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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드 알리 모하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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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는 1819년 이란 쉬라즈에서 태어난 인물로, 바브교의 창시자이다. 그는 샤이히파의 영향을 받아 1844년 자신이 '바브'(문)이며, 숨겨진 이맘인 마흐디를 만나는 문이라고 주장하며 종교적 활동을 시작했다. 바브는 초기에는 이슬람 율법을 따랐으나 점차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의 화해, 윤리, 교육, 여성의 권리 향상 등을 강조했다. 그의 가르침은 이슬람교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며, 바하이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브는 1850년 처형당했으나, 그의 가르침은 바하이교로 계승되었고, 바하이교는 그를 '신의 현현'으로 존경한다.

2. 생애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는 1819년 10월 20일 이란 쉬라즈의 중산층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9][8]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밑에서 자랐으며, 막타브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기존 교육 방식보다는 영적인 탐구에 더 몰두했다.[8] 15세 이후에는 외삼촌의 가업을 이어 부셰르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며 정직함으로 평판을 얻었으나, 종교 문헌 연구에 더 큰 열정을 보였다.[10]

1842년, 23세의 나이에 카디제 술탄 바굼과 결혼하여[12] 아들을 낳았으나 일찍 잃었다. 이 시기 그는 이라크 카르발라 등지를 순례하며 시아 이슬람교 내 셰이크파 지도자 카짐 라슈티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8] 카짐 라슈티는 임종 전 제자들에게 약속된 마흐디(콰임)를 찾아 나서라고 독려했다.[8]

1844년 5월 23일, 물라 후세인은 쉬라즈에서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를 만나 그가 바로 기다리던 인물임을 확인하고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8]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는 자신을 '바압'(문, Báb)이라고 선언하며, 이는 은폐된 열두 이맘과 신자들을 연결하는 통로이자 새로운 하나님의 사자임을 의미했다. 그는 첫 저작인 《카윰 알 아스마》를 통해 자신의 사명을 밝혔고, 이후 17명의 제자가 더 합류하여 '생존의 문자들'이라 불리는 핵심 그룹을 형성했다.[13] 바압의 가르침은 점진적으로 그의 높은 지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는 추종자들이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이도록 돕고 박해를 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접근이었다.

바압의 새로운 가르침은 빠르게 확산되었으나, 이란카자르 왕조 정부와 기성 종교 지도자들의 강한 반발과 박해에 직면했다. 그는 이스파한, 마쿠, 체흐리크 등지로 강제 이송되어 수년간 감금 생활을 했다. 감옥에서도 그는 저술 활동을 계속하며 신자들과 소통했고, 그의 영향력은 꺾이지 않았다. 1848년 타브리즈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신체적 처벌을 받기도 했다.

결국 1850년 7월 9일, 총리 아미르 카비르의 명령으로 바압은 타브리즈의 병영 광장에서 사격형으로 처형되었다.[16] 그의 제자 무함마드-알리(아니스)도 함께 순교했다. 처형 과정에서 첫 번째 총탄이 빗나가 밧줄만 끊어진 사건은 바하이 신앙에서 기적으로 전해진다. 그의 유해는 신자들에 의해 비밀리에 수습되어 오랜 기간 숨겨졌다가, 1909년 이스라엘 하이파의 카르멜 산에 세워진 바브 사원에 안치되었다.

2. 1. 성장 과정

열 살 전에 쓰여진 바브의 서예 연습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는 1819년 10월 20일(히즈라력 1235년 1월 1일) 이란 쉬라즈에서 중산층 상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ʿAlí Muḥammad|알리 모하마드ara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무함마드 리다였고, 어머니 파티마(1800–1881)는 쉬라즈의 저명한 상인의 딸이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인 사이이드였으며, 특히 무함마드의 손자 후세인 이븐 알리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전해진다.[9][8] 그의 어머니 파티마는 나중에 바하이 신자가 되었다.

알리 모하마드는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상인이었던 외삼촌 하짐 미르자 시이드 알리(Hájí Mírzá Siyyid `Alí|하짐 미르자 시이드 알리ara) 슬하에서 자랐다.[8] 쉬라즈에서 외삼촌은 그를 막타브(초등학교)에 보냈고, 그는 그곳에서 6~7년 동안 교육을 받았다. 당시 학교 교육은 형식적인 신학 공부가 주를 이루었으나, 알리 모하마드는 어린 나이부터 수학, 서예와 같은 과목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영적인 탐구와 창의적인 생각에 몰두했는데, 이는 당시 페르시아의 경직된 학교 분위기와 맞지 않아 스승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기존 교육 시스템에 다소 환멸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훗날 어른들에게 아이들을 존중하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도록 허용하며, 학생들에게 결코 가혹하게 대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15세에서 20세 사이의 어느 시점에, 그는 외삼촌의 가업을 이어받아 페르시아만 인근의 항구 도시 부셰르에서 상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8] 그는 주로 인도, 오만, 바레인 등과의 무역에 종사하며 정직함과 신뢰성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초기 글들을 보면 상업 활동보다는 종교 문헌 연구와 영적인 탐구에 더 큰 열정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10]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매우 과묵했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말을 하지 않았으며, 질문에도 즉답하기보다 깊이 생각에 잠겨 기도와 경전을 암송하는 데 몰두했다"고 묘사했다. 또한 "수염이 얇고 단정한 옷차림에 녹색 숄과 검은 터번을 두른 잘생긴 청년"으로 기억되었다.[11] 한 아일랜드인 의사는 그를 "키가 작고 매우 흰 피부를 가졌으며, 온화하고 섬세한 모습에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녔는데, 이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고 기록했다. 후대의 바하이 지도자 쇼기 에펜디는 그의 "온화하고 젊으며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온유함, 흔들림 없는 평정심, 매혹적인 언변"을 칭송하며, 이러한 성품이 그를 만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고 평가했다.

1842년, 23세가 된 그는 한 살 어린 카디지 바굼(Khadíjih-Bagum|카디지 바굼ara, 1820–1882)과 결혼했다. 그녀 역시 쉬라즈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듬해 부부는 아들을 낳았으나, 안타깝게도 아이는 첫 돌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12]

2. 2. 결혼

1842년, 23세의 나이에 어머니의 권유로 시라즈의 저명한 상인의 딸인 20세의 카디제 술탄 바굼(1822–1882)과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듬해인 1843년 외아들 아흐마드가 태어났으나, 같은 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고, 카디제는 다시 임신하지 못했다. 젊은 부부는 시라즈에 있는 바브의 어머니 집에서 함께 살았다. 카디제는 나중에 바하이 신자가 되었다.

2. 3. 샤이히파 운동

1790년대 이라크에서 셰이크 아흐마드(1753–1826)는 시아 이슬람교 내 열두 이맘파에 근간을 둔 종교 운동을 시작했다.[8] 그의 추종자들은 셰이크파로 알려졌으며,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고 최후의 심판에서 악의 무리와 맞설 마흐디(무함마드 알-마흐디) 또는 그의 대리인인 콰임이 곧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셰이크 아흐마드는 이슬람 가르침에 대해 덜 문자적인 접근 방식을 취했으며, 예를 들어 무함마드의 육신 승천(이스라와 미라지)이나 죽은 자의 부활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로 인해 셰이크 아흐마드는 당시 정통 시아파 신학자들과 갈등을 겪었고, 1824년에는 이단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셰이크 아흐마드가 사망한 후, 카짐 라슈티(1793–1843)가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2번째 이맘이 은폐된 지 1000년(AH 기준)이 되는 해인 서기 1844년(AH 1260년)에 마흐디가 나타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1841년, 바압(시이드 알리 모하마드)은 이라크로 순례를 떠나 7개월 동안 주로 카르발라에 머물렀다. 그는 그곳에서 카짐 라슈티의 강의에 참석한 것으로 여겨진다.[8]

1843년 12월 임종을 앞둔 카짐 라슈티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집을 떠나 곧 나타날 마흐디, 즉 콰임을 찾으라고 권유했다.[8] 카짐 라슈티의 추종자 중 한 명인 물라 후세인은 모스크에서 40일간 기도한 후 쉬라즈로 가서 바압을 만났다. 1844년 5월 23일, 물라 후세인은 바압이 바로 자신들이 찾던 마흐디(콰임)이자 '바압'(문)이라고 선언했다.[8] '바압'은 원래 열두 이맘파 신앙에서 은폐된 열두 이맘과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인물, 즉 '문'(門)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2. 4. 바압으로서의 활동

시이드 카짐 라쉬티는 임종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에 나타날 마흐디인 콰임을 찾아 나서라고 독려했다. 그의 수제자였던 물라 후세인은 1844년 쉬라즈에서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를 만났다. 물라 후세인은 쉬라즈의 문 앞에서 바압을 만났으며, 두 사람은 이전에 카르발라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1844년 5월 22일 저녁, 시라즈에 있는 자택에서 바브의 선언이 이루어진 방


1844년 5월 22일 밤, 물라 후세인은 바압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을 방문했다. 물라 후세인이 카짐 라쉬티의 후계자를 찾고 있다고 밝히자, 바압은 자신이 바로 그 후계자이며 신성한 지식의 소유자라고 선언했다. 바압은 물라 후세인에게 자신을 '하나님의 기억'이자 '하나님의 증거'라고 묘사했는데, 이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숨겨진 이맘을 분명히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물라 후세인은 바압의 주장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인물이 되었다.[8] 바압은 물라 후세인의 모든 질문에 답하고, 그 앞에서 빠른 속도로 꾸란의 유수프 장에 대한 해설서인 《카윰 알 아스마》(Qayyúmu'l-Asmáʼ)의 첫 장을 써 내려갔다. 이는 바압이 처음으로 계시한 작품으로 여겨지며,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은 바압의 비교적 긴 아랍어 저작 중 하나로, 초기 바비교 운동에서 꾸란이나 성경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 날은 바하이 신앙에서 중요한 축일로 기념된다.

물라 후세인은 바압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 이후 5개월 동안 카짐 라쉬티의 제자 17명이 추가로 바압을 하느님의 현현으로 인정했다. 이들 중에는 여성 시인 파티미 자린 타지 바라가니(훗날 타히리로 불림)도 포함되었다. 이 18명의 초기 제자들은 '생존의 문자들'로 알려졌으며, 이란이라크 등지에 새로운 신앙을 전파하는 임무를 받았다.[13] 바압은 이 18명과 자신을 합쳐 첫 번째 '단결'(아랍어: 와히드, 숫자값 19)을 이룬다고 설명했다. 바압의 저서인 《페르시아 바얀》은 생존의 문자들의 상징적 정체성을 12 이맘파 시아 이슬람교의 14 성인(무함마드, 12 이맘, 파티마) 및 네 명의 대천사와 연결 짓는다.

'바압'(Báb)은 '문'(門)을 의미하는 칭호로, 본래 시아파 열두 이맘파 신학에서 은둔 상태인 열두 이맘과 지상의 신자들을 연결하는 중개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13]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는 초기 저작에서 자신을 이러한 '문'으로 칭했으나, 점차 자신의 지위를 숨겨진 이맘이자 새로운 하나님의 사자로 더욱 명확히 밝혔다. 그의 주장은 점진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박해를 피하고 추종자들이 점진적으로 그의 높은 지위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신중한 접근이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그의 야망 변화로 보기도 하지만, 지지자들은 일관된 정체성을 점진적으로 공개한 것으로 해석한다. 바압 자신은 마쿠(Mákú) 감옥 투옥 후, 초기에는 사람들이 새로운 계시에 당황하지 않도록 이슬람 율법을 존중했으며,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의도적으로 점진적으로 드러냈다고 설명했다. '바압'이라는 칭호 자체도 신의 현현이라는 그의 궁극적인 지위가 가져올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밝혔다.

바브는 1846년 9월 시라즈의 바킬 모스크 설교단에서 대중에게 연설했다.


이러한 점진적인 주장의 전개는 일부 추종자들과 대중에게 혼란을 주기도 했다. 일부 초기 신자들은 그를 신성한 권위를 지닌 사자로 즉시 받아들였고, 타히리와 같은 인물들은 공개적으로 그가 약속된 마흐디라고 선언했다.

그의 첫 주요 저작인 《카윰 알 아스마》는 저자를 모세, 예수, 무함마드의 계보를 잇는 하나님의 사자로 제시하며, 전 인류에게 새로운 영적·사회적 갱신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 이 책에서 '바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독립적인 사자로서의 주장이 지닌 파격을 완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역할이 장차 나타날 바하올라("하나님의 영광")를 예비하는 선구자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바비교 신자들은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를 이슬람 예언에 등장하는 콰임[14]이자 세례자 요한의 영적인 귀환으로 믿었다.[15]

바압은 자신의 사명을 공적으로 선언하기 전후로 여러 저작을 남겼다. 선언 약 6개월 전인 1843년 말에는 알바카라 수라에 대한 해설서 집필을 시작했으며, 이는 그의 선언 전에 계시된 작품 중 유일하게 온전히 보존된 것이다. 1844년 메카 순례를 떠나기 전에는 14개의 기도를 모은 《사히피히-이-마크주니히》(Sahífiy-i-Makhzúnih)를 저술했다.

2. 5. 박해와 처형

이란 당국은 바브교의 믿음이 널리 확산되자 경계심을 가졌다.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바브)는 박해를 피해 자신에게 우호적인 이스파한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이맘-줌'이의 집을 방문했고 많은 지지자를 얻었으며, 지역 성직자들과의 토론과 즉석 시 짓는 솜씨로 인기가 높아졌다. 그러나 그를 지지하던 이스파한 지사 마누체르 칸 고르지가 사망하자, 성직자들의 압력으로 모하마드 샤 카자르는 1847년 1월 바브에게 테헤란으로 갈 것을 명령했다. 테헤란 외곽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샤를 만나기 전에 총리는 그를 이란 북서쪽 타브리즈로 보냈고, 이후 터키 국경 근처 아제르바이잔 지방의 마쿠 요새로 옮겨져 감금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인 ''페르시아어 바얀''을 쓰기 시작했다. 마쿠에서도 그의 인기가 높아지고 지사까지 개종하자, 총리는 1848년 4월 그를 치히리크 요새로 다시 옮겼다. 치히리크에서도 그의 인기는 계속되었고 감시가 완화되기도 했다.

마쿠 요새, 이란(2008)


1848년 이란의 샤 모하마드 샤 콰자르가 사망하자 이란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혼란 속에서 약 2만여 명의 바브교 신자들이 바브를 내세워 왕좌를 노린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16]

같은 해 6월, 바브는 울레마 앞에서 배교 혐의로 재판을 받기 위해 치히리크에서 타브리즈로 이송되었다. 황태자가 참석한 이 재판에서 성직자들은 그의 주장과 가르침에 대해 질문하고 기적을 요구하며 주장을 철회하라고 압박했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바브는 "나는 당신들이 천 년 동안 기다려온 그 사람이다"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재판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났다. 일부 성직자들은 사형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그의 인기를 고려해 의사에게 정신 이상 진단을 요청하여 처형을 피하려 했다. 또한 바브가 주장을 철회했다는 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바브 반대 운동의 선두 주자였던 셰이크 알-이슬람은 재판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바브가 정신적으로 온전하다면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조건부 파트와를 내렸다. 황태자의 주치의 윌리엄 코믹은 바브를 진찰했으나, 처형을 면하는 대신 발 채찍질(팔랑가) 20대를 맞는 신체적 처벌이 가해졌다. 재판 직후 바브가 서면으로 주장을 철회했다는 공식 보고서가 나왔으나, 이 문서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에드워드 그랜빌 브라운은 이 문서의 사본을 공개했지만, 압바스 아만아트는 필체가 바브의 것과 다르고 그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보인다며 위조된 것으로 본다. 바브는 철회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재판 후 바브는 다시 체흐리크 요새로 보내졌다.

바브가 처형된 타브리즈의 병영 광장


1850년 중반, 새로운 총리 아미르 카비르는 바브교도들의 반란 실패와 운동의 쇠퇴를 이유로 바브의 처형을 명령했다. 바브는 마흐디와 이란의 왕을 사칭했다는 혐의로[16] 사격형에 처해지기 위해 다시 타브리즈로 이송되었다. 처형 전날 밤, 조누즈 출신의 젊은 바브교도 무함마드-알리(아니스)가 바브와 함께 순교하기를 간청하여 함께 투옥되었다.

1850년 7월 9일 아침, 바브와 아니스는 타브리즈 병영 안뜰로 끌려나와 벽에 매달렸다. 수천 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격 명령이 내려졌다.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첫 번째 일제 사격은 밧줄만 끊었을 뿐 바브를 맞추지 못했다. 이는 바브교와 바하이 전통에서 기적으로 여겨진다. 두 번째 사격 부대가 동원되어 다시 발포했고, 이번에는 바브와 아니스 모두 사망했다.

처형 후 바브와 아니스의 유해는 도랑에 버려졌으나, 바브교도들이 비밀리에 수습하여 숨겼다. 유해는 여러 도시를 거쳐 1899년 아크레로 옮겨졌고, 1909년 3월 21일 압둘 바하에 의해 이스라엘 하이파의 카르멜 산에 세워진 바브 사원에 안치되었다. 이 부근에는 현재 바하이 세계 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

3. 가르침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의 초기 가르침은 이슬람교 신앙에 따른 콰임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존재의 형이상학적 설명과 역사에 대한 신비주의적 해석으로 가르침을 확장했다.[17]

바브는 초기 저작(1844–1847)에서 자신을 '문'(báb)으로 칭했는데, 이는 941년 주요 은폐에 들어간 시아파 12대 이맘의 4대 대리인 중 한 명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후기 저작에서는 자신의 지위를 숨겨진 이맘이자 하느님의 새로운 사자라고 더욱 명확히 선언했다. 이러한 주장의 점진적인 변화에 대해 비평가들은 그의 야망 변화를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반면, 지지자들은 이를 일관된 정체성을 신중하게 점진적으로 드러낸 과정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그의 첫 저작은 꾸란과 유사한 스타일로 작성되어 당시 계시 주장으로 쉽게 인식될 수 있었다. 바브는 마쿠(Maku)로 추방되기 전 초기 저작에서 자신의 진정한 주장을 모호하게 하여 사람들이 이후에 밝혀질 그의 진정한 지위에 대비하도록 했다. 이러한 신중한 접근 방식은 숨겨진 이맘의 출현에 대한 기대를 조성하고, 마흐디 신분을 공개했을 때 따를 수 있는 즉각적인 박해와 투옥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공개 선언 초기 몇 달 동안 그는 논란을 최소화하면서 최대한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신중한 정책을 채택했다.

주장의 점진적인 전개는 대중과 일부 추종자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다. 일부 초기 신자들은 그를 신성한 권위를 가진 하느님의 사자로 여겼고, 이는 바브교 공동체 내 불일치를 초래했다. 바브는 신중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지만, 타히리와 같은 많은 추종자들은 그가 약속된 숨겨진 이맘이자 마흐디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바브의 첫 주요 저작인 《카윰 알-아스마》(Qayyūm al-asmāar)는 저자를 모세, 예수, 무함마드의 계보를 잇는 하느님의 사자로 명시한다. 이 주석은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하며, 동서양의 통치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영적, 사회적 쇄신 운동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한다. 이 책에서 바브는 자신을 전통적인 이슬람 칭호인 '바브'(문)로 지칭했지만, 문맥상 이전과는 매우 다른 영적 주장을 담고 있음이 분명했다. '문'이라는 칭호는 한편으로는 독립적인 하느님의 사자라는 주장의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역할을 바하올라(Bahá'u'lláh)로 이어지는 '문의 문', 즉 세계 경전에서 예언된 보편적 사자의 선구자로 암시했다.[17]

마쿠(Mákú) 감옥에서의 9개월간의 투옥은 그의 삶과 사명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이 약속된 콰임(숨겨진 이맘)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이슬람의 사회적 율법을 폐지했다. 바브는 사역 초기에 꾸란의 법을 따른 것은 사람들의 전환을 돕고 새로운 계시로 인한 불안감을 줄이기 위한 자비심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메시지가 점진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가렸으며, '바브'(문)라는 칭호조차 신의 현현으로서의 주장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약속된 자가 베푸신 여러 가지 은혜와 이슬람교 추종자들의 모임에 스며들어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신 그의 은총의 유출을 생각해 보라. 진실로 창조의 기원을 대표하고 '나는 참으로 하나님이다'라는 구절의 해설자이신 그분은 어떻게 자신을 무함마드의 후손인 약속된 까임의 출현을 위한 문(바브)으로 식별하셨으며, 그의 첫 번째 책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책과 새로운 계시 때문에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그들의 믿음과 유사하게 여겨 진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이 존재하게 된 이유를 무시할 수 있도록 꾸란의 법을 준수하도록 명령하셨는지 살펴보라."

바브 가르침의 핵심은 인류 가족 구성원 모두의 화해를 촉구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인류 역사의 새로운 단계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같은 나무의 잎과 열매가 되어 서로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너희 모두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신자와 비신자를 구별하지 않고 타인의 객관적인 필요를 인식하는 도덕적 의무를 포함하는 보편적인 윤리적 관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가르침의 의도는 "인류의 혁명적 변혁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바브는 인간의 행복과 복지가 다른 사람을 황금률에 따라 대하는 것, 특히 타인에게 슬픔을 유발하는 행위를 삼가는 것, 그리고 자연물이든 인공물이든 모든 것을 완벽한 상태로 만들려는 노력, 즉 모든 것에 아름다움과 영적인 목적을 부여하는 과정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관점에서 문명 자체가 신성한 사업이 되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하올라의 질서에 눈을 고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바브의 저술은 바하올라의 저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바브의 가르침은 신, 종교, 예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며, 천국, 지옥, 부활과 같은 종교적 개념을 재해석한다.[17] 점진적 계시, 종교의 연속성과 갱신, 현대적 교육, 여성 지위 향상, 사제직 폐지, 윤리 강조, 진리에 대한 독립적인 탐구, 인간의 고귀함 등이 그의 핵심 가르침이다. 또한, 그가 자주 "하나님이 드러내실 분"이라고 칭한 메시아적 인물의 도래를 강조하는 것이 그의 가르침의 또 다른 기본적인 초점이다.[2] 바브는 이 약속된 인물의 맥락 안에서 자신의 계시와 법을 일관되게 논의한다. 이전 종교들에서는 약속된 인물에 대한 언급이 간헐적이고 암시적이었던 반면, 바브교의 핵심 경전인 《바얀》의 주요 초점은 "하나님이 드러내실 분"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1]
핵심 원리


  • 지속적이고 진화하는 종교: 신은 예언자를 통해 점진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인류가 발전함에 따라 신성한 가르침은 더욱 포괄적이고 세련되어진다.[3] 각 종교는 시대의 특정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며 이전 종교를 넘어서지만, 궁극적으로는 더 완벽한 종교의 출현으로 이어진다.[4] 예언자들은 신의 완벽한 반영이며 통일성을 지닌다(같은 태양을 비추는 거울). 신성한 계시는 역사를 통해 계속되는 과정이다.
  • 부활의 재해석: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낡은 종교의 쇠퇴와 새로운 계시를 통한 영적 부활을 의미한다. 계절의 순환(겨울의 죽음과 봄의 부활)처럼 종교도 쇠퇴와 갱신을 겪는다. 이는 역사적 변화와 인간의 행위를 포용하는 미래 지향적 관점이다.
  • 역동적인 종교관: 종교는 신의 뜻과 인류의 역사적 단계 사이의 상호작용 결과로 나타나는 역동적인 현상이다. 신의 뜻이 절대적이고 불변하게 강요된다는 전통적 관점을 거부한다.
  • "하나님이 드러내실 분": 바브교 경전 《바얀》의 중심 주제는 바브 자신보다 더 위대한 메시아적 인물, 즉 "하나님이 드러내실 분"이다.[1] 바브의 사명은 이 약속된 자를 위한 길을 준비하는 것이다.[2] 이 인물은 모든 신성한 속성을 지니며 신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 바브는 외부 요인이 아닌 그의 인격과 행동을 바탕으로 약속된 자를 인식하도록 독립적인 조사를 장려한다.[5] 그는 과거 종교가 새로운 예언자를 반대했듯이, 바브교 경전을 근거로 약속된 자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5]
  • 독립적인 진리 탐구: 인간은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진실을 독립적으로 조사할 타고난 능력을 지닌다. 성직자 제도를 폐지하고, 기적이 아닌 계시의 말씀(경전)을 예언자 정당성의 진정한 기준으로 강조한다. 사제들의 권력 구조를 제거하고 성직자가 주도하는 회중 기도를 금지하며, 예배는 인간의 중재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직자를 종교적 부패의 주요 원인으로 본다.
  • 합리성, 과학, 교육: 합리성, 과학, 효율적인 교육을 강력히 옹호한다. 잘 조직된 학교를 기반으로 윤리, 다양한 의견 존중, 과학 탐구,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가르치는 진보적인 사회를 구상한다. 자연 과학 학습을 장려하고, 구식 주제 제거 및 쉬운 언어 사용과 같은 교육 개혁을 제안한다.
  • 여성 지위 향상: 당시 규범에 비해 여성의 삶을 상당히 개선했다. 법률에서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이슬람법의 부담(일부다처제 장려, 강제 결혼, 첩살이 금지 등)을 완화하여 여성에게 더 큰 자율권을 부여한다. 여성 교육을 장려하고, 신의 관점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본다. 사회 규범에 도전한 여성 제자 타히리에 대한 지지는 여성 권리 개선에 대한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 윤리와 비폭력: 용서, 친절, 자신을 해치는 이에게도 선을 행할 것을 강조한다. 개인의 개선, 환경 보전, 아름답고 번영하는 사회 건설을 옹호한다. 폭력을 금지하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통해 평화로운 공존을 장려한다. 연대, 사랑, 봉사, 폭력 거부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구상했다.

가르침의 단계바브의 저작과 가르침은 시간 순서와 주제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바브 자신은 저작을 두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준비 단계로, 그의 주장과 가르침이 신중하게 가려져 주변 사람들에게 완전히 이해되지 못했던 시기이다. 두 번째 단계는 그가 시아 이슬람의 약속된 12대 이맘일 뿐 아니라, 토라, 복음서, 꾸란에서 예언된 새로운 세계 종교를 가져온 예언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시기이다. 그는 이 새로운 계시가 세계 통합과 평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창조적 에너지와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브의 가르침은 주제적 초점에 따라 세 단계로 더 세분화될 수 있다.

1. 해석 단계 (초기): 주로 꾸란과 하디스를 해석하며, 신과 예언자, 모든 사람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해석학적 관점에서 신학적 믿음을 재구성했다. 새로운 종교법 대신 "종교법의 내적이고 신비로운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의례적 행위를 영적 여정으로 변화시키는" 데 집중했다.

2. 철학적 단계: 존재와 창조의 형이상학을 설명하고, 영적 진리 인식 방법, 인간 본성, 믿음의 의미, 선행의 본질, 영적 여정의 조건, 세상의 기원, "진정한 정의"의 실현과 종교의 역할 등 근본적인 종교적 질문들을 다루었다. 음악의 철학까지 탐구하며 행위자의 의도와 기능에 따라 도덕성을 판단했다. 이 시기에 역사적 의식을 갖고 진보적 계시의 원칙을 명확히 확립했다.

3. 입법적 단계 (1848년 이후): 이슬람법을 명확히 폐지하고 자신만의 교리와 관행을 도입했다. 종교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신의 뜻과 인간 발달의 역사적 단계의 상호 작용의 산물"이며, 인간의 이해와 행동이 변화함에 따라 종교도 진보하는 현상이라는 급진적인 주장을 제시했다. 이 시기의 주요 경전인 페르시아어 《바얀》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을 공표한다. 여기에는 결혼, 장례, 순례, 기도 등 미래의 바비 국가를 위한 법률 또는 하나님이 드러내실 자에 의해 시행될 관행들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법은 "하나님이 드러내실 자"의 승인을 조건으로 했으며, 그 중요성은 다음 신성한 계시에서 그를 인식하는 영적 의미에 있었다.

4. 저작

책 표지 ''바브의 저작 선집''


바브는 신의 현현이 계시한 구절이 자신의 사명의 가장 큰 증거라고 단언했다. 그의 저작은 2천 개가 넘는 서신, 기도문, 철학 논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은 바비교 신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계시되었으며, 때로는 비서와 목격자 앞에서 매우 빠르게 작품을 낭송하며 계시하기도 했다. 이 저작들은 바하이 경전의 일부를 이루며, 특히 기도는 개인적으로나 예배 모임에서 자주 사용된다.

바브의 저작은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엘람 아프난은 그의 글이 "독자들의 생각을 재구성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믿음과 유산된 관습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고 평가했다. 잭 맥린은 숫자, 색, 언어 등 모든 것이 신의 이름과 속성(asmá va sifát)의 심오한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 또는 징표로서 광범위하게 상징적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기존 용어가 부적절할 때 신조어를 사용하는 언어 혁신, 자유 연상과 의식의 흐름 기법 활용, 그리고 종교적으로 중요한 특정 단어나 구절을 반복하는 등의 독특한 문체적 특징을 보인다. 바브 자신은 저작을 신성한 구절, 기도, 주석, 아랍어로 쓰인 합리적 담론, 그리고 앞의 네 가지를 포괄하는 페르시아어 저작의 다섯 가지 형태로 분류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저작과 헤겔, 칸트, 제임스 조이스 같은 서양 사상가들의 저작 사이에서 유사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브 저작의 상당수는 유실되었다. 바브는 자신의 저작이 50만 구절 이상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6300구절인 코란과 비교된다. 나빌-이-자란디는 저서 ''새벽의 개척자들''에서 바브가 마쿠 감옥에서 계시한 코란 주석 9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기록했다. 남아있는 작품들의 진정한 원본 텍스트를 확립하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은 아니며, 일부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작품들은 상태가 양호하며, 주요 작품 중 일부는 바브의 신뢰할 수 있는 비서들이 직접 쓴 필사본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현재 바하이 세계 센터 기록 보관소에는 약 190개의 바브의 타블렛이 보관되어 있다. 여러 주요 작품의 발췌문은 바브의 저작을 영어로 엮은 유일한 선집인 ''바브의 저작 선집''에 게재되어 있다. 데니스 맥에온은 그의 저서 ''초기 바비 교리와 역사에 대한 자료''에서 많은 작품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며, 아래 요약의 대부분은 그 자료에서 파생되었다. 주요 작품 외에도 바브는 아내와 추종자들에게 수많은 편지, 다양한 목적의 기도문, 코란 구절이나 장에 대한 주석, 그리고 많은 ''후트바''(설교, 대부분 전달되지 않음)를 계시했다. 이들 중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고, 다른 것들은 편집본으로 남아 있다.

바브는 종교 저작에서 아랍어 문법을 부정확하게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아랍어로 쓴 편지에서는 거의 실수가 없었다. 이러한 불일치는 단어의 외적인 형식 너머를 볼 수 없는 사람들과 그의 메시지의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한 의도였을 수 있다. 바브는 그의 문법 논문에서 아랍어 문법이 우주의 영적 문법의 외적 상징으로 가르쳐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브의 주요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 ''Qayyúmu'l-Asmáʼ'' (유수프 수라 주해): 1844년 5월 22일 저녁, 물라 후세인에게 자신의 사명을 선언하며 첫 번째 장을 썼다. 전체 작품은 수백 페이지에 달하며 바하이교도들이 계시로 간주하며, 완성하는 데 40일이 걸렸다. 초기 바비교 운동에서 코란이나 성경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 책에서 바브는 자신이 신의 현현이라고 주장하지만, 숨겨진 이맘의 종이라는 다른 진술로 위장하기도 했다. 타히리가 이 작품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했다.
  • ''사히피히-이-마크주니히'' (Sahífih-i-Makhzúnih): 1844년 9월 메카로 떠나기 전에 계시된 14개의 기도를 모아 놓은 것으로, 대부분 특정 성일과 축제에 낭송하도록 되어 있다.
  • ''카사일-이-사비히'' (Khasá'il-i-sabʿih): 메카 순례 후 부셰르로 돌아오는 해상 여행 중에 쓴 작품으로, 바비교 공동체가 따라야 할 몇 가지 규정을 나열했다.
  • ''키타브-이-루흐'' (Kitáb-i-Rúḥ, 영혼의 서): 700절 또는 900절로 구성되어 있으며 바브가 순례에서 부셰르로 돌아오는 항해 중에 쓰여졌다. 바브가 체포되었을 때 원본은 거의 파괴되었으나 몇몇 필사본 사본이 현존한다.
  • ''사히피 바이누'ㄹ-하라마인'' (Sahífih baynu'l-haramayn, 두 성지 사이의 서한): 이 아랍어 작품은 바브가 1845년 초 메카에서 메디나로 여행하는 동안 쓰여졌으며, 저명한 셰이히 지도자가 그에게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 ''키타브-이-피흐리스트'' (Kitáb-i-Fihrist, 목록의 서): 메카 순례에서 돌아온 후 바브가 직접 쓴 자신의 초기 저작 목록 (1845년 6월 21일).
  • ''사히피-이-자파리예'' (Sahífih-yi-Jaʿfariyyih): 바브는 1845년에 미상의 상대에게 이 논문을 썼다. 100페이지가 넘는 이 논문은 특히 샤이키 신앙과 관련하여 그의 기본적인 가르침을 많이 담고 있다.
  • ''타프시르-이-수리히-이-카우사르'' (Tafsír-i-Súrih-i-Kawthar, 알-카우사르 장 해설): 바브는 시라즈에 있는 동안 야흐야 다라비 바히드(Yahyá Dárábí Vahíd)를 위해 이 주석을 썼는데, 시라즈 시대에 계시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수라는 코란에서 가장 짧은 구절로 단 세 구절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에 대한 주석은 200페이지가 넘는다.
  • ''누부비흐 카시시'' (Nubuwwih Kháṣṣih): 50페이지 분량의 이 작품은 마누체르 칸 고르지 총독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두 시간 만에 계시되었다. 이 작품은 무함마드의 특별한 예언자 직분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이는 무슬림과 기독교인 간의 논쟁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 ''타프시르-이 수리히-이 발-아스르'' (Tafsír-i Súrih-i-Va'l-ʿAṣr, 알-아스르 수라 주석): 이는 바브가 이스파한에서 쓴 두 개의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이 도시의 수석 성직자인 미르 사이이드 무함마드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즉흥적이고 공개적으로 쓰여졌으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대부분의 내용은 하룻밤 사이에 쓰여졌다.
  • ''페르시아 바얀'': 이 작품은 의심할 여지 없이 바브의 가장 중요한 작품이며 그의 가르침을 성숙하게 요약하고 있다. 1847년 말 또는 1848년 초 마쿠에서 집필되었다. 이 작품은 '바히드'(통일성)라는 제목의 9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다시 19개의 '바브'(문)로 세분화된다. 바브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현시하실 분'의 임무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하이교 신자들은 바하올라의 ''키타브-이-이칸''이 바얀의 완성이라고 믿는다. 각 통일성은 내용에 대한 아랍어 요약으로 시작된다. 이 작품의 발췌본은 ''바브의 저작 선집''에 게재되어 있다.
  • ''아랍어 바얀'': 이 작품은 두 바얀 중 더 짧고 중요도가 낮은 작품이다. 11개의 '바히드' 또는 "통일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통일성은 19개의 '바브' 또는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브의 가르침과 법에 대한 간결한 요약을 제공한다. 1847년 말 또는 1848년 초 마쿠에서 집필되었다.
  • ''달라일-이-사비'' (Dalá'il-i-Sabʿih, 일곱 증거): 이 제목의 작품은 두 개가 있으며, 더 긴 것은 페르시아어로, 더 짧은 것은 아랍어로 되어 있다. 두 작품 모두 1847년 말 또는 1848년 초 마쿠에서 집필되었다. 니콜라스는 페르시아어 일곱 증거를 "사이드 알리 무하마드의 펜에서 나온 논쟁적 작품 중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불렀다. 이 작품은 바비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나 믿음이 흔들린 추종자에게 쓰여졌지만, 수신자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 ''키타부'ㄹ-아스마'' (Kitábu'l-Asmá', 이름의 서): 이것은 신의 이름에 대한 매우 긴 책이다. 바브는 처형되기 전 체흐리크에서의 마지막 날에 이 책을 썼다. 다양한 필사본에는 텍스트의 수많은 변형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의 원래 텍스트를 재구성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키타브-이 판지 샤안'' (Kitáb-i-Panj Sha'n, 다섯 등급의 서): 1850년 3월과 4월 사이에, 처형되기 불과 3개월 전에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이 책은 바브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책은 각각 다른 신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17개의 그룹으로 나뉜 85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그룹 안에는 5개의 "등급", 즉 5가지 종류의 섹션이 있다: 구절, 기도, 설교, 주석, 그리고 페르시아어로 된 계시. 각 그룹은 다른 사람에게 보내졌으며 다른 날에 구성되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관련 없는 자료의 일종의 혼합물이다.

5. 영향

시이드 알리 모하마드(바브)의 사후 창시된 바하이교는 그를 선구자로 여긴다.[18] 바하이 신앙의 기본 개념 중 하나는 바브와 바하올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쌍둥이 신의 현현' 개념이다. 두 인물 모두 신의 현현으로 간주되며, 각각 별도의 종교(바브교와 바하이 신앙)를 창시하고 성서를 계시했지만, 하나의 분리될 수 없는 연속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본다. 바하이 신자들에게 바브와 바하올라의 사명은 불가분의 관계이며, 바브의 사명은 '신이 나타나게 할 분'(궁극적으로 바하올라로 나타난 인물)의 출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브와 바하올라는 모두 바하이 신앙의 중심 인물로 존경받는다.

바브 가르침의 핵심은 인류 가족 구성원의 화해를 촉구하며 인류 역사의 새로운 단계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신자와 비신자를 구별하지 않고 타인의 필요를 헤아리는 도덕적 의무를 포함하는 보편적 윤리관을 강조했다. 또한 인간의 행복과 복지는 다른 사람을 황금률에 따라 대하고, 타인에게 슬픔을 주는 행위를 삼가며, 자연과 인공물을 포함한 모든 것에 아름다움과 영적인 목적을 부여하여 완벽한 상태로 만드는 과정에 달려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인류의 혁명적 변혁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바브의 가르침은 신, 종교, 예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며, 이를 통해 천국, 지옥, 부활과 같은 전통적인 종교 개념을 재해석한다. 그의 주요 가르침에는 점진적인 계시, 종교의 연속성과 갱신, 현대적 교육, 여성 지위 향상, 사제직 폐지, 윤리 강조, 진리에 대한 독립적인 탐구, 인간의 고귀함 등이 포함된다. 특히 그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이 드러내실 분'이라고 자주 언급한 메시아적 인물의 도래를 강조한 점이다.[2] 바브는 자신의 계시와 율법을 이 약속된 인물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설명했으며, 그의 핵심 경전인 바얀의 주된 목적 역시 '하나님이 드러내실 분'을 위한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1]

압둘바하는 바브의 영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는 혼자서 상상하기 어려운 과업을 수행했습니다... 이 훌륭한 존재는 페르시아의 종교법, 관습, 습관, 도덕, 습관의 기초를 흔들 만큼 강력하게 일어나 새로운 법, 신앙, 종교를 세웠습니다."

바브교 운동은 19세기 이란의 종교 및 사회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드 벨라이그는 이슬람 세계의 계몽주의 시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1840년대에 시작된 바브교 운동은 19세기 중반 이란에서 종교 간 평화, 남녀 간의 사회적 평등, 혁명적인 반군주주의를 장려하면서 사회 진보의 중요한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세속주의, 국제주의, 전쟁 거부를 바탕으로 한 현대성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이 비전 덕분에 이 운동은 현재까지 생존하여 5백만 명의 영혼을 가진 바하이교라는 형태로 소규모 공동체에 존재하며, 중동의 현대화에 대한 모든 서사에 포함될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6. 계승

바브의 사당, 하이파, 이스라엘


당시 바비 공동체의 주요 인물이었던 바하올라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미 사형 영장이 발부된 상태였기에(왕의 사망 직전 모하마드 샤 카자르에 의해 취소됨) 그의 안전을 위해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 심지어 바브가 바하올라에게 보낸 편지조차 그의 남동생 미르자 야흐야의 이름으로 전달될 정도였다. 특히 아미르 카비르는 바하올라에게 큰 위협이었는데, 만약 그가 바하올라의 실제 역할을 알았다면 처형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하올라와 미르자 야흐야, 그리고 바브의 비서 중 한 명은 바하올라를 보호하기 위한 합의에 이르렀다. 이 합의에 따라, 아직 어리고 주목받지 않던 미르자 야흐야가 바비 공동체의 명목상 지도자로 내세워지고 안전하게 숨겨지기로 했다. 이는 바하올라가 주요 인물로서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바브는 미르자 야흐야에게 명목상의 리더십을 부여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는 바브가 '신이 나타내실 분'으로 언급한, 곧 도래할 약속된 인물의 출현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당시 미르자 야흐야는 십 대에 불과했고 바비 운동에서 지도력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형인 바하올라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바브가 감옥에 갇혀 추종자들과의 소통이 제한된 상황에서, 18세에 불과했던 미르자 야흐야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보였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기도 한다.

이전의 종교들과 달리, 바비 신앙의 핵심 경전인 바얀은 바브 자신보다 더 위대한 메시아적 인물, 즉 바브가 "신이 나타내실 분"이라고 칭한 존재에 대한 논의로 가득 차 있다. 바브는 자신의 계시와 율법을 항상 이 약속된 인물의 맥락 속에서 설명했다.[1] 바브는 자신의 사명의 본질과 목적이 바로 이 인물의 도래를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2] 그는 이 메시아적 인물을 모든 신성한 속성의 근원으로 묘사하며, 그의 명령은 곧 신의 명령과 같다고 선언했다. 바브는 추종자들에게 외부적인 요인이 아닌, 약속된 자의 고유한 실체, 업적, 속성을 통해 그를 스스로 찾고 인식하라고 촉구했다.[5] 심지어 과거 종교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경전을 인용하며 다음 예언자를 부정했던 것처럼, 바브 자신의 가르침을 근거로 약속된 자를 거부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5] 또한 바브는 약속된 자의 출현이 임박했음을 알리며, 그 시기를 9년 또는 19년 후로 언급했다.[6]

1863년, 바브가 자신의 사명을 선언한 지 19년이 되던 해, 바하올라이라크에서 동료들에게, 그리고 이후 1866년 에디르네에서 더욱 공개적으로 자신이 바로 바브가 예언한 '신이 나타내실 분'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바비 공동체의 대다수는 바하올라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이들은 이후 바하이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바하올라를 인정하지 않은 소수의 바비들은 미르자 야흐야를 지도자로 따랐으며, 그는 1912년 사망할 때까지 이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아잘리 또는 아잘리 바비로 불리게 되었다. 아잘리의 계승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바하이 측 자료에 따르면, 미르자 야흐야가 바비 공동체를 감독하기 위해 임명했던 18명의 "증인" 중 11명과 그의 아들들 다수가 바하이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미르자 야흐야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하디 다울라트-아바디는 이후 바브와 미르자 야흐야에 대한 신앙을 공개적으로 철회했다. 오늘날 바하이 신앙은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신자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아잘리의 수는 이란 내에서 약 1,000명 정도로 추정되며, 조직적인 활동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참조

[1] Harvnb
[2] Harvnb
[3] Harvnb
[4] Harvnb
[5] Harvnb
[6] Harvnb
[7] 자료집 바하이교 자료집, 4장 처형당한 바브 http://reference.bah[...]
[8] 서적 Bāb Koninklijke Brill NV
[9] 서적 The Báb: The Herald of the Day of Days George Ronald
[10] 간행물 Bāb, Sayyed `Ali Mohammad Sirazi
[11] 기타 quoted in Amanat, Abbas (1989). Resurrection and Renewal: The making of the Babi Movement in Iran, 1844-1850 Cornell University Press
[12] 문서 Khadijih Bagum - Wife of the Bab
[13] 간행물 Bāb, Sayyed `Ali Mohammad Sirazi
[14] 서적 Resurgence of Apocalyptic in Modern Islam Continuum
[15] 기타 Resurrection and Renewal
[16] 서적 Báb Oneworld Publications
[17] 서적 Gate of the Heart Wilfrid Laurier University Press
[18] 서적 The Revelation of Bahá'u'lláh, Volume 1 George Ron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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