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하 (오호 십육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夏)는 407년 유발발이 건국한 오호 십육국 시대의 국가이다. 유발발은 옛 철불흉노와 선비족을 규합하여 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대선우와 대하천왕을 자칭하며 하나라를 건국했다. 하나라는 오르도스 지역을 평정하고, 북위와 대립하며 북연, 북량 등과 동맹을 맺었다. 418년에는 관중 지역을 점령하고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이후 내분과 북위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431년 멸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5세기에 멸망한 나라 - 서로마 제국
    서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서쪽 지역으로, 내외부적 요인으로 쇠퇴하여 476년에 멸망했지만, 법, 문화, 종교 등은 서유럽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 5세기에 멸망한 나라 - 수아송 왕국
    5세기 후반 갈리아 북서부에 존재했던 수아송 왕국은 서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이었으나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하며 아이기디우스와 그의 아들 시아그리우스가 통치했으나, 486년 프랑크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멸망하고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다.
하 (오호 십육국)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423년의 하
423년의 헬리안 샤
기본 정보
국명하 (夏)
다른 이름철불 (鐵弗, Tiěfú)
존속 기간407년 – 431년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통만성 (418년–427년)
상귀 (上邽) (427년–428년)
핑량 (428년–430년)
역사
주요 사건헬리안 봅의 황제 칭칭 (418년)
통완 함락 (427년 7월 11일)
건국407년
멸망헬리안 딩의 죽음 (431년 5월 13일)
주요 인물
황제혁련발발 (407년–425년)
혁련창 (425년–428년)
혁련정 (428년–431년)
언어 및 종교
공용어흉노어
종교불명
화폐
통화불명
면적 및 인구
면적불명
인구불명
이전 및 이후
이전 국가후진
서진
이후 국가북위
토욕혼
유송
현재 국가
현재 영토중국

2. 역사

407년 유발발은 철불흉노선비 부족들을 규합하여 후진에서 독립하고 대선우·대하천왕을 자칭하며 하나라를 건국했다. 하나라는 오르도스 전역을 평정했으며, 413년에는 흉노의 성씨인 혁련씨로 성을 바꾸고 통만성을 축조하며 세력을 키웠다. 당시 중원의 강국이었던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414년 북연과 동맹을 맺고 북위를 공격하여 415년까지 병주 일대를 점령했으며, 같은 해 북량과 동맹하여 후진 및 서진과 대립하였다.

417년, 관중의 후진이 동진의 유유에게 멸망하자, 하나라군은 남하하여 동진의 후방 수비대를 격파하고 418년, 장안 등 관중의 여러 을 점령했다. 혁련발발은 제위에 올라 통만성을 수도로 하고, 장안을 남도(南都)로 정하였으며 419년에 진흥이라 개원하였다. 하나라의 영역은 관중, 오르도스, 병주 남쪽에 이르렀고, 토욕혼·북량을 복속시켜, 화북 서쪽에서 대세력을 구축하였다.

424년, 혁련발발이 장남 황태자 혁련괴(赫連璝)를 폐하고 4남 혁련륜(赫連倫)을 태자로 삼자, 혁련괴가 반란을 일으켜 내분이 일어났다. 혁련발발은 425년에 사망했고, 이후 북위의 공격과 내분으로 인해 하나라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426년부터 북위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427년에는 수도 통만성이 함락되었다.[1] 428년에는 혁련창이 사로잡히면서 사실상 정권이 붕괴되었다. 혁련창의 동생 혁련정이 저항을 이어갔으나, 430년 북위의 공격으로 평량까지 함락되면서 하나라는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 431년, 혁련정이 토욕혼에게 사로잡히면서 하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2. 1. 건국 이전

는 남흉노 지도자 거비의 후손인 철불부 출신의 유발발이 건국하였다. 철불부는 흉노인 아버지와 선비족 어머니를 둔 혼혈 부족으로, 오환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산서성 일대에서 활동하다 유호 대에 이르러 서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탁발선비에게 진압당했다. 이후 철불부는 삭방군으로 이동하여 한조, 후조, 전진 등 여러 국가에 복속과 반란을 반복했다.

376년, 철불부의 수장 유위진은 전진을 도와 대를 정벌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비수 전투 이후 전진이 쇠퇴하자 386년 삭방을 재점령했다. 그러나 391년 북위와의 전쟁에서 유위진이 사망하면서 철불부는 멸망 위기에 처했다. 유위진의 아들 유발발은 후진으로 망명하여 재기를 도모하였다.

2. 1. 1. 철불부의 형성

나라의 통치자들은 남흉노 지도자 거비의 후손인 철불부 출신이었다. 거비는 선우 강거의 형제로서 유연씨 씨족의 일원이었지만, 나중에는 한나라 왕자 출신으로 흉노 귀족이 된 유진백(劉進伯)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196년, 거비는 군벌 조조를 도와 헌제를 허창으로 호송했고, 216년에는 조조에 의해 산서성의 남흉노 오부(五部)를 감독하는 자리에 임명되었다. 흉노 황실은 한나라 공주와의 ''화친'' 결혼을 통해 한나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거비의 가족은 "유"(劉) 성을 사용했다.[6]

309년, 거비의 손자 유호가 아버지 유고생연을 계승하여 추장이 되었고, 그의 부족의 이름을 "Tiefu(철불)"라고 지었다. "Tiefu"라는 단어는 흉노인 아버지와 선비족 어머니를 둔 사람들을 지칭하며, 이는 이 부족이 선비족과 혼합되었음을 나타낸다. Tiefu는 또한 오환으로 알려졌는데, 4세기에는 "잡다한 ''호''" 또는 "''잡호''"를 뜻하는 또 다른 용어였다.

310년, 유호는 서진 왕조에 반란을 일으켰다. 탁발-선비 부족은 서진과 동맹을 맺고 그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대의 봉토를 보상으로 받았다. 유호는 서쪽으로 도망쳐 삭방군으로 갔고, 한조 황제 유총은 그에게 누번공의 칭호를 주었다.

Tiefu는 삭방에 수년 동안 거주했다. 유호는 대와 전쟁을 벌였지만 반복적으로 패배했고, 한때 만리장성에서 도망쳐야 했다. 341년 그의 아들 유오환이 그를 계승했고 즉시 대와 결혼 동맹을 맺었다. 한편, 그는 또한 걸족이 이끄는 후조 왕조에 복종했다. 356년 그의 형제 유엘루투가 그를 계승했지만, 358년 오환의 아들 유희무기에 의해 축출되었다. 359년 희무기가 사망한 후, 그의 형제 유위진이 그의 아들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유위진은 대와 저족이 이끄는 전진 사이에서 충성을 번갈아 가며 바꿨다. 376년 대에게 여러 차례 패배한 후, 그는 전진을 설득하여 대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도록 했고, 그가 안내자로 나섰다. 전진은 그해 대를 정복했지만, 영토를 분할할 때 유위진은 전진이 사촌 유고련에게 더 많은 통제권을 넘긴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패배하여 오르도스 사막 서쪽의 황하를 건너야 했고, 그곳에서 전진에 다시 복종했다.

비수 전투 이후 전진이 붕괴되면서, 유위진은 386년에 삭방을 재점령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탁발도 그들의 국가를 부활시켰는데, 현재는 북위로 알려져 있다. Tiefu는 처음에는 북위에 위협이 되었지만, 392년에 유위진이 죽고 북위의 반격으로 부족의 권력 기반이 파괴되었다. 유위진의 아들 유발발은 망명하여 선비족 추장 모이기간(沒弈干)의 보호를 받아 고평(高平; 현재의 영하 회족 자치구 고원시)에 머물렀다.

2. 1. 2. 유발발의 등장

391년 유위진이 북위와의 전쟁에서 사망하자, 유발발은 선비족 추장 모이기간(沒弈干)의 보호를 받으며 고평(高平, 현재의 영하 회족 자치구 고원시)에 망명했다. 402년, 유발발과 모이기간은 북위의 압력으로 강족이 세운 후진으로 도망쳤다. 후진의 통치자 요흥은 유발발의 외모와 재능에 감명받아 그를 장군으로 삼고, 삭방 방어를 맡겼다. 요흥은 유발발의 폭력적인 행동에 대한 관리들의 경고를 무시했다. 407년, 유발발은 후진과 북위 간의 평화 회담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유연으로부터 조공받은 말 8,000마리를 몰수하고 고평으로 돌아가 모이기간을 죽이고 그의 군대를 장악했다.

2. 2. 하나라 건국과 발전

407년, 유발발은 철불흉노선비 부족들을 모아 후진에서 독립하고 대선우·대하천왕을 자칭하며 하나라를 건국했다. 그 해 하나라는 오르도스 전역을 평정했다. 413년에는 흉노의 성씨인 혁련씨로 성을 바꾸고 통만성을 축조하는 등 세력을 키웠다. 414년에는 북연과 동맹을 맺고 북위를 공격, 415년까지 병주 일대를 점령했다. 같은 해 북량과 동맹하여 후진 및 서진과 대립했다.

417년, 관중의 후진이 동진의 유유에게 멸망하자, 418년 하 군은 남하하여 동진군을 격파하고 장안 등 관중의 여러 성을 점령했다. 같은 해, 혁련발발은 황제에 즉위하고, 이듬해 419년에 진흥으로 개원하고 통만성을 도읍으로 정했다. 하나라의 영역은 관중, 오르도스, 병주 남쪽에 이르렀고, 토욕혼·북량을 복속시켜 화북 서쪽에 큰 세력을 구축하였다.

하 왕조의 통치자들은 남흉노 지도자 거비의 후손인 Tiefu 부족 출신이었다. 196년, 거비는 군벌 조조를 도와 헌제를 허창으로 호송했고, 216년에는 조조가 그를 산서성의 남흉노 오부(五部)를 감독하게 했다. 흉노 황실은 한나라 공주와의 ''화친'' 결혼을 통해 한나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거비의 가족은 "유"(劉) 성을 사용했다.

통만성의 잔해


흉노족이 우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것처럼, 유발발은 하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대하국을 건국하고 천왕과 대선우의 칭호를 사용했다. 그는 혼인 동맹을 거부한 남량과 잠시 전투를 벌여 크게 패배시켰다. 북위에 대한 앙심에도 불구하고 유발발은 주로 후진에 군사력을 집중했다. 그는 초기에 수도를 건설하는 대신, 유랑하는 군대를 이끌고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진의 북쪽 국경을 공격하는 방식을 택했다.

혁련발발 치세인 424년에 조각된 산시성 시안(현대 장안)의 석마


419년, 혁련발발은 스스로를 하 황제로 격상시켰다. 비록 고대 수도인 장안이 그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그는 그곳에 남부 행정부를 설치하고 북위가 자신이 부재한 동안 오르도스를 침략할 것을 우려하여 통만성을 수도로 유지했다.

묘호시호이름재위 기간연호
철불부 (309–407)
유호309–341
유무항341–356
유알루두356–358
유실물기358–359
유위진359–391
유발발391–407
하 (407–431)
세조무열혁련발발
(유발발과 동일 인물)
407–425룡승(龍升) 407–413
봉상(鳳翔) 413–418
창무(昌武) 418–419
진흥(眞興) 419–425
혁련창425–428승광(承光) 425–428
혁련정428–431승광(勝光) 428–431


2. 2. 1. 건국과 초기 발전

407년 유발발은 옛 철불흉노선비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후진에게서 독립하고 대선우·대하천왕을 자칭하며 하나라를 건국하였다. 하나라는 오르도스 전역을 평정하였으며, 413년에는 본래 흉노의 성씨인 혁련씨로 성을 바꾸고 통만성을 축조하며 세력을 키웠다. 당시 중원의 강국이었던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414년에는 북연과 동맹을 맺고 북위를 공격하여 415년까지 병주 일대를 점령하였다. 415년에는 북량과 동맹하여 후진 및 서진과 대립하였다.

2. 2. 2. 영토 확장과 주변국과의 관계

407년 유발발은 옛 철불흉노선비의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후진에게서 독립하고 대선우(大單于)·대하천왕(大夏天王)이라 자칭하며 하나라를 건국하였다. 하나라는 오르도스 전역을 평정하였으며, 413년에는 본래 흉노의 성씨인 혁련씨로 성을 바꾸고 통만성을 축성하며 세력을 키웠다. 당시 중원의 강국이었던 북위에 대항하기 위해 414년에는 북연과 동맹을 맺고 북위를 공격하여 415년까지 병주 일대를 점령하였다. 415년에는 북량과 동맹하여 후진 및 서진과 대립하였다. 417년, 관중의 후진이 동진의 유유에 의해 멸망당하자, 하나라군은 남하하여 동진의 후방 수비대를 격파하고 418년, 장안 등 관중의 여러 점령했다. 혁련발발은 제위에 올라 통만성을 수도로 하고, 장안을 남도(南都)로 정하였으며 419년에 진흥이라 개원하였다. 하나라의 영역은 관중, 오르도스, 병주 남쪽에 이르렀고, 토욕혼·북량을 복속시켜, 화북 서쪽에서 대세력을 구축하였다.

2. 3. 하나라의 쇠퇴와 멸망

424년, 혁련발발이 장남 황태자 혁련괴(赫連璝)를 폐하고 4남 혁련륜(赫連倫)을 태자로 삼자, 혁련괴가 반란을 일으켜 내분이 일어났다. 혁련발발은 425년에 사망했고, 이후 북위의 공격과 내분으로 인해 하나라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426년부터 북위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고, 427년에는 수도 통만성이 함락되었다.[1] 428년에는 혁련창이 사로잡히면서 사실상 정권이 붕괴되었다.

혁련창의 동생 혁련정이 저항을 이어갔으나, 430년 북위의 공격으로 평량까지 함락되면서 하나라는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 431년, 혁련정이 토욕혼에게 사로잡히면서 하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2. 3. 1. 내분과 북위의 공격

424년 혁련발발은 장안에 주둔한 병력을 지휘하던 장남 황태자 혁련괴(赫連璝)를 폐하고 4남 혁련륜(赫連倫)을 태자로 삼았다. 이에 혁련괴는 장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통만성을 공격하였으나, 혁련륜을 살해하고 3남 혁련창에게 패하여 죽었다. 혁련발발은 혁련창을 태자로 삼았다. 425년 혁련발발이 죽고 혁련창이 즉위하였다.

426년, 혁련창은 서진을 공격하여 수도 포한을 함락하고 서평까지 진격하였으나, 본국이 비어있는 틈을 타 쳐들어온 북위에게 관중의 여러 성을 빼앗겼다.[1] 427년에는 북위의 2차 원정군이 수도 통만성을 함락시켰다.[1] 혁련창은 통만성을 탈출해 안정을 수도로 삼아 저항을 계속했으나, 각지에서 북위에게 패배하였으며 428년 혁련창은 북위군에 사로잡혔다.[1]

2. 3. 2. 혁련정의 저항과 멸망

428년, 혁련창의 동생 혁련정평량으로 도망쳐 대선우에 즉위하고, 각지의 패잔병을 규합해 관중을 회복하고 통만성을 제외한 오르도스 지역의 여러 성들을 탈환하였다. 430년, 과 동맹을 맺고 통만성 탈환에 나섰으나, 북위는 3차 원정군을 파견해 이를 격파하고 평량까지 함락시켰다. 혁련정은 패잔병을 이끌고 상규(上邽)로 도망쳐서 수도로 삼았다. 431년 1월, 혁련정은 재기를 위해 서쪽으로 진격하여 남안의 서진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이어서 전군을 이끌고 북량 원정에 나섰다. 6월, 하나라군은 황하를 건너는 도중 복속했던 토욕혼에게 습격을 받아 괴멸당하고, 혁련정도 사로잡혀 하나라는 멸망했다. 혁련정은 432년에, 혁련창은 434년에 각각 북위에 의해 살해당했다.

3. 역대 군주

하 (오호 십육국)나라의 역대 군주와 재위 기간은 다음과 같다.

묘호시호이름재위 기간연호
철불부 (309–407)
유호309–341
유무항341–356
유알루두356–358
유실물기358–359
유위진359–391
유발발391–407
하 (407–431)
세조무열혁련발발
(유발발과 동일 인물)
407–425룡승(龍升) 407–413
봉상(鳳翔) 413–418
창무(昌武) 418–419
진흥(眞興) 419–425
혁련창425–428승광(承光) 425–428
혁련정428–431승광(勝光) 428–431



하나라의 군주들은 남흉노 지도자 거비의 후손인 Tiefu 부족 출신이었다.[1] 거비는 조조를 도와 헌제를 허창으로 호송하는데 기여했으며, 그의 가족은 한나라와의 ''화친'' 결혼을 통해 "유"(劉) 성을 사용했다.[1]

309년, 거비의 손자 유호가 부족장이 되었고, 부족의 이름을 "Tiefu"라고 지었다.[2] Tiefu는 서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탁발-선비 부족에게 진압되었다.[3] 이후 Tiefu는 삭방군을 근거지로 삼아 대와 대립했다.[4]

유위진은 전진북위 사이에서 충성을 번갈아 바꿨다.[5] 비수 전투 이후 전진이 붕괴되자 386년에 삭방을 재점령했지만, 392년에 북위의 반격으로 부족의 권력 기반이 파괴되었다.[6]

유발발후진으로 망명하여 요흥의 신임을 얻었다. 407년, 발발은 후진에 반기를 들고 하 왕조를 건국했다. 그는 통만성을 건설하고, 무우스 사막 남쪽 가장자리에 수도로 정했다.

419년, 헬리안 포보는 스스로를 하 황제로 격상시켰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포보는 극도로 잔혹한 통치자로 묘사된다. 424년, 그의 아들들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3. 1. 하나라 군주 목록

이름재위 기간
거비2세기 말경 - 3세기 전반경
고승원251년 - 309년
유호309년 - 351년
유무환351년 - 356년
유알두356년 - 358년
유실물기358년 - 359년
유위진359년 - 391년
혁련발발407년 - 425년
혁련창425년 - 428년
혁련정428년 - 431년


4. 하나라의 문물

현존하는 하나라의 문물로는 통만성 유적, 대래성 유적, 태하진흥전(419년), 전구묘지(420년), 대하석마(424년), 시문조상(429년)이 있으며, 기년문서로 돈황, 투르판 문서 수 점이 있다. 또한 현존하지 않는 것 중에는 대하용작도(413년) 및 통만성 남비(419년) 등이 알려져 있다.[1]

5. 주요 인물

이름역할비고
혁련발발하나라 초대 군주407년 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하나라 건국, 천왕, 대선우 칭호 사용. 413년 성을 유(劉)에서 혁련(赫連)으로 변경, 통만성 건설.
혁련창혁련발발의 아들424년 내전 끝에 태자 책봉
혁련정혁련발발의 아들
힐간아리선비 힐간부 부족장 일족 출신혁련발발을 숨겨준 인연으로 하나라 건국 후 어사대부, 양공, 장작대장 역임, 통만성 축조 담당
오락고하나라의 어사중승외교 담당, 북연, 북량과의 동맹 성사
왕매덕원래 후진의 참군, 혁련발발에게 투항418년 관중 평정전에서 큰 공, 도관상서, 관군장군, 하양후 임명
혁련위벌혁련발발의 동생, 거기대장군, 북평공서정군 담당, 426년 서진 공격 (원천, 남안, 포한, 서평 함락), 431년 서진 멸망
혁련나물려혁련발발의 아들, 칠병상서431년 하나라 멸망 후 북위에 항복, 북부 막불 역임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6] 서적 新唐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