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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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메이저는 1943년 영국에서 태어나, 은행원으로 일하다 1964년 정계에 입문했다. 1979년 하원 의원으로 당선된 후 여러 직책을 거쳐 1989년 외무장관, 이어서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1990년 마거릿 대처의 사임으로 총리가 되었으며, 1992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재선에 성공했으나, 경제 침체, 유럽 연합 문제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했다.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자서전 출판, 자선 활동, 강연 등을 하며 활동했다. 그는 북아일랜드 평화 과정에 기여하여 훈장을 받았고, 2005년에는 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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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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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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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존 메이저 |
출생일 | 1943년 3월 29일 |
출생지 | 세인트헬리어, 서리, 잉글랜드 |
정당 | 보수당 |
배우자 | 노마 존슨(1970년 10월 3일 결혼) |
자녀 | 2명 |
아버지 | 톰 메이저-볼 |
형제자매 | 테리 메이저-볼 (형) |
학력 | 러틀리시 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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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직위 | |
영국 총리 | 재임 시작: 1990년 11월 28일 재임 종료: 1997년 5월 2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부총리 | 마이클 헤셀틴 (1995–1997) |
야당 대표 | 재임 시작: 1997년 5월 2일 재임 종료: 1997년 6월 19일 |
총리 | 토니 블레어 |
부총리 | 마이클 헤셀틴 |
보수당 대표 | 재임 시작: 1990년 11월 27일 재임 종료: 1997년 6월 19일 |
부대표 | 화이트로 남작 위슬로 (1990–1991) |
재무장관 | 재임 시작: 1989년 10월 26일 재임 종료: 1990년 11월 28일 |
총리 | 마거릿 대처 |
외무장관 | 재임 시작: 1989년 7월 24일 재임 종료: 1989년 10월 26일 |
총리 | 마거릿 대처 |
재무부 수석 비서관 | 재임 시작: 1987년 6월 13일 재임 종료: 1989년 7월 24일 |
총리 | 마거릿 대처 |
하급 장관 직위 | |
사회보장부 장관 | 재임 시작: 1986년 9월 10일 재임 종료: 1987년 6월 13일 |
총리 | 마거릿 대처 |
사회보장부 차관 | 재임 시작: 1985년 9월 2일 재임 종료: 1986년 9월 10일 |
총리 | 마거릿 대처 |
재무부 위원 | 재임 시작: 1984년 10월 3일 재임 종료: 1985년 11월 1일 |
총리 | 마거릿 대처 |
의회 의원 | |
의회 | 영국 |
선거구 | 헌팅던 헌팅던셔 (1979–1983) |
임기 시작 | 1979년 5월 3일 |
임기 종료 | 2001년 5월 14일 |
기타 정보 | |
작위 | 가터 훈장 기사 (KG) 컴패니언 오브 아너 훈장 컴패니언 (CH) 추밀원 고문관 (PC) 욱일대수장 |
선거 역사 | 선거 역사 |
헌팅던 지역구 의원 | 헌팅던 지역구 |
1990년 예산 | 1990년 예산 |
총리 재임 기간 | 총리 재임 기간 |
제1차 내각 및 임기 (1990년 11월 ~ 1992년 4월) | 1990년 대표 선거 내각 시민 헌장 차터 마크 콘 핫라인 1990년대 초 경기 침체 걸프 전쟁 1992년 총선 |
제2차 내각 및 임기 (1992년 4월 ~ 1997년 5월) | 내각 검은 수요일 국가 복권 1992년 고등 및 추가 교육법 자율 학교 마스트리흐트 조약 반란자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 다운링 가 박격포 공격 다운링 가 선언 영국 훈장 제도 1993년 검토 시의회세 아동 지원 기관 1993년 불신임 투표 기본으로 돌아가기 영국 철도 민영화 1994년 형사 사법 및 공공 질서법 1995년 대표 선거 컬렌 보고서 현금 대 질문 공직 생활 기준 위원회 무기 대 이라크 사건 스콧 보고서 영국 광우병 발병 위럴 사우스 보궐선거 사임 훈장 |
저서 | 자서전 단순한 게임 그 이상 나의 아버지 |
2. 생애
잉글랜드 서리주 출신으로, 16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1964년 보수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79년 총선에서 영국 하원 의원으로 당선된 이후, 마거릿 대처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 비서, 외무장관, 재무장관 등 주요 직책을 거치며 빠르게 승진했다.
1990년 11월, 마거릿 대처의 갑작스러운 사임 이후 치러진 보수당 당수 경선에서 승리하여 영국 총리직에 올랐다.[38] 당시 47세로, 20세기 영국 최연소 총리 중 한 명이었다. 총리 취임 초기에는 1990년대 초 경기 침체로 인한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등 어려운 경제 상황에 직면했다.[41][44][45]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2년 총선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노동당에 승리하여 보수당의 4연속 집권을 이끌었다.[46][47][48]
메이저 내각은 미국과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유럽 연합(EU)과의 관계 설정에 주력했다. 그는 마스트리흐트 조약 체결을 이끌었으나,[51] 이는 유럽 통합 문제를 둘러싼 보수당 내 극심한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당내 강경파인 '유로 반란군(Euro-rebels)'과의 갈등은 그의 재임 기간 내내 지속되며 리더십에 큰 부담을 주었다.
경제적으로는 1992년 9월 블랙 웬즈데이 사태로 영국 파운드화가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서 탈퇴하는 위기를 겪으며 보수당의 경제 운영 능력에 대한 신뢰가 크게 흔들렸다.[50] 이후 영국 경제는 회복세로 돌아섰지만,[42] '블랙 웬즈데이'의 충격과 연이은 정치 스캔들, 당내 분열 등으로 인해 정부 지지율은 회복되지 못했다.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의 초기 단계를 추진하는 등의 성과도 있었으나, 전반적인 국정 운영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지 못했다.
1997년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신노동당'에 역사적인 대패를 당하며 18년간의 보수당 집권은 막을 내렸다.[56] 선거 패배 직후 메이저는 "막이 내릴 때는 무대에서 내려올 때"라는 말을 남기고 보수당 대표직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윌리엄 헤이그가 후임 대표로 선출될 때까지 약 7주간 야당 대표직을 수행했다.[57][59][60]
총리직 퇴임 후에도 2001년 총선까지 하원 의원직을 유지했으며,[62] 2001년 정계 은퇴 시 귀족 작위 제안을 거절했다.[65]
은퇴 후 메이저는 자서전(존 메이저: 자서전)[67]과 크리켓[69], 뮤직홀[70] 관련 저서를 출간했다. 평생의 취미였던 크리켓 관련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서리 카운티 크리켓 클럽 회장(2000-2001)[71], 메릴본 크리켓 클럽(MCC) 위원(2005-2011)[74] 등을 역임했다.
또한 영국 천식협회 회장,[99] 퀸 엘리자베스 다이아몬드 주년 기념 트러스트 의장(2012~)[78] 등 다양한 자선 활동과 함께, 크레디트 스위스,[80] 카일라일 그룹,[83] 글로벌 인프라스트럭처 파트너스[99] 등 여러 기업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1997년 다이애나비 사망 후에는 윌리엄 왕세자와 해리 왕자의 법적 후견인으로 임명되기도 했다.[87]
존 메이저에 대한 평가는 복합적이다. 온화하고 중도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유럽 문제 등을 둘러싼 극심한 당내 분열과 '블랙 웬즈데이' 사태, 스캔들 등으로 인해 재임 기간 내내 리더십 부족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126] 언론 역시 대체로 그에게 비판적이었다.[129]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 추진, 경제 회복 기반 마련, 공공 부문 개혁 시도 등이 재평가받기도 한다.[131][133] 일부에서는 그가 어려운 정치적 환경 속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후 토니 블레어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한다.[134][136] 하지만 여전히 그의 리더십과 정책적 성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137]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43-1959)

존 메이저는 1943년 3월 29일 잉글랜드 서리주 카숄턴의 세인트 힐리어 병원 및 퀸 메리 어린이 병원에서 태어났다.[228] 아버지는 배우이자 정원 장식가인 톰 메이저-볼(Tom Major-Ball, 1879–1962)이었고, 어머니는 그웬 메이저(Gwen Major, 결혼 전 성씨 코츠, 1905–1970)였다.[229][230] 메이저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63세였다.[3] 그는 '존 로이 메이저(John Roy Major)'로 세례를 받았지만, 그의 출생 증명서에는 '존 메이저(John Major)'만 기록되었다.[4] 그는 1980년대 초까지 자신의 중간 이름을 사용했다.[5]
메이저는 런던 램버스구 브릭스턴에서 자랐다.[230] 그래머 스쿨인 럿리시 스쿨에 다녔으나,[230] 1959년 16세 생일 직전에 역사, 영어, 영문학 세 과목의 O-레벨 시험에만 합격하고 학교를 중퇴하여[8]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았다.[228]
메이저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이 영국 하원에서 해롤드 맥밀런이 재무장관으로서 예산안을 발표하는 것을 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다.[5][10]
2. 2. 학교 졸업 후 경력 (1959-1979)
메이저의 첫 직업은 1959년 런던에 본사를 둔 보험 중개 회사 알렉산더 포브스 그룹 홀딩스의 사무직원이었으나, 단조로운 업무와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곧 그만두었다. 이후 형 테리와 함께 정원 장식 사업을 시작했고, 1959년 이 사업을 매각한 자금으로 가족은 브릭스턴 버턴 로드 80번지의 더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메이저의 아버지는 1962년 3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존은 이듬해 병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장식 사업을 그만두었지만, 어머니가 회복된 후에도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1962년 하반기 대부분을 실업 상태로 보냈는데, 그는 이 시기를 "굴욕적"이었다고 회고했다.이후 메이저가 영국 수상이 되었을 때, 그가 버스 안내원 시험에서 떨어진 이유가 수학 시험 낙제 때문이라는 잘못된 보도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모든 필수 시험에 합격했지만 키가 작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이 시기 그는 통신 교육을 통해 은행업 자격증을 공부했다.[11] 마침내 1962년 12월, 그는 엘리펀트 앤 캐슬에 있는 런던 전력청(LEB)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1959년, 메이저는 브릭스턴에서 청년 보수당에 가입하여 매우 활동적인 회원이 되었다. 이는 학창 시절의 실패 이후 그의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보수당 동료 데릭 스톤의 격려로 브릭스턴 시장에서 거리 연설대에 올라 연설을 시작하기도 했다. 전기 작가 앤서니 셀던에 따르면, 메이저는 브릭스턴 토리당에 "젊은 활력"을 불어넣었지만, 때때로 전문 에이전트 마리온 스탠딩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64년, 21세의 나이로 램버스 런던 자치구 의회 선거에 라크홀 선거구 후보로 출마했으나 노동당에 패배했다. 그는 또한 1964년 영국 총선에서 케네스 페인, 1966년 영국 총선에서 피어스 딕슨 등 지역 보수당 후보들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이 시기 메이저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인물은 장 키어런스였다. 메이저보다 13살 연상의 이혼녀로 두 아이를 둔 그녀는 메이저 가족의 집 맞은편 버턴 로드에 살았으며, 그의 멘토이자 연인이 되었다. 셀던은 "그녀는… 메이저의 외모를 단정하게 하고, 정치적으로 단련시켰으며, 그를 더 야심차고 세련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메이저는 1965년 가족이 버턴 로드를 떠나자 키어런스와 함께 살았고, 그들의 관계는 1963년부터 1968년 이후 어느 시점까지 지속되었다.[12]

메이저는 런던 전력청(LEB)을 떠나 1965년 5월 디스트릭트 은행에 취직했지만, 이듬해 해외 근무 기회를 찾아 스탠다드 은행으로 옮겼다. 1966년 12월, 그는 나이지리아 조스로 장기 파견 근무를 떠났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매우 즐겼지만 일부 외국인 노동자들의 무신경한 인종차별에 실망하기도 했다. 1967년 5월, 그는 심각한 자동차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본국으로 후송되어야 했다.[13] 병원에서 퇴원한 후, 그는 장 키어런스의 집과 메이페어의 작은 임대 아파트를 오가며 스탠다드 은행 런던 사무실에서 근무했고, 여가 시간에는 은행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청년 보수당 활동을 재개했다.
메이저는 1968년 램버스 런던 자치구 의회 선거에서 퍼런데일 구 후보로 다시 출마했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노동당 강세 지역이었지만, 1968년 4월 이노크 파월의 반이민 연설인 '피의 강 연설' 이후 보수당 지지율이 급등한 덕분에 당선되었다. 메이저 자신은 파월의 견해에 강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흐름 속에서 승리했다. 그는 당시 과밀과 열악한 임대 주택 문제로 악명 높았던 램버스의 주택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 2월, 메이저는 주택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여러 대규모 공영 주택 단지 건설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았다. (메이저는 나중에 대규모 고층 아파트 단지 건설을 지지한 것을 후회했다고 밝혔다. 1992년 4월 노동당이 운영하는 램버스 의회는 자치구에 메이저를 기념하는 명판 설치 계획을 거부하고 "스톡웰 공원과 무어랜드 단지의 형태로 이미 존 메이저에게 충분한 기념물이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또한 의회의 개방성을 높이고 지역 주민들과의 공개 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했으며, 네덜란드, 핀란드, 소련 등으로 현장 조사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램버스 주택팀이 전국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는 1971년 램버스 런던 자치구 의회 선거에서 의석을 잃었다.
1970년 4월, 메이저는 브릭스턴의 보수당 행사에서 노르마 메이저를 만났고, 두 사람은 곧 약혼하여 1970년 10월 3일 브릭스턴의 세인트 매슈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존의 어머니는 결혼 직전인 9월,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5][16] 존과 노르마는 존이 1969년에 구입한 스트리섬 프리머스 코트의 아파트로 이사했고, 1971년 11월 첫 아이인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1974년 부부는 베켄햄 웨스트 오크의 더 큰 집으로 이사했으며, 1975년 1월 두 번째 아이인 아들 제임스를 낳았다. 한편, 메이저는 1972년 은행 자격증을 취득한 후 스탠다드 은행(1975년부터 스탠다드 차타드로 사명 변경)에서 계속 근무했다. 1976년 8월에는 홍보부장으로 승진했으며, 업무상 종종 동아시아로 출장을 가기도 했다.
1971년 램버스 구의회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는 정치적 야망을 버리지 않았고, 보수당 친구들의 도움으로 보수당 중앙당의 잠재적 국회의원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노동당이 장악하고 있던 세인트 판크라스 노스 선거구의 보수당 후보로 선출되어 1974년 2월 영국 총선과 1974년 10월 영국 총선에 출마했지만, 두 번 모두 노동당의 앨버트 스탤러드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후 메이저는 당선 가능성이 더 높은 지역구의 후보가 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1976년 12월이 되어서야 성공했다. 점점 좌절감을 느끼던 메이저는 마지막 시도로 여겨지던 안전한 보수당 지역구인 헌팅던셔 후보 공모에 지원하여 마침내 후보로 선출되었다. 런던에서 태어나고 자란 메이저가 지주 가문이 많은 시골 지역구 후보로 선택된 것은 다소 이례적이었으나, 당시 해당 지역으로 유입되던 상향 이동 성향의 런던 출신 유권자들에게 가장 어필할 수 있는 후보로 여겨졌다. 그는 지역구 국회의원 데이비드 렌턴의 도움을 받아 지역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1977년 메이저 가족은 헤밍퍼드 그레이 마을의 드 베어 클로즈에 있는 집을 구입했다. 메이저는 스탠다드 차타드에서 업무 부담이 적은 직책으로 옮겼고, 1978년부터는 지역구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2. 3. 초기 의정 활동 (1979-1987)
1979년 영국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승리하면서, 존 메이저는 헌팅던셔 지역구에서 상당한 표 차이로 영국 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17][230][228] 그는 1979년 6월 13일 하원에서 가진 첫 연설을 통해 정부 예산안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18] 초기 의정 활동 시기 동안 메이저는 당내 여러 그룹과 관계를 구축하며 보수당 의원들의 비공식 모임인 '가이 포크스 클럽'에 참여했고, 다양한 위원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환경위원회 서기를 맡았으며, 협의회 주택 세입자들에게 주택 매입권을 부여하는 내용의 주택법 1980 관련 작업에도 참여했다.
메이저의 첫 정부 직책은 1981년 1월, 당시 내무부 국무장관이었던 패트릭 메이휴와 티모시 레이슨의 의회 사무관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외교 분야 경험을 쌓기 위해 1982년 4월에는 여러 노동당 의원들과 함께 중동 지역을 방문했다. 이 방문에서 그는 레바논에서 요르단 후세인 국왕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를 만났고, 이스라엘에서는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시위대 간의 총격전에 잠시 휘말리기도 했다.
1983년 1월, 메이저는 동앵글리아 지역구 의원들을 담당하는 의원 채찍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지역구 내에 위치한 RAF 몰스워스 공군 기지에 순항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에 대응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러 평화 단체들이 기지 주변에 상주하며 '평화 캠프'를 설치하자, 메이저는 시위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 집회에 참석하고, 빌 웨스트우드 당시 케임브리지셔 의회 의장 및 마이클 헤셀틴 국방장관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했다. 시위대는 결국 1984년 2월 강제 퇴거 조치되었다.[19]
1983년 영국 총선에서 메이저는 선거구 개편으로 신설된 헌팅던 지역구에서 재선되었다.[230] 이후 그는 당시 보수당의 유망주로 여겨지던 의원들의 모임인 '블루칩' 그룹에 초청받았고, 1984년 10월에는 재무부 채찍으로 승진했다. 2002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메이저는 이 시기부터 보수당 동료 의원이자 후에 보건 사회복지부 차관이 되는 에드위나 커리와 불륜 관계를 맺었으며, 이 관계는 1988년까지 지속되었다.[20][21] 1984년 10월, 메이저는 IRA가 브라이턴의 그랜드 호텔에서 일으킨 브라이턴 호텔 폭탄 테러 당시 폭탄이 터지기 몇 시간 전에 호텔을 떠나 화를 면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외무장관을 대신하여 콜롬비아, 페루, 베네수엘라 등 남미 국가들을 순방하기도 했다.
1985년 9월, 메이저는 보건 사회복지부(DHSS)의 국무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1986년 9월에는 같은 부서의 국무장관으로 승진했다. DHSS는 당시 영국 정부 부처 중 규모가 컸기 때문에, 이곳의 장관직은 다른 부처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큰 책임과 권한을 가졌다. 메이저는 1986년 사회보장법 제정 과정에 참여했으며 장애인 지원 제도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86년 10월 보수당 연례 대회에서 처음으로 주요 연설을 하며 당내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7년 1월, 영국 전역에 기록적인 한파가 닥쳤을 때, 메이저는 노인들을 위한 한파 지원금 지급 문제로 처음으로 대중적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23][24] 거센 언론 비판 속에서 메이저는 마거릿 대처 총리와 직접 논의하여 지원금 증액 결정을 이끌어냈다.
2. 4. 내각 경력 (1987-1990)
1987년 영국 총선 이후 마거릿 대처 내각에 재무부 장관 비서(Chief Secretary to the Treasury)로 입각하며 본격적인 내각 경력을 시작했다.[231] 그는 1979년 하원에 입성한 동기 의원들 중 처음으로 내각에 진입한 인물이었으며, 예산 관리 능력을 인정받았다.[228]1989년 7월에는 제프리 하우의 뒤를 이어 외무·영연방장관에 임명되었으나,[232] 불과 3개월 만인 같은 해 10월, 나이젤 로손 재무장관이 사임하자 그 후임으로 재무장관 자리를 맡게 되었다.[233] 이로써 메이저는 내각 입성 2년여 만에 영국의 고위직 중 외무장관과 재무장관 두 자리를 연이어 경험하게 되었다. 재무장관으로서 그는 당시 영국의 주요 경제 현안이었던 인플레이션 억제와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 가입 문제 등을 다루었다.[235]
2. 4. 1. 재무부 장관 비서 (1987-1989)
1987년 영국 총선에서 의석을 유지하고 다수당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한 후,[231] 영국 내각의 재무부 장관 비서(Chief Secretary to the Treasury)로 승진하여 첫 입각하였다. 이는 1979년 하원에 입성한 동기 의원들 중 내각에 진입한 첫 번째 사례였으며, 이때 영국 추밀원에도 임명되었다.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나이젤 로손 아래에서 메이저는 주로 국무장관들과 각 부처의 예산을 협상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이 논의를 순조롭게 진행하여, 수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 중재 절차인 소위 '별실 재판' 없이 예산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예산 관리 능력은 내각에서 높이 평가받았다.[228] 1988년 7월에도 두 번째 예산 검토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재무부 장관 비서로 재직하는 동안, 메이저는 1988년 2월 임금 문제로 인한 국민보건서비스(NHS) 파업을 배경으로 NHS의 미래 자금 조달에 관한 논의에 참여했다. 이는 이후 '환자를 위한 노력'(Working for Patientseng)이라는 백서 발간과 1990년 국민보건서비스 및 지역 사회 복지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또한 마가렛 대처 총리와의 논의에서 북아일랜드의 주요 항공 우주 회사인 봄바디어에 대한 매각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회사의 파산 위기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2. 4. 2. 외무장관 (1989년 7월-10월)
1987년부터 1988년까지 메이저는 마가렛 대처 총리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여겨졌으며, 더 높은 직책으로의 승진이 유력시되었다.[228]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9년 7월 메이저가 외무·영연방장관에 임명된 것은 내각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고 국제 정세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다.[232][228] 메이저 본인도 이 전망에 부담을 느껴 대처에게 재무부에 남게 해달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28] 또한 외교 및 영연방청(FCO) 내부에서는 메이저가 대처의 '도끼 자객' 역할을 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이는 이전 외무장관이었던 제프리 하우 시절 대처와 외무부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상호 불신이 깊었기 때문이다.[228] 메이저는 결국 외무장관직을 수락하고 FCO 위층 방에서 생활하며 업무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는 필요에 따라 의사 결정을 위임했지만, 강화된 보안 조치에 부담을 느꼈고 외무장관 역할에 따르는 광범위한 의례적인 측면을 좋아하지 않았다.[228]외무장관으로서 메이저의 첫 조치 중 하나는 내부 탄압에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호크 항공기의 이라크 판매를 취소한 것이었다.[228] 그는 캄보디아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파리 평화 회의에서 영국 대표로 참석했다.[228] 또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와 만나 주로 베트남 보트 피플 문제를 논의했으며, 중국 외교부 장관 치앤 치천과 회담했다. 이는 천안문 광장 시위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 이후 중국 관리와 만난 최초의 서방 고위급 정치인이 된 사례였다.[228] 이 회담에서는 주로 1997년 중국에 반환될 예정이었던 홍콩의 미래 문제가 논의되었다.[228]
메이저는 그 해 여름 휴가 대부분을 스페인에서 보내며 국제 문제와 영국 외교 정책에 대한 방대한 배경 자료를 읽는 데 할애했다.[228]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대처 총리와 함께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을 만나 유럽 공동체의 미래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228] 1989년 9월, 메이저는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콜롬비아의 마약 밀매 단속 노력을 지지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대한 영국의 반대 입장을 재확인했다.[228] 그는 또한 워싱턴 D.C.에서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와 만났으며,[228] 7년 전 포클랜드 전쟁 종전 이후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외무장관인 도밍고 카바요와 회담했다.[228]
외무장관으로서 메이저의 마지막 주요 일정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영연방 정부 수반 회의(CHOGM)였다. 이 회의의 주요 쟁점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경제 제재 문제였는데, 영국은 제재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보다는 가난한 남아프리카 주민들에게 더 큰 피해를 줄 것이라는 이유로 제재에 반대하는 유일한 국가였다.[228] 정상회담은 대처 총리가 영국의 제재 반대 입장을 담은 별도의 최종 공동 성명을 발표하면서 논란 속에 마무리되었다. 이는 기존의 관례를 깨는 행동이었으며, 언론은 메이저와 대처 사이의 명백한 의견 차이에 주목했다.[228]
메이저는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지 불과 3개월 만인 1989년 10월, 나이젤 로손 재무장관이 대처의 경제 고문인 앨런 월터스와의 갈등 끝에 사임하자 그의 뒤를 이어 재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233] 대처는 메이저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며 "나이젤만큼 경제에 정통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과거 정책의 실패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정책 실패의 결과에 훨씬 더 쉽게 대처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234] 당시 영국 경제는 경상수지 적자가 크고 인플레이션이 급등하며 금리가 상승하는 등 어려운 상황이었다. 메이저는 대처에게 유럽통화제도(ERM) 가입을 건의했고, 소극적이었던 대처를 설득하여 이를 실현시켰다.[235]
2. 4. 3. 재무장관 (1989-1990)
1989년 7월 외무·영연방장관에 임명된 지 불과 3개월 만인 같은 해 10월 26일, 존 메이저는 나이젤 로손 재무장관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후임 재무장관이 되었다.[233] 로손은 마거릿 대처 총리가 경제 고문 앨런 월터스의 조언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판단하여 사임했다.[25] 대처는 메이저를 임명하며 "나이젤만큼 경제에 정통하지 않지만, 적어도 과거 정책의 실패에 갇혀서 꼼짝 못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정책 실패로 인한 결과에 훨씬 더 쉽게 대처할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234] 이 임명으로 메이저는 내각에 들어온 지 2년여 만에 영국의 고위직 중 두 자리를 연이어 맡게 되었다.당시 영국 경제는 경상수지 적자가 크고 인플레이션이 급속히 진행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235] 메이저는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고 "아프지 않으면 효과가 없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1989년 11월 15일 첫 가을 예산안을 발표하며 주로 NHS를 위한 지출 증가와 금리 유지를 결정했다.
1990년 3월 20일, 메이저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최초의 1990년 예산을 발표했다. 그는 이를 '저축가를 위한 예산'으로 홍보하며 세금 면제 특별 저축 계좌(TESSA) 도입을 발표했는데, 이는 이전 회계연도에 나타난 가계 저축률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복합세율과 주식 거래에 대한 인지세를 폐지하는 한편, 주류, 담배, 휘발유에 대한 세금은 인상했다. 브래드퍼드 시티 경기장 화재와 힐스버러 참사 이후 축구장의 안전 조치 강화를 위한 자금 지원 목적으로 축구 협회에 대한 감세 조치도 포함되었다. 그 해 도입된 커뮤니티 차지(일명 '인두세')의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 추가 자금이 지원되었다.
유럽 공동체의 경제 통화 연합(EMU) 추진 문제도 재무장관 시절 주요 현안이었다. 1990년 6월, 메이저는 단일 유럽 통화 대신 '강력한 ECU'를 제안했다. 이는 각국 통화가 경쟁하고, ECU가 성공할 경우 단일 통화로 발전할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점차 유럽 회의론적 입장을 보이던 대처 총리가 EMU에 전면 반대하면서, 이 제안은 프랑스와 독일 등으로부터 논의를 방해하려는 전술로 여겨졌고 결국 폐기되었다. 반면, 새로 설립된 유럽 재건 개발 은행(EBRD)의 본부를 런던에 유치하는 데는 성공했다.
1990년 초, 메이저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거시 경제 안정을 위해 영국 파운드화를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가입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235] 그와 외무장관 더글러스 허드는 ERM 가입에 회의적이던 대처 총리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28] ERM 가입은 잉글랜드 은행, 재무부, 내각 다수, 노동당, 주요 경제 단체 및 언론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로손 붐'의 경기가 둔화되고 1990년 8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유가가 상승하면서 경기 침체 우려와 금리 인하 압력이 커지자, 대처 총리는 10월 4일 마침내 ERM 가입에 동의했다. 영국의 ERM 가입은 다음 날인 10월 5일, 1파운드당 DM 2.95 (변동폭 ±6% 허용)의 환율로 발표되었다. 같은 날 금리도 15%에서 14%로 1%p 인하되었다.
이후 보수당 대표 경선 전까지 메이저의 재무장관 임기는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그는 잉글랜드 은행에 금리 결정 권한을 부여하여 통화 정책의 운영상 독립성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 또한 1990년 9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열린 영연방 재무장관 회의에서 일부 제3세계 부채의 구조조정 및 탕감에 합의했다.
2. 4. 4. 보수당 당수 경선
마거릿 대처 총리에 대한 보수당 내 반대는 그녀의 독선적인 통치 스타일과 전국적인 반대에 부딪힌 인구세 강행 등으로 인해 꾸준히 커져 갔다. 1989년 12월 당수 경선에서 앤서니 마이어의 도전을 물리쳤지만, 60명의 의원이 반대표를 던졌고 상당수 의원은 압력에 의해 마지못해 지지했다는 소문이 돌았다.[30][31][32] 1990년 초, 새로운 인구세 도입으로 세금 부담이 예상보다 커질 것이 명백해지자 반대 여론이 거세졌고 납세 거부 운동이 확산되었다. 급기야 3월에는 트라팔가 광장에서 열린 반 인구세 시위가 폭동으로 번지기도 했다.[33] 연이은 보궐선거 패배도 대처의 입지를 흔들었다. 보수당은 전통적인 텃밭이었던 미드 스태퍼드셔와 이스트본에서 각각 노동당과 자유민주당에게 패배하면서, 다가올 총선에 대한 당내 불안감은 커져 갔다.[34][35] 또한 대처의 강경한 반유럽 노선은 당내 친유럽 성향 의원들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결정적으로 11월 1일, 친유럽파 부총리였던 제프리 호가 사임했고, 13일에는 하원 연설을 통해 대처 총리를 강하게 비판했다.[36]호의 연설 바로 다음 날, 1986년 웨스트랜드 사건으로 대처와 격렬하게 대립하다 사임했던 전 국방장관 마이클 헤셀틴이 당수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대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존 메이저와 외무장관 더글러스 허드는 1차 투표에서 대처를 지지했다. 당시 메이저는 예정된 사랑니 수술 후 회복 중이어서 헌팅던 자택에 머물렀다. 1차 투표 결과 대처는 204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지만, 당선을 위해 필요한 과반에서 4표가 부족하여 2차 투표가 불가피해졌다. 내각 각료들과의 논의 끝에, 대처는 자신에 대한 지지가 흔들리고 있으며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경선에서 물러나고 새 당수가 선출되면 총리직에서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37]
이에 메이저는 11월 22일, 대처의 지지를 받으며 2차 투표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유럽 문제에 대한 온건한 접근, 인구세 재검토, 그리고 "계급 없는 사회" 건설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11월 27일에 치러진 2차 투표에서는 과반수(372명 중 187명)만 확보하면 당선될 수 있었다.
후보 | 득표수 | 비고 |
---|---|---|
존 메이저 | 185 | 당선 (경쟁자 사퇴) |
마이클 헤셀틴 | 131 | 사퇴 |
더글러스 허드 | 56 | 사퇴 |
합계 | 372 |
메이저는 185표를 얻어 과반에 2표가 부족했지만, 131표를 얻은 헤셀틴과 56표를 얻은 허드를 큰 차이로 앞섰다. 헤셀틴과 허드는 즉시 경선에서 사퇴하고 메이저 지지를 선언했다. 더 이상 경쟁자가 없어진 메이저는 그날 저녁 보수당 당수로 공식 선출되었고, 다음 날인 11월 28일 총리로 임명되었다.[38][236][237] 당시 47세였던 그는 약 95년 전 로즈베리 경 이후 영국 역사상 가장 젊은 총리가 되었다.
3. 총리 재임 (1990-1997)
1990년 11월, 마거릿 대처 총리의 사임 후 보수당 당수 선거를 통해 존 메이저가 후임자로 선출되어 1990년 11월 28일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236][237] 그는 대처로부터 다수당 정부를 물려받았으나, 당시 보수당은 인두세(Community Charge) 도입 등으로 인해 지지율이 낮은 상태였다.[39]
취임 초 1990년대 초 경기 침체라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저는 1992년 4월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보수당의 승리를 이끌었다.[46][47] 이 승리로 보수당은 4회 연속 집권에 성공하며 메이저는 6년 반 동안 총리직을 수행할 기반을 마련했으나,[48] 재임 기간 동안 국민과 당 내부 모두에서 점차 지지를 잃어갔다.
메이저 정권 하에서 영국 경제는 통신 등 일부 신산업 분야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광업과 조선업 등 전통 산업의 쇠퇴가 지속되어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었다. 특히 1992년 9월의 블랙 웬즈데이 사건은 영국 경제와 정부의 통화 정책 신뢰도에 큰 타격을 주었다.[50]
외교적으로는 미국과의 전통적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전임자와 달리 유럽 연합(EU)과의 관계 개선 및 통합 심화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240] 그는 마스트리흐트 조약 체결과 EU 출범에 기여했으나, 유럽 통합 문제는 보수당 내 극심한 분열을 야기하고 정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주요인이 되었다.[51][52] 많은 사람들은 메이저 총리가 유럽 통합에 치중하면서 영국의 국익을 소홀히 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메이저의 중도적인 정책 노선은 "이념 없는 정치가"라는 비판을 받았고,[238] 연이은 정치 스캔들과 IRA 테러 재개, 광우병 파동 등은 정권에 대한 신뢰를 더욱 떨어뜨렸다.[238] 이러한 상황 속에서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은 '신노동당' 기치 아래 인기를 얻어갔다.[53][238][256]
결국 1997년 5월 1일 치러진 1997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압승하며 18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56] 보수당은 20세기 최악의 참패를 기록했고,[257] 메이저는 1997년 5월 2일 총리직에서 사임했다.[258]
3. 1. 첫 번째 메이저 내각 (1990-1992)
1990년 11월 2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존 메이저에게 정부 구성을 제안했고, 그는 이를 수락하여 마거릿 대처의 뒤를 이어 영국 총리가 되었다.[39] 그는 대처가 지난 11년간 이끌었던 다수당 정부를 물려받았다. 당시 보수당의 지지율은 낮았는데, 1990년 4월 커뮤니티 차지(인두세) 도입 이후 여론조사에서 노동당의 닐 키녹 대표가 보수당을 23%p 앞서고 있었다.[39] 메이저가 총리로 임명될 무렵에는 노동당과의 격차가 14%p로 줄어들었으며,[39] 1991년까지 보수당은 여론조사에서 근소한 차이로 노동당을 앞서게 되었다.[40]
메이저의 첫 번째 내각은 1990년대 초 경기 침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는 높은 금리, 하락하는 주택 가격, 과대평가된 환율 때문으로 분석된다.[41] 높은 금리는 영국의 여러 부문에서 저축 증가, 소비 감소, 투자 감소로 이어졌고,[41] 주택 가격 하락은 주택 건설 부문을 위축시켰다. 경제 성장은 1993년 초까지 회복되지 않았다.[42] 1991년 12월 실업자 수는 250만 명에 달해 18개월 전의 160만 명보다 크게 증가했으며,[43] 인플레이션은 두 자릿수를 기록했고 금리는 15%에 달했다.[44][45]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이 기간 동안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992년 3월 10일, 재무장관 노먼 라몬트는 하원에서 예산안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다가올 총선을 의식한 감세 조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 날인 3월 11일, 메이저는 예상대로 4월 9일에 1992년 영국 총선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많은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보수당은 4월 9일 선거에서 336석을 얻고 득표율 41.9%를 기록하며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다.[46][47] 높은 투표율 속에 보수당은 1400만 표 이상을 얻었는데, 이는 영국 총선 역사상 최다 득표 기록으로 남아 있다.[48] 이로써 보수당은 4회 연속 총선 승리를 거두었다. 선거 패배 후 닐 키녹은 노동당 대표 및 야당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존 스미스가 그 뒤를 이었다.[49]
3. 2. 두 번째 메이저 내각 (1992-1997)
1992년 4월 총선에서 예상을 깨고 보수당이 승리하여 존 메이저는 총리직을 이어가게 되었다.[238][239] 그러나 이 승리는 장기 집권의 기반을 마련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곧이어 여러 문제에 직면하며 국민과 당 내부 모두에서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
메이저 정권 하에서 영국 경제는 통신과 같은 새로운 분야가 번창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전통적인 광업과 조선업은 계속해서 쇠퇴하여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었다. 특히 1992년 9월 16일, 재무장관 노먼 래몬트가 파운드화를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 내에 유지시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0] 이 날은 이후 '블랙 웬즈데이'로 불리게 되었으며, 영국 경제와 보수당 정부의 신뢰도에 큰 타격을 주었다. 비록 1993년에 경기 침체는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보수당의 지지율은 회복되지 못했다.
또한 메이저 정부는 유럽 연합(EU)과의 관계 설정 문제로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메이저 총리는 마스트리흐트 조약 체결을 추진하는 등 유럽 통합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이 과정에서 영국의 주권과 이익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마스트리흐트 조약 비준 과정에서 정부가 의회에서 패배하는 등[51][52] 유럽 문제는 보수당 내부를 분열시키고 정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93년부터 1994년 사이에는 보수당 정치인들의 금전 및 성 관련 스캔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면서 정권의 도덕성에 대한 신뢰가 크게 추락했다.[238]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당인 노동당은 새로운 리더십 아래 변화를 모색했다. 1994년 5월 12일, 존 스미스 당수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의 토니 블레어가 새로운 당수로 선출되었다.[53] 블레어는 '신노동당'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당의 현대화를 추진했으며, 국유화 정책 폐기 등 과감한 개혁을 통해 중도층 유권자들의 지지를 넓혀나갔다.[238][256] 1994년 말과 1995년 초 여론조사에서 노동당 지지율은 60%를 넘어서는 등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당내 분열과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자, 메이저는 1995년 6월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재신임을 묻기 위해 당 대표직에서 사퇴하고 당수 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유럽회의주의자인 존 레드우드의 도전을 받았으나, 메이저는 비교적 여유롭게 승리하며 자리를 지켰다.[54] 하지만 당내 갈등은 완전히 봉합되지 않았고, 연이은 보궐선거 패배로 1996년 12월에는 보수당의 의회 과반수 의석이 21석까지 줄어들었다.[55] 여기에 1996년 아일랜드 공화군(IRA)의 테러 활동 재개와 광우병 파동까지 겹치면서 메이저 정부의 위기는 더욱 깊어졌다.[238]
결국 1997년 5월 1일에 치러진 1997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에 역사적인 참패를 당했다. 노동당은 179석의 압도적인 과반수를 확보하며 18년간의 야당 생활을 청산하고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56] 반면 보수당은 165석을 얻는 데 그쳤으며, 이는 20세기 들어 최악의 선거 결과이자 1906년 이후 가장 큰 패배였다.[257] 특히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에서는 단 한 석의 의석도 얻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선거 다음 날인 5월 2일 아침, 메이저는 다우닝가 10번가를 떠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총리직 사의를 표명하면서 "막이 내릴 때는 무대에서 내려올 때"라는 말을 남기고 보수당 당수직에서도 물러날 뜻을 밝혔다.[258] 그의 뒤를 이어 토니 블레어가 새로운 총리로 취임했다.
3. 3. 외교 정책
영국의 외교 노선은 전통적으로 친미와 친유럽 사이에서 논의되어 왔다. 메이저의 전임자인 마거릿 대처 총리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유럽 공동체(EC)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240]
그러나 메이저는 총리 취임 직후 연설에서 "유럽 공동체(EC) 안에서 영국의 나의 목표는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본래의 위치에 서기를 바란다. 그것은 유럽의 중심부이다. 거기서 파트너들과 함께 미래를 건설해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대처와 달리 친유럽 노선으로 전환할 뜻을 내비쳤다.[240] 그는 미국과의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유럽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고, 마스트리흐트 조약 체결과 유럽 연합(EU) 발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메이저는 미국과의 관계를 외교상 최우선 과제로 삼는 영국의 기본 방침은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이냐 유럽이냐) 왜 선택해야 하는가? 우리나라의 국익은 미국과 유럽이라는 두 개의 큰 블록에 거의 균등하게 나뉘어 있는데 왜 이러한 선택을 굳이 해야 하는가. 내게 말하자면 그것은 광기이다"라고 말하며,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을 비판했다.[240]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메이저 총리가 유럽 연합과 더 가까워지려 하면서 영국의 이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유럽 연합 관련 논쟁은 보수당 내 분열을 야기하고 정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의 중도적인 정책은 "이념 없는 정치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3. 4. 내정
1992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여 총리로 다시 선출되었으나, 국민과 당 안 양쪽에서 인기를 잃었다. 메이저 정권 아래 영국 경제는 통신 등 새 분야가 번창했지만, 광업과 조선업은 쇠퇴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많은 노동자를 실직 상태로 몰아넣어 사회적 불만을 고조시켰다.
1992년 9월 16일, 재무장관 노먼 래몬트가 파운드화를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유지시키려 노력했으나 실패하며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0] 이는 이후 "블랙 웬즈데이"로 불리게 되었다. 1993년 경기 침체가 끝났음에도 보수당의 인기는 회복되지 않았다.
또한 마스트리흐트 조약 비준을 둘러싼 논쟁은 보수당 내 분열을 심화시키고 정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51][52] 많은 이들은 메이저 총리가 유럽 연합과 가까워지려 하면서 영국의 국익 보호에 소홀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메이저는 대처의 구조개혁을 일부 계승하여 공공시설 건설 및 운영을 민간에 위탁하는 프라이빗 파이낸스 이니셔티브(PFI) 정책을 1992년 도입했다.[253] 한편, 대처 정권 말기에 도입되어 "인두세"라는 비판을 받았던 커뮤니티 차지(Community Charge)는 취임 초기에 폐지하였다.[254][255]
1994년 5월 존 스미스의 사망 후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대표가 되어 "신노동당" 슬로건 아래 당 현대화를 추진했다.[53] 보수당 내 분열이 계속되자 메이저는 1995년 6월 당 대표 선거를 통해 존 레드우드를 누르고 재신임을 얻으려 했으나[54], 당내 갈등은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연이은 보궐선거 패배로 1996년 12월에는 과반수 의석마저 상실했다.[55]
결국 1997년 5월 1일 총선에서 노동당이 179석 과반을 확보하며 압승했고, 보수당은 20세기 최악의 패배를 기록하며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모든 의석을 잃었다.[56] 메이저는 1997년 5월 2일 총리직에서 물러나며 보수당 대표직 사임 의사도 밝혔고, 토니 블레어가 후임 총리가 되었다.
4. 총리 퇴임 이후 (1997-현재)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대패한 후, 많은 보수당 의원들은 메이저가 즉시 당 대표직에서 사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동맹이었던 크랜본 경과 앨리스테어 굿래드 등은 당이 패배의 충격을 수습할 시간을 갖도록 가을까지 대표직을 유지하라고 권유했다.[57] 메이저는 "그것은 끔찍할 것이다. 나는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여러 후보자들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이 주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통을 연장시킬 뿐이다"라고 말하며 이를 거절했다.[57]
메이저는 후임자를 선출하는 대표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7주간 야당 대표를 맡았다. 그는 임시 그림자 내각을 구성했으나, 내각 장관 7명이 선거에서 낙선하여 고위직을 맡을 의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여러 의원이 여러 직책을 겸임해야 했다.[57][57] 메이저 자신도 그림자 외무장관과 그림자 국방장관을 겸임했다. 당시 보수당은 스코틀랜드 지역 의석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그림자 스코틀랜드 장관직은 2001년 총선 이후까지 공석으로 남았다.[57][57][58] 윌리엄 헤이그가 새 대표로 선출된 후, 메이저는 1997년 6월 19일 보수당 대표직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다.[59][60][238][257][258]
메이저의 사임 명예는 1997년 8월 1일에 발표되었다.[61] 그는 총리직 사퇴 후에도 하원 의원직을 유지하며 의회 활동을 계속했고, 토론에도 정기적으로 참여했다.[62] 2000년 3월 10일, 그는 다음 총선 불출마 및 의회 은퇴를 선언했고,[63] 2001년 총선에서 하원에서 물러났다. 그의 지역구인 헌팅던은 조나단 쟈노글리가 이어받아 보수당 의석을 지켰다.[64]
에드워드 히스와 같은 일부 전임 총리들과 달리, 메이저는 2001년 하원 은퇴 시 귀족 작위 수여를 거절했다. 그는 "정치와의 단절"을 원하며 글쓰기와 사업, 스포츠, 자선 활동에 집중하고 싶다고 밝혔다.[65][262]
퇴임 후 메이저는 언론 노출을 줄이고 원로 정치인으로서 가끔 정치 현안에 대해 논평하는 활동을 했다.[66] 1999년에는 자신의 초기 삶과 총리 재임 기간을 다룬 자서전(존 메이저: 자서전)을 출간하여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67][68] 이후 크리켓 역사에 관한 책 (''More Than a Game: The Story of Cricket's Early Years'', 2007)[69]과 음악당 역사에 관한 책 (''My Old Man: A Personal History of Music Hall'', 2012)[70]을 저술하기도 했다.
크리켓에 대한 애정으로 2000년부터 2001년까지 서리 카운티 크리켓 클럽(Surrey County Cricket Club) 회장을 지냈고,[71] 2002년부터는 명예 종신 부회장이 되었다.[72] 2001년 3월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크리켓 선수 콜린 카우드리 추모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했으며,[73] 2005년에는 메릴본 크리켓 클럽(Marylebone Cricket Club, MCC) 위원회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로드 크리켓 경기장 재개발 계획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2011년 위원회를 떠났다.[74][75]
메이저는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영국 천식협회 회장,[99] 전립선암 자선단체, 시츠세이버 영국, 머시 십스, 아프리카 지원 2000,[99] 아프간 영웅들(Afghan Heroes),[76] 길거리 아이들을 위한 컨소시엄(Consortium for Street Children)[77] 등의 후원자를 맡았다. 2012년 2월에는 엘리자베스 2세의 다이아몬드 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설립된 퀸 엘리자베스 다이아몬드 주년 기념 트러스트(Queen Elizabeth Diamond Jubilee Trust)의 의장이 되었다.[78] 이 트러스트는 질병 치료 및 문화·교육 증진과 같은 분야에 중점을 두고 영연방 전역의 자선 단체와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78] 또한 시각 장애 및 학습 장애 자선 단체인 SeeAbility의 후원자(2006-2012) 및 부회장(2013-)을 역임하고 있다.[79]
다양한 사업 활동도 펼쳤는데, 크레디트 스위스 수석 고문,[80][81] 글로벌 인프라스트럭처 파트너스 수석 고문단 이사회 의장,[99][81] AECOM 글로벌 고문,[81] 쿠웨이트 국립은행 국제 자문 위원회 의장,[99] 에머슨 일렉트릭 유럽 자문 위원회 의장[99][82] 등을 맡았다. 그는 1998년부터 카일라일 그룹의 유럽 자문 위원회 위원이었으며, 2001년 5월 카일라일 유럽(Carlyle Europe) 회장으로 임명되었다가[83][84][162] 2004~05년경 그룹에서 물러났다.[82][85] 메이저는 또한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버스 제조업체인 메이플라워 코퍼레이션(Mayflower Corporation) 이사였는데, 이 회사는 2004년 자금 문제로 청산되었다.[101][86]
1997년 다이애나비 사망 후, 메이저는 법적 및 행정적 문제를 담당하는 윌리엄 왕세자와 해리 왕자의 특별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87] 이 때문에 메이저는 당시 생존해 있던 5명의 현직 또는 전직 총리 중 유일하게 2018년 5월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결혼식에 초대받았다.[88] 메이저는 또한 2013년 12월 넬슨 만델라 장례식,[89] 2018년 4월 21일 미국 휴스턴의 세인트 마틴스 성공회 교회에서 열린 전 미국 영부인 버바라 부시 장례식,[90] 그리고 2018년 12월 5일 조지 H. W. 부시의 국장 등 저명한 정치인들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91]
1993년, 메이저는 다우닝가 10번지 케이터링 담당자였던 클레어 레이티머와의 불륜설을 보도한 「뉴 스테이츠먼 앤 소사이어티」와 「스캘리웨그」 두 잡지 및 배포업체들을 고소했다. 해당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10년 후 에드위나 커리와의 불륜 사실이 드러나자 이들 출판사는 당시 발생했던 소송 비용 회수를 위한 법적 조치를 검토하기도 했다.[92][93]
2002년 9월, 메이저가 내각에 입각하기 전인 1984년부터 1988년까지 4년간 동료 의원이었던 에드위나 커리(Edwina Currie)와 불륜 관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94][95][259][260] 해설가들은 메이저가 총리 시절 내세웠던 '기본으로 돌아가자' 캠페인을 언급하며 그의 위선적인 행동을 비판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토니 뉴턴 남작의 부고 기사에서 뉴턴이 이 불륜 사실을 비밀로 지키지 않았다면 "메이저가 수상이 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96] 메이저는 언론 발표를 통해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밝혔고 아내가 자신을 용서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커리는 "그는 당시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관계가 계속되기를 원했다"고 반박했다.[97]
메이저는 활발한 사후 만찬 연설가로 활동하며, 정치 및 기타 문제에 대한 "통찰력과 자신의 의견"을 제공하는 대가로 참석당 2.5만파운드 이상을 벌어들였다.[98] 그는 또한 다양한 싱크탱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채텀하우스(이전 회장 역임) 고위 자문위원회 위원장,[99] 이스라엘 페레스 평화센터 국제자문위원회 위원,[99] 국제협력협의회 위원,[99] 휴스턴 베이커 연구소 위원,[100] 그리고 대서양 파트너십 후원자이다.[99][100] 메이저는 2000년부터 2009년까지 디치리 재단 이사를 역임했고,[101][102]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중도우파 성향의 싱크탱크인 보 그룹 회장을 지냈다.[103]
2005년 2월, 메이저와 노먼 라몬트가 정보자유법에 따라 검은 수요일 관련 문서 공개를 지연시켰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04] 메이저는 예정된 공개일까지 요청 사실을 알지 못했으며 단지 문서를 직접 검토하겠다고 요청했을 뿐이라고 부인했다.[105] 그는 B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라몬트가 언론의 "속삭이는 캠페인"의 희생자였다고 주장했으며,[106] 이후 문서 공개를 승인했다.[107]
2006년 12월, 전 영국 고위 외교관 카네 로스가 토니 블레어 총리의 이라크 침공 결정 명분과 모순되는 내용을 폭로하자, 메이저는 이에 대한 독립적인 조사를 촉구하며 블레어 정부를 비판했다.[108]
그는 2008년 런던 시장 선거의 보수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당시 보수당 대표였던 데이비드 캐머런의 제안을 거절했다. 메이저의 대변인은 "그의 정치 경력은 끝났다"고 밝혔다.[109]
2010년 총선 이후 메이저는 캐머런-클레그 연정을 지지한다고 발표하고 2015년 이후 "자유주의적 보수주의" 연합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는 에드 밀리밴드가 이끄는 노동당이 국가 이익보다는 "당파적 게임"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10][111]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 메이저는 영국의 사회적 이동성 감소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영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분야에서 2013년 권력의 최상층은 사립학교 출신이나 부유한 중산층이 압도적으로 차지하고 있다. 나의 배경에서 볼 때, 그것이 정말 충격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12][113]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 기간 동안 메이저는 독립 투표가 스코틀랜드와 영국 나머지 지역 모두에 해를 끼칠 것이라며 "반대(No)" 투표를 강력히 촉구했다. 이는 1997년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서 독립 투표가 실시되기 전 스코틀랜드 분권화에 대한 그의 입장과 유사했다.[114][115]
메이저는 2016년 영국 유럽 연합 잔류 여부 국민투표에서 잔류 캠페인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2차 국민투표 실시를 지지하며, 탈퇴 캠페인이 국민투표 기간 동안 "환상적인 주장"을 펼쳤다고 비판했다. 또한 2차 투표를 비민주적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다소 이상한 주장"이며 투표를 다시 하는 것에 대한 "지적인 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116] 메이저는 브렉시트가 영국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북아일랜드의 평화 협정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117][263]
2019년 8월 30일, 메이저는 당시 총리였던 보리스 존슨의 의회 폐회 결정에 반대하는 지나 밀러의 소송에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발표했다.[118] 2019년 총선에서는 강경 브렉시트를 원하는 후보들에 대해 전략적 투표를 촉구했다. 그는 브렉시트를 "제 인생에서 가장 최악의 외교 정책 결정"이라고 규정하며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더 가난하고 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줄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위험이 그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브렉시트는 우리의 역사적인 영국을 분열시킬 수도 있습니다"라고 경고했다.[119] 2020년 초, 영국이 초기 합의를 통해 EU를 공식적으로 탈퇴한 후, 메이저는 향후 EU와의 무역 협상이 "부실할 것(thin)"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120]
2022년 2월, 메이저는 런던의 정부 연구소 싱크탱크 연설에서 존슨 총리의 파티게이트 스캔들을 비판하며 사퇴를 촉구했고, 난민 신청자에 대한 정부의 제안된 정책을 "비영국적(un-British)"이라고 비난했다.[121] 2022년 7월, 존슨이 총리직 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후임자가 선출될 때까지 유임하겠다고 발표하자, 메이저는 "국가 전체의 안녕을 위해" 존슨의 즉각적인 교체와 해임을 촉구했다.[122]
2023년 2월, 메이저는 북아일랜드 문제 특별위원회에서 연설하며 브렉시트가 "엄청난 실수"였으며 존슨이 북아일랜드 의정서가 "엉망진창(mess)"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의했다고 비판했다.[123][124]
2005년 4월 23일, 메이저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가터 훈장(Garter Knight, KG)을 수여받아 "경(Sir)" 칭호를 얻었다. 이는 각료들의 조언이 아닌 여왕의 개인적인 호의로 수여된 것이었다. 메이저는 이에 대해 "나는 매우 흥분했고,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261]
5. 평가 및 유산
존 메이저의 온화한 태도와 온건한 정치적 입장은 전임자인 마거릿 대처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특징이 그를 보수당의 화합을 이끌고 비교적 논란이 적은 지도자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보수당 내 갈등은 격화되었는데, 특히 영국의 유럽 연합과의 통합 정도를 둘러싼 문제가 심각했다. 메이저는 자신의 유럽 정책에 반대하는 소수의 '유로 반란군'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은 작은 규모였지만, 메이저 정부의 적은 과반 의석 수와 보수당 활동가 및 유권자들 사이의 지지 기반 덕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빌 캐시와 마거릿 대처가 주도한 마스트리히트 조약 비준 반대와 같은 사건들은 메이저와 그의 정부에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혔다. 또한, 마거릿 대처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방식에 대한 보수당 우익의 뿌리 깊은 반감은 메이저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많은 이들이 그를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지도자로 여기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주요 보수당 의원들 사이에서 계속 터져 나온 부정부패 관련 스캔들 역시 메이저와 그의 정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대중들 사이에서 보수당에 대한 지지도를 하락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94년, 현대적이고 대중 매체 활용에 능숙한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메이저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블레어는 보수당의 분열을 적극적으로 파고들면서 노동당을 중도 노선으로 이동시켰고, 이는 일부 유권자들에게 노동당의 집권 가능성을 훨씬 높이는 것으로 인식되었다.[125] 메이저가 정직하고 괜찮은 인물이라는 점이나, 영국 사회를 개선하고 심하게 분열된 당을 통합하기 위해 진지하고 때로는 성공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을 의심하는 관찰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종종 무능하고 무력한 인물로 비춰졌고, 재임 기간 대부분 낮은 지지율에 시달렸다. 특히 1992년 9월의 '블랙 웬즈데이' 사건은 경제를 효과적으로 관리한다는 보수당의 명성을 크게 훼손했다.[126]
메이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정부를 변호하며, 특히 그의 집권 하에 영국 경제가 1990~1993년 경기 침체에서 회복된 방식을 강조했다. 그는 "내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금리가 14%에서 6%로 하락했고, 내가 취임했을 때 실업률은 175만 명이었으나 떠날 때는 160만 명으로 감소했으며, 정부의 연간 차입금은 최고치인 약 460억파운드로 증가하기 전에 5억파운드에서 10억파운드 미만으로 감소했다"고 주장했다. 메이저 정부의 재무장관이었던 켄 클라크는 2016년에 메이저의 명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반면, 토니 블레어의 명성은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했다.[127] 메이저 재임 기간 동안 자유민주당 대표였던 패디 애슈다운은 2017년에 메이저가 "총리가 된 가장 정직하고 용감하며 진실된 사람들 중 한 명"이며 그의 재임 기간은 후임자인 토니 블레어와 비교될 만하다고 평가하며 더 긍정적인 시각을 보였다.[128]
퇴임 직후 역사가이자 언론인인 폴 존슨은 메이저를 "희망 없는 지도자"이자 "총리가 되어서는 안 되었던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이러한 평가는 당시 대부분의 언론이 특히 블랙 웬즈데이 이후 메이저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과 일치한다. 언론인 피터 오본 역시 당시에는 비판적이었으나, 2017년에는 자신과 언론이 전반적으로 "메이저에게 엄청나게 불공정했다"고 말하며 부정적인 보도를 후회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러한 비판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메이저의 평범한 출신 배경에 대한 속물근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했다.[129] 2012년 오본은 메이저 정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성공적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130] 오본은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에서의 메이저의 역할, 경제 부양, 유로존 가입 거부 결정, 공공 서비스 개혁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업적으로 꼽았다.[131] 그러나 다른 이들은 여전히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2011년 BBC의 내무부 편집장 마크 이스턴은 "메이저리즘"이 거의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132]
학계에서는 메이저의 유산이 일반적으로 더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2017년 마크 스튜어트는 메이저를 "우리가 가진 최고의 전직 총리"라고 칭하며,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 시작, 중국에 홍콩을 평화적으로 반환한 점, 영국 복권 설립, 1997년 노동당에 건전한 경제를 물려준 점 등을 높이 평가했다.[133] 데니스 카버너 역시 메이저가 1990년대 보수당 내에 존재했던, 주로 유럽 문제를 둘러싼 해결 불가능한 분열을 고려할 때 비교적 잘 대처했으며, 경제 성장, 더 사용자 중심적인 공공 부문, 북아일랜드 평화 정착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134] 그는 또한 메이저의 예상치 못한 1992년 총선 승리가 대처 시대의 개혁을 효과적으로 확정하고 노동당이 더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띤 정책들을 포기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영국 정치 지형을 중도로 영구적으로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134] 앤서니 셀던은 이러한 평가에 대체로 동의하며, 메이저의 차별에 대한 깊은 반감이 영국 사회에서 인종차별과 동성애 혐오증의 지속적인 감소에 기여했고, 그의 적극적인 대외 정책이 급격한 세계적 변화기에 영국의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메이저가 매우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노동 조합의 권력 억제나 실패한 산업의 민영화와 같은 명백하고 시급한 보수적 개혁 과제 대부분이 이미 대처 시대에 완료되었고, 그의 빠른 권력 상승은 정책 입장을 구체화할 시간을 거의 주지 않았으며, 총리가 된 직후에는 걸프 전쟁과 심각한 경기 침체에 대처해야 했다. 게다가 1992년 선거 이후 확보한 적은 과반 의석은 그를 당내 반란에 취약하게 만들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보수당의 다음 선거 패배가 확실시됨에 따라 적대적인 언론의 도움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셀던은 "메이저는 무능한 인물도 실패자도 아니었다. 그의 업적은 보수당 세기 말의 중요하지만 혼란스러운 총리직으로 평가될 것이며, 이전 의제의 일부를 완료하면서 동시에 21세기를 위한 보수주의를 정의하는 데 기여했다"고 결론지었다. 셀던은 2017년 책 ''John Major: An Unsuccessful Prime Minister?''에 기고한 글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재확인했다.[135]
정치 역사가 로버트 테일러는 2006년 메이저의 전기에서 이러한 많은 점에 동의하며, "1997년 5월 이후 신노동당 정부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존 메이저의 총리로서의 기록은 많은 비평가들이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영국의 가장 특별한 보수당 총리는 이 당과 그의 국가가 발전할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언젠가는 둘 다 그것을 인식하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요약했다.[136] 그러나 저명한 정치 역사가 딕 레너드는 2004년에 메이저에 대해 더 가혹하게 평가하며, 그는 "분명히 괜찮은 본능을 가진 사람이지만 능력은 제한적이다. 총리로서 그는 이러한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충분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137]
6. 서훈
1987년 영국 추밀원 의원(PC)으로 임명되었다.[230] 1999년 신년 훈장 명단에서 북아일랜드 평화 과정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컴패니언 오브 아너(CH)를 받았다.[186][230][265]
2005년 4월 23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가터 훈장(KG)을 받았다.[187][266] 가터 훈장은 군주가 개인적으로 수여하는 최고 영예의 기사단 훈장으로, 정원은 24명으로 제한되며 전직 총리에게 수여하는 것이 관례이다. 서임식은 같은 해 6월 13일 윈저 성 내 성 조지 예배당에서 열렸다.[187]
2008년 6월 20일, 아일랜드 코크 시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188][189] 또한 2014년 12월 4일에는 더블린에서 아일랜드에 대한 뛰어난 공헌으로 상을 받았다.[190][191]
2012년 5월 8일, 일본 황궁에서 천황으로부터 욱일장 대훈장을 받았다.[192][267] 이는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의 활동과 상호 이해 증진을 통해 영국-일본 관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총리 재임 시절 메이저는 양국 간 무역 증진 캠페인인 "프라이오리티 재팬"(1991-1994)과 "액션 재팬"(1994-1997)을 추진했으며, 1991년 일본 축제도 그의 재임 기간에 열렸다.[192]
2023년 11월 10일 벨파스트 퀸즈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LL.D) 학위를 받았다.[1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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