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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황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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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 황제 문제는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비잔티움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등 여러 국가들이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권력 다툼을 의미한다. 비잔티움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 여겼으나, 서유럽에서는 샤를마뉴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즉위를 통해 동서 로마 제국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과 경쟁하며 로마 황제의 지위를 주장했고, 러시아 제국은 '제3의 로마'를 자처하며 황제의 지위를 요구했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유산을 계승하려 했으며, 이러한 경쟁은 외교적 갈등과 때로는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각 제국은 쌍두 독수리 문장을 사용하며 자신들의 제국적 권위를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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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황제 문제
두 황제 문제
정의여러 사람이 황제의 칭호를 주장하는 문제
유형군사적 갈등
정치적 혼란
계승 분쟁
관련 개념계승법, 정통성
역사적 배경
원인제위 계승의 모호성
중앙 권력의 약화
지방 세력의 성장
예시로마 제국의 군인 황제 시대
비잔티움 제국의 내전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 시대
해결 방안
군사적 해결전쟁을 통한 승자 결정
내전의 종식
정치적 해결협상과 타협
선거를 통한 합의
계승법의 명확화
현대적 의의
권력 투쟁의 상징권력의 집중과 분산, 정통성의 문제
조직 관리의 교훈리더십의 중요성, 의사 결정 과정의 투명성

2. 배경

고대 로마 제국은 지중해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이었으나, 4세기 말 동서로 분열되었고 5세기에는 서로마 제국게르만 민족의 이동 속에서 멸망하였다. 이후 로마 제국의 정통성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스스로는 '로마 제국'으로 칭함)만이 계승하게 되었다. 동로마 황제들은 고대 로마 황제들처럼 자신들이 전 세계의 유일하고 보편적인 통치자라는 인식을 유지하며,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했다.[1][2][3]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동로마 제국은 동방의 페르시아,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 및 북방의 여러 민족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면서 서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상실해갔다. 특히 8세기 중반, 이탈리아 반도에 남아있던 동로마 제국의 주요 거점인 라벤나 총독부랑고바르드족에게 함락되면서 이탈리아 중북부에서 동로마의 정치적 지배력은 사실상 소멸하였다.[4][5] 이 사건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랑고바르드족의 위협에 직면한 교황은 더 이상 동로마 황제의 보호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서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게 되었다.[6][7]

이러한 정치적 변화 속에서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가 어머니 이리니에 의해 폐위되고, 이리니가 여성 최초로 '황제(바실레우스)'를 칭하며 제국을 통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8][9] 서유럽, 특히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에서는 이를 로마 황제의 자리가 사실상 비어있는 것(공석)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강해졌다.[10][11]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를 새로운 로마 황제로 추대하게 되면서, 동방의 기존 로마 황제와 서방의 새로운 로마 황제라는 두 명의 황제가 공존하는 '두 황제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2][13]

2. 1. 정치적 배경

1453년 멸망하기 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영토 변화.
1453년 멸망하기 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영토 변화.


5세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로마 제국의 유산은 동쪽의 동로마 제국(스스로는 '로마 제국'으로 칭함)에서 이어졌다. 고대 로마 황제들처럼 동로마 황제들은 자신들을 전 세계의 보편적인 통치자로 여겼다. 이는 세상이 하나의 제국(로마 제국)과 하나의 교회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기반했으며, 제국의 서방 영토가 무너졌음에도 동방은 건재하다는 믿음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려는 마지막 대규모 시도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정복 전쟁으로,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일부를 되찾기도 했으나, 서방 전체를 회복하는 것은 이후 비잔티움 황제들에게는 이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북쪽과 동쪽 국경에서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서방 문제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고, 서방 영토에 대한 통제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의 보편 제국 주장은 서유럽의 세속 및 종교 권위자들에게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 5세기와 6세기의 서고트 왕국이나 프랑크 왕국의 왕들은 비잔티움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했는데, 이는 로마 제국의 일원임을 상징적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고 당시 세계 질서 속에서 위상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비잔티움 황제들 또한 서방 지역을 잠시 '야만족'에게 넘어갔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통제 하에 있는 제국의 일부로 여겼으며, 서방 왕들에게 칭호나 명예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인식을 유지하려 했다.

동서 관계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콘스탄티노스 5세 황제(재위 741년~775년) 시기에 찾아왔다. 그는 제국의 동쪽 국경에서 무슬림 세력불가르족의 위협에 맞서 성공적인 군사 활동을 벌였지만,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방어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 결국 751년, 이탈리아 내 비잔티움 제국의 주요 거점이었던 라벤나 총독부랑고바르드족에게 함락되면서 북부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의 영향력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라벤나 총독부의 붕괴는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형식적으로 비잔티움 황제의 봉신이었던 교황은 더 이상 비잔티움의 보호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자, 랑고바르드족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서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하던 프랑크 왕국에 점차 의존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나폴리 같은 이탈리아의 다른 비잔티움 도시들도 자체적인 방어 체계를 갖추며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으로 발전했다. 코르시카사르데냐에 대한 비잔티움의 영향력도 사라졌으며, 남부 이탈리아의 종교적 관할권마저 황제에 의해 교황에게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 넘겨졌다. 이로써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지중해 세계는 동방과 서방으로 뚜렷하게 나뉘게 되었다.

황제 이리니와 그녀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가 묘사된 금 솔리두스
앞면의 이리니 황후(왼쪽)와 뒷면에 이리니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6세(오른쪽)를 담은 금화.


797년,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가 그의 어머니이자 섭정이었던 이리니에 의해 폐위되고 실명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리니는 이후 여성의 몸으로 남성 황제의 칭호인 '바실레우스'를 사용하며 제국을 단독으로 통치했다. 같은 시기 서유럽에서는 샤를마뉴 치하의 프랑크 왕국이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리니는 황제가 되기 전까지 교황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녀의 제위 찬탈은 교황 레오 3세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샤를마뉴의 궁정에서는 학자 앨퀸 등이 여성이 황제를 칭하는 것을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 징후로 보고, 제국의 황제 자리가 사실상 비어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성 통치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더불어 이러한 주장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교황 레오 3세 역시 비잔티움의 황제 자리가 공석이라고 여겼다. 결국 800년 크리스마스, 로마를 방문한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로마 황제로 선포되고 대관식을 치렀다. 이는 샤를마뉴를 단순한 영토 통치자가 아닌, (서유럽의 관점에서) 유럽의 유일한 합법적 군주로 인정하는 행위였다.

교황 레오 3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인정하지 않고 샤를마뉴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2. 2. 로마와 보편 제국의 사상



역사상 많은 위대한 제국들은 스스로를 보편군주제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이들은 다른 어떤 국가나 제국도 자신들과 동등하다고 인정하지 않았으며, 알려진 세계 전체, 나아가 우주 전체가 자신들의 통치 아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알려진 세계 전체를 지배한 제국은 없었기에, 정복되지 않거나 통합되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야만인'으로 취급되어 무시되거나, 제국의 이념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다. 보편 제국 사상의 핵심에는 모든 인류가 하나의 제국 아래 통합되어 전쟁이 없는 보편적 평화를 이룬다는 이상이 있었다. 로마 제국은 이러한 '보편적 제국'의 대표적인 예시이지만, 이러한 생각은 아즈텍 제국, 아케메네스 제국, 아시리아 제국 등 다른 여러 문명에서도 나타났다.

대부분의 '보편 군주'들은 신성한 권위를 통해 자신들의 통치와 이념을 정당화했다. 스스로를 신적인 존재로 선언하거나 신의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들의 통치는 이론적으로 하늘의 승인을 받은 것이 되었다. 종교를 제국 및 통치자와 연결함으로써 제국에 대한 복종은 신에 대한 복종과 동일시되었다. 고대 로마의 종교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기능했으며, 정복된 민족들은 기존 신앙과 관계없이 황제 숭배에 참여해야 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 '주님'으로 선언하는 기독교와 같은 종교에 위협이 되었고, 로마 제국 초기 기독교 박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는 제국의 이념에 직접적인 도전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에도 제국의 이념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전의 황제 숭배처럼 기독교는 제국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했으며, 황제는 더 이상 신으로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기독교 교회를 다스리는 지배자로서 세속적 권위와 영적 권위를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한 이후에도 로마 제국의 문명과 보편 제국 사상은 동로마 제국(스스로는 '로마 제국'으로 칭했다)에서 존속했다. 고대 로마 황제들처럼 동로마 황제들은 자신들을 전 세계의 보편적인 통치자로 여겼다. 이는 세계가 단 하나의 제국(로마 제국)과 단 하나의 교회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에 기반했으며, 제국의 서방 영토 상실에도 불구하고 이 사상은 유지되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정복 전쟁은 이러한 이념을 현실화하려는 마지막 대규모 시도였으나, 이후 동로마 제국은 동방과 북방의 위협에 집중하느라 서방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잃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로마 황제의 보편적 권위에 대한 주장은 서방의 세속 및 종교 권력자들에게 오랫동안 인정받았다. 5~6세기 서고트 왕국이나 프랑크 왕국의 왕들은 동로마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고 로마 세계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했다.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권위는 로마 제국의 정당한 계승자이자 기독교 세계의 수장으로서 15세기 제국 멸망 시까지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비잔티움인들은 황제가 지상에서 신이 임명한 통치자이자 대리인('Deo coronatus', 즉 '신에 의해 왕관을 쓴 자')이며, 보편적이고 독점적인 황제권으로 세계 최고 권위를 지닌다고 굳게 믿었다. 황제는 권력 행사에 있어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인 통치자('아우토크라토르', 즉 '스스로 통치하는 자')였다. 황제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고 이론적으로 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았으며, 지상에서의 권위 또한 무한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본질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이념은 고대 로마 제국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이념을 기독교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8세기 중반 이후 동서 관계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콘스탄티노스 5세 황제(741~775) 시기, 제국은 동방의 이슬람 세력과 북방의 불가르족 방어에 집중하면서 이탈리아 방어를 소홀히 했다. 결국 751년 랑고바르드족라벤나 총독부를 함락시키면서 북부 이탈리아에서 동로마 제국의 지배는 종식되었다. 이 사건은 중대한 결과를 낳았다. 표면상 동로마의 봉신이었던 교황은 더 이상 동로마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닫고, 랑고바르드족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의 강대국인 프랑크 왕국에 점차 의존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나폴리 등 이탈리아의 다른 동로마 영토들도 사실상 독립적인 상태가 되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어져 온 지중해 세계는 동방과 서방으로 확실하게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797년,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가 어머니 이리니에 의해 폐위되고 이리니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성형 칭호인 '바실레우스'를 사용하며 단독 통치자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유럽에서는 이를 제위가 공석이 된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나타났다. 특히 교황 레오 3세는 여성 황제를 인정하지 않았고, 마침 샤를마뉴 치하에서 강력해진 프랑크 왕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결국 800년 크리스마스, 교황 레오 3세는 로마를 방문한 샤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절대주의적 황제 사상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제국 개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동로마 황제가 세속 제국과 영적 교회를 모두 장악한 것과 달리, 서유럽에서 새로운 제국의 등장은 세속 권력(황제)과 종교 권위(교황)의 협력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샤를마뉴는 전쟁을 통해 세속 권력을 얻었지만, 황제의 칭호는 교황으로부터 받았다. 황제와 교황 모두 서유럽에서 최종적인 권위를 주장하면서(교황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황제는 신성하게 임명된 교회의 수호자로서) 서로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이러한 '이중 통치' 구조는 이후 서임권 투쟁이나 대립교황 문제 등 수많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3. 신성 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 분쟁

신성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의 분쟁은 중세 유럽에서 '두 황제 문제'로 알려진 오랜 갈등의 핵심이었다. 이 갈등은 단순히 누가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할 자격이 있는지를 넘어, 로마 제국의 정통 계승자로서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우위를 주장하려는 두 제국 간의 근본적인 경쟁이었다.

갈등은 800년 크리스마스,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당시 여성 황제 이리니가 통치하던 비잔티움 제국의 유일한 제국 계승자라는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유럽에서는 이를 제국의 이전(translatio imperii) 개념으로 정당화하며, 로마 제국의 정통성이 동방의 '그리스인'에게서 서방의 '프랑크족'에게로 옮겨왔다고 주장했다.

이후 카롤링거 제국 시대에는 루도비쿠스 2세와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오스 1세 사이의 서신 교환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인'의 정의와 황제 칭호의 세습 및 민족적 자격 문제를 둘러싼 첨예한 신학적, 법적 논쟁이 이어졌다. 10세기에는 오토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962년)하면서 갈등이 다시 불붙었다. 오토 1세는 교황령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했고, 비잔티움 측은 그를 '야만족의 왕'으로 폄하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에는 갈등이 더욱 격화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제3차 십자군 원정 중 비잔티움 제국과 직접적인 충돌을 겪었으며,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는 비잔티움 제국에 조공을 요구하는 등 노골적인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서방의 압박과 불신은 결국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라틴 제국(1204-1261)을 세우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라틴 황제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로마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며 두 황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1261년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복원했지만, 두 제국 간의 근본적인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이후 팔레올로고스 왕조 황제들은 서방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교황청과의 교회 통합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이는 제국 내부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두 황제 문제는 중세 유럽의 정치 질서와 동서 교회의 분열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두 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속된 난제였다.

3. 1. 카롤루스 시대

797년,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가 어머니 이리니에게 폐위되고 눈이 멀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리니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남성형 칭호인 '바실레우스'를 사용하여 제국을 단독으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왕국을 재편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 있었다.

이리니의 제위 찬탈은 교황 레오 3세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당시 샤를마뉴의 궁정에 있던 학자 앨퀸은 여성이 황제가 된 것은 동방 제국의 쇠퇴를 보여주는 징표이며, 제국의 왕좌가 사실상 비어있는 상태라고 주장했다. 여성 황제를 인정할 수 없었던 교황 레오 3세 역시 이러한 시각에 동조하여 황제의 자리가 공석이라고 여겼다. 결국 800년 크리스마스, 로마를 방문한 샤를마뉴는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황제로 인정받고 대관식을 치렀다.

샤를마뉴의 대관식은 서유럽에서 제국의 이전(translatio imperii)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었다. 이는 로마 제국의 정통성이 동쪽의 '그리스인'들에게서 서쪽의 프랑크족에게로 옮겨왔다는 주장이었다. 서유럽의 동시대인들은 샤를마뉴가 갈리아, 독일, 이탈리아(로마 포함) 등 옛 로마 제국의 핵심 영토를 실제로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반면 비잔티움 황제는 이러한 전통적인 영토를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주민들은 스스로를 계속 '로마인'(Ῥωμαῖοι|로마이오이grc)이라고 불렀지만, 샤를마뉴의 대관식 이후 서유럽의 기록들은 이들을 점차 '그리스인'으로 지칭하며 로마 제국의 계승자로서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샤를마뉴 데나리우스
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마뉴의 데나리우스. 그는 800년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카롤루스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로 즉위했는데, 이는 교황이 비잔티움 제국의 여성 황제 이리니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샤를마뉴의 즉위에 비잔티움은 강하게 반대했다.


정작 샤를마뉴 자신은 비잔티움 제국이나 그 통치자들과의 직접적인 경쟁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교황에게 대관을 받을 때 단순히 '황제'(Imperator|임페라토르la)라는 칭호를 받았다. 81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을 "황제이자 아우구스투스, 그리고 프랑크족과 랑고바르드족의 왕"이라고 칭하여, 황제 칭호를 로마인이 아닌 프랑크족과 랑고바르드족의 왕이라는 기존 직위와 연결시켰다. 그의 동전에는 '카롤루스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Karolus Imperator Augustusla)라고 새겼으며, 공식 문서에서는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아우구스투스 황제'(Imperator Augustus Romanum gubernans Imperium|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아우구스투스 황제la) 또는 '신의 왕관을 쓴 가장 고요한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위대하고 평화로운 황제'(serenissimus Augustus a Deo coronatus, magnus pacificus Imperator Romanorum gubernans Imperium|신의 왕관을 쓴 가장 고요한 아우구스투스,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위대하고 평화로운 황제la)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로마 황제'가 아닌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라는 표현은 누가 진정한 로마 황제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논쟁을 피하고, 제국의 통일성이라는 명분을 유지하려는 외교적 고려로 해석될 수 있다.

814년 카롤루스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814년 카롤링거 제국(녹색)과 비잔티움 제국(보라색)의 모습.


프랑크족이 황제 칭호를 사용하자, 비잔티움 황제들은 자신들의 우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이전에는 단순히 '황제'라고만 칭하던 것에서 나아가 '로마인의 황제'라는 완전한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비잔티움인들에게 샤를마뉴의 대관식은 그들이 인식하던 세계 질서에 대한 명백한 부정 행위이자 제위 찬탈이었다. 이후 비잔티움 황제 미하일 1세 랑가베가 결국 샤를마뉴를 황제이자 동방 황제의 '영적인 형제'로 인정하기는 했지만, 이는 '로마 황제'로서의 인정은 아니었다. 비잔티움 측은 샤를마뉴의 제국을 보편적인 로마 제국이 아닌, 그의 실제 통치 영역에 국한된 지역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그의 후계자들은 비잔티움 기록에서 황제가 아닌 '왕'으로 지칭되는 경우가 많았다.

샤를마뉴의 대관식 이후 두 제국 사이에는 외교적 교섭이 이루어졌다. 정확한 논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802년경 샤를마뉴는 당시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하던 이리니와의 결혼을 통해 두 제국을 통합하자는 제안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어느 쪽 통치자가 더 정통성 있는지에 대한 논쟁 없이 제국을 '재통일'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샤를마뉴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기 직전, 이리니가 니키포로스 1세에 의해 폐위되고 추방되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3. 1. 1. 루도비쿠스 2세와 바실리오스 1세

루도비쿠스 2세(사진)가 871년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두 황제가 갖고 있는 로마인이라는 의미에 대한 생각이 매우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카롤링거 제국 시대의 두 황제 문제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 중 하나는 871년 루도비쿠스 2세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보낸 편지이다. 루도비쿠스 2세는 카롤링거 제국의 네 번째 황제였으나, 제국이 분열되면서 그의 통치 영역은 이탈리아 북부에 한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국들은 여전히 그를 황제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 편지는 바실리오스 1세가 먼저 보낸 도발적인 서신에 대한 답장이었는데, 바실리오스의 원본 편지는 소실되었으나 그 내용은 당시의 정황과 루도비쿠스의 답장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두 황제는 이슬람 세력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문제를 논의하던 중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바실리오스 편지의 핵심은 루도비쿠스 2세를 로마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바실리오스는 루도비쿠스의 황제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근거로 두 가지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로마 황제의 칭호는 세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황제 칭호를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하면서도 여전히 로마 공화국의 전통을 따라 세습직이 아닌 것으로 간주했다. 둘째, 특정 민족(gens|겐스la) 출신은 황제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바실리오스를 비롯한 비잔티움인들은 프랑크족과 같은 유럽의 여러 집단을 고유한 민족(gentes|겐테스la)으로 보았지만, '로마인'은 특정 민족 집단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로마인은 민족적 특성이 없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정의되었으므로, 프랑크족인 루도비쿠스는 로마인이 아니며 따라서 로마 황제가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바실리오스는 루도비쿠스가 프랑크족의 황제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βασιλεύς|바실레우스grc(황제)라는 칭호는 로마인의 통치자에게만 해당한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을 ''Basilios Augustus''(아우구스투스 황제)로 칭하는 비잔티움 황제 바실리오스 1세의 주화.


이에 대해 루도비쿠스는 자신의 편지에서 서방의 관점을 드러내며 반박했다. 서방에서는 모든 사람을 특정 민족(gens|겐스la)에 속한 것으로 보았으며, 루도비쿠스는 '로마 민족'(gens romana|겐스 로마나la)을 비잔티움 제국이 버렸다고 여긴 로마의 주민들로 간주했다. 그는 또한 βασιλεύς|바실레우스grc라는 칭호가 과거 페르시아 군주 등 다른 민족의 통치자에게도 사용된 적이 있음을 지적하며, 특정 민족 출신이 황제가 될 수 없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루도비쿠스는 히스파니아 출신의 테오도시우스 왕조, 이사우리아 출신의 이사우리아 왕조, 하자르 출신의 레온 4세 등이 과거 황제가 되었던 사례를 들었다. 물론 비잔티움 측에서는 이들을 이방인이 아닌 로마인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실리오스는 로마인을 특정 민족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민족적 개념(민족성 부재)으로 로마 제국을 정의하려 했고, 루도비쿠스는 로마인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면서도 로마 제국 자체는 민족을 초월한 보편적인 하느님의 제국으로 정의했다.

루도비쿠스는 자신의 정당성을 기독교교황의 권위에서 찾았다. 그는 로마를 실제로 통치하고 있는 로마 교황이 비잔티움 제국의 종교적 경향(이단으로 간주)을 거부하고 자신과 같은 프랑크족 통치자를 지지하며 황제로 인정했기 때문에 자신이 합법적인 로마 황제라고 주장했다. 즉, 교황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하느님이 자신에게 로마의 교회와 백성, 도시를 다스릴 권한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자신이 로마 황제가 아니라면, 자신의 조상에게 황제 칭호를 부여한 로마인들 덕분에 프랑크인의 황제도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자신의 황제 즉위가 교황의 인정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동방의 황제들은 대부분 원로원의 인정만 받거나, 심지어 군대나 여성(이리니를 염두에 둔 발언)에 의해 추대되기도 했다고 지적하며 교황 승인의 정통성을 부각했다. 다만 루도비쿠스는 로마 황제의 칭호인 imperator|임페라토르la가 본래 군대의 추대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은 간과했을 수 있다.

두 황제 모두 제국이 두 개로 나뉘었다는 현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이는 제국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기존의 이해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루도비쿠스의 편지는 이러한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로, 바실리오스를 '신 로마의 영광스럽고 거룩한 황제'로 칭하면서, 제국은 '분할할 수 없는 제국'이며 하나님의 제국으로서 "하나님이 이 교회를 나에게나 너희에게만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요, 오직 사랑으로만 서로 결속하여 갈라지지 아니하고 하나같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루도비쿠스가 여전히 제국은 하나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적으로 두 명의 황제 주장자(사실상의 황제와 대립황제)가 존재한다고 인식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어느 쪽도 제국의 단일성이라는 이상을 포기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루도비쿠스가 바실리오스를 '황제'라고 칭한 것은 진정한 인정을 의미하기보다는 외교적 수사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

루도비쿠스는 편지에서 비잔티움 제국이 제국의 본래 수도인 로마를 버리고 로마적인 생활 방식과 라틴어를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통치는 제국의 존속이 아니라 책임 회피로 비춰졌다. 이 편지는 루도비쿠스가 직접 작성하지 않고, 저명한 성직자이자 로마 시민이었던 아나스타시우스 비블리오테카리우스가 대필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나스타시우스가 프랑크인이 아닌 로마 시민이었다는 점은 당시 로마의 지식인층 역시 루도비쿠스와 비슷한 시각을 공유했으며, 비잔티움 제국과 로마 시 사이의 거리감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875년 루도비쿠스 2세가 사망한 후, 서유럽에서는 몇십 년간 황제가 계속 즉위했지만, 이들의 통치는 대부분 단명했고 권력 기반도 취약했다. 이로 인해 두 황제 문제는 한동안 비잔티움 제국에게 중요한 관심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3. 2. 오토 시대

니키포로스 2세 황제. 그는 오토 1세의 대관식에 반발했다.


루도비쿠스 2세가 875년에 사망한 이후 서방 황제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한동안 두 황제 문제는 잠잠해졌다. 그러나 962년, 교황 요한 12세가 독일 왕 오토 1세를 로마 황제로 즉위시키면서 두 황제 문제는 다시 불거졌다. 이는 이전 황제였던 베렌가리오 1세가 사망한 지 약 40년 만의 일이었다. 오토 1세는 이탈리아 왕으로도 선포되었으며,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비잔티움 제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비잔티움 황제였던 로마노스 2세는 오토 1세의 주장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뒤를 이은 니키포로스 2세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오토 1세는 자신의 제국에 대한 정식 승인을 받고 남부 이탈리아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결혼 동맹을 추진했고, 967년 니키포로스 2세에게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오토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이전 카롤루스 왕조 황제들보다 제국의 로마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했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에게 오토 1세의 등장은 카롤루스 대제의 즉위만큼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오토 1세의 사절단을 이끈 인물은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였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이 서방 영토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교황령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리우트프란트는 오토 1세가 교황령을 회복하고 수호함으로써 진정한 황제의 자격을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과거 비잔티움의 영토였던 이 지역들을 상실한 것은 비잔티움 제국의 약화와 황제의 자격 미달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여겼다. 리우트프란트는 비잔티움 관리들에게 보낸 자신의 임무 보고서에서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의 황제는 무력으로 로마를 침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교황]을 폭군, 아니 폭군의 멍에에서 해방시켰다. 그 직위는 여자의 노예가 다스리지 않았는가? 아니면 그 여자들은 자신이 더 나쁘고 수치스러울까? 당신의 힘, 또는 명목상으로 로마 제국의 황제라고 불리지만 그렇지 않은 당신의 전임자들의 힘은 그 당시에 자고 있었을 것이다. 그 전임자들이 강력하고 로마의 황제라면 왜 로마가 창녀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했는가? 교황 중 가장 신성한 사람들이 추방당하고, 다른 일부의 교황들은 너무 억눌려서 생활 용품이나 자선품을 구할 수 없었지 않았는가? 아달베르트가 당신의 전임 황제인 로마누스와 콘스탄티노스에게 조롱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나? 그가 가장 신성한 사도들을 약탈하지 아니하였는가? 너희 [동방] 황제 중 누가 하나님에 대한 열성으로 그토록 합당하지 않은 죄를 갚고 신성한 교회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려고 하였느냐? 당신들은 그것을 소홀히 했지만, 나의 황제는 그것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땅 끝에서 일어나 로마에 이르러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제거하시고 신성한 사도들의 대리자들에게 그들의 권세와 그들의 모든 명예를 주셨으니...


니키포로스 2세는 리우트프란트에게 오토 1세는 자신을 황제나 로마인이라고 칭할 자격이 없는 야만족의 왕일 뿐이라고 직접적으로 반박했다. 리우트프란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기 직전, 니키포로스 2세는 교황 요한 13세로부터 오토 1세의 압력으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공격적인 편지를 받았다. 이 편지는 비잔티움 황제를 '로마인의 황제'가 아닌 '그리스인의 황제'로 칭하며 그의 제국적 지위를 부정했다. 리우트프란트는 이 편지에 대한 니키포로스 2세 측근들의 격렬한 반응을 기록했는데, 이는 비잔티움 측 역시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권력이 이동했다는 독자적인 'translatio imperii' 개념을 발전시켰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들어! 어리석은 교황은 거룩하신 콘스탄티누스께서 황제의 홀, 원로원, 로마의 기사직을 이곳으로 옮기고 로마에는 –어부, 즉 행상인, 새잡이, 평민들, 노예들과 같이 사악한 사람들만 남기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어.


비잔티움 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10세기 상아 책 표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2세와 그의 아내 테오파누 황후의 대관식을 묘사한다.


리우트프란트는 교황이 비잔티움 사람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하고 관습을 바꾼 탓에 '로마인'이라는 칭호를 싫어할 것이라 믿었다고 변명하며 외교적 수습을 시도했고, 니키포로스 2세에게 앞으로 동방 황제들은 교황 서신에서 '로마인의 위대하고 존엄한 황제'로 불릴 것이라고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오토 1세의 우호 관계 수립 시도는 두 황제 문제로 인해 난관에 부딪혔고, 동방 황제는 그의 제안에 호응하지 않았다. 리우트프란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방문은 외교적으로 실패했으며, 그는 니키포로스 2세가 반복적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하에 되돌리겠다고 위협하고, 심지어 독일 본토 침공까지 언급하며 오토 1세를 향해 "우리는 그에게 대적하는 모든 민족들을 불러일으켜 토기장이의 그릇처럼 그를 부숴버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목격했다.

오토 1세의 결혼 동맹 시도는 니키포로스 2세가 사망할 때까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972년, 비잔티움 황제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 치하에서 오토 1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오토 2세와 요안니스 1세의 조카 테오파누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양측의 관계는 개선되었다.

오토 1세는 966년에 잠시 '로마와 프랑크의 아우구스투스 황제'(imperator augustus Romanorum ac Francorumla)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 황제'(Imperator Augustusla)라는 칭호를 주로 사용했다. 그가 칭호에서 '로마'를 생략한 것은 비잔티움 황제의 인정을 얻으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오토 1세 이후, 서방 황제의 칭호에 '로마'에 대한 언급은 점차 일반화되었다. 11세기에는 '독일인의 왕'(황제가 되기 전 왕들이 사용하던 칭호)이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la)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후 표준적인 황제 칭호는 '신의 은총을 받은 로마의 황제, 영원한 아우구스투스'(dei gratia Romanorum Imperator semper Augustusla)가 되었다.

3. 3. 호엔슈타우펜 시대

12세기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에도 동서 제국 간의 황제 칭호 문제는 계속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안나 콤니니는 자신의 저서 《알렉시아스》(1148년경)에서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를 로마 황제로 칭한 반면,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는 단순히 '독일인의 왕'으로 지칭하며 서방 황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1150년대에 비잔티움 황제 마누일 1세 콤니노스는 자신과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그리고 이탈리아-노르만 계열의 시칠리아 왕국루제루 2세 사이의 복잡한 삼각관계에 놓였다. 마누일 1세는 두 경쟁 세력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교황으로부터 유일한 합법 황제로 인정받아 분열된 기독교 세계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통합하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항하는 롬바르디아 동맹 도시들에 자금을 지원하고, 시칠리아 왕에 맞서 반체제 노르만 남작들의 반란을 부추겼다. 심지어 마누일 1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직접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는데, 이는 비잔티움 군대가 서유럽 땅을 밟은 마지막 사례로 기록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누일 1세의 서방 원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전쟁 막바지에 서로 동맹을 맺은 프리드리히 1세와 루제루 2세의 적대감만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호엔슈타우펜 시대 동안 두 황제 문제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가 이끈 제3차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는 비잔티움 측과의 극심한 갈등이 발생했으며,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는 비잔티움 제국에 더욱 노골적인 압력을 가하며 조공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 라틴 제국을 세우면서, 두 황제 문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3. 3. 1. 프리드리히 1세의 십자군



1185년 동로마-노르만 전쟁이 끝난 직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는 술탄 살라딘이 1187년 예루살렘을 정복하자 제3차 십자군이 소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자신의 제국에 적대적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이전 십자군처럼 비잔티움 제국을 통과하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올 것이라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비잔티움 제국을 전복시키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며,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이사키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던 많은 라틴인 시민들을 투옥했다. 또한 그는 성지에서 영토를 얻기 위해 살라딘과 비밀 동맹을 맺고,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를 지연시키고 파괴하기로 합의했다. 이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와의 조약 협상에서 진실하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할 의도가 없었던 프리드리히 1세는 이사키오스 2세와 살라딘의 동맹 사실을 몰랐지만, 경쟁 관계인 동방 황제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1189년 초, 뮌스터 주교를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했다. 당시 알라셰히르(필라델피아)의 반란을 진압 중이던 이사키오스 2세는 사절단 도착 일주일 후에 수도로 돌아와 즉시 독일 사절단을 투옥했다. 이는 독일인 인질을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더 중요하게는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와 있던 살라딘의 사절단 존재를 숨기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189년 6월 28일, 프리드리히 1세의 십자군은 비잔티움 국경에 도착했다. 신성 로마 황제가 직접 비잔티움 영토에 들어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브라니체보 총독이 그들을 맞이했지만, 그는 독일군을 최대한 지연시키거나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니시로 향하는 동안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는 지역 주민들의 반복적인 공격을 받았고, 이사키오스 2세는 도로를 봉쇄하고 식량 조달을 방해하는 작전을 지시했다. 공격으로 인한 피해는 약 100명 정도로 크지 않았지만, 비잔티움 측이 시장 제공을 거부하면서 보급품 부족 문제가 더 심각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도착을 미리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이미 사절단을 보낸 것으로 충분한 통보라고 여겼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프리드리히 1세는 여전히 이사키오스 2세가 적대적이지 않다고 믿으며, 비잔티움의 적들이 제안한 동맹 요청을 거절했다. 니시에서 그는 비잔티움 대사들로부터 소피아 근처에 비잔티움 군대가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것이 독일군이 아닌 세르비아군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을 믿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고,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적대적인 대우를 받았으나, 비잔티움 군대는 독일 기병대의 첫 돌격에 흩어져 달아났다.

제3차 십자군의 경로(1189–1192).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진군한 길은 붉은색으로 표시되었다.


공포에 질린 이사키오스 2세는 트라키아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중 하나였던 필리포폴리스의 총독 니케타스 코니아테스(훗날 이 사건의 주요 역사가가 됨)에게 모순된 명령을 내렸다. 처음에는 도시 성벽을 강화하고 요새를 사수하라고 지시했지만, 나중에는 독일군이 도시를 기지로 사용할 것을 우려하여 도시를 버리고 요새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이사키오스 2세가 프리드리히 1세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프리드리히 1세는 비잔티움 사령관 마누엘 카미체스에게 편지를 보내 "저항은 헛되다"고 경고하면서도, 비잔티움 제국을 해칠 의도는 없음을 분명히 했다. 8월 21일, 필리포폴리스 외곽에 진을 치고 있던 프리드리히 1세에게 이사키오스 2세의 편지가 도착했다. 이 편지는 매우 모욕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사키오스 2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황제 칭호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만을 '로마의 황제'라고 칭했다. 독일인들은 처음에 비잔티움 황제가 자신을 천사라고 부르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기도 했다(이사키오스 2세의 성 '앙겔로스(Angelos)' 때문). 또한 이사키오스 2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무슬림에게서 정복할 영토의 절반을 요구하고, 프리드리히 1세가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하여 자신의 아들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6세를 황제로 앉히려 한다는 브라니체보 총독의 보고를 근거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동시에 프리드리히 1세는 자신이 보낸 사절단이 투옥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일부 참모들은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제안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외교적 해결을 우선시했다.

두 황제 간의 서신 교환에서 서로의 칭호를 제대로 인정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첫 편지에서 프리드리히 1세를 단순히 '독일의 왕'이라고 불렀다. 이후 상황 개선을 위해 두 번째 편지에서는 '독일 출생의 가장 높고 고귀한 황제'라고 칭했지만, 여전히 로마 황제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비잔티움 측은 그를 '고대 로마의 가장 고귀한 황제'(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대비되는 의미)라고 부르는 선에서 타협했다. 반면 독일 측은 이사키오스 2세를 일관되게 '그리스의 황제'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라고 불렀다.

제3차 십자군 당시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를 묘사한 그림.


비잔티움 측의 방해는 계속되었다. 버려진 필리포폴리스에 남겨진 포도주에는 독이 들어 있었고, 프리드리히 1세가 보낸 두 번째 사절단도 투옥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사키오스 2세는 두 사절단을 모두 석방했다. 석방된 사절단은 프리드리히 1세에게 돌아와 이사키오스 2세가 살라딘과 동맹을 맺었으며, 독일군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널 때 공격할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주변 지역에서 반(反)십자군 선전물이 발견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군은 필리포폴리스 인근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독일의 왕'이라고 불린 것에 격분한 프리드리히 1세는 비잔티움 측에 인질(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과 가족 포함)을 요구하고 자신이 유일한 로마 황제임을 주장했다. 또한 비잔티움 측의 도강 지원 제안에도 불구하고 트라키아에서 겨울을 보낼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시점에서 프리드리히 1세는 십자군의 성공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1월 18일, 그는 아들 하인리히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겪은 일들을 설명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준비와 함께 봄에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합류할 대규모 함대 소집을 명령했다. 또한 교황의 지원을 확보하고 비잔티움 제국에 대항하는 서방 십자군을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이사키오스 2세는 트라키아가 프리드리히 1세에게 '죽음의 덫'이 될 것이며 이미 너무 늦었다고 위협했지만, 세르비아와 블라크인 동맹군의 지원을 받은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접근하자 점차 평화적인 해결을 선호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가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비잔티움 측은 계속해서 화해 제안을 보냈으나, 프리드리히 1세가 1189년 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자 이사키오스 2세는 결국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독일군을 파괴할 수 없으며 자칫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잃을 수도 있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평화 협정을 통해 독일군은 비잔티움 제국을 자유롭게 통과하고, 보스포루스 해협 도강 지원과 시장 개방을 보장받았으며, 이전의 방해 행위로 인한 피해 보상도 받게 되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알라셰히르 총독이 시장 개방을 거부하여 도시를 약탈할 뻔한 일을 제외하고는 큰 사건 없이 성지로 향했다. 제3차 십자군 동안 벌어진 이 사건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서방 사이의 적대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비잔티움 측은 트라키아의 황폐화와 독일군의 강력한 군사력에 위협을 느꼈고, 서방 측은 황제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사절단 투옥을 잊지 않게 되었다.

3. 3. 2. 하인리히 6세의 위협

하인리히 6세 황제는 신성 로마 황제이자 시칠리아의 왕으로서 독일과 이탈리아 전역을 통치했고 공식적으로 키프로스 왕국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을 속국으로 삼았으며, 잉글랜드, 프랑스, 아라곤 왕국들과 레반트 지역의 십자군 국가들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으면서 거의 전 기독교 세력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그는 궁극적으로 비잔티움을 정복하기를 열망했을 수 있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성지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6세는 비잔티움 궁정에 자신이 우월하며 유일하게 합법적인 황제임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1194년까지 하인리히 6세는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이탈리아의 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하여 이탈리아 전역을 자신의 통치 아래 성공적으로 통합한 후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살라딘의 죽음 이후 이슬람 세계는 분열되었고, 프리드리히 1세의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이 약하다는 것을 드러냈으며, 이는 비잔티움을 공격하는 데 유용한 전쟁 명분(casus belli)을 제공했다. 게다가,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의 군주인 레본 1세는 왕관을 받는 대가로 하인리히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인리히 6세는 1195년에 포로가 된 이사키오스 2세의 딸 이리니 안젤리나와 자신의 동생 필리프 폰 슈바벤을 결혼시켜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동생에게 미래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왕조에 대한 권리를 부여했다.

같은 해 1195년, 하인리히 6세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사단을 파견하여 이사키오스 2세에게 시칠리아의 왕 구기에르무 2세가 이전에 정복했던 두러스에서 테살로니키까지 이르는 땅을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새로운 십자군을 위해 비잔티움 황제가 해군 지원을 약속하기를 바랐다. 비잔티움 역사가들에 따르면, 독일 대사들은 하인리히 6세를 마치 '황제 중의 황제'이자 '군주 중의 군주'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하인리히 6세는 비잔티움이 평화를 보장받는 대가로 일반적으로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하려 했으며, 그의 사절단은 프리드리히 1세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티움이 제기했던 불만들을 다시 거론했다. 저항할 힘이 없었던 이사키오스 2세는 요구 조건을 금전적인 것으로 수정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러한 조건에 동의한 직후 그는 폐위되었고 그의 형인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새로운 비잔티움 황제가 되었다.

하인리히 6세는 알렉시오스 3세에게도 성지로 가는 길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할 수도 있다는 위협을 가하며 성공적으로 조공(Alamanikon)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하인리히 6세는 기독교 세계 전체의 지도자가 되려는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전통적인 영역인 독일과 이탈리아만을 직접 통치하려 했지만, 다른 어떤 제국도 보편적 권력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고 모든 유럽 국가들이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비잔티움 제국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려는 시도는 프랑스, 잉글랜드, 아라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키프로스, 그리고 레반트십자군 국가들로 자신의 봉건적 지배권을 확장하려던, 부분적으로 성공한 계획의 일부였다. 레반트에 기반 시설을 건설하고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와 키프로스의 종주권을 확보한 것을 바탕으로, 하인리히 6세는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을 침공하여 경쟁 제국을 자신의 통치 하에 통합하는 것을 고려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하인리히 6세가 황제 직위를 선거제가 아닌 세습제로 만들려던 계획과 마찬가지로, 시칠리아와 독일 내부의 문제로 인해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하인리히 6세의 위협은 비잔티움 제국에 상당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응하여 알렉시오스 3세는 자신의 황제 칭호를 약간 변경했다. 그리스어로는 ἐν Χριστῷ τῷ Θεῷ πιστὸς βασιλεὺς θεοστεφὴς ἄναξ κραταιὸς ὕψιστος αὔγουστος καὶ αὐτοκράτωρ Ῥωμαίων|엔 크리스토 토 테오 피스토스 바실레우스 테오스테페스 아낙스 크라타이오스 힙시스토스 아우구스토스 카이 아우토크라토르 로마이온grc, 라틴어로는 in Christo Deo fidelis imperator divinitus coronatus sublimis potens excelsus semper augustus moderator Romanorum|인 크리스토 데오 피델리스 임페라토르 디비니투스 코로나투스 수블리미스 포텐스 엑스켈수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모데라토르 로마노룸la로 바꾸었다. 이전의 비잔티움 황제들은 βασιλεὺς καὶ αὐτοκράτωρ Ῥωμαίων|바실레우스 카이 아우토크라토르 로마이온grc("로마의 황제이자 전제자")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하지만 알렉시오스 3세의 칭호는 '바실레우스(basileus)'를 분리하고 그 자리에 '아우구스투스(augoustos)'를 넣었다. 이는 알렉시오스 3세가 단순히 황제(바실레오스)일 뿐이며, '로마의 전제자'(moderator Romanorum|모데라토르 로마노룸la)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명시적으로 '로마의 황제'는 아니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통해 그는 독일의 라이벌과의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고, 서방 세계에 덜 자극적인 칭호를 사용하려 했다. 알렉시오스 3세의 후계자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이러한 관행을 이어받아, 심지어 moderator Romanorum|모데라토르 로마노룸la의 순서를 뒤집어 Romanorum moderator|로마노룸 모데라토르la로 만들기도 했다.

3. 3. 3. 라틴 제국

제4차 십자군(1202~1204)의 진군로와 십자군이 끝난 뒤에, 이전의 비잔티움 제국 국경 내의 정치적 상황의 모습.


일련의 사건들과 베네치아의 개입으로 인해 제4차 십자군(1202~1204)은 원래 목표였던 이집트 대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게 되었다. 십자군이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을 때, 그들은 라틴 제국을 세우고 교황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 새로운 영역을 비잔티움 제국과 동일하게 사용되던 용어인 ''imperium Constantinopolitanum''(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이라고 불렀다. 이는 십자군이 가톨릭 황제 보두앵 1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좌에 앉히고 제국의 행정 구조를 봉건적인 네트워크로 변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비잔티움 제국을 대체하는 새로운 독립체가 아니라 계승하는 것으로 여겼음을 시사한다. 특히 보두앵 1세는 왕이 아닌 황제로 임명되었다. 이는 십자군이 서방 기독교인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을 진정한 로마 제국으로, 그 군주를 유일하고 진정한 황제로 인정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결정이며, 라틴 제국의 설립 조약은 제국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봉사하도록 명시했다.

첫 번째 라틴 황제 보두앵 1세의 옥새. 생략한 ''Rom.''은 ''Romaniae''(로마니아) 혹은 ''Romanorum''(로마인)을 언급할 때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라틴 제국의 통치자들은 교황과의 서신에서는 자신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imperator Constantinopolitanus'')나 '로마니아의 황제'(''imperator Romaniae'', 로마니아는 비잔티움 사람들이 '로마인의 땅'을 의미하는 용어)라고 칭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잔티움 제국의 전임 황제들과 거의 동일한 칭호를 사용했다. 라틴 황제의 공식 칭호(''Dei gratia fidelissimus in Christo imperator a Deo coronatus Romanorum moderator et semper augustus'')는 알렉시오스 4세의 칭호 라틴어 버전(''fidelis in Christo imperator a Deo coronatus Romanorum moderator et semper augustus'')과 거의 같았다. 이처럼 라틴 제국 황제의 칭호는 알렉시오스 3세가 만들었던 타협적인 성격을 이어갔다. 보두앵 1세는 자신의 옥새에서 ''Romanorum''을 ''Rom.''으로 줄여 표기했는데, 이는 ''Romanorum''(로마인의)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Romaniae''(로마니아의)를 의미하는지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편리하고 미묘한 조정이었다.

라틴 황제들은 ''Romanorum''나 ''Romani''라는 용어를 서방의 개념인 '지리적인 로마인'(로마 시 거주자)으로 보지도 않았고, 비잔티움의 개념인 '민족적인 로마인'(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비잔티움 시민)으로 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이 용어를 로마 황제에게 속한 모든 신민, 즉 다민족 제국(라틴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등을 포함)의 모든 신민을 포괄하는 정치적 정체성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의 로마적 성격을 수용한 것은 라틴 황제들을 서방의 ''translatio imperii''(제국 이전) 개념과 충돌하게 만들 수 있었다. 더욱이 라틴 황제들은 ''Deo coronatus''(신에 의해 왕관을 쓴)라는 권위를 주장했는데, 이는 신성 로마 황제들이 교황에게 대관식을 의존했기 때문에 주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라틴 황제들이 신성 로마 제국을 '진정한' 로마 제국으로 인정했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적어도 신성 로마 황제와 동등한 지위를 주장했다. 1207년에서 1208년 사이, 라틴 황제 앙리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선출되었으나 아직 황제로 즉위하지 못한 로마인의 왕(rex Romanorum)인 필리프 폰 슈바벤(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와의 경쟁으로 인해 황제가 되지 못함)의 딸과의 결혼을 제안했다. 필리프의 사절은 앙리가 ''advena''(이방인, 외부인)이자 ''solo nomine imperator''(이름뿐인 황제)이며, 앙리가 필리프를 ''imperator Romanorum''(로마인의 황제)이자 ''suus dominus''(그의 주군)으로 인정해야만 결혼을 승낙할 것이라고 답했다.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으므로, 라틴 황제들이 신성 로마 황제에게 복종하는 것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라틴 제국의 등장과 황제들에 의해 촉진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가톨릭 교회 복종은 ''translatio imperii'' 개념을 ''divisio imperii''(제국의 분할)라는 개념으로 수정하게 만들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받아들인 이 생각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국의 권좌로, 그 통치자들을 서방에서 이미 인정받은 황제들과 함께 통치할 합법적인 황제로 공식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결과 라틴 제국은 서방에서 어떠한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행사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동유럽과 동지중해, 특히 레반트 지역의 십자군 국가들에 대해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서방에서 행사했던 것과 유사한 종교적, 정치적 패권을 강요하려 했으며, 이 지역에서 신성 로마 황제의 영유권 주장에 반대했다.

3. 4. 비잔티움 제국의 복원

1261년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는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다. 미하일 황제와 그의 왕조는 서방과의 화해를 추구했지만, 비잔티움 제국 내의 신민들은 이에 크게 실망했다.


1261년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은 복원되었지만, 이는 교황청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그들의 종교적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비잔티움인들은 다시 한번 로마 황제의 지위뿐만 아니라, 로마 중심의 교회로부터 독립된 교회를 가질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미하일 8세 시대의 교황들은 비잔티움에 대한 종교적 권위를 계속 주장하려 했다. 미하일 8세는 서방에서 교황이 가진 상당한 영향력을 인지하고 있었고,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직후 당시 교황 우르바노 4세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 도착한 두 명의 사절단은 즉시 투옥되었고, 한 명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잔혹한 일을 당했으며, 다른 한 명만이 간신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쳐 돌아올 수 있었다.

1266년부터 1282년 사망할 때까지 미하일 8세는 시칠리아의 왕 카를루 1세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렸다. 카를루 1세는 라틴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주기적으로 교황의 지원을 등에 업고 비잔티움을 압박했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 미하일 8세와 그의 후계자인 팔레올로고스 왕조 황제들은 로마 교회동방 정교회의 재결합을 추진했다. 이는 미하일 8세가 오직 교황만이 카를루 1세를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비잔티움 사절단은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공식적으로 로마 교회와 재통합되어 200년 이상 단절되었던 교류를 회복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미하일 8세는 "당신은 프랑크인이 되었다"는 조롱을 받아야 했다.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가톨릭으로 개종한 그리스인들을 조롱하는 표현으로 남아 있다. 교회 통합은 비잔티움 신민들, 정교회 성직자들, 심지어 황실 내부에서도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미하일 8세의 여동생 에울로기아와 그녀의 딸 안나(에페이로스 전제공국의 군주 니키포로스 1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아내)는 반통합 운동의 주요 지도자였다. 니키포로스 1세와 그의 이복형제 테살리아의 요안니스 1세 두카스, 심지어 트라페준타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까지 반통합 운동에 가담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도망치는 반대파들을 지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통합은 미하일 8세의 주요 목표였던 서방 세계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통치자로서의 합법성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또한 아나톨리아의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한 십자군 파병에 대한 미하일 8세의 제안은 공의회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실제 실행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1281년, 당시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카를루 1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하일 8세를 파문했고, 교회 통합은 사실상 파기되었다. 미하일 8세 사후,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카를루 1세의 침공 위협이 사라지자 그의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는 비잔티움 내부에서 증오의 대상이었던 교회 통합을 즉시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미하일 8세 사후에도 교황들은 주기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을 고려하며 로마 교회의 통치를 강요하려 했지만,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미하일 8세는 이전 황제들과 달리 교황이 서신이나 리옹 공의회에서 자신을 '그리스인의 황제'라고 부르는 것에 항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보편적인 황제권에 대한 개념은 변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빠르게 팽창하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포위된 1395년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안토니오스 4세는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전히 보편 제국의 개념을 강조하며, 비잔티움 황제 외에 다른 이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불법'이며 '부자연스럽다'고 주장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점점 더 커지자, 미하일 8세의 후계 황제들, 특히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와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는 신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해 교회 통합을 다시 시도했다.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서 황제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는 얼마 남지 않은 제국 영토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임박한 공격을 막기 위해 교회 통합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이는 비잔티움 신민들에게 그들의 신앙과 제국의 정체성, 세계관을 배반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서방의 지원을 약속받은 교회 통합은 오히려 제국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요안니스 8세의 노력으로 조직된 바르나 십자군은 1444년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참패하면서 재앙으로 끝났고, 서방의 약속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4. 비잔티움 제국-불가리아 분쟁

로마노스 1세가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와 협상하는 모습, 15세기 세밀화 채식필사본(''Radziwiłł Chronicle'').


비잔티움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분쟁은 주로 외교 영역에 머물렀고, 실제로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두 제국 간의 지리적 거리 때문에 대규모 원정이 어려웠기 때문일 수 있다. 비잔티움인들은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의 상황보다는 주변 지역의 정치적 변화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서방 영토를 언젠가는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913년, 불가리아 제1제국크냐지 시메온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까지 진격했다. 시메온 1세는 불가리아의 독립 인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대체하는 새로운 보편 제국으로 인정받기를 요구했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콜라스 미스티코스는 시메온에게 황제의 관을 수여했다. 하지만 이는 시메온을 '로마인의 황제'가 아닌 '불가리아인의 황제'로 인정하는 다소 기만적인 외교적 조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잔티움 제국은 시메온이 스스로를 '불가리아인의 황제'뿐만 아니라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고 칭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문제는 927년 시메온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페터르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보편 제국에 대한 복종의 표시로 자신을 '불가리아인의 황제'라고만 칭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시메온의 주장에서 비롯된 분쟁은 이후 강력한 불가리아 군주들에 의해 다시 불거졌다. 칼로얀(재위 1196년–1207년)과 이반 아센 2세(재위 1218년–1241년)는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다시 사용했다. 칼로얀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황제로 인정받으려 했으나, 교황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왕으로 즉위시킬 추기경을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1346년에는 세르비아 제국스테판 두샨이 자신을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로 칭하면서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5. 신성 로마 제국-오스만 제국 분쟁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이 동방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면서 두 황제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스스로를 Kayser-i Rûm|카이세리 룸ota(로마 제국의 카이사르)이라 칭하며 로마 황제의 계승자로서 세계 지배를 주장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전통을 계승하려 노력했다. 도시를 크게 바꾸지 않고 복원 작업에 힘썼으며, 새로운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로 겐나디오스 스콜라리오를 임명하고, 비잔티움 황제처럼 자신의 주화를 발행했다. 또한 비잔티움의 영향을 받은 엄격한 궁정 의례를 도입하기도 했다.

메흐메트 2세(왼쪽)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유산을 주장했다. 그와 후계 술탄들은 16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오른쪽은 겐나디오스 스콜라리오 총대주교)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메흐메트 2세의 황제 칭호와 세계 지배 주장은 인정받았다. 역사가 미하일 크리토불로스는 술탄을 '황제의 황제', '전제 군주' 등으로 묘사했으며, 베네치아에 보낸 편지에서도 메흐메트는 '황제'로 불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옛 비잔티움 제국의 시민들(스스로를 여전히 '로마인'으로 여김) 역시 오스만 제국을 자신들의 제국, 즉 보편 제국으로 받아들였다. 수도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였고, 통치자 메흐메트 2세는 바실레우스로 인식되었다.

오스만 술탄들은 이전 비잔티움 황제들처럼 자신들의 제국적 지위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냈다. 외교 문서에서 신성 로마 황제는 황제가 아닌 빈이나 헝가리의 kıral|크랄ota(왕)으로 불렸다. 이러한 관행은 1533년 오스만 제국(쉴레이만 1세 치세)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대신한 페르디난트 1세 대표) 사이에 체결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조약을 통해 더욱 확고해졌다. 이 조약에서 페르디난트 1세는 독일의 왕으로, 카를 5세는 스페인의 왕으로 규정되었다. 이들의 지위는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과 동등한 수준으로 간주되어, 술탄의 황제 칭호보다 낮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또한 조약은 오스만 술탄 외에는 누구도 황제로 인정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고대 로마의 대리석 흉상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마지막 신성 로마 황제프란츠 2세의 대리석 흉상의 모습.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두 황제 문제는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한 후 1606년 지토바토로크 조약을 체결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이 조약에서 오스만 술탄 아흐메트 1세는 처음으로 신성 로마 황제 루돌프 2세를 kıral|크랄ota(왕)이 아닌 Padişah|파디샤ota(황제)라는 칭호로 부르며 공식적으로 황제로 인정했다. 다만 아흐메트 1세는 서신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쓰는 표현을 사용하여, 여전히 오스만 제국이 신성 로마 제국보다 우위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려 했다.

지토바토로크 조약 이후 오스만 술탄이 신성 로마 황제를 공식적으로 황제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는 여전히 술탄이 유일한 보편적 통치자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예를 들어, 1798년 예루살렘 총대주교 안티무스는 오스만 제국이야말로 신이 세운 지상 최고의 제국이며, 이는 팔레올로고스 왕조 황제들이 서방과의 타협으로 정통성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생각은 1798년에 그가 쓴 글에서 드러난다:

:''보라, 우리 자비롭고 전지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우리 거룩한 정교 신앙의 완전성을 보존하고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는가. 그분은 우리 로마 제국이 정교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의 강력한 제국을 무에서 창조하셨고, 이 오스만 제국을 다른 모든 제국 위에 세우시어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하셨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권위 외에는 다른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도 제국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 변화가 나타났다. 점차 고대 로마와의 직접적인 계승 관계보다는 독일적인 성격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15세기부터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로마-게르만 제국'(imperium Romano-Germanicum|임페리움 로마노-게르마니쿰la)이라는 용어도 사용되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신성 로마 제국을 고대 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계승자로 보기보다는, 중세 독일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체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16세기 이후 '황제'라는 칭호는 다른 국가의 군주들에게도 점차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 로마 황제들은 1806년 프란츠 2세가 퇴위하며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자신들이 고대 로마 황제의 정통 계승자임을 계속 주장했다.

6. 신성 로마 제국-러시아 분쟁

고대 로마 황제들이 주화에 새겨진 것을 따라 만든 주화로, 차르 표트르 1세월계관으로 꾸며져 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1488년 신성 로마 제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첫 번째 대사가 파견될 때부터 '두 황제 문제'는 모스크바로 옮겨가게 되었다. 1472년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는 마지막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딸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하고, 비공식적으로 모든 러시아 공국들의 '차르'(황제)임을 선언했다. 1480년에는 킵차크 칸국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제국의 상징인 쌍두수리를 자신의 상징 중 하나로 채택했다. 프스코프의 수도원장 필로페이(Филофей|필로페이ru)는 러시아가 로마 제국의 계승자라는 독특한 해석(translatio imperii)을 발전시켰다. 이 해석에 따르면, 첫 번째 로마는 이단(가톨릭)에게, 두 번째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교도(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했지만, 세 번째 로마인 모스크바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유지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1488년 이반 3세는 자신의 칭호를 황제와 동등하게 인정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다른 서유럽 통치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반 4세는 자신이 최초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제국적 주장을 더욱 강화했다. 1561년 그의 차르 대관식에서는 비잔티움의 대관식 의례를 교회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비잔티움의 상징물(Regalia)들을 러시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역사학자 마셜 포에 따르면, 제3의 로마 이론은 초기에 주로 성직자들 사이에서 퍼졌으며, 초기 역사 대부분 동안 모스크바는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차르그라드)에 종속된 것으로 여겨졌고, 이반 4세 역시 이러한 입장을 취했다. 포는 필로페이의 제3의 로마 교리가 범슬라브주의가 발전하기 전까지 러시아에서 거의 잊혀졌으며, 고의식파에서만 중요하게 여겨졌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교리가 표트르 1세나 예카테리나 2세의 외교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들 차르는 스스로를 로마 황제들과 비교하곤 했다. 제3의 로마 이념의 팽창주의적 해석은 1855년 알렉산드르 2세의 대관식 이후에 다시 부각되었고, 후대 러시아 작가들은 이를 통해 초기 근대 러시아를 재해석하기도 했다.

1697년~1698년 표트르 1세의 대사절단 파견 이전까지 차르 정부는 신성 로마 제국과 그 헌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표트르 1세 치하에서는 쌍두수리 문장의 사용이 늘어났고, 1709년 폴타바 전투 승리 후 주조된 동전에서는 차르를 고대 로마 황제처럼 묘사하는 등, 비잔티움적 요소보다는 고대 로마의 상징을 채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대북방 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여러 북독일 군주들과 동맹을 맺었고, 러시아군은 독일 북부에서 활동했다. 1718년 표트르 1세는 1514년 8월 4일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차르 바실리 3세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는데, 이 편지에서 막시밀리안 1세는 차르를 '카이저'(Kaiser|카이저de)라고 칭하며 암묵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인정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10] 그리고 1721년 10월, 표트르 1세는 공식적으로 '임페라토르'(imperator|임페라토르la, 황제)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들은 이 새로운 칭호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막시밀리안 1세의 편지가 러시아 군주에게 '카이저' 칭호를 사용한 유일한 사례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또한 표트르 1세가 제안한, 러시아와 독일 군주가 번갈아 가며 유럽의 최고 통치자가 되자는 제안도 거부되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는 오직 한 명의 황제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726년 카를 6세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1세 사이에 동맹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주는 신성 로마 황제와의 서신 교환에서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명시적으로 규정되었으며,[11] 동맹 조약 자체에는 황제 칭호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었다.[12]

러시아의 황제 칭호 주장이 점진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 당사국들은 러시아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1742년 마리아 테레지아가 통치하는 빈 궁정은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황제 칭호를 인정했지만, 러시아 군주의 동등성까지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경쟁자였던 황제 카를 7세는 1742년 자신의 대관식에서 러시아의 주장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고 동맹국인 프로이센(프로이센은 1721년 표트르 1세의 칭호 사용 직후 거의 즉시 이를 인정했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1743년 말 카를 7세는 어떤 형태로든 러시아의 칭호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정은 1744년 초에 이루어졌지만, 이때 카를 7세는 신성 로마 황제로서가 아니라 바이에른 선제후로서 행동했다.[13] 카를 7세가 사망할 때까지 이 문제는 제국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1745년이 되어서야 제국의 선제후 회의가 러시아의 주장을 인정했고, 이는 새로 선출된 황제 프란츠 1세(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가 작성한 문서를 통해 확인되어 1746년 제국 의회(Reichstag|라이히스타크de)에서 공식적으로 비준되었다.[14][15]

1733년에서 1762년 사이에 러시아군은 세 차례나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내에서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싸웠다. 1762년부터 1796년까지 러시아를 통치한 예카테리나 2세는 독일 공주 출신이었다. 1779년 예카테리나 2세는 테셴 조약을 중재하여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러시아는 프랑스, 스웨덴과 마찬가지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제국 헌법의 보증인이라고 주장했다. 1780년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여 새로운 그리스 제국 또는 복원된 비잔티움 제국을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했고, 이를 위해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당시 양측 모두에게 큰 기대를 모았으나, 그리스 계획과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제국은 이후 나폴레옹 전쟁에서 대프랑스 동맹의 일원으로 협력하고 유럽 협조 체제에 참여하게 된다. 신성 로마 제국과 러시아 간의 황제 칭호를 둘러싼 분쟁은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로 최종적으로 종결되었다.

7. 문장

참조

[1] 서적
[2] 서적 Czar A. and C. Black 1842
[3] 논문 Австро-русский альянс 1726 г.: долгий процесс при общих политических интересах сторон https://cyberleninka[...] 2016
[4] 서적 Recueil des Traités et Conventions conclus par la Russie avec les puissances étrangères, publié d' ordre du Ministère des Affaires Etrangères http://elib.shpl.ru/[...]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1874
[5] 논문 Russia, Prussia, and Great Britain, 1742-4 https://www.jstor.or[...] 1930-10
[6] 논문 Признание императорского титула российских государей Священной Римской империей: проблема и пути ее решения (первая половина 1740-х годов) https://nni.jes.su/s[...] 2022
[7] 논문 Герман Карл фон Кейзерлинг и признание императорского титула российских государей Священной Римской империей германской нации в 1745–1746 гг. https://cyberleninka[...] 2021
[8] 서적
[9] 서적
[10] 서적 Czar A. and C. Black 1842
[11] 논문 Австро-русский альянс 1726 г.: долгий процесс при общих политических интересах сторон https://cyberleninka[...] 2016
[12] 서적 Recueil des Traités et Conventions conclus par la Russie avec les puissances étrangères, publié d' ordre du Ministère des Affaires Etrangères http://elib.shpl.ru/[...]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1874
[13] 논문 Russia, Prussia, and Great Britain, 1742-4 https://www.jstor.or[...] 1930-10
[14] 논문 Признание императорского титула российских государей Священной Римской империей: проблема и пути ее решения (первая половина 1740-х годов) https://nni.jes.su/s[...] 2022
[15] 논문 Герман Карл фон Кейзерлинг и признание императорского титула российских государей Священной Римской империей германской нации в 1745–1746 гг. https://cyberleninka[...]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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