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러시아 국경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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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러시아 국경 분쟁은 17세기 러시아 차르국과 청나라 사이의 아무르강 유역을 둘러싼 영토 분쟁이다. 분쟁의 배경에는 시베리아 진출을 시도하는 러시아와 흑룡강 유역을 지배하려는 청나라의 이해관계가 있었다. 1639년부터 1643년까지 청나라는 아무르강 유역의 원주민을 복속시키려 했고, 러시아는 1643년 오호츠크에 도달하며 태평양으로 진출했다.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러시아와 전투를 벌였다. 이후 알바진 요새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고,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는 아무르강 유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했다. 이후 아이훈 조약(1858)과 베이징 조약(1860)을 통해 러시아는 아무르강 이북과 연해주를 차지하며 분쟁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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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러시아 국경 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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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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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청-러시아 국경 분쟁 |
다른 명칭 | 청로국경분쟁 (清露國境紛爭) |
구글 지도 검색어 | 헤이룽장성, 아무르주 |
기간 | 1652년 – 1689년 |
원인 | 아무르강 지배, 자바이칼 지배 |
장소 | 헤이룽장성과 아무르주 일대 |
결과 | 청나라의 승리,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러시아 차르국 카자크 약사 |
교전국 2 | 청나라 조선 할하부 몽골 |
지휘관 | |
러시아 차르국 | 예로페이 하바로프 오누프리 스테파노프† 아파나시 파시코프 알렉세이 톨부진† 아파나시 베이톤 니키포르 체르니고프스키 바실리 폴랴코프 |
청나라, 조선, 할하부 몽골 | 강희제 하이세 (海色)† 시푸 (希福) 밍안다리 (明安达理) 사르후다 (沙爾虎達) 린 싱추 허 위 변급 신류 토셰트 칸 |
병력 규모 | |
러시아 차르국 | 2,000명 |
청나라 | 1650년대 전투: 3,000명 (만주족 팔기군 및 한족 군인 포함) 포병: 200명 장교 및 통역관: 60명 |
조선 | 260명 (1650년대 전투) |
청나라 (추정) | 15,000명 |
피해 규모 | |
러시아 차르국 | 약 800명 |
청나라 | 수백 명 (논쟁 중) |
조선 | 전사: 7명 부상: 24명 부상 후 사망: 1명 총 32명 |
2. 분쟁의 배경
청-러시아 국경 분쟁의 배경이 된 곳은 시베리아 남동쪽 구석, 스타노보이산맥 남쪽 지역이다. 수문학(水文學)적으로 스타노보이산맥은 북쪽으로 흘러 북극해로 흘러들어가는 강들과 남쪽으로 흐르는 아무르강을 나누는 분수령이다. 생태학적으로 이 지역은 시베리아 침엽수림의 남동쪽 끝부분으로, 농업에 적합한 구역이 다소 섞여 있다. 사회적·정치적으로는 서기 600년경부터 중국-만주 세계의 북쪽 가장자리로, 여진의 근거지에 속했다.
명나라의 누르간 도사[3]는 아무르강 북쪽 제방의 아이군에 요새를 건설했고,[4] 텔린, 즉 현대의 티르에 행정 소재지를 설치했는데, 이곳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위쪽에 위치한다.[5]
러시아 차르국의 시베리아 진출은 1582년 시비르 칸국 정복으로 시작되었다. 1643년까지 오호츠크에서 태평양에 도달했다. 예니세이강 동쪽에는 농업에 적합한 토지가 거의 없었는데, 다우리아 ( 스타노보이 산맥과 아무르강 사이의 땅)는 청나라의 명목상 지배를 받았다.[23][24][25]
1643년, 러시아 차르국의 탐험가들이 스타노보이산맥 일대로 쏟아져 들어왔으나, 1689년까지 청나라 당국에 의해 모두 쫓겨났다. 이 지역에는 다우르족 9,000여 명이 제야강에 거주했고, 하류에는 14,000명의 두처르족이, 그리고 강 하구 쪽에는 수천 명의 에벤키족과 니브흐족이 거주했다. 다우리아에 대해 처음 들은 러시아인들은 아마도 1640년경 이반 모스크비틴과 막심 페르필레프였을 것이다.[23][24][25]
1859년에서 1860년에 걸쳐 러시아가 이 지역을 차지했고, 재빨리 러시아계 인구로 채워넣었다.
2. 1. 지정학적 배경
시베리아 남동쪽, 스타노보이산맥 남쪽 지역은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의 분쟁 지역이었다. 수문학적으로 스타노보이산맥은 북쪽으로 흘러 북극해로 들어가는 강과 남쪽으로 흐르는 아무르강을 나누는 분수령이다. 생태학적으로 이 지역은 시베리아 침엽수림의 남동쪽 끝부분으로, 농업에 적합한 곳이 섞여 있다.1643년 러시아 차르국 탐험가들이 스타노보이산맥 일대로 들어왔으나, 1689년까지 청나라에 의해 쫓겨났다. 1859년부터 1860년까지 러시아가 이 지역을 차지했고, 러시아계 인구로 빠르게 채워졌다.
2. 2. 역사적 배경
스타노보이산맥 남쪽, 시베리아 남동쪽 구석 지역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두 차례 분쟁이 벌어진 곳이다. 수문학적으로 스타노보이 산맥은 북쪽으로 흘러 북극해로 흘러드는 강과 남쪽으로 흘러 아무르강으로 흘러드는 강을 구분한다. 생태학적으로 이 지역은 시베리아 침엽수림의 남동쪽 가장자리이며, 일부 지역은 농업에 적합하다.사회적, 정치적으로는 서기 600년경부터 중국-만주 세계의 북쪽 가장자리였다. 여러 중국 왕조는 충분히 강해지면 주권을 주장하고, 요새를 건설하고, 조공을 징수하려 했다. 명나라의 누르간 도사[3]는 아무르강 북쪽 제방의 아이군에 요새를 건설했고,[4] 텔린, 즉 현대의 티르에 행정 소재지를 설치했는데, 이곳은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 위쪽에 위치한다.[5]
한편, 아무르강 유역 남쪽에는 나나이족, 오로치족, 울치족, 우데게족, 네기달족, 오로코족, 니브흐족, 아이누가 있었다. 이들은 어로와 수렵 문화를 비롯하여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경에는 이미 철기를 보유하고 농경도 행하고 있었다. 아무르강 북쪽에는 에벤족이 살고 있었다. 수렵 민족인 에벤키족은 아무르강 북부에서 예니세이강 서쪽까지 이동하며 생활했다.
2. 3. 청나라의 상황
여진은 흑룡강 하류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흑수말갈족의 후손이다.[1][2] 말갈은 7개의 부족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 흑수말갈이 가장 강성했다. 거란 제국 시대에 남하하면서 여진(여진인, 여직인)이라고 불렸다. 명나라 시대에는 명에 조공했는데, 15세기 중반부터는 조공·수출품에서 족제비(담비) 모피의 비율이 늘어났다. 명나라 궁정에서는 담비 모피가 매년 1만 장이나 소비되었고, 하층 사회에도 보급되었다. 조선에서도 15세기 후반부터 담비 모피 유행이 시작되었다. 흑담비는 흑룡강 유역과 시베리아 타이가에서만 잡혔기 때문에, 여진인은 무역로 각지에서 활약하며 부와 힘, 무기를 축적했다.[3]명나라는 여진인을 3종류로 나누었다. 조선 동북 경계에서 길림성 동부에 걸쳐 거주하는 여진인은 건주여직, 송화강의 여진인은 해서여직, 그 외의 여진인은 야인여직이라고 불렀다. 청나라를 세운 누르하치는 건주여직의 후예이다.[4]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는 1635년에 민족명을 "만주(만주)"로 바꾸었다. 1636년에 청나라가 건국되었지만, 명나라와 그 조공국과의 전쟁은 계속되었다.[5]
== 참조 ==
2. 4. 러시아 차르국의 상황
러시아 차르국은 1582년 시비르 한국을 정복하면서 시베리아로 팽창하기 시작했고, 1643년에는 오호츠크에 도달하여 태평양까지 영토를 넓혔다.[36][37][38] 예니세이강 동쪽에는 농사에 적합한 땅이 거의 없었지만, 스타노보이산맥과 아무르강 사이의 다우리아 지역은 예외였다. 이 지역에는 다우르족 9,000여 명, 두체르족 14,000여 명, 그리고 퉁구스계 예벤키족과 니브흐족 수천 명이 살고 있었다. 1640년 이반 모스크비틴과 막심 페르필레프가 다우리아에 대한 정보를 처음으로 러시아에 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6][37][38]1643년, 바실리 폴랴코프는 야쿠츠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제야강을 탐사했다. 그는 아무르강을 따라 하구까지 내려간 뒤, 오호츠크해 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3년 뒤 야쿠츠크로 돌아왔다.[36][37][38]
2. 5. 몽골의 상황
17세기 고비 사막 남쪽의 몽골 부족들은 청나라에 신종하였다. 그러나 사막 북부의 할하부는 독립을 유지했다. 할하 부족은 고비 사막의 동북쪽을 담당하는 좌익과 서남쪽의 우익으로 나뉘면서도 서로 연계하며 존속했다.1640년, 할하 몽골의 영주 13명과 오이라트의 영주 15명은 몽골-오이라트 회의를 열고 동맹을 맺어 독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할하는 청나라와의 우호 관계에도 힘썼다. 할하 좌우익 영주 4명씩은 청나라로부터 자사크 (기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할하는 실질적으로 청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외(外) 자사크라고 불렸다.
할하 좌익의 영주는 자바이칼 지역의 부랴트인에게 공납을 요구했다. 그러나 1654년 러시아인들이 자바이칼의 네르친스크에 요새를 건설했고, 1665년에는 셀렝긴스크, 1666년에는 우다에 겨울 주둔지를 건설하면서 할하 몽골인들은 러시아에 항의했다. 1672년, 할하 좌익의 종주 토셰트 칸이 모스크바에 사절을 파견하여 공납을 바치던 부랴트인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러시아 측은 그들이 50년 이상 전부터 러시아에 모피세를 납부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3. 청-러시아 충돌의 전개
러시아의 동진은 국가 사업이라기보다는 주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사냥꾼, 코사크, 총병(스트렐치) 등의 소부대가 강가에 겨울 야영지를 만들고 요새(오스트로그)로 확장했다. 이후 현지인에게 모피 등의 세금을 요구하고, 러시아 농민, 수공업자, 상인이 이주해 왔다. 이러한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러시아 정부가 요새를 승인하고 군정관(보예보다)이 진출하는 방식이었다.[46][47]
시베리아 동진은 오비 강, 예니세이 강, 레나 강 등의 큰 강과 그 지류를 이용하여 빠르게 진행되었다. 지류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배를 강에서 끌어올려 다음 수로로 이동했다.( 연수륙로) 1639년에는 러시아인이 오호츠크 해에 도달했다.
17세기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은 남부의 삼림 스텝이 아닌, 북쪽의 타이가를 통해 진행되었다. 삼림 스텝에서는 항상 유목민이 습격해 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643년 러시아 탐험가가 스타노보이 산맥을 넘었다. 당시 자바이칼에는 제야 강 유역에 다우르족 9,000명, 하류에 Duchers영어 14,000명, 그리고 하구 부근에 에벤키족과 니브흐족 수천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반 모스크비친과 막심 페르필레브가 1640년에 자바이칼을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다.[48][49][50]
1659년부터 1660년에 걸쳐 이 지역은 러시아 영토가 되었고, 곧바로 러시아인이 이주했다.
3. 1. 청나라의 원주민 복속 (1639-1643)
1639년 12월부터 1640년 5월까지 원주민과 청나라 사이에 최초의 전투인 구알라르 전투가 일어났다. 청나라의 2개 연대 병력에 맞서 봄보고르가 이끄는 예벤키족-다우르족 연합군 500명이 싸웠다. 다른 원주민 지도자 바르다시는 중립을 지켰다.[34] 1640년 9월에는 야크샤 전투에서 원주민(솔론족, 다우르족, 어룬춘족)과 청나라 군대가 충돌했다. 1643년 5월에 벌어진 세 번째 전투에서 원주민들은 청나라에 항복했다.[34]3. 2. 러시아의 초기 탐험 (1643-1646)


1638년, 러시아인들은 원주민으로부터 "실코르 강"(아무르 강) 인근에서 은이 채취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코사크 이반 모스크비친이 정찰을 떠나 러시아인으로서 처음으로 오호츠크 해에 도달했다. 그러나 모스크비친 등이 아무르 강에 도달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톰스크 장관은 "실코르 강" 원정을 위해 다시 이반 모스크비친을 파견하려 했지만, 야쿠츠크 장관이 먼저 코사크 바실리 포야르코프 이하 132명을 보냈다.
1643년, 포야르코프 등은 야쿠츠크를 출발했다.[23][24][25] 1643년 겨울부터 1644년 봄에 걸쳐, 코사크 기병대가 선도하는 러시아군이 영토 확장을 기도하며 제야강과 아무르 강의 지류를 탐사했다. 포야르코프는 야쿠츠크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제야 강으로 갔다. 그 후 아무르 강을 따라 하구까지 항해한 다음 오호츠크 해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여 3년 후인 1646년에 야쿠츠크로 돌아갔다.[23][24][25]
이 탐험으로 야쿠츠크 장관은 아무르 강 하구 부근의 길랴크인(니브흐인)은 어디에도 공물(야사크)을 납부하지 않고, 인구가 많으며, 모피와 곡물도 풍부하다는 등의 보고를 받았다. 또한 "볼보이칸"(청나라 황제를 뜻하는 몽골어)이 이 땅에 공납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들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다는 것도 밝혀졌다. 하지만 1644년은 청나라가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중원으로 들어간 해였고, 순치제 등은 러시아인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3. 3.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원정 (1649-1653)
예로페이 하바로프는 1649년 레나 강 유역에서 아무르강으로 가는 더 좋은 길을 발견하고, 야쿠츠크로 돌아가 이 지역 정복을 위한 무력 행동을 건의했다.[23][24][25] 1650년, 하바로프는 아무르강 북단의 알바진에 겨울 숙소를 짓고, 이듬해 여름 아무르강을 따라 내려가 현재의 하바롭스크 지역에 아찬스크 요새를 건설했다.러시아인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원주민들은 그들의 상국(宗國)인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1652년 3월 24일, 아찬스크 전투가 벌어졌다. 아찬스크는 닝안에서 출발한 600명의 만주족 병사와 약 1,500명의 다우르족과 두체르족으로 구성된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청군은 요새 공략에 실패했다.[7][8][9] 이 전투에서 청군 지휘관 해색(海色)은 지휘가 부진하여 처형당했다.[41]
하바로프는 강의 얼음이 녹자 상류로 철수하여[42] 현재의 쿠마르스크 지역에 동계 병영을 건설했다. 1653년 봄, 드미트리 지노비에프(Dmitry Zinoviev)가 이끄는 증원군이 도착했으나, 하바로프와 지노비에프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하바로프는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되었다.[23][24][25]
하바로프의 시베리아 정복은 러시아 코사크족의 식민지화에 대한 원주민들의 저항과 학살을 동반했다. 코사크족은 원주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으며, 특히 청나라의 지배를 받던 아무르 원주민들에게 잔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불교 신화에 나오는 악마인 루오차(羅剎)로 불렸다. 1650년대 하바로프의 아무르강 유역 침략 당시, 수백 마리의 소와 말이 약탈당하고 243명의 다우르족 몽골족 소녀와 여성들이 러시아 코사크족에게 강간당했다.[11]
3. 4. 오노프리오 스테파노프의 활동 (1653-1658)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후임인 오노프리오 스테파노프는 400~500명 가량의 코사크 군을 이끌고 아무르강 일대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원주민을 약탈하고 청나라 지방군을 격파하며 세력을 확장했다.[35]청나라는 이에 대응하여 두 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첫째, 러시아인들의 식량 확보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현지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둘째, 경험 많은 장군 사르후다를 닝안의 수비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35] 1657년, 사르후다는 울라 마을에서 40척 이상의 배를 건조하여 러시아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1655년 3월부터 4월까지 청군은 코마르를 포위했지만, 스테파노프는 이를 격퇴했다. 1657년에는 샤르호디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654년부터 1658년까지 청나라는 조선과 연합하여 러시아에 대한 원정을 실시했다. 1654년 1월, 조선군은 닝안에서 청군에 합류했다. 같은 해 7월, 이란현 인근 쑹화강 하류에서 변급이 이끄는 1,500명의 청-조선 연합군과 400~500명의 러시아군 사이에 후통 전투가 벌어졌다.[35]
1658년, 신류가 이끄는 조선군을 포함한 사르후다의 청나라 함대는 닝안을 출발하여 쑹화강을 따라 아무르강으로 내려갔다. 이들은 알바진에서 나온 오노프리오 스테파노프의 소규모 코사크 선단을 발견하고 공격했다. 아무르강 하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청-조선 연합군은 11척의 러시아 선단을 궤멸시켰고, 스테파노프는 작전 중 사망했다.[35]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러시아군은 탈출하여 약탈을 일삼으며 연명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 역사에서 나선정벌로 알려져 있다.
3. 5. 무인지대 형성 (1658-1665)
1658년까지 청군은 네르친스크 이남의 러시아인들을 모두 몰아냈다. 코사크 패잔병들이 숨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 일대를 파괴했다.[36][37][38] 그러나 청군은 자신들의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자 코사크를 더 쫓지 못했다. 1670년대에 청군은 마야강까지 북진하여 러시아인들을 오호츠크 해 너머로 몰아내려 했다.3. 6. 알바진 분쟁 (1665-1689)
1665년, 니키포르 체르니고프스키는[13] 일림스크의 보예보다를 살해하고 아무르강으로 도망쳐 알바진 요새를 재점령했다. 이곳은 그가 자크사라고 명명한 작은 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1670년, 알바진 요새는 청나라의 공격을 받았으나 방어에 성공했다. 1672년 알바진은 차르의 사면을 받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673년부터 1683년까지 청나라는 남부에서 일어난 삼번의 난을 진압하느라 북부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36][37][38] 1682년 또는 1684년에 모스크바에서 알바진의 보예보다가 파견되었다.[23][24][25]

1685년, 반란을 완전히 진압한 청 제국은 알바진 요새를 공략하여 관대한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알바진은 머스킷 300개, 대포 3문, 적은 양의 화약만 갖춘 목조 요새였다. 그럼에도 청나라 군대는 홍이포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작은 수비대만으로는 점령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청나라 군대 3,000명이 처음 요새를 공격했고, 일부 부대는 요새 남쪽에서 위장 공격을 시도했고, 다른 병사들은 비밀리에 홍이포를 요새 북쪽과 측면으로 이동시켜 포위 공격을 수행했다. 청나라군은 경포 100~150문, 대형 공성포 40~50문, 머스킷병 100명으로 구성되었고, 나머지 병사들은 전통적인 무기를 사용했다. 첫날, 러시아인 100명이 대규모 포격으로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목조 벽에 불이 붙자, 러시아인들은 항복하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거의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네르친스크로 도망갔지만, 소수는 만주에 남아 페킹의 알바진 코사크가 되었다. 곧이어 청군이 남쪽으로 물러갔는데, 이 소식을 들은 알렉세이 톨부진(Aleksei Tolbuzin)이 이끄는 러시아인 800명이 또다시 몰려와 요새를 되찾았다. 그들의 본래 목적은 곡식을 얻는 것뿐이었으나, 1686년에 청군이 돌아왔다.[44]
이후 러시아 수비대는 더욱 강력한 벽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프로이센 군인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베이톤(요새 부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벽은 결국 높이 5.5m, 두께 7.5m로 건설되었다. 1686년 7월, 청나라는 군대 3,000명(주로 기병, "새로 주조된" 대포 30~40문 포함)을 파견하여 러시아 군인과 민병대 736명(대포 11문 보유)의 수비대로부터 요새를 탈환하려 했으며, 병력 3,000~6,000명이 탑승한 보급선 150척이 지원했다. 러시아인들은 청나라의 항복 요구를 거부했고, 7월 18일에 또 다른 전투가 벌어졌다. 그 후 몇 주 동안 청나라는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항상 큰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으며, 러시아의 전투 손실은 미미했다. 러시아인들은 심지어 청나라의 공성 장비를 파괴하기 위해 반격을 시작하여, 한 번의 공격으로 러시아인 21명이 손실되고 중국군 150명을 사살했다. 청나라는 당시 유럽의 포병 요새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전술에 따라 공성선과 포병을 배치하려고 할 때 종종 중국 병사들이 교차 사격에 갇히게 하는 요새의 설계에 당황했다. 청나라 장군 랑탄은 8월에 공격을 포기하고 대신 러시아가 인근 강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요새를 굶어 죽이기로 결정했다. 결국 알바진에 대한 청나라의 투자는 너무 커져서, 포위 캠프의 요새는 알바진 자체의 요새보다 커졌다. 모스크바는 정예 머스킷병을 보내 요새를 구출하려 했지만 청나라는 모든 접근로를 통제했고 썰매가 들어갈 수 없었다. 양측 군대는 질병과 기아로 고통받았다. 러시아의 전투원과 민간인은 괴혈병, 발진티푸스, 콜레라로 대량 사망했고, 중국군은 벽 밖에서 굶주리고 얼어 죽었으며 때로는 식인에 이르기도 했다. 11월까지 러시아 병사 600명과 청나라 군인 1,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686년 10월, 러시아 사절단이 평화를 요청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베이징에 도착했다. 12월, 청나라 황제의 전령이 포위 선에 도착하여 포위 중단을 발표하고, 그의 병사들이 선의의 표시로 남은 러시아인 24명에게 음식과 약을 제공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마지막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공성전이 12월까지 질질 끌리다가 양국이 평화 조약을 맺어 흐지부지되었다는 것과,[44] 18개월 동안의 공성전 끝에 톨부진이 전사하고 요새는 함락되었다는 것이다.[45] 어찌 되었든 간에 전투가 끝났을 때 방어측 생존자는 100명이 채 되지 못했다.
- 1685년 5월~7월 : 알바진 공방전 - 청나라는 대만의 동녕 왕국에서 정씨 왕국 아래에서 복무했던 전 명나라 충신 한족 해군 전문가들을 알바진 공방전에 투입했다.[17] 러시아군은 정성공의 대만 기반 전 병사들과 싸웠다.[18] 전 대만 수병들의 해상 군사적 이해가 이 전투에 참여한 이유였다.[19]
- 1686년 7월~10월 : 신알바진 공방전.
전 명나라의 충신이었던 정성공 휘하에서 근무했으며 등패(Tengpaiying 藤牌營)라고 불리는 등나무 방패와 검을 사용한 한족 부대가 러시아에 대항하여 알바진을 강화하기 위해 강희제에게 추천되었다. 강희제는 그들의 기술 시연에 감명을 받아 린싱주와 허유, 전 정성공 추종자들의 지휘하에 500명의 부대를 알바진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이 등나무 방패 부대는 강에서 뗏목을 타고 이동하는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베어 넘길 때 등나무 방패와 칼만을 사용했으며, 옷을 입지 않고 싸웠지만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았다.[14][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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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증원군이 강을 따라 요새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그[린 후작]는 우리 해병들에게 옷을 벗고 물에 뛰어들라고 명령했다. 각자 머리에 등나무 방패를 쓰고 손에는 거대한 칼을 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러시아인들은 너무 겁에 질려 모두 외쳤다. '저것 봐라, 큰 모자를 쓴 타타르족이다!' 우리 해병들은 물속에 있었으므로 총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우리 수병들은 적의 총알과 화살이 뚫지 못하도록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등나무 방패를 썼다. 우리 해병들은 긴 칼을 사용하여 적의 발목을 베었다. 러시아인들은 강에 빠졌고, 대부분 죽거나 부상당했다. 나머지는 도망쳐 탈출했다. 린싱주는 도시를 포위하는 데 다시 참여했을 때 단 한 명의 해병도 잃지 않았다." 린 후작과 관련된 전쟁 참여자인 양하이차이의 기록[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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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진은 결국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베이징에서의 무역 특권과 네르친스크 도시를 유지할 권리를 대가로 청나라에 할양되었다.
4. 나선정벌 (조선의 참전)
청나라가 러시아 차르국의 아무르강 유역 확장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나선정벌이 이루어졌다.
1654년, 효종은 한거원을 통해 조총 군사 파병을 요청받고 변급을 지휘관으로 임명해 파병했다.[46] 조선군은 후퉁 전투에서 청군과 협력하여 러시아군을 격파했다.[47]
1658년, 청나라는 다시 조선에 군량 지원을 요청했고, 신류가 이끄는 조선군이 아무르강에서 오노프리오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스테파노프를 사살했다.[49][35] 이 과정에서 조선군 7명이 전사하기도 했다.[50]
조선은 두 차례의 나선정벌을 통해 청-조선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4. 1. 1차 나선정벌 (1654)
1654년 1월, 조선군이 닝안시에서 청군에 합류하였다. 같은 해 7월, 후퉁 강 (지금의 이란현 근처 쑹화강)에서 변급이 이끄는 1,500명의 청-조선 연합군이 400~500명의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였다.[35] 이 전투가 조선에서 말하는 1차 나선 정벌이다.1654년 3월 20일(음력 2월 2일),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한거원이 서울로 돌아와 청나라 예부에서 “조총을 잘 쏘는 사람 100여 명을 뽑아 보내라”는 요구를 전달했다. 효종이 ‘나선’이 어느 나라인지 묻자, 한거원은 “영고탑 근처에 사는 별종”이라고 답했다. 영의정 정태화는 북우후 변급을 군사 인솔자로 추천했다.[46]
서울을 떠난 변급은 회령을 거쳐 8일 만에 영고탑에 도착했고, 영고탑에서 다시 14일 후 왈합에서 러시아군과 마주쳤다. 당시 러시아군은 큰 배 13척, 작은 배 26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청나라 장수는 조선군을 선봉에 세우려 했으나, 변급은 “이 작은 자피선으로 어떻게 저렇게 큰 서양 배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거부했다. 청군은 변급의 의견을 받아들여 왈합 원주민 300여 명과 청군 300여 명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하고, 조선군에게는 포병 지원사격을 맡겼다. 덩치는 크지만 노가 없는 서양 배들은 아무르강(흑룡강)의 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떠내려갔다.[47] 변급은 음력 7월경에 영고탑으로 돌아왔다.[48]
1차 나선정벌에서 조선군은 7일 만에 적군을 물리치고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다. 청나라는 조선 조총 부대의 위력에 놀랐다고 한다.
4. 2. 2차 나선정벌 (1658)
신류가 이끄는 조선군이 청나라군과 함께 아무르강 하구에서 전투를 벌여 오노프리오 스테파노프를 전사시켰다.[35] 이 전투는 조선의 역사 기록에서 나선정벌로 알려지게 되었다.신류가 직접 작성한 일기인 《북정록》과 그의 6세손 신호응이 1869년에 펴낸 《통상신공실기》는 나선정벌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51] 특히 《북정록》에는 전투 상황, 청-조선 연합군의 작전, 러시아군의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51]
1658년, 사르후다의 청군 함대는 닝구타를 출발하여 쑹화강을 따라 아무르강으로 내려갔다. 이 함대에는 신류가 지휘하는 조선군도 포함되어 있었다.[12] 알바진에서 나온 오노프리오 스테파노프의 코사크 선단과 아무르강에서 전투가 벌어졌고(1658년 7월 10일), 11척의 러시아 측 전단은 궤멸되었으며 스테파노프는 전사했다.[35]
조선군은 7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청나라 장수가 러시아 차르국 배에 실린 재물을 탐내 불을 끄고 전리품을 챙기라고 명령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50] 이 과정에서 숨어있던 러시아인들이 사격을 가해 조선군 7명을 포함한 다수의 전사자가 나왔다. 분노한 조선군은 반격하여 러시아인들을 모두 섬멸했다. 청군은 조선군 시신을 화장할 것을 명령했으나, 조선군은 조국의 산하에 묻어주지 못할 망정 이국에서 태울 수는 없다며 근처에 매장했다.[50]
5. 외교 협상
청나라와 러시아는 모피 무역 확대를 위한 교역을 희망하며 협상을 시작했다. 1655년, 러시아는 청나라에 사절을 보냈고, 1669년에는 표트르 야리진과 세이토쿠르 아브린이 베이징에 들어가 공물 사절로 취급되었다. 이를 통해 청나라는 "라차"가 러시아임을 알게 되었다.[4]
러시아 대사는 차르 알렉세이의 칙서를 청나라 측근에게 전달했는데, 칙서는 강희제에게 차르에게 복속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청나라 관료들은 문제를 우려하여 러시아의 복속 요구를 "우호 요청"으로 고쳐 강희제에게 전달했다.[5] 강희제는 사절단을 연회에 초대하여 후대했고, 양국 간 무역 관계가 맺어질 가능성이 보였으나, 아무르강 연안에서의 분쟁이 다시 문제시되었다.[4]
에벤키족 족장 간치무르 문제는 청나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간치무르는 1667년경 청나라 영토에서 네르친스크 부근으로 돌아와 러시아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는데,[3] 청나라는 속인주의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간치무르의 "배신"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4],[5] 청나라는 간치무르의 반환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1669년 강희제는 아브린에게 구두로 간치무르를 비롯한 공납민 170명을 넘겨줄 것을 전달했다. 또한, 청나라 사절 4명을 네르친스크 장관에게 보내 정식 러시아 사절 파견과 간치무르 반환을 명령하는 칙서를 전달했다. 칙서는 모스크바까지 전달되었으나, 야쿠츠크의 러시아인들은 만주어와 몽골어로 쓰인 칙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모스크바 정부는 공납민 반환 요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책을 취하지 않았다.[5]
5. 1. 러시아의 모피 시장 변화
러시아 차르국은 이반 4세 (뇌제, 재위 1533년-1584년) 치세 하에 시베리아 정복을 본격화했다. 시베리아 정복의 주요 목적은 현지인으로부터 야사크(공납) 형태로 모피를 징수하는 것이었다. 야사크는 튀르크-몽골계 민족 사이에서 약한 부족이 강자나 국가에 바치는 공물이나 세금을 의미하며, 주로 모피가 해당되었다.[1] 1586년 시베리아에서 야사크로 징수된 모피는 검은담비 20만 장, 검은 여우 1만 장, 다람쥐 50만 장에 달했다. 17세기 그리고리 코토시힌은 시베리아 모피 수입을 60만 루블로 추산했지만, 정확한 수치는 알려지지 않았다.[2]이후 러시아는 모피 무역 확대를 위해 청나라와의 교역을 희망했다.
5. 2. 간치무르 문제
에벤키족 족장 간치무르는 자바이칼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였다. 그는 1667년경 강제 이주를 당했던 청나라 영토에서 고향인 네르친스크 부근으로 돌아와 러시아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3] 청나라는 영토에 대해 '속인주의'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는 조공민의 조공 대상이 바뀌면 그 조공민이 사는 곳은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다고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4] 이러한 간치무르의 "배신"은 청나라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매우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5]5. 3. 베이징 협상
1655년,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재위 1645년-1676년) 치하의 러시아는 두 명의 사절을 청나라에 보냈다. 1669년, 표트르 야리진과 세이토쿠르 아브린이 베이징에 들어가 공물 사절로 취급되었다. 이 사절을 통해 청나라 측도 "라차"가 러시아인임을 인지하게 되었다.[4]러시아 대사는 청나라 측근에게 차르 알렉세이의 칙서를 전달했다. 칙서는 강희제 (재위 1662년-1723년)에게 차르에게 복속할 것을 요구했다. 청나라 관료들은 강희제에게 전달할 때, 문제를 우려하여 러시아로부터 청나라에 대한 복속 요구를 "우호 요청"으로 고쳐 썼다.[5]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강희제는 사절 아브린 등을 연회에 초대하여 후하게 대접했다. 청나라-러시아 간에 무역 관계가 맺어질 가능성이 생기는 한편, 아무르강 연안에서의 분쟁이 다시 문제시되었다.[4]
청나라 측은 간치무르의 반환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1669년, 강희제는 아브린에게 구두로 간치무르를 비롯한 공납민 170명을 넘겨줄 것을 전달했다. 이어서 청나라는 사절 4명을 네르친스크 장관에게 보냈다. 청나라 사절들이 가지고 간 칙서에서는 러시아에게 정식 러시아 사절 파견과 간치무르의 반환을 명령했다. 문서는 모스크바까지 전달되었다. 야쿠츠크의 러시아인들은 만주어와 몽골어로 쓰인 칙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통했다. 모스크바 정부는 야쿠츠크에서 강희제의 칙서를 전달한 사절과 베이징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온 사절들로부터 공납민의 반환 요구를 들었을 터였지만, 대책을 취하지 않았다.[5]
6. 네르친스크 조약 (1689)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 차르국 사이에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알바진을 포함한 아무르강 일대의 영토를 잃었고, 양국 간의 국경은 아르군강과 스타노보이산맥으로 결정되었다.
6. 1. 조약의 내용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알바진을 포함한 아무르 지역 전체를 포기했다. 청과 러시아 차르국의 국경은 아르군강과 스타노보이산맥으로 결정되었다. 1727년 캬흐타 조약은 이 국경을 확인하고 명확히 했으며, 러시아-중국 무역을 규제했다.네르친스크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회 신부가 통역을 맡아 조약은 러시아어, 라틴어, 만주어 3가지 언어로 작성되었다.[3]
6. 2. 조약의 의의
네르친스크 조약은 러시아 차르국이 알바진을 포함한 아무르강 일대의 영토를 모두 잃고, 청나라와 아르군강과 스타노보이산맥을 국경으로 확정지은 조약이다.[1] 1727년 캬흐타 조약을 통해 이 국경을 재확인하고, 러시아와 청나라 사이의 교역을 규제했다.[1]그러나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러시아 제국은 스타노보이산맥과 아무르강 사이의 영토를 차지했고,[2]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17세기에는 분쟁 대상도 아니었던 프리모르스키를 차지하여, 외만주는 현재까지 러시아 영토로 남아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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