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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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탁발선비는 단석괴가 세운 통일 선비가 붕괴된 후 분열된 선비족 분파 중 하나로, 3세기 후반 탁발역미가 내몽골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서진과의 관계 속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대(代)를 건국하고, 386년에는 탁발규가 대나라를 부활시켜 국호를 위(북위)로 변경, 북위 태무제 시대에 화북을 통일하여 남북조 시대를 열었다. 탁발선비의 기원은 튀르크, 몽골, 한인 기원설 등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며, 탁발부를 구성하는 씨족과 가한 호칭 사용에 대한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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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발선비 - 탁발씨
탁발씨는 선비족 일족으로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으며, 대와 북위를 건국하여 중국 북방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민족적 기원과 사용 언어는 논쟁 중이고 한족과의 문화적 융합이 정체성 혼란을 야기했다는 분석이 있으며, 북위 멸망 후에도 수·당 건국 기여설과 서하 지배층 연관설, 중앙아시아 지역 명칭 흔적 등으로 남아있다. - 탁발선비 - 묵기씨
묵기씨는 백제 왕실과 혼인 관계를 통해 권세를 누린 귀족 씨족의 이름으로, 역사적 인물인 묵기마나와 묵기사문 외에 만기추노, 만기영, 만기설, 만기덕, 만사기 언 등 다양한 인물과 관련되어 있다. - 오호 십육국 시대 - 모용부
모용부는 3세기부터 5세기 초 화북 지역에서 활동한 선비족의 한 부족으로, 요서 지역에서 유목과 농경을 병행하며 세력을 키워 여러 국가를 건국하고 토욕혼을 건국하기도 했으나, 5세기 초 북위의 화북 통일 과정에서 쇠퇴하였다. - 오호 십육국 시대 - 정령 (민족)
정령은 기원전 3세기부터 5세기경 바이칼호 서쪽에서 남시베리아에 걸쳐 거주한 유목 민족으로, 흉노와 돌궐의 지배를 받으며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 이동했고, 일부는 중국 북부에 정착하여 적위를 건국했으며, 이후 고차 또는 철륵으로도 불리며 튀르크족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 선비 - 발흐
발흐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고대 도시로, 인도-이란 민족이 건설한 최초의 도시 중 하나이며, 조로아스터교 중심지이자 실크로드 요충지로서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받은 역사적인 도시이다. - 선비 - 모용부
모용부는 3세기부터 5세기 초 화북 지역에서 활동한 선비족의 한 부족으로, 요서 지역에서 유목과 농경을 병행하며 세력을 키워 여러 국가를 건국하고 토욕혼을 건국하기도 했으나, 5세기 초 북위의 화북 통일 과정에서 쇠퇴하였다.
| 탁발선비 | |
|---|---|
| 개요 | |
| 민족명 | 탁발부 |
| 원어명 | 拓跋部 (Tuòbá bù) |
| 언어 | 선비어 |
| 주요 활동 시기 | 후한 ~ 북위 |
| 활동 지역 | 삭방군 북쪽, 대 지역 |
| 역사 | |
| 기원 | 흉노족의 후예 (일설) |
| 초기 활동 | 삭방군 북쪽에서 유목 생활 |
| 세력 확장 | 서진 말기에 세력 확장, 대나라 건국 |
| 국가 멸망 | 북위 건국 후 멸망 |
| 주요 인물 | 탁발힐분 탁발의로 탁발규 |
| 사회 | |
| 생활 방식 | 유목 생활, 수렵 및 목축 |
| 문화 | 선비족 문화, 북방 민족 문화 |
| 종교 | 샤머니즘, 토템 신앙 |
| 정치 | |
| 정치 체제 | 부족 연맹 체제 |
| 지배 계층 | 탁발부 종실 |
| 기타 | |
| 관련 항목 | 선비족 북위 대나라 |
2. 역사
단석괴의 통일 선비가 붕괴된 후 분열된 선비족 중 가장 두드러진 세력이 탁발선비였다. 3세기 후반 탁발역미가 내몽골 호흐호트 분지로 남하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고, 4세기 초 탁발역미의 손자 탁발의타와 탁발의로가 서진을 멸망시킨 흉노계 국가 전조의 유연과 싸워 대선우를 칭하며 음산 일대 선비족의 통령이 되었다. 탁발의로는 병주자사 유곤에게 상간하 상류, 구주산 이북의 영토를 요구하여 대동분지를 포함한 장성 너머의 땅을 영유했다. 이는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이 화북의 영토를 요구한 첫 사례로, 탁발선비는 화북의 한족과 정치적·군사적·문화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1]
이후 탁발선비는 중국풍의 성을 쌓고 제도도 중국풍으로 바꾸었다. 일시적 분열 후 탁발십익건이 왕이 되자 성락 남쪽에 새로운 성을 쌓고 한족 관료를 기용했으며,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꾸는 등 국가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전진이 화북의 패권을 쥐기도 했지만, 동진과 항쟁하다 몰락하고 386년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가 북위를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태무제 시기 화북이 통일되고 강남에서는 유송이 동진을 대체함으로써 중국에는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1]
2. 1. 건국 이전
단석괴의 통일 선비가 붕괴된 후, 다시 분열된 선비족들 중 가장 두드러진 세력이 탁발선비였다. 3세기 후반, 탁발역미가 내몽골 호흐호트 분지로 남하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4세기 초, 탁발역미의 손자 탁발의타와 탁발의로가 서진을 도와 흉노의 유연과 싸웠다. 그 공으로 대선우·대공에 봉해져 음산 지대의 선비족 수령으로 떠올랐다.[1]탁발의로는 병주자사 유곤에게 상간하 상류, 구주산 이북의 토지 할양을 요구하여 대동 분지를 포함한 내장성 지대를 영유했다. 이는 북아시아의 기마 민족이 화북에 영토를 요구한 첫 사례로, 이후 탁발부는 화북의 한족과 정치, 군사, 문화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1]
2. 2. 대(代) 건국
315년, 탁발의로는 대나라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다. 호흐호트 분지의 성락(현재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 시 허린거얼 현)에 도성을 건설하여 북도(北都)로 삼았다.[1] 대동 분지의 평성 (현재 산시성다퉁시)을 수리하여 남도(南都)로 삼았다.[1] 상간하 북안에 신평성을 축성했다.[1] 탁발부의 지배력이 화북에 미치자, 중국식 성곽을 축조하고 제도 역시 중국식으로 정비했다.[1] 탁발십익건 통치 시기, 성락 남쪽에 새로운 성을 쌓고 한족 관료를 기용했으며,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꾸는 등 국가 제도와 사회를 중국식으로 개혁했다.[1]2. 3. 북위(北魏) 건국과 발전
386년, 탁발십익건의 손자 탁발규가 대나라를 부활시켰다.[1] 399년에는 국호를 위(魏)로 고치고 황제에 즉위했는데, 이 나라가 북위이다.[1] 태무제 시대에 화북을 통일하여,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들어갔다.[1] 북위는 북쪽의 유연과 대립하고, 남쪽으로는 유송 등 남조(南朝)와 대립했다.3. 역대 군주
4. 명칭
탁발(拓跋)이라는 명칭은 여러 기록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위서』와 『남제서』에서는 "탁발(托跋)", 『송서』에서는 "탁발(託跋)", 두씨의 『통전』과 『광운』에서는 "탁발(拓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소리가 같은 글자를 사용한 음역일 뿐이다[4].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탁발(拓跋)"의 옛 소리가 "tak-bat"이라고 했다[4].
동로마 제국의 테오필라크토스 시모카타가 기록한 "Taugas"와 돌궐 비문에 나오는 "Tabgač"는 중국을 가리키는 말인데, (중국#「탁발」에서 유래한 호칭 참조) 예전에는 조제프 드 갱이 "대위(Ta-göei)"(북위)를, 프리드리히 힐트가 "당가(Tang-kia)"(당)를 음역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이들 모두 "탁발(tak-bat)"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5].
"탁발(拓跋)"이라는 글자의 뜻에 대해 『위서』 서기에는 "흙(土)을 탁(托)이라 하고, 임금(后)을 발(跋)이라 하니, 이것으로 성(氏)을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탁발씨의 조상이 흙의 덕(土德)을 가진 왕인 황제(黃帝)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치다 긴후는 "탁(拓)・발(跋)" 두 글자가 알타이어의 "tab(토지)", "γač(소유자)"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라고 주장했다[6].
프리드리히 빌헬름 라드로프는 위구르어의 "tapkač"를 "유명・저명"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지만, 나중에 이를 철회하고 "당인(唐人)"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보았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토(土)・후(后)" 두 글자가 몽골어의 "toghosun(진흙)", 퉁구스어의 "bogin(군주)"에 해당하지만, "탁발(拓跋)"의 의미가 "토후(土后)"라는 『위서』의 기록은 믿기 어렵고, "탁발(拓跋)"의 정확한 뜻은 여전히 알 수 없다고 보았다.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튀르크・몽골어의 "tamga(인새)"에 "~를 맡는 자"라는 뜻의 "či"가 붙은 단어라고 설명했다[7].
탁발부는 "색두(索頭)", "색로(索虜)"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그들이 변발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탁발부 외에도 변발을 한 경우가 있었으므로, 색두부=탁발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색두부"는 아마도 한족 왕조가 변발을 한 이민족을 통틀어 부른 것으로, 특정 부족의 이름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8].
5. 언어 계통
선비의 전신인 동호의 언어 계통에 관해, 과거에는 퉁구스어족[9], 혹은 몽골-퉁구스 혼합 계통[10]으로 생각되었으나, 후에 동호의 자손인 선비의 언어를 튀르크어족으로 이해했기 때문에[11][12], 선비를 튀르크계 민족으로 이해하는 설이 유력해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선비(특히 탁발부)의 언어가 몽골어족이라는 학설도 제기되었다[13][14]
6. 기원
탁발(拓跋)의 기원에 대해서는 튀르크어 기원설과 원(原) 몽골어 기원설이 대립하고 있다. 튀르크어 기원설이 옳다고 하더라도, 선비족 전체에는 원 몽골족이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탁발선비의 기원은 민족 생성 과정의 문제이며, 후대에 튀르크계가 되었는지 몽골계가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는 현대의 프랑스인과 독일인의 선조가 게르만 계로 여겨지며, 카롤루스 대제 시대에 뚜렷하게 갈라지지 않은 것과 유사하다.[15]
6. 1. 한인(漢人) 기원설
『위서』에 따르면 탁발씨는 황제의 자손이라고 한다. 한민족은 예로부터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으로 여겼으므로, 탁발씨와 한인은 같은 기원이라는 것이다. 『송서』 색로전에는 "색두로(索頭虜)는 성이 탁발씨이며, 그 조상은 전한의 장군 이릉의 후예이다. 이릉은 흉노에 항복하여 흉노의 일부 낙(落)인 색두부(索頭部)가 되었다"고 하여, 탁발씨의 조상을 한인인 이릉이라고 하였다. 『한원』 주(註)에 인용된 『한명신주(漢名臣奏)』에서는 "선비는 진 시황 시대에 만리장성 건축 시 도망친 자들"이라고 하여, 역시 한인 기원이라고 한다. 흉노인이 서방계의 깊은 눈, 높은 코, 덥수룩한 수염, 붉은 머리, 녹색 눈이었던 반면, 선비인이 신체적으로 한인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에 선비는 한인 기원으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7. 씨족
탁발부를 구성하는 씨족은 크게 혈족 관계인 십성과 인척 등으로 구성된 외부 씨족으로 나뉜다.
헌제(탁발린) 시대에 처음 정해진 혈족 십성은 다음과 같다.[17]
- 제실 탁발씨(후에 원씨로 개명): 시조는 탁발린
- 흘골씨(후에 호씨로 개명): 시조는 탁발린의 맏형
- 보씨(후에 주씨로 개명): 시조는 탁발린의 둘째 형
- 발발씨(후에 장손씨로 개명): 시조는 탁발린의 셋째 형[18]
- 달해씨(후에 해씨로 개명): 시조는 탁발린의 맏동생
- 이루씨(후에 이씨로 개명): 시조는 탁발린의 둘째 동생
- 구돈씨(후에 구씨로 개명): 시조는 탁발린의 셋째 동생
- 사해씨(후에 해씨로 개명): 시조는 탁발린의 넷째 동생[19]
- 을천씨(후에 숙손씨로 개명)
- 차혼씨(후에 차씨로 개명)
이 외에도 몰록회부의 두씨(竇氏), 모용부의 모용씨(慕容氏), 하란부의 하씨(賀氏), 독고부의 유씨(劉氏) 등이 있었다.
신원제(탁발력미) 때 탁발부에 복속된 여러 씨족은 다음과 같다.[17]
| 씨족명(원음) | 바뀐 씨족명 |
|---|---|
| 구목릉씨 | 목씨(穆氏) |
| 보육고씨 | 육씨(陸氏) |
| 하뢰씨 | 하씨(賀氏) |
| 독고씨 | 유씨(劉氏) |
| 하루씨 | 루씨(樓氏) |
| 물뉴우씨 | 우씨(于氏) |
| 시련씨 | 연씨(連氏) |
| 복란씨 | 복씨(僕氏) |
| 약간씨 | 구씨(苟氏) |
| 발열란씨 | 량씨(梁氏) |
| 발략씨 | 소씨(蘇氏) |
| 약구인씨 | 구씨(寇氏) |
| 질라씨 | 라씨(羅氏) |
| 보루유씨 | 유씨(茹氏) |
| 하갈씨 | 갈씨(葛氏) |
| 시분씨 | 봉씨(封氏) |
| 아복간씨 | 아씨(阿氏) |
| 가지연씨 | 연씨(延氏) |
| 아록환씨 | 녹씨(鹿氏) |
| 타락발씨 | 락씨(駱氏) |
| 박해씨 | 박씨(薄氏) |
| 오환씨 | 환씨(桓氏) |
| 소화씨 | 화씨(和氏) |
| 토욕혼씨 | (해당 없음) |
| 고구인씨 | 후씨(侯氏) |
| 하약씨 | (해당 없음) |
| 곡혼씨 | 혼씨(渾氏) |
| 필루씨 | 루씨(婁氏) |
| 사리발씨 | 포씨(鮑氏) |
| 토복로씨 | 노씨(盧氏) |
| 첩운씨 | 운씨(雲氏) |
| 시운씨 | 시씨(是氏) |
| 질리씨 | 리씨(利氏) |
| 부려씨 | 부씨(副氏) |
| 나씨 | (해당 없음) |
| 여라씨 | 여씨(如氏) |
| 걸부씨 | 부씨(扶氏) |
| 가단씨 | 단씨(單氏) |
| 후기씨 | 기씨(幾氏) |
| 하아씨 | 아씨(兒氏) |
| 토해씨 | 고씨(古氏) |
| 출련씨 | 필씨(畢氏) |
| 유씨 | (해당 없음) |
| 하발씨 | 하씨(何氏) |
| 질려씨 | 여씨(呂氏) |
| 막나루씨 | 막씨(莫氏) |
| 해두로씨 | 색로씨(索盧氏) |
| 막로씨 | 노씨(蘆氏) |
| 보대한씨 | 한씨(韓氏) |
| 몰로진씨 | 로씨(路氏) |
| 호지간씨 | 호씨(扈氏) |
| 모여씨 | 여씨(輿氏) |
| 힐간씨 | 간씨(干氏) |
| 사복근씨 | 복씨(伏氏) |
| 시루씨 | 고씨(高氏) |
| 굴돌씨 | 굴씨(屈氏) |
| 답로씨 | 답씨(沓氏) |
| 온석란씨 | 석씨(石氏) |
| 해비씨 | 해씨(解氏) (고차) |
| 기근씨 | 기씨(奇氏) (고차) |
| 수복씨 | 복씨(卜氏) (남흉노) |
| 구림씨 | 림씨(林氏) (남흉노) |
| 대막간씨 | 합씨(郃氏) |
| 이면씨 | 면씨(綿氏) |
| 개루씨 | 개씨(蓋氏) |
| 소려씨 | 려씨(黎氏) |
| 갈단씨 | 단씨(單氏) |
| 일두권씨 | 명씨(明氏) |
| 질문씨 | 문씨(門氏) |
| 숙륙근씨 | 숙씨(宿氏) |
| 필한씨 | 한씨(邗氏) |
| 토난씨 | 산씨(山氏) |
| 옥인씨 | 방씨(房氏) |
| 수락간씨 | 수씨(樹氏) |
| 을불씨 | 을씨(乙氏) |
등국 초, 도무제 (탁발규)에 의해 행해진 "제부 해산" 후에는 여러 씨족이 편민이 되었다.[17]
- 동방: 우문씨(선제(탁발추인) 때의 동부), 모용씨(선제(탁발추인) 때의 동부)
- 남방: 융권씨(후에 융씨(戎氏)로 고침), 유련씨(후에 운씨(雲氏)로 고침), 힐두릉씨(후에 두씨(竇氏)로 고침), 후막진씨(후에 진씨(陳氏)로 고침), 사적씨(후에 적씨(狄氏)로 고침, 고차), 태락계씨(후에 계씨(稽氏)로 고침), 가발씨(후에 가씨(柯氏)로 고침)
- 서방: 돌발씨(원래는 탁발부와 동족, 후에 원씨로 고침), 위지씨(후에 위씨(尉氏)로 고침), 보록근씨(후에 보씨(步氏)로 고침), 파다라씨(후에 반씨(潘氏)로 고침, 고차), 질간씨(후에 설씨(薛氏)로 고침), 사노씨(후에 사씨(俟氏)로 고침), 전지씨(후에 전시(展氏)로 고침), 비련씨(후에 비씨(費氏)로 고침), 기련씨(후에 기씨(綦氏)로 고침), 거근씨(후에 애씨(艾氏)로 고침), 갈후씨(후에 구씨(緱氏)로 고침), 질로씨(후에 축씨(祝氏)로 고침), 화계씨(후에 완씨(緩氏)로 고침), 토뢰씨(후에 취씨(就氏)로 고침), 온분씨(후에 온씨(溫氏)로 고침), 달발씨(후에 포씨(褒氏)로 고침), 독고혼씨(후에 두씨(杜氏)로 고침)
- 북방: 하란씨(후에 하씨(賀氏)로 고침), 욱원진씨(후에 진씨(甄氏)로 고침), 힐해씨(후에 嵆氏로 고침, 고차), 월륵씨(후에 월씨(越氏)로 고침), 질노씨(후에 랑씨(狼氏)로 고침), 갈촉혼씨(후에 주씨(朱氏)로 고침), 고늑관씨(후에 고씨(庫氏)로 고침), 오락란씨(후에 란씨(蘭氏)로 고침), 일나루씨(후에 루씨(蔞氏)로 고침), 우불씨(후에 우씨(羽氏)로 고침)
8. 가한호(可汗號) 사용 논란
일반적으로 가한이라는 군주 호칭은 유연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지만[20], 일설에는 그보다 이전부터 선비 탁발부에 의해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자치통감』 제77권, 80권에서 "가한추인(可汗推寅)", "역미가한(力微可汗)"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507년에 건립된 『위인해지묘비(魏人奚智墓碑)』에 "복회 가한의 후예(僕膾可汗之後裔)…달해씨로 고쳤다"라고 적혀 있는데, 복회는 서기에 보이는 탁발회에 해당하며, 『위서』 관씨지(官氏志)에 따르면 달해씨라는 명칭은 탁발린의 대에 처음 정해졌다고 하므로, 탁발회의 대에는 이미 가한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21]
참조
[1]
서적
内田 1975
[2]
뉴스
世界史上のシルクロードと唐帝国 森安講義への質問に対する回答(全面的に補足)
http://www.let.osaka[...]
大阪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東洋史学研究室 第4回全国高等学校歴史教育研究会
2006
[3]
서적
逆転の大中国史 ユーラシアの視点から
文藝春秋
2016-08-11
[4]
서적
白鳥 1970
[5]
서적
白鳥 1970
[6]
서적
内田 1975
[7]
서적
白鳥 1970
[8]
서적
内田 1975
[9]
서적
アベル・レミュザ
1820
[10]
서적
白鳥庫吉
[11]
서적
ピーター・A・ブドバーグ
1936
[12]
서적
ポール・ペリオ
[13]
서적
エドウィン・プリーブランク
1962
[14]
서적
L.Ligeti
1970
[15]
웹사이트
森安講義への質問に対する回答(全面的に補足)
http://www.let.osaka[...]
[16]
서적
内田 1975
[17]
서적
魏書
[18]
서적
魏書校勘記·卷一百一十三·官氏志九第十九·二三
[19]
서적
魏書校勘記·卷一百一十三·官氏志九第十九·二四
[20]
서적
通典
[21]
서적
内田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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