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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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1645년부터 1676년까지 러시아 차르로 재위했다. 그는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보리스 모로조프의 영향 아래에서 서구 사상에 개방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는 중앙 집권화를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나, 농노제 강화, 빈번한 전쟁, 종교 분열 등의 문제도 발생했다. 알렉세이는 폴란드, 스웨덴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러시아 정교회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종교 개혁은 분열을 초래했다. 그는 긍정적인 평가와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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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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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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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칭호 | 전 러시아의 차르 |
재위 기간 | 1645년 7월 12일 – 1676년 2월 8일 |
대관식 | 1645년 9월 28일 |
이전 통치자 | 미하일 |
다음 통치자 | 표도르 3세 |
전체 이름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
왕조 | 로마노프 가 |
아버지 | 미하일 로마노프 |
어머니 | 예브도키야 스트레시네바 |
출생일 | 1629년 3월 29일 |
출생 장소 | 모스크바, 러시아 |
사망일 | 1676년 2월 8일 |
사망 장소 | 모스크바, 러시아 |
매장지 | 대천사 성당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러시아어 표기 |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
배우자 | |
배우자 1 | 마리야 일리니치나 밀로슬라프스카야 (1648년 결혼, 1669년 사망) |
배우자 2 | 나탈리야 키릴로브나 나리시킨나 (1671년 결혼) |
자녀 | |
자녀 목록 |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예브도키야 알렉세예브나 마르파 알렉세예브나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마리야 알렉세예브나 표도르 3세 페오도시야 알렉세예브나 시메온 알렉세예비치 이반 5세 표트르 1세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 |
2. 어린 시절과 즉위
알렉세이는 1629년 3월 29일(율리우스력 3월 19일)[2] 모스크바에서 차르 미하일 1세와 에우독시아 스트레시네바 사이에서 태어났다.[4]
1645년 7월 12일, 아버지 미하일 1세가 사망하자 알렉세이는 16세의 나이로 차르에 즉위했다.[4][19] 즉위 초기에는 그의 스승이었던 보리스 모로조프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섭정을 펼쳤다. 모로조프는 서구 사상에 개방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6][19]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 내부적으로는 군사, 정치, 사회, 경제, 종교 등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변화와 사건들이 발생했다.
1645년 7월 12일, 아버지 미하일 1세가 사망하자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5] 같은 해 8월에는 어머니 에우독시아마저 세상을 떠났다. 알렉세이는 세르기예프 포사드 순례 후 9월 28일 모스크바의 성모 승천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5] 어린 차르의 교육은 서구 사상에 개방적이었던 보야르 보리스 모로조프가 맡았으며,[6][19] 알렉세이는 즉위 초기에 모로조프에게 국정 운영의 상당 부분을 의존했다.
모로조프는 외교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휴전을 확보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직접적인 분쟁을 피하는 평화 정책을 추구했다.[6][19] 국내에서는 외국 상인들의 특권을 제한하고 불필요하며 비용이 많이 드는 궁정 직책을 폐지하려 했다.[6][19] 1648년 1월 17일, 모로조프는 차르와 일리야 다닐로비치 밀로슬라브스키의 딸 마리아 밀로슬라프스카야의 결혼을 주선했으며, 10일 뒤 자신도 마리아의 여동생 안나와 결혼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했다.[6][19]
그러나 모로조프의 개혁, 특히 세금 부담을 크게 늘린 조치[3]는 민중의 거센 반발을 샀다. 그는 부패하고 이기적인 귀족으로 여겨졌으며, 심지어 마법이나 마녀사냥과 연관되었다는 비난까지 받았다.[9][20] 결국 1648년 5월, 모스크바 시민들은 소금 폭동을 일으켜 모로조프 파벌에 대항했다.[9][20] 젊은 차르 알렉세이는 민중의 요구에 따라 모로조프를 해임하고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으로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로조프는 4개월 뒤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권력 회복을 시도했다.[9][20] 이러한 즉위 초기의 혼란과 민중 봉기는 1649년 새로운 법전인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에'''(Соборное уложение|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ru)가 제정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2]
3. 초기 통치 (모로조프 섭정)
모로조프는 외교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의 휴전을 유지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는 평화 정책을 추진했다.[6][19] 국내에서는 외국 상인들의 특권을 제한하고 불필요하거나 비용이 많이 드는 관청을 폐지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6][19]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세금 부담을 크게 늘리려 하여 대중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3]
1648년 1월 17일, 모로조프는 알렉세이 차르와 마리아 밀로슬라프스카야의 결혼을 주선했고, 열흘 뒤 자신도 마리아의 여동생인 안나 밀로슬라프스카야와 결혼하며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6][19]
하지만 모로조프는 백성들에게 부패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귀족으로 인식되었으며, 심지어 마법이나 주술을 사용한다는 비난까지 받았다.[9][20] 결국 1648년 5월, 모스크바 시민들은 소금 폭동을 일으켜 모로조프와 그의 세력에 맞섰다. 젊은 차르 알렉세이는 민중의 요구에 밀려 모로조프를 해임하고 키릴로-벨로제르스키 수도원으로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9][20] 이 사건은 모로조프의 섭정 시대를 끝내고 알렉세이가 직접 통치하는 시대를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비록 모로조프는 4개월 뒤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돌아와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했지만,[9][20] 그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소금 폭동과 같은 민중 봉기로 표출된 사회적 불만은 이후 1649년 알렉세이 차르가 새로운 법전인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에'''(Соборное уложение|소보르노예 울로제니에ru)를 공포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2]
4. 국내 정책
1648년, 알렉세이는 부친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군대 개혁에 착수하여 라이타, 보병, 드라군, 후사르 등 서구식 신식 연대(New Order Regiments)를 대량으로 창설했다.[7] 이는 30년 전쟁 종료 후 유럽에서 발생한 다수의 군사 전문가들을 고용함으로써 가능했다.[8] 이 신식 연대들은 이후 러시아 군대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적으로는 귀족 회의와 젬스키 소보르(전국 회의)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차르 중심의 전제정치와 관료제가 강화되었다. 1649년 제정된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 법전은 도시민과 농민의 이동을 금지하여 농노제를 법적으로 완성시켰으며, 러시아 정교회의 토지 소유 제한 등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 집권 강화와 사회 통제,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경제난은 민중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알렉세이 치세에는 1648년 소금 폭동, 1650년 프스코프 및 노브고로드 반란, 1662년 구리 폭동, 1669년-1671년 스테판 라진의 난 등 대규모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9] 특히 구리 동전 대량 발행과 같은 경제 정책 실패는 민중의 불만을 가중시켰다.[9]
종교적으로는 1653년부터 총대주교 니콘이 추진한 교회 의례 개혁이 극심한 반발을 낳았다. 결국 1666년 모스크바 교회 회의에서 니콘은 파면되고 개혁 반대파는 파문당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는 공식 교회와 구교도파(고의식파)로 분열되었다.[21]
4. 1. 중앙 집권 강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ru) 치세에는 러시아의 국가 및 사회 체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귀족 회의와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 전국 회의)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해지고, 관료의 보좌를 받은 차르(Царь)가 직접 전제정치를 행하게 되었다. 중앙 관청이 잇달아 신설되면서 관료제에 의한 국정 운영이 가능해졌고, 알렉세이는 기존 대귀족 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정치를 추진했다. 대신 아르타몬 마트베예프(Артамон Матвеев)와 아파나시 오르딘나시초킨(Афанасий Ордин-Нащокин)과 같은 신흥 세력 출신의 측근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젬스키 소보르는 1649년 이후 거의 소집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방 대표인 중소 귀족들이 중앙 정부의 군대 등 여러 기관에 편입되면서 지역적 자치 의식이 약화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치세 초기에는 측근이자 의형제인 보리스 모로조프(Борис Морозов) 중심의 고문단이 정치를 주도했으나, 1648년 소금 폭동으로 이들이 축출되면서 알렉세이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1649년 소집된 전국 회의에서는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Соборное уложение, 회의 법전)가 제정되었다. 이 법전은 도시민과 농민의 이동 자유를 제한하며 농노제를 법적으로 완성시켰다. 또한, 대귀족이나 고위 성직자, 수도원이 면세 특권을 이용해 상인을 보호하는 행위도 금지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새로운 토지 소유는 대폭 제한되었고, 정부가 교회 토지를 감독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수도원청이 설치되었다.
중앙 정부의 통제는 변방 지역까지 강화되었다. 1660년대 후반, 돈 코사크(донские казаки)와 도망 농민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인 스테판 라진의 난(восстание Степана Разина)이 일어났다. 스테판 라진(Степан Разин)이 이끄는 반란군은 처음 카스피해 북쪽 해안을 장악했으나, 모스크바 정부와 적대 관계가 되면서 러시아 남동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반란은 1671년 코사크 내부 분열로 진압되었고, 이를 계기로 코사크의 자치권은 더욱 약화되었다.
4. 2. 법전 편찬과 농노제 강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치세 초기에는 그의 측근이자 의형제인 보리스 모로조프(Борис Морозов)를 중심으로 한 고문단이 정치를 주도했다. 그러나 1648년 소금 폭동으로 인해 모로조프 등 고문단이 실각하면서 알렉세이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친정 시작 후, 1649년 젬스키 소보르(Земский собор, 전국 회의)가 소집되어 새로운 법전인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 Соборное уложение|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ru, 회의 법전)가 제정되었다. 이 법전은 러시아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도시민과 농민의 이동 자유를 법적으로 금지하여 농노제를 완성시킨 것이다. 이는 농민들을 토지에 묶어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소보르노예 울로제니예는 대귀족이나 고위 성직자, 수도원 등이 면세 특권을 이용해 상인을 보호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새로운 토지 소유 역시 크게 제한되었으며, 정부가 교회 토지를 감독하는 제도가 마련되고 이를 위한 수도원청이 설치되었다. 이는 국가의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이러한 조치들은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젬스키 소보르는 1649년 이후 거의 소집되지 않게 되었다. 변방 지역에 대한 중앙 정부의 간섭도 강화되었는데, 특히 1660년대 후반 돈 코사크(донские казаки)와 도망 농민들이 일으킨 스테판 라진의 난 이후 국가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4. 3. 경제 개혁과 반란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치세 동안 러시아 전역에서는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치세 초기에는 측근이자 의형제인 보리스 모로조프를 중심으로 한 고문단이 정치를 주도했으나, 1648년 소금 폭동으로 인해 그들이 실각하고 알렉세이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소금 폭동은 소금세 도입 등 무리한 조세 개혁에 대한 모스크바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다.[9]
소금 폭동을 진압한 이후에도 반란은 계속되었다. 1650년에는 프스코프와 노브고로드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알렉세이는 노브고로드의 반란은 신속하게 진압했지만, 프스코프는 쉽게 진압하지 못하고 결국 항복의 대가로 사면을 약속해야 했다. 당시 총대주교였던 니콘은 노브고로드 반란 진압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 1651년 차르의 수석 장관이 되었다.[9]
1654년부터 시작된 폴란드 및 스웨덴과의 오랜 전쟁은 러시아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 정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알렉세이 정부는 1654년 대량의 구리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화폐 가치의 급격한 하락, 즉 루블화의 평가절하를 불러왔고 심각한 금융 위기로 이어졌다. 1656년에는 기준 통화를 은화에서 동전으로 바꾸려는 시도 과정에서 정부 고위 관리들의 부패가 드러나기도 했다. 결국 1662년, 경제난과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분노한 모스크바 주민들이 구리 폭동을 일으켰다. 정부는 폭동 참가자들의 요구대로 은화로의 환원에 응했지만, 알렉세이는 군대를 동원해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했다.[9]
1669년에는 러시아 남부 돈강 유역에서 코사크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불만을 품은 돈 코사크 스테판 라진이 이끌었으며, 그는 러시아의 중요 거점 도시인 아스트라한을 점령하기도 했다. 1670년부터 1671년까지 라진은 볼가강을 따라 여러 도시를 점령하며 세력을 넓혔으나, 1670년 10월 심비르스크 공성전 실패를 기점으로 전세가 기울었다. 결국 라진은 1671년 4월 돈강에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된 후 능지처참이라는 잔혹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다. 스테판 라진의 난은 코사크 내부의 분열로 소멸되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코사크의 자치권은 크게 약화되고 국가의 통제가 강화되었다.[9]
이 외에도 알렉세이 시대에는 여러 경제 관련 개혁이 시도되었다. 징세 효율화를 위해 과세 대상을 경작지 면적 기준에서 가구 단위 기준으로 변경했으며, 외국 상인을 유치하여 경제를 활성화하고자 1652년 수도 모스크바 교외에 외국인 거류지를 설치하고 법적 보호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는 러시아 상인들과 러시아 정교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4. 4. 종교 개혁과 교회 분열
1653년 니콘 총대주교는 러시아 정교회의 관행을 그리스 정교회와 일치시키기 위한 목표로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십자가 성호를 그을 때 기존의 두 손가락 대신 세 손가락을 사용하도록 의무화한 것이었다. 이는 교회 공동체 내에서 상당한 반발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세이 차르는 1658년 니콘 총대주교가 개인적인 모욕을 이유로 직위를 버리고 총대주교 자리가 공석이 될 때까지 그를 지속적으로 지지했다.[11]
1666년 차르는 니콘 총대주교가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 대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는 마카리우스 3세 이븐 알 자임 총대주교와 알렉산드리아의 파이시우스 총대주교도 참석했다. 공의회는 니콘을 공식적으로 파면하고, 교회 개혁에 반대한 모든 이들을 파문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파문된 반대자들은 공식적인 러시아 정교회에서 분리되어 옛 신앙도(고의식파) 운동을 형성하게 되었다.[11]
러시아 전역에서 옛 신앙도들은 가혹한 박해에 직면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옛 신앙도의 지도자였던 아바쿰이 있다.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내와 자녀들이 산 채로 매장되는 것을 보았고, 자신은 유배되었다"고 전해진다.[12] 몇몇 옛 신앙도들은 솔로베츠키 수도원 봉기가 일어난 솔로베츠키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이 수도원은 7년간 포위되었고, 알렉세이 차르가 사망하기 며칠 전인 1676년 1월 22일에 함락되었다.
5. 대외 관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시대의 러시아는 주변국들과 복잡한 대외 관계를 맺으며 영토 확장을 추구했다. 특히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러시아-폴란드 전쟁 (1654년-1667년))은 스몰렌스크와 좌안 우크라이나 등 광대한 영토를 러시아에 편입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세력과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맺어 영향력을 확대했다.
폴란드와의 전쟁 중 스웨덴의 침공(대홍수)을 계기로 스웨덴과도 전쟁(러시아-스웨덴 전쟁 (1656년-1658년))을 벌였으나, 큰 성과 없이 카르디스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서유럽과의 관계에서는 잉글랜드 내전 중 찰스 1세가 처형되자 이에 반발하여 잉글랜드와의 외교 및 통상 관계를 단절하고 왕당파를 지원하는 등 군주정의 원칙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남쪽에서는 사파비 제국과 북카프카스 지역에서 영토 문제로 잠시 군사적 충돌(러시아-페르시아 전쟁 (1651년-1653년))이 있었으나, 외교적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이러한 대외 활동들은 러시아의 국력을 소모시키기도 했지만, 동유럽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이후 제국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5. 1. 폴란드와의 전쟁 (1654년-1667년)
1653년 흐멜니츠키 봉기로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혼란에 빠지자, 알렉세이 차르는 이 기회를 이용해 고대 키예프 루스의 영토를 병합하고자 했다. 그해 10월 1일, 모스크바에서 전국 의회(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하여 전쟁을 승인하고 필요한 준비를 논의했다. 1654년 4월에는 1652년 총대주교로 선출된 니콘이 출정하는 군대를 축복했다.[6]1654년에 시작된 전쟁은 러시아의 연이은 승리로 이어졌으며, 중요한 요새 도시인 스몰렌스크를 포함한 여러 지역이 러시아의 수중에 들어왔다.[6] 우크라이나의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폴란드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알렉세이 차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 결과 페레야슬라프 조약이 체결되어 좌안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수장국이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55년 여름,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브가 갑작스럽게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폴란드는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졌는데, 이 시기를 대홍수라고 부른다. 러시아는 별다른 저항 없이 스웨덴군이 점령하지 않은 폴란드 영토 대부분을 신속하게 차지했다. 폴란드가 협상을 제안했을 때, 알렉세이는 최소한의 요구 조건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 전체를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스웨덴은 곧 전리품 분배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게 되었고, 1656년 5월 말,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웨덴의 다른 적들의 부추김을 받은 알렉세이는 스웨덴에 전쟁을 선포했다.[6]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전쟁(러시아-스웨덴 전쟁 (1656년-1658년))에서 큰 기대를 걸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도르파트를 점령했지만, 리가 공략에는 실패하며 많은 병력을 잃었다. 한편, 폴란드는 점차 국력을 회복하여 스웨덴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러시아는 두 나라와 동시에 전쟁을 치를 수 없었기에 스웨덴과의 전쟁을 먼저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1661년 7월 2일 체결된 카르디스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스웨덴으로부터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반환해야 했다.[6]
폴란드와의 전쟁은 이후 6년 동안 더 지속되었고, 1667년 2월 11일 안드루소보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명목상 13년간의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이 협정은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협정에 따라 폴라츠크와 폴란드령 리보니아는 폴란드에 반환되었지만, 중요한 도시인 스몰렌스크와 키예프, 그리고 드네프르강 동쪽 연안 전체는 러시아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6] 이 휴전 협정은 당시 러시아의 외교관이었던 아파나시 오르딘-나시초킨의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니콘 총대주교가 실각한 후 1670년까지 차르의 최고 장관 역할을 하다가 아르타몬 마트베예프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6]
장기간의 전쟁은 러시아의 국가 재정을 압박하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켰지만, 결과적으로 헤트만 국가를 분열시키고 폴란드의 곡창 지대 일부를 획득함으로써 러시아가 동유럽에서 패권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동유럽 인문주의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키예프를 얻게 되면서 러시아인들이 서구 문화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발트해 연안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던 경험은 이후 러시아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5. 2. 스웨덴과의 전쟁 (1656년-1658년)
1655년 여름,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브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대홍수로 알려진 혼란이 발생했다. 러시아는 이 기회를 틈타 스웨덴군이 점령하지 않은 폴란드 영토 대부분을 빠르게 장악했다. 그러나 알렉세이 차르와 스웨덴 국왕은 곧 전리품 분배를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 황제 페르디난트 3세를 비롯한 스웨덴의 다른 적들의 부추김도 더해져, 알렉세이는 1656년 5월 말 스웨덴에 전쟁을 선포했다.[6]러시아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큰 성과를 기대했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도르파트(Dorpat)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리가(Riga) 공성전에서는 많은 병력을 잃고 실패했다.[6]
한편, 폴란드는 점차 국력을 회복하여 스웨덴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러시아로서는 폴란드와 스웨덴 양쪽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차르는 먼저 스웨덴과의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1658년 말 스웨덴과 휴전하였고, 1661년 7월 2일 카르디스 조약(Peace of Kardis)을 체결하여 전쟁 중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스웨덴에 반환했다.[6] 이로써 스웨덴과의 전쟁은 별다른 소득 없이 마무리되었다.
5. 3. 잉글랜드 내전
1649년 올리버 크롬웰 휘하의 의회파가 잉글랜드의 찰스 1세를 처형하자, 알렉세이는 이에 분노하여 잉글랜드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모스크바에 왕당파 망명자들을 받아들였다. 또한 모든 잉글랜드 상인, 특히 모스크바 회사 회원들의 러시아 내 활동을 금지했다. 더불어 '비통한 미망인'으로 불린 찰스 1세의 부인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10]5. 4. 사파비 제국과의 전쟁 (1651년-1653년)
1651년, 사파비 왕조 군대가 북카프카스에 있는 러시아 요새들을 공격했다. 이 충돌의 주요 원인은 코이 수 강에서의 러시아 주둔군 확장과 테레크강 이란 쪽에 러시아가 새로운 요새들을 건설한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사파비 군대의 성공적인 공격으로 러시아 요새는 파괴되었고 주둔군은 철수해야 했다.1653년, 알렉세이는 처음에는 자포리자 코자크를 파병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사파비 제국에 사절단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1653년 8월, 이반 로바노프-로스토프 공과 이반 코미닌 관리가 아스트라한을 떠나 이스파한으로 향했다. 사파비 왕조의 샤 압바스 2세는 이 분쟁이 자신의 동의 없이 시작되었다고 밝히며, 분쟁을 마무리하는 것에 동의했다.
6. 후계 문제와 사망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밀로슬라브스카야와 21년간 결혼 생활을 하며 13명의 자녀(아들 5명, 딸 8명)를 두었다. 마리아는 13번째 아이를 낳고 몇 주 후에 사망했다. 그녀가 낳은 아들 중 표도르와 이반이 살아남았으나, 왕위 계승자였던 알렉세이를 포함한 다른 아들들은 일찍 사망했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 1648–1649 | 황태자 (유아기 사망) |
예브도키아 알렉세예브나 | 1650–1712 | |
마르파 알렉세예브나 | 1652–1707 | |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 1654–1670 | 황태자 (15세 미혼 사망) |
안나 알렉세예브나 | 1655–1659 | 유아기 사망 |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 1657–1704 | 러시아 섭정 (1682–1689), 미혼[16] |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 1658–1718 | |
마리아 알렉세예브나 | 1660–1723 | |
표도르 3세 | 1661–1682 | 러시아 차르 (1676–1682), 자녀 없음[17] |
표도시아 알렉세예브나 | 1662–1713 | |
시메온 알렉세예비치 | 1665–1669 | 유아기 사망 |
이반 5세 | 1666–1696 | 표트르 1세와 공동 러시아 차르 (1682–1696), 안나 여제 부친[18] |
예브도키아 알렉세예브나 | 1669 | 유아기 사망 |
알렉세이는 1671년 2월 1일 나탈리아 나르이시키나와 재혼했다. 나탈리아는 스코틀랜드 출신 메리 해밀턴을 아내로 둔 아르타몬 마트베예프의 집에서 자랐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세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 | 생몰년 | 비고 |
---|---|---|
표트르 1세 | 1672–1725 | 표트르 대제, 러시아 차르(1682-1721) 및 초대 러시아 황제(1721-1725) |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 | 1673–1716 | |
표도라 알렉세예브나 | 1674–1678 | 유아기 사망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는 1676년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첫 번째 부인 마리아에게서 얻은 아들 표도르 3세가 러시아 차르로 즉위했다.[17] 표도르 3세 사후에는 이복동생 표트르 1세와 공동 차르가 된 이반 5세, 그리고 이반 5세의 누이이자 섭정이었던 소피아 알렉세예브나[16][18] 등으로 인해 복잡한 후계 구도가 이어졌다.
7. 평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에 따르면 차르 알렉세이의 가장 큰 공적은 그가 피오도르 르티셰프(Fyodor Rtishchev), 오르딘, 마트베예프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많이 발굴하여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그는 뛰어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었고(그렇지 않았다면 니콘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본성적으로, 비록 소극적이었지만, 진보적이었고(그렇지 않았다면 위대한 개혁파 보이아르 마트베예프를 격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텐카 라진의 끔찍한 반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은 당연히 평온했다.[6]
알렉세이의 편지는 1856년 표트르 바르테네프에 의해 처음 출판되었다. 그의 편지들은 D. S. 미르스키가 평가한 바와 같이 러시아 문학 역사에서 그의 위치를 확보해 주었다.
그의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몇몇 개인적인 편지와 그의 매사냥꾼들에게 보낸 지시뿐이다. 그러나 세르게이 플라토노프가 그를 러시아 군주 중 가장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선포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가장 조용한"(most quiet) 또는 "가장 평화로운"(most peaceful)이라는 뜻의 Тишайший|티샤이시ru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그의 행동 방식을 통해 이 별명을 얻었는데, 그는 친절하고 우호적이었지만 악기 소리는 그를 짜증나게 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특정 측면, 가장 순수하게 영적인 측면이 아니라 미학적이고 세속적인 측면이 그에게서 가장 완벽한 표현을 발견했다. 알렉세이 성격의 본질은 낙관적인 기독교 신앙, 교회의 전통과 의례에 대한 깊지만 광신적인 헌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소망, 그리고 모든 것에서 조용하고 온화한 즐거움을 얻는 뛰어난 능력에 나타나는 특정한 영적인 쾌락주의이다.[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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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 г. Именной указ. "О титуле Царском и о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й печат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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ピョートル前夜のロシア
彩流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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