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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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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칼리굴라는 로마 제국의 세 번째 황제로, 티베리우스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 대제의 아들이다. 그는 어린 시절 군대에서 '칼리굴라'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황위에 올랐다. 즉위 후 초기에는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7개월 만에 병을 앓은 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며 국고를 탕진하고 기행을 일삼았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고 근친상간을 하는 등 폭정을 이어갔으며, 결국 41년에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3년 10개월이었으며, 후대의 역사 기록과 작품에서 광기, 폭정, 성적 일탈 등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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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년 사망 - 율리아 리빌라
    율리아 리빌라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일원으로,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의 딸이자 칼리굴라 황제의 여동생이었으며, 반역 음모 연루와 메살리나의 모함으로 추방과 처형을 반복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칼리굴라
기본 정보
AD 37–41년, 대리석 흉상
로마자 표기Gaius Jul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전체 이름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별칭가이우스 황제
출생일12년 8월 31일
출생지안치오, 로마 이탈리아
사망일41년 1월 24일 (28세)
사망지로마, 팔라티노 언덕
매장지로마, 아우구스투스 영묘
통치 정보
직위로마 황제
재위 기간37년 3월 16일 – 41년 1월 24일
이전 통치자티베리우스
다음 통치자클라우디우스
가족 관계
왕조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버지게르마니쿠스
어머니대 아그리피나
배우자유니아 클라우딜라
리비아 오레스틸라
롤리아 파울리나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자녀율리아 드루실라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양자)
기타
로마자 표기 (고전 라틴어)Gaius Iul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2. 생애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아우구스투스의 손녀 대 아그리피나의 아들로, 네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냈는데, 이때 아버지 휘하의 군단병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렸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차례차례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남긴 유서에 의해서 칼리굴라는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함께 제위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사망 당시 77살)의 젊은 후계자(즉위 당시 24살)로서 칼리굴라의 제위 계승은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성사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치세 만년에 공포 정치를 펴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유서에 티베리우스 게메루스를 공동상속인으로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유서를 무시하고 칼리굴라가 단독상속인으로서 황제로 취임했다.

칼리굴라는 황제 취임 직후 티베리우스의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지시켜 로마시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병을 앓은 뒤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칼리쿨라는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한 내용으로 바꾸고 사치스러운 연회를 즐기는 등 국고를 탕진해 재정을 파탄시켰다. 또 자신과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시키는 등 비(非)정상적인 통치를 하였다.

41년 1월, 칼리굴라는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에 의해 아내, 딸과 함께 암살당했다. 그의 통치기간은 3년 10개월이었다. 칼리굴라 암살 후, 원로원은 로마 공화정 복원을 시도했지만,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무산되었다.

2. 1. 초기 생애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대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네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냈는데, 이때 아버지 휘하의 군단병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렸다.[2]

칼리굴라의 이름이 유래된 로마의 ''칼리가''. 칼리굴라가 부모와 함께 게르마니아에서 군사 원정 중이었던 크산텐 근처에서 발굴되었다.


칼리굴라는 12년 8월 31일 안티움의 휴양지에서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Gaius Julius Caesar Germanicus)라는 출생명으로 태어났다.[35] 그는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 대제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명의 자녀 중 셋째였다.[36] 칼리굴라의 형제는 장남 네로 카이사르와 차남 드루수스 카이사르이다.[36] 여동생으로는 율리아 리빌라, 율리아 드루실라, 아그리피나 소제가 있다.[36] 또한 칼리굴라는 다음 황제인 클라우디우스조카이자, 그 다음 황제인 네로의 숙부이기도 하다.[37]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유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가계에 속하는 저명한 인물로, 로마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장군 중 한 명으로 존경받았다.[38] 게르마니쿠스는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안토니아 소제의 아들이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이기도 하다.[39] 어머니인 아그리피나 대제는 마르쿠스 비프사니우스 아그리파와 율리아 대제의 딸이며, 따라서 율리아 대제의 부모인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두 번째 아내 스크리보니아의 손녀이다.[36]

칼리굴라는 2세 또는 3세 무렵부터 군사 작전으로 북부 게르마니아(Germania)에 가는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를 따라갔다. 당시 칼리굴라는 군화와 갑옷을 포함한 특별 주문 제작된 미니어처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재미있어한 병사들 사이에서 마스코트 같은 존재가 되었다.[40] 칼리굴라라는 별명은 이 군복의 일부였던 그의 작은 신발 때문에 병사들이 붙여준 것이다.[41]

7세 때 칼리굴라는 아버지를 따라 시리아(Syria) 원정에 동행했다.[43] 19년 10월 19일에 칼리굴라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했다. 스베토니우스(Suetonius)는 정적이었던 티베리우스(Tiberius)가 시리아 속주(Syria) 총독(屬州總督)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Gnaeus Calpurnius Piso)에게 명령하여 게르마니쿠스에게 독을 먹였다고 주장한다.[44][45]

아버지가 죽은 후, 칼리굴라는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손에서 자랐지만, 얼마 후 그녀가 티베리우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추방당했다.[43]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피나의 재혼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것을 우려하여 그녀의 재혼을 금지하기까지 했다.[46] 아그리피나와 칼리굴라의 형인 네로 카이사르(Nero Caesar)는 29년에 반역죄 혐의로 추방당했다.[47][48] 그래서 어린 칼리굴라는 처음에는 증조모이자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인 리비아 드루실라(Livia Drusilla)의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43] 리비아가 죽은 후에는 할머니인 소 안토니아(Antonia Minor)의 집으로 보내졌다.[43] 30년에는 칼리굴라의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Drusus Caesar)마저 반역죄 혐의로 투옥되었고, 이미 유배 중이던 형 네로 카이사르도 기아 또는 자살로 사망했다.[48][49] 스베토니우스에 따르면, 어머니와 형제들이 추방된 후 칼리굴라와 그의 자매들은 군대에 의해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고, 티베리우스의 포로와 같은 상태였다고 한다.[50]

2. 2.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대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어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아버지 휘하의 군단병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려 군단의 마스코트가 되었다.[40]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차례차례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남긴 유서에 의해서 칼리굴라는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함께 제위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58]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사망 당시 77살)의 젊은 후계자(즉위 당시 24살)로서 칼리굴라의 제위 계승은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성사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치세 만년에 공포 정치를 펴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유서에 티베리우스 게메루스를 공동상속인으로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유서를 무시하고 칼리굴라가 단독상속인으로서 황제로 취임했다.

31년, 칼리굴라는 카프리 섬의 빌라 요비스에서 티베리우스의 직접적인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티베리우스의 궁정에서 칼리굴라가 성장한 카프리 섬의 빌라 요비스 복원도


그는 티베리우스의 근위대 대장인 나에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와 친분을 맺었다. 마크로는 티베리우스에게 칼리굴라를 "친절하고 순종적이며" 티베리우스의 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에게 헌신적인 자로 묘사했다. 이 시기의 칼리굴라는 일류 연설가이자 박식하고 교양 있고 지적인 인물로 묘사되며, 타고난 배우였던 그는 자신이 처한 위험을 인식하고 티베리우스의 자신과 가족에 대한 학대에 대한 분노를 그토록 아첨하는 태도로 감추었기에 "더 좋은 노예도, 더 나쁜 주인도 없었다"고 말해졌다.[43][52]

33년, 티베리우스는 칼리굴라에게 재무관의 지위를 주었다.[53] 칼리굴라는 같은 해 유니아 클라우딜라와 결혼했지만, 이듬해 유니아 클라우딜라가 산욕 중에 사망하여 첫 결혼 생활은 짧게 끝났다.[56] 칼리굴라는 곧 중요한 심복이 될 근위대장인 나에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와 친분을 맺었다.[56] 마크로는 티베리우스 앞에서 칼리굴라를 칭찬하며, 칼리굴라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악의와 의심을 없애려고 노력했다.[57]

35년,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로서 황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58]

티베리우스는 서기 37년 3월 16일,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칼리굴라는 3월 28일 또는 29일에 로마에 입성했고, 상원은 그에게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과 권한"을 부여했다.[3]

2. 3. 황제 즉위와 통치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대 아그리피나의 아들로, 네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어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냈다. 이때 칼리굴라는 아버지 휘하의 군단병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려 군단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차례차례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남긴 유서에 의해서 칼리굴라는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메루스와 함께 제위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58]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사망 당시 77살)의 젊은 후계자(즉위 당시 24살)로서 칼리굴라의 제위 계승은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성사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치세 만년에 공포 정치를 펴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유서에 티베리우스 게메루스를 공동상속인으로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유서를 무시하고 칼리굴라가 단독상속인으로서 황제로 취임했다.[61]

칼리굴라는 황제 취임 직후 티베리우스의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지시켜 로마시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72][73] 그러나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고열이 나 쓰러져 심하게 병을 앓은 뒤에 그 후유증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지 못하고 미친듯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칼리쿨라는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한 내용으로 바꾸고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도박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마차를 끌어온 인부에게 거액을 주는 등 국고를 탕진해 재정을 파탄시키고 이로 인해 민심의 급속한 이탈을 불러왔다. 또 자신과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시키는 등 비(非)정상적인 통치를 하였다. 특히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맺고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신들과 같은 복장을 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는데, 이러한 기행은 여러 번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37년 3월 16일 티베리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재산과 ‘프린케프스’의 칭호는 공동 상속자인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의 손자 게멜루스에게 계승되었다. 타키투스는 칼리굴라의 즉위를 서두르는 것이 로마 시민들에게도 유익하다고 생각한 마크로가 베개를 이용해 티베리우스를 암살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59] 스베토니우스는 칼리굴라 자신이 직접 손을 썼을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다.[56] 반면,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과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티베리우스의 죽음이 자연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60] 마크로의 도움을 받은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유언 중 게멜루스에 관한 조항을 게멜루스의 광기를 이유로 무효화하고, 나머지 부분만 티베리우스의 유지를 따랐다.[61]

원로원으로부터 프린케프스의 칭호를 받은 칼리굴라는 3월 28일 로마에 입성했다. 그는 군중으로부터 "우리의 아들", "우리의 별"이라는 환호를 받았으며,[62] "해가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 온 세상의"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최초의 황제라고 칭송받았다.[63]

24세의 젊은 나이에 아무런 업적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칼리굴라의 즉위가 이토록 열렬하게 환영받은 것은 티베리우스의 인기 부재 때문이었다. 말년의 티베리우스는 "은퇴"라는 명목으로 카프리 섬으로 거처를 옮겨 칩거하며, 공식적인 자리에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5년이나 지냈다. 필요에 따라 원로원에 서신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이 고작이었고, 공식적인 자리는 물론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귀족이나 원로원 의원들을 만나는 일이 드물었으며, 철저한 혐오스러운 태도를 보였다.[64] 게다가 티베리우스의 긴축 재정으로 인해 검투사 경기나 경연 대회 등 돈이 많이 드는 행사의 예산이 대폭 삭감되어[65] 각계각층의 불만을 샀고, 그의 사망 소식에 로마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66] 명장 게르마니쿠스의 업적이 아직 기억에 생생한 로마 군단과 속주 주민들에게는 게르마니쿠스를 냉대하고 그의 가족을 추방한 티베리우스에 대한 반감이 여전히 강했고, 칼리굴라에 대한 동정심은 컸다. 특히 로마 군단 병사들에게는 한때 그들의 마스코트였던 소년이 그의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다.[62]

칼리굴라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개최된 공공 축전 행사에서는 16만 마리가 넘는 동물이 제물로 바쳐졌다는 일화도 스베토니우스에 의해 전해진다.[68][69]

즉위 후 처음 7개월 동안의 칼리굴라의 통치는 완전히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필론은 기록하고 있다.[70] 그것의 대부분이 정치적인 배려 때문이었을지라도, 칼리굴라의 초기 정치는 매우 관대한 것이었다.[61] 지지를 얻기 위해, 프라이토리아니와 도시의 병사는 물론 이탈리아 국외의 군대까지 포함한 군인들에게 상여금을 지급하거나,[61] 티베리우스가 작성한 반역죄 관련 문서를 파기하고, 이와 관련된 재판은 이미 과거의 일이라고 추방된 자들의 귀국을 허가하거나,[71] 제국의 세제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진 사람들을 보호하거나, 검투사 경기를 부활시키기도 했다. 칼리굴라는 또한, 죽은 어머니와 형제의 유골을 모아 돌아와 아우구스투스 신전에 안치하여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74]

2. 4. 암살

칼리굴라는 원로원, 귀족, 기사 계급에게 가혹한 통치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136] 요세푸스는 이러한 가혹한 명령들이 칼리굴라를 암살하려는 여러 음모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137][138] 결국 칼리굴라는 카시우스 케레아(Cassius Chaerea)가 이끄는 근위대 장교들에 의해 암살되었다.[139] 이 암살 계획은 세 명이 입안했지만, 많은 원로원 의원, 군인, 기사 계급이 미리 알고 가담했다고 한다.[140]

요세푸스는 케레아가 정치적 동기로 암살을 실행했다고 주장했지만,[141] 스베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케레아를 모욕적인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라고 전한다.[137] 칼리굴라는 케레아의 가는 목소리와 세금 징수 태도를 비난하며, 그를 여성스럽다고 여겨 "프리아포스"나 "비너스"와 같은 별명으로 모욕했다.[137][142]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는 젊은 배우 극단에게 아우구스투스 신을 위한 공연에 대해 격려하던 중 케레아와 근위대 장교들에게 불려갔다.[144] 이후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료마다 다르지만, 케레아가 먼저 칼리굴라를 찌르고 다른 공모자들이 뒤따랐다는 점은 일치한다.[142][144][145] 스베토니우스는 칼리굴라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두 사람 모두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가졌고, 카시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각각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카시우스 케레아)과 동료들에게 30번 찔려 사망했다.[144][146] 칼리굴라의 게르만족 경호병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황제가 사망한 뒤였다. 경호병들은 분노와 슬픔에 잠겨 암살자와 동료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원로원 의원과 구경꾼들까지 해쳤다.[143][144]

원로원은 칼리굴라의 죽음을 공화정 복원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147] 케레아는 군대를 설득해 원로원을 지지하게 하려 했지만,[148] 군대는 황실에 충성했다.[148] 칼리굴라 암살을 애도한 로마 시민들은 집회를 열고 암살자 처벌을 요구했다.[149] 황제 제도 지지가 여전한 것에 분노한 암살자들은 칼리굴라의 아내 밀로니아 카이소니아(Milonia Caesonia)를 살해하고, 어린 딸 율리아 드루실라의 머리를 벽에 부딪혀 죽였다.[150] 그러나 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우스는 이미 도시를 떠나 근위대 병영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찾을 수 없었다.[151]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의 지지로 황제가 된 후, 케레아와 칼리굴라 암살 가담자들을 처형했다.[152]

3. 공공 개혁 및 재정 정책

칼리굴라는 하층민과 젊은 귀족들이 좋아하는 검투사 경기, 전차 경주, 경마, 극장, 도박 등을 대규모로 즐겼다. 그는 직접 검투사 훈련을 하고 호화로운 경기를 주최했으며, 로마 내 검투사 수 제한을 완화하는 사치법 면제를 상원으로부터 받았다.[56] 특정 선수나 팀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비난하고, 때로는 공연자들과 함께 노래하거나 대사를 따라 하는 등 '군중의 일원'처럼 행동했다. 그는 팔물라리우스 검투사와 녹색 파벌 전차 경주팀을 선호했고, 애마 인키타투스를 직접 몰기도 했다. 로마 귀족들은 이를 황제에게 전례 없는 모욕으로 여겼다.[56]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노예가 되려는 사람들"이라 묘사했던 상원 의원들의 계급, 지위, 특권에 대한 존중심이 거의 없었다.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불쾌감을 준 배우와 공연자들을 유배에서 복귀시켰다.[56] 그는 해방 노예, 평민, 평판이 좋지 않은 공연자, 하급 귀족(기사)들에게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을 확보했고, 상원 의원과 귀족들은 불신하고 경멸했다.[56] 디오는 칼리굴라가 일부 기사들에게 상원 의원 영예를 주고, 개인적 공로에 따른 상원 의원 승진을 예상했다고 긍정적으로 언급한다.[56] 기사 계급 감소를 막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부유한 신규 회원을 모집하고, 부정직이나 스캔들에 대한 명단 조사를 실시했다. 그는 사소한 비행은 무시하고, "신흥 인물들"(''노비 호미네스'')의 상원 진출을 예상했을 것이다.[56]

배럿은 칼리굴라가 처벌한 일부 기사의 범죄를 "매우 사소한 것"으로, 처벌은 선정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디오는 칼리굴라가 서커스 "소동"에서 26명 이상의 기사를 처형했다고 주장한다. 수에토니우스는 거의 같은 사건에서 "20명 이상"이 폭력적이지만 우발적인 압사 사건으로 사망했다고 묘사한다.[56] 일부 자료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기사와 상원 의원들을 강제로 경기장에서 검투사로 싸우게 했다.[56] 검투사 경기장에서 전투원으로 처벌받는 것은 특정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비시민에게 표준 처벌이었고, 공공 오락의 역할을 했다. 기원후 19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법률은 엘리트의 모든 공공 행사에 대한 자발적 참여를 금지했지만, 이 금지는 칼리굴라 통치 기간에는 대체로 무시되었다. 칼리굴라의 병중에 한 기사를 포함한 두 시민이 황제의 목숨을 구해준다면 검투사로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칼리굴라는 회복 후 위증 혐의를 피하기 위해 그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56]

37년 3월 16일 티베리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재산과 ‘프린케프스’ 칭호는 공동 상속자인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의 손자 게멜루스에게 계승되었다. 타키투스는 마크로가 베개로 티베리우스를 암살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59] 스베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직접 살해했을 가능성도 언급한다.[56] 반면,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과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티베리우스가 자연사했다고 기록한다.[60] 마크로의 도움으로 칼리굴라는 게멜루스의 광기를 이유로 티베리우스 유언 중 게멜루스 관련 조항을 무효화했다.[61]

원로원으로부터 프린케프스 칭호를 받은 칼리굴라는 3월 28일 로마에 입성했다. 그는 군중으로부터 "우리의 아들", "우리의 별"이라는 환호를 받았으며,[62] "온 세상의" 백성으로부터 존경받는 최초의 황제로 칭송받았다.[63]

칼리굴라 즉위가 열렬히 환영받은 것은 티베리우스의 인기 부재 때문이었다.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 칩거하며 원로원에 서신으로 지시를 내리고 귀족들을 만나지 않았으며, 긴축 재정으로 검투사 경기 예산이 삭감되어[65] 각계각층의 불만을 샀다.[66] 로마 군단과 속주 주민들은 게르마니쿠스를 냉대한 티베리우스에게 반감이 컸고, 칼리굴라에게 동정심을 가졌다.[62]

칼리굴라는 아우구스투스와 실제 혈연 관계가 있는, 정통성이 매우 명확한 존재였다. 칼리굴라 즉위 축하 공공 축전 행사에서 16만 마리 이상의 동물이 제물로 바쳐졌다는 일화가 스베토니우스에 의해 전해진다.[68][69]

즉위 후 처음 7개월 동안 칼리굴라의 통치는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필론은 기록한다.[70] 칼리굴라의 초기 정치는 매우 관대했다.[61] 군인들에게 상여금을 지급하고,[61] 티베리우스의 반역죄 관련 문서를 파기하고 추방된 자들을 귀국시켰으며,[71] 제국 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검투사 경기를 부활시켰다. 성범죄자를 제국에서 추방하는 조치도 취했다.[72][73] 칼리굴라는 죽은 어머니와 형제의 유골을 아우구스투스 신전에 안치했다.[74]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39년에 재정 위기가 발생했다.[75] 스베토니우스는 38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89] 공공 지출로 국가 재정이 쇠약해졌다. 고대 역사가들은 칼리굴라가 개인 재산 몰수를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기소, 벌금, 살인까지 했다고 주장한다.[90] 자금을 얻기 위해 국민들에게 국가에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하고,[91] 소송, 결혼, 매춘에 세금을 부과하고,[92] 검투사 목숨을 경매에 부치기도 했다.[90][93] 티베리우스 사망 당시 유언장은 칼리굴라에게 재산을 증여해야 한다는 해석이 확정되었다.[94] 백부장은 전리품을 국가에 넘겨야 했고,[94] 도로 감독관은 횡령으로 기소되어 환불을 강요당했다.[94]

단기간의 기근이 발생했는데, 스베토니우스는 칼리굴라 때문이라고 하고,[90] 세네카는 칼리굴라가 부교 건설에 많은 배를 사용해 곡물 수입이 지연되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95]

4. 건설 사업

기원후 38년, 칼리굴라는 검열을 해제하고 공공 자금 및 지출 내역을 공개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이것을 어떤 황제도 행한 적 없는 최초의 행위라고 칭찬했다.[1] 즉위 직후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상원이 장악했던 일반 시민을 대표하는 관리 선출권을 인민회(코미티아(comitia))에 다시 부여했다. 공공 게임과 축제를 관리하고 도로와 사당을 유지 관리하는 선출직 관리인 아이딜레스(aedile)는 이제 인기 투표를 얻기 위해 자신의 돈을 사치스럽고 눈에 띄는 구경거리 및 기타 ''무네라''(국가 또는 국민에게 주는 선물)에 사용할 동기가 생겼다.[2] 디오 카시우스는 이것이 "하층민을 기쁘게 했지만, 만약 직책이 다시 많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간다면... 많은 재앙이 초래될 것이라고 생각한 현명한 사람들을 슬프게 했다"고 썼다.[3] 상원이 이를 완전히 거부하자 칼리굴라는 선거 관리권을 상원에 다시 돌려주었다. 어느 쪽이든 황제는 궁극적으로 어떤 후보가 선거에 출마하고 당선될지를 선택했다. 칼리굴라는 자신의 계획과 결정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반대에 직면했을 때 이를 포기하거나 수정하거나 되돌릴 수 있었다.[4] 그는 좋은 조언을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젊음이나 이해력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필론은 "누가 감히 나에게 가르치려 하는가?"라는 칼리굴라의 경고를 인용했다. 칼리굴라는 예루살렘 성전을 자신을 제우스로 한 상과 함께 황제 숭배 사원으로 개조하려는 계획을, 그 계획이 극심한 항의를 불러일으키고 지역 경제에 피해를 줄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포기했다.[5] 그는 필요한 곳에 자금을 지원했다. 화재로 재산을 잃은 사람들을 도왔고, 매우 인기 없는 판매세를 폐지했지만, 그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배우, 전차 경주 선수 또는 다른 공연자들에게 한 사치스러운 선물이 그의 개인 재산인지 국고인지는 알 수 없다. 개인적인 관용과 관대함은 신중함과 책임감과 함께 지배 계층, 특히 황제에게 기대되었다.[6][7][8] 어느 시점에서 칼리굴라는 공직자에 대한 유증이 공직자의 재산이 아니라 공직의 재산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명령했다.[9][10][11][12]

5. 대외 정책

칼리굴라는 외교 정책에서도 여러 활동을 펼쳤다.

39년 말 또는 40년 초, 칼리굴라는 게르마니아 상부에 군대와 군수품을 집중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곳으로 향했다.[40] 아그리피나리빌라가 연루된 음모를 진압하고, 관련자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했다.[42][43][44][45] 클라우디우스가 이끄는 원로원 사절단은 적대적인 반응에 직면했으며,[46] 칼리굴라는 아우구스투스가 도입한 극장 좌석 배치 계획을 폐기했다.[47] 그는 "기사계급과 백성"에게만 말하고, 원로원은 언급하지 않았다.[48]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부터 군사 작전에 동행하며 병사들에게 사랑받는 마스코트였다.[49][50] "칼리굴라"라는 별명은 "작은 군화"를 의미하며, 그의 작은 군화에서 유래했다.[51] 그는 7세 때 시리아 원정에도 동행했다.[53]

40년 봄, 칼리굴라는 브리타니아 원정을 계획하고 두 개의 군단을 창설했다.[11] 고대 자료에서는 칼리굴라의 비겁함이나 광기를 묘사하지만, 반란 가능성도 제기된다.[11] 브리튼 추장들이 로마의 요구에 응했거나, 훈련 및 정찰 임무, 또는 브리튼 추장 아드미니우스의 항복을 받는 단기 원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11][12][13] Suetoniusla는 칼리굴라가 병사들에게 조개껍데기를 모으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포위 공격 무기를 뜻하는 musculila를 잘못 번역한 것일 수 있다.[11] 브리타니아 정복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이루어졌다.[11]

칼리굴라(37~41년) 시대 로마 제국과 주변 국가 지도


40년, 칼리굴라는 로마의 속국인 마우레타니아(Mauretania)를 병합했다.[7] 마우레타니아 통치자 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of Mauretania)는 처형되었고, 이는 반란을 야기했다.[14] 로마는 마우레타니아를 팅기타나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Tingitana)와 카이사리아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Caesariensis) 두 속주로 나누었다.[15] 플리니우스(Pliny)는 이 분할이 칼리굴라의 업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디오(Dio)는 반란 진압 후에 분할이 이루어졌다고 서술한다.[16] 칼리굴라가 분할을 결정했지만 반란 때문에 연기했을 가능성이 있다.[17] 39~44년 마우레타니아 사건에 대한 세부 사항은 유실되었다.[18] 칼리굴라의 확장은 잠재적인 미래 위협에 대한 신중하고 성공적인 대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9]

5. 1. 유대 속주 문제

칼리굴라 통치 시기 유대에서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스인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124]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로마 제국 전역과 유대에 정착해 있었고,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다. 마케도니아 그리스인 정복 이후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이집트에 정착했고, 로마 정복 후에도 그곳에 남았다.[124] 알렉산드리아 그리스인은 시민권이 있었지만,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은 단순한 정착민으로 분류되어 로마 총독이 부여한 권리를 제외하고는 법적 권리나 시민권이 없었다. 그리스인은 유대인이 공식적으로 시민으로 인정받으면 그들의 지위와 특권이 훼손될까 봐 두려워했다.[124]

칼리굴라는 이집트 총독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를 바타네아와 트라코니티스의 총독이자 그의 친구인 헤로데 아그리파로 교체했다.[124] 플라쿠스는 칼리굴라의 어머니에 대해 음모를 꾸몄고 이집트 분리주의자들과 관계를 맺었다.[126] 38년, 칼리굴라는 아그리파를 플라쿠스를 조사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갑작스럽게 파견했다.[127] 필론에 따르면, 이 방문은 아그리파를 "유대인의 허접한 왕"으로 여긴 그리스인들의 조롱을 불러일으켰다.[128] 필론의 기록에 따르면, 그리스인 폭도들은 회당에 난입하여 유대교의 종교 법에 위배되는 칼리굴라의 조각상과 신전을 세웠다. 플라쿠스는 유대인을 "외국인과 이방인"으로 선언하고, 그들이 끔찍한 환경 속에서 살았던 알렉산드리아 5개 구역 중 하나를 제외한 모든 구역에서 추방했다. 필론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이 그 도시의 그리스 인구에 의해 이 유대인 거주지 안팎에서 저지른 여러 잔혹 행위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129] 칼리굴라는 플라쿠스를 소요 사태의 책임자로 여겨 그를 추방하고 결국 처형했다.[131]

39년, 아그리파는 그의 삼촌이자 갈릴리와 페레아의 테트라르크인 헤로데 안티파스파르티아의 도움을 받아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는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백했고, 칼리굴라는 그를 추방했으며, 아그리파는 그의 영토를 상으로 받았다.[80]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기를 거부한 유대인이 황제를 모욕했다는 혐의로 40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다시 소요가 발생했다.[132] 유대 도시 얌니아에서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은 유대인의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황제 숭배를 위한 조잡하고 기준 미달의 제단을 세웠고, 유대인들은 즉시 그것을 허물었다. 이것은 반란 행위로 해석되었다.[133] 이에 대한 응답으로 칼리굴라는 유대인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도록 명령했다.[134] 로마에게는 종교적 행위라기보다는 정치적 행위였지만, 유대인에게는 신성 모독이었고 유대교 일신교와 상충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론은 칼리굴라가 "자신의 뜻에 반하는 소망을 품은 유일한 사람들인 것처럼 유대인들을 특히 의심했다"고 썼다.[125]

40년 5월, 필론은 알렉산드리아 유대인과 그리스인 대표단을 칼리굴라에게 데려갔고, 그 해 8월 31일 이후 알렉산드리아 폭동이 가장 심했을 때 두 번째 대표단을 데려갔다. 이러한 만남은 결정적이지 않았다. 두 만남 모두 칼리굴라에게 유대인 대표단을 비웃는 가벼운 농담을 할 충분한 기회를 주었지만, 그는 의복이나 말씨에서 신성을 주장하지 않았고, 두 번째 만남에서 유대인이 그의 숭배를 어려워하는 이유를 거의 수사적으로 물었다. 필론과 요세푸스는 모두 칼리굴라의 행동이 그의 신성 주장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유대인에게는 외관과 달리 근본적으로 미쳤다고 여겨질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들은 이미 그의 숭배의 초점으로 그의 이미지를 전시하여 새로운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분명히 했다. 얌니아의 제단 파괴와 그리스 시민들이 회당에 놓은 "우상" 이미지의 제거는 한 폭군의 공격적인 신성 주장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유대인의 종교적 열정의 표현으로 의도되었을 수 있다. 필론은 처음부터 칼리굴라를 혐오했던 것 같지만, 칼리굴라가 유대인을 증오하고 그들의 멸망을 준비하고 있다는 그의 믿음은 증거가 없다. 칼리굴라의 조각상을 성전 구역에 주피터로 분장한 모습으로 배치하는 것은 황제 숭배로 알려진 제국 전역의 종교 현상과 일치했을 것이며, 유대인은 지금까지 이것에서 면제받았다. 그들은 황제에게 ''기도''하기보다는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 완벽한 타협은 아니었지만, 유대인 전통이 필멸자를 기리기 위해 허용한 최고의 영예였다. 칼리굴라는 이것이 매우 불만족스럽다고 생각하여 그의 조각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즉시 설치하라고 요구했다.[134]

시리아의 총독인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는 시돈에서 조각상을 주문한 다음, 심각한 유대인 반란의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설치를 최대한 연기했다.[135] 어떤 기록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아그리파와 유대인 당국과의 합리적인 논의에 동의했고, 반란, 재산 파괴, 계획이 진행될 경우 곡물 수확 손실의 위협에 직면하여 이 계획을 포기했다. 더 적대적인 기록에서는 칼리굴라가 명백히 미치고 합리적인 논의를 할 수 없어 충동적으로 다시 마음을 바꾸고 페트로니우스에게 명령을 다시 내리고 실패하면 강제 자살을 위협했다. 칼리굴라-제우스의 더 큰 조각상이 로마에서 주문되었고, 그것을 운반하는 배가 항해 중일 때 칼리굴라의 죽음 소식이 페트로니우스에게 전해졌다. 칼리굴라의 계획은 포기되었고, 페트로니우스는 살아남았고 조각상은 결코 설치되지 않았다.[132]

5. 2. 게르마니아 및 라인 강 국경

39년 말 또는 40년 초, 칼리굴라는 게르마니아 상부에 군대와 군수품을 집중시키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라인강 상류 지역의 게르만 부족들을 공격하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준비 부족으로 후퇴했다.[40] 칼리굴라는 제국 총독 가에툴리쿠스를 "악의적인 음모"로 고발하여 처형했는데,[42] 디오에 따르면 그는 군대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43] 레피두스는 칼리굴라의 두 자매인 아그리피나와 리빌라와 함께 이 음모에 연루된 것으로 고발되었고, 그 역시 처형되었으며 칼리굴라의 두 자매는 간통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망명당했다.[44][45]

클라우디우스가 이끄는 원로원 사절단이 이 음모 진압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에서 도착했지만, 적대적인 반응에 직면했는데, 클라우디우스는 라인강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있다.[46] 칼리굴라가 북쪽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오직 계급만이 자리를 결정하도록 아우구스투스가 도입한 극장 좌석 배치 계획을 폐기했다. 그 결과 난장판이 벌어졌고, 좌석은 운에 맡겨졌다.[47] 그의 통치 말기, 칼리굴라는 북부에서의 군사 활동과 레피두스 진압 후 로마에서의 임박한 승전 축하식을 준비하기 위해 공문을 보냈다. 그는 자신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돌아갈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기사계급과 백성"에게만 말하고, 점점 불신하게 된 원로원이나 원로원 의원들은 언급하지 않았다.[48]

칼리굴라는 2세 또는 3세 무렵부터 군사 작전으로 북부 게르마니아에 가는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를 따라갔다. 당시 칼리굴라는 군화와 갑옷을 포함한 특별 주문 제작된 미니어처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 사이에서 마스코트 같은 존재가 되었다.[49] 티베리우스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잇는 것에 반대하여 폭동이 일어났을 때도, 주동자였던 병사들은 칼리굴라를 자신들 곁에서 멀리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며 스스로 폭동을 진압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병사들에게 사랑받았다.[50] 라틴어로 "작은 군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라는 별명은, 이 군복의 일부였던 그의 작은 신발에 착안하여 병사들에 의해 붙여진 것이다.[51] 하지만 그는 나중에 이 별명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52] 칼리굴라는 7세 때에도 아버지를 따라 시리아 원정에 동행했다.[53]

5. 3. 브리타니아 원정

Caligulala의 브리타니아 원정은 40년 봄에 계획되었다.[11] 이 원정은 로마의 지배를 브리타니아로 확장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11] 이를 위해 두 개의 군단이 새로 창설되었으며, 이 군단들은 칼리굴라의 갓 태어난 딸의 이름을 따서 '프리미게니아이(Primigeniae)'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11]

고대 자료에서는 칼리굴라가 비겁하거나 미쳐서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묘사하지만, 군대를 십인벌로 위협했다는 이야기는 반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군대가 왜 침공을 감행하지 않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11] 반란 외에도, 브리튼 추장들이 로마의 요구에 응하여 전쟁 명분이 사라졌거나, 훈련 및 정찰 임무,[11] 또는 브리튼 추장 아드미니우스(Adminius)의 항복을 받는 단기 원정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2][13]

Suetoniusla는 칼리굴라가 병사들에게 "바다의 전리품"으로 조개껍데기를 모으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포위 공격 무기를 뜻하는 musculila를 잘못 번역한 것일 수 있다.[11] 결국 브리타니아 정복은 칼리굴라의 후계자인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이루어졌다.[11]

5. 4. 마우레타니아 병합



40년, 칼리굴라는 로마의 부유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속국인 마우레타니아(Mauretania)를 병합했다.[7] 마우레타니아는 로마화에 저항하는 독립적인 반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그 통치자 마우레타니아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of Mauretania)는 유바 2세(Juba II)의 귀족 후손으로, 인기가 많고 엄청난 부를 소유했지만 "무능하고 무책임한"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했고 결국 축출되었다. 무능한 속국 왕들의 일반적인 운명은 은퇴와 편안한 망명이었지만, 칼리굴라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로마로 소환하여 40년 봄 이후 어느 시점에 처형했다. 그의 제거는 마우레타니아에서 불만을 야기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14]

로마는 마우레타니아를 말루아(Malua) 강을 경계로 팅기타나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Tingitana)와 카이사리아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Caesariensis) 두 속주로 나누었다.[15] 플리니우스(Pliny)는 이 분할이 칼리굴라의 업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디오(Dio)는 42년(칼리굴라 사후) 가이우스 스웨토니우스 파울리누스(Gaius Suetonius Paulinus)와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Gnaeus Hosidius Geta)에 의해 반란이 진압되었고, 그 이후에야 분할이 이루어졌다고 서술한다.[16] 이러한 혼란은 칼리굴라가 속주를 분할하기로 결정했지만 반란 때문에 분할을 연기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합병된 속주의 최초의 기사(equestrian) 총독은 44년에 재직한 마르쿠스 파디우스 켈레르 플라비아누스(Marcus Fadius Celer Flavianus)였다.[17]

39~44년 마우레타니아 사건에 대한 세부 사항, 특히 디오가 쓴 병합에 관한 전체 장은 유실되었다.[18] 디오와 타키투스(Tacitus)는 칼리굴라가 북쪽에서의 불명예스러운 군사적 성과에 대한 두려움, 질투, 고려 등이 긴급한 군사적 또는 경제적 필요성보다는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라고 시사한다.[14] 타크파리나스(Tacfarinas)의 반란은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Africa Proconsularis)가 서쪽으로 얼마나 노출되어 있었고, 마우레타니아 속국 왕들이 그 속주를 보호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었으며, 따라서 칼리굴라의 확장은 잠재적인 미래의 위협에 대한 신중하고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대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9]

6. 종교 정책

칼리굴라는 자신의 정치적 역할에 종교를 도입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헤라클레스, 메르쿠리우스, 비너스, 아폴로 등 신들과 반신의 복장을 하곤 했다.[118] 그는 정치인들과의 회합에서 자신을 신이라고 불렀으며, 공문서에서도 종종 주피터라고 불리게 되었다.[119][120]

아시아 속주의 밀레투스에는 그를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 세워졌고, 로마에도 그를 숭배하는 두 개의 신전이 건립되었다.[120] 포룸 로마눔의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은 팔라티노 궁전과 직결되었고, 칼리굴라에게 봉헌되었다.[120][121] 칼리굴라는 때때로 여기에 모습을 드러내어, 대중 앞에서 신의 역할을 하였다.

칼리굴라의 동시대인 필론은 칼리굴라가 디오니소스, 헤라클레스, 디오스쿠리와 같은 반신들부터 수성, 비너스, 아폴론과 같은 주요 신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웅과 신들의 복장을 했다고 주장한다. 필론은 이러한 분장을 그가 외교 방문 중에 목격하거나 들었을지도 모르는 사적인 팬토마임이나 연극 공연의 맥락에서 묘사하며, 칼리굴라가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받기를 원했다는 증거로 제시한다.[118]

최고대제사로서 칼리굴라를 묘사한 당대 조각상


칼리굴라의 분장에는 전례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한때 자신과 손님들이 올림푸스 신들로 분장한 파티를 열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아폴론으로 분장했다. 하지만 그 행사는 반복되지 않았다. 그것은 신들에게 불경을 보였고, 대중에게 무감각함을 보였다. 기원전 20년대 초에 제작된 공식 로마 조폐국의 주화에는 옥타비아누스가 아폴론, 주피터, 넵투누스로 나와 있다. 이것 또한 범죄로 여겨졌을 수 있으며 반복되지 않았다.[118]

디오는 칼리굴라가 주피터를 가장했고, 공개 회의에서 자신을 신이라고 언급했으며, 공문서에서 때때로 "주피터"라고 불렸다고 주장한다. 로마의 최고 신인 주피터에 대한 칼리굴라의 특별한 관심은 모든 현존하는 자료에 의해 확인된다.

칼리굴라는 자신의 종교적 의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그는 네미 호수의 디아나 사제를 대체하고, 살리이(마르스 사제)를 재조직했으며, 주피터의 수석 사제인 플라멘 디알리스가 맹세를 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황제 충성 맹세를 할 수 없었다. 칼리굴라는 그리스 디디마의 아폴론 신전을 자신의 숭배를 위해 인수하거나 공유하기를 원했다. 그의 동상이 준비되었지만 설치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 포룸의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유적. 칼리굴라가 이 건물을 개조하여 신전을 증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에토니우스와 디오는 로마 시에 칼리굴라를 위한 신전을 언급한다. 학자들은 그러한 신전이 존재했다면 팔라티노 언덕에 있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미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을 팔라티노 언덕에 있는 그의 황궁과 연결했고, ''세비리 아우구스탈레스''의 공식 사제단을 설립하여 ''게니우스 아우구스티''(그의 "가족 정령")와 라레스(가정의 조상 정령)를 섬기게 했다.[16]

그리스 국가의 로마 사절단은 칼리굴라를 "새로운 신 아우구스투스"로 환영했다. 키지쿠스에서 칼리굴라 통치 초기에 나온 공공 비문은 그를 "새로운 태양신"으로 감사를 표한다. 이집트 지방 주화와 일부 국가 ''두폰디이''는 칼리굴라가 옥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태양신의 광관을 쓰거나, 칼리굴라의 신성한 선조인 divusla 아우구스투스의 광관을 쓴 "새로운 태양"()으로 묘사된 최초의 재위 로마 ''프린켑스''이다.

디오는 칼리굴라가 그의 ''게니우스'' 숭배를 위해 귀족들에게 사제직을 1,00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수수료로 팔았고, 즉시 전액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대출을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사제들에는 그의 아내 카이소니아와 삼촌 클라우디우스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디오는 그가 비용 때문에 파산했다고 주장한다.

7. 원로원과의 갈등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노예가 되려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던 원로원 의원들의 계급, 지위, 특권에 대한 존중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105]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 시대의 재판 기록을 재검토하여, 재판 과정에서 원로원 의원들의 행동을 고려해 많은 의원들이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조사와 재판을 실시하도록 지시했다.[105] 그리고 집정관을 해임하고, 일부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했다.[107] 수에토니우스는 다른 원로원 의원들은 칼리굴라 옆에 시중들며 그의 이륜 전차 옆을 따라 뛰어야 하는 모욕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07]

칼리굴라는 자신에게 돈과 선물을 아낌없이 베푼 평판이 좋지 않은 공연자들보다 하급 귀족(기사)들 사이에서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을 확보했다. 또한, 칼리굴라는 원로원 의원들과 귀족들을 공공연하게 불신하고 경멸하며 충성심을 가식적으로 가장한다고 비웃었다. 반면, 그는 충성스러운 해방 노예와 시민-평민들을 곁에 두었다.

디오는 칼리굴라가 일부 기사들에게 원로원 의원의 영예를 허락하고, 그들의 개인적인 공로를 바탕으로 후속 승진을 예상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기사 계급의 감소하는 회원 수를 보충하기 위해 칼리굴라는 제국 전역에서 새로운 부유한 회원들을 모집했고, 부정직이나 스캔들의 징후가 있는지 면밀히 조사했다. 그는 사소한 비행은 무시했던 것 같고, 가문에서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으로 봉사하는 "신흥 인물들"(''노비 호미네스'')의 등장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들은 승진에 대한 감사와 충성심을 칼리굴라에게 빚지게 될 것이었다.

배럿은 칼리굴라가 처벌한 것으로 알려진 일부 기사의 범죄를 "매우 사소한 것"으로, 그들의 처벌을 선정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디오는 칼리굴라가 서커스 "소동"에서 26명 이상의 기사를 처형했다고 주장한다. 수에토니우스는 거의 확실히 같은 사건에서 "20명 이상"의 목숨이 잃었는데, 이는 폭력적이지만 우발적인 압사 사건으로 묘사된다고 기록한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기사와 원로원 의원들을 강제로 경기장에서 검투사로 싸우게 했다고 한다.

원로원과 결렬한 직후, 칼리굴라는 여러 음모에 휘말렸다.[108] 39년에는 칼리굴라의 의붓형제인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가 관련된 음모가 실패했다.[108] 그 직후 게르마니아 총독이었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에투리쿠스가 공모죄로 처형되었다.[108]

8. 암살과 그 여파

41년 1월 24일,[17] 알렉산드리아로 떠나기 하루 전, 칼리굴라는 근위대 장교 카시우스 케레아(Cassius Chaerea)와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Cornelius Sabinus) 및 여러 백부장들에 의해 암살당했다.[139] 이 암살 계획은 세 명의 남자에 의해 입안되었지만, 많은 원로원 의원들과 군인, 기사 계급이 이 계획을 미리 알고 가담했다고 한다.[140]

요세푸스는 칼리굴라의 측근 여러 명을 공모자로 지목하고 있으며, 디오는 상원의 시각에서 많은 다른 인물들을 공모자로 지목하는 내용에 접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수의 공모자만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모든 공모자가 서로 직접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필요는 없었다. 공모자의 수가 적을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141] 요세푸스에 따르면, 케레아는 암살을 실행할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141]

이전의 암살 시도들은 동료의 배신으로 인해 실패하거나 무산되었는데, 이는 고문, 고문에 대한 두려움 또는 약속된 보상 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상원은 이기적이고 부유하며 서로 불신하는 귀족들로 구성된 분열된 기관이었으며, 자신의 전망을 위험에 빠뜨리려 하지 않았고, 도덕적이고 단결된 모습을 보이려 했다.

요세푸스의 칼리굴라 암살에 대한 기록에서 케레아는 “숭고한 이상주의자”로 묘사되며, “공화국의 자유”에 깊이 헌신했다. 그는 또한 칼리굴라의 일상적인 모욕과 조롱에 대한 분노에 의해서도 동기가 부여되었다. 스베토니우스는 칼리굴라가 케레아를 모욕했음을 확인해 주는데, 그가 케레아에게 “프리아푸스(Priapus)”나 “비너스(Venus)”와 같은 음탕한 말을 했으며, 후자는 케레아의 가늘고 높은 목소리 또는 세금 징수 시 그의 온화한 태도, 또는 매춘부에 대한 세금 징수 의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한다.[137] 칼리굴라는 목소리가 가늘고 세금 징수에도 엄격하지 않은 케레아를 여성스러운 남자로 여기고,[142][143] 프리아포스(생산과 생식을 관장하는 그리스 신화의 신으로, 남근을 의미하는 은어이기도 함)나 비너스(미의 여신)와 같은 별명을 붙여 모욕했다.[137][142] 그는 또한 고문을 포함하여 칼리굴라의 “더러운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라자로 발디(Lazzaro Baldi)의 ''칼리굴라 암살''(1624년~1703년 사이 작품)


케레아, 사비누스 및 다른 이들은 궁전 아래에서 젊은 남성 배우단에게 연설하던 칼리굴라에게 접근했다. 당시 ''디부스(Divus)'' 아우구스투스를 위한 일련의 게임과 연극이 열리고 있었다. 자료의 세부 사항은 다르지만, 모두 케레아가 칼리굴라를 처음 찌른 것으로 일치한다.[142][144][145] 이 직후 일어난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케레아가 먼저 칼리굴라를 찌르고 몇몇 공모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142][144][145] 스베토니우스는 칼리굴라의 죽음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에는 유사점이 많다는 것을 지적한다. 둘 다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카시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카시우스 롱기누스와 카시우스 케레아)와 그의 동료들에 의해 30번 찔려 사망했기 때문이다.[144][146]

좁은 공간 때문에 탈출하거나 구조될 여지가 거의 없었고, 칼리굴라의 충성스러운 게르만 근위대(Numerus Batavorum)가 그를 방어하기 위해 올 때쯤에는 이미 황제는 사망한 상태였다. 그들은 무고한 상원 의원들과 구경꾼들을 포함하여 칼리굴라의 일행 중 여러 명을 죽였다. 근위대가 통제권을 장악했을 때에야 살인이 멈췄다.[143][144] 칼리굴라의 경호를 맡고 있던 게르만족 병사들이 도착했을 때, 황제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호위병들은 분노와 슬픔에 잠겨 암살자와 그의 동료들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무고한 원로원 의원들과 구경꾼들까지 해쳤다.[143][144]

요세푸스는 상원이 칼리굴라의 죽음을 공화정을 복원할 기회로 삼으려 했다고 전한다. 이는 황제직의 폐지, 왕조 통치의 종식, 그리고 귀족과 상원 의원들의 이전 사회적 지위와 특권의 회복을 의미했을 것이다.[147] 케레아는 군대가 원로원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려고 노력했다.[148] 그러나 군대는 황실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148] 루키우스 안니우스 비니키아누스(Lucius Annius Vinicianus)를 포함한 적어도 한 명의 상원 의원은 이를 장악할 기회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그가 음모의 주요 배후자라고 믿고 있다.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은 칼리굴라의 살해에 놀랐고, 그의 통치로부터 얻었던 혜택을 잃은 것을 기뻐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거의 모든 공모자는 엘리트 계층 출신이었다. 칼리굴라의 죽음이 확인되자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위선과 아첨으로 부유해졌던 귀족들과 상원 의원들은 음모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동료들과 성공의 공을 나누려 했다. 다른 이들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려 했다.[149] 칼리굴라 암살을 애도한 로마 시민들은 집회를 열고 칼리굴라 암살자를 법에 따라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149]

암살자들은 칼리굴라의 가족과 동맹 세력의 지속적인 지지를 두려워하여 그의 아내 밀로니아 케소니아(Milonia Caesonia)와 어린 딸 율리아 드루실라를 찾아 살해했다.[150] 하지만 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우스는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도시를 떠나 근위대 병영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151] 전통적인 기록에 따르면, 그라투스(Gratus)라는 병사가 궁전 커튼 뒤에 숨어 있는 클라우디우스를 발견했다. 근위대의 동정적인 세력이 그를 인근 캠프로 몰래 데려갔고, 그를 황제로 지명했다. 상원은 이제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에 직면하여 그들의 선택을 확인했다. 칼리굴라의 "가장 강력하고 널리 두려움을 받던 고문"이었던 해방 노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칼리스투스(Gaius Julius Callistus)는 칼리굴라가 살아 있을 때 은밀히 그의 충성심을 칼리굴라에서 클라우디우스로 바꾸었을 수 있다.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의 지지를 얻어 황제에 취임한 후, 케레아와 칼리굴라 암살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진 그의 모든 동료들을 처형하도록 명령했다.[152]

칼리굴라의 살해는 불법 행위였으며, 왕정에 대한 반역과 같았고, 이를 실행한 자들은 그에 대한 충성 서약을 어겼다. 칼리굴라의 후계자로서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전임자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었지만, 그의 살해를 묵인하거나 제정을 기관으로서 잘못된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보일 수는 없었다. 칼리굴라는 로마의 하층 시민 대다수에게 인기가 있었고, 상원은 이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새로운 근위대 대장을 임명하고 케레아, 루푸스(Lupus)라는 장교, 그리고 관련된 백부장들을 처형했다. 그는 사비누스가 자살하도록 허락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상원의 칼리굴라를 공식적으로 적(hostis)으로 선포하거나 그의 기억을 규탄(damnatio memoriae)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또한 모든 카이사르를 공식적으로 규탄하고 그들의 사원을 파괴하자는 제안도 거절했다. 칼리굴라의 이름은 공식적인 서약과 헌정 목록에서 삭제되었고, 일부 비문은 제거되거나 지워졌으며, 그의 대부분의 조각상은 머리가 아우구스투스나 클라우디우스 또는 네로의 모습으로 새겨졌다. 네로는 나중에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칼리굴라의 시신은 그의 자매들에 의해 화장되고 매장될 때까지 흙으로 덮였다.[19][20]

9. 후대의 평가

칼리굴라의 통치는 짧았지만, 그는 웅대한 건설 사업과 영토 확장에 힘썼다. 또한 최고 권력자로서 권위를 높이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로부터 지위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원로원도 관련된 음모에 의해 41년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일부 장교들에게 암살되었다.

칼리굴라는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지만, 현존하는 후대의 사료에서는 모두 그를 광기에 찬 독재자이며, 잔혹하고 낭비벽과 성적 도착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1차 사료의 수는 적고, 칼리굴라의 통치 실태에는 불명확한 점이 많다.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와 그의 자매들 간의 근친상간 혐의가 당대의 소문이었다고 인정한다. 칼리굴라와 동시대를 살았던 세네카와 필론은 칼리굴라 사후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칼리굴라의 막내 여동생에 대한 헌신은 분명했지만, 근친상간 혐의는 비도덕적인 "광기의 황제"라는 고정관념에 부합한다. 디오는 칼리굴라가 그의 두 누이인 아그리피나리빌라와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을 사실로 반복한다.

로마 세스테르티우스에 묘사된 칼리굴라(기원후 38년). 뒷면에는 칼리굴라의 세 자매인 아그리피나, 드루실라, 리빌라가 묘사되어 있다.

9. 1. 역사적 기록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아우구스투스의 손녀 대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네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는 그의 여동생이다.[10]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 사령관을 맡고 있어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로마 제국의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냈다. 이때 군단병들은 칼리굴라를 '꼬마 장화'라는 뜻의 칼리굴라로 부르며 귀여워했고, 칼리굴라는 군단의 마스코트가 되었다.[10]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차례로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티베리우스는 죽기 직전 유서에 칼리굴라를 사촌 동생 티베리우스 게메루스와 함께 후계자로 지명했다.[10]

칼리굴라는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사망 당시 77세)의 젊은 후계자(즉위 당시 24세)로서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즉위했다. 티베리우스는 만년에 공포 정치를 펴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유서를 무시하고 칼리굴라를 단독 황제로 추대했다.[10]

칼리굴라는 즉위 직후 티베리우스의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단하고 로마 시민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즉위 7개월 만에 고열로 쓰러져 병을 앓은 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며 비정상적인 통치를 시작했다.[10] 그는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하게 바꾸고, 화려한 만찬과 도박을 일삼고, 마차를 끄는 인부에게 거액을 주는 등 국고를 탕진하여 재정을 파탄 냈다.[10] 또한 자신과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하는 등 비정상적인 통치를 했다. 특히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맺고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신과 같은 복장을 하는 등 기행을 일삼아 여러 번 영화화되기도 했다.[10]

41년 1월, 팔라티누스 경기 도중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Cassius Chaerea) 등이 칼리굴라를 아내, 딸과 함께 살해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3년 10개월이었다.[10] 칼리굴라 암살 후, 원로원제정 대신 로마 공화정 복원을 시도했으나,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무산되었다.[10]

칼리굴라 통치에 대한 역사는 사료 부족과 편향성 때문에 문제가 많다. 현존하는 칼리굴라 시대 기록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론과 세네카의 저작뿐이다. 필론의 저서는 주로 유대 속주와 이집트 유대인 관련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세네카의 저서는 단편적인 일화로 칼리굴라의 성격을 전한다. 세네카는 칼리굴라 암살 음모와 관련되어 처형될 뻔했다.[153]

과거 칼리굴라에 대한 상세한 역사 문헌이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이 문헌들은 칼리굴라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판적이거나 옹호적이어서 중립적이지 않다.[154] 소실된 1차 자료는 후세 역사가들의 2차, 3차 사료 출처로 사용되었다.

칼리굴라를 비판한 파비우스 루스티쿠스와 쿨루이우스 루푸스의 역사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파비우스 루스티쿠스는 역사를 윤색하고 오류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고,[155] 쿨루이우스 루푸스는 칼리굴라 암살에 가담한 원로원 의원이었다.[156] 칼리굴라의 여동생 소 아그리피나의 전기도 소실되었으며, 그녀는 칼리굴라에 의해 추방되었다.[108] 칼리굴라를 칭찬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에투리쿠스의 저서도 소실되었다.

칼리굴라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수에토니우스와 카시우스 디오의 저서를 통해 전해진다. 수에토니우스는 칼리굴라 암살 80년 후, 카시우스 디오는 180년 후에 역사를 썼다. 카시우스 디오의 저서는 칼리굴라 통치를 연대순으로 기술한 유일한 사료이지만, 11세기 수도사 요하네스 쿳시필리누스의 개요 형태로만 현존한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칼리굴라 암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남겼고, 타키투스티베리우스 감시 하의 칼리굴라의 생활을 기록했다. 타키투스는 객관적인 역사가로 평가되지만, 그의 『연대기』 중 칼리굴라 관련 부분은 소실되었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도 칼리굴라에 대한 언급이 있다.

칼리굴라에 대한 현존 사료는 매우 적고, 호의적인 묘사는 없다. 이 때문에 칼리굴라 통치에 대한 많은 부분이 불분명하며, 특히 초기 2년과 마우레타니아 병합, 브리타니아 원정, 원로원과의 불화 등 중요한 사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제한적이다.

39년 후반, 칼리굴라는 갈리아(Gaul)의 루그두눔(Lugdunum)(현재의 리옹)에서 겨울을 보내며 누이들의 재산을 경매에 부쳤다. 디오(Dio)는 부유한 입찰자들이 물건 가치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제시하려 했으며, 이는 충성심을 보이거나 처형될 만큼 부유한 자신을 덜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10] 칼리굴라는 가격을 올리기 위해 협박과 다양한 경매사의 속임수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10] 수에토니우스는 한 근위대 장교가 잠에서 깨어보니 검투사 13명을 900만 세스테르티우스라는 엄청나게 부풀려진 가격에 사게 된 사건을 묘사했다.[10] 칼리굴라는 첫 번째 루그두눔 경매의 성공에 힘입어 로마 궁전 가구 중 많은 것을 루그두눔으로 옮겨 경매에 부쳤는데, 여기에는 귀중한 가족 유물도 포함되었다. 칼리굴라는 경매 중 물건의 기원을 설명하며, 고유한 가치가 있는 물건에 대해 공정한 대가를 받고, 부유한 자들이 황제 관련 물건을 원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가치를 보장하려 했다.[10]

두 번째 경매 수입은 비교적 적었다. 클라이위흐트(Kleijwegt, 1996)는 두 번째 경매에서 칼리굴라가 판매자이자 경매사로서 폭군 이미지와 달리 악의, 탐욕, 협박 없이 자비로운 원수(princeps)처럼 행동한 것 같다고 주장한다.[10] 황실 재산 경매는 회계를 맞추는 허용 가능한 방법이었으며, 아우구스투스트라야누스도 시행했다. 이는 판매자와 입찰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로마의 경매사들은 천하게 여겨졌지만, 칼리굴라는 두 번째 경매에서 자비롭게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10]

9. 2. 추문

칼리굴라의 성생활에 대한 자료는 다소 모순된다. 세네카는 공개 연회에서 칼리굴라가 그의 "특별한 친구"인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 상원의원을 발레리우스의 아내의 실망스러운 잠자리 생활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모욕했다고 주장한다.[21] 칼리굴라는 엄청난 성욕, 여러 정부와 남성 애인들을 가졌다고 전해지지만, 티베리우스가 코르푸에서 행했다고 주장되는 "변태 행위"와 관련하여, 그리고 일부 자료에서 칼리굴라가 공유했다고 하는 것과 관련하여, 배럿은 그가 즉위 시 이른바 ''spintriae''를 섬에서 추방한 것으로 보아 매우 엄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칼리굴라의 첫 번째 아내는 전 집정관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딸인 유니아 클라우디아였다. 로마 상류층의 대부분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칼리굴라의 네 번의 결혼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치적 동맹이었으며, 합법적인 상속인을 낳고 칼리굴라의 왕조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유니아와 그녀의 아기는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출산 중에 사망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크로는 자신의 아내인 엔니아 트라실라를 설득하여 칼리굴라와 성관계를 맺게 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그가 슬픔을 극복하도록 돕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수에토니우스와 디오는 칼리굴라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의 결혼식에서 리비아 오레스틸라를 만나 그녀를 납치하여 대신 그녀와 결혼하고 합법적인 상속인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전 남편에게 충실하자 칼리굴라는 그녀를 추방했다. 아르발 형제단의 기록은 그녀의 피소와의 결혼을 확인하지만, 일반적인 로마 관습에 따라 이루어졌다. 수잔 우드는 칼리굴라와의 "결혼"을 술 취한 파티의 술책으로 일축한다. 칼리굴라가 "아름답고... 매우 부유한" 그리고 사치스러운 롤리아 파울리나와의 결혼은 그녀의 불임을 이유로 이혼으로 이어졌다. 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은 카이소니아와의 결혼이었는데, 이것은 그가 "아내를 매우 사랑하고 일부일처제"를 고수했던 사랑의 결혼이었고, 그는 늦은 여동생을 기념하여 딸의 이름을 율리아 드루실라라고 지었다. 칼리굴라의 동시대 사람들은 카이소니아에 대한 그의 매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전 결혼에서 다산을 증명했지만, 귀족 로마 여성의 모범과는 거리가 먼 "사치스럽고 타락한"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 수에토니우스, 풍자 작가 유베날리스가 전하는 칼리굴라의 성적 역동성에 관한 이야기는 카이소니아가 사랑의 묘약으로 그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광기"를 불러일으켰다는 소문과 일치하지 않는다.[21] 배럿은 이 소문이 칼리굴라가 "그가 왜 그녀를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카이소니아를 고문하고 싶었다"는 말장난 이외에는 근거가 없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칼리굴라와 그의 자매들 사이의 근친상간 혐의, 또는 그와 그의 가장 총애하는 드루실라 사이의 근친상간 혐의는 수에토니우스보다 더 오래되지 않았으며, 그는 자신의 시대에 그것들이 소문이었다고 인정한다. 칼리굴라의 동시대인이자 도덕적인 세네카와 필론은 칼리굴라 사후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안전했을 때조차도 이러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는다. 칼리굴라의 그의 막내 여동생에 대한 헌신은 분명했지만, 그 당시나 현재나 근친상간 혐의는 비도덕적인 "광기의 황제"의 고정관념에 맞는다. 돈, 성, 그리고 그의 신하들의 목숨을 함부로 낭비하는 사람. 디오는 칼리굴라가 그의 두 명의 누나인 아그리피나와 리빌라와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을 사실로 반복한다.

현존하는 후대의 사료에서는 모두 칼리굴라는 광기에 찬 독재자이며, 잔혹하고 낭비벽과 성적 도착의 소유자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9. 3. 정신 질환 논란

칼리굴라의 생애 어느 시점에서도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거는 없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정신 이상이었다면, 그의 악행은 그의 잘못으로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빈터링은 로마법에서 정신 이상자는 행동의 심각성에 관계없이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통제와 억제에 대한 책임은 주변 사람들에게 있었다.[23] 모든 1차 및 당대 자료들은 서술 과정에서 계급, 종교 또는 황제로서의 그의 역할에 대한 위반을 이유로 칼리굴라를 불신하고 궁극적으로 비난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하며, '광기의 칼리굴라'를 찾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24] 배럿은 칼리굴라가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남은 가족을 잃으면서 자신의 생존에 매달렸다고 제안한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거의 무한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의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그 권력을 사용했으며, "실질적으로 어떠한 도덕적 책임감도 없이, 원수직의 임기가 권력을 행사할 기회에 불과했던 인물"이었다. 칼리굴라는 "분명히 매우 발달된 넌센스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종종 잔혹하고, 사디스틱하며, 악의적인 유머의 형태로 이어졌으며, 본질적으로 반격할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교묘하게 점수를 따면서 영향을 미쳤다."[25]

필론은 37년 칼리굴라의 병을 신경 쇠약의 형태, 즉 칼리굴라가 기질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던 극심한 스트레스와 압력에 대한 제국 통치의 반응으로 보았다.[26] 요세푸스, 세네카는 칼리굴라의 명백한 "정신 이상"을 자기 방종과 무제한적인 권력 행사를 통해 강조된 근본적인 성격 특성으로 본다.[27] 세네카는 칼리굴라가 황제로 승진한 것이 그를 더욱 거만하고, 화가 나고, 모욕적으로 만든 것 같다고 인정한다.[28] 여러 현대 자료들은 그의 행동과 외모의 일부 측면에 대한 설명으로 근본적인 질병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조증, 양극성 장애, 정신분열병, 뇌염, 수막염, 그리고 소위 "간질 발작"이라고 하는 간질이 포함된다.[29] 베네딕트손은 수에토니우스가 칼리굴라가 수영을 할 수 없었다는 진술을 간질성 측두엽 간질의 진단으로 정제하고, 그 결과 발작에 대한 두려움으로 수영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22] 로마-그리스 의학 이론에서 심각한 간질 발작은 보름달과 달의 여신 셀레네와 관련이 있었는데, 칼리굴라는 이 여신과 대화하고 성관계를 맺었다고 주장되었다.[30] 수에토니우스가 칼리굴라를 육체적으로 불쾌하게 묘사한 것은 인구에 의해 젊은 원수로서 열광적이고 열정적인 환영을 받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뢰할 수 없고 그럴듯하지 않다. 고대 세계에서는 사람의 체격이 그들의 성격과 행동을 나타내는 신뢰할 수 있는 지표라고 믿었다.[31]

10. 칼리굴라를 소재로 한 작품

칼리굴라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수에토니우스와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이 중요하지만, 이들 역시 칼리굴라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쓰여졌고,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24] 필로세네카의 저술은 칼리굴라 초기 통치에 대한 일부 정보를 제공하지만, 특정 사건이나 칼리굴라의 성격에 대한 일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타키투스의 기록은 칼리굴라에 대해 편향된 묘사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존하는 부분은 매우 적다. 파비우스 루스티쿠스와 클루비우스 루푸스의 역사서는 소실되었고, 칼리굴라의 누이 소 아그리피나의 자서전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요세푸스의 기록은 칼리굴라 암살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헤로데 아그리파에 대한 미화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에는 칼리굴라에 대한 간략한 언급만이 있을 뿐이다.

칼리굴라는 다양한 예술 작품에서 다뤄졌다.

10. 1. 영화


  • 칼리굴라
  • 1937년 웨일스 배우 엠린 윌리엄스(Emlyn Williams)는 제작이 완료되지 않은 영화 ''클라우디우스''에서 칼리굴라 역을 맡았다.[25]
  • 1968년 ITV 역사 드라마 시리즈 ''카이사르들''에서 랄프 베이츠(Ralph Bates)가 칼리굴라를 연기했다.[26]
  • 미국 배우 제이 로빈슨(Jay Robinson)은 1950년대 ''로브''(1953)와 그 속편 ''데메트리우스와 검투사들''(1954)에서 칼리굴라를 연기하여 유명해졌다.[27]
  • 1976년 BBC 미니시리즈 ''클라우디우스''에서는 존 허트(John Hurt)가 칼리굴라를 연기했다.[28]
  • 1979년에는 맬컴 맥도웰(Malcolm McDowell)이 주연을 맡은 영화 ''칼리굴라''가 완성되었다.
  • 칼리굴라의 통치는 미니시리즈 ''A.D.: Anno Domini''의 2, 3화에 걸쳐 묘사되는데, 사도행전을 각색한 것이다. 칼리굴라는 존 맥에너리(John McEnery)가 연기했다.
  • 1982년 영화 ''칼리굴라…숨겨진 이야기''에서 데이비드 브랜던(David Brandon)이 칼리굴라를 연기했다.[29]
  • ''젠나: 전사 공주''의 두 에피소드에서 알렉시스 아케트(Alexis Arquette)가 칼리굴라를 연기했다.[30]
  • 칼리굴라는 2015년 NBC 시리즈 ''A.D. 성경은 계속된다''의 등장인물이며, 앤드루 고워(Andrew Gower)가 연기했다. 그의 연기는 칼리굴라의 "방탕하고 위험한" 인물[31]뿐만 아니라 성적 욕구, 급한 성격, 폭력적인 성향을 강조한다.
  • ''로마 제국'' 시리즈의 세 번째 시즌 (2019년 넷플릭스에서 공개)은 ''칼리굴라: 광기의 황제''라는 제목이며, 이도 드렌트(Ido Drent)가 주연을 맡았다.[32]
  • BBC 프로그램 ''끔찍한 역사''에서는 사이먼 파나비(Simon Farnaby)가 칼리굴라를 연기했다.

10. 2. 드라마


  • 웨일스 배우 엠린 윌리엄스(Emlyn Williams)는 1937년 제작이 완료되지 않은 영화 ''클라우디우스''에서 칼리굴라 역을 맡았다.[25]
  • 1968년 ITV 역사 드라마 시리즈 ''카이사르들''에서 랄프 베이츠(Ralph Bates)가 칼리굴라를 연기했다.[26]
  • 미국 배우 제이 로빈슨(Jay Robinson)은 1950년대 영화 ''로브''(1953)와 그 속편 ''데메트리우스와 검투사들''(1954)에서 음험하고 눈길을 사로잡는 칼리굴라를 연기하여 유명해졌다.[27]
  • 1976년 BBC 미니시리즈 ''클라우디우스''에서 존 허트(John Hurt)가 칼리굴라를 연기했다.[28]
  • 1979년에는 맬컴 맥도웰(Malcolm McDowell)이 주연을 맡은 장편 역사 영화 ''칼리굴라''가 완성되었다.
  • 칼리굴라의 통치는 미니시리즈 ''A.D.: Anno Domini''의 2, 3화에 걸쳐 묘사되는데, 이 시리즈는 티베리우스부터 네로까지의 카이사르들의 역사와 함께 사도행전을 각색한 것이다. 칼리굴라는 존 맥에너리(John McEnery)가 연기했다. 칼리굴라의 다른 줄거리와의 많은 연관성은 허구의 남매인 칼렙과 사라를 통해 이루어진다. 코넬리우스 백부장이 황제의 동상을 성전에 설치하는 감독을 맡은 사람으로 묘사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 1982년 역사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 ''칼리굴라…숨겨진 이야기''에서 데이비드 브랜던(David Brandon)이 칼리굴라를 연기했다.[29]
  • ''젠나: 전사 공주''의 두 에피소드에서 알렉시스 아케트(Alexis Arquette)가 칼리굴라를 연기했다.[30]
  • 칼리굴라는 2015년 NBC 시리즈 ''A.D. 성경은 계속된다''의 등장인물이며, 영국 배우 앤드루 고워(Andrew Gower)가 연기했다. 그의 연기는 칼리굴라의 "방탕하고 위험한" 인물[31]뿐만 아니라 그의 성적 욕구, 급한 성격, 폭력적인 성향을 강조한다.
  • ''로마 제국'' 시리즈의 세 번째 시즌 (2019년 넷플릭스에서 공개)은 ''칼리굴라: 광기의 황제''라는 제목이며, 남아프리카 공화국 배우 이도 드렌트(Ido Drent)가 주연을 맡았다.[32]
  • 수상 경력에 빛나는 BBC 프로그램 ''끔찍한 역사''에서는 사이먼 파나비(Simon Farnaby)가 칼리굴라를 연기했다.

10. 3. 희곡


  • 폴란드 작가 카롤 후베르트 로스트보로프스키의 희곡 ''카이우스 카이사르 칼리굴라''는 1917년 3월 31일 크라쿠프의 율리우스 스워바츠키 시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주인공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권력에 이르게 한 상황의 희생자가 된 약하고 불행한 남자로 묘사된다.
  •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희곡 ''칼리굴라''에서 칼리굴라는 사랑하는 여동생 드루실라의 죽음 이후 궁궐을 떠나 삼일 밤낮을 보낸 후 돌아온다. 젊은 황제는 그 후 무제한적인 권력을 이용하여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영역으로 가져온다".[33]

10. 4. 오페라


  • 하인리히 이그나츠 프란츠 비버의 오페라 《아르미니우스》에 젊은 칼리굴라가 등장인물 중 하나로 나온다.
  • 알베르 카뮈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데틀레프 글라네르트의 오페라 《칼리굴라》의 주인공이 칼리굴라이다.
  • 바로크 시대의 여러 작곡가들이 칼리굴라를 소재로 한 오페라 작품을 작곡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사라졌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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