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후백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후백제는 신라 말 견훤이 건국한 국가로, 900년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건국하여 전주를 도읍으로 삼았다. 신라의 통치력 약화와 백제 유민들의 반감이 건국 배경이 되었으며, 고려와 대립하며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하기도 했다. 내부 분열로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고, 아들 신검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936년 고려에 의해 멸망하며 후삼국 시대를 종식시켰다. 후백제는 신라의 관제를 따랐으며, 오월과 외교 관계를 맺어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후백제 - 장화왕후
    장화왕후는 고려 태조의 제2비이자 혜종의 어머니로, 태조와의 만남과 혜종 출생 설화, 그리고 삼한 통일에 기여한 나주 오씨 가문의 위상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 후백제 - 정개 (후백제)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900년부터 936년까지 사용한 연호인 정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거나 전투에 참여하는 등 후백제의 주요 역사적 사건과 함께했으며, 능환의 공격을 격퇴하고 금강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기여했다.
  • 전라도의 역사 - 백제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660년까지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했던 고대 왕국으로, 고구려에서 온 온조왕이 건국하여 한성, 웅진, 사비로 수도를 옮기며 발전했고, 중국 남조 및 왜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를 융성시켰으나 660년 신라-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 전라도의 역사 - 마한
    마한은 기원전 3세기부터 5세기까지 한반도 서남부에 존재했던 소국 연맹으로, 농업 기반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키다 백제에 병합되었다.
후백제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후백제
일반 명칭후백제
국가 유형군주제
존속 기간892년 - 936년
건국892년
멸망936년
이전 국가통일신라
이후 국가고려
915년의 후백제 (녹색)
915년의 후백제 (녹색)
수도완산주
공용어고대 한국어
한문 (문학)
종교불교
유교
도교
무속신앙
통화알 수 없음
정치
군주 칭호국왕
초대 국왕견훤
초대 국왕 재임 기간892년–935년
마지막 국왕견신검
마지막 국왕 재임 기간935년–936년
현재 국가
현재 국가대한민국

2. 역사

견훤신라 상주 지방 농민 출신으로,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 국경 방위에서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시 신라는 진성여왕 때로 정치와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892년 견훤은 군사를 일으켜 무진주(광주)를 점령하고 독자적인 세력임을 선포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만에 그 무리가 5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900년, 견훤은 백제 의자왕의 오랜 소원을 풀어주겠다며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백제로 정하고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모든 관서(官署)를 설치하고 관직을 정하였으나, 그 명칭은 전해지는 것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고, 신라의 관제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건국 후 중국 오월(吳越)과 외교 관계를 맺는 한편, 영토 확장에 힘썼다. 901년 대야성을 공격하고, 918년에는 왕건의 고려 건국을 축하하며 외교적 유대를 맺으려 했다. 그러나 920년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고 진례성(進禮城)[6]으로 진격할 때 신라가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후백제와 고려의 관계는 나빠졌고, 반대로 신라와 고려는 더욱 가까워져 후백제를 공동의 적으로 여기고 자주 군사 행동을 함께 했다.

927년 11월, 견훤은 신라 수도 경주를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다. 또한 왕족, 재상, 보물, 병장기, 남녀, 기술자 등을 빼앗아 돌아갔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정예병을 이끌고 팔공산에서 견훤 군과 맞서 싸웠으나, 김락, 신숭겸 등의 장군을 잃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는 자주 충돌했다. 934년 왕건이 운주(運州)[7]에 직접 출정하여 웅진(熊津)[8] 이북의 30여 성을 빼앗기면서 후백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935년 후백제 내부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견훤이 넷째 아들 견금강(甄金剛)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장남 신검이 동생들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견금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했고, 후백제는 분열되었다. 같은 해 신라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했다.

견훤의 사위이자 후백제 장군 박영규도 왕건에게 협력 의사를 전달했다. 왕건은 10만 대군으로 선산 부근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황산(黃山)[9] 부근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936년). 이로써 후백제는 44년 만에 멸망하였고,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2. 1. 건국 배경

견훤신라 상주 지방 농민 출신으로,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 국경방위(西南海防戍)에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다. 진성여왕 재위 시기 신라는 정치와 사회가 극도로 문란해져 있었다.[6] 삼국통일 이후 후기 신라는 동아시아 세계의 강국으로 군림하며 220년이 넘는 전성기를 누렸으나, 쇠퇴하면서 '호족'으로 알려진 전국 각지의 지방 귀족들이 진골 귀족 간의 끊임없는 왕위 다툼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반란을 꾀하기 시작했다.

진성여왕 (887-897) 시대, 수도와 그 주변 지역을 제외한 영토에 대한 신라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징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앙 정부는 농민들에게 세금 납부를 독려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했고,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분노했다. 이후 원종과 애노가 이끈 반란(889)은 신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는 후삼국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견훤은 상주의 호족 출신으로, 서남해에서 군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 신라에 의해 장군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견훤은 장군 자리에 불만을 품고 근거지인 서남해에서 세력을 축적하며 거병을 준비했다.

892년, 농민 봉기를 틈타 거병하여 무진주(전라남도광주)를 점령하고 독자적인 세력임을 선포하였다. 《삼국사기》는 그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그 무리가 한 달(旬月) 만에 5천 명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900년백제 의자왕의 숙원을 풀어주겠다며 백제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백제로 하고 완산주(전라북도 전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2. 1. 1. 백제 유민들의 신라에 대한 반감

신라가 나당 전쟁에서 당나라를 물리치고 삼국 통일을 이루면서 백제 유민들은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 유민들에게 매우 배타적인 골품제를 고수했고, 특히 백제 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백제인들에게는 더욱 차별적인 대우를 했다.

백제 부흥운동 이후 신라 정부에 협력한 백제 유민들은 청백군에 편입되어 나당 전쟁에 참전했고, 일부 왕족과 귀족들은 신라 문무왕으로부터 작위와 지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백제인들을 완전히 통합하는 데 실패했다.

많은 백제 지배층은 평민으로 전락했고, 백제의 8대 귀족은 역사에서 사라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성씨를 버렸다. 신라로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포상은 백제 시절의 지위보다 훨씬 낮았다. 이러한 상황은 백제 유민들과 그 후손들의 정치적 성공을 제한했고, 결국 옛 백제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백제 주민의 후손이라는 인식을 갖고 신라에 대한 반감을 품으며 집단 의식을 보존하게 되었다.

2. 1. 2. 신라 말의 혼란

신라는 진성여왕 때 정치와 사회가 극도로 문란해져 있었다.[6] 삼국통일 이후 후기 신라는 동아시아 세계의 강국으로 군림하며 220년이 넘는 전성기를 누렸으나, 쇠퇴하면서 '호족'으로 알려진 전국 각지의 지방 귀족들이 진골 귀족 간의 끊임없는 왕위 다툼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반란을 꾀하기 시작했다.

진성여왕 (887-897) 시대, 수도와 그 주변 지역을 제외한 영토에 대한 신라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징세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앙 정부는 농민들에게 세금 납부를 독려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했고,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분노했다. 이후 원종과 애노가 이끈 반란(889)은 신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는 후삼국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 2. 견훤의 등장과 후백제 건국

견훤은 원래 신라 상주 지방 농민 출신으로,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 국경 방위에서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시 신라는 진성여왕 때로 정치와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892년 견훤은 군사를 일으켜 무진주(광주)를 점령하고 독자적인 세력임을 선포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만에 그 무리가 5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900년, 견훤은 백제 의자왕의 오랜 소원을 풀어주겠다며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백제로 정하고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모든 관서(官署)를 설치하고 관직을 정하였으나, 그 명칭은 전해지는 것이 없어 자세히 알 수 없고, 신라의 관제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건국 후 중국 오월(吳越)과 외교 관계를 맺는 한편, 영토 확장에 힘썼다. 901년 대야성을 공격하고, 918년에는 왕건의 고려 건국을 축하하며 외교적 유대를 맺으려 했다. 그러나 920년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고 진례성(進禮城)[6]으로 진격할 때 신라가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후백제와 고려의 관계는 나빠졌고, 반대로 신라와 고려는 더욱 가까워져 후백제를 공동의 적으로 여기고 자주 군사 행동을 함께 했다.

2. 3. 발전과 쇠퇴

견훤신라 상주 출신의 농민으로,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 방위에서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시 신라는 진성여왕 때 정치와 사회가 극도로 문란했다. 892년 견훤은 거병하여 무진주(광주)를 점령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삼국사기》에는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만에 5천 명의 무리가 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900년, 견훤은 백제 의자왕의 숙원을 풀어주겠다며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백제로 정하고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삼아 후백제를 건국했다. 관서(官署)와 관직을 설치했으나, 그 명칭은 전해지지 않아 신라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견훤은 건국 후 중국 오월(吳越)과 교류하며 영토 확장에 힘썼다. 후백제는 927년에 군사력이 최고조에 달했는데, 그 해에 신라 수도 경주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경애왕을 살해한 뒤 경순왕을 옹립했다. 한국 사학자 이기백은 "만약 궁예와 왕건이 견훤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신라를 멸망시키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4]

2. 3. 1. 고려와의 대립

901년(효공왕 5) 견훤은 대야성을 공격했고, 918년(경명왕 2)에는 왕건의 고려 건국을 축하하며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러나 920년(경명왕 4) 견훤이 대야성을 공격하고 진례성(進禮城)[6]으로 진격하자 신라는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후백제와 고려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반대로 신라와 고려의 관계는 긴밀해져 후백제에 대한 공동 군사 행동을 가하기도 했다.[4]

이에 견훤은 927년(경애왕 4) 11월, 신라 수도 경주를 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다. 또한 왕족, 재상, 보물, 병장기, 남녀, 기술자 등을 빼앗아 돌아갔다. 왕건은 이 소식을 듣고 정예병을 이끌고 팔공산에서 견훤 군과 맞서 싸웠으나, 김락, 신숭겸 등의 장군을 잃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후 후백제와 고려는 자주 충돌했다. 934년 왕건이 운주(運州)[7]에 직접 출정하여 웅진(熊津)[8] 이북의 30여 성을 빼앗기면서 후백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935년(경순왕 9) 후백제 내부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했다. 견훤이 넷째 아들 견금강(甄金剛)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장남 신검이 동생들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견금강을 죽인 후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했고, 후백제는 분열되었다. 같은 해 신라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했다.

견훤의 사위이자 후백제 장군 박영규도 왕건에게 협력 의사를 전달했다. 왕건은 10만 대군으로 선산 부근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황산(黃山)[9] 부근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았다(936년). 이로써 후백제는 44년 만에 멸망하였고,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후백제는 존속 기간 동안 왕건의 수군이 나주 지역을 침략하여 고통을 겪었으며, 이는 무역과 남중국 왕조와의 외교 관계를 악화시켰다.

930년 고창 전투에서 고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후백제는 본거지로 밀려났으며, 934년 홍성군에서 또 다른 치명적인 패배를 겪었다.

2. 3. 2. 내부 분열과 멸망

935년(경순왕 9), 후백제 내부에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형제들 간의 불화로 인해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여러 명의 아내로부터 수십 명의 아들을 낳은 견훤은 넷째 아들이자 서출인 견금강을 총애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적출 장자인 견신검은 이에 불만을 품고 동생들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5] 견신검은 아버지 견훤금산사에 가두고 견금강을 죽인 후, 스스로 대왕(大王)의 자리에 올랐다. 견훤은 절에서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함으로써 후백제는 완전히 분열되었고, 이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5] 같은 해 신라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견훤의 사위이자 후백제의 장군이었던 박영규도 왕건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內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5] 이에 왕건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선산 부근에서 견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황산(黃山)[9] 부근에 진을 쳤다. 결국 견신검은 항복 의사를 밝혔고, 동생 양검, 용검과 문무 관리들을 이끌고 항복했다(936년). 이로써 후백제는 건국 44년 만에 멸망했다.[5] 후백제의 항복으로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졌다.

견훤은 스스로 왕위에 오른 후 일부다처제를 통해 많은 아내를 두었고, 그 결과 첫 번째 부인에게서 얻은 8명의 아들을 포함하여 10명이 넘는 아들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왕국의 멸망을 초래한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935년, 견훤은 맏아들들을 제쳐두고 넷째 아들 금강을 후백제의 태자로 책봉했다. 이에 맏아들 견신검은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를 김제의 금산사에 유폐시키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견신검은 태자 금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견훤고려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5]

같은 해 6월, 초대 후백제 왕이었던 견훤은 딸을 데리고 고려에 투항했다. 왕건은 견훤에게 "상부"라는 칭호를 주고 아버지처럼 극진히 대접했다.

935년 아들들에게 쫓겨나 고려로 망명한 견훤은 왕건과 함께 10만 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옛 왕국을 공격했다.[5] 고려군과 후백제군은 오늘날 경상북도 구미시 지역인 선산에서 격돌했고, 이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궤멸되었다. 이로써 경순왕신라를 왕건에게 바친 지 1년 만인 936년에 후백제는 멸망했다. 선산 전투는 후삼국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936년 6월, 견훤은 왕건에게 자신의 아들 신검을 토벌할 것을 요청했고, 왕건은 견훤과 함께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견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양검과 용검은 진주로 유배된 후 살해되었다. 한편, 왕건은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에게 작위를 내리고 견씨 가문을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왕건은 패배한 지도자인 신검에게도 관대한 처분을 내려 작위를 내렸다. 그러나 쿠데타책임을 물어 신검의 동생 양검과 용검은 유배 보냈다.

3. 정치 제도

견훤은 무진주를 점령한 이후, 한동안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지 않고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御史中丞上柱國 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戶)라 칭하였다. 900년에 이르러서야 국호를 정하고 왕을 칭하였다.[1]

후백제는 신라가 쓰던 관직명을 거의 대부분 사용하였다. 후백제의 관리였던 능환은 신라 관계의 6등위인 아찬(阿飡) 벼슬을 지냈고, 후백제의 장수였던 상귀 역시 신라 제 7관등에 속하는 일길찬(一吉飡) 벼슬을 지냈다.[1] 이를 통해 후백제는 신라와 매우 흡사한 사회 구조와 관직 체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1]

4. 외교

왕건이 북쪽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통해 정통성을 유지하려 한 반면, 견훤은 남쪽 중국, 특히 오월과의 관계를 통해 이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후백제의 존속 기간은 중국의 혼란스러운 오대 십국 시대와 겹쳐, 양측 모두 이러한 관계를 군사적 지원으로 활용할 수 없었다.[1]

922년, 후백제는 일본에 참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1] 후당에도 조공했으나 이름뿐인 관직만 얻었을 뿐, 실질적인 원조는 없었다.[6] 929년, 경상북도에서 승리한 후 다시 일본에 원조를 요청했지만, 또다시 거절당했다.[2]

4. 1. 대중국 외교

견훤은 900년에 전주로 도읍을 옮기고 후백제를 세운 다음, 오월(907~978)과 사신을 왕래하며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당시 오월은 오대 십국 시대 강소성·절강성을 중심으로 번영한 나라로, 중국 최대 청자 생산지인 월요(越窯)가 위치한 곳이었다. 또한 중국 남해 교역의 종점이자 해상 교역의 중심지로, 후백제에게는 대중국 해상 교역에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후백제는 오월과의 수교를 바탕으로 경제적 기반을 굳건히 했고, 외교적인 교섭을 통해 국제 사회에서 정치적 후견 세력을 확보했다.[10]

왕건이 북쪽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정통성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동안, 견훤은 남쪽 중국, 특히 오월의 통치자들과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후백제의 존재가 중국의 혼란스러운 오대 십국 시대와 대체로 일치했기 때문에, 어느 쪽도 이러한 관계를 군사적 지원으로 활용할 수는 없었다.

4. 2. 대일본 외교

922년, 후백제는 일본에 참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1] 929년에 후백제는 경상북도에서 쾌진격을 거두고 다시 일본에 원조를 요청했지만, 또다시 거절당했다.[2]

4. 3. 외교적 위기

태봉국에게 나주를 빼앗기면서 후백제는 중국으로 가는 무역로이자 교역로가 될 항구를 잃게 되었다. 이는 곧 후백제의 외교력 상실로 이어져 후백제의 장래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고 결국 후백제는 멸망한다.[1]

922년, 후백제는 일본에 참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6] 후당에도 조공했으나 이름뿐인 관직만 얻었을 뿐, 실질적인 원조는 없었다.[6] 929년, 경상북도에서 쾌진격을 거둔 후 다시 일본에 원조를 요청했지만, 또다시 거절당했다.[8]

5. 역대 국왕

대수왕호재위 기간비고
1견훤왕892년~935년초대 국왕
2신검왕935년~936년마지막 왕


5. 1. 연호

892년부터 936년까지 정개(正開)를 연호로 사용하였다.

참조

[1] 논문 From Unification to Division : on the Background of the Formation of Later Baekje 2018
[2] 논문 The situation of the Gyeonhwon government in Mujinju 2021
[3] 논문 Studies on the Four-Spirit Belief(四靈) in the Jeonju(全州), the Capital of Hubaekje(後百濟) 2003
[4]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for the Harvard-Yenching institute 1984
[5]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Silk Pagoda 2006
[6] 문서 무주
[7] 문서 홍성
[8] 문서 공주
[9] 문서 충청남도 연산
[10] 웹인용 후백제 견훤, 중국의 어떤 나라와 국교를 맺었나 https://www.edaily.c[...] 2020-08-16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