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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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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구당은 19세기 후반, 개화 운동 시기에 조선의 정치 세력 중 하나로, 전통적인 가치와 청나라와의 관계 유지를 중시했다. 위정척사파처럼 수구당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개화 운동을 전개하며 실학에 기반했다.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며, 온건 개화파가 수구당의 주류를 이루었다. 민씨 척족과 사대당, 수구당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으며,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 더욱 의존했으나 청일 전쟁과 을미사변을 거치면서 쇠퇴하여 친러파로 전향하는 등 변화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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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당
사대당
한글사대당 / 수구파
한자事大黨 / 守舊派
히라가나지다이토 / 슈큐하
가타카나사테단 / 스쿠파
로마자 표기Sadaedang / Sugupa

2. 정파별 비교

개화사상은 처음 중인 계급에서 시작되어 점차 양반 관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이들 사이에서는 개화 방식을 두고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났다.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점진적으로 개화를 추진하자는 입장과,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아 급진적인 개혁을 이루자는 입장이었다. 전자를 온건개화파 혹은 수구당이라 불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심순택, 김홍집 등이 있었다. 후자는 급진개화파로, 개화당이라 불렸으며, 김옥균, 박영효 등이 주도하였다.[3]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개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확대되면서, 급진적인 국정 개혁을 추구하는 개화당(독립당)과 민씨 일족을 중심으로 한 사대당이 대립하였다. 이들의 갈등은 1882년 임오군란1884년 갑신정변을 거치며 격화되었다.[3]

황문웅은 "조선이 청나라의 종속국이었던 것은 '만국공법'(국제법)과 당시 청과 조선의 정치 · 군사 · 외교 관계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명백한 국제 상식이었다"고 하며, "조선 말기에 등장한 개화파는 청에 대한 사대를 버리고 독립을 획득하려 했기 때문에, 사대파(속국파)에 대항하는 '독립파'라고 칭해졌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평가했다.[1]

2. 1. 온건개화파 (수구당)

청나라의 지도와 원조를 받아 점진적인 개화를 추진하려 하였다. 심순택,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민영익 등은 대표적인 온건개화파 인사들이었으며, 이들을 수구당이라고 불렀다. 수구당에는 온건개화파 이외에도 수구파심상훈, 한규직, 윤태준,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등도 포함된다.[3]

위정척사파와 달리 개화 운동을 전개하였고, 실학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사대당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청나라의 내정 간섭에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았다. 민씨 척족, 사대당, 수구당은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훗날 동도서기파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2. 2. 급진개화파 (개화당)

일본 제국의 원조를 받아 급진적인 내정 개혁과 자주독립을 추구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척족 민씨에게 압박받는 소장 지식인층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개화당을 결성하여 급진적인 국정 개혁을 도모하였다.[3]

2. 3. 사대당

민씨 일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주장하며 정권 유지를 꾀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위안스카이의 자문에 따라 민경식, 민영휘, 민영환, 조병식 등이 주요 인물로 등용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 더욱 의존하며 세력을 강화했다.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쇠퇴하여, 많은 이들이 친러파로 전향했다.[3]

3. 국제 정세와 개화파의 입장

중인 계급 사이에서 시작된 개화사상은 점차 양반 관리들에게도 퍼져나갔다. 양반 관리들 사이에서는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점진적으로 개화하자는 측과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아 내정을 개혁하고 독립하자는 측으로 나뉘었다. 전자는 심순택,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민영익온건개화파가 대표적이며, 이들을 '''수구당'''이라 불렀다. 수구당에는 수구파심상훈, 한규직, 윤태준,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등도 포함되었다. 후자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급진개화파가 대표적이며, 이들을 개화당(開化黨)이라 불렀다.

강화도 조약 이후 보수 세력의 반발이 거세지는 가운데, 일본 제국의 발전을 보고 개화를 주장하는 개화파도 확대되었다. 이들은 독립당을 형성하여 급진적인 국정개혁을 추진했고, 이에 맞서 민씨 일족을 중심으로 한 사대당이 나타나 정권 장악을 위한 갈등을 벌였다. 양측의 대립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심해졌으며, 1884년 갑신정변으로 최고조에 달했다.[3]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을 몰아낸 민씨 일족은 에 대한 사대를 버리고 일본과 결탁하여 자주 독립정치 개혁을 주장하는 독립당에 대항하여, 전통을 지키며 종주국인 청에 대한 신속을 주장하며 정권 유지를 꾀했다. 민씨 일족은 위안스카이 저택에 특사를 보내 의견을 구했고, 위안스카이가 추천한 민경식, 민영휘, 민영환, 조병식 등이 사대당에 속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청에 더 접근하여 우세했지만,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쇠퇴하여, 많은 이들이 친러파로 바뀌었다.

3. 1. 조선의 종속국 지위

황문웅은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었던 것은 '만국공법'(국제법)과 당시 청과 이조 조선의 정치 · 군사 · 외교 관계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명백한 국제 상식이었다"고 하면서, "이조 조선 말기에 등장한 개화파는 청에 대한 사대를 버리고 독립을 획득하려 했기 때문에, 사대파(속국파)에 대항하는 '독립파'라고 칭해졌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평가했다.[1]

3. 2. 개화파의 독립 운동

개화파에 대한 사대주의를 버리고 자주독립을 획득하려 했기 때문에, 사대파(속국파)에 대항하는 '독립파'로 불렸다.[1]

4. 주요 사건

개화사상중인 계급에서 시작되어 점차 양반 관리들 사이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양반 관리들 사이에서는 청나라의 지원을 받아 점진적으로 개화하자는 온건개화파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아 급진적으로 개혁하자는 급진개화파로 나뉘었다. 전자를 '''수구당'''이라 불렀으며, 심순택,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민영익 등이 대표적이었다. 수구당에는 수구파심상훈, 한규직, 윤태준,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등도 포함되었다. 후자는 개화당이라 불렸으며,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이 대표적이었다.[3]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파는 독립당을 형성하여 급진적인 국정개혁을 도모하려 했으며, 이에 대항하여 민씨 일족을 중심으로 한 사대당이 출현해 서로 정권 장악을 위한 갈등을 일으켰다.

4. 1. 임오군란 (1882)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와 사대당 간의 대립 투쟁 양상이 현저하게 격화되었다.[3]

4. 2. 갑신정변 (1884)

개화당과 사대당 간의 갈등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최고조에 달하였다.[3]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을 몰아낸 민씨 일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대당은 일본과 결탁하여 으로부터의 자주 독립정치 개혁을 주장하는 독립당에 대항하여, 전통을 지키며 종주국인 청에 대한 신의를 지킬 것을 주장하며 정권 유지를 꾀했다.[1]

4. 3.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수구당은 청에 더욱 접근하여 우세했지만, 청일 전쟁에서 청이 패배하고 을미사변이 일어나면서 쇠퇴하여, 많은 이들이 친러파로 바뀌었다.[1]

참조

[1] 서적 日本の植民地の真実 扶桑社 2003-10-31
[2] 간행물 개화파의 개혁운동
[3] 간행물 사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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