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예 (충숙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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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예(李藝, 1373년 ~ 1445년)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외교관으로, 충숙공(忠肅公)의 시호를 받았다. 그는 울산 출신으로, 1397년 왜구의 침입 당시 군수를 보필하여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1400년부터 1443년까지 40여 차례 일본에 사절로 파견되어 667명의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특히 계해조약 체결에 기여하여 조선과 일본 간의 외교 및 무역의 기반을 다졌으며, 문화 교류에도 힘썼다. 그의 업적을 기려 2005년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는 이예를 2월의 문화 인물로, 2010년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한국 역사상 저명한 외교 인물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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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 (충숙공) | |
---|---|
인물 정보 | |
본관 | 학성 이씨 |
자 | 학파(鶴坡) |
시호 | 충숙(忠肅) |
출생 | 1373년 |
사망 | 1445년 |
주요 경력 | |
주요 활동 | 조선의 외교관 |
2. 생애
1373년(고려 공민왕 22년) 울산의 유력한 토착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고려시대부터 대대로 이어진 향리 계층이었다.[11] 1396년(조선 태조 5년) 24세 때 울산군의 기관(記官)으로 활동했는데, 이는 문서 수발과 기록을 담당하는 향리 직책이었다.[10]
1397년 왜구가 울주포[12]를 침입하여 군수 이은(李殷) 등을 사로잡아 갔을 때, 다른 관리들은 도망쳤으나 이예는 자진하여 군수를 따라가 끝까지 보필하였다.[13][10] 이 사건 이후 조선 조정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아전의 역(役)을 면제하고 벼슬을 내렸으며,[14] 이를 계기로 그는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사대부로서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10]
1400년부터 1443년까지 44년간 40여 차례에 걸쳐 일본 등지로 사행(使行)하며 외교관으로 활동했다.[20] 그의 주요 임무는 왜구에게 납치된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하는 것이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총 667명의 포로를 데려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류큐국(현재의 오키나와)에 팔려간 백성들을 데려오기 위해 직접 파견되기도 했으며,[16][17] 대마도와의 외교 관계 유지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8]
1443년(세종 25년), 71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왜구에게 약탈당한 백성들을 찾아오기 위해 스스로 대마도 체찰사(對馬島體察使)로 파견되기를 자청하여 마지막 사행을 마쳤다.[19] 그는 1445년(세종 27년)에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왜구에게 피랍
1373년 (고려 공민왕 22년) 경상도 울산에서 태어났다.[11] 그의 집안은 고려 시대부터 울산 지역의 유력한 토착 세력이었으나, 왕조 교체기를 거치며 향리(鄕吏) 계층으로 자리 잡았다.[11] 이예가 8세 되던 1380년(우왕 6년)에는 어머니가 왜구에게 납치되는 아픔을 겪었다.[3]1396년 (조선 태조 5년), 24세의 이예는 울산군의 기관(記官)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는 문서 수발과 기록을 담당하는 향리 직책이었다.[10]
1397년 1월, 약 3천 명의 왜구가 울주포[12]를 침략하여 군수 이은(李殷)[4] 등을 사로잡아갔다.[13] 다른 관리들은 모두 도망쳤으나, 당시 하급 관료였던 이예는 자진하여 포로가 된 군수를 따라가 끝까지 보필하였다.[3] 왜구들은 이들을 쓰시마 섬으로 끌고 갔으며, 이예는 그곳에서 포로 생활 중 일본어를 익힌 것으로 보인다.[3] 그의 충성심과 끈질긴 석방 요구에 감복한 왜구들은 아시카가 막부의 중재를 받아들였다.[3] 1397년 2월,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의 노력으로 군수와 이예는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10][3]
조선 조정은 이예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아전(衙前)의 역(役)을 면제해주고 벼슬을 내렸다.[14] 이를 계기로 이예는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사대부 계층으로 편입되었고, 전문 외교관으로서의 길을 걷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10][3] 8세 때 납치된 어머니를 찾기 위해, 1400년 조정의 허가를 받아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의 수행원으로 대마도에 갔으나 어머니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10]
2. 2. 외교관으로서의 활동
1397년 왜구가 울주포[12]를 침입하여 군수 이은(李殷) 등을 사로잡아 갔을 때, 다른 관리들은 도망쳤으나 당시 향리였던 이예는 자진하여 군수를 따라가 보필하며 해적들을 감복시켰다. 이후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의 중재로 군수와 함께 무사히 귀환하였다.[10][13] 조정에서는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 아전의 역(役)을 면제하고 벼슬을 내려,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14][10] 그는 8세 때(1380년) 해적에게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조정에 청하여 1400년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의 수행원으로 대마도에 갔으나 어머니를 찾지는 못했다.[10]이예가 처음으로 사절의 책임을 맡은 것은 1401년(태종 1년)으로, 보빙사로서 일기도에 파견되어 조선인 포로 5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10][3] 1406년에는 일본 회례관(日本回禮官)으로 파견되어 납치되었던 70여 명을 송환하였다.[15] 1410년경까지 그의 노력으로 약 500명의 조선인 포로가 석방되었다.[4] 1416년 1월 27일에는 왜구에게 포로로 잡혀 유구국(현재의 오키나와)으로 팔려간 백성들을 데려오기 위해 유구국에 파견되었고,[16] 같은 해 7월 23일 44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17][4]
1418년(태종 18년) 4월 24일,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宗貞茂)가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생전 공로(왜구 단속)를 기려 이예를 조문 사절로 파견하여 쌀, 콩, 종이 등을 부의하였다. 이는 소 씨 가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왜구 침입을 억제하려는 목적이었다.[18][4] 그러나 사다시게 사후 그의 어린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 대신 해적 두목 소다 사에몬타로가 실권을 잡아 조선과 명 해안 약탈을 재개하자, 상왕으로서 군사권을 행사하던 태종은 1419년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였고, 이예는 이때 조선 수군의 군수 물자 조달 등에 관한 자문을 맡았다.[4]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일본을 오가며 외교 활동을 펼쳤다. 1443년(세종 25년), 왜구가 다시 변방을 침입하여 백성과 물자를 약탈하자, 당시 70세였던 이예는 스스로 대마도 체찰사(對馬島體察使)로 파견되기를 자청하여 7명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사행(使行)이었다.[19][3]
이예는 28세인 1400년부터 71세인 1443년까지 44년간 40여 차례 일본[20] 등지로 사행했으며, 그중 조선왕조실록에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된 것만 13회에 달한다.[21] 실록에는 그가 사행을 통해 송환한 조선인 포로의 수가 총 667명으로 기록되어 있다.[3] 그는 외교와 무역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1443년 계해조약(癸亥條約) 협상에도 기여하였다.[3][5] 또한 그의 문화 외교 노력으로 일본의 개량된 물레방아와 사탕수수가 조선에 들어오고, 조선의 불교 문화와 인쇄술 등이 일본에 전해지기도 했다. 그의 평화 공존 노력을 기리기 위해 대마도 엔쓰지(円通寺)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3]
3. 업적
이예는 조선 초기 대일 외교 전문가로서 계해약조 체결에 기여하고 수많은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세종의 명으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일본의 선진 기술이었던 자전(自轉) 물레방아와 사탕수수 재배법 등을 조선에 도입하는 등 문화 및 경제 교류에도 힘썼다. 이 외에도 민간의 광물 채취 자유화 및 과세, 화포 재료 변경, 외국 조선 기술 도입 등을 건의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22][23]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에도 높이 평가받았다. 1910년 대한제국 융희황제는 이예의 업적을 기려 충숙공(忠肅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6] 현대에 들어서도 그의 외교적 노력이 재조명되어, 2005년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는 이예를 '2월의 문화 인물'로 지정했으며,[5] 2010년에는 외교통상부에서 그를 한국 역사상 저명한 외교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5]
그의 삶과 업적은 후대에 영감을 주어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2011년 일본 변호사 金住則行|가나즈미 노리유키일본어는 이예의 삶을 다룬 소설 『이예, 최초의 조선 통신사』를 저술하여 울산광역시 울주군 석계서원에 헌정하였다.[3][7] 2013년 6월 1일에는 이누이 히로아키 감독이 연출한 한일 합작 다큐멘터리 영화 "이예"가 도쿄에서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배우 윤태영이 이예 역을 맡았고, 코미야 에츠코가 내레이션을 담당했다.[8][9]
3. 1. 계해조약 체결 기여
이예는 일본인의 조선 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와 양국의 교역 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 체결에 기여하여 왜구의 발생 원인을 근절시키고자 하였다.[3][5] 계해약조 체결 이후 조선은 중종 시기 삼포왜란이 발생하기 전까지 대규모 왜구의 침입을 받지 않게 되었다.이예의 대일 외교 활동은 태종 재위 1년인 140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첫 임무로 이키 섬에 파견되어 조선인 포로 50명을 송환하였다.[3] 이후에도 꾸준히 일본을 오가며 포로 석방을 위한 협상을 벌여 1410년경까지 약 500명의 포로를 귀환시켰다.[4] 1416년에는 해적에게 붙잡혀 류큐 제도로 끌려갔던 조선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직접 류큐를 방문하여 44명을 송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4]
1418년, 쓰시마 도주였던 소 사다시게宗貞茂|소 사다시게일본어가 사망하자, 이예는 조선 조정의 조문 사절로 파견되어 소 씨 일족과의 우호 관계를 다지고 왜구 통제 정책이 지속되도록 노력했다.[4] 그러나 소 사다모리宗貞盛|소 사다모리일본어의 집권 이후 왜구 활동이 다시 기승을 부리자, 상왕이었던 태종의 주도로 이루어진 1419년 대마도 정벌 당시에는 조선 수군에 물류 자문을 제공하기도 했다.
세종 재위 25년인 1443년, 왜구 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당시 70세의 고령이었던 이예는 마지막으로 쓰시마에 사신으로 자원하여 7명의 포로를 송환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생애 동안 40차례 이상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총 667명의 조선인 포로를 송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 이러한 오랜 외교 경험과 노력을 바탕으로, 이예는 1443년 일본과의 외교 및 무역 관계의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계해조약 체결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3][5]
이 외에도 이예는 세종의 명으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일본의 개량된 물레방아와 사탕수수를 들여오고, 대신 한국 불교 문화와 금속활자 인쇄술을 전하는 등 양국 간 문화 및 경제 교류에도 힘썼다. 또한 일본식 상가 제도 시행, 민간의 광물 채취 자유화 및 과세, 화차(火筒) 및 완구(碗口)의 재료를 동철에서 무쇠로 변경,[22] 외국 조선 기술 도입[23] 등을 건의하며 조선의 기술 및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평화적 외교 노력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쓰시마의 엔쓰지円通寺|엔쓰지일본어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3]
3. 2. 문화 및 경제 교류
이예는 일본과의 외교뿐 아니라 양국의 문화 및 경제 교류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세종의 명으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였으며, 일본에서 개량된 물레방아를 조선에 도입하고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을 추진하였다.[3][5] 또한 일본식 상가 제도의 시행을 건의하기도 했다.경제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도 건의했는데, 민간에 의한 광물 채취를 허용하고 이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 화통(火筒) 및 완구(碗口) 등 화약 무기의 재료를 기존의 청동에서 무쇠로 변경하는 방안,[22] 외국의 발전된 조선 기술을 도입하는 방안 등이 그것이다.[23]
특히 왜구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일본과의 교역 조건을 명확히 할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1443년(세종 25년) 계해조약(癸亥條約) 협상에 참여하여, 양국 간 외교 및 무역의 실질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3][5] 이 조약은 이전의 계해약조와 더불어 중종 시기 삼포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대일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이예의 문화 및 경제 교류 노력은 조선의 불교 문화와 인쇄술을 일본에 전하는 동시에, 일본의 개량된 기술(물레방아, 사탕수수 재배법 등)을 조선에 도입하는 쌍방향 교류의 성격을 띠었다. 그의 평화로운 공존 노력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일본 쓰시마의 엔쓰지(円通寺) 절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3]
4. 평가
이예는 1910년 충숙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의 이 달의 문화 인물로, 2010년에는 외교통상부의 '올해의 외교 인물'로 선정되는 등 현대에도 그의 공적이 인정받고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왜구에게 납치되는 개인적인 아픔 속에서도 조선과 일본의 평화와 우호 관계를 위해 헌신한 그의 삶은 높이 평가된다.
4. 1. 긍정적 평가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왜구에게 납치되는 아픔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일본 간의 평화와 우호 관계 증진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1910년, 융희황제는 이예의 공적을 기려 충숙공(忠肅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6]
2005년 2월,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는 이예를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하였고,[5] 2010년에는 외교통상부가 그를 한국 역사상 중요한 외교 인물 중 한 명으로 인정하며 '올해의 외교 인물'로 선정했다.[5]
이러한 평가는 현대에도 이어져, 2011년에는 일본 변호사 가나즈미 노리유키가 그의 삶을 조명한 소설 『이예, 최초의 조선 통신사』를 저술하여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석계서원에 헌정하기도 했다.[3][7] 또한, 2013년 6월 1일에는 이누이 히로아키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윤태영이 이예 역을 맡은 한일 합작 다큐멘터리 영화 "이예"가 도쿄에서 개봉되어 그의 외교적 업적을 기렸다. 코미야 에츠코가 내레이션을 맡았다.[8][9]
5. 대중 매체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는 2005년 2월의 문화 인물로 이예를 선정했고,[5] 2010년에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가 그를 한국 역사상 저명한 외교 인물로 인정했다.[5]
2011년, 일본의 변호사 가나즈미 노리유키(金住則行)는 소설 『이예, 최초의 조선 통신사』를 저술하여 울산광역시 울주군 석계서원에 헌정했다.[3][7]
2013년 6월 1일, 이누이 히로아키(乾弘明)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윤태영이 이예 역을 맡은 한일 합작 다큐멘터리 영화 '이예'가 도쿄 시내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내레이션은 小宮悦子|고미야 에쓰코일본어가 맡았다.[8][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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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권107, 세종 27년(1445년) 2월 23일(정묘) 2번째 기사
[11]
기사
토성(土姓) 9개는 박(朴), 김(金), 이(李), 목(睦), 전(全), 오(吳), 윤(尹), 문(文), 임(林)이다(《세종실록》 권150, 지리지 경상도 울산군).
[12]
문서
현재의 [[울산광역시]]이다.
[13]
기사
《태조실록》 권11, 태조 6년(1397년) 1월 3일(병진) 2번째 기사
[14]
기사
《태조실록》 권13, 태조 7년(1398년) 1월 26일(갑술) 2번째 기사 이명훈의 논문에 따르면, 이 기사의 이도(李陶)와 박언(朴焉)은 이예(李藝)와 박청(朴靑)을 잘못 표기한 것이다. 이명훈, 〈李藝 관련 왕조실록의 誤記-국사편찬위원회 校勘의 우선순위〉, 《한일관계사 연구》 57, 2017년 참조.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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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권12, 태종 6년(1406년) 윤7월 3일(경신) 5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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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태종실록》 권31, 태종 16년(1416년) 1월 27일(경신) 4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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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권32, 태종 16년(1416년) 7월 23일(임자)
[18]
기사
《태종실록》 권35, 태종 18년(1418년) 4월 24일(갑진) 2번째 기사
[19]
기사
《세종실록》 권100, 세종 25년(1443년) 6월 22일(을사) 2번째 기사
[20]
문서
대마도-일기도 포함
[21]
문서
일본 국왕에 6회, 대마도-일기도-유구국에 7회
[22]
기사
《세종실록》 권1, 세종 즉위년(1418년) 8월 14일(신묘) 8번째 기사
[23]
기사
《세종실록》 권46, 세종 11년(1429년) 12월 3일(을해) 5번째 기사
[24]
문서
이 가계도는 《세종실록》과 남경희, 《치암집》 권10, 軍資監奉事李公行狀을 근거로 작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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