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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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셀레우코스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장군들이 세운 헬레니즘 제국 중 하나이다. 기원전 312년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건국하여 현재의 시리아, 이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그리스 문화를 동방에 전파하고 헬레니즘 문화를 융성시켰으나, 기원전 3세기에 박트리아와 파르티아가 독립하고,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쇠퇴했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멸망하고 로마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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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제국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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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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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기간 | 기원전 312년 – 기원전 63년 |
위치 | 서아시아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셀레우키아 (기원전 305년–240년) 안티오크 (기원전 240년–63년) |
공용어 | 고대 그리스어 (공식) 고대 페르시아어 중간 아람어 |
종교 | 올림피아 종교 / 헬레니즘 바빌로니아 종교 헬레니즘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그리스-불교 |
역사 | |
주요 사건 | 디아도코이 전쟁 (시작) 로마에 합병 (종료) 이프소스 전투 (기원전 301년)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기원전 192년–188년) 아파메아 조약 (기원전 188년) 마카베오 반란 (기원전 167년–160년) 파르티아에 의한 셀레우키아 점령 (기원전 141년) 엑바타나 전투 (기원전 129년) |
이전 국가 | 마케도니아 제국 |
이후 국가 | 파르티아 제국 마우리아 제국 시리아 속주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하스몬 왕국 오스로에네 |
통치자 | |
칭호 | 바실레우스 |
초대 통치자 |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기원전 305년–281년) |
마지막 통치자 | 필리포스 2세 (기원전 65년–63년) |
통계 | |
면적 (기원전 303년) | 3,000,000 km² |
면적 (기원전 301년) | 3,900,000 km² |
면적 (기원전 240년) | 2,600,000 km² |
면적 (기원전 175년) | 800,000 km² |
면적 (기원전 100년) | 100,000 km² |
인구 (기원전 301년) | 30,000,000+ 명 |
화폐 | |
통화 | 드라크마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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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빠르게 정복했지만, 기원전 323년에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후계자 없이 광대한 제국을 남겼다. 제국은 섭정인 페르디카스의 통치를 받았고, 광대한 영토는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에게 분할되었다. 이들은 그 해에 바빌론 분할에서 사트라프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들, 통칭 디아도코이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의 제국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전직 장군이자 당시 이집트의 사트라프였는데, 새로운 체제에 처음으로 도전했으며, 결국 페르디카스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프톨레마이오스의 반란은 기원전 320년 트리파라디소스 분할로 제국의 새로운 분할을 낳았다. 셀레우코스는 "헤타이로이 사령관" 이었고 첫 번째 또는 궁정 킬리아르크로 임명되었다. 그는 바빌로니아를 받았고, 그 시점부터 가차 없이 자신의 지배지를 확장해 나갔다.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12년 바빌론에 자리를 잡았고, 이 해는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의 건국 연도로 사용되었다.
바빌론에서 셀레우코스의 부상은 아시아에서 안티고노스 1세 영토의 동쪽 경계를 위협했다.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함께 바빌론을 병합하려는 캠페인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셀레우코스의 승리는 바빌론에 대한 그의 권리와 정당성을 보장했다. 그는 바빌로니아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대왕 제국의 거대한 동부 전체를 통치했다.
역사가 아피아노스는 셀레우코스가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셀레우코스' 카파도키아, 페르시스, 파르티아, 박트리아, 아라비아, 타푸리아, 소그디아, 아라코시아, 히르카니아,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정복된 인더스 강까지의 다른 인접 민족들을 획득하여 그의 제국의 경계는 알렉산드로스 이후 아시아에서 가장 광대했다고 묘사했다.[16]
셀레우코스 제국은 셀레우코스 1세가 바빌론을 차지한 이후 계속해서 영토를 넓혀 나갔다. 이후, 안티오코스 1세와 안티오코스 2세가 통치하던 시기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전쟁을 벌이고, 디오도토스 1세와 안드라고라스가 각각 박트리아와 파르티아를 세우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셀레우코스 2세 때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 그리고 형제와의 갈등까지 겹쳐 영토가 더욱 줄어들었다.
안티오코스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고, 파르티아와 박트리아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등 동쪽 지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대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영토를 잃고 많은 배상금을 물게 되어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셀레우코스 4세와 안티오코스 4세 시기에는 로마의 영향력이 커지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힘은 약해졌다.
안티오코스 4세가 죽은 후, 셀레우코스 제국은 왕위를 둘러싼 싸움과 반란,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스러웠다.[16] 결국 기원전 1세기경에는 시리아 일부만을 다스리는 작은 나라가 되었고, 기원전 64년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멸망하여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역대 왕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위 기간 |
---|---|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 기원전 311년-305년 (총독), 기원전 305년-281년 (왕) |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 | 기원전 291년부터 공동 통치, 기원전 281년-261년 단독 통치 |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 | 기원전 261년-246년 |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 | 기원전 246년-225년 |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 | 기원전 225년-223년 |
안티오코스 3세 대왕 | 기원전 223년-187년 |
셀레우코스 4세 필로메토르 | 기원전 187년-175년 |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 기원전 175년-164년 |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 | 기원전 164년-162년 |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 | 기원전 161년-150년 |
알렉산드로스 발라스 | 기원전 150년-145년 |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 (첫 번째 통치) | 기원전 145년-138년 |
안티오코스 6세 디오뉘소스 또는 에피파네스 | 기원전 145년-140년? |
디오도토스 트뤼폰 | 기원전 140년?-138년 |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 또는 에우에르게테스 | 기원전 138년-129년 |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 (두 번째 통치) | 기원전 129년-126년 |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 | 기원전 129년-123년 |
클레오파트라 테아 | 기원전 126년-123년 |
셀레우코스 5세 필로메토르 | 기원전 126년/125년 |
안티오코스 8세 그뤼포스 | 기원전 125년-96년 |
안티오코스 9세 퀴지케노스 | 기원전 114년-96년 |
셀레우코스 6세 에피파네스 니카토르 | 기원전 96년-95년 |
안티오코스 10세 에우세베스 필로파토르 | 기원전 95년-92년 혹은 83년 |
데메트리오스 3세 에우카이로스 또는 필로파토르 | 기원전 95년-87년 |
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 필라델포스 | 기원전 95년-92년 |
필리포스 1세 필라델포스 | 기원전 95년-84년/83년 |
안티오코스 12세 디오뉘소스 | 기원전 87년-84년 |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 기원전 83년-69년 |
셀레우코스 7세 퀴비오사크테스 또는 필로메토르 | 기원전 70년대-60년대? |
안티오코스 13세 아시아티코스 | 기원전 69년-64년 |
필리포스 2세 필로로마이오스 | 기원전 65년-63년 |
2. 1. 디아도코이 전쟁과 제국의 성립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후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광대한 제국은 섭정 페르디카스와 알렉산드로스의 장군들에게 분할되었다. 이 장군들을 라고 부르며, 이들은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다.[68]프톨레마이오스의 반란으로 제국은 새롭게 분할되었고,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를 받았다. 그는 기원전 312년 바빌론에 자리를 잡았고, 이 해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건국 연도로 사용되었다.[79]
셀레우코스 1세는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페르디카스가 나일강 도하에 실패하자, 셀레우코스는 다른 장군들과 함께 페르디카스를 암살했다.[73] 이후 트리파라디소스 분할에서 바빌로니아를 얻었다.[75]
기원전 319년 안티파트로스 사후, 폴리페르콘과 안티고노스가 대립했다. 셀레우코스는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의 귀순 요구를 거부하고 바빌론을 공격받았으나, 안티고노스의 도움으로 바빌로니아를 탈환하고 에우메네스를 타도했다.[76] 그러나 안티고노스에게 미움을 받아 바빌로니아에서 쫓겨나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의탁했다.[78]
프톨레마이오스는 셀레우코스에게 병사를 주어 바빌로니아로 파견했고,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311년 바빌론 시를 탈환하고 셀레우코스 왕조를 건국했다.[79] 안티고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셀레우코스는 이란 고원 방면으로 세력을 확장했다.[80]
셀레우코스는 마우리아 제국의 찬드라굽타와 간다라, 게드로시아, 아라코시아 지역의 지배권을 마우리아 제국에 넘기는 평화 조약을 맺었다.[82] 기원전 305년, 셀레우코스는 왕을 칭했고,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1세를 패사시켰다.[85] 기원전 281년에는 코르페디온 전투에서 리시마코스를 격파하여 제국의 아시아 부분 거의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되었다.[86]
셀레우코스 1세는 아들 안티오코스 1세에게 유프라테스강 동쪽의 광대한 지역(상부 사트라피) 통치를 맡겼다.[88] 안티오코스 1세는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를 거점으로 이 영토를 다스렸다.
2. 2. 전성기와 쇠퇴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뒤를 이은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와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는 제국의 영토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서쪽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 동쪽에서는 기원전 250년경 디오도토스 1세가 독립하여 세운 박트리아와 안드라고라스가 독립하여 세운 파르티아 등 내우외환에 시달렸다.[16]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는 대폭 축소되었다.기원전 246년에 즉위한 셀레우코스 2세 카리니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형제인 안티오코스 히에락스의 반란까지 겹쳐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 축소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기원전 223년 안티오코스 3세가 즉위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은 다시 팽창하기 시작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즉위 직후 국내의 반란 세력들을 진압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벌인 제4차 시리아 전쟁에서는 기원전 217년 라피아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기원전 212년부터 시작한 동방 원정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먼저 파르티아로 향한 안티오코스 3세는 안드라고라스의 영토를 정복하고 그곳에 왕조를 세운 아르사케스 2세를 격파했다. 이어서 박트리아로 진군하여 아리에스 전투에서 에우티데모스 1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박트라를 2년 동안 포위한 끝에 유리한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를 통해 셀레우코스 제국의 동방 영향력은 크게 증대되었다. 동방 원정에서 돌아온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싸워 승리했다(제5차 시리아 전쟁).
이러한 업적 덕분에 안티오코스 3세는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공화정과 대립하여 로마-시리아 전쟁이 발발했고,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 결과 아파메이아 조약을 통해 영토를 잃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면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팽창은 다시 멈추게 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셀레우코스 4세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고, 반대로 셀레우코스 제국의 권위는 쇠퇴하였다.
2. 3. 내분과 멸망
안티오코스 4세 사후, 셀레우코스 제국은 극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외세의 침략까지 이어졌다.[16]기원전 250년경, 디오도토스 1세는 박트리아를 독립시켜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을 세웠고, 안드라고라스는 파르티아나를 독립시켜 파르티아를 세웠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토는 대폭 축소되었다. 기원전 246년 셀레우코스 2세 카리니코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전쟁과 형제 안티오코스 히에락스의 반란으로 영토 축소가 가속화되었다.
기원전 223년 안티오코스 3세 즉위 후 셀레우코스 제국은 다시 확대기에 접어들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국내 반란 세력을 진압하고,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2세를 격파하고 박트라를 포위하는 등 동방 원정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과의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아파메이아 조약으로 영토 할양과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받아 제국의 확대는 다시 종료되었다. 안티오코스 3세의 아들 셀레우코스 4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치세에 로마의 영향력은 증대했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권위는 실추했다.
기원전 1세기경, 셀레우코스 제국은 시리아 일부 지역만을 통치하는 소국으로 전락했다. 결국 기원전 64년,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멸망하고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3. 통치와 행정
셀레우코스 제국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현대 그리스어 자료에서는 셀레우코스 국가를 제국(ἀρχή|아르케grc)이자 왕국(βασιλεία|바실레이아grc)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셀레우코스 통치자들은 바빌로니아에서 왕으로 묘사되었다.[15]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을 특정 영토나 백성의 출신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원전 2세기부터 고대 작가들은 이들을 시리아 왕, 시리아인 왕, 셀레우코스 니카토르의 후손 왕, 아시아 왕 등으로 불렀다.[15]
초대 왕 셀레우코스 1세는 아들 안티오코스 1세에게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넓은 지역(당시에는 상부 사트라피라고 불렸다) 통치를 맡겼다. 안티오코스 1세는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를 거점으로 이 영토를 다스렸다. 이는 셀레우코스 1세의 지배 역점이 서쪽, 시리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안티오코스 1세의 동방 영토 통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셀레우코스 1세의 정적이었던 안티고노스 1세는 메디아의 총독(사트라프)이었던 니카노르에게 상부 사트라피 통치를 맡겼다고 하며, 안티오코스 1세의 지위는 이를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왕족에 의한 동서 영토 분할 통치는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3. 1. 도시 건설
셀레우코스 왕조는 정복한 영토 내에서 활발하게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는 헬레니즘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특히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와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는 도시 건설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왕이 건설한 도시는 알려진 것만 40개가 넘으며,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30]셀레우코스 왕조가 도시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유는 보병을 주력으로 삼았던 왕조에게 도시망 정비가 중요했고,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영토 내에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을 정착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신도시는 기존 도시를 확장하거나 재정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북 메소포타미아에 건설된 안티오키아(뮈그도니아의 안티오키아)는 옛 니시비스를 기반으로 확장된 계획 도시였다.[30]
셀레우코스 왕조의 도시 건설 정책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게 여겨진 곳은 왕조의 핵심 지역이었던 시리아였다. 이 지역에는 수도 안티오키아(오론테스 강변의 안티오키아), 군사 중심지 아파메아(오론테스 강변의 아파메아), 항구 도시 셀레우키아(피에리아의 셀레우키아), 라오디케아(바다에 임하는 라오디케아) 등 다수의 계획 도시가 건설되었다. 위에 언급된 4개 도시는 4대 도시라고 불리며, 시리아에 건설된 도시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다.[30]
도시 건설의 중심은 그리스식 폴리스 건설보다는 '''카토이키아'''라고 불리는 군사 식민지 건설이었다. 이주하는 많은 그리스인들에게는 자신들이 거주할 땅이 폴리스여야 했다. 그러나 대규모 도시 건설은 부담이 컸고, 영토 내 안정을 중요하게 여긴 셀레우코스 왕조는 장차 폴리스로 승격될 것을 전제로, 보다 간편한 카토이키아 건설을 많이 실시했다. 카토이키아 역시 기존 도시를 이용하여 건설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30]
카토이키아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두라 유로포스이다. 이 계획 도시는 서쪽 중심지인 수도 안티오키아와 동쪽 중심지인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를 잇는 "왕의 길" 중간에 경비 및 보급 거점으로 건설되었다. 이 도시에 대한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의 기록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입지 조건은 카토이키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30]
4. 문화
셀레우코스 제국은 에게 해에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으며,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페르시아인, 메디아인, 메소포타미아인,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이 살았다. 제국은 이러한 다양성을 통제하기 위해 지역 문화 존중과 지역 엘리트 통합을 혼합하여 사용했다.
정부는 그리스 이민을 장려하여 제국 전역에 그리스 도시와 정착지를 건설했다. 이들 정착지는 그리스인들에게 토지와 특권을 제공하고 군 복무를 기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인구의 소수였지만, 제국의 핵심 세력으로서 군대와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이집트와 달리, 셀레우코스 제국의 그리스인들은 비그리스인과 혼인을 거의 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도시에서 생활하는 경향을 보였다.
제국의 다양한 비그리스 민족들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안티오크와 같은 주요 도시들은 그리스식으로 개명되었고, 수백 개의 새로운 도시가 그리스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교육받은 지역 엘리트들은 그리스어를 배우고, 그리스 철학을 흡수하며, 그리스 이름을 사용하는 등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경향은 점차 하위 계층으로 확산되었다.
헬레니즘과 토착 문화, 종교, 철학의 융합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추구했던 민족적 통일성 정책의 일환이었지만, 결과는 복합적이었다.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평화와 반란이 동시에 나타났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일반적으로 지역 종교를 존중하여 지지를 얻으려 했다.[40] 그러나 제2성전 유대교 통합 문제는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안티오코스 4세 통치 시기, 이스라엘 대제사장 직을 둘러싼 갈등과 종교적 박해는 마카베오 반란을 야기했고, 결국 유대 지역은 하스몬 왕조 아래 독립하게 되었다.
4. 1. 그리스-마케도니아인과 현지인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 계층은 주로 그리스-마케도니아인이었으며, 이들은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특권을 누렸다. 현대 연구자들은 셀레우코스 왕조가 기본적으로 마케도니아인의 왕조였으며, 실제로 왕조의 주도권을 잡은 것도 마케도니아인(그리스인)이었다고 평가한다. 티그리스 강변의 셀레우키아에서는 그리스인과 바빌로니아인이 별개의 도시를 형성하고 서로 대립했을 정도로, 그리스인 식민 단체와 그 이전부터 각지에 살던 사람들은 명확하게 구분되었다.현지인들은 상대적으로 차별받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는 제국 내 갈등과 반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몇몇 도시에서는 현지인이 예속민으로 취급되었고, 바빌로니아인과 같이 비교적 강력한 집단도 그리스인에 비해 열세였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는 현지 주민들의 협력 없이는 제국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 현지인들에게 관직을 부여하거나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정치적 이유로 대등한 입장을 인정받은 현지인 공동체도 있었지만(예: 스트라니케의 카리아인 등), 이는 예외적인 경우였다.
셀레우코스 왕조 영내의 그리스인 인구는 전체에서 보면 소수였기 때문에, 왕조는 도시 건설 정책을 통해 그리스인이 거주하는 요새망을 건설하여 수의 부족을 보충하고 지배의 안정을 꾀하는 전통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마케도니아인에 의한 외래 왕조가 압도적으로 많은 현지 주민의 의향을 완전히 무시하고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셀레우코스 왕조 국가 자체도 현지인의 관여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군대의 중급 이하 지휘관에는 각지의 현지 출신 장군이 기용된 예가 적지 않으며, 일반 병력의 경우 그리스인만으로는 수가 부족했다. 안티오코스 3세가 편성한 팔랑크스의 구성원 과반수가 오리엔트 각지의 용병으로 채워졌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고급 관료나 군 지휘관 지위에 비(非)마케도니아인(그리스인)이 임용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5. 경제
셀레우코스 제국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 체제를 유지했으며, 대부분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했다.[49] 주요 농산물은 곡물, 올리브, 포도 등이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보리, 대추야자, 참깨 등이 생산되었다.[51][52] 특히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한 토지와 관개 시설 덕분에 제국의 핵심 지역으로 높은 생산성을 자랑했다.[52][49]
셀레우코스 왕조는 화폐 경제를 발전시키고 상업을 장려했다. 제국 전역에 걸쳐 통일된 화폐가 사용되었는데, 초기에는 아티카 표준을 따르는 화폐가 주로 사용되었으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세겔 단위가 사용되기도 했다.[51][52] 점차 청동 주화가 널리 보급되어 소규모 거래를 촉진했다.[52][51]
셀레우코스 제국의 경제는 왕실과 귀족, 그리스-마케도니아인 지배층에 의해 독점되었다.[57][55] 왕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세금을 징수했으며, 사원도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55][56] 왕들은 때때로 사원의 재산을 몰수하여 재정을 충당하기도 했다.[50] 이러한 경제 구조는 빈부 격차를 심화시키고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요인이 되었다.
6. 군사
다른 주요 헬레니즘 군대와 마찬가지로, 셀레우코스 군대는 주로 그리스-마케도니아 방식으로 전투를 벌였다. 주력 부대는 팔랑크스였다. 팔랑크스는 작은 방패와 사리사으로 무장한 병사들로 구성된 크고 밀집된 대형이었다. 이러한 형태의 전투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마케도니아 군대에 의해 개발되었다. 팔랑크스 외에도 셀레우코스 군대는 그리스군을 보충하기 위해 수많은 토착 및 용병 부대를 사용했는데, 이는 셀레우코스 통치자의 마케도니아 고향과의 거리 때문에 제한적이었다. 셀레우코스 군대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7만 명에서 20만 명 사이였다.
그리스와의 거리는 셀레우코스 군사 시스템에 부담을 주었는데, 이는 주로 군대의 핵심 부분으로 그리스인을 모집하는 것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다. 셀레우코스 통치자들은 왕국 내 그리스인 인구를 늘리기 위해 군사 정착지를 만들었다. 정착지 건설에는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와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 시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시대 두 가지 주요 시기가 있었다. 군사 정착민들은 "계급과 복무 분야에 따라 크기가 다른" 토지를 받았다.[44] 그들은 "어느 시점에서는 폴리스의 지위를 얻을 수 있는 도시적 성격을 가진 식민지"에 정착했다.[45] katoikoi|카토이코이grc라고 불린 정착 병사들은 토지를 자신들의 것으로 유지하고 그 대가로 소집 시 셀레우코스 군대에서 복무했다. 정착지의 대부분은 리디아, 북부 시리아, 상부 유프라테스 강 및 메디아에 집중되어 있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에우보이아, 크레타 및 아이톨리아에서 그리스인을 데려와 안티오크에 정착시켰다.[46]
이러한 그리스 정착민들은 셀레우코스 팔랑크스와 기병대를 형성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선발된 병사들은 왕국의 근위병 연대에 배치되었다. 셀레우코스 군대의 나머지는 토착 및 용병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경보조 부대로 복무했다. 셀레우코스인들은 아랍인, 유대인, 동부의 이란 민족, 북부의 소아시아 거주자 등 인구가 적고 제국의 외딴 지역에서 기꺼이 병력을 모집했지만, 일반적으로 토착 시리아인과 바빌론인의 모집은 피했다. 이는 안티오크와 바빌론에서 제국의 무역 및 정부 중심지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무장시켜 반란을 일으킬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외딴 지역의 반란은 중심부의 단호한 조치로 진압할 수 있었지만, 시리아-코엘레에서의 봉기는 왕국의 존립 자체를 훼손했을 것이다.[47]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동안 소아시아에서 영토를 상실한 후, 안티오코스 4세는 이를 대체하고 기원전 166–165년 다프네에서 열린 군사 퍼레이드에서 볼 수 있었던 팔랑크스를 유지할 만큼 충분한 그리스인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이민과 정착지 건설을 후원했다. 안티오코스 4세는 15개의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으며 "다프네에서 증가된 팔랑크스와의 연관성을 무시하기에는 너무 분명하다".[48]
7. 역대 국왕 목록
이름 | 재위 기간 |
---|---|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 기원전 312년 - 기원전 281년 |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 | 기원전 281년 - 기원전 261년 |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 | 기원전 261년 - 기원전 246년 |
셀레우코스 2세 칼리니코스 | 기원전 246년 - 기원전 226년 |
안티오코스 히에락스 | 기원전 240년 - 기원전 228년 (아나톨리아에서 자립) |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 | 기원전 226년 - 기원전 223년 |
안티오코스 3세 대왕 | 기원전 223년 - 기원전 187년 |
아카이오스 | 기원전 220년 - 기원전 213년 |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 | 기원전 187년 - 기원전 175년 |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 기원전 175년 - 기원전 164년 |
안티오코스 5세 에우파토르 | 기원전 164년 - 기원전 162년 |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 | 기원전 162년 - 기원전 150년 |
알렉산드로스 1세 발라스 | 기원전 150년 - 기원전 145년 |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 | 기원전 145년 - 기원전 138년 (일시 파르티아의 포로) |
안티오코스 6세 디오니소스 | 기원전 145년 - 기원전 140년 |
디오도토스 트리폰 | 기원전 140년 - 기원전 138년 (찬탈자) |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 | 기원전 138년 - 기원전 129년 |
데메트리오스 2세 니카토르 | 기원전 129년 - 기원전 126년 (복위) |
알렉산드로스 2세 자비나스 | 기원전 128년 - 기원전 122년 (찬탈자) |
클레오파트라 테아 | 기원전 125년 - 기원전 121년 (알렉산드로스 1세, 데메트리오스 2세, 안티오코스 7세의 왕비) |
셀레우코스 5세 필로메토르 | 기원전 126년 - 기원전 125년 |
안티오코스 8세 그리푸스 | 기원전 125년 - 기원전 96년 |
안티오코스 9세 키지케노스 | 기원전 113년 - 기원전 95년 |
셀레우코스 6세 에피파네스 니카토르 | 기원전 96년 - 기원전 95년 |
안티오코스 10세 에우세베스 | 기원전 95년 - 기원전 92년 또는 기원전 83년 |
데메트리오스 3세 에우카이로스 | 기원전 95년 - 기원전 88년 |
필리포스 1세 필라델포스 | 기원전 95년 - 기원전 83년 |
안티오코스 11세 에피파네스 필라델포스 | 기원전 95년 - 기원전 92년 |
안티오코스 12세 디오니소스 | 기원전 87년 - 기원전 84년 |
티그라네스 2세 | 기원전 83년 - 기원전 69년 (아르메니아 왕) |
셀레우코스 7세 키비오사크테스 | 기원전 83년 - 기원전 69년 |
안티오코스 13세 아시아티코스 | 기원전 69년 - 기원전 63년 |
필리포스 2세 필로로마이오스 | 기원전 69년 - 기원전 63년 |
8. 연표
기원전 | 사건 |
---|---|
305년 |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왕을 칭하다. |
304년 | 인도 영토 포기 |
301년 | 시리아 획득 |
281년 | 소아시아 대부분 획득, 계승자 전쟁 최종 종결. |
278년 | 마케도니아와 화해 |
274년 | 갈리아인의 침입 격퇴 |
271년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제1차 시리아 전쟁 |
262년 | 아탈로스 왕조 독립 |
260년 | 제2차 시리아 전쟁 |
255년경 | 박트리아 독립. |
247년경 | 파르티아 독립. |
246년 | 제3차 시리아 전쟁 |
219년 | 제4차 시리아 전쟁 |
212년 | 안티오코스 3세 동방 원정. |
205년 | 파르티아, 인도 등에 대한 종주권 확립. 제5차 시리아 전쟁 발발 |
190년 |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로마 공화정에 패배, 아르메니아 왕국 독립 |
140년 | 마카비 전쟁에서 패배, 하스몬 왕조의 유대인 독립 승인 |
130년 |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패배, 동방 영토 완전 상실 |
100년경 | 안티오크와 일부 시리아 도시들을 포함하는 작은 지역으로 축소됨. |
83년 |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가 시리아 침공, 시리아 통치자로 즉위. |
69년 | 로마 장군 루쿨루스가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티그라네스 격파, 안티오코스 13세 아래 셀레우코스 왕국 복원. |
64년 | 폼페이우스에 패배, 멸망. 로마에 병합 |
9. 가계도
셀레우코스 왕조의 가계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부자간의 공동 통치는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는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되기 전, 아들 안티오코스 1세에게 왕의 칭호와 함께 셀레우코스 왕조의 동방 영토(상부 사트라피) 지배를 위임했다.[88]
-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는 아버지 셀레우코스 1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들 셀레우코스를 상부 사트라피의 공동 통치자로 임명했다.[91] 그러나 이 셀레우코스는 기원전 267년에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고, 대신 다른 아들 안티오코스 2세가 상부 사트라피의 지배자로 임명되었다.[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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