나기타는 『석신문답』 재간 서문에서 "이것은 나무의 신이었음이 먼저 분명해졌고, 이제 이 부분만은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201][204]
야나기타의 설에 대해 야마토 이와오는(1990년)는 야나기타가 『수와구취적지』를 인용했을 때 "이는 곧 돌의 신이다"라는 문구를 생략했다고 지적하며, 애초에 『취적지』의 저자가 미샤구지를 돌의 신으로 묘사한 것은 경계의 신에 돌의 신이 많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201] 야마토는 미샤구지가 모셔지는 고목의 뿌리에 사당이 있고, 신체로서 돌 막대가 놓여 있는 것이 전형적인 미샤구지의 모습이라는 이마이 노기쿠의 관찰에 근거하여, 미샤구지는 역시 돌과 관련이 있으며, 나무의 신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205] 이시노 미치호 (2017년)도 야나기타가 민간 신앙으로서의 돌의 신 조사의 연장선상에서 미샤구지를 다루었으며, 중세 수와 신앙에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결론에 도달했다고 비판하고 있다.[64]
7. 1. 2. 사슴의 태아, 술의 신
나카야마 타로(민속학자)는 1930년(쇼와 5년) "어좌구신고"에서 입술술을 옛날에는 "미사쿠", "사쿠치"라고 불렀다는 점을 들어 미샤구지가 술의 신이라는 설을 주장하고, 스와 대사와 사슴의 깊은 인연으로 미샤구지의 정체를 암사슴·임신한 사슴으로 보아 "사슴의 태아를 술 제조에 사용하는 일종의 주술적 작법이 행해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고 추측했다.[206]그러나 향토사학자 이토 토미오에게 이 설에 관해 질문받은 이마이 노기쿠는 사슴의 태아를 술 제조에 사용하는 주술적 작법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나카야마의 추측을 부정했다. 키타무라 카이오(1975년)도 나카야마 설을 "어딘가 긍정할 만한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면서, 나카야마가 논고에서 언급한 미카와국 시타라군 후리카사무라 오아자 코바야시(현재의 아이치현 키타시타라군 토에이초)에서 행해지는 씨앗받이 신사에서 사슴의 배에 넣는 포가 "사슴의 사고(태아)"라고 불리는 것을 미샤구지의 명칭 또는 토지 개척과의 관계와 "어떤 인연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207] 야마토 이와오도 이 정보를 바탕으로 미샤구지는 식물(밭농사·논농사)뿐만 아니라 동물과도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208]
7. 1. 3. 미샤구지와 고목, 석봉
미샤구지는 바위, 나무, 대나무 잎에 깃드는 정령으로 여겨지며,[4][27][28] 남근 형태의 돌 막대(세키보)[29][30][31], 맷돌(이시자라), 절구(이시우스)와 같은 다양한 인공물에도 깃든다고 여겨진다.[32][33] 이 외에도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에 내려앉거나,[34] 종교 의식 중에 인간에게 깃들기도 한다.[32][28]
민간 신앙에서 미샤구지는 다산과 수확과 관련이 있고,[20] 감기나 백일해와 같은 질병을 치료하는 신으로도 여겨졌다.[36][37] 미샤구지는 마을 전체의 수호신(우부스나-가미)이자 특정 혈족 집단의 수호신(이와이-가미)으로 숭배되었다.[38] 또한 마을을 세우는 것을 주관하고, 사이카미(경계 또는 국경의 수호신)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믿어졌다.[39]
후지모리 에이이치, 이마이 노기쿠, 미야사카 미츠아키, 고부족 연구회(노모토 미키치, 키타무라 카이오, 다나카 모토) 등의 연구를 통해 미샤구지와 석봉이나 돌절구와의 관계가 밝혀졌다. 이마이는 고목의 뿌리 근처에 석봉을 모시는 것이 가장 전형적인 미샤구지의 형태임을 실지 답사를 통해 판명하였다.[209] 따라서 미샤구지는 나무에 내려와 돌에 깃드는 신령으로 여겨진다.
키타무라는 미샤구지의 신체가 되는 석봉이나 돌절구의 대부분이 조몬 중기 시대의 것이라고 지적하며, 미야지 나오이치가 석봉은 원래 미샤구지의 신체가 아니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미샤구지 신앙의 기원을 조몬 중기 시대의 지모신 신앙에서 찾고, 석봉 속에 그 신앙적 배아가 있었다고 보았다.[210] 미야사카는 신목·석봉 신앙을 고대의 뱀 신앙과 결부시켜 (신목-뱀-남근-석봉), 스와 대사의 용사 신앙이 조몬 중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샤구지(석봉)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211]
하지만 스와 대사 상사의 과거 제사에서는 미샤구지가 나무나 돌뿐만 아니라 조릿대나 인간 등에도 깃들기 때문에, 단순한 나무나 돌의 신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또한, 다른 신(덴파쿠신, 센로쿠신 등[212])을 모시는 사당에도 석봉이 신체로 봉납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석봉 제사가 미샤구지 신앙 특유의 것이 아니라, 원래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이 설에서는 "땅속에서 나온 특수한 돌·석기(석봉이나 석검 등)를 신사에 봉납하여 모신다"라는 각지에서 보이는 석신 신앙이 스와 신앙의 확산에 따라 미샤구지와 결부되었다고 한다.[65]
이시노 호다카(2018년)는 무사시국(현 사이타마현, 도쿄도)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히카와 신사에도 석봉·석검을 모시는 예가 많은 것을 예로 들었다. 히카와 신앙에서의 영석 제사는 미샤구지 신앙과 관련이 없고, 석봉·석검을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에 비정하여 생긴 신앙이라고 한다.[213]
7. 1. 4. 신인가 정령(힘)인가
스와 대사는 가미샤(上社)와 시모샤(下社)라는 두 개의 신사로 이루어져 있다. 스와 호 남쪽에 위치한 가미샤에는 오호리(大祝)라고 불리는 최고위 신관과 그 아래에 배치된 5명의 신직이 봉사했다. 스와 씨(신씨) 출신의 가미샤 오호리는 옛날에는 제신·다케미나카타노카미(스와 명신)의 살아있는 신체로 여겨져 현인신으로 숭배받았다.[66]오호리를 보좌하여 신사를 주관한 것은 모리야 씨 출신의 칸노오사(神長, 후에 진초칸(神長官)이라고도 함)이다. 신장은 오호리의 즉위식을 포함하여 가미샤의 신사 비전을 전하고, 신사 때 미샤구지(御左口神)를 강림시키거나 올리거나, 또는 의대가 되는 사람이나 물건에 "부착"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겨졌다.[67]
스와 지역에 전해지는 신화에 따르면, 스와 명신이 스와에 들어왔을 때 지주신인 모로야 신과 싸웠다. 모로야 신은 싸움에서 져서 명신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한다. 모리야 씨는 모로야 신의 후예이고, 신씨는 스와 명신의 후예로 여겨졌다.[68][69][70][71]
지방 향토 사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입수 신화"는 스와에서 일어난 제정권의 교체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설에서는, 외래 씨족(신씨)이 스와 분지를 통솔한 재지 호족(모리야 씨)을 제압하여 스와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지만, 모리야 씨가 제사를 주관하는 씨족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이 사건이 스와 가미샤의 제사 체제의 시작으로 여겨진다.[72][73][74] (참고로, 이 견해는 최근 의문시되고 있으며, 입수 신화는 고고학적 지견과 연결해야 한다[75], 또는 이 신화 자체는 중세에 널리 유포되었던 쇼토쿠 태자와 모노노베노 모리야의 다툼(정미의 난)에 얽힌 전승의 영향을 받고 있다[76], 또는 그 전설을 바탕으로 중세에 창작된 것으로, 고대 신화가 아니다[77]라는 주장도 있다.) 권력 교체극이 일어났다고 여겨지는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며, 스와에 유입된 신씨를 벼농사 기술을 가져온 이즈모 계 민족(야요이 시대 사람들)으로 보는 설[78][79], 가네사시 씨(시나노 국조 가문, 후에 스와 시모샤의 오호리 가문)의 분가[80][81], 또는 오오미와 씨의 일파 또는 동족[82][83]으로 보는 설이 있다. 후자의 경우, 정권 교체극을 시모이나 지방에 개화한 말갖춤 부장 고분 문화가 스와 지역에 출현한 시기(6세기 말~7세기 초)에 잘 맞춰진다.[84][85]
막부 말기에 쓰여진 『수와구취적지(諏訪旧蹟誌)』는 미샤구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슨가신풍토기(駿河新風土記)』에도 마을의 척량 후에 간관(間竿)을 묻은 다음 이 신을 모셨다는 설이 보이며, 『화한삼재도회』는 "사야구노미야(志也具之宮)"를 도조신(새의 신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54]
야나기타 구니오는 일본에서 보이는 각종 돌의 신에 대한 야마나카 쇼 등과의 서간 왕래를 『석신문답(石神問答)』[200]으로 1910년에 출판했다. 신체가 돌이라는 점에서 미샤구지를 돌의 신으로 보는 야마나카에 대해, 야나기타는 돌을 모시지 않는 미샤구지도 있고, 돌을 모셔도 미샤구지라고 하지 않는 예가 있다고 지적하며, 척량에 사용되는 간관이 그 신체로서 모셔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미샤구지는 토지 척량의 신이라고 주장했다.[201][202] 또한, 미샤구지는 야마토 민족에 대한 선주민에 의해 모셔지던 새의 신(경계의 신)으로, 야마토 민족과 선주민이 각자의 거주지에 세운 일종의 표지라고도 고찰했다.[203] 『석신문답』의 재간 서문에서 야나기타는 "이것은 나무의 신이었음이 먼저 분명해졌고, 이제 이 부분만은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201][204]
이 야나기타의 설에 대해 야마토 이와오는(1990년)는, 야나기타가 『수와구취적지』를 인용했을 때 "이는 곧 돌의 신이다"라는 문구를 생략했다고 지적하며, 애초에 『취적지』의 저자가 미샤구지를 돌의 신으로 묘사한 것은 경계의 신에 돌의 신이 많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201] 게다가 야마토는, 미샤구지가 모셔지는 고목의 뿌리에 사당이 있고, 신체로서 돌 막대가 놓여 있는 것이 전형적인 미샤구지의 모습이라는 이마이 노기쿠의 관찰에 근거하여, 미샤구지는 역시 돌과 관련이 있으며, 나무의 신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205] 이시노 미치호 (2017년)도, 야나기타가 민간 신앙으로서의 돌의 신 조사의 연장선상에서 미샤구지를 다루었으며, 중세 수와 신앙에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결론에 도달했다고 비판하고 있다.[64]
현재는 미샤구지를 "신"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호소다 키스케(2003년)는 "정령과 인격신(신)을 옛 일본인들은 구별했다. 미사쿠지를 신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시노 미치호는, 상사의 신사에서 미샤구지에 씌인 사람이 신탁하는(신의 뜻을 나타내는) 일이 전혀 없고, 1년 동안 상사에 봉사할 향촌을 결정하는 어점 신사도 어디까지나 스와 명신의 신탁이며, 제사 중에 내려지는 미샤구지는 그를 위해 작용할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샤구지는 본래 추상적인 "스와 대인을 위해 일하는 순수한 힘"(즉, 자연 에너지 그 자체)으로 이해되었다는 설을 이시노가 제창하고 있다. 키타무라 카이오와 타나카 모토(2018년) 또한 미샤구지를 마나(실체성이 없는, 사람이나 물건에 부착하는 신비한 힘)나 오리쿠치 시노부가 말하는 "외래 영혼"에 비유하고 있다. 테라다 시즈코, 와시오 테츠타(2010년)도 미샤구지의 본질을 "생명력을 북돋는 파워 같은 것", "하늘에서 내려오는(...) 대기(공기·하늘)에 충만한 에너지"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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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神氏系図(前田古写本之写)/資料コード 03OD0624101600
https://www.ro-da.jp[...]
2020-01-12
[146]
간행물
祟りなす諏訪の土着神 ミシャグジ
KADOKAWA
[147]
서적
穴巣始と外来―古諏訪祭政体の冬期構成―
人間社
[148]
서적
諏訪明神―カミ信仰の原像
岩田書院
[149]
논문
諏訪社の祭祀と仮屋
https://hdl.handle.n[...]
近畿民俗学会
[150]
논문
神長官家における『諏訪大明神絵詞』受容のあり方
https://www.shinshu-[...]
信州大学
[151]
서적
諏訪大社の御柱と年中行事
郷土出版社
[152]
서적
諏訪の神さまが気になるの
信濃毎日新聞社
[153]
서적
諏訪神社の竜蛇信仰
人間社
[154]
서적
諏訪明神―カミ信仰の原像
岩田書院
[155]
서적
諏訪の神さまが気になるの
信濃毎日新聞社
[156]
서적
諏訪大社の御柱と年中行事
郷土出版社
[157]
서적
龍蛇神:諏訪大明神の中世的展開
人間社
[158]
서적
諏訪信仰の中世―神話・伝承・歴史
三弥井書店
[159]
서적
諏訪信仰史
名著出版
[160]
간행물
祭事を読む―諏訪上社物忌令之事―
[161]
서적
囚われの聖童たち 諏訪祭政体の大祝と神使をめぐって
国書刊行会
[162]
서적
諏訪明神―カミ信仰の原像
岩田書院
[163]
서적
諏訪大社の御柱と年中行事
郷土出版社
[164]
웹사이트
諏訪大社 上社宝印
https://www.82bunka.[...]
2019-02-08
[165]
간행물
諏訪御子神としてのミシャグジ―ミシャグジ研究史の盲点を問う《後編》
[166]
서적
諏訪大社の御柱と年中行事
郷土出版社
[167]
서적
囚われの聖童たち 諏訪祭政体の大祝と神使をめぐって
国書刊行会
[168]
서적
松前健著作集 第9巻
おうふう
[169]
서적
諏訪の神さまが気になるの
信濃毎日新聞社
[170]
서적
諏訪大社の御柱と年中行事
郷土出版社
[171]
간행물
諏訪御子神としてのミシャグジ―ミシャグジ研究史の盲点を問う
[172]
서적
諏訪大社
[173]
서적
諏訪大社
[174]
서적
諏訪明神―カミ信仰の原像
岩田書院
[175]
서적
諏訪明神―カミ信仰の原像
岩田書院
[176]
서적
諏訪大社
""
[177]
서적
諏訪大社の御柱と年中行事
郷土出版社
[178]
서적
諏訪の神さまが気になるの
信濃毎日新聞社
[179]
서적
諏訪明神―カミ信仰の原像
岩田書院
[180]
간행물
中世諏訪社の一考察 失われた芸能と伝承を求めて
東西南北 和光大学総合文化研究所年報
[181]
서적
藤森栄一全集 第14巻(諏訪神社)
学生社
[182]
서적
諏訪大社の御柱と年中行事
郷土出版社
[183]
서적
諏訪の神さまが気になるの
信濃毎日新聞社
[184]
서적
諏訪大社の御柱と年中行事
郷土出版社
[185]
서적
諏訪神社の研究 後篇
信濃教育会諏訪部会
[186]
서적
図説・上伊那の歴史 上 (長野県の歴史シリーズ 4)
郷土出版社
[187]
서적
新編信濃史料叢書 第5巻
https://dl.ndl.go.jp[...]
信濃史料刊行会
[188]
간행물
鉄鐸―その古代史上の意義 諏訪神社の考古学的研究(四)
藤森栄一全集 第14巻 (諏訪神社) 学生社
[189]
간행물
地母神信仰の村・序説
古代諏訪とミシャグジ祭政体の研究 古代部族研究会編、人間社
[190]
간행물
洲羽事跡考
諏訪史料叢書 巻21 諏訪教育会 編
[191]
서적
諏訪神社の研究 後篇
信濃教育会諏訪部会
[192]
서적
長野県史 近世史料編 第3巻 (南信地方)
https://dl.ndl.go.jp[...]
長野県史刊行会
[193]
서적
長野県史 近世史料編 第3巻 (南信地方)
長野県史刊行会
[194]
간행물
囚われの聖童たち 諏訪祭政体の大祝と神使をめぐって
諏訪学 国書刊行会
[195]
서적
神道の本 八百万の神々がつどう秘教的祭祀の世界(NEW SIGHT MOOK Books Esoterica 2)
학연플러스
[196]
서적
諏訪の神さまが気になるの
信濃毎日新聞社
[197]
서적
諏訪大社の御柱と年中行事
郷土出版社
[198]
서적
諏訪神社の研究 後篇
信濃教育会諏訪部会
[199]
서적
信濃古代史考
名著出版
[200]
서적
石神問答
https://dl.ndl.go.jp[...]
聚精堂
[201]
서적
信濃古代史考
名著出版
[202]
간행물
「ミシャグジ祭政体」孝
古代諏訪とミシャグジ祭政体の研究 古代部族研究会編、人間社
[203]
문서
『遠野物語』研究草稿
[204]
간행물
「ミシャグジ祭政体」孝
古代諏訪とミシャグジ祭政体の研究 古代部族研究会編、人間社
[205]
서적
信濃古代史考
名著出版
[206]
간행물
「ミシャグジ祭政体」孝
古代諏訪とミシャグジ祭政体の研究 古代部族研究会編、人間社
[207]
간행물
「ミシャグジ祭政体」孝
古代諏訪とミシャグジ祭政体の研究 古代部族研究会編、人間社
[208]
서적
信濃古代史考
名著出版
[209]
간행물
「ミシャグジ祭政体」孝
古代諏訪とミシャグジ祭政体の研究 古代部族研究会編、人間社
[210]
간행물
「ミシャグジ祭政体」孝
古代諏訪とミシャグジ祭政体の研究 古代部族研究会編、人間社
[211]
논문
蛇体と石棒の信仰―諏訪御左口神と原始信仰―
人間社
2017
[212]
논문
洩矢祭政体の原始農耕儀礼要素
人間社
2017
[213]
간행물
石神信仰と草薙剣
2018
[214]
서적
県宝守矢文書を読む―中世の史実と歴史が見える
ほおずき書籍
2003
[215]
간행물
諏訪御子神としてのミシャグジ―ミシャグジ研究史の盲点を問う
2017
[216]
간행물
シンポジウム「ミシャグジ再起動」~探求のあれからと今、そしてこれから~
2018
[217]
서적
諏訪明神―カミ信仰の原像
岩田書院
2010
[218]
서적
日本民俗大辞典〈上〉あ〜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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