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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르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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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펜타르키는 초기 기독교 시대에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5개 주요 교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 조직 체제이다. 4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총대주교'라는 칭호가 사용되면서 펜타르키 이론이 정립되었다. 이 이론은 7세기와 8세기에 교회의 무오성을 지지하는 다섯 기둥으로 여겨졌으며, 비잔틴 제국 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지위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동서 교회 분열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주의가 강화되었고, 다른 총대주교구가 등장하면서 펜타르키는 변화를 겪었다. 현재 펜타르키는 동방 정교회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남아있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에서는 부분적으로 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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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르키
개요
6세기 모자이크에 묘사된 펜타르키 성도들. 왼쪽부터: 알렉산드리아의 마르코, 로마의 베드로, 예루살렘의 야고보, 콘스탄티노플의 바울, 안티오키아의 베드로.
6세기 모자이크에 묘사된 펜타르키 성도들. 왼쪽부터 알렉산드리아의 마르코, 로마의 베드로, 예루살렘의 야고보, 콘스탄티노플의 바울, 안티오키아의 베드로.
기본 정보
유형교회 정치 모델
기원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입법
공식화트룰로 공의회(692년)
구성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상세 정보
설명단일 제국의 후원 아래 다섯 총대주교구가 보편적인 기독교 세계를 통치하는 정부 형태.

2. 펜타르키의 발전

초기 기독교 시대에 교회는 사도 시대(1세기)의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여러 지역 교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4세기에 이르러 각 지역(대주교)의 주교가 그 지역의 다른 도시(교구 주교)의 주교에 대해 특정 권한을 갖는 시스템이 발전했다.[9]

니케아 공의회가 인정한 세 개의 교구 중 로마는 기록이 가장 많으며, 갈등 해결을 위해 다른 지역사회에 개입했다.[10] 교황 클레멘스 1세는 1세기 말에 고린토스에서 그렇게 했다.[11] 2세기 초,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는 안티오키아 주교로서 로마 교회를 "로마인 지역에서 주재하는" 교회라고 칭했다.[11]

안티오키아시리아 밖에서 권위를 행사한 첫 기록은 2세기 말 안티오키아의 세라피온이 킬리키아의 아르수스에 개입하고 로마 제국 외부에 있는 세 번째 에데사 주교를 임명했을 때이다. 3세기 중반 안티오키아 공의회에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동부 소아시아 주교들이 참여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는 이들을 "동방의 주교단"이라 칭하며 안티오키아 주교 데메트리안을 언급했다.[13]

알렉산드리아 주교는 이집트와 인근 아프리카 지역에서 처음에는 유일한 대주교였다. 다른 대주교 교구가 세워지면서 알렉산드리아 주교는 대주교로 알려졌다. 3세기 중반 알렉산드리아의 헤라클라스는 템미스 주교를 폐위하고 교체하며 대주교 권한을 행사했다.[14]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는 로마 제국 속주에 따른 주교 관할 구역을 승인하고,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세 주교좌의 더 넓은 지역 권위를 인정했다. 로마나 안티오크 권한 범위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알렉산드리아가 이집트, 리비아, 펜타폴리스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고 언급했다.[17] 존 H. 에릭슨은 니케아 공의회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특별 권한을 각 속주 자체 수도 대주교를 갖는 일반 규칙의 예외로 보았다고 해석한다.

니케아 공의회는 예루살렘 주교에게 수도 대주교 권한이 아닌 특별한 존경을 부여했다.[19] 예루살렘은 카이사레아가 수도 대주교인 시리아 팔레스타이나 속주에 있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비잔티움(콘스탄티노폴리스)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는 로마 주교 다음가는 명예를 가질 것이다."라고 선언했다.[20]

테오도시우스 1세동로마 제국을 이집트(알렉산드리아 관할), 동방(안티오크 관할), 아시아(에페소스 관할), 폰토스(카이사레아 카파도키아 관할), 트라키아(콘스탄티노폴리스 관할) 5개 교구로 나누었다.[21] 공의회는 주교들이 관할 구역 밖 교회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22]

콘스탄티노폴리스는 330년 수도 이전 후, 헤라클레아 종속에서 벗어나 반세기 만에 로마 다음 지위를 인정받았다. 알렉산드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부상에 반대하며 5세기 전반에 걸쳐 갈등했다. 로마는 알렉산드리아를 지지하며 로마가 첫 번째인 세 사도좌 이론을 제시했다.[21]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키프로스 교회 독립을 옹호했고,[27]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세 지역 대주교 권력을 얻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트라키아, 폰토스, 아시아에 대한 권력을 확장하는 것을 인정했다. 공의회는 "아버지들이 구 로마 왕좌에 특권을 부여한 것은 그곳이 왕의 도시였기 때문"이며,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처럼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도 "교회 문제에서 숭고하게 여겨지고, 그녀 다음 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28]

교황 레오 1세는 공의회는 인정했지만, 제28조는 니케아 공의회 제6조에 위배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21][29]

공의회 제9조는 주교나 성직자가 대주교와 불화가 있다면, 교구 엑사르크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재판을 의지하도록 했다.[30]

이 과정을 통해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다섯 주요 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펜타르키 체제가 구체화되었다. 에페소스 공의회 결정으로 키프로스는 안티오크로부터 독립을 유지했으며, 이 배열은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에서 별도 "카톨릭"이 발전한 제국 밖에는 적용되지 않았다.[21]

2. 1. 초기 기독교

사도 시대(1세기)에 기독교 교회는 처음에 주요 중심지이자 기준으로 예루살렘의 첫 번째 교회를 바라보는 불특정 다수의 지역 교회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4세기에 이르러 각 민간 지방의 수도(대주교)의 주교는 일반적으로 그 지방의 다른 도시(나중에 교구 주교라고 불림)의 주교에 대해 특정 권한을 갖는 시스템을 개발했다.[9]

니케아 공의회가 그러한 초지방 권력을 갖는 것으로 인정한 세 개의 교구 중 로마는 기록이 가장 많은 곳이다. 로마 교회는 갈등 해결을 돕기 위해 다른 지역사회에 개입했다.[10] 교황 클레멘스 1세는 1세기 말에 고린토스에서 그렇게 했다.[11] 2세기 초에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는 안티오키아 주교로서 로마 교회를 "로마인 지역에서 주재하는"(ἥτις προκάθηται ἐν τόπῳ χωρίου Ῥωμαίων) 교회라고 말했다.[11] 그 세기 말에 교황 빅토르 1세는 14일 규정을 계속 지키며, 그 다음 주 일요일이 아닌 니산월 14일에 부활절을 지키는 동방 주교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12]

안티오키아가 자신의 지방인 시리아 밖에서 권위를 행사한 첫 번째 기록은 2세기 말에 안티오키아의 세라피온이 킬리키아의 도시 아르수스에 개입하고 로마 제국 외부에 있는 세 번째 에데사 주교를 임명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3세기 중반에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공의회에 참여한 주교들은 시리아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동부 소아시아에서도 왔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는 이 주교들을 "동방의 주교단"이라고 칭하며 안티오키아의 주교 데메트리안을 맨 처음 언급했다.[13]

이집트와 인근 아프리카 지역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는 처음에는 유일한 대주교였다. 다른 대주교 교구가 세워지면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는 대주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3세기 중반에 알렉산드리아의 헤라클라스는 템미스의 주교를 폐위하고 교체함으로써 대주교로서의 권한을 행사했다.[14] 따라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는 4세기 초까지 각기 여러 주교 지방에 대한 오랫동안 인정받는 관할권을 가질 정도로 교회적으로 두드러지게 성장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이집트, 로마 리비아, 펜타폴리스에 대한 수위를 차지했다. 로마는 도시에서 100마일 이내의 지방에 대해 수위 주교 권한을 가졌다.[15]

2. 2. 니케아 공의회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325년)는 여섯 번째 규칙에서 "수도 대주교"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면서, 로마 제국의 속주에 따른 기존의 주교 관할 구역을 승인했다.[9] 또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의 세 주교좌가 이미 더 넓은 지역에 대한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공의회는 로마나 안티오크의 권한 범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알렉산드리아가 자신의 속주인 이집트를 넘어 권한을 갖는 지역을 분명히 언급하며 "알렉산드리아 주교가 모든 지역에 대해 권한을 갖는 이집트, 리비아, 펜타폴리스의 고대 관습"을 언급했다.[17]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의 더 넓은 권한에 대한 특별한 전통을 언급한 직후, 같은 규칙에서는 수도 대주교 아래의 조직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는 이전 두 규칙의 주제이기도 했다. 이 시스템에서 각 로마 속주의 수도(수도 대주교)의 주교는 속주의 다른 도시(보좌 주교)의 주교에 대해 특정 권리를 가졌다.[9]

존 H. 에릭슨의 해석에 따르면, 공의회는 각 속주가 자체 수도 대주교를 갖는 일반적인 조직 규칙에 대한 예외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특별한 권한을 보았으며, 이들의 주교는 실제로 여러 속주에 걸쳐 수도 대주교였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및 기타 속주의 특별한 전통을 언급한 후, 규칙 6은 즉시 수도 대주교 형태의 조직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는 이전 두 규칙의 주제이기도 했다.

이 공의회가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의 특별한 권한을 인정한 것은 세 베드로 주교좌(로마와 안티오크는 성 베드로에 의해, 알렉산드리아는 그의 제자 마르코 복음사가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전해짐) 이론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특히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 다섯 개의 펜타르키 주교좌 이론에 반대하여 지지되었다.[18]

공의회의 일곱 번째 규칙은 당시 Aelia라고 불렸던 예루살렘 주교에게 수도 대주교의 권한이 아닌 특별한 존경을 부여했으며,[19], 예루살렘은 수도이자 수도 대주교가 카이사레아였던 시리아 팔레스타이나 속주에 있었다.

2. 3. 니케아 공의회 이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새롭게 이름 붙이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 교회에서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는 로마 주교 다음가는 명예를 가질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새로운 로마이기 때문이다."[20]라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의 새로운 지위를 인정했지만, 자신의 교구 밖의 관할권까지 포함하지는 않았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는 동로마 제국을 이집트(알렉산드리아 관할), 동방 (안티오크 관할), 아시아 (에페소스 관할), 폰토스 (카이사레아 카파도키아 관할), 트라키아 (원래 헤라클레아 관할,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관할)의 5개 교구로 나누었다.[21] 또한 공의회는 주교들이 자신의 관할 구역 밖의 교회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면서, 각 교구 주교들의 관할 지역을 명확히 했다.[22]

콘스탄티노폴리스는 330년 제국의 수도 이전 이후, 헤라클레아에 대한 교회적 종속에서 벗어나 반세기 만에 로마 다음가는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상에 반대하며 5세기 전반에 걸쳐 두 교구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는 알렉산드리아를 지지하며 주요 교구는 로마를 첫 번째로 하는 세 곳의 사도좌라는 이론을 제시했다.[21]

서방 주교들은 테살로니카의 아스콜리우스를 제외하고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24] 라틴 교회가 이 공의회를 세계 공의회로 인정한 것은 6세기 중반까지였다고 알려져 있지만,[21] 교황 레오 1세와 그의 사절들이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령을 인용한 것을 보면 이보다 훨씬 전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25]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안티오키아의 간섭으로부터 키프로스 교회의 독립을 옹호했고,[27] 같은 시기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세 지역에 대한 대주교 권력을 얻는 데 성공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알렉산드리아의 펜타르키 총대주교의 지위를 약화시켰는데, 이는 기독교 인구 대다수가 단성론을 따랐기 때문이다.[21] 칼케돈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트라키아 외에도 폰토스와 아시아에 대한 권력을 확장하는 것을 인정했다. 공의회는 "아버지들이 구 로마의 왕좌에 정당하게 특권을 부여한 것은 그곳이 왕의 도시였기 때문"이며,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같은 고려를 받아 새로운 로마의 가장 거룩한 왕좌에 동등한 특권을 부여했다"는 근거로 이 결정을 정당화했다.[28]

교황 레오 1세는 공의회를 세계 공의회로 인정하고 교리적 법령을 확인했지만, 제28조는 니케아 공의회의 제6조에 위배되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21][29]

공의회의 제9조는 "주교 또는 성직자가 관할구의 대주교와 불화가 있다면, 교구의 엑사르크 또는 황제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왕좌에 의지하여 거기에서 재판을 받도록 한다"라고 선언했다.[30]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구상한 지역별 구조는 10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및 예루살렘의 주교들이 수장으로 있는 5개의 대규모 분할 체제로 변형되었다. 에페소스 공의회의 결정으로 키프로스는 안티오크 분할로부터 독립을 유지했으며, 이러한 배열은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에서 별도의 "카톨릭"이 발전한 제국 밖에는 적용되지 않았다.[21]

2. 4. 칼케돈 공의회 (451년)

칼케돈 공의회 (451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이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트라키아 뿐만 아니라 폰토스와 아시아 지역에 대한 교회 관할권을 인정받았다.[28] 이는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새로운 로마"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가 로마 주교 다음가는 명예를 가진다고 선언한 것에서 더 나아간 결정이었다.[20]

칼케돈 공의회는 이러한 결정을 "아버지들이 구 로마의 왕좌에 정당하게 특권을 부여한 것은 그곳이 왕의 도시였기 때문"이며,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폴리스도 "교회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숭고하게 여겨지고, 그녀 다음가는 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28]

그러나 교황 레오 1세는 이 결정에 반대했다. 그는 공의회 자체는 인정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권한 확대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 위배되며,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21][29] 레오 1세가 반대한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황제의 영구적인 거주지였기 때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1]

공의회 제9조는 "주교 또는 성직자가 관할구의 대주교와 불화가 있다면, 교구의 엑사르크 또는 황제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왕좌에 의지하여 거기에서 재판을 받도록 한다"고 선언했다.[30]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에 더 큰 특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펜타르키, 즉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의 다섯 주요 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 구조가 점차 구체화되었다.

3. 펜타르키 이론의 정립

펜타르키 이론은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부터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밀턴 V. 아나스토스에 따르면, 이 이론은 11세기부터 15세기 중반까지 가장 발전했지만, 그 기원은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8]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다섯 총대주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18] 680년 콘스탄티누스 4세가 소집한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다섯 총대주교 대표가 모두 참석하면 에큐메니컬 공의회로 인정된다고 해석했다.[21]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소집한 퀴니섹스트 공의회(692년)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가 로마 교구와 동등한 특권을 가지며 교회 문제에서 그 다음으로 존중된다고 명시했다. 그 뒤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교구가 따르도록 순서를 정했다.[36]

7세기와 8세기에 펜타르키는 교회의 무오성을 지지하는 다섯 기둥으로 비유되었으며, 다섯 감각처럼 모두 동등하고 독립적이어서 어느 한 쪽도 다른 쪽에 우위를 점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18] 그러나 비잔틴 제국은 로마 교황의 수위권 주장에 비판적이었으며, 교황 레오 1세교황 니콜라오 1세 등 로마 교황의 수위권 주장이 계속되자 아나스타시우스 비블리오테카리우스는 로마 총대주교가 다른 넷을 지배한다는 단서를 추가하여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했다.[18]

692년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순위가 매겨진 다섯 개의 고대 총대주교(펜타르키)는 다음과 같다.

다섯 개의 고대 총대주교 (펜타르키)
직함교회승인 / 추가 참고 사항
로마 총대주교로마 교황동방 정교회에 따르면 원래는 primus inter pares(동등한 자 중 으뜸)였으며,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인정받았다. 현재 1054년의 대분열 이후 동방 정교회에서는 주교 또는 총대주교 권한이 아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의 수장분열 이후 동방 정교회primus inter pares(동등한 자 중 으뜸)이며,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인정받았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모든 아프리카의 교황이자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인정받았다.
안티오크 총대주교근동의 안티오크 및 모든 동방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인정받았다.
예루살렘 총대주교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모든 아라비아의 예루살렘 정교 총대주교의 수장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인정받았다.


3. 1.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역할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1년에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의 주교들을 지칭하는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했으며, 이 다섯 교구의 주교들을 대주교보다 우위에 두었다.[21][33] 그는 이 다섯 총대주교의 중요성을 교리 공식화 과정에서 자주 강조했다.[18]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제국 갱신''(renovatio imperii) 계획에는 교회 문제뿐만 아니라 법전에서의 로마법 개정, 그리고 로마시를 포함한 서방의 부분적인 재정복도 포함되었다.[21][34]

680년 콘스탄티누스 4세가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소집했을 때,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총대주교 칭호를 부여한 다섯 주교 모두의 대표자들이 참석했기 때문에 공의회는 스스로를 에큐메니컬하다고 선언했다.[35] 이는 다섯 총대주교 모두의 대표자들이 참석하면 공의회가 에큐메니컬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21]

3. 2. 퀴니섹스트 공의회 (692년)

트룰로 공의회라고도 불리는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펜타르키의 순서가 명시되고 각 관구의 권한이 재확인되었다.[1]

3. 3. 펜타르키와 무오성

7세기와 8세기에 들어서면서 펜타르키는 교회의 무오성을 지지하는 다섯 기둥으로서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다섯 기둥 모두가 동시에 오류에 빠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21] 펜타르키는 인간의 신체에 있는 다섯 감각에 비유되었으며, 모두 동등하고 서로 완전히 독립적이며, 어느 쪽도 다른 쪽에 우위를 점하지 않았다.[18]

펜타르키에 대한 비잔틴의 견해는 강하게 반(反)로마적 성향을 띠었으며, 교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 발언권과 총대주교를 심판할 권리에 대한 로마의 주장에 반대하여 제시되었다.[18] 864년 로마에서 열린 시노드에서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로마의 승인 없이는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교황 하드리아노 2세(867–872)까지는 모든 동방 총대주교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교황은 없었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크의 총대주교만 인정했다.[21]

마지막 두 교황의 수석 고문인 아나스타시우스 비블리오테카리우스는 펜타르키를 인간 신체의 다섯 감각에 비유하는 비잔틴의 비교를 받아들였지만, 시력과 같은 로마 총대주교가 나머지 넷을 지배한다는 단서를 추가했다.[18]

3. 4. 비잔틴 제국과 펜타르키

펜타르키 이론은 비잔틴 제국에서 11세기부터 15세기 중반까지 가장 발전했지만, 그 기원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8]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의 다섯 총대주교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했으며,[18] 531년에는 이들 주교들을 지칭하는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했다.[21][33]

692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소집한 트룰로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구가 옛 로마 교구와 동등한 특권을 가지며, 교회 문제에서 그 다음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 뒤를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 교구가 따르도록 순서를 정했다.[36]

7세기와 8세기에 펜타르키는 교회의 무오성을 지지하는 다섯 기둥으로 비유되었으며, 다섯 감각처럼 모두 동등하고 독립적이어서 어느 한 쪽도 다른 쪽에 우위를 점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18]

그러나 펜타르키에 대한 비잔틴의 견해는 로마 교황의 권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었다. 비잔틴은 교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 발언권과 총대주교를 심판할 권리가 로마 교황에게 있다는 주장에 반대했다.[18] 교황 레오 1세는 446년에 이미 교회 전체에 대한 권위를 주장했고,[21][37] 864년 로마에서 열린 시노드에서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로마의 승인 없이는 에큐메니컬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다고 선언하는 등 로마 교황의 수위권 주장은 계속되었다.[21]

아나스타시우스 비블리오테카리우스는 펜타르키를 다섯 감각에 비유하는 비잔틴의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시력과 같은 로마 총대주교가 나머지 넷을 지배한다는 단서를 추가하여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옹호했다.[18]

692년 퀴니섹스트 공의회에서 순위가 매겨진 다섯 개의 고대 총대주교(펜타르키)는 다음과 같다.

다섯 개의 고대 총대주교 (펜타르키)
직함교회승인 / 추가 참고 사항
로마 총대주교로마 교황동방 정교회에 따르면 원래는 primus inter pares(동등한 자 중 으뜸)였으며,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인정받았다. 현재 1054년의 대분열 이후 동방 정교회에서는 주교 또는 총대주교 권한이 아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정교회의 수장분열 이후 동방 정교회primus inter pares(동등한 자 중 으뜸)이며,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인정받았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모든 아프리카의 교황이자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인정받았다.
안티오크 총대주교근동의 안티오크 및 모든 동방 그리스 정교회의 수장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인정받았다.
예루살렘 총대주교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모든 아라비아의 예루살렘 정교 총대주교의 수장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인정받았다.


4. 동서 대분열 이후의 펜타르키

1054년 동서 교회 분열[21]로 펜타르키는 로마를 제외한 넷으로 축소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주의는 이미 존재했다. 비잔틴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국의 수도이자 세계의 통치자이므로 총대주교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며, 황제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18] 이러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은 동서 대분열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4. 1. 이슬람의 발흥과 펜타르키

661년까지 라시둔 칼리파조는 이슬람의 초기 정복을 통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관할 구역을 점령했으며, 이 지역들은 이후 부분적, 일시적으로만 회복되었다.[39]

4. 2.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주의의 강화

동서 대분열 이후, 오두정치는 사두정치로 축소되었지만, 비잔틴 제국 내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21] 비잔틴 작가들은 제국의 수도이자 세계의 통치자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총대주교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며, 황제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고 보았다.[18]

요한 필로포노스(c. 490 – c. 570)는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제국의 수도가 이전되면서 교회 내 수위권도 함께 이전되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포티오스 1세(c. 810 – c. 893)가 이 주장을 발전시켰으며, 칼리스토스 1세, 필로테오스, 닐루스 (1379–1388) 등 그의 후계자들도 이를 계승하였다.[18]

1142~43년에 닐루스 독사파트리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의 수위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수도 이전과 로마가 야만족에게 함락된 것을 근거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로마로부터 수위권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비잔틴의 권위가 다른 세 개의 동방 총대주교에게만 국한된다고 보았다. 칼리스토스 총대주교 역시 약 200년 후 같은 주장을 펼쳤다. 즉,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향권에서 제외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동등한 위치에 놓였다는 것이다. 닐루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의 주교만이 세계 총대주교라고 불렸다는 점을 들어 이를 뒷받침했다.[18]

5. 다른 총대주교구의 등장

시메온 1세 치세 (893–927) 동안의 불가리아 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927년에 불가리아 정교회 (프레슬라프 대교구)의 총대주교 지위를 인정했다.[40] 이로써 불가리아 정교회는 정교회에 의해 인정된 제국 외부의 최초의 자율 총대주교가 되었다. (동방 교회와 오리엔트 정교회의 총대주교에게는 인정을 부여하지 않았다.) 조지아 정교회는 486년에 자율 교회가 되었으며 1010년에 총대주교로 승격되었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1219년에 자율 교회가 되었고 1346년에 총대주교로 승격되었다 (처음에는 분열주의로 간주되었지만).[40] 러시아 정교회 (모스크바 대교구)는 1589년에 총대주교로 승격된 것으로 인정받았다.[40]

오늘날 동방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불가리아 총대주교, 조지아 총대주교, 예루살렘 총대주교, 러시아 총대주교, 루마니아 총대주교, 세르비아 총대주교의 9개 총대주교를 포함한다.

로마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 외에도, 베네치아 총대주교, 리스본 총대주교, 고아 총대주교는 각각 1451년, 1716년, 1886년에 설립되어 총대주교 지위를 가지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총대주교, 알렉산드리아 라틴 총대주교, 안티오키아 라틴 총대주교 등 원래 오대 교구의 나머지 지역에도 라틴 총대주교가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1964년에 폐지되었다.[40]

6. 현대의 펜타르키

로마 가톨릭교회칼케돈 공의회에 따른 서열에 따라 로마를 시작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그 뒤를 잇는 펜타르키를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오리엔트 정교회는 세 개의 베드로 좌 이론을 고수하며, 아시리아 동방 교회는 펜타르키를 인정하지 않는다.

6. 1. 동방 정교회의 관점

동방 정교회는 펜타르키 이론을 교회론적 주요 개념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펜타르키의 역사성과 현실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6. 2. 가톨릭 교회의 관점

가톨릭 교회는 펜타르키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며, 칼케돈 공의회에 따른 서열에 따라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가 바로 뒤를 잇는다)를 시작으로 하는 동등한 펜타르키로 본다.

6. 3. 펜타르키 관구의 현황

다음은 펜타르키 관구의 현임 총대주교와 그들을 인정하는 교회 목록이다.

관구가톨릭 교회동방 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
로마프란치스코 (라틴 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바르톨로메오스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사학 2세 마샬리안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알렉산드리아이브라힘 이삭 시드락 (콥트 가톨릭 교회)테오도로스 2세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정교회)타와드로스 2세 (콥트 정교회)
안티오키아요한 10세 (안티오크 그리스 정교회)
예루살렘피에르바티스타 피차발라 (라틴 교회)테오필로스 3세 (예루살렘 그리스 정교회)누르한 마누기안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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