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뤼사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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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드뤼사이 왕국은 기원전 5세기경 트라키아 부족들을 통합하여 테레스 1세가 건국한 최초의 트라키아 국가이다. 시탈케스 시대에 영토를 확장했으나, 4세기 초 내분으로 분열되었고, 이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정복당했다.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를 거치며 여러 정치적 변동을 겪었고, 결국 로마 제국에 흡수되었다. 오드뤼사이 왕국은 군사, 정치, 사회적으로 주변 국가와 교류하며 헬레니즘 문화를 수용했으며,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당시의 문화와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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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뤼사이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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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공식 명칭 | 오드뤼사이 왕국 |
일반 명칭 | 트라키아 |
원어 명칭 (그리스어) | Βασίλειον Ὀδρυσῶν |
원어 명칭 (라틴어) | Regnum Odrysium |
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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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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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
성립 | 기원전 480년경/470년경 |
주요 사건 | 기원전 480년경: 건국 기원전 340년: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에 정복됨 기원전 330년경: 세우테스 3세의 반란 기원전 250년경: 세우토폴리스 파괴 기원전 30년경: 사파에아인에 의한 오드뤼시아 심장부 정복 |
멸망 | 46년, 로마 제국에 정복 |
국가 | |
위치 | 불가리아 그리스 튀르키예 루마니아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
주요 수도 | 스타로셀 세우토폴리스 (기원전 330년경–250년경) 비제 카빌레 |
언어 | |
공용어 | 트라키아어 고대 그리스어 (행정 및 무역에서 사용) 트라키아-일리리아어 |
종교 | |
주요 종교 | 트라키아 다신교 |
면적 | |
면적 | 150,000 제곱킬로미터 |
이전 | |
이전 국가 | 선사 시대 발칸 반도 |
이전 국가 | 스키드라(아케메네스 제국) |
이후 | |
이후 국가 | 마케도니아 왕국 |
이후 국가 | 게타이 |
이후 국가 | 틸리스 |
이후 국가 | 사파에아 왕국 |
2. 역사
기원전 6세기 말, 트라키아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다리우스 1세에게 정복되었다. 이오니아 반란으로 잠시 독립했으나, 기원전 492년에 마르도니우스에 의해 다시 복속되었다. 아케메네스 제국 치하에서 트라키아는 스크드라 주에 편입되었지만, 스키타이인과 그리스인의 침략을 빈번하게 받았다.
기원전 470년경, 테레스 1세가 여러 트라키아 부족을 통합하여 오드뤼사이 왕국을 건국했다. 시탈케스 (재위: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21년) 시대에 왕국은 크게 확장되어, 동쪽으로는 흑해, 북쪽으로는 도나우강, 남서쪽으로는 스트루마 강, 에게해까지 이르렀다. 이는 현재의 불가리아, 루마니아령 북 도브루자, 터키령 동 트라키아, 그리스령 서 트라키아에 해당한다. 그러나 흑해와 에게해 해안선은 대부분 그리스 도시들이 지배했다.
역사학자 Z. H. 아치볼드는 오드뤼사이 왕국이 발칸반도 동부에 부족 체제를 넘어선 최초의 국가를 건설했지만, 왕권이 트라키아 전역에 미치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오드뤼사이 왕국은 느슨한 부족 연합체였으며, 왕권은 불안정했다. 기원전 5세기 말부터 기원전 4세기 초, 왕국은 내분으로 세 개로 분열되었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5세기 말 트라키아의 오드뤼사이족에서 왕가가 나타나 도나우강에서 에게해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다고 기록했다. 이 왕가는 1세기 초까지 존속했지만,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었다.
시탈케스는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도로망 정비와 무역 촉진을 통해 강력한 군대를 조직했다. 기원전 429년,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를 침공했으나, 보급 문제로 철수했다. 5세기 오드뤼사이 왕족은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했고, 행정과 비문에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
오드뤼사이 왕국이 분열되자,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가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대부분을 정복했다. 기원전 352년, 두 개의 오드뤼사이 왕국이 마케도니아의 속국이 되었고, 기원전 342년부터 341년까지 필리포스 2세는 오드뤼사이 왕국의 중심부를 정복했다. 세우테스 3세 (재위: 기원전 341년 - 기원전 300년)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피하고 리시마코스에게 느슨하게 종속되었다. 세우테스 3세는 세우토폴리스를 건설했으나, 기원전 281년 켈트족의 침입을 받았다. 기원전 212년, 오드뤼사이 왕 프레우라투스는 켈트족의 틸리스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2세기경, 오드뤼사이 왕국은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기원전 146년 로마에 굴복했다. 기원전 100년 트라키아 왕국이 부활했지만, 독립 여부는 불분명하다. 기원전 55년, 사파이오이인의 왕국이 발흥하여 기원전 30년까지 오드뤼사이계 왕국을 통합했지만, 곧 로마에 종속되었다. 기원전 11년, 로에메탈케스 1세는 아우구스투스의 동맹자가 되어 트라키아의 로마화를 추진했다. 46년, 로에메탈케스 3세가 암살되면서 트라키아는 로마 제국의 트라키아 속주가 되었고, 오드뤼사이 왕국은 멸망했다.
2. 1. 초기 역사와 페르시아의 지배
트라키아인들은 기원전 2천년기에 이미 정착했으며,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도 등장했다.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에는 트라키아 해안의 여러 지역에 고대 그리스인 식민지인들이 정착하여 타소스, 비잔티온, 오데소스와 같은 도시를 건설했다.[30] 기원전 6세기 말, 아테네 정착민들이 갈리폴리 반도 북쪽에 거주하는 "트라키아의 왕"(오드뤼사이 왕의 가능한 선조?)과 교류했다는 기록이 있다.[31]
기원전 513년경,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 군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넜다. 다리우스 1세 왕의 목표는 흑해 북부 해안에 있는 스키타이인에 대한 징벌 원정이었다. 대부분의 동부 트라키아 부족은 평화적으로 항복했지만, 게타이족은 패배했다. 메가바주스와 마르도니우스 장군, 그리고 크세르크세스 1세 왕의 지휘 하에 더 많은 원정이 이어졌지만, 이들은 에게 해 해안을 확보하는 데에 그쳤다.[32]
아케메네스 왕조가 트라키아에 사트라피 (지방 행정 구역)를 설립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34] 정복된 지역이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중요한 행정 중심지에 대한 증거는 없다. 대신, 페르시아의 권위는 주로 도리스코스와 에이온과 같은 몇 개의 수비 요새를 통해 행사되었다.[35] 기원전 480-79년 그리스 침공 실패 후, 유럽에서의 페르시아 발판은 무너졌다. 기원전 450년경에는 트라키아를 포함한 유럽에서의 페르시아 권위가 완전히 사라졌다.[36]
2. 2. 오드뤼사이 왕국의 성립과 발전
페르시아의 트라키아 점령은 짧았지만, 트라키아인들 사이의 무역과 최초의 국가 형성을 자극했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00년경 트라키아 동전 주조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다양한 초기 부족 왕국이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지표일 수 있다. 비록 오드뤼사이 왕국의 기원이 이 시기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오드뤼사이의 이름은 주화 증거에서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25] 오드뤼사이인들은 그리스에서의 페르시아의 실패 이후 역사에 등장했으며, 헤로도토스에 의해 언급되었지만, 더 자세한 내용은 없다.[26] 오드뤼사이인들은 헤브로스 강과 그 지류인 톤조스 강과 아르다 강 계곡을 핵심 영토로 삼았다.[27] 다른 트라키아 정치체들과 마찬가지로, 오드뤼사이 부족 왕국은 페르시아의 퇴각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28]오드뤼사이 왕국의 첫 번째 왕은 확장주의자인 테레스 1세였다. 투키디데스는 그를 오드뤼사이의 첫 번째 왕이라고 칭하며, 기원전 5세기 후반에 테레스에 대해 "오드뤼사이의 첫 번째 강력한 왕"이었고 "많은 트라키아 부족들이 여전히 독립적이지만, 트라키아의 상당 부분을 확장하여 위대한 오드뤼사이 제국을 처음으로 세운 인물"이라고 기록했다.[29] 독립 부족들은 에게 해 연안 일부에 거주하는 트라키아인[30]과 로도피 산맥의 일부, 그리고 강력한[31] 트리발리족이 하이무스 산맥 주변에 거주했다.[32]
테레스는 기원전 480년 직후 중앙 트라키아를 지배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특권적인 전사 귀족 계급을 기반으로 왕국을 건설했으며, 그와 그의 아들 시탈케스는 북쪽의 다뉴브 강에서 에게 해의 아브데라 외곽까지 왕국을 확장했다. 그는 또한 동부 트라키아로 확장했지만, 티노이족에게 패배했다. 북동쪽에서는 테레스의 딸과 결혼한 왕 아리아페이테스 치하의 스키타이 왕국과 동맹을 맺어 왕국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33] 결론적으로, 오드뤼사이인들은 트라키아 부족 체제를 대체하고 동부 발칸 반도에 큰 국가를 세운 최초의 인물들이었다.[34]

5세기 중반경, 시탈케스가 아직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았을 때,[35] 오드뤼사이인들은 스키타이 내전에 개입하여 폐위된 왕 스킬라스 측에 서서 아리아페이테스와 테레스의 여동생의 아들인 옥타마사다스에 대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군대가 다뉴브 강에서 만났을 때, 시탈케스는 단순히 스킬라스를 (현장에서 살해됨) 스키타이인들 사이에 거주하는 그의 이름 없는 형제를 위해 넘겨주기로 동의했다.[36]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이 보스포루스 왕국에서 일어났을 수 있는데, 스파르토코스 1세라는 트라키아인이 기원전 438년경에 권력을 잡았다. 그가 오드뤼사이 혈통이었고 그의 정권 장악이 오드뤼사이 왕가에 의해 조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추측으로 남아있다.[37]

고고학적 증거는 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 지역 및 지역 기원의 귀중한 유물을 축적한 새롭고 강력한 엘리트가 등장했음을 확인시켜준다.[38] 페르시아의 철수 이후 매장 관습이 변화했고 중앙 트라키아[39]에서 전돌 조적과 때로는 석관이 있는 묘소 형태로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 매장이 나타났다.[40] 기원전 5세기 후반의 루에츠 묘소에는 벽화의 흔적도 있었다.[41] 이 새로운 엘리트 묘소 중 가장 초기의 묘소는 두반리의 묘지에서 발견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묘소는 기원전 5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42] 그들의 유물은 동시대 트라키아뿐만 아니라 지중해 기준에서도 예외적이다.[43] 고고학자 톤코바에 따르면, 그들은 "수많은 고리형 또는 배 모양 귀걸이, 귀걸이 펜던트, 목걸이, 토크, 팔찌, 반지, 펜던트가 달린 체인, 그리고 흉갑으로 구성된 머리와 몸 장식의 훌륭한 세트"를 포함하고 있었다.[44] 대부분의 트라키아 엘리트 묘소는 무기와 금 흉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전사 매장으로 확인되었다. 스베티차(기원전 5세기 후반)와 달라코바(기원전 4세기 초)에서 발견된 두 개의 매장에서도 정교하게 제작된 인상적인 금 장례 마스크가 발견되었다.[45]
헤로도토스나 투키디데스 등 그리스 역사가들은 5세기 말에 트라키아의 오드뤼사이족 중에서 왕가가 나타나, 도나우 강에서 에게해에 이르는 지역의 상당 부분의 사람들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테레스 1세의 아들 시탈케스는 유능한 지휘관으로, 반란을 시도한 여러 부족을 공격하여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했다. 그는 풍요롭고 거대해진 왕국에서 도로망을 정비하고, 무역을 촉진하면서 강력한 군대를 조직했다. 기원전 429년, 시탈케스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46] 트라키아인과 파에오니아인으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에 침공했다. 투키디데스는 그 병력을 15만 명으로 기록했지만, 보급 실패와 겨울의 도래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47] 5세기 시점에서 이미 오드뤼사이의 왕족 일부는 공용어로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점차 행정도 그리스어가 사용되게 되었고, 새로운 트라키아인의 비문은 그리스 알파벳으로 쓰이게 되었다.[48]
2. 3. 왕국의 분열과 마케도니아의 침략
테레스 1세나 시탈케스(재위: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21년) 시대에 왕국의 확장은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말부터 기원전 4세기 초에 걸쳐, 오드뤼사이 왕국은 내분으로 세 개로 분열되었다.92세까지 살았다고 알려진 테레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기원전 431년에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는 아들 시탈케스였다. 시탈케스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트라키아인과 파에오니아인으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에 침공했다. 투키디데스는 그 병력을 15만 명으로 기록했지만, 보급 실패와 겨울의 도래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시탈케스는 424년에 삼촌인 세우테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시탈케스는 서부 헤무스 북쪽에 거주하는 트리발리족과의 전쟁 중 사망했다. 세우테스 1세는 기원전 410년 또는 405년 경에 아마도쿠스 1세(메도코스로도 알려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코티스의 죽음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의 즉위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났으며, 왕국의 쇠퇴의 시작을 알렸다. 오드뤼사이 국가는 세 명의 경쟁 왕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코티스의 아들인 케르세블렙테스는 하부 헤브로스와 톤조스 너머 동쪽 지역을 통치했고, 아마도코스 2세는 마로네이아와 메리차 사이의 중앙 트라키아를 다스렸으며, 베리사데스는 동쪽의 마로네이아에서 서쪽의 스티르몬까지 서쪽 지역을 통제했다.
케르세블렙테스는 세 왕 중 가장 야심 찬 인물이었다. 그는 아테네에 대항하여 헤르소네소스에서 아버지의 전쟁을 계속하는 동시에 오드뤼사이 왕국을 재통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지원을 받은 아마도코스 2세와 베리사데스가 그의 공격에 저항했기 때문에 그의 시도는 실패했다. 기원전 357년에 그는 오드뤼사이 국가의 분열을 확정하는 평화 조약을 수락해야 했다.

기원전 359년, 필리포스 2세는 즉위한 해에 마케도니아의 왕위 찬탈을 막기 위해 "트라키아 왕"(아마도 서부 오드뤼사이 왕국의 왕 베리사데스로 추정)에게 접촉했다. 그는 초기 몇 년 동안은 오드뤼사이 왕국 간의 내분을 자신의 통치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트라키아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베리사데스와 그의 후계자 케트리포리스의 왕국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은 기원전 357/6년에 일어났으며, 이때 그는 암피폴리스와 크레니데스를 정복했다. 케트리포리스는 파이오니아와 일리리아의 왕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필리포스 2세는 그들을 차례로 격파했다.
체르세블렙테스는 오드뤼사이 왕국을 통일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기원전 353/4년에 그는 필리포스와 함께 아마도쿠스 2세의 왕국과 아테네의 트라키아 영토 침공을 논의했고, 약 1년 후 케트리포리스의 왕국을 공격했다. 한편, 아테네는 필리포스와 체르세블렙테스 간의 동맹 가능성을 두려워하여 세스토스를 정복하고 그 주민을 몰살하는 본보기를 보이기로 결정했다. 겁을 먹은 체르세블렙테스는 케르소네소스에 대한 그의 주장을 포기하고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 이는 필리포스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는 아마도쿠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체르세블렙테스를 공격했다. 기원전 351년에 헤라이온 테이코스에 있는 그의 거주지를 포위한 후 그는 트라키아 왕에게 항복을 강요하고 그의 아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 무렵 필리포스는 또한 케트리포리스의 왕국을 폐지하고, 테레스 2세를 지지하며 아마도쿠스 2세를 폐위시켰다.

이 사건 이후 트라키아 전선은 기원전 347년 또는 346년 초까지 평화로웠는데, 이때 아테네인들은 다시 트라키아에서 그들의 존재를 강화하려고 시도했으며, 아마도 체르세블렙테스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마케도니아는 아테네 수비대를 몰아내고 오드뤼사이인을 격파하여 그를 상대로 한 트라코-아테네 동맹을 다시 한번 막았다.
몇 년 후 체르세블렙테스는 테레스 2세와 동맹을 맺고 현재 마케도니아의 보호를 받고 있는 케르소네소스를 침공했다. 그는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게 이오니아 도시들이 체르세블렙테스를 지원하는 것을 중단하도록 요청한 후, 필리포스는 마침내 기원전 342년부터 340년까지 지속될 대규모 캠페인 형태로 내륙 트라키아 정복이라는 그의 가장 야심찬 프로젝트를 시작할 만큼 충분히 자신감을 얻었다. 필리포스는 여러 번의 좌절을 겪었고 심지어 적어도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41년 봄까지 전투는 여전히 격렬하게 벌어졌고 필리포스는 지원군을 불러들여야 했다. 자세한 증거는 부족하지만 그는 마침내 상황을 개선했고 기원전 341년 하반기에서 340년 상반기 사이에 체르세블렙테스와 테레스를 격파했다.
오드뤼사이 왕국이 삼분열되었을 때,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가 트라키아에 침공하여, 그 대부분을 정복했다. 세 나라 중 두 나라는 기원전 352년에 마케도니아의 속국이 되었고, 게다가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42년부터 기원전 341년에 걸쳐 오드뤼사이 왕국의 심장부를 정복하고, 반항적인 왕과 부족을 추방했다.
2. 4. 헬레니즘 시대와 켈트족의 침입
4세기 초, 오드뤼사이 왕국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405년, 아마다쿠스 1세와 세우테스 2세 두 통치자가 나타났는데,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이들 모두를 "트라키아의 왕"이라 칭했지만, 이는 오해일 가능성이 있다.[38] 세우테스 2세는 아마다쿠스 1세를 종주로 여겼다.[38] 아마다쿠스는 시탈케스 왕의 아들이었고, 세우테스 2세는 테레스 왕의 후손인 마이사데스의 아들이었으므로 둘은 먼 친척 관계였다. 비잔티움 서부 배후지에는 테레스라는 자치 오드뤼사이 공작도 있었다.[38]세우테스는 아마다쿠스 궁정에서 성장한 후 동부 트라키아로 보내졌다. 기원전 405년까지 아폴로니아 폰티카에서 스트란자 산맥을 거쳐 북부 프로폰티스 해안 일부까지 영토를 확보했다.[38] 기원전 400년, 크세노폰 휘하의 그리스 용병을 고용하여 테레스 및 다른 반란자들을 제압하고 아마다쿠스의 권위를 재인정받게 했다.[38] 자금 부족으로 용병들은 두 달 만에 떠났다. 세우테스 2세는 결국 아마다쿠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389년, 아테네 장군 트라시불루스가 중재하여 세우테스 2세는 다시 아마다쿠스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다.[38]
인기 있던 아마다쿠스는 기원전 389년 직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후계자 헤브리젤미스는 아테네의 호의를 구했고, 세우테스 2세는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었다.[38] 기원전 386/5년 아테네 비문은 헤브리젤미스가 아테네에 사절단을 보냈음을 확인해주지만, 아테네는 소극적이었다.[38] 세우테스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이피크라테스가 이끄는 용병 군대의 도움으로 영토를 되찾았다. 이피크라테스는 이후 세우테스의 아들인 코티스 1세의 딸과 결혼했다.[38]
코티스 1세는 기원전 383년에 세우테스 2세를 계승했다. 그는 쇠퇴해가는 오드뤼사이 왕국을 강화하고 헬레니즘 세계에서 중요한 정치적 요인으로 만들었다.[38] 그의 통치 초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그와 이피크라테스는 헤브리젤미스의 영토를 정복하여 오드뤼사이 왕국을 통일했다.[38] 기원전 375년에는 트리발리족의 침략으로 왕국의 서부 지역이 황폐해졌다.[38]
코티스는 전략적 요충지인 헤르소네소스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장악하여 아테네의 패권에 도전했다.[38] 아테네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통해 흑해 북부 지역에서 곡물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놓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38] 기원전 367년의 초기 침공은 실패했지만, 기원전 363/2년에 코티스는 여러 아테네 장군들을 격파하며 성공했다.[38] 이로써 헤르소네소스와 헬레스폰토스 해협은 오드뤼사이의 지배하에 놓였으나, 코티스 1세는 기원전 360/59년에 살해당했다.[38]
게타이족은 하에무스 산맥 북동쪽 기슭과 하류 도나우강 및 흑해 사이에 위치한 북부 트라키아 민족으로, 테레스 1세 이후 오드뤼사이 왕국의 일부였다.[46] 게타이족이 언제, 어떻게 독립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도 코티스 1세 치세 또는 기원전 360년 그가 사망한 이후일 것이다.[46] 아기기올, 페레투 또는 보로보와 같은 4세기 후반의 풍부한 장례 보물은 게타이족 엘리트의 부가 증가했음을 보여준다.[46]
4세기 중반에는 1세기 동안 번성할 게타이족 왕국이 존재했다.[46] 게타이족의 수도는 헬리스였으며, 스보리야노보 유적지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46] 게타이족은 도나우강 북쪽 문테니아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으며,[46] 이 지역은 훗날 로마 시대 다키아의 일부가 된다.[46]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게타이족 왕은 코텔라스였으며, 그는 딸 메다를 필리포스 2세에게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다.[46] 이 왕국은 리시마코스와의 두 차례 전쟁과 기원전 280년경의 켈트족 침략을 견뎌냈지만 결국 수십 년 후에 붕괴되었다.[46] 헬리스/스보리야노보는 3세기 중반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46]
2. 5. 로마의 지배와 멸망
필리포스 2세가 오드뤼사이 왕국을 정복하면서 그의 영토는 두 배로 확장되었지만,[39] 내륙 트라키아는 마케도니아의 직접 통치 대신 스트라테고스의 느슨한 지배를 받았다. 신뢰할 만한 지역 트라키아 지배자들은 십일조를 내고 군대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마케도니아를 대신해 통치했다.[47] "트라키아인" 또는 "오드뤼사이인" 군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의 페르시아 정복에 참여했으며, 아마도 오드뤼사이 귀족들이 지휘했을 것이다.[48] 필리포스는 카빌레와 필리포폴리스 등 트라키아에 여러 도시를 건설하여 마케도니아 지배를 용이하게 했다.[49] 하이무스 산맥 남쪽은 대체로 안정적이었지만,[50] 마케도니아는 모든 트라키아 부족을 지배하지는 못했다.[51] 마케도니아의 지배는 불안정했고, 잠재적인 오드뤼사이의 신흥 세력은 불만을 품은 많은 주민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52]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에 부재한 동안 트라키아의 사트라프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게타이족에 대한 실패한 원정으로 국가를 크게 불안정하게 만들었다.[50] 330년대 말이나 320년대 중반, 세우테스 3세로 알려진 인물이 트라키아 반란을 선동했다.[53] 그는 오드리시아인으로 보이며[54] 체르세블렙테스 왕가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의 사회적 배경은 추측으로 남아있다.[55]

알렉산드로스가 323년에 사망한 후, 그의 호위병 중 한 명인 리시마코스가 트라키아의 사트라프로 임명되었다. 그는 도착 직후 세우테스와 대면했는데, 세우테스는 자신의 깃발 아래 많은 트라키아인들을 규합했다.[56] 세우테스의 목표는 독립적인 오드리시아 국가의 부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7] 그와 리시마코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리시마코스는 간신히 승리했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양측은 두 번째 갈등을 준비했지만, 이 사건의 주요 자료인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그 결과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제공하지 않는다.[58]
어쨌든, 양측은 결국 합의에 도달하여 세우테스를 내륙 지역으로, 리시마코스를 에게해와 흑해 연안 지역으로 제한했다.[56] 리시마코스가 세우테스를 예속시켰다는 증거는 없다.[59] 로도페 산맥 북쪽의 트라키아는 리시마코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을 가능성이 높으며,[60] 그는 그 지역의 평정을 돈과 인력의 가치가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59] 313년에 세우테스는 흑해 서쪽 해안의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 도시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리시마코스는 이 동맹을 격파했다. 두 반대 세력 간의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세우테스는 리시마코스의 딸 베레니케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두 사람 사이의 또 다른 대립에 대한 증거는 없다.[61]
세우테스는 헬레니즘 왕국을 세우는 데 열심이었지만 자신의 동전에 왕이라고 표기하는 것을 피했다. 아마도 323년 알렉산드로스 사후, 세우테스는 현대 카잔락 근처 톤조스 강에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세우토폴리스라고 명명했다.[56] 이 도시는 주로 동시대 마케도니아 재단을 기반으로 했으며 강한 그리스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세우토폴리스는 아마도 세우테스 왕국의 수도 역할을 했을 것이다.[56] 이 왕국의 규모와 힘은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 영향력은 세우토폴리스의 배후지, 특히 남쪽의 로도페 산맥에서 북쪽의 하이무스 산맥 사이의 계곡과 서쪽의 스트리야마에서 동쪽의 상부 톤조스 강까지로 제한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영역은 이전 오드리시아 제국의 북서쪽 변두리만 포함했다. 세우테스는 또한 청동 동전만 발행했는데, 이는 마케도니아의 경제적 패권과 더 귀금속으로 발행되는 왕실 주조에 도전하기에 불충분했다.


세우테스 3세의 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추정 시기는 4세기 말부터 280년대까지 다양하다. 그의 이름으로 주조된 동전에는 카산더 (기원전 297년 사망)와 리시마코스 (기원전 281년 사망)의 겹쳐진 동전이 포함되어 있어, 그의 동전이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세우테스는 실제 시신 없이 골랴마 코스마트카의 고분에서 상징적으로 매장되었다. 그는 전투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마도 리시마쿠스와 싸우거나 그와 동맹을 맺었을 수도 있다.
세우토폴리스에서 발견된 긴 비문은 도시의 쇠퇴와 세우테스 가문의 어려움을 증언한다. 이 비문에는 세우테스의 부인 베레니케와 그들의 네 아들 (아마도 미성년자) 헤브리젤미스, 테레스, 사토코스, 사탈라스가 언급되어 있다. 이 문서는 베레니케의 이름으로 발행되었으며 "세우테스가 건강할 때"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작성 당시 그가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으며 베레니케가 통치권을 잡았음을 암시한다. 이 비문은 베레니케와 필리포스 2세가 건설했던 도시인 카빌레의 통치자 스파르토코스 간의 협상에 대해 설명한다. 카빌레는 오랫동안 마케도니아 요새로 남아 있지 않고 동전을 주조하기 시작했으며,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도시 국가로 발전했다. 스파르토코스는 기원전 281년 이후 주조된 여러 동전에서 왕 (''바실레우스'')으로 언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우토폴리스 비문에는 언급되지 않았고 몇몇 동전과 카잔락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문에서만 알려진 세우테스는 결국 왕이 된 로이고스라는 다른 아들을 둔 것으로 보인다. 세우테스 왕조의 운명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3세기 자료에 기록된 다른 트라키아 군주들, 예를 들어 코티스나 스코스토쿠스는 현대 작가들이 종종 그렇게 묘사하더라도 오드뤼사이 왕조 출신임이 입증될 수 없다.
세우토폴리스의 멸망은 논쟁의 대상이지만, 이 도시는 3세기 전반에 파괴된 것이 분명하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기원전 270년대에 켈트족에게 정복되었다고 한다. 켈트족은 기원전 270년대 초부터 발칸 반도 대부분을 약탈했으며 트라키아에도 여러 차례 침략을 가했다. 기원전 278년에 코몬토리우스가 이끌면서 그들은 결국 틸리스를 중심으로 동부 트라키아에 왕국을 세웠다. 더 새로운 이론은 도자기, 화폐 증거, 여러 켈트족 유물의 존재에 대한 재조사를 바탕으로 250년대에 도시가 파괴되었다고 제안한다. 고고학적 증거는 또한 포위 포병의 사용을 보여주는데, 이는 켈트족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낮다. 따라서 세우토폴리스는 켈트족이 아니라, 기원전 252년경 트라키아 내륙에서 작전을 펼쳤던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2세에 의해 파괴되었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오드뤼사이 왕국이 헬레니즘 시대와 초기 제국 시대를 거쳐 로마의 속국이 될 때까지 계속 존재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에 대한 증거는 매우 빈약하다. 3세기의 나머지 기간 동안 트라키아는 다양한 정치 실체로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내륙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트라키아의 군주들이 통치했다. 동쪽에는 켈트족이 지배하는 틸리스 왕국이 있었는데, 그 존재는 공갈과 조공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결국 트라키아 반란이나 공격으로 220년 직후에 멸망했다. 남동쪽의 리시마키아를 기반으로 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안티오코스 2세(재위: 기원전 261~246년) 치하에서 스스로를 구축했는데,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내륙 깊숙이 확장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트라키아의 군주들에게 의존했다. 기원전 246년 그가 사망한 후 셀레우코스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의해 대체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해안 트라키아에 사트라피를 세웠다. 그러나 오드뤼사이 왕국은 자료에 묘사되어 있지 않다.
3세기 말, 필리포스 5세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죽음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약점을 이용하여 동쪽으로의 확장을 재개했다. 필리포스의 초기 초점은 해안 트라키아였지만, 그는 또한 내륙으로의 원정을 이끌었다. 기원전 197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난 후 잠시 트라키아 영토를 상실했지만, 10년 후 대부분의 영토를 재정복했고, 다시 트라키아 내륙에서 원정을 펼쳤다. 기원전 184년 또는 183년에 그는 상 헤브로스 평원으로 진출하여 오드뤼사이와 다른 지역 부족들을 격파하고 필리포폴리스를 정복했지만, 오드뤼사이는 곧 그 도시를 재정복했다. 오드뤼사이 왕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기원전 181년에 필리포스가 여전히 북 트라키아의 하에무스를 오르고 있었지만, 그의 트라키아 제국은 2년 후 그의 죽음과 함께 붕괴되었다.
기원전 171년에서 168년 사이, 필리포스의 상속자인 페르세우스는 로마 공화국과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페르세우스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은 트라키아의 왕 코티스였는데,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그를 오드뤼사이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칼리니쿠스 전투와 피드나 전투에서 싸웠지만, 결국 전쟁 후 로마의 동맹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오드뤼사이 배경은 의심을 받아왔는데, 이는 폴리비오스의 기록이 그를 단 한 번만 오드뤼사이인이라고 불렀지만, 게토족의 왕 드로미케테스도 오드뤼사이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따라서 폴리비오스가 "오드뤼사이인"을 "트라키아인"의 동의어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전쟁 후 코티스는 에게해 연안의 압데라 배후지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그가 오히려 사파이인 왕이었음을 암시하며, 사파이인은 로도페 산맥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정체성은 불확실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코티스가 자료에서 명시적으로 "오드뤼사이인"으로 묘사된 마지막 왕이라는 사실이 있다. 또한 오드뤼사이가 기원전 1세기의 사파이인과 아스티 왕가와 연관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이르러 로마는 해안 트라키아를 지배했고, 가장 중요한 트라키아 부족은 사파이인과 아스티였다.
로마는 트라키아 내륙에 행정부를 설치하는 대신, 옛 오드뤼사이 왕국과 유사한 크고 헬레니즘화된 속국을 통해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아마도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직후 로마는 아스티 왕조를 폐지하고 비제에 사파이인을 세웠으며, 비제는 이전 왕국의 수도였다. 비제의 사파이인들은 로마에 충성하는 대왕국을 건설했고 심지어 내륙으로 확장하기도 했다. 사파이인들이 이 지역을 어떻게 통치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필리포폴리스를 왕실 거주지로 만들었다. 서기 21년에 로메탈케스 2세 왕은 반란에 직면했을 때 필리포폴리스로 피신했는데, 그 중에는 오드뤼사이인도 있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들을 강력하다고 묘사했지만, 그들의 봉기는 조직력 부족으로 실패했다. 로마는 결국 서기 45/6년에 사파이 왕국을 해체하고 이를 트라키아 속주로 만들었다.
3. 정치와 사회
오드리사이 왕국은 전성기에 발칸 반도 전체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했지만, 세우테스 3세 이전에는 국가다운 제도를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3] 일반적으로 오드리사이 왕권은 페르시아 궁정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4] 마케도니아 왕권과도 많은 유사점을 보였다.[5]
오드리사이 사회는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었고, 전쟁은 귀족에게만 가치 있는 영웅적인 활동으로 여겨졌다. 평민들은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징집병으로 구성되어 질이 낮았다. 시탈케스 왕의 군대 15만 명 중 3분의 1은 기병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질 낮은 보병이었다.[41] 그러나 트라키아 보병은 그리스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다.[41]
3. 1. 왕권과 지배 체제
오드리사이 왕국은 전성기에 발칸 반도 전체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했지만, 세우테스 3세 이전에는 국가다운 제도를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3] 일반적으로 오드리사이 왕권은 페르시아 궁정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4] 마케도니아 왕권과도 많은 유사점을 보였다.[5] 동시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달리, 오드리사이 왕들은 군사적 역량, 종교, 선물을 통해 통치를 정당화해야 했다.[6] 특히 왕실의 선물 교환은 페르시아 궁정에서 유래한 관습으로,[7] 통치 정당성에 매우 중요했다.[8] 투키디데스는 세우테스 1세 시대에 400 탈렌트의 금과 은으로 총 조공이 발생했으며, 이는 세우테스뿐만 아니라 "오드르사의 지도자들과 귀족들"에게 분배되었다고 언급했다.[9] 여러 은제 용기에 코티스 1세와 케르세블렙테스에 대한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선물이나 조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0] 왕은 금, 은, 직물, 말과 같은 귀중한 선물을 받았지만,[11] 유물, 여성, 토지[12]와 같은 선물을 분배하여 충성심을 얻고 군사적 수행원의 확장을 달성해야 했다.[13] 이러한 시스템은 불안정했고,[14] 왕권은 항상 유동적일 수밖에 없었다.[15]현존하는 자료가 단편적이어서 왕실 궁정과 왕국의 행정은 대부분 불분명하다.[16] 초기 마케도니아와 마찬가지로 오드리사이 왕들은 왕국의 핵심을 형성하고 정책을 통제했으며, 동전을 주조하고, 충성스러운 대리인을 임명하고,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7] 왕국은 본질적으로 왕의 영지였다.[18] 왕 아래에는 왕실 궁정뿐만 아니라 경쟁 부족 출신의 기마 전사와 행정가들로 구성된 엘리트가 있었다. 투키디데스는 이러한 지역 통치자들을 ''paradynasteuontes''라고 불렀는데, 이는 "권력을 공유하는 자들"을 의미한다.[19] 왕에게만 충성하는 유사한 엘리트 계급인 ''헤타이로이''는 마케도니아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20] 오드리사이 왕국은 비교적 분권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권력을 다투는 여러 지역 엘리트들로 구성되었다.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에 살았던 피지배자들에 대한 그들의 통치는 매우 느슨했고, 주로 약탈과 조공 요구를 통해 이루어졌다.[21]
초기 오드리사이 왕들이 고정된 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대신, 그들은 왕국 전역을 이동하며 요새화된 거주지에 머무르는 이동식 궁정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22] 그리스인들이 thyrseis|튀르세이스grc라고 불렀던 이러한 작은 요새화된 장소들은 도시를 건설하지 않은 사회에서 트라키아 귀족들의 중추였다.[23] 이러한 상황은 세우테스 3세가 세우토폴리스를 건설하여 초기의 국가다운 제도를 확립한 기원전 4세기 후반에 다소 변화했는데,[24] 이는 헬레니즘 마케도니아의 제도를 본받았을 것이다.[25] 세우토폴리스의 규모는 항상 매우 작았으며, 1,000명 이하의 주민이 거주했다. 이곳은 왕국의 귀족들의 거주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일반 대중은 여전히 도시 외곽에서 살면서 옛날의 농목축 경제를 계속 유지했다.[26]
3. 2. 사회 계층과 경제
오드뤼사이 사회는 귀족과 평민으로 나뉘었으며, 전쟁은 귀족에게만 가치 있는 영웅적인 활동으로 여겨졌다. 평민들은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징집병으로 구성되어 질이 낮았다. 시탈케스 왕의 군대 15만 명 중 3분의 1은 기병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질 낮은 보병이었다.[41] 그러나 트라키아 보병은 그리스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다.[41]초기 오드뤼사이 군대는 경보병과 경기병으로 구성되었다. 보병은 활, 투석기, 창, 칼, 도끼, 그리고 "펠테"라 불리는 반달 모양의 가벼운 방패를 사용했다.[41] 기병은 보병과 같은 무기를 사용했으며, 기원전 5세기 후반부터 갑옷을 착용하기 시작했다.[41] 칼키스 투구가 가장 인기 있었으며, 가죽 갑옷과 리넨 갑옷, 판갑(scale armour), 정강이받이(greave)도 사용되었다.[41]
4. 문화
오드뤼사이 왕국은 페르시아, 켈트족, 스키타이인 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리스 문화의 영향은 왕족과 귀족층을 중심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트라키아인들은 다키아인, 일리리아인과 같이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문신을 새기는 풍습이 있었다.[4] 트리발리와 같은 일부 부족들은 켈트족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장비를 사용하기도 했다.
트라키아인들은 삼, 아마, 양모 등으로 옷을 만들었으며, 스키타이인과 유사하게 옷 가장자리에 색깔을 넣거나 뾰족한 신발을 신었다. 게타이족은 스키타이인과 매우 비슷하여 종종 혼동되기도 했다. 귀족이나 일부 병사들은 모자를 착용하기도 했다.[5]
4. 1.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
오드뤼사이 왕국의 공예와 금속 세공은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2][3] 트라키아인들은 다키아인, 일리리아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문신을 새겼다.[4] 트라키아의 전쟁은 켈트족의 영향을 받았으며, 트리발리는 켈트족의 장비를 채택했다. 트라키아 의상은 품질과 질감으로 유명하며, 삼, 아마 또는 양모로 만들어졌다. 그들의 의상은 재킷의 색깔이 있는 가장자리, 뾰족한 신발을 포함하여 스키타이인의 의상과 유사했으며, 게타이족은 스키타이인과 매우 유사하여 종종 혼동되었다. 귀족과 일부 병사들은 모자를 썼다. 그리스인과 트라키아인 사이에는 상호적인 영향이 있었다.[5] 그리스의 관습과 유행은 동 발칸 사회의 재형성에 기여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의복, 장신구, 군사 장비에서 그리스 스타일이 유행했다.[6] 그리스인과 달리 트라키아인들은 종종 바지를 입었다. 트라키아 왕은 헬레니즘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7] 그리스어는 기원전 5세기에 적어도 왕실의 일부 구성원들이 사용했고, 행정관들의 언어가 되었으며, 그리스 문자는 새로운 트라키아어의 문자로 채택되었다.[8]
4. 2. 언어와 문자
기원전 5세기부터 오드뤼사이 왕족은 링구아 프랑카로 그리스어를 사용했고, 점차 행정도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 새로운 트라키아인의 비문은 그리스 알파벳으로 쓰였다.[42] 그리스 문자는 트라키아어의 문자로 채택되었다.[8]5. 유산
고대 트라키아인들은 고유의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고고학 유적, 동전,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역사를 알 수 있다.[9]
기원전 5세기 중반, 지역에서 유래한 귀중한 유물을 축적한 새로운 엘리트 계층이 등장했다.[9] 페르시아가 물러난 후 매장 관습이 바뀌었고, 중앙 트라키아[9]에서는 전돌을 쌓거나 석관을 사용한 새로운 형태의 엘리트 무덤이 나타났다.[9] 루에츠 묘소에서는 벽화 흔적도 발견되었다.[9] 초기 엘리트 무덤은 두반리 묘지에서 발견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무덤은 기원전 5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9] 이 무덤들에서는 고리형 또는 배 모양 귀걸이, 목걸이, 토크, 팔찌, 반지 등 머리와 몸을 장식하는 훌륭한 세트가 발견되었다.[9] 대부분의 트라키아 엘리트 무덤은 무기와 금 흉갑을 포함하고 있어 전사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스베티차(기원전 5세기 후반)와 달라코바(기원전 4세기 초)에서 발견된 무덤에서는 정교하게 제작된 금 장례 마스크도 발견되었다.[9]
스타로셀 인근 스레드나 고라 산맥에서는 오드뤼사이 왕국의 거주지와 사원이 발견되었다.[53] 트라키아 왕들의 거주지 북동쪽 벽이 발굴되었는데, 길이는 13m이고 높이는 최대 2m까지 보존되어 있었다.[54]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의 장군인 클레오불루스와 아낙산드로스의 이름도 발견되었다.[54]
5. 1. 고고학적 유적
고대 트라키아인들은 고유의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고고학 유적, 동전, 그리고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의 기록이다.[9]고고학적 증거는 기원전 5세기 중반까지 지역 및 지역 기원의 귀중한 유물을 축적한 새롭고 강력한 엘리트가 등장했음을 확인시켜준다.[9] 페르시아의 철수 이후 매장 관습이 변화했고 중앙 트라키아[9]에서 전돌 조적과 때로는 석관이 있는 묘소 형태로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 매장이 나타났다.[9] 기원전 5세기 후반의 루에츠 묘소에는 벽화의 흔적도 있었다.[9] 이 새로운 엘리트 묘소 중 가장 초기의 묘소는 두반리의 묘지에서 발견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묘소는 기원전 5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9] 그들의 유물은 동시대 트라키아뿐만 아니라 지중해 기준에서도 예외적이다.[9] 고고학자 톤코바에 따르면, 그들은 "수많은 고리형 또는 배 모양 귀걸이, 귀걸이 펜던트, 목걸이, 토크, 팔찌, 반지, 펜던트가 달린 체인, 그리고 흉갑으로 구성된 머리와 몸 장식의 훌륭한 세트"를 포함하고 있었다.[9] 대부분의 트라키아 엘리트 묘소는 무기와 금 흉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전사 매장으로 확인되었다. 스베티차(기원전 5세기 후반)와 달라코바(기원전 4세기 초)에서 발견된 두 개의 매장에서도 정교하게 제작된 인상적인 금 장례 마스크가 발견되었다.[9]
오드뤼사이 왕국의 거주지와 사원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스타로셀 인근의 스레드나 고라 산맥에서 발견되었다.[53] 고고학자들은 트라키아 왕들의 거주지 북동쪽 벽을 발굴했는데, 길이는 13m이고 높이는 최대 2m까지 보존되어 있었다.[54] 또한 오드뤼사이 왕국을 공격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의 장군인 클레오불루스와 아낙산드로스의 이름도 발견했다.[54]
5. 2. 현대 불가리아에 미친 영향
오드리사이 왕국은 현대 불가리아의 많은 지역을 포함하여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시탈케스 왕 통치 기간 동안 오드리사이 왕국의 영향력은 불가리아, 그리스 트라키아, 터키 트라키아 대부분과 동남부 루마니아 일부 지역까지 확장되었다.[3] 서쪽으로는 스트리몬 강과 이스카르 강, 동쪽으로는 흑해와 프로폰티스 해협, 북쪽으로는 하이무스 산맥과 다뉴브 강 하구에 이르렀다.[3]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오드리사이 왕국은 매우 강력했으며, 수입과 번영 면에서 이오니아 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모든 유럽 국가를 능가했다.[4]


6.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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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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