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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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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륜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과 교류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이인임의 측근으로 활동하다가,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 수립에 기여했다. 태종의 측근으로서 서얼 차별을 건의하고, 불교를 비판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말년에는 영의정부사에 이르렀으며, 사후 태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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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하륜
한자 이름河崙
로마자 표기Ha Ryun
호정 (浩亭)
대림(大臨), 중림(仲臨)
출생1347년 음력 12월 22일
출생지고려 경상도 진주
사망1416년 음력 11월 6일 (향년 70세)
사망지조선 함길도 정평군 (객사)
본관진주(晉州)
시호문충(文忠)
학력 및 경력
학력1365년 문과 급제
주요 경력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영삼사사(領三司事)
영의정
작위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종교유교(성리학)
가족 관계
배우자성주 이씨 (판서 이인미의 딸)
자녀4남 2녀
아버지하윤린
어머니진주 강씨 부인 (강승유의 딸)
친척 관계할아버지: 하시원
장인: 이인미
처백부: 이인복
처백부: 이인임
처숙부: 이인립, 이인달, 이인민
외할아버지: 강승유
사촌 처남: 이제
6촌 처남: 이숭인
관직
영의정 임기 시작1414년 5월 6일
영의정 임기 종료1415년 6월 13일
영의정 이전성석린
영의정 이후성석린
영의정 임기 시작1409년 11월 17일
영의정 임기 종료1412년 9월 26일
영의정 이전이서
영의정 이후성석린
영의정 임기 시작1408년 3월 8일
영의정 임기 종료1409년 9월 18일
영의정 이전이화, 의안대군
영의정 이후이서
좌의정 임기 시작1412년 9월
좌의정 임기 종료1414년 5월 6일
좌의정 이전성석린
좌의정 이후남재
좌의정 임기 시작1405년 2월 14일
좌의정 임기 종료1407년 8월 6일
좌의정 이전조준
좌의정 이후성석린
좌의정 임기 시작1402년 10월 30일
좌의정 임기 종료1404년 7월 12일
좌의정 이전김사형
좌의정 이후조준
우의정 임기 시작1400년 9월 25일
우의정 임기 종료1401년 4월 14일
우의정 이전민제
우의정 이후이서

2. 생애

하륜은 1347년(고려 충목왕 3년) 하공진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하시원(河恃源)이며,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이인복과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정도전, 정몽주, 조준, 권근 등과 교류하였다. 1360년(공민왕 9년)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시험관 이인복은 이인미의 딸을 하륜과 결혼시켰다.

1367년(공민왕 16년) 춘추관 검열, 공봉이 되었고, 1368년(공민왕 17년) 감찰규정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신돈 문객인 양전부사의 비행을 탄핵하고 신돈을 공박하다 지영주군사로 좌천, 파직되었다. 1371년(공민왕 20년) 신돈 사형 후 복직, 지영주군사가 되었다. 영주목을 잘 다스려 안렴사 김주가 치적을 높이 평가했다. 고공좌랑, 판도좌랑을 거쳐 교주, 강릉도찰방이 되었다.

하륜은 이인복의 동생 이인임과 가깝게 지내며 그의 심복이 되었다. 임견미, 염흥방 등과도 친하게 지냈으며, 특히 문신을 싫어하던 임견미에게 임기응변의 술수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1] 1374년 제릉서령, 사헌부지평이 되었다.[1]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한 인연으로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냈다. 1388년 이인임이 죽었을 때 전의부에서 그의 시호를 황무(荒繆)라는 악시(惡諡)로 정하자 담당자에게 항의하기도 했다.[1]

1380년 어머니 진주 강씨의 상을 당해 사직했다가,[1] 1383년 3년 상을 마친 뒤 사간원우부대언, 우대언, 전리판서, 밀직제학을 역임했다. 퇴청 후에는 서실을 열어 문하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1] 1385년 명나라 사신 주탁(周卓) 등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았다.[1] 1388년 첨서밀직사사가 되었으나, 최영의 요동 공격을 반대하다 양주(襄州)로 유배되었다.[1]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복직, 관작을 회복했다.[1] 가을에는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가짜라고 공격했다가 역공격을 받고 광주, 울주 등지로 추방되었다.[1]

윤이 이초의 변이 일어났을 때 복직하였고, 1391년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다.[1] 정몽주, 이숭인, 권근, 길재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여 초기에는 조선 건국에 반대했으나,[1]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 등과 함께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다.[1]

이후 정안대군(태종)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정안대군이 태조 이성계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환궁을 맞이할 때, 하륜은 차일(遮日, 천막)의 기둥을 굵고 오래된 나무로 만들도록 조언했다. 태조가 정안대군에게 활을 쏘았을 때, 정안대군은 이 기둥 뒤로 피하여 목숨을 구했고, 화살이 꽂힌 자리에서 '살꽂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또한 태조의 환영 연회에서는 내관에게 곤룡포를 입혀 대신 참석하게 하여 태조의 철퇴 공격을 피하게 했다.

1416년(태종 16년) 노환으로 치사(致仕)하였다. 태종은 이를 만류하였으나, 고령과 병을 이유로 거듭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태종은 교서를 내려 진주의 전세 100결을 하사하였으나, 사적으로 쓰지 않고 향사당(鄕射堂)을 지어 교서를 보관하고 전세는 동리 노인들을 위해 사용하게 했다. 향사당에는 태종이 직접 쓴 벽오당(碧梧堂)이라는 현판이 걸렸다.[1] 진산부원군에 임명되어 왕명을 받아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침을 순찰하기 위해 함길도로 떠났고, 그해 11월 6일 한성으로 돌아오던 중 정평군 관아에서 사망했다.

2. 1. 생애 초기

1347년(고려 충목왕 3년) 하윤린(河允潾)과 진주강씨(晉州姜氏)사이에서 태어났다. 하공진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하시원(河恃源)이며, 어머니 진주강씨는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하륜의 출생지-진주성 영남포정사 옆


이색 초상


이인복과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정도전, 정몽주, 조준 등을 만났다. 하륜은 정몽주를 어려워했으나 정도전과는 가깝게 지냈고, 권근과도 친분이 있었다. 1360년(공민왕 9년)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국자감 유생이 되었다.

1365년(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시험관 이인복은 이인미의 딸을 하륜과 결혼시켰다. 동지공거는 이색이었다.

1367년(공민왕 16년) 춘추관 검열, 공봉이 되었고, 1368년(공민왕 17년) 감찰규정에 시보되었다. 이듬해 감찰규정으로 신돈 문객인 양전부사의 비행을 탄핵하고 신돈을 공박하다 지영주군사로 좌천, 파직되었다.

1371년(공민왕 20년) 신돈 사형 후 복직, 지영주군사가 되었다. 영주목을 잘 다스려 안렴사 김주가 치적을 높이 평가했다. 고공좌랑, 판도좌랑을 거쳐 교주, 강릉도찰방이 되었다.

2. 1. 1. 출생과 소년기

호정 하륜은 1347년(고려 충목왕 3년)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낸 하윤린(河允潾)과 진주강씨(晉州姜氏)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공진의 후손으로, 하식(河湜)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식목녹사(拭目錄事)를 지낸 하시원(河恃源)이다. 어머니 진주강씨는 증 찬성사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초은 이인복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이어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선배인 정도전, 정몽주, 조준 등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하륜은 10년 연상인 정몽주를 무척 어려워했으나 정도전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그와 가깝게 지냈다. 또한 후에 정몽주의 문하생 중의 한사람인 권근과도 가깝게 지냈다. 1360년(공민왕 9년)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 국자감의 유생이 되었다.

2. 1. 2.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365년(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시험관이기도 했던 스승 이인복은 하륜의 사람됨이 큰 것을 보고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결혼시켰다. 또한 당시의 동지공거 중 한 사람은 그의 스승이었던 이색이었다.

1367년(공민왕 16년) 춘추관 검열(檢閱)ㆍ공봉(供奉)이 되었고, 1368년(공민왕 17년)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시보(試補)되었으며, 이듬해 감찰규정으로, 그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신돈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했다. 그리고 신돈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짐을 들어 신돈을 공박하다가 지영주군사로 좌천되고 신돈에 의해 파직되었다.

1371년(공민왕 20년) 신돈이 사형당하자 복직되어 다시 지영주군사가 되었으며, 이때에 영주목(榮州牧)을 잘 다스려 안렴사 김주(金湊)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여 보고했다. 이어서 고공좌랑(考功佐郞)을 거쳐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서 교주(交州)ㆍ강릉도찰방(江陵道察訪)이 되었다.

2. 2. 정치 활동과 관료 생활

하륜은 이인복의 동생 이인임과 가깝게 지내며 그의 심복이 되었다. 임견미, 염흥방 등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특히 문신을 싫어하던 임견미에게 임기응변의 술수를 가르쳐 주기도 하며 비상한 지혜를 인정받았다.[1]

1374년 제릉서령(諸陵署令), 사헌부지평이 되었다.[1]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한 인연으로 공민왕 말년부터는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냈다. 이후 신진사대부와 가까워지면서 이인임과 다소 멀어졌지만, 1388년 이인임이 죽었을 때 전의부에서 그의 시호를 황무(荒繆)라는 악시(惡諡)로 정하자 담당자에게 항의하기도 했다.[1]

1380년 어머니 진주 강씨의 상을 당해 사직했다가,[1] 1383년 3년 상을 마친 뒤 복직하여 사간원우부대언, 우대언, 전리판서, 밀직제학을 역임했다. 퇴청 후에는 서실을 열어 문하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1]

1385년 명나라 사신 주탁(周卓) 등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았다.[1] 1388년 벼슬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으나, 최영의 요동 공격을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며 적극 반대하다 양주(襄州)로 유배되었다.[1]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복직, 관작을 회복했다.[1] 가을에는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가짜라고 공격했다가 역공격을 받고 광주, 울주 등지로 추방되었다.[1]

윤이 이초의 변이 일어났을 때 복직하였고, 1391년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다.[1] 스승 이색과 동문인 정몽주, 이숭인, 권근, 길재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여 초기에는 조선 건국에 반대했다.[1] 그러나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 등과 함께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다.[1]

이후 정안대군(태종)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여러 일화들을 남겼다. 정안대군이 태조 이성계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환궁을 맞이할 때, 하륜은 차일(遮日, 천막)의 기둥을 굵고 오래된 나무로 만들도록 조언했다. 태조가 정안대군에게 활을 쏘았을 때, 정안대군은 이 기둥 뒤로 피하여 목숨을 구했고, 화살이 꽂힌 자리에서 '살꽂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또한 태조의 환영 연회에서는 내관에게 곤룡포를 입혀 대신 참석하게 하여 태조의 철퇴 공격을 피하게 했다.

2. 2. 1. 권문세족과의 관계

그는 스승 이인복이 동생인 이인임과 친하지 않은 것과 달리, 이인임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심복이 되었다. 또한 임견미, 염흥방 등과도 가깝게 지냈는데 하륜은 이인임의 측근 중에서도 유난히 문신을 싫어하던 임견미에게 임기응변의 술수를 간언하기도 했고, 비상한 지혜를 인정받기도 했다.[1]

1374년 제릉서령(諸陵署令), 사헌부지평이 되었다.[1] 그는 이색의 문하에서도 수학한 바 있어 이 연고로 공민왕 말년부터는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이후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면서 이인임과 다소 멀어졌지만 훗날 1388년에 이인임이 죽었을 때에 전의부에서 그 시호를 황무(荒繆)라고 하여 악시(惡諡)를 올리자 시호를 올리는 담당자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1]

2. 2. 2. 신진사대부 활동

그는 스승 이인복이 동생인 이인임과 친하지 않은 것과 달리, 이인임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심복이 되었다. 또한 임견미, 염흥방 등과도 가깝게 지냈는데 하륜은 이인임의 측근 중에서도 유난히 문신을 싫어하던 임견미에게 임기응변의 술수를 간언하기도 했고, 비상한 지혜를 인정받기도 했다.[1]

1374년 제릉서령(諸陵署令), 사헌부지평이 되었다.[1] 그는 이색의 문하에서도 수학한 바 있어 이 연고로 공민왕 말년부터는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1] 이후 전리정랑(典理正郎)·전교서부령 지제교(典校署副令知製敎)·전의감부령(典儀監副令)·전법서총랑(典法署摠郎)·보문각직제학·판도서총랑(版圖署摠郎) 등을 거쳐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로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전리총랑(典理摠郎), 전교서령(典校署令)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했으나 1380년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1]

그 뒤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면서 이인임과 다소 멀어졌지만 훗날 1388년에 이인임이 죽었을 때에 전의부에서 그 시호를 황무(荒繆)라고 하여 악시(惡諡)를 올리자 시호를 올리는 담당자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1]

1380년 어머니 진주강씨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1] 1383년 어머니의 3년 상을 마친 뒤 복직, 사간원우부대언, 우대언, 전리판서, 밀직제학을 역임했다.[1] 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퇴청 후에는 별도의 서실을 열고 문하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1]

1385년명나라의 사신 주탁(周卓) 등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았다.[1] 1388년 벼슬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러 1388년 최영의 요동 공격을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며 비판, 적극 반대하다가 양주(襄州:지금의 양양군)로 유배되었다.[1]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복직, 관작을 회복했다.[1] 그 해 가을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가 가짜라고 공격하였다가, 역공격을 받고 오히려 광주, 울주 등지로 추방되었다.[1]

그러나 윤이 이초의 변이 일어났을 때 복직하였고, 1391년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다.[1] 그는 스승인 이색이나 동문인 정몽주, 이숭인, 권근, 길재 등과 함께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1] 그러나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 등과 함께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였다.[1]

2. 2. 3. 정안대군(태종)의 측근

정안대군은 세자가 된 후,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찾아가 인정받으려 했다. 무학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로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머물던 태조는 한성부로 돌아오게 되었다. 태조가 한성으로 환궁하던 날, 정안대군은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 부왕을 맞이했다. 하륜은 정안대군을 말렸으나, 정안대군은 듣지 않았다. 하륜은 정안대군에게 '태상왕(태조)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않았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 기둥을 굵은 나무이되 수령이 오래되고 조밀한 나무로 만들라'고 건의하였다.

정안대군은 하륜의 말대로 아름드리 큰 나무를 준비하여 차일의 대들보를 세웠다. 환궁한 태조는 아들 정안대군을 보자마자 노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정안대군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정안대군은 황급히 천막의 대들보 뒤로 몸을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고,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기둥에 꽂혔다. 이는 후에 '살꽂이'라는 이름,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정안대군이 아버지 태조의 환영 연회에 참석할 때에도 하륜은 대신 내관에게 곤룡포를 입혀 보내라고 진언하였다. 정종 내외가 술잔을 올린 뒤, 정안대군의 세자 곤룡포를 입은 내관이 태조에게 술을 따라 올릴 때, 태조는 뒤에 숨겨둔 철퇴를 내리쳤고 내관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이후 태조는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하고 단념했다고 한다.

2. 3. 생애 후반

1416년(태종 16년) 하륜은 노환으로 치사(致仕)하였다. 태종은 이를 만류하였으나, 하륜은 고령과 병을 이유로 거듭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태종은 교서를 내려 진주의 전세 100결을 하사하였으나, 하륜은 이를 사적으로 쓰지 않고 향사당(鄕射堂)을 지어 교서를 보관하고 전세는 동리 노인들을 위해 사용하게 했다. 향사당에는 태종이 직접 쓴 벽오당(碧梧堂)이라는 현판이 걸렸다.[1]

하륜은 진산부원군에 임명되어 왕명을 받아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침을 순찰하기 위해 함길도로 떠났고, 그해 11월 6일 한성으로 돌아오던 중 정평군 관아에서 사망했다. 저서로는 《호정집》(浩亭集), 《삼국사략》 등이 있으며, 가사로는 도인송도지곡, 수명명 등이 있다. 작품으로는 스승 이색의 묘지명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1]

2. 3. 1. 은퇴와 최후

1416년(태종 16년) 노환을 이유로 치사(致仕)하였다. 태종은 치사를 청하는 하륜을 극구 만류하였으나, 하륜은 고집을 꺾지 않고 나이가 많고 병이 들었음을 이유로 거듭 청하여 허락받고 물러났다. 태종은 친히 교서를 써서 진주의 전세 100결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하륜은 성상께서 주신 것을 어찌 감히 사사로이 쓸 수 있겠는가 하며 따로 향사당(鄕射堂)을 지어 교서를 모셔두고 전세는 동리 노인들을 위해 쓰게 하였다. 이때 향사당에는 태종이 직접 친필로 벽오당(碧梧堂)이라는 현판을 써서 내려주었다.[1]

바로 진산부원군에 임명되어 왕명을 받아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침을 순찰하기 위하여 함길도에 가서 봉심하고 그해 11월 6일 한성으로 되돌아오던 도중에 정평군 관아에서 죽었다. 저서에 《호정집》(浩亭集), 《삼국사략》등이 있고, 가사인 도인송도지곡, 수명명 등이 있다. 작품으로는 스승 이색의 묘지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1]

3. 사후

하륜의 출생지 비석(진주성)


하륜은 사후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태종은 그를 자신의 장자방이라 했으며, 후대에 하륜은 한나라의 장자방, 송나라의 치규(稚圭)에 흔히 비유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변통도 가능하며, 때에 따라서는 변절이나 권모술수로 보일 수 있는 수단까지도 불사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륜의 묘는 진양군(현 진주시) 미천면 오방동(현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산166)에 있으며, 진주성 내 영남포정사 왼편에는 1970년대 세운 출생지비가 있다. 묘소 주변에는 할아버지 하시원, 할머니 진주정씨, 아버지 하윤린, 어머니 진주강씨의 묘가 함께 있다. 이 묘역은 1977년 12월 28일 경상남도기념물 제41호로 지정되었다.

함양 경충재, 함양 부조묘 등에 제향되었다.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에 있는 사당 경충재는 후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6호로 지정되었다. 불천지위의 은전을 받았으며, 경상남도 함양군에는 부조묘가 세워졌다.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441번지에 있는 하륜의 부조묘는 2004년 7월 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6호로 지정되었다.

4. 사상과 신념

하륜은 이(理)와 인간의 본성을 하나로 보았으며, 인간의 본성은 선량하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저서 《호정집》에서 '본성(性)이란 천리가 마음에 있는 것이다. 인의예지신이 그 이름이다.'라고 하여 인간의 본성을 '인의예지신'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하늘에 있으면 이치(理)가 되고, 사람에게 있으면 본성이 되지만, 실은 하나이다.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은 그 본체이고,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는 것은 그 작용이다. 측은·수오·사양·시비는 작용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밖으로 드러난 것을 보고서 그 안에 본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본연지성이다.'라는 것이다.

하륜은 맹자성선설에서 더 나아가 사람마다 각기 받은 기질이 다르다고 보았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바가 똑같지 않으므로, 우둔하고 현명하고 강하고 약함의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기질지성이다. 맹자의 성선설은 본래의 성품이고, 순자의 성악설 등은 기질의 성품으로 규정하였다.

그에 따르면 '맹자는 본성이 선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궁극적인 본원에 대해 말한 것이고 기질지성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하고, 양웅은 선악이 뒤섞여 있다고 하고, 한유는 본성에 세 등급(三品)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다 기질지성에 대한 말이고 본연지성은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무릇 본연지성은 요순과 보통 사람이 똑같고, 기질지성은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학문에 힘써서 기질을 변화시키면 본연지성이 드러나게 된다. 예를 들면 밝은 구슬이 맑은 물 속에 있으면 밝고 탁한 물 속에 있으면 흐린데, 흐린 물을 걸러서 맑게 하면 맑은 물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후대의 이기론에 영향을 미쳤다.

하륜은 '그 밝음은 밖에서 구할 수 없고 그 흐림은 고유한 것이 아니며, 단지 걸러내는 데 달렸을 뿐이다. 자연스런 본성에 따르는 것이 도이고, 이 도를 행하여 마음에 얻은 것이 덕이다. 성(性) 자의 뜻을 밝게 알 수 있으면 본성을 알 수 있고 도와 덕을 알 수 있다. 밝게 알기 때문에 바르게 행한다. 밝게 알지 못하면서 행동이 어긋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하였다.

4. 1. 성리학(性理學)

이색, 이인복에게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음양, 의술, 풍수 지리에도 두루 능하였다. 또한 역사와 고전에 밝았고, 예악(禮樂)과 제도에도 능통하여 조선 개국 직후 대명 외교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1]

4. 2. 불교 비판

그는 불교와 도가 사상, 무속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불교와 무속 등이 민심을 현혹하고 사람들을 속인다고 질타하였다. 현실 세계의 일도 완벽하게 알아맞추지 못하면서 사람들을 혹세무민한다는 것이고, 사후세계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기망한다는 것이었다.

태종이 "내가 불교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이들이 불교에 미혹되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불교에서 사람들에게 화복을 미리 알려준다는 것이 잘못인가?"라고 묻자 그는 "불교는 미래의 볼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의연하게 일에 대처하는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인이 이치에 맞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사시이비)고 미워하는 바입니다. 화복으로 말하면, 과거 부처가 살아있을 때 일족을 도살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부처는 왜 미리 알려주어 화를 면하게 하지 않았는지요? 화복에 관한 부처의 설이 그름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라며 반박하였다.

하륜은 미래의 일을 미리 알 수 없음을 들어 불교를 비판하였다. 부처가 생존할 당시에도 자신의 일가족을 도살하는 자가 있는 등 불상사가 적지 않았는데 부처가 신통하다면 어찌 그것을 미리 일러주어 화를 면하게 하지 못했느냐며 부처가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 없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불교나 무속 등이 앞으로 닥칠 일의 이해득실을 미리 계산하여 처신하려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비판하고, 인간 본연의 입장에 따라 매사에 일이 닥치면 의연하게 선을 지향하여 나아갈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정도전과 함께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불교 비판 이론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불교 비판은 불교의 사회적 폐단이나 반사회성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이론적인 비판으로 진보하기 시작하였다.

4. 3. 왕권 강화론

하륜은 정사의 안정을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태종 즉위 직후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제도 개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6조의 대신들이 재상을 거쳐 왕에게 결재받는 것이 아니라, 왕이 직접 6조 대신들에게 결재를 받음으로써 6조 대신들의 권한을 높이는 한편, 시행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시무안에 대해 왕이 직접 결정하게 하였다.

하륜은 6조의 정무 결재를 왕이 직접 맡을 것을 건의하는 한편, 6조 직계제를 시행하여 문하성의정부 정승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하여 업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하게 하였으며, 재상의 권한을 축소하였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해 임금이 백성들의 고충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언로를 마련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6조 대신이나 지방관의 전횡, 권한 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과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하륜은 신문고 설치를 건의하여 왕이 백성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였고, 태종은 이를 적극 수용하였다. 아울러 그는 시장에서의 물물교환보다는 일정한 화폐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태종에게 저화(楮貨) 발행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4. 4. 서얼 차별 건의

태종 즉위 후, 적서 차별 문제는 여러 신하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하륜의 주장이었다.[6] 하륜은 이자춘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하지 말 것과 재혼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도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6] 이로 인해 의안대군 이화, 이천우, 이양우 등의 눈총을 받았지만, 태종은 하륜을 적극적으로 비호하였다.

이자춘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이자 태종의 할아버지이다. 하륜의 주장은 방원이 방석을 몰아낸 반란을 합법화하고, 첩의 아들인 이성계를 정통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6] 이성계는 후처의 자손이었으나, 당시 정처의 자식으로 하려는 노력이 있었다.[6] 이성계에게는 이자춘의 전처의 아들인 이원계라는 형과 이화라는 배다른 동생이 있었다.[6] 이원계의 아들 양우가 태종을 비방한 사건을 계기로, 하륜은 이러한 주장을 펼쳤다.[6]

이후 서선(徐選)은 1415년(태종 15년) 종친과 각 품관의 서얼은 현직에 두지 말라는 공론을 내세워 채택을 이끌어냈다. 이는 서얼 금고의 시초가 되었고,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가혹한 신분 제약의 단초가 되었다.[6] 서얼 금고를 주장하던 태종은 서선 등의 공론을 빌미로 서자들의 관직 진출 금지령을 내렸다. 이후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 제도는 성종 때 세부 조항이 성종에 의해 직접 작성, 반포되면서 재가녀(재혼 여성) 자손 금고령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자리잡았다.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본가 진주 하씨(晉州 河氏)
조부하시원(河侍源)? - 1360년
식목녹사 역임
사후 증직
조모진주 정씨(贈 貞敬夫人 晉州 鄭氏)정균(鄭均)의 딸
사후 정경부인 증직
아버지하윤린(河允潾)? - 1394년
순흥부사 역임
사후 진양부원군 증직
외조부강승유(姜承裕)검교예빈경 역임
어머니진주 강씨(贈 辰韓國大夫人 晋州 姜氏)? - 1380년
사후 진한국대부인 증직
처가 성주 이씨(星州 李氏)
처증조부이조년(李兆年)1269년 - 1343년
정당문학 역임
성산군
처조부이포(李褒)? - 1373년
성산군 경원공
처백부이인복(李仁復)1308년 - 1374년
안흥부원군
처백부이인임(李仁任)
장인이인미(李仁美)예의판서 역임
부인성주 이씨(辰韓國大夫人 星州 李氏)이인미(李仁美)의 딸
진한국대부인
장남하구(河久)1380년 - 1417년10월19일
좌군도총제 역임
손자하복생(河福生)
장녀홍섭(洪涉)의 처
차녀이승간(李承幹)의 처
(1416년 - 1417년)


6. 저서 및 작품

음양(陰陽)·의술·성경(星經)·지리(地理) 등에도 정통하였고 일찍 《태조실록》 15권을 찬수하였다.


  • 《호정집(浩亭集)》
  • 《삼국사략》
  • 《동국약운》(東國略韻)
  • 동국사략
  • 이색 묘지명
  • 도인송도지곡(都人頌禱之曲)
  • 수명명(受明命) (1402)
  • 성덕가(聖德歌) (1402)

7. 평가

하륜은 시문에 능했고 음양, 의술, 경전, 지리에도 정통했다.[1] 인품이 중후하고 침착하며 대범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1] 그러나 사사로운 인사 청탁을 하거나 국유지를 착복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

태종이 끝까지 신임하고 신뢰한 유일한 측근이었다.[2] 그는 조선의 정치, 행정의 기반을 다져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2]

8. 기타

하륜은 시에도 능했는데, 〈제광주청풍루(題廣州淸風樓)라는 시가 전해진다.

題廣州淸風樓|제광주청풍루|광주 청풍루에 제하다중국어

少年曾此一看花|소년증차일간화|젊어 여기서 꽃을 한 번 보았는데중국어

老大今來感慨加|로대금래감개다|늙어서 지금 오니 감개가 무량하구나중국어

歲月不留人換盡|세월불류인환진|세월은 머물지 않아 사람은 다 바뀌었는데중국어

眼前風物尙繁華|안전풍물상번화|눈앞의 풍물들은 오히려 번화하기만 하구나중국어

8. 1.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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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백과사전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6-05
[2] 사료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11월 6일 계사 2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3] 서적 재상:한국편 이가서 2005
[4] 서적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 1 돌베개 2003
[5] 서적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열전 1 돌베개 2003
[6] 서적 한국의 파벌 어문각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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