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토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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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토미르는 우크라이나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역사적으로 다양한 국가의 지배를 받았으며, 현재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8세기에 건설되어 슬라브족의 족장 지토미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1320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편입된 이후 폴란드 왕국, 러시아 제국, 소련의 지배를 거쳐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다. 지토미르는 유리, 금속 가공, 전자 기기, 제과 등 다양한 산업이 발달했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공습을 받아 피해를 입기도 했다. 도시에는 다양한 박물관, 극장, 도서관 등 문화 시설이 있으며, 세르게이 코롤료프 우주 박물관이 특히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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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지토미르 공격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기간 동안 지토미르시에 가해진 일련의 공습으로, 군사 시설뿐 아니라 주거 지역, 병원, 학교 등 민간 지역에도 피해를 입혔으며 2023년과 2024년에도 공격이 지속되었다. - 지토미르주의 도시 - 코로스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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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토미르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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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지토미르 |
기타 명칭 | |
위치 | 우크라이나 지토미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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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블럼 종류 | 브랜드마크 |
별칭 | (정보 없음) |
표어 | (정보 없음) |
행정 | |
국가 | 우크라이나 |
주 | 지토미르주 |
라이온 (군) | 지토미르 라이온 |
흐로마다 | 지토미르 도시 흐로마다 |
시장 | 세르히 수홈린 |
시장 소속 정당 | 제안 (정당) |
지리 | |
면적 | 61 km² |
해발 고도 | 221 m |
인구 | |
총 인구 (2022년) | 261,624 명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역사 | |
설립 | 884년 |
기타 정보 | |
시간대 | UTC+2 (겨울) |
서머타임 | UTC+3 |
우편 번호 | 10000 — 10036 |
지역 번호 | +380 412 |
웹사이트 | 지토미르 공식 웹사이트 |
2. 명칭
지토미르는 역사적으로 여러 언어로 다양하게 불려왔다. 러시아어로는 Житомир|지토미르ru, 폴란드어로는 Żytomierz|지토미에시pl, 벨라루스어로는 Жытомір|지토미르be, 이디시어로는 זשיטאָמיר|지토미르yi로 알려져 있다.
지토미르는 8세기에 건설되었으며, 슬라브계 드레블랴니족의 족장인 지토미르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988년에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났다.
3. 역사
1320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점령되었고, 1444년 마그데부르크 권리를 받았다. 1569년 루블린 연합 이후 폴란드 왕국 왕관령에 편입되었고,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에 따라 키예프 주의 수도가 되었다.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로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고, 1804년 볼린현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우크라이나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임시 수도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독립 투쟁은 실패로 끝났고,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되었다. 이후 지토미르는 소련의 일부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는 스탈린의 5개년 계획으로 인해 발생한 인위적인 기근, 즉 홀로도모르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지토미르와 주변 지역은 나치 독일에 2년 반 동안 점령되기도 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지토미르는 하인리히 힘러의 우크라이나 본부 역할을 했다.
나치 독일을 물리친 소련은 지토미르를 다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시켰다.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지토미르는 독립된 우크라이나의 도시가 되었다.
3. 1. 초기 역사
8세기에 건설되었으며 슬라브계 드레블랴니족의 족장인 지토미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여겨진다.[3] 988년에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났다.
전설에 따르면 지토미르는 약 884년 드레블랴니족 지토미르 공작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884년은 지토미르가 세워진 언덕에 있는 빙하기 시대의 큰 돌에 새겨져 있는 연도이다. 지토미르는 키예프 루스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이 도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240년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약탈당했을 때였다.[4]
1320년 지토미르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점령되었고, 1444년 마그데부르크 권리를 받았다.[3]
3. 2. 폴란드-리투아니아 시대
1320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점령되었고 1444년 마그데부르크 권리를 받았다.[3] 1569년 루블린 연합 이후 폴란드 왕국 왕관령에 편입되었고 1667년 안드루소보 조약에 따라 키예프 주의 수도가 되었다.[3]
루블린 연합 이후 지토미르는 지역 행정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고, 스타로스타의 소재지이자 지토미르 군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에서 키예프 보이보드십의 세이미크가 열렸다. 1572년 이 도시에는 142개의 건물, 스타로스타의 영주 저택, 그리고 성이 있었다. 지그문트 3세 바사 왕의 특권에 따라 지토미르는 연 2회의 박람회를 개최할 권리가 있었다.[3]
흐멜니츠키 봉기 (1648년) 동안 지토미르는 코사크 헤트만국에 편입되었다.[3]
1667년 지토미르는 키예프 주의 수도가 되었고, 1724년에는 예수회 학교와 수도원이 이곳에 문을 열었다. 1765년까지 지토미르에는 5개의 교회(로마 가톨릭 3개, 정교회 2개)와 285채의 집이 있었다.[3]
3. 3. 러시아 제국 시대
1793년 제2차 폴란드 분할로 지토미르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고, 1804년 볼린현의 수도로 지정되었다.[3]
3. 4. 우크라이나 독립 전쟁과 소련 시대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우크라이나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지토미르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임시 수도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3]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독립 투쟁은 실패로 끝났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에 점령되었다. 이후 지토미르는 소련의 일부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3]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는 스탈린의 5개년 계획으로 인해 발생한 인위적인 기근, 즉 홀로도모르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다.[3] 2008년 홀로도모르 제노사이드 국립 박물관에서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지토미르 지역에서 8015명 이상이 사망했다.[3]
3. 5. 홀로도모르
소련의 스탈린이 추진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이 도시에는 인위적인 기근인 홀로도모르(1932-1933년)가 발생했다. 2008년 홀로도모르 제노사이드 국립 박물관은 1932-1933년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희생자 국립 추모록 (지토미르 지역 - 지토미르)을 발간했다.[3] 이 책은 1116페이지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사 기록에 따르면 1932-1933년 홀로도모르 기간 동안 8015명 이상이 사망했다.
3. 6.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지토미르와 주변 지역은 나치 독일에 2년 반 동안 점령되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1941년 7월 9일부터 1943년 11월 12일까지였다가, 1943년 11월 19일부터 지토미르-베르디체프 공세가 끝나는 1943년 12월 31일까지 다시 점령되었다.[4] 이 기간 동안 지토미르는 하인리히 힘러의 우크라이나 본부 역할을 했다.[4]
역사가 웬디 로어는 나치가 "지토미르 일반 지역"이라고 부르는 정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힘러의 재정착 활동가, 유대인 제거, 그리고 동부의 독일 식민지화 실험실이었고, 다른 나치 점령 유럽 지역(폴란드 제외)에서 경험하지 못한 정도로 풍경을 바꾸고 인구를 황폐화시켰다. [결국]... [전쟁] 상황과 후방에서 증가하는 게릴라전으로 인해 나치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에서 그들의 식민지 목표를 완전히 발전시키고 실현하는 것을 방해받았다... 모든 유대인 공동체의 즉각적인 파괴 외에도 힘러는 우크라이나 민간인 인구를 '최소한'으로 유지할 것을 주장했다.[4]
1942년부터 1949년까지 지토미르 지역은 우크라이나 반군 군대(UPA) 활동이 비교적 적은 지역(UPA 북부)이었으며, 이들은 나치 독일과 소련에 맞서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싸웠다.
3. 7. 전후 소련 시대
나치 독일을 물리친 소련은 지토미르를 다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시켰다.[3]
3. 8.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의회는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1991년부터 지토미르는 독립적이고 주권적인 우크라이나의 일부가 되었다.[3]
3. 9. 2022년 러시아 침공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동안 지토미르와 주변 지역은 여러 차례 러시아의 공습과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2022년 3월 2일 공습으로 주거 건물, 화력 발전소 1곳, 병원 2곳이 파괴되어 최소 2명이 사망하고 1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5][6][7][8]
4. 행정 구역
지토미르는 보훈스키 구와 코롤리오프스키 구의 두 개의 구로 나뉘며, 여러 마이크로구역을 포함한다.
4. 1. 구
구 | 인구 | 면적 |
---|---|---|
보훈스키 | 153,700명 | 30km2 |
코롤리오프스키 | 118,500명 | 31km2 |
4. 2. 마이크로구역
구역 |
---|
보후니아 |
히드로파르크 |
힌찬카 제2구역 |
자보크잘니 구역 |
기차역 지역 |
코르부티우카 |
크로시니아 |
말리오반카 |
마리아니우카 |
파블리키우카 |
푸탸틴카 |
루드냐 |
스모키우카 |
스몰리안카 |
소콜로바 호라 |
구시가지 |
동부 마이크로구역 (민속 명칭 폴리오바) |
흐밀니키 (민속 명칭 말리코바) |
시내 |
5. 인구
263,507명 (2021년 기준)이 지토미르에 거주하고 있다.[31] 지토미르의 면적은 65km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