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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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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니슈카는 쿠샨 제국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 중 한 명으로, 1세기 후반 또는 2세기 초에 즉위하여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그의 기원에 대해서는 호탄 출신 설과 카슈미르 출신 설이 있으며, 라바타크 비문을 통해 비마 카드피세스의 아들임이 밝혀졌다. 카니슈카는 북인도를 포함한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제4차 불교 공의회를 개최하고 불교 미술을 장려했다. 그는 다양한 종교적 신들을 동전에 묘사하는 등 종교적 혼합주의를 보였으며, 그의 치세는 불교의 중국 전파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카니슈카의 통치 연대는 논란이 있지만, 2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며, 그의 유산으로는 카니슈카 탑과 납골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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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슈카
기본 정보
카니슈카 금화
카니슈카의 금화. 그리스-박트리아 전설: ϷΑΟΝΑΝΟϷΑΟ ΚΑΝΗϷΚΙ ΚΟϷΑΝΟ "샤오나노샤오 카니시키 코샤노", "왕중왕, 쿠샨 카니슈카". 영국 박물관.
통치 기간127년–150년
즉위Circa|127
Circa|127 AD
이전 통치자비마 카드피세스
다음 통치자후비슈카
왕조쿠샨 제국
아버지불명
어머니불명
출생 장소Possibly|호탄, present-day|신장 위구르 자치구, 중국 (per Chinese chronicles)
or|카슈미르
종교불명
이름
산스크리트어कनिष्क (Kaniṣka)
박트리아어Κανηϸκε (Kaniške)
카로슈티 문자𐨐𐨞𐨁𐨮𐨿𐨐 (Ka-ṇi-ṣka)
브라흐미 문자𑀓𑀸𑀡𑀺𑀱𑁆𑀓 (Kā-ṇi-ṣka)
쿠샨 제국 통치자
카니슈카 1세 동전
쿠샨 숭배자 초상
통치 기간기원후 1–30년
통치 기간기원후 50–90년
통치 기간기원후 90–113년
통치 기간기원후 113–127년
통치 기간기원후 127–151년
통치 기간기원후 151–190년
통치 기간기원후 190–230년
통치 기간기원후 230–247년
통치 기간기원후 247–267년
통치 기간기원후 267–270년
통치 기간기원후 270–300년
통치 기간기원후 300–305년
통치 기간기원후 305–335년
통치 기간기원후 335–350년

2. 혈통 및 기원



카니슈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으나, 1993년 아프가니스탄 북부 라바타크에서 발견된 라바타크 비문을 통해 비마 카드피세스의 아들임이 밝혀졌다.

카니슈카의 출신은 오랫동안 불분명했다. 카니슈카 이후 화폐 명문에 인도 문자를 사용하지 않은 점, 호탄 출신지 설, 소월지 설 등 여러 근거로 인해 카니슈카는 이전 왕들(쿠줄라 카드피세스, 비마 카드피세스)과 혈연 관계가 없고 왕위를 찬탈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는 왕조 단절설이 유력했다.

호탄 출신지 설의 근거 중 하나는 카니슈카와 동시대 인물로 왕의 '삼지인' 중 한 명인 불교 시인 마명의 작품으로 전해지며, 카니슈카 왕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대장엄교론' 권6에 '내가 옛날에 들으니, 구사 종족 중에 왕이 있었으니, 이름은 진단가니타이며, 동천축을 정벌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단'은 호탄의 옛 이름이며, '가니타'는 카니슈카를 가리키므로, '진단가니타'는 '호탄 출신의 카니슈카'가 된다는 것이다.

2. 1. 라바타크 비문

1993년 아프가니스탄 북부 라바타크에서 발견된 그리스 문자 박트리아어 비문(라바타크 비문)에 따르면, 카니슈카는 비마 카드피세스의 아들로 확인되었다.[14][15] 라바타크 비문에는 카니슈카와 다른 쿠샨 통치자들의 연결 관계가 설명되어 있는데, 카니슈카는 그의 시대까지 통치했던 왕들의 목록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왕 쿠줄라 카드피세스 (그의 증조부), 왕 비마 탁투 (그의 할아버지), 왕 비마 카드피세스 (그의 아버지), 그리고 *또한 그 자신인 왕 카니슈카*".[16]

2. 2. 기타 학설

카니슈카의 기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있는데, 두 이론 모두 별개의 카니슈카 왕조가 있었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10] 스텐 코노우의 이론에 따르면 카니슈카는 호탄 출신으로, 비마 카드피세스 통치 이후 혼란기에 민족 동맹으로 소환되었다고 한다.[10] 코노우는 서기 120년경의 티베트 전통에 따르면 호탄의 인도 원정을 '비자야키르티' 왕과 '카니카' 왕, '구잔' 왕이 지휘했다는 점을 인용하여 이 이론을 뒷받침한다.[11][12]

로만 기르슈만의 유사한 이론에 따르면 카니슈카는 원래 카슈미르의 왕이었으며, 왕조 전체의 종주가 되었다고 한다.[10] 그는 위에 언급된 칼라트세 비문을 인용했는데, 이 비문은 쿠샨의 세력이 카슈미르 북동쪽 구석까지 미쳤음을 암시할 수 있으며, 라자타란기니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카슈미르의 쿠샨 왕들의 목록은 카니슈카의 이름을 '후슈카'와 '주슈카'의 이름과 함께 순서상 세 번째로 언급하고 있다.[10] 마지막으로, 불교에 대한 카니슈카의 카슈미르에서의 활동 증언은 그가 다른 지역보다 그 지역을 선호했으며 페샤와르를 카슈미르에 가까운 수도로 세웠음을 시사한다.[10]

그는 월지 출신이었으며, 그의 모국어는 아마도 토하라어였을 것이다.[13] 카니슈카는 비마 카드피세스의 후계자였으며, 이는 라바타크 비문으로 알려진 쿠샨 왕들의 인상적인 계보를 통해 입증되었다.[14][15]

카니슈카의 출신은 오랫동안 불분명했다. 카니슈카 이후의 화폐 명문에 인도 문자 사용 중단, 호탄 출신지 설, 소월지 설 등 여러 근거로 인해 카니슈카는 전대 왕(쿠줄라 카드피세스, 비마 카드피세스)과 혈연 관계가 없고, 왕위를 찬탈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는 왕조 단절설이 유력했다.

호탄 출신지 설의 근거 중 하나는, 카니슈카와 동시대 인물로, 왕의 '삼지인' 중 한 명인 불교 시인 마명의 작품으로 전해지며, 카니슈카 왕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창작된 것으로 보이는 '대장엄교론' 권6에, '내가 옛날에 들으니, 구사 종족 중에 왕이 있었으니, 이름은 진단가니타이며, 동천축을 정벌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단'은 호탄의 옛 이름이며, '가니타'는 카니슈카를 가리키므로, '진단가니타'는 '호탄 출신의 카니슈카'가 된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1993년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라바타크에서 발견된 그리스 문자 박트리아어 비문(라바타크 비문)의 발견으로, 카니슈카는 비마 카드피세스의 아들임이 확인되었다.(왕조 교체설 참조)

3. 정복 활동

카니슈카는 북서 인도를 근거지로 삼아 푸루샤푸라(현재의 페샤와르)를 수도로 정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여름에는 아프가니스탄 초원, 겨울에는 인도 평원으로 이동하며 지방 유력자들을 복속시키고 "왕 중의 왕"으로 군림했다. 동부 영토 지배를 위해 마투라를 부도로 삼았는데, 마투라 근교 유적에서는 중앙아시아풍 복장을 한 카니슈카의 입상이 발견되기도 했다.[26]

카니슈카 시대에 쿠샨 왕조는 갠지스 강 중류 유역, 인더스 강 유역, 박트리아 등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이루었지만, 그의 치세 후반 이후 쿠샨 왕조에 대한 기록은 줄어들어 상세한 역사는 알 수 없게 된다. 이후 아들인 바시슈카가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3. 1. 인도 아대륙

카니슈카의 제국은 매우 넓었다. 북서쪽으로는 아무다리야강(옥수스강) 북쪽의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남부에서 동남쪽의 마투라까지 북인도를 포함했다. 라바탁 비문에는 그가 파탈리푸트라와 스리 챔파를 소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영토에는 카슈미르도 포함되었는데, 바라우라 패스 근처에는 카니슈카푸르(오늘날의 카니스포라)라는 도시가 있었고, 이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여전히 큰 불탑의 기저부를 포함하고 있다.[17][18]

후한서반초 장군이 90년에 호탄 근처에서 셰(謝)라는 쿠샨 총독이 이끄는 7만 명의 쿠샨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초는 승리했다고 주장하며, 초토화 전술을 사용하여 쿠샨군을 후퇴시켰다. 카슈가르, 호탄, 야르칸드는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타림 분지의 중국 속주였다. 타림 분지에서는 카니슈카의 동전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19]

카니슈카는 통치 기간 동안 파르티아 제국과의 침략을 물리쳤을 가능성이 있다.[20] 불교 경전인 ''부법장인연전''에는 카니슈카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파르티아 왕이 쿠샨 왕조의 영토를 침략했기 때문에 카니슈카 왕이 맞서 싸워 승리했고, 파르티아인 9억 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는 과장된 수치로 보이지만, 파르티아와 쿠샨 왕조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니슈카는 갠지스 강을 따라 인도 동부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네팔카트만두사르나트를 지배하에 두고 파탈리푸트라 근처까지 진출했다. 벵골 지방에서도 카니슈카가 발행한 동전이 발견되었지만, 이것이 정복의 결과인지는 불분명하다.

3. 2. 중앙아시아

후한서에 따르면, 반초 장군은 90년에 호탄 근처에서 셰(謝)라는 이름의 쿠샨 총독이 이끄는 7만 명의 쿠샨군과 전투를 벌였다. 반초는 승리하여 초토화 전술로 쿠샨군을 후퇴시켰다. 카슈가르, 호탄, 야르칸드는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타림 분지의 중국 속주였다. 타림 분지에서는 카니슈카 시대의 동전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19]

카니슈카는 통치 기간 동안 파르티아 제국의 침략을 물리쳤을 가능성이 있다.[20] 이 전쟁은 중국어 번역본인 ''부법장인연전''에 기록되어 있다.[21] 불교 경전 기록에 따르면, 파르티아 왕이 쿠샨 왕조를 침략했으나 카니슈카 왕이 이에 맞서 승리했다고 한다.

3. 3. 파르티아와의 전쟁

카니슈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파르티아 제국과의 침략을 물리쳤을 가능성이 있다.[20] 이 전쟁은 잃어버린 산스크리트어 원본의 중국어 번역본인 ''부법장인연전''에서만 증명된다.[21]

불교 경전에 따르면, 당시 파르티아 왕은 매우 흉폭하여 쿠샨 왕조의 영토를 침략했고, 카니슈카 왕은 이에 맞서 싸워 승리하여 파르티아인 9억 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 수치는 명백한 과장이다. 파르티아와 쿠샨 왕조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카니슈카의 대 파르티아 전쟁의 실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4. 종교 정책

카니슈카의 종교 정책은 그의 동전에 잘 나타나 있다. 초기에는 그리스어와 문자로 그리스 신들을 묘사했지만, 이후 박트리아어를 사용하면서 이란 및 인도 신들로 대체되었다. 이는 그의 종교적 혼합주의적인 신념을 보여준다.

카니슈카의 동전에 나타난 신들은 다음과 같다:

종류
이란 및 인도 신
불교 신
힌두교 신



동전 앞면에는 그리스 문자로 "ϷΑΟΝΑΝΟϷΑΟ ΚΑΝΗϷΚΙ ΚΟϷΑΝΟ" ("제왕 카니슈카 왕")이라고 쓰여 있으며, 뒷면에는 헬리오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의 모습이나 붓다 (ΒΟΔΔΟ)가 그려져 있기도 하다.

카니슈카 왕은 불교 외에도 다른 종교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가 발행한 동전에는 시바 신, 태양신, 달신, 스칸다 신, 비샤카 신, 화신, 풍신 등 전통적인 인도 신의 도상이 나타나 있다. 또한, 그가 지배했던 시대의 탁실라에는 조로아스터교의 배화 신전으로 보이는 건물도 존재하고 있었다.

4. 1. 불교 후원

카니슈카는 불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비록 불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불교를 장려하고 왕실의 후원을 제공했다.[31] 특히 카슈미르에서 제4차 불교 공의회를 주관했는데,[32] 이 회의는 바수미트라와 아슈바고샤가 주재했다. 그의 시대에는 32가지 신체적 특징을 바탕으로 한 붓다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는 간다라의 그레코-불교 미술과 마투라 미술을 모두 장려했다. 카니슈카는 개인적으로 불교와 페르시아의 속성을 모두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지만, 불교를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불교 건축에 대한 가장 큰 공헌은 오늘날의 페샤와르에 위치한 카니슈카 탑이다. 1908~1909년에 그 기단을 재발견한 고고학자들은 이 탑의 지름이 87m라고 추정했다. 현장과 같은 중국 순례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 높이는 대략 180m~210m였으며 보석으로 덮여 있었다.[33]

카니슈카는 불교 학자 아슈바고샤와 특히 가까웠으며, 그는 말년에 카니슈카의 종교 고문이 되었다고 한다.

카니슈카의 주화에 묘사된 "석가모니 부처" (전설 ϷΑΚΑΜΑΝΟ ΒΟΔΔΟ "Shakamano Boddo")


석가모니 부처 (전설 "사카마노 부도", 즉 석가모니 부처, 역사적 부처 싯다르타 고타마의 또 다른 이름)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며, 왼손은 엉덩이에 대고 오른손으로는 아바야 무드라를 취하고 있다. 이 동전들은 모두 구리로만 만들어졌으며, 일반적으로 꽤 낡았다.

석가모니 부처의 가운은 안타라바사카와 우타라상가로 추정된다. 또한, 그의 가운은 왼쪽 팔에 걸쳐져 있는데, 이것은 비마란 상자에서만 알려진 특징이며, 스카프와 같은 우타리아를 연상시킨다. 그는 우시니샤를 덮는 풍성한 상투를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빛을 내는 단순하거나 이중적인 후광이 그의 머리를 둘러싸고 있다.

카니슈카 시대의 동전에 묘사된 "미륵" (ΜΕΤΡΑΓΟ ΒΟΔΔΟ "메트라고 보도"라는 명문 포함)


보살 미륵 (명문 "메트라고 부도" 포함)은 물병을 들고 아바야 무드라를 취하며, 다리를 꼬고 옥좌에 앉아있다. 이 동전은 구리 재질로만 알려져 있으며, 상당히 닳아있다.

가장 선명한 동전에서 미륵은 인도 왕자의 팔찌를 착용하고 있는데, 이는 미륵의 조각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옥좌는 작은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미륵의 동전 묘사가 이미 존재하던 조각상의 특징을 직접적으로 복사한 것임을 시사한다.

미륵을 "부처"로 칭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는 대신 보살이다 (그는 미래의 부처이다).

이 세 유형의 도상은 카니슈카 시대 동전에 묘사된 다른 신들의 도상과 매우 다르다. 카니슈카의 신들은 모두 측면에서 묘사되는 반면, 부처는 정면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조각상의 서 있는 부처와 앉아 있는 부처의 동시대적 정면 표현을 복사했음을 나타낸다.[35] 부처와 석가모니의 묘사 모두 두 어깨가 승려의 가운으로 덮여 있는데, 이는 모델로 사용된 조각상이 간다라 미술 학교 출신임을 나타낸다.

쿠샨 미술도 참조.

카니슈카 치세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여러 불상이 있는데, 예를 들어 마투라 미술의 여러 보살상과 간다라에서 발견된 몇몇 불상은 서기 186년부터 175년까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야바나 시대의 연대가 새겨져 있다.[47]

카니슈카 치세의 연대별 조상



불교 전통에서 카니슈카는 불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공격적이고, 성격이 급하며, 완고하고, 엄격하며, 다소 가혹한 종류의 왕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불교로 개종한 후에는 마음이 열린, 자비롭고 충실한 통치자가 되었다. 스리-다르마-피타카-니다나 수트라(Sri-dharma-pitaka-nidana sutra)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이때 응안시(파르티아)의 왕은 매우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성격을 지녔다....왕이 행한 가혹한 행위를 보고 그에게 참회를 시키고 싶어했던 비쿠(승려) 아라한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왕이 지옥의 고통을 보게 했다. 왕은 겁에 질려 뉘우치고 통곡하며 자신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녹여내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아를 깨달았다." Śri-dharma-piṭaka-nidāna sūtrasa[50]

또한, 카니슈카의 등장은 부처에 의해 예언되거나 예측되었으며, 그의 탑 건설도 마찬가지였다.

: ". . . 부처는 진흙으로 토페를 만드는 어린 소년을 가리키며....[말하기를] 그곳에 Kaṇiṣkasa가 자신의 이름을 딴 토페를 세울 것이다." ''비나야 수트라(Vinaya sutra)''[51]

보살 미륵 "메트라고 부도"가 새겨진 카니슈카의 동전.


아힌 포시 탑은 서기 2세기에 봉헌되었으며 카니슈카의 동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같은 이야기가 둔황에서 발견된 코탄어 두루마리에 반복되는데, 이 두루마리는 카니슈카가 부처의 열반 후 400년 후에 등장할 것이라고 처음 묘사했다. 이 기록은 또한 카니슈카가 어떻게 그의 탑을 세우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카니슈카에게 거대한 탑을 건설하려는 소망이 생겼다]....그때 네 명의 세계 지배자들이 왕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위해 그들은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변했다....[그리고] 진흙으로 스투파를 만들기 시작했다.... 소년들은 [카니슈카]에게 '우리는 Kaṇiṣka-stūpasa를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그때 소년들은 모습을 바꾸었다....[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위대한 왕이시여, 부처의 예언에 따라 당신은 큰 스투파와 함께 완전한(?) Saṅghārāmasa를 지어야 하며, 이곳으로 공덕이 있는 선한 존재들이 가져올 유물을 초대해야 합니다.'"[52]

630년경에 인도를 여행한 현장과 같은 중국 순례자들도 이 이야기를 전한다.

:"Kaṇiṣkasa는 잠부드비파(인도 아대륙) 전체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는 업을 믿지 않았지만, 불교의 가르침과 경전에 매료되어 스스로 불교로 개종하면서 불교를 존경하고 존중했다. 그가 야생에서 사냥을 하던 중 하얀 토끼가 나타났고, 왕은 토끼를 쫓았고 토끼는 갑자기 [미래 탑의 부지]에서 사라졌다....[탑 건설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자] 왕은 인내심을 잃고 직접 그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여 정확하게 계획을 부활시켰고, 그리하여 최고의 완벽함과 끈기로 스투파를 완성했다. 이 두 개의 스투파는 여전히 존재하며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치료를 위해 의지했다."

카니슈카 왕은 그의 행적으로 인해 그가 다스리고 통치했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명예를 받았으며, 모든 측면에서 그의 친절함, 겸손함, 평등 의식, 정당함으로 인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카니슈카 왕의 그러한 훌륭한 행적과 인격은 그의 이름을 불멸하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그는 "왕 중의 왕"으로 여겨졌다.[53]

카니슈카 왕이 불교를 보호했다는 것은 많은 불전에 기록되어 있다. 불전의 전설에 따르면, 카슈미르 지방의 왕에게 신하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하여 수다르샤나라고 칭하며 카슈미르에서 법을 설했다고 한다. 카니슈카는 그의 소문을 듣고 설법을 들으러 갔다가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카니슈카 왕은 각지에 불탑을 건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치세에 불전의 제4차 결집 (제3차라고도 함)이 행해졌다고 전해진다.

마찬가지로 불전의 기록에 따르면, 카니슈카 왕은 중부 인도에 원정군을 파견하여 공격하게 했다. 그 지역의 왕은 평화 협상을 벌였고, 카니슈카 왕은 을 요구했다. 그 지역의 왕이 이를 지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자, 카니슈카 왕은 을 감액하는 대신, 보물인 "불발"과 사케타 출신의 시인 아슈바고샤(한자음: 마명. 변재 비구)를 보낼 것을 요구했다. 아슈바고샤는 그 지역의 왕에게 널리 여러 나라에 불도를 널리 퍼뜨릴 도리를 설득했다. 중부 인도의 왕은 두 보물을 카니슈카 왕에게 주기로 했다. 이렇게 카니슈카 왕 밑으로 온 아슈바고샤는 카니슈카 왕의 후한 대우를 받았고, 대신 마타라(한자음: 마타라), 의사 차라카(한자음: 차라카)와 함께 "삼지인"으로 불리며 카니슈카 왕의 "친우"가 되었고, 카니슈카 왕의 정신적인 스승이 되었다.

일본중국의 불교도 기록에 따르면 카니슈카 왕은 대승 불교를 지지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대승 불교와 카니슈카 왕의 관계는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슈바고샤가 남긴 작품 등을 통해 카니슈카 왕이 지지한 불교는 전통적 보수 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였다고 여겨진다.

4. 2. 불교 주화

카니슈카의 동전은 인도, 그리스, 이란, 수메르-엘람 신들의 이미지를 묘사하여 그의 종교적 혼합주의적인 신념을 보여준다. 초기 동전은 그리스어와 문자로 그리스 신들을 묘사했다. 이후 동전은 박트리아어로 새겨졌고, 그리스 신들은 이란 신들로 대체되었다. 카니슈카의 모든 동전은 박트리아어로 새겨진 것조차 수정된 그리스 문자로 쓰였다.

그의 동전에서 왕은 턱수염, 긴 코트, 발목에 바지가 모아진 모습, 어깨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크고 둥근 부츠를 신고, 긴 칼과 창으로 무장했으며, 작은 제단에서 제물을 바치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

동전에서 박트리아어로 전환된 후, 이란 및 인도 신들이 그리스 신들을 대체했다.

  • ΑΡΔΟΧ''Ϸ''Ο (ardoxsho, 아시 방구히)
  • ΛΡΟΟΑΣΠΟ (lrooaspo, 드르바스파)
  • ΑΘ''Ϸ''Ο (adsho, 아타르)
  • ΦΑΡΡΟ (pharro, 의인화된 카르나)
  • ΜΑΟ (mao, 마하)
  • ΜΙΘΡΟ, ΜΙΙΡΟ, ΜΙΟΡΟ, ΜΙΥΡΟ (mithro, miiro, mioro, miuro, 미트라의 변형)
  • ΜΟΖΔΟΟΑΝΟ (mozdaooano, "승리자 마즈다?")
  • ΝΑΝΑ, ΝΑΝΑΙΑ, ΝΑΝΑ''Ϸ''ΑΟ (범아시아 ''Nana''의 변형, 소그드어 ''nny'', 조로아스터교 문맥에서 아레드비 수라 아나히타)
  • ΜΑΝΑΟΒΑΓΟ (manaobago, 보후 마나)
  • ΟΑΔΟ (oado, 바타)
  • ΟΡΑΛΑΓΝΟ (orlagno, 베레트라그나)


몇몇 불교 신들도 사용되었다.

  • ΒΟΔΔΟ (boddo, 붓다)
  • ''Ϸ''ΑΚΑΜΑΝΟ ΒΟΔΔΟ (shakamano boddho, 석가모니 붓다)
  • ΜΕΤΡΑΓΟ ΒΟΔΔΟ (metrago boddo, 보살 미륵)


몇몇 힌두교 신들도 사용되었다.

석가모니 부처 (전설 "사카마노 부도")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며, 왼손은 엉덩이에 대고 오른손으로는 아바야 무드라를 취하고 있다. 이 동전들은 모두 구리로만 만들어졌으며, 일반적으로 꽤 낡았다.

보살 미륵 (명문 "메트라고 부도" 포함)은 물병을 들고 아바야 무드라를 취하며, 다리를 꼬고 옥좌에 앉아있다. 이 동전은 구리 재질로만 알려져 있으며, 상당히 닳아있다. 미륵을 "부처"로 칭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는 대신 보살이다 (그는 미래의 부처이다).

이 세 유형의 도상은 카니슈카 시대 동전에 묘사된 다른 신들의 도상과 매우 다르다. 카니슈카의 신들은 모두 측면에서 묘사되는 반면, 부처는 정면으로 묘사된다.[35]

동전 앞면의 명문에는 그리스 문자로 "ϷΑΟΝΑΝΟϷΑΟ ΚΑΝΗϷΚΙ ΚΟϷΑΝΟ" "제왕 카니슈카 왕"이라고 쓰여 있으며, 뒷면에는 태양신 헬리오스 (ΗΛΙΟΣ)를 비롯한 많은 신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거나, 드물게는 붓다 (ΒΟΔΔΟ)가 그려지기도 했다.

5. 통치 연도

카니슈카의 재위 연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의가 있어 왔지만, 현재까지 정설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연대 추정의 근거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 후한서』에는 서기 125년경까지의 쿠샨 왕조의 사정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 안에서 카니슈카 왕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에, 카니슈카의 즉위는 125년 이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
  • 코인 등의 쿠샨 왕조의 유품 연구로부터 카니슈카의 치세가 비마 카드피세스보다 후라고 생각되는 점 (이 점은 라바타크 비문에 비마 카드피세스가 카니슈카의 아버지라고 하는 기술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뒷받침되었다).
  • 『삼국지』의 기록에 태화 3년 (229년)에 대월지왕 파조(바수데바)의 사자가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 등이다.


카니슈카 기원 74년부터 98년경이 바수데바의 치세였다 (전후로 더 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여기에서 거꾸로 계산하여 카니슈카 기원의 제1년이 서기 168년보다 이전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증거와 그 밖의 약간의 방증으로부터 카니슈카 왕의 재위 연대가 추정되고 있다. 프랑스 학계에서는 144년 - 173년 설이 많이 지지되고 있지만, 아직 정설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도의 학자 딕시트는 144년 - 164년경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밖에도 많은 설이 있다. 그러나 대개 2세기 중반의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어느 설이나 일치하고 있다.

6. 왕의 칭호

쿠샨 왕국은 왕의 칭호 표기 방식에서 왕국의 포괄적이고 융합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왕국에서는 여러 민족이 군주에게 사용했던 다양한 칭호를 그대로 채용했다.

예를 들어, 카니슈카의 칭호 중 하나는 "샤히・무로다・마하라자・라자=아티라자・데바푸트라・카이사르인 카니슈카 왕"이었다. 각 칭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칭호의미유래
샤히월지족
무로다수장사카족
마하라자대왕인도
라자=아티라자제왕 중의 왕이란
데바푸트라천자 (天子|천자중국어, 신의 아들)중국
카이사르황제라틴어



그 외에 중앙아시아 계통의 칭호인 야부구(翕侯), 페르시아어의 샤(왕), 그리스어의 바실레우스(왕) 등도 사용했다.

7. 카니슈카 대왕의 유산

카니슈카 대왕은 불교를 숭상하고 널리 전파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불교 예술과 건축이 크게 발전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그 유산으로 남아있다.

카니슈카 대왕은 불교 건축에 큰 공헌을 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페샤와르에 위치했던 카니슈카 탑이다. 이 탑은 지름이 약 87.17m에 달했으며, 현장과 같은 중국 순례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높이는 약 180m~210m에 이르고 보석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33]

127년에 만들어진 카니슈카의 납골함(카니슈카의 유물함)은 카니슈카 탑 아래 보관실에서 발견되었는데,[48][49] 여기에는 부처의 뼛조각 3점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납골함은 현재 페샤와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사본은 대영 박물관에 있다. 납골함에는 카로슈티 문자로 헌정되었으며, 그리스 예술가 '아게실라스'가 서명하여 당시 그리스인들이 불교에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카니슈카 시대에는 간다라 지역의 불교 승려들이 북아시아로 불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샨 승려 로카크세마는 대승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이며, 중국 수도 뤄양에 번역국을 설립하기도 했다.

7. 1. 카니슈카 대탑

카니슈카의 불교 건축에 대한 가장 큰 공헌은 오늘날의 페샤와르에 위치한 카니슈카 탑이었다. 1908~1909년에 그 기단을 재발견한 고고학자들은 이 탑의 지름이 약 87.17m라고 추정했다. 현장과 같은 중국 순례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그 높이는 600~700(중국) "피트"(= 대략 180m~210m)였으며 보석으로 덮여 있었다.[33]

카니슈카 탑의 잔해.


127년 카니슈카 통치 원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카니슈카의 납골함" 또는 "카니슈카의 유물함"은 오늘날 페샤와르 구시가지의 간지 게이트 외곽에 있는 샤지키데리에서 1908~1909년 고고학 발굴 중에 카니슈카 탑 아래의 보관실에서 발견되었다.[48][49] 현재는 페샤와르 박물관에 있으며, 사본은 대영 박물관에 있다. 부처의 뼛조각 3점이 들어 있었으며, 현재는 버마 만달레이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란의 태양신과 달신에게 둘러싸인 카니슈카 (세부 묘사)


납골함은 카로슈티 문자로 헌정되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 "(*마하라)자사 카니슈카사 카니슈카-푸레 나가레 아야 가다-카라에 데야-다르메 사르바-사트바나 히타-수하르타 바바투 마하세나사 사가라키 다사 아기살라 나바-카르미 아나*카니슈카사 비하레 마하세나사 상가라메"

이 텍스트는 카니슈카의 (차이티야)에서 작업을 감독한 그리스 예술가 '아게실라스'가 서명했으며, 이처럼 늦은 시기에도 그리스인들이 불교적 실현에 직접 관여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마하세나 수도원의 카니슈카 비하라에서 작품 감독관인 하인 아기살라오스"("다사 아기살라 나바-카르미 아나*카니슈카사 비하라 마하세나사 상가라메").

납골함 뚜껑에는 연꽃 받침대 위에 부처가 있고, 브라흐마인드라가 경배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뚜껑의 가장자리에는 날아가는 거위의 프리즈가 장식되어 있다. 납골함의 몸체는 쿠샨 군주, 아마도 카니슈카 본인을 나타내며, 그의 옆에는 이란의 태양신과 달신이 있다. 옆면에는 카니슈카로 추정되는 왕족이 경배하는 앉아 있는 부처의 두 이미지가 있다. 천사들이 지지하는 화환이 전형적인 헬레니즘 스타일로 장면을 둘러싸고 있다.

납골함의 카니슈카 귀속은 최근에 스타일상의 이유로 논쟁이 벌어졌다(예를 들어, 납골함에 묘사된 통치자는 수염이 없으며, 카니슈카와는 정반대이다). 대신, 이 납골함은 종종 카니슈카의 후계자인 후비슈카에게 귀속된다.

7. 2. 카니슈카의 납골함



카니슈카의 납골함(카니슈카의 유물함)은 127년 카니슈카 통치 원년에 만들어졌으며, 1908년~1909년 고고학 발굴 중에 오늘날 페샤와르 구시가지의 간지 게이트 외곽에 있는 샤지키데리에서 카니슈카 탑 아래의 보관실에서 발견되었다.[48][49] 현재는 페샤와르 박물관에 있으며, 사본은 대영 박물관에 있다. 부처의 뼛조각 3점이 들어 있었으며, 현재는 버마 만달레이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납골함은 카로슈티 문자로 헌정되었으며, 비문은 다음과 같다.

: "(*마하라)자사 카니슈카사 카니슈카-푸레 나가레 아야 가다-카라에 데야-다르메 사르바-사트바나 히타-수하르타 바바투 마하세나사 사가라키 다사 아기살라 나바-카르미 아나*카니슈카사 비하레 마하세나사 상가라메"

이 텍스트는 카니슈카의 (차이티야)에서 작업을 감독한 그리스 예술가 '아게실라스'가 서명했으며, 이처럼 늦은 시기에도 그리스인들이 불교적 실현에 직접 관여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마하세나 수도원의 카니슈카 비하라에서 작품 감독관인 하인 아기살라오스"("다사 아기살라 나바-카르미 아나*카니슈카사 비하라 마하세나사 상가라메").

납골함 뚜껑에는 연꽃 받침대 위에 부처가 있고, 브라흐마인드라가 경배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뚜껑의 가장자리에는 날아가는 거위의 프리즈가 장식되어 있다. 납골함의 몸체는 쿠샨 군주, 아마도 카니슈카 본인을 나타내며, 그의 옆에는 이란의 태양신과 달신이 있다. 옆면에는 카니슈카로 추정되는 왕족이 경배하는 앉아 있는 부처의 두 이미지가 있다. 천사들이 지지하는 화환이 전형적인 헬레니즘 스타일로 장면을 둘러싸고 있다.

납골함의 카니슈카 귀속은 최근에 스타일상의 이유로 논쟁이 벌어졌다(예를 들어, 납골함에 묘사된 통치자는 수염이 없으며, 카니슈카와는 정반대이다). 대신, 이 납골함은 종종 카니슈카의 후계자인 후비슈카에게 귀속된다.

7. 3. 불교의 중국 전파

간다라 지역의 불교 승려들은 서기 2세기 중반부터 북아시아 방향으로 불교 사상을 발전시키고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샨 승려 로카크세마는 대승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한 최초의 인물로, 중국 수도 뤄양에 번역국을 설립했다. 이후 수 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불교 승려들은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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