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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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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집현전은 중국 당나라의 집현원을 모방하여 고려 인종 14년(1136)에 처음 명칭이 사용되었으며, 조선 세종 2년(1420)에 확대 개편된 왕의 자문 기구이다. 세종은 집현전을 학술 연구를 포함하는 기구로 발전시켰으며, 경복궁 궐내각사에 위치하여 경전과 역사 강론, 임금 자문, 언론 기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된 사육신 등 반대파 인물들이 집현전에서 나오자 폐지되었다가, 1478년 예문관에 통합되어 홍문관으로 개편되었다. 집현전은 훈민정음 창제, 《고려사》 등 다양한 서적 편찬, 명나라 사신과의 외교 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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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
개요
수정전
경복궁 내 수정전, 집현전 건물로 사용됨
위치서울, 조선
설립자세종대왕
설립일1420년 3월
해체일1456년 6월
유형연구 기관
명칭
한글집현전
한자集賢殿
로마자 표기Jiphyeonjeon
설명
집현전1420년(세종 2년) 3월에 설치된 조선시대의 학술 연구 기관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학문 연구와 정책 자문 역할을 수행했다. 1456년(세조 2년)에 폐지되었다.

2. 연혁

중국집현원(集賢院)은 한나라·위나라 이래 설치되어, 당나라 현종(玄宗) 때 완비된 기관으로서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警籍)의 간행과 서적의 수집 등을 맡아 보게 하였다.

한국에도 옛날부터 이 제도가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集賢殿’(집현전)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고려 때와 조선의 건국 초기까지에도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1356년(공민왕 5년) 고려 공민왕이 집현관과 우문관을 없애고, 수문전·집현전 학사를 두었다고 한다.[14] 이후에도 간간이 폐하고, 다시 설치하던 것을 조선 세종 2년(1420년)에 확대·개편하였다.[15] 이전까지는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었으나 이때부터 청사를 가지고, 경전과 역사의 강론과 임금의 자문을 담당하였다. 세종은 재위 초기에 집현전을 설립하고 유능한 학자들을 배치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통치와 국가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 활동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4]

집현전은 원래 왕의 자문 기구로 기능했지만, 세종은 이를 개편하여 학술 연구를 포함하도록 그 역할을 확대했다. 세종 재위 초기에 집현전은 입법 기구 역할을 했지만, 결국 조선의 국정에 대한 논의를 담당하는 역할로 성장했다. 집현전은 또한 이후 언론 기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5]

집현전 학자들의 근무지는 경복궁에 위치한 일련의 관청인 궐내각사였다. 궐내각사는 현재 수정전/Sujeongjeon Hall중국어 건물이 위치한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궐내각사에는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지만, 수정전만이 잘 보존된 상태로 남아 있다.[6]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 운동을 한 사육신을 비롯한 반대파 인물이 집현전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음력 6월 6일에 집현전을 파하고 경연을 정지시키면서, 집현전에 소장한 책을 예문관에서 관장하게 하였다.[16] 그러나 문신들이 벼슬에만 욕심을 내고 공부를 게을리 하는 폐단이 생겨서 1459년(세조 5년) 이후 3품 이하의 문신으로서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 예문관의 관직을 겸임시켜 연구하게 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460년(세조 6년) 음력 5월 22일에는 이조에서 사관 선임 규정을 강화하고, 경연·집현전·보문각 등은 직함이 비고 직임이 없으니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윤허하였다.[17] 이로써 집현전은 완전히 폐하게 되었다.

1478년(성종 9년) 음력 3월 19일 집현전에 의거해서 예문관 부제학 이하의 각원을 홍문관의 관직으로 옮겨 임명하게 하여 예문관을 분리·개편하였다.[18] 대우를 극진히 하였으나 세종 때의 집현전에는 따르지 못하였다.

2. 1. 고려 시대

중국집현원(集賢院)은 한나라·위나라 이래 설치되어, 당나라 현종(玄宗) 때 완비된 기관으로서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警籍)의 간행과 서적의 수집 등을 맡아 보게 하였다.[14]

한국에도 옛날부터 이 제도가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集賢殿’(집현전)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한다.[14] 1356년(공민왕 5년) 고려 공민왕이 집현관과 우문관을 없애고, 수문전·집현전 학사를 두었다고 한다.[14] 이후에도 간간이 폐하고, 다시 설치하던 것을 조선 세종 2년(1420년)에 확대·개편하였다.[15]

2. 2. 조선 시대

한국에는 옛날부터 중국집현원(集賢院) 제도가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집현전’(集賢殿)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고려 때와 조선의 건국 초기까지에도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14] 1356년(공민왕 5년) 고려 공민왕이 집현관과 우문관을 없애고, 수문전·집현전 학사를 두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간간이 폐하고, 다시 설치하던 것을 조선 세종 2년(1420년)에 확대·개편하였다.[15] 이전까지는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었으나 이때부터 청사를 가지고, 경전과 역사의 강론과 임금의 자문을 담당하였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립하고 유능한 학자들을 배치하여 자신의 통치와 국가 강화를 위한 다양한 연구 활동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4] 집현전은 왕의 자문 기구로 기능했지만, 세종은 이를 개편하여 학술 연구를 포함하도록 그 역할을 확대했다.[5] 집현전 학자들의 근무지는 경복궁에 위치한 궐내각사였으며, 현재 수정전 건물 주변으로 추정된다.[6]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 운동을 한 사육신 등 반대파 인물이 집현전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음력 6월 6일에 집현전을 파하고 경연을 정지시키면서, 집현전에 소장한 책을 예문관에서 관장하게 하였다.[16] 세종 재위 초기에 입법 기구 역할을 했던 집현전은 조선의 국정에 대한 논의를 담당하는 역할로 성장했고, 이후 언론 기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5] 그러나 문신들이 벼슬에만 욕심을 내고 공부를 게을리 하는 폐단이 생겨서 1459년(세조 5년) 이후 3품 이하의 문신으로서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 예문관의 관직을 겸임시켜 연구하게 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460년(세조 6년) 음력 5월 22일에는 이조에서 사관 선임 규정을 강화하고, 경연·집현전·보문각 등은 직함이 비고 직임이 없으니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윤허하였다.[17] 이로써 집현전은 완전히 폐하게 되었다.

1478년(성종 9년) 음력 3월 19일 집현전에 의거해서 예문관 부제학 이하의 각원을 홍문관의 관직으로 옮겨 임명하게 하여 예문관을 분리·개편하였다.[18] 대우를 극진히 하였으나 세종 때의 집현전에는 따르지 못하였다.

3. 구성

1420년(세종 2) 3월 세종이 즉위한 뒤에 문신을 집현전에 모아 문풍을 진흥시키자는 신하들의 건의에 따라, 고려 이래로 유명무실하였던 수문전(修文殿)·집현전·보문각(寶文閣) 중에서 집현전 하나만을 남기는 대신 그 기구를 대폭적으로 확장시켰다. 겸임관으로 영전사·대제학·제학을 두고, 그 아래에는 모두 전임 학사(前任學士)에서 뽑았다. 이와 동시에 전임학사(專任學士)로서 10명을 임명, 그 뒤 정원의 증감이 있다가 1436년(세종 18)에는 20명으로 확정되었다.

집현전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해 많은 도서(圖書)를 구입 혹은 인쇄시켜 집현전에 보관토록 하는 한편, 휴가를 주어 산사(山寺)에서 뜻대로 학문 전반에 걸쳐 연구하게 하였으며, 그 경비와 기구는 모두 나라에서 부담하였다. 이 결과 우수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많이 나오게 되었다. 정인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이숙형, 서거정 등이 대표적인 집현전 학사 출신이다.

품계관직정원비고
정1품영전사(領殿事)2명겸직
정2품대제학2명겸직
종2품제학2명겸직
정3품부제학(당상관)1명
종3품직제학1명
정4품직전1명
종4품응교1명
정5품교리1명부검토(副檢討)를 겸임.
종5품부교리1명부검토(副檢討)를 겸임.
정6품수찬1명부검토(副檢討)를 겸임.
종6품부수찬1명부검토(副檢討)를 겸임.
정7품박사1명
정8품저작1명
정9품정자1명


4. 기능 및 역할

이들의 임무는 첫째, 학사 20명 중 10명은 경연(慶筵)을, 나머지 10명은 서연(書筵)을 담당하였으며, 둘째, 집현전이 궁중에 있고 또 학사들이 문필에 능하다는 이유로서 그 일부가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고, 셋째는 사령(辭令)의 제찬(制撰)을 담당하였다. 전대(前代)에는 수문전(修門殿)·집현전·보문각(寶門閣)이 같이 맡아보았으나 수문전·보문각이 폐지되자 집현전이 전적으로 이 일을 맡게 되었다. 넷째는 중국의 고제(古制)에 대한 연구였다. 유교를 조선 사회의 근본이념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유교적인 제도나 의식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집현전 학사들은 정치인으로도 많이 등장하여 실제 정치 면을 통하여 그들의 이상(理想)을 실현시키려 하였다. 특히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이런 경향은 더욱 농후하였다. 집현전의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한글 제정이었지만, 그밖에도 《고려사》, 《농사직설》,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 《삼강행실》, 《치평요람》, 《동국정운》,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의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시대를 이루게 하였다.

집현전은 다양한 학문적 활동에 참여했는데, 그중 하나가 훈민정음 편찬이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하여 1443년에 반포하였다.[7][8][9][10] 이후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을 지어 한글의 창제 동기와 목적을 설명하고 간략한 예시와 설명을 제공했으며, 집현전에게 상세한 예시와 설명을 작성하도록 하였다.[9] 집현전의 수장 정인지는 훈민정음 편찬을 담당했다.[10] 훈민정음은 일반 백성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1446년에 간행되어 공포되었다.[9]

유교 이념은 세종에게 매우 중요했으며, 그는 신하들이 유교의 윤리와 도덕을 배울 수 있는 매체를 갖기를 원했다. 재위 14년,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한국과 중국 역사에서 인간 관계의 근본 원리(효, 충, 열)에 대한 뛰어난 사례들을 수집하도록 지시했다.[11] 이러한 저작의 편찬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탄생했다. 불행히도 이 책은 원래 한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약 30년 후에 한글로 번역되기 전까지 일반 백성들은 읽을 수 없었다.[11]

훈민정음 편찬과 삼강행실도 간행 외에도, 세종은 용비어천가와 그의 조상에 대한 찬가와 같은 책들을 후원했으며, 집현전은 수많은 학문적, 과학적 저술의 간행에 참여하여 세종의 치세를 한국 문화의 황금기로 명성을 드높였다.[3][12]

4. 1. 학술 연구

집현전 학사 20명 중 10명은 경연(慶筵)을, 나머지 10명은 서연(書筵)을 담당하였으며, 일부는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고, 사령(辭令)의 제찬(制撰)을 담당하였다. 전대(前代)에는 수문전(修門殿)·집현전·보문각(寶門閣)이 같이 맡아보았으나 수문전·보문각이 폐지되자 집현전이 전적으로 이 일을 맡게 되었다. 또한 유교를 조선 사회의 근본이념으로 삼기 위해 유교적인 제도나 의식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였기에, 중국의 고제(古制)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였다.

집현전의 업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한글 제정이었지만, 그밖에도 《고려사》, 《농사직설》,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 《삼강행실》, 《치평요람》, 《동국정운》,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의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시대를 이루게 하였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직접 창제하여 1443년에 반포하였고,[7][8][9][10] 집현전에 상세한 예시와 설명을 작성하도록 하였다.[9] 집현전의 수장 정인지는 훈민정음 편찬을 담당했다.[10] 훈민정음은 일반 백성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1446년에 간행되어 공포되었다.[9]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한국과 중국 역사에서 인간 관계의 근본 원리(효, 충, 열)에 대한 뛰어난 사례들을 수집하도록 지시했고,[11] 그 결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三綱行實圖/삼강행실도한국어)가 탄생했다. 이 책은 한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약 30년 후에 한글로 번역되기 전까지 일반 백성들은 읽을 수 없었다.[11]

용비어천가와 같은 책들을 후원했으며, 집현전은 수많은 학문적, 과학적 저술의 간행에 참여하여 세종의 치세를 한국 문화의 황금기로 명성을 드높였다.[3][12]

4. 2. 정치 자문

집현전 학사 20명 중 10명은 경연(慶筵)을, 나머지 10명은 서연(書筵)을 담당하였다. 또, 집현전이 궁중에 있고 학사들이 문필에 능하다는 이유로 그 일부가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다. 사령(辭令)의 제찬(制撰)을 담당하였는데, 전대(前代)에는 수문전(修門殿)·집현전·보문각(寶門閣)이 같이 맡아보았으나 수문전·보문각이 폐지되자 집현전이 전적으로 이 일을 맡게 되었다. 유교를 조선 사회의 근본이념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유교적인 제도나 의식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였기에, 중국의 고제(古制)에 대한 연구도 집현전의 임무였다.

한편 집현전 학사들은 정치인으로도 많이 등장하여 실제 정치 면을 통하여 그들의 이상(理想)을 실현시키려 하였다.

4. 3. 서적 편찬

집현전 학사들은 정치인으로도 많이 등장하여 실제 정치 면을 통하여 그들의 이상(理想)을 실현시키려 하였다. 특히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이런 경향은 더욱 농후하였다. 집현전의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한글 제정이었지만, 그밖에도 《고려사》, 《농사직설》,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 《삼강행실》, 《치평요람》, 《동국정운》,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의방유취》 등의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시대를 이루게 하였다.[3][12]

집현전은 훈민정음 편찬에 참여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하여 1443년에 반포하였다.[7][8][9][10] 세종은 훈민정음 서문을 지어 한글의 창제 동기와 목적을 설명하고 간략한 예시와 설명을 제공했으며, 집현전에게 상세한 예시와 설명을 작성하도록 하였다.[9] 집현전의 수장 정인지는 훈민정음 편찬을 담당했다.[10] 훈민정음은 일반 백성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1446년에 간행되어 공포되었다.[9]

유교 이념은 세종에게 매우 중요했으며, 그는 신하들이 유교의 윤리와 도덕을 배울 수 있는 매체를 갖기를 원했다. 재위 14년,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한국과 중국 역사에서 인간 관계의 근본 원리(효, 충, 열)에 대한 뛰어난 사례들을 수집하도록 지시했다.[11] 이러한 저작의 편찬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탄생했다. 이 책은 원래 한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약 30년 후에 한글로 번역되기 전까지 일반 백성들은 읽을 수 없었다.[11]

훈민정음 편찬과 삼강행실도 간행 외에도, 세종은 용비어천가와 그의 조상에 대한 찬가와 같은 책들을 후원했으며, 집현전은 수많은 학문적, 과학적 저술의 간행에 참여하여 세종의 치세를 한국 문화의 황금기로 명성을 드높였다.[3][12]

4. 4. 외교 교류

1450년 명나라 사신이 경태제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왔을 때, 집현전 학자들과 명나라 사신들은 황화집으로 알려진 전통에 따라 시를 주고받았다. 명나라 사신은 예부 시랑 예겸이 이끌었으며, 집현전 학자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와 친분을 맺었다. 양측은 방문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시를 주고받았다. 이러한 지속적인 시와 조공품 교환은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강력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5. 주요 인물

정인지(1396–1478)

신숙주(1417–1475)

최항(1409–1474)

성삼문(1418–1456)

박팽년(1417–1456)

이개(1417–1456)

유성원(? – 1456)

이숙형(1415–1477)

서거정(1420–1488)

박정림: 판서, 박팽년의 아버지

박팽년: 부제학, 사육신 중 한 명

하위지: 부제학, 사육신 중 한 명

성삼문: 봉교, 사육신 중 한 명

이개: 집현전 부제학, 사육신 중 한 명

유성원: 성균관의 고관, 사육신 중 한 명

박인년: 박팽년의 동생

박기년: 박팽년의 동생

허조: 이개의 처남

심신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집현전 출신 인물로는 사육신으로 잘 알려진 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이개, 유성원 등이 있다. 박팽년의 아버지인 박정림은 판서를 지냈으며, 박인년과 박기년은 박팽년의 동생들이다. 이개의 처남은 허조이며, 심신이라는 인물도 세조 반정에 반대하였다.

5. 1. 세조 반정에 반대한 인물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한 집현전 출신 인물로는 사육신으로 잘 알려진 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이개, 유성원 등이 있다. 박팽년의 아버지인 박정림은 판서를 지냈으며, 박인년과 박기년은 박팽년의 동생들이다. 이개의 처남은 허조이며, 심신이라는 인물도 세조 반정에 반대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Jiphyeonjeon http://www.hangeulmu[...] 2014-12-04
[2] Encyclopedia 집현전 (集賢殿)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6-05
[3] 웹사이트 Sejong the Great https://www.worldhis[...] 2024-03-01
[4] 웹사이트 Reexamination of King Sejong's Achievements https://web.archive.[...] Korea Foundation 2014-12-04
[5] Youtube Window on Korean Culture - 10 Hall of Worthies and the Invention of Hangeul https://www.youtube.[...] Korea Foundation 2014-12-04
[6] 웹사이트 Sujeongjeon Hall of Gyeongbokgung Palace https://english.cha.[...] 2024-03-01
[7] 서적 The Korean Alphabet: Its History and Structur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8-05-16
[8] 웹사이트 알고 싶은 한글 http://www.korean.go[...] 2017-12-04
[9] 웹사이트 Hunminjeongeum Manuscript http://english.cha.g[...] 2019-02-28
[10] 웹사이트 Preserving Korea's Documents: UNESCO's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https://web.archive.[...] Korea Foundation 2014-12-08
[11] 웹사이트 Reexamination of King Sejong's Achievements https://web.archive.[...] Korea Foundation 2014-12-07
[12] 서적 East Asia: A Cultural,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https://www.cengage.[...] Cengage Learning 2024-03-01
[13] 웹사이트 Bongsa Joseon Changhwa Sigwon https://www.museum.g[...] 2024-03-01
[14] 서적 동사강목
[15] 서적 세종실록 1420-04-25
[16] 서적 세조실록 1456-07-05
[17] 서적 세조실록 1460-06-10
[18] 서적 성종실록 1478-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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