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노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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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세노파네스는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 출신의 철학자, 시인으로, 전통적인 그리스 신화와 다신교를 비판하고 유일신론적인 신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25세에 고향을 떠나 유랑하며 시를 낭송했고, 콜로폰과 엘레아의 건국을 주제로 한 시를 썼다. 그는 신들의 의인화와 육상경기 숭배를 비판하고, 자연 현상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했으며,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보였다. 크세노파네스는 엘레아 학파와 관련하여 논의되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 영향력을 넘어 독창적인 철학자로 평가한다. 그의 사상은 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서양 종교 철학에서 최초의 일신론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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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노파네스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기원전 570년경 |
출생지 | 콜로폰, 이오니아 연맹(오늘날의 튀르키예, 이즈미르 주, 데이르멘데레) |
사망 | 기원전 478년경 (92세) |
사망지 | 시라쿠사, 시칠리아(오늘날의 이탈리아) |
학문 | |
지역 | 서양 철학 |
시대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 |
주요 관심사 | 사회 비판 카타파시스 자연 철학 인식론 |
주요 사상 | 종교적 다신교적 관점을 인간의 투사로 간주 흙과 물이 아르케 지식과 단순한 참된 믿음 사이의 구분 |
2. 생애
고대 그리스의 전기 작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크세노파네스가 현재 터키에 위치했던 이오니아의 도시 콜로폰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크세노파네스가 제60회 올림피아드 (기원전 540-537년)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다고 기록했으며, 현대 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그의 출생 시기를 대략 기원전 570년에서 560년 사이로 추정한다. 그의 현존하는 시 단편들에는 동시대 혹은 선대의 사상가인 탈레스, 에피메니데스, 피타고라스에 대한 언급이 남아 있으며, 후대의 헤라클레이토스와 에피카르무스의 저술에도 크세노파네스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크세노파네스는 시인으로서 서사시, 엘레게이아, 이암보스 등 다양한 형식의 시를 지어 대중에게 낭송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그는 이오니아의 콜로폰과 엘레아의 건국을 주제로 약 2000행에 달하는 긴 시를 썼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그의 시 일부만이 단편 형태로 전해진다.
크세노파네스의 철학은 후대의 엘레아 학파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 비판, 신학, 자연 철학, 인식론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의 사상은 주로 시의 형태로 전해지는데, 특별히 '자연에 관하여'(Περὶ φύσεωςgrc)와 같은 철학 시를 저술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존 버넷과 같은 학자들은 해당 제목이 후대에 붙여진 것이며, 크세노파네스의 철학적 견해가 그의 풍자시 등에서 우연히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실제로 현존하는 그의 시 단편들은 구름이나 무지개와 같은 자연 현상을 다루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크세노파네스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25세(기원전 545년경 추정)에 고향 콜로폰을 떠나 67년 동안 시켈리아의 잔클레, 엘레아, 카타네 등 여러 그리스 도시들을 떠돌아다니며 유랑 시인으로 살았다. 그는 엘레아의 식민 도시 건설에도 참여했으며, 92세가 넘는 나이까지 장수했다고 전해진다. 노년에는 자신의 아들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직접 장례를 치르는 개인적인 슬픔을 겪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일부에서는 그가 아테네의 철학자 아르켈라오스의 제자였다고도 하지만, 크세노파네스 개인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다른 신뢰할 만한 전기적 정보는 거의 없다.
그는 체계적인 철학 저술보다는 시 창작에 더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사시, 엘레게이아(비가풍의 시), 이암보스(풍자시) 등 다양한 형식의 시를 지어 대중 앞에서 낭송했다. 특히 콜로폰의 건설과 엘레아로의 식민 과정을 주제로 한 2000행에 달하는 장편 서사시를 썼으며, 최소 5권 분량의 풍자 시집도 남겼다고 한다. 후대의 많은 자료들이 "자연에 관하여(On Nature)"라는 제목의 철학 시를 크세노파네스의 저작으로 언급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이 제목이 후대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 철학자'(φυσικοί|푸시코이grc)로 분류한 인물들의 저작에 붙인 일반적인 명칭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크세노파네스가 실제로 이 제목의 저작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크세노파네스는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묘사된 신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인간적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신들이 도둑질하고, 간음하며, 서로를 속이는 등 비도덕적인 행위를 일삼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러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후대의 풍자 시인 티몬에게 "거만함이 없는 크세노파네스, 호메로스를 곡해하여 질책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며, 플라톤이 국가론 등에서 호메로스를 비판하는 입장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한편 그의 자연 철학 사상은 밀레토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예를 들어, 그가 무지개를 단순한 구름 현상으로 설명한 것은, 무지개를 구름에 반사된 빛으로 본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에 대한 발전된 견해 혹은 반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3]
3. 작품 활동
그의 시는 주로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 같은 기존 시인들이 묘사한 전통적인 그리스 신화와 다신교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에 대한 믿음(의인화)과 당시 그리스 사회의 육상경기 선수 숭배 문화를 비판했다. 그는 심포지엄에서의 적절한 행동에 대한 시를 쓰기도 했다.
그의 풍자시는 '실로이'(σίλλοι|실로이grc)라고 불렸는데, 이 명칭은 크세노파네스 자신에게서 유래했거나, 후대의 피론주의 철학자 플리우스의 티몬이 자신의 풍자 시에서 크세노파네스를 화자로 자주 등장시켰기 때문에 붙여졌을 수 있다. 티몬은 자신의 저서에서 크세노파네스를 높이 평가했다.
후대 학자들은 크세노파네스가 '자연에 관하여'(Περὶ φύσεως|페리 퓌세오스grc)라는 제목의 철학 시를 썼다고 언급하기도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연 철학자들(φυσικοί|퓌시코이grc)이라고 부른 이들의 저작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학자들이 붙인 일반적인 명칭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크세노파네스가 특별히 철학 시를 쓰지 않았더라도, 그의 현존하는 단편들 중에는 구름이나 무지개 같은 자연 현상을 다루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3], 그의 철학적 사유가 풍자시 등 다른 작품 속에서 드러났을 것으로 보인다.
4. 철학 사상
그의 자연 철학적 설명은 밀레토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예를 들어, 무지개를 구름의 일종으로 본 그의 이론은, 무지개를 구름에 반사된 빛으로 설명한 아낙시메네스의 견해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되기도 한다.[3]
4. 1. 사회 비판
크세노파네스는 ''실로이''라고 불리는 풍자시 등을 통해 당시 고대 그리스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비판했다. 그는 특히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시에 나타난 신들의 의인화된 모습과 그들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그리스인들이 육상경기 선수들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문화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사회 비평가로서 크세노파네스는 심포지엄(향연)과 같은 모임에서 지켜야 할 적절한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며 절제를 강조했고, 운동선수를 문화적으로 영웅시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그는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가 전한 신화를 넘어서 신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시하고자 했으며, 이는 고대 그리스 종교의 경건함에 대한 개념을 개혁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당시의 전통적인 종교적 견해를 인간의 심리적 투사로 풍자하기도 했다.
4. 2. 신학 (유일신론)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묘사한 고대 그리스 종교의 신화적 신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신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개혁하고자 했다.[3] 그는 의인화된 신들의 범신전에 대한 믿음과 당시의 전통적인 종교적 견해를 인간의 심리적 투사로 보며 비판하고 풍자했다.
크세노파네스는 "신들과 인간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하나의 신"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이 신은 "육체나 정신 면에서 인간과 같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최고신이 하나이며, 영원하고, 구형이고, 모든 것을 스스로 포괄하며, 절대적인 정신과 생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 신은 지적이며, 모든 것을 움직이지만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고 부동하며, 육체나 정신 면에서 인간과 닮지 않았다. 또한, 그의 생각만으로 "모든 것을 흔든다"고 하여 신의 전능함을 나타냈다. 크세노파네스는 신의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핵심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 신은 인간의 도덕성을 초월한다.
# 신은 인간의 형태와 닮지 않았다.
# 신은 태어나거나 죽지 않는다 (영원하다).
# 신들 사이에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 신은 인간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상 때문에 크세노파네스는 종종 서양 종교 철학에서 최초의 일신론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7] 하지만 그가 "가장 위대한 신" 외에 다른 "신들"을 언급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완전한 일신론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후대의 독소그래피 작가들인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플루타르코스 등은 크세노파네스의 사상을 단일신교나 범신론으로 요약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그의 견해를 "모든 것은 신이다"라고 정리했다. 근대에 들어 피에르 베일은 크세노파네스의 견해가 바뤼흐 스피노자와 유사하다고 보았고,[7]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막스 베른하르트 바인슈타인은 그를 초기 범신론자 중 한 명으로 특정했다.
크세노파네스의 비인격적인 신에 대한 견해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인 엠페도클레스에게 영향을 미쳐, 엠페도클레스 역시 신을 비물질적인 정신으로 보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다.[8]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크세노파네스가 신의 본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4. 3. 자연 철학
크세노파네스는 밀레토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자연 현상에 대한 신화적 설명을 거부하고 합리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설명을 추구했다.[3] 예를 들어, 그는 무지개가 단순히 구름의 한 종류라고 보았는데, 이는 구름에 반사된 빛이라는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3] 또한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신성한 본성에 대한 그의 이해는 물리적 현상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세인트 엘모의 불(배의 돛대에 나타나는 방전 현상)에 대해 최초로 자연주의적 설명을 시도한 철학자로 여겨진다. 당시에는 정전기 현상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크세노파네스는 이 빛이 작은 구름 입자들이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려 했다. 이는 고대 세계에서는 독특한 시도였다.
크세노파네스의 우주론에서 우주는 "우리 발 아래로 보이는" 경계만 가진다. 그는 지구가 아래쪽뿐만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 무한히 펼쳐져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해와 달은 일몰 때 지구 아래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쪽으로 직선으로 이동하며 사라지고 다음 날 아침 동쪽에서 새로운 해와 달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즉, 해와 달을 매일 순환하는 특정 개체가 아니라 하늘에 나타나는 일종의 '현상'이나 '유형'으로 이해한 것이다.
크세노파네스는 만물의 근원(아르케)을 γῆ|게grc(흙)과 ὕδωρ|휘도르grc(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육지에서 발견되는 바다 생물 화석을 증거로 들어, 과거에 지구 전체가 물에 덮였던 시기가 있었으며, 이후 물이 물러나고 흙(땅)이 드러나는 과정이 반복된다고 생각했다. 즉, 우주는 습한 상태(물)와 건조한 상태(흙) 사이를 주기적으로 오가며, 이 과정에서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들이 소멸했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한다고 보았다. 이는 공기를 만물의 근원으로 본 밀레토스의 아낙시메네스의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크세노파네스가 4원소설을 주장했다고도 전하지만, 다른 많은 자료에서는 그가 만물의 근원을 흙과 물로 보았다고 일관되게 언급한다.
화석과 같은 구체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자연 현상과 지구의 변화를 설명하려 한 크세노파네스의 시도는, 단순히 사변적인 주장을 넘어 관찰과 증거를 중시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초기 형태로 평가받는다. 이는 그가 인과관계의 원리를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보여주며, 고대 철학이 좀 더 과학적이고 관찰에 기반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기여한 중요한 단계로 여겨진다.
4. 4. 인식론
크세노파네스는 인식론적 질문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질문에도 관심을 보인 최초의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객관적인 진리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지만, 인간은 단순한 필멸자이기에 이를 알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정당화된 참된 믿음과 지식을 구별했으며, 어떤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알지 못할 가능성을 인정한 최초의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의 회의주의에 관한 구절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의해 다음과 같이 인용된다.
그러나 신들에 관하여, 그리고 내가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바에 관해서는:
어떤 사람도 명확한 것을 보지 못했고, 어떤 사람도 결코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아니다, 심지어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확언할지라도,
그 자신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의견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크세노파네스의 전체 저작이 부족하여 그의 견해를 해석하기는 어렵다. '지식'의 의미가 더 심오한 것("더 명확한 진리")일 수도 있고, 단순히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어떤 것을 알 수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는 가장 다양하고 광범위한 증거가 이론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세노파네스는 때때로 서양 철학에서 최초의 회의론자로 여겨진다.[5] 그의 회의주의는 또한 피론주의의 전조로 볼 수 있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피론의 추종자 티몬이 크세노파네스를 칭찬하고 그의 풍자를 그에게 헌정했으며, 그를 완벽한 회의론자(피론처럼)는 아니지만 용서할 만하게 근접한 사람의 예로 들었다고 인용한다.[6]
유세비우스는 메세네의 아리스토클레스를 인용하여 크세노파네스가 피론주의로 절정에 달하는 철학의 계열의 창시자라고 말한다. 이 계열은 크세노파네스에서 시작하여 파르메니데스, 사모스의 멜리수스, 엘레아의 제논,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프로타고라스, 키오스의 네소스, 키오스의 메트로도로스, 스미르나의 디오게네스, 아낙사르쿠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론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5. 엘레아 학파와의 관계
많은 후대의 고대 기록들은 크세노파네스를 이탈리아 도시 엘레아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와 연관 짓는다. 이 기록들은 그가 엘레아의 건국에 관한 시를 썼거나, 엘레아 학파 철학의 창시자이거나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의 스승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기록들은 그를 피타고라스 학파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연관성에 역사적 또는 철학적 근거가 거의 없다고 본다.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피타고라스를 소위 "이탈리아 학파"의 계승 관계로 묶는 것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크세노파네스가 92세까지 방랑 생활을 했다는 기록은 그가 엘레아에 정착하여 학파를 세웠다는 주장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특히 그가 히에론의 궁정에서 여생을 보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고대 작가 중 크세노파네스가 엘레아에 있었다고 명확히 언급한 사람이 없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며, 현존하는 증거들은 오히려 그가 엘레아에 정착했다는 설과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대에는 크세노파네스를 파르메니데스의 동료인 엘레아의 제논의 스승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오늘날의 일반적인 견해는 이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6. 영향
크세노파네스는 전통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받아 그를 선구자이자 창시자로 여긴 엘레아 학파와 회의주의자들의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지만, 현대 학자들은 그가 후대 철학 학파에 미친 영향력을 넘어선 독창적이고 뚜렷한 철학자라고 여긴다. 그의 영향력에 대해 "인식론의 창시자, 철학자가 아닌 시인이자 랩소디, 최초의 회의론자, 최초의 경험론자, 합리주의 신학자, 종교 개혁가" 등 다양하게 평가받는다.[4] 칼 포퍼는 크세노파네스를 비판적 합리주의의 초기 선구자로 보았으며, 작용 가능한 것은 작동하는 가설에 근거한 행위뿐이며, 우리가 진실을 안다고 행동할 수 있지만 그것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세노파네스는 때때로 서양 철학에서 최초의 회의론자로 여겨진다.[5] 그의 회의론은 피론주의의 전조로 볼 수 있다. 섹스투스는 피론의 추종자 티몬이 크세노파네스를 칭찬하고 그의 풍자를 그에게 헌정했으며, 그를 완벽한 회의론자(피론처럼)는 아니지만 용서할 만하게 근접한 사람의 예로 들었다고 인용한다.[6] 유세비우스는 메세네의 아리스토클레스를 인용하여 크세노파네스가 피론주의로 절정에 달하는 철학의 계열의 창시자라고 말한다. 이 계열은 다음과 같다.
철학자 | 설명 |
---|---|
크세노파네스 | 계보의 시작 |
파르메니데스 | |
사모스의 멜리수스 | |
엘레아의 제논 | |
레우키포스 | |
데모크리토스 | |
프로타고라스 | |
키오스의 네소스 | |
키오스의 메트로도로스 | |
스미르나의 디오게네스 | |
아낙사르쿠스 | |
피론 | 계보의 절정 (피론주의) |
크세노파네스는 "신들과 인간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하나의 신"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종종 서양 종교 철학에서 최초의 일신론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동일한 인용문은 최고 신보다 더 위대한 여러 "신들"을 언급한다. 그의 사상은 고대 독소그래피인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플루타르코스에 의해 단일신교와 범신론으로 요약되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는 그의 견해를 "모든 것은 신이다"로 요약했다. 또한 의사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문인 ''멜리수스, 크세노파네스, 고르기아스에 관하여''에도 그의 가르침에 대한 중요한 증언이 담겨 있다. 피에르 베일은 크세노파네스의 견해가 바뤼흐 스피노자와 유사하다고 보았다.[7]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막스 베른하르트 바인슈타인은 크세노파네스를 초기 범신론자 중 한 명으로 특정했다.
크세노파네스의 비인격적인 신에 대한 견해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엠페도클레스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며, 엠페도클레스는 신을 비물질적인 정신으로 보았다.[8] 하지만 엠페도클레스는 평평한 지구에 대한 크세노파네스의 견해와 무한한 거북이에 대한 견해를 어리석은 것으로 불렀다.[9][10]
참조
[1]
웹사이트
Xenophanes
http://www.collinsdi[...]
[2]
Sound file
http://cougar.eb.com[...]
[3]
서적
Fragment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01-01
[4]
문서
Is God In the Clouds?: A Note on Xenophanes
[5]
간행물
Xenophanes' Scepticism
1978
[6]
서적
From Epicurus to Epictetus
[7]
문서
Critical Dictionary
[8]
문서
Empedocles
1961
[9]
문서
DK 21B28
[10]
문서
DK31B39
[11]
서적
서양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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