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사빈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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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리스 사빈코프는 러시아의 혁명가이자 테러리스트, 작가이다. 1879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학생 시위로 퇴학당했다. 사회주의 단체 활동을 시작하여 마르크스주의에 실망하고 테러리즘으로 전향, 사회혁명당에 가입하여 전투 조직의 지도자가 되었다. 러시아 제1 혁명, 임시 정부 참여, 반볼셰비키 활동을 거치며,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1924년 소련으로 유인되어 체포, 재판을 받고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자서전 『테러리스트의 회고록』과 소설 『창백한 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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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사빈코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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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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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보리스 빅토로비치 사빈코프 |
출생 | 1879년 1월 31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하르키우 (현재의 우크라이나) |
사망 | 1925년 5월 7일 |
사망 장소 |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
사망 원인 | 투신 자살 (살해 또는 자살) |
국적 | 러시아 |
다른 이름 | B. 롭신 (필명) |
교육 |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
직업 | 러시아 임시 정부 육군 차관 |
활동 기간 | 1906년–1911년 (사회혁명당 전투 조직) 1918년 (백군 운동 및 자유와 조국 옹호 연맹) |
소속 정당 | 사회혁명당 (1906년–1911년) |
경력 | |
군 복무 | 1914년 - ? (프랑스 육군) 1918년 3월 - 1918년 7월 (자유와 조국 옹호 연맹) 1918년 (?) - ? (러시아 의용군) |
최종 계급 | 육군 차관 |
지휘 | 자유와 조국 옹호 연맹 지도자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
사상 및 활동 | |
사상 | 마르크스주의 테러리즘 |
참여 조직 | 사회혁명당 사회혁명당 전투단 자유·조국 옹호 동맹 |
주요 작품 | 《테러리스트의 회상》 《창백한 말》 |
인용구 |
2. 초기 생애
보리스 사빈코프는 현재 우크라이나 하르코프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학생 시위 참여로 퇴학당했다. 이후 독일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초기에는 사회주의 단체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볼로그다로 유배되었고, 이 시기 마르크스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테러리즘 노선으로 전향했다. 1903년 유배지를 탈출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사회혁명당에 가입하여 SR 전투 조직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 1. 출생과 가계
1879년 1월 19일, 러시아 제국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귀족 가문의 자녀로 태어났다.[11] 아버지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사빈코프는 폴란드 왕국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지역 군사 판사(재판관)로 일했다. 어머니는 화가 니콜라이 야로셴코 장군의 여동생으로, 유명한 작가였다. 형 알렉산드르는 사회민주주의자로 활동하다 시베리아로 망명했고, 1904년 망명지인 야쿠츠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생 빅토르는 육군 장교, 저널리스트, 예술가였으며, "다이아몬드의 잭", 프리메이슨 회원이기도 했다.사빈코프는 바르샤바의 김나지움에서 수학했는데, 훗날 사회혁명당 동료가 되는 이반 칼리야예프도 이 학교 출신이었다.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같은 해 바르샤바에서 혁명 활동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1898년부터는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며 사회민주주의 단체 "사회주의자"와 "노동자의 깃발"의 회원이 되었다. 1899년에는 1899년 러시아 학생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퇴학당했으며, 같은 해 작가 글레프 우스펜스키의 딸 베라 글레보브나 우스펜스카야와 결혼하여 2명의 아이를 두었다. 퇴학 후에는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2. 2. 학창 시절과 혁명 활동
1879년 1월 19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귀족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11] 그의 아버지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사빈코프는 폴란드 왕국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지역 군사 판사로 일했다. 어머니는 화가 니콜라이 야로셴코 장군의 여동생이자 작가였다. 형 알렉산드르는 사회민주주의자로 활동하다 시베리아로 망명했고, 1904년 망명지인 야쿠츠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생 빅토르는 육군 장교, 저널리스트, 예술가였으며, 예술가 그룹 "다이아몬드의 잭"과 프리메이슨의 회원이기도 했다.사빈코프는 바르샤바의 김나지움에서 이반 칼리야예프와 함께 공부한 후,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1899년 1899년 러시아 학생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일찍부터 혁명 활동에 관심을 보였다. 1897년 바르샤바에서 혁명 활동 혐의로 체포되었고, 1898년부터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사회주의자", "노동자의 깃발"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단체에서 활동했다. 1899년 다시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같은 해, 작가 글레프 우스펜스키의 딸 베라 글레보브나 우스펜스카야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었다. 1900년에는 빅토르 체르노프 등과 교류하며 이전에 비판했던 인민의 의지파의 테러리즘에 점차 기울게 되었다. 1901년에는 노동자 계급 해방 투쟁 동맹의 선전부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었고, 이듬해 볼로그다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지방 재판소의 선서 변호사 협의회 비서로 잠시 일했으며, 함께 유배 중이던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 등 저명한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지적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사빈코프는 점차 마르크스주의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같은 유배지에 있던 여성 혁명가 에카테리나 브레슈코-브레슈코프스카야의 강한 영향을 받아 사회혁명당(SR)의 노선, 즉 테러리즘으로 사상적 전환을 이루었다. 1903년 6월, 그는 유배지에서 스위스 제네바로 탈출하여[11] 사회혁명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그는 당의 SR 전투 조직에 합류하여, 당시 조직을 이끌던 예브노 아제프의 부관이 되었다. 이후 아제프가 체포되자 사빈코프가 조직의 단장이 되었다.
3. 사회혁명당 활동
사회혁명당(에세르)에 가입한 사빈코프는 당내 강경 노선을 대표하며 핵심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에 가담하여 러시아 내무부 장관 뱌체슬라프 폰 플레베 암살과 모스크바 총독이었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암살 등 러시아 제국의 고위 인사 암살을 주도했다. 1906년 이러한 활동으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옥하여 망명길에 올랐다.[3] 이후 동료 아제프가 오흐라나(제정 러시아 비밀경찰)의 스파이로 밝혀지자 전투 조직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조직의 약화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프랑스 육군으로 참전한 후 1917년 2월 혁명을 계기로 귀국하여 러시아 임시정부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내각에서 전쟁 차관을 맡기도 했으나, 코르닐로프 사건에 연루되어 사임하고 당에서도 축출되었다.
3. 1. 전투 조직 가담

1905년 제네바로 건너가 사회혁명당(에세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 시기에 게오르기 가폰 신부를 알게 되었다. 사빈코프는 전투단이 사용할 권총을 구입하고 벨기에인으로 위장한 여권을 이용해 러시아로 돌아왔다. 러시아 제1 혁명 이후 니콜라이 2세가 반정부 세력에 양보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했지만, 에세르 당내에서는 테러 활동 중단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사빈코프는 이에 반대하며 테러 전술의 지속을 강력히 주장했다.
1905년부터 1906년에 걸쳐 열린 에세르 제1차 당 대회에 전투단 대표로 참가하여, 당을 사회주의 사상 보급 부문과 테러 담당 조직으로 분리할 것을 제안했다. 당 대회 후, 아제프와 함께 전투단 재건에 착수했다.
1906년, 러시아 내무부 장관 뱌체슬라프 폰 플레베 암살과 모스크바 총독이었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암살에 가담한 혐의로 세바스토폴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재판 직전, 한 경비병과 옷을 바꿔 입고 감옥을 탈출했다고 전해진다. 이 경비병은 사빈코프 대신 교수형을 당했다고 한다.[3] 사빈코프는 부재중 재판에서 다시 사형 판결을 받았고, 재체포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을 떠났다.
1908년, 동료였던 아제프가 오흐라나(제정 러시아 비밀경찰)의 스파이임이 밝혀지자, 사빈코프는 사회혁명당 전투 조직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당시 수상으로서 혁명 세력 탄압으로 알려진 표트르 스톨리핀 암살과 테러 유격대 결성을 계획했지만, 조직의 약화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제2차 당 대회에서 전투단 대표직을 사임하고 파리로 이주했다. 파리에서도 니콜라이 2세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미수에 그쳤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육군에 자원하여 참전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4월에 러시아로 돌아왔고, 7월에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에서 전쟁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30일,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일으킨 코르닐로프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차관직에서 사임하고 사회혁명당에서도 축출되었다.
3. 2. 주요 테러 가담
1905년, 제네바로 건너가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게오르기 가폰 신부와 교류했다. 사빈코프는 전투단이 사용할 권총을 구입하고 위조된 벨기에 여권을 이용해 러시아로 돌아왔다. 러시아 제1 혁명 이후 니콜라이 2세가 10월 선언을 통해 양보했으나, 사회혁명당 내에서는 테러 지속 여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사빈코프는 테러 종결론에 반대하며 테러 전술의 지속을 강력히 주장했다.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열린 사회혁명당 제1차 당 대회에 전투단 대표로 참가하여, 당을 사회주의 사상 보급 부문과 테러 담당 조직으로 나눌 것을 제안했다. 대회 이후 아제프와 함께 전투단 재건에 나섰다. 그는 러시아 내무부 장관 뱌체슬라프 폰 플레베 암살과 모스크바 총독이었던 러시아 대공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폭탄 테러에 가담했다.
1906년, 이 암살 사건들에 연루된 혐의로 세바스토폴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재판 직전 탈출에 성공했는데, 한 경비병이 그와 역할을 바꾸는 데 동의하여 사빈코프는 경비병 제복을 입고 탈출했고, 대신 그 경비병이 교수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3] 사빈코프는 부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재체포를 피해 러시아 제국을 떠났다.
1908년, 전투단의 핵심 인물이었던 아제프가 오흐라나(제정 러시아 비밀경찰)의 스파이였음이 밝혀지자, 사빈코프는 사회혁명당 전투 조직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혁명 세력 탄압으로 알려진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 암살과 테러 유격대 결성을 계획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제2차 당 대회에서 전투단 대표직을 사임하고 파리로 이주했으며, 니콜라이 2세 암살 계획도 준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3. 3. 전투 조직 지도자
1905년, 사빈코프는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가 사회혁명당(에세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시기 게오르기 가폰 신부를 알게 되었고, 전투단이 사용할 권총을 구입하고 위조 여권을 이용해 러시아로 돌아왔다. 러시아 제1 혁명 이후 니콜라이 2세가 10월 선언을 통해 양보했음에도, 사빈코프는 당 회의에서 테러 전술의 지속을 주장했다.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열린 에세르 제1차 당 대회에 전투단 대표로 참가하여, 당을 사회주의 사상 보급 부문과 테러 담당 조직으로 나눌 것을 제안했다. 당 대회 후 아제프와 함께 전투단 재건에 착수했다.
1906년, 러시아 내무부 장관 뱌체슬라프 폰 플레베와 모스크바 총독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암살에 가담한 혐의로 세바스토폴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재판 직전, 한 경비병이 그와 감옥을 바꾸는 데 동의하여 탈출했다고 전해진다. 사빈코프는 경비병의 제복을 입고 아무런 제지 없이 걸어 나갔고, 경비병은 그 대신 교수형을 당했다.[3] 사빈코프는 부재 재판에서도 사형 판결을 받았고, 재체포를 피해 러시아 제국을 떠났다.
1908년, 아제프가 오흐라나의 스파이로 밝혀지자 사빈코프는 SR 전투 조직의 지도자로 승진했다. 그는 수상으로서 혁명파에 대한 철저한 탄압으로 알려진 표트르 스톨리핀 암살과 테러 유격대 결성을 계획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 조직은 더 이상 심각한 작전을 수행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결국 제2차 당 대회에서 전투단 대표직을 사임하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다. 이후에도 니콜라이 2세 암살 계획을 준비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육군에 자원하여 참전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4월에 러시아로 돌아왔고, 7월에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시정부 밑에서 전쟁 차관이 되었다. 그러나 8월 30일,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의 케렌스키 총리에 대한 쿠데타 시도에서 자신의 역할 때문에 직에서 사임하고 사회혁명당에서도 축출되었다.
4. 러시아 혁명과 임시정부
1917년 2월 혁명 이후 러시아로 귀국한 사빈코프는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코미사르와 육군 차관 등을 역임하며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를 지지하고 전쟁 지속을 주장했다.[1][2] 그러나 9월 코르닐로프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사회혁명당에서도 제명되었다.[1][2] 그는 전러시아 민주 회의를 통해 러시아 공화국 임시 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1]
10월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을 일으키자, 사빈코프는 겨울 궁전 방어에 참여하고 케렌스키와 함께 페트로그라드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 이후 모스크바에서 반볼셰비키 지하조직인 '자유·조국 옹호 동맹'을 결성하고, 레닌과 트로츠키 암살(레닌 암살 미수 사건) 및 야로슬라블, 리빈스크, 무르만스크 등 여러 도시에서의 무장 봉기를 계획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1][2]
4. 1.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의용병으로 프랑스군에 입대하였다. 전쟁 중 사빈코프는 애국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으며, 1917년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자 러시아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같은 해 4월, 체르노프 등 동료들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와 제7군과 남서 전선의 코미사르로서 임시 정부에 참여했다. 사빈코프는 전쟁을 계속하여 승리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육해군 대신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를 지지했다.1917년 7월에는 케렌스키 정부 아래에서 육군 차관을 맡았다. 이후 케렌스키가 수상이 되자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코르닐로프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빈코프 또한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사빈코프는 반란 직후 페트로그라드 임시 총독에 임명되었으나, 결국 임시 정부의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코르닐로프 사건과 관련하여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에 소환되었으나, 사빈코프는 당에 더 이상 "도덕적 권위도 정치적 권위도 없다"고 판단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1917년 10월 9일 사회혁명당에서 제명되었다.
9월 22일 열린 전러시아 민주 회의에서 사빈코프는 쿠반주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러시아 공화국 임시 평의회에 참여하고 그 사무국에 배속되었다.
1917년 10월,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무장 봉기를 일으켜 10월 혁명이 발발했다. 사빈코프는 겨울 궁전 포위망을 돌파하려 시도했으며, 이후 프스코프로 도피한 케렌스키와 합류하여 페트로그라드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2월 말에는 '자유·조국 옹호 동맹'을 결성하고 모스크바에 잠복하며 소비에트 정권 타도를 위한 활동을 벌였다. 그는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 암살 계획(레닌 암살 미수 사건) 및 야로슬라블, 리빈스크, 무르만스크 등지에서의 무장 봉기를 계획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4. 2. 임시정부 참여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의용병으로 프랑스군에 지원했다. 전쟁 중 사빈코프는 애국주의 입장을 견지했으며, 1917년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며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같은 해 4월, 그는 체르노프 등 다른 사회혁명당 인사들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와 제7군과 남서 전선의 코미사르로서 임시 정부에 합류했다. 사빈코프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으며, 육해군 대신이었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를 지지했다.같은 해 7월, 사빈코프는 케렌스키 정부 아래에서 육군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케렌스키가 수상이 되자, 그는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을 최고 사령관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코르닐로프 장군이 반란을 일으켰고 (Корниловское выступление|코르닐로프스코예 비스투플레니예ru, 코르닐로프 사건), 사빈코프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반란 직후 잠시 페트로그라드 임시 총독을 맡기도 했지만, 결국 임시 정부의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사빈코프는 코르닐로프 사건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에 소환되었다. 하지만 그는 당이 더 이상 "도덕적 권위도 정치적 권위도 없다"고 판단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결국 1917년 10월 9일 사회혁명당에서 제명되었다.
같은 해 9월 22일에 열린 Всероссийское демократическое совещание|프세로시스코예 데모크라티체스코예 소베샤니예ru (전러시아 민주 회의)에서 사빈코프는 쿠반주의 대의원 자격으로 Временный совет Российской республики|브레멘니 소베트 로시스코이 레스푸블리키ru (러시아 공화국 임시 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사무국에서 활동했다.
4. 3. 코르닐로프 사건 연루
1917년 7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휘하에서 육군 차관을 맡았다. 이후 케렌스키가 수상으로 취임하자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했다. 같은 해 9월, 코르닐로프가 반란을 일으키자(코르닐로프 사건) 사빈코프는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반란 직후 잠시 페트로그라드 임시 총독에 취임했지만, 결국 임시 정부의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코르닐로프 사건에 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에 소환되었으나, 사빈코프는 당에 더 이상 "도덕적 권위도 정치적 권위도 없다"고 판단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한편, 9월 22일 전러시아 민주 회의에서는 쿠반주 대의원 자격으로 러시아 공화국 임시 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사무국에 배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917년 10월 9일, 사빈코프는 사회혁명당에서 제명되었다.
5. 러시아 내전과 반볼셰비키 활동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 남은 사빈코프는 볼셰비키 정권에 강력히 반대하며 러시아 내전 시기 동안 반혁명 활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했다. 그는 모스크바를 거점으로 반혁명 지하 조직인 조국과 자유 수호 연합( Союз защиты Родины и Свободы|소유즈 자시티 로디니 이 스보보디ru)을 창설하고[12], 1918년 여름 야로슬라블, 리빈스크, 무롬 등지에서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무장 봉기를 조직했다.[4] 그러나 이 봉기들은 붉은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사빈코프는 결국 프랑스로 망명길에 올랐다.
프랑스 망명 시기 동안 그는 백색 러시아 망명자 사회에서 활동하며 백군 지도자 중 한 명인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을 지원하기 위한 외교 활동에 주력했다. 그는 콜차크 정부의 대표로서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서방의 지원을 얻고자 노력했으며, 폴란드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영국의 윈스턴 처칠 등 주요 정치 지도자들과 접촉했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이 발발하자 사빈코프는 피우수트스키의 초청으로 폴란드로 이동하여 반볼셰비키 투쟁을 이어갔다. 그는 붉은 군대 포로들을 중심으로 러시아인 부대를 편성하고, '러시아 정치 위원회'(Русский политический комитет|루스키 폴리티체스키 코미테트ru)를 설립하는 등 군사적, 정치적 활동을 병행했다. 또한 바르샤바에서 За свободу!|자 스보보두!ru("자유를 위하여!")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반소련 선전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러시아 내 농민 반란 세력의 지도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간의 리가 조약이 체결되면서 사빈코프는 폴란드에서 추방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반볼셰비키 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런던에서 볼셰비키 외교관 레오니트 크라신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타협 가능성을 모색하거나[13],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하는 등 활로를 찾으려 했으나 점차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결국 1924년 8월, 소련 정보기관인 체카(당시 GPU)의 정교한 함정 수사인 신디케이트-2 작전에 걸려 민스크에서 체포되었다.
5. 1. 반혁명 조직 결성

사빈코프는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에 반대했다. 그는 겨울 궁전에 포위된 임시 정부를 지원하려 했으며, 미하일 알렉세예프 장군과 협상하기도 했다. 이후 가치나로 이동하여 표트르 크라스노프 장군의 별동대에서 임시 정부의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백군의 러시아 의용군(Добровольческая армия|도브로볼체스카야 아르미야ru)에 일개 병사로 입대했다.
1918년 2월부터 3월 사이, 사빈코프는 근위 장교 조직을 기반으로 모스크바에서 반혁명 지하 조직인 조국과 자유 수호 연합(Союз защиты Родины и Свободы)을 창설했다.[12] 이 조직은 모스크바 몰로치니 골목 4번지에 본부를 두었으며, 부관인 그리고리에프 박사가 위장 의료 시설을 운영했다. 조직의 목표는 소련 정권 전복, 러시아 내 군사 정권 수립, 독일과의 전쟁 지속이었다. 이 외에도 여러 준군사 조직이 만들어졌지만, 5월 말 모스크바에서 발각되어 다수의 참가자가 체포되었다.
사빈코프는 조국과 자유 수호 연합의 지도자로서 1918년 7월 볼셰비키에 맞서 여러 무장 봉기를 조직했다. 특히 야로슬라블, 리빈스크, 무롬에서의 봉기가 주목할 만하다.[4] 그러나 이 봉기들은 붉은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사빈코프는 블라디미르 카펠( Владимир Оскарович Каппель|블라디미르 오스카로비치 카펠ru) 장군이 점령한 카잔으로 피신했으나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잠시 카펠의 분견대에 소속된 후 우파로 이동하여 임시 전 러시아 정부의 외무부 장관 후보로 잠시 거론되기도 했다.
이후 임시 전 러시아 정부 대표 자격으로 프랑스로 군사 임무를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싱가포르, 인도를 경유하는 긴 여정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러시아 망명자 사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고,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의 파리 대표이자 외교 사절 단장으로서 유럽 각국을 돌며 콜차크 군에 대한 서방의 원조를 요청했다. 그는 폴란드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영국의 윈스턴 처칠 등과 개인적으로 회담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등과도 만났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이 발발하자, 사빈코프는 피우수트스키의 초청으로 폴란드로 이동했다. 그는 폴란드에서 붉은 군대 포로 출신으로 구성된 여러 보병 사단과 기병 부대를 창설하는 러시아 정치 조직을 결성했다. 그의 지휘 아래 '피난 위원회'(후에 '러시아 정치 위원회'(Русский политический комитет|루스키 폴리티체스키 코미테트ru)로 개칭)가 설립되었고, 스타니스와프 불라크-발라호비치( Станислав Никодимович Булак-Балахович|스타니스와프 니코디모비치 불라크발라호비치ru) 휘하의 러시아 제3군(3-я русская армия|트레티야 루스카야 아르미야ru) 및 반소 군사 분견대 창설에도 참여했다. 또한 바르샤바에서 «За свободу!»|자 스보보두!ru (자유를 위하여!)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소련 정권을 비판하는 등 정치적 반공 활동도 전개했다. 이 시기 사빈코프는 녹색군 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단결한 모든 반볼셰비키 농민 반란의 지도자로서 자신을 내세우려 했다.
1921년 10월, 폴란드와 소련 사이에 강화 조약(리가 조약)이 체결되면서 폴란드 당국은 소련과의 추가 마찰을 피하기 위해 사빈코프를 국외로 추방했다.
추방 후에도 사빈코프는 반소 활동을 이어갔다. 1921년 12월 10일, 그는 런던에서 볼셰비키 외교관 레오니트 크라신과 비밀리에 만났다. 사빈코프는 이 만남에서 체카 해체, 사유 재산 승인, 자유 선거 실시라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우파 공산주의자와 녹색군 간의 합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크라신은 공산당 내 분열 가능성을 언급하며 사빈코프의 제안을 모스크바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 사빈코프는 처칠(당시 식민지 장관)과 로이드 조지 총리에게 이 내용을 알리고, 영국이 소련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이 세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후 피우수트스키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협상 내용을 보고했다.[13]
백색 운동과 결별한 사빈코프는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계를 모색했다. 1922년부터 1923년 사이 이탈리아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했으나, 정치적으로 고립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파리로 돌아온 사빈코프는 망명지에서 영국 정보부와 협력하며 반소비에트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24년 8월, 민스크에서 반소 조직과 접선하려다 체카(당시 GPU)의 함정 수사(신디케이트-2 작전)에 걸려 체포되었다.
5. 2. 백군 지원 및 해외 활동
사빈코프는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에 반대했다. 그는 겨울 궁전에 포위된 임시 정부를 지원하려 했으며, 미하일 알렉세예프 장군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가치나로 이동하여 표트르 크라스노프 장군이 이끄는 부대에서 임시 정부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백군의 러시아 의용군에 일개 병사로 입대하기도 했다.
1918년 2월부터 3월 사이, 사빈코프는 모스크바에서 근위 장교들을 중심으로 반혁명 지하 조직인 '조국과 자유 수호 연합'(Союз защиты Родины и Свободы|소유즈 자시티 로디니 이 스보보디ru)을 창설했다.[12] 이 조직의 목표는 소비에트 정권을 무너뜨리고 러시아에 군사 정권을 세우며,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조직의 본부는 모스크바 몰로치니 골목 4번지에 있었으며, 부관인 그리고리예프 박사가 위장 의료 시설을 운영했다. 여러 군사 조직이 만들어졌으나, 1918년 5월 말 모스크바에서 발각되어 많은 조직원이 체포되었다.
사빈코프는 '조국과 자유 수호 연합'의 지도자로서 1918년 7월 볼셰비키에 맞서 여러 무장 봉기를 조직했다. 주요 봉기는 야로슬라블, 리빈스크, 무롬에서 일어났다.[4] 그러나 이 봉기들은 붉은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사빈코프는 블라디미르 카펠 장군이 점령한 카잔으로 피신했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잠시 카펠의 부대에 소속되었다가 우파로 이동하여 임시 전 러시아 정부의 외무부 장관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결국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사빈코프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는 임시 전 러시아 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싱가포르, 인도를 거쳐 프랑스로 가는 긴 여정을 택했다. 파리에서 그는 러시아 망명자 사회에서 활동하며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의 외교 사절단장으로서 유럽 각국을 돌며 콜차크 군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폴란드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영국의 윈스턴 처칠 등 여러 지도자들과 직접 만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등과도 회담했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이 발발하자, 사빈코프는 폴란드 국가 원수 피우수트스키의 초청을 받아 폴란드로 이동했다. 그는 폴란드에서 붉은 군대 포로들을 중심으로 여러 보병 및 기병 부대를 창설하는 러시아 정치 조직을 결성했다. 그의 주도로 '피난 위원회'(이후 '러시아 정치 위원회'로 개칭)가 설립되었으며, 스타니스와프 불라크-발라호비치 휘하의 러시아 제3군 및 반소비에트 군사 부대 창설에도 관여했다. 또한 바르샤바에서 «За свободу!»|자 스보보두!ru("자유를 위하여!")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소비에트 정권을 비판하는 정치 활동도 전개했다. 이 시기 사빈코프는 녹색군 운동의 이름 아래 모인 모든 반볼셰비키 농민 봉기의 지도자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1921년 10월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폴란드 당국은 소련과의 추가 마찰을 피하기 위해 사빈코프를 국외로 추방했다.
추방 후에도 사빈코프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21년 12월, 그는 런던에서 볼셰비키 외교관 레오니트 크라신과 비밀리에 만났다. 이 만남에서 사빈코프는 체카 해체, 사유 재산 인정, 자유 선거 실시라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우파 공산주의자와 녹색군이 타협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크라신은 이를 모스크바에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 사빈코프는 처칠(당시 식민지 장관)과 로이드 조지 총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영국이 소련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세 가지 제안을 내걸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후 피우수트스키에게 보낸 긴 서한에서 이 협상 내용을 보고했다.[13]
백색 운동과 점차 멀어진 사빈코프는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계를 모색했다. 1922년부터 1923년 사이 이탈리아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하기도 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결국 파리로 돌아온 사빈코프는 망명지에서 반소비에트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영국 정보부와 연계하여 반혁명 활동을 벌였으나, 1924년 8월 소련 정보기관인 체카의 신디케이트-2 작전에 속아 민스크의 반소 조직과 접선하려다 체포되었다.
5. 3.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참여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이어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동안, 사빈코프는 폴란드의 국가 원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초청을 받아 폴란드로 이동했다. 그의 목표는 붉은 군대를 격퇴하는 것이었다. 폴란드에서 그는 붉은 군대 포로 출신들을 중심으로 여러 보병 및 기병 부대를 창설하는 러시아 정치 조직을 결성했다. 이를 위해 '피난 위원회'(이후 '러시아 정치 위원회'(Русский политический комитет|루스키 폴리티체스키 코미테트ru)로 개칭)를 설립했다. 또한, 스타니스와프 불라크-발라호비치(Станислав Никодимович Булак-Балахович|스타니슬라프 니코디모비치 불라크-발라호비치ru) 장군 휘하의 '러시아 제3군'(3-я русская армия|트레티야 루스카야 아르미야ru)과 반소 군사 분견대 창설에도 참여했다.군사 활동 외에도 정치적인 반공 활동을 전개했다. 드미트리 메레시코프스키와 함께 바르샤바에서 За свободу!|자 스보보두!ru(자유를 위하여!)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소련 정권을 비판했다.
그러나 1921년 10월,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폴란드 당국은 소련과의 추가적인 마찰을 피하기 위해 사빈코프를 국외로 추방했다.
6. 체포와 죽음
보리스 사빈코프는 영국 비밀정보부(SIS) 등과 협력하며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여러 반혁명 활동에 관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소련의 보안 기관인 국가정치총국(OGPU)이 기획한 트러스트 작전에 의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사빈코프는 이 작전에 속아 소련으로 유인되어 체포되었다.
체포 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10년 형으로 감형되어 모스크바 루비얀카 감옥에 수감되었다. 1925년, 그는 감옥 건물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은 그가 실제로는 OGPU 요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5]
6. 1. 트러스트 작전

사빈코프는 전설적인 반역자이자 영국 요원인 시드니 레일리와 친분이 있었으며, 때로는 영국 비밀정보부(SIS)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반혁명 음모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소련의 보안 기관인 국가정치총국(OGPU)이 기획한 트러스트 작전에 의해 좌절되었다. 사빈코프는 가짜 반혁명 조직원들을 만나기 위해 소련으로 유인되어 결국 체포되었다.
소련 최고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전러시아 중앙 집행 위원회(VTsIK) 간부회는 형량을 10년 징역형으로 감형했다. 재판 과정에서 사빈코프는 볼셰비키 정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 그의 증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 「나, 보리스 사빈코프는, 사회혁명당 전투 조직의 전 멤버이며, 예고르 세르게예비치 소조노프|예고르 소조노프ru와 이반 플라토노비치 칼랴예프|이반 칼랴예프ru의 친구이자 동지이며, 플레베,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암살에 참여하고, 많은 테러 행위에 참여한 남자이며, 평생, 인민을 위해, 인민의 이름으로만 일해 온 남자입니다.」
1924년 8월 29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협의회는 사빈코프에게 사형(총살형)을 선고했으나, 재판 중 그가 소비에트 정권의 승인을 표명함에 따라 10년 금고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모스크바의 루비얀카 감옥에 수감되었다.
투옥된 동안 사빈코프는 문예 활동을 할 기회를 얻었으며, 일부 자료에 따르면 호텔과 같은 환경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는 감옥에서 백색 운동 지도자들에게 소비에트 정권과의 투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백색 망명자들을 풍자하는 소설을 썼고, 이 소설들은 모스크바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여러분과의 고되고 긴, 피비린내 나는 투쟁 끝에, 아마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전투를 치른 끝에, 나는 여기에 와서, 그들이 등에 라이플을 메고 서서, 나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음을 선언합니다.」
1925년 5월 7일, 사빈코프는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소련 당국의 공식 발표는 그가 산책에서 돌아오던 중 5층 수사관 집무실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끊이지 않는다. 계단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설도 있으며, 특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같은 인물들은 사빈코프가 OGPU 요원들에 의해 살해되었거나, 헤로인 중독 상태였다고 주장한다.[5] 실제로 세묜 이그나티예프는 의사들의 음모 사건 당시 스탈린이 국가보안부(MGB)의 심문 방식이 너무 인도적이라고 불평하며 "사빈코프를 창밖으로 던지라고 펠릭스 제르진스키에게 명령한 레닌보다 더 인도적이 되고 싶은 거요?"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5] (다만, 레닌은 사빈코프가 러시아로 돌아오기 몇 달 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사빈코프의 매장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2018년 폴란드 바르샤바에는 그를 기리는 거리 이름이 붙여졌다.[14]
6. 2. 재판과 최후
보리스 사빈코프는 전설적인 반역자이자 영국 요원인 시드니 레일리와 친분이 있었으며, 때로는 영국 비밀 정보국(SIS)과 협력하여 여러 차례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반혁명 음모에 연루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소련 보안 기관인 국가정치부(OGPU)가 시행한 트러스트 작전에 의해 효과적으로 무력화되었다. 사빈코프는 허위 공모자들을 만나기 위해 소련으로 유인되어 체포되었다.
1924년 8월 29일, Военная коллегия Верховного суда СССР|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협의회ru는 그에게 사형(총살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사빈코프가 볼셰비키 정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는 태도를 보이자, 전러시아 중앙 집행 위원회(VTsIK) 간부회는 형을 10년 징역형으로 감형했다. 재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나, 보리스 사빈코프는, 사회혁명당 전투 조직의 전 멤버이며, Егор Сергеевич Созонов|예고르 세르게예비치 소조노프ru와 Иван Платонович Каляев|이반 플라토노비치 칼랴예프ru의 친구이자 동지이며, 플레베, 세르게이 대공 암살에 참여하고, 많은 테러 행위에 참여한 남자이며, 평생 인민을 위해, 인민의 이름으로만 일해 온 남자입니다.」
사빈코프는 모스크바의 루비얀카 감옥에 수감되었다. 수감 중 문예 활동에 종사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일부 자료에 따르면 호텔과 같은 환경에서 지냈다고도 한다. 그는 백색 망명자들에 대한 풍자 소설을 썼고, 이 소설들은 모스크바에서 출판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또한 백색 운동 지도자들에게 소비에트 정권과의 싸움을 멈추도록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그는 이렇게 적었다.
: 「여러분과의 고되고 긴, 피비린내 나는 투쟁 끝에, 아마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전투를 치른 끝에, 나는 여기에 와서, 그들이 등에 라이플을 메고 서서 나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음을 선언합니다.」
1925년 5월 7일, 사빈코프는 4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소비에트 정권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산책에서 돌아온 길에 5층 수사관 집무실 창문에서 투신 자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자살 발표는 많은 의혹을 낳았으며, 계단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같은 인물들은 사빈코프가 실제로는 OGPU 요원들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살해되기 전 헤로인 중독 상태에 빠뜨려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타살설을 뒷받침하는 듯한 증언도 있다. 세묜 이그나티예프는 의사 음모 사건 당시 스탈린이 국가보안부(MGB)의 심문 방식이 너무 인도적이라고 불평하며 "사빈코프를 창밖으로 던지라고 펠릭스 제르진스키에게 명령한 레닌보다 더 인도적이 되고 싶은 거요?"라고 외쳤다고 기록했다.[5] (하지만 레닌은 사빈코프가 러시아로 돌아오기 몇 달 전에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사빈코프의 매장 장소는 불명이다. 2018년, 폴란드 바르샤바에는 사빈코프를 기리는 거리 이름이 붙여졌다.[14]
7. 사상과 평가
일리야 에렌부르크는 1916년 파리에서 사빈코프를 만난 후 그를 "이해할 수 없고 무서운 남자"로 묘사하며, 아제프 사건 이후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에렌부르크는 사빈코프의 문학 작품이 "대의에 대한 믿음을 잃은 테러리스트의 내면의 공허함"을 드러낸다고 보았다.[3]
사빈코프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민족주의 및 반공주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존경심을 표했고, 파시즘이 자신의 견해와 가깝다고 인정하기도 했다.[6]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특히 『테러리스트의 회고록』과 자전적 소설 『창백한 말』이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사회혁명당 내에서 테러리즘을 "조롱"한다는 비판을 받는 등 큰 논란을 일으켰다. 사후에도 그의 평가는 엇갈리는데, 폴란드 바르샤바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 명칭이 논란 끝에 변경되는 일이 있었다.[7][8][9]
7. 1. 파시즘 옹호
일리야 에렌부르크는 1916년 파리에서 사빈코프를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그토록 이해할 수 없고 무서운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사실 사빈코프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그는 아제프 사건이 그를 무너뜨렸다고 내게 말했다... 사빈코프는 자신의 대의에 대한 믿음을 잃은 테러리스트의 내면의 공허함을 드러내는 평범한 소설을 쓰게 되었다."[3]사빈코프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했으며 그의 민족주의와 반공주의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반혁명 음모에 대한 이탈리아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무솔리니와 여러 차례 개인적으로 만나기도 했다. 사빈코프는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이탈리아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민주적이라고 믿었다. 그는 죽기 이틀 전에 쓴 마지막 편지에서 파시즘이 자신의 견해와 가장 "심리적, 이념적으로 가깝다"고 인정했다.[6]
7. 2. 문학적 유산
사빈코프는 여러 권의 책을 썼으며, B. 로프신(B. Ropshin)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은 두 권의 자서전인 ''테러리스트의 회고록''과 자전적 소설에 가까운 ''창백한 말''이다. 1909년 '러시아 사상'지에 발표된 ''창백한 말''(蒼ざめた馬일본어)은 사회혁명당 전투단의 공허한 내면을 묘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夢幻の人びと일본어)(1912년), ''검은 말을 보았다''(漆黒の馬일본어)(1923년), ''어느 테러리스트의 회고''(テロリスト群像일본어)(1928년) 등 자신을 포함한 혁명가들의 행동과 내면을 날카롭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사빈코프의 작품들은 사회혁명당 내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당원들은 그의 작품이 테러리즘에 대한 "조롱"이라며 비난했다.
한편, 폴란드에서는 2017년 바르샤바의 프라가 푸우노츠 지역에 있는 한 거리의 이름이 사빈코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거리의 원래 이름은 ''Dąbrowszczacy''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다브로프스키 대대의 폴란드 의용군을 기리는 이름이었다(이 대대는 파리 코뮌의 지도자 야로스와프 돔브로프스키의 이름을 딴 것이다). 거리 이름 변경은 공산주의 및 기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선전을 금지하는 법률에 따라 이루어졌다.[7] 그러나 이 결정은 논란을 낳았고, 이름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캠페인이 벌어졌다.[8] 결국 2019년에 이 거리의 이름은 다시 ''Dąbrowszczacy''로 변경되었다.[9]
8. 작품 목록
- ''창백한 말'' (소설), 1909년 (영문판 1919년, [https://archive.org/details/cu31924026718035 온라인]), Конь бледный|콘 블레드니ru – "V. 롭신"이라는 필명으로 출판
-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 혁명에 관한 소설'', 1912년 (영문판 1917년, [https://archive.org/details/whatneverhappene00savi 온라인]), То, чего не было|토, 체고 네 빌로ru – "V. 롭신"이라는 필명으로 출판
- ''테러리스트의 회고록'', 1917년 (영문판 1931년), Воспоминания террориста|보스포미나니야 테로리스타ru
- ''전쟁 중 프랑스에서'' (기사 모음집), 1917년 (러시아어판 1917년), Во Франции во время войны|보 프란치 보 브레먀 보이니ru – "V. 롭신"이라는 필명으로 출판
- ''"제3의" 러시아로 가는 길'', 1920년 (러시아어판 1920년), На пути к "Третьей" России|나 푸티 크 "트레티예이" 로시ru
- ''검은 말'' (소설), 1924년 (러시아어판 1923년), Конь вороной|콘 보로노이ru
- ''감옥에서'' (소설), 1924년 (러시아어판 1924년), В тюрьме: Посмертный рассказ|프 튜르메: 포스메르트니 라스카스ru
- ''나는 왜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했는가?'' (기사 모음집), 1924년 (러시아어판 1924년), Почему я признал Советскую власть?|포체무 야 프리즈날 소베츠쿠유 블라스트?ru
- "보리스 사빈코프의 펠릭스 제르진스키에게 보낸 편지", ''러시아 평론(The Russian Review)'', 제29권, 제3호 (1970년 7월), 325–327쪽
9. 대중문화
참조
[1]
서적
Lenin: Life and Legacy
HarperCollins
[2]
웹사이트
Heinrich Ioffe. What Was. To the 130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ris Savinkov
http://magazines.rus[...]
[3]
서적
People and Life, A First Volume of Autobiography
Macgibbon & Kee
1961
[4]
서적
The Russian Revolution, 1917-1921, Volume Two
The Macmillan Company
1935
[5]
문서
To [[Lavrentiy Beria|Beria]] from [[Ignatiev]], 27 March 1953 quoted by Brent, Jonathan, and Naumov, Vladimir P. in ''Stalin's Last Crime'', John Murray (Publishers), London, 2003, p. 218
[6]
서적
Boris Savinkov: Renegade on the Left
East European Monographs
1991
[7]
웹사이트
Ulica Sawinkowa - Praga Północ | Warszawa
https://www.twoja-pr[...]
[8]
웹사이트
Odpieprzcie się od Dąbrowszczaków!
https://krytykapolit[...]
2017-09-06
[9]
웹사이트
Koniec dekomunizacji. Wróciły wszystkie nazwy ulic
https://www.fakt.pl/[...]
2019-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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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В. Ропши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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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Ведомость ВГЖУ о розыске скрывшегося из вологодской ссылки Б. В. Савинкова
http://www.booksite.[...]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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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Красная книга ВЧК» т. 1 (с. 22, 52 и д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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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Krasin-Savinkov: Une rencontre secrète
198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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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Улица имени российского революционера Бориса Савинкова появилась в Варшаве - ТАСС
https://tass.ru/obsc[...]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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