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왕양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존왕양이는 춘추 시대 주 왕실을 받들고 이민족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시작되어, 에도 막부 말기 일본에서 천황을 존경하고 서양 세력을 배척하려는 사상으로 발전했다. 중국에서는 주 왕실을 받들고 중화사상에 입각해 이민족을 배척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서구 열강에 대한 양이를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막부의 무능함에 반발한 사무라이들이 존왕양이를 내세워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지만, 결국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군주주의 - 연방군주제
연방 군주제는 여러 군주국이 연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정치 체제이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국가에서 나타났고, 현대에는 아랍에미리트와 말레이시아 등에서 채택하고 있다. - 군주주의 - 보편군주제
보편군주제는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고 전 세계의 주권을 주장하는 개념으로, 다양한 문명에서 이상으로 여겨졌으며, 군주의 절대 권력, 종교, 역사관, 코스모폴리타니즘과 관련되어 현대 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막말의 대외 관계 - 고용 외국인
고용 외국인은 메이지 시대 일본이 서구의 선진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초빙한 외국 국적자로, 교육, 기술, 군사,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 막말의 대외 관계 - 일란화친조약
죄송합니다. 제공된 본문이 없어 "일란화친조약" 페이지의 개요를 요약할 수 없습니다. - 에도 시대의 대외 관계 - 하세쿠라 쓰네나가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다테 마사무네의 명을 받아 유럽 파견 사절단을 이끌고 스페인과의 무역 협상 및 교황 알현을 위해 유럽으로 파견되었으나 일본의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통상 협정에는 실패하고, 쇄국 정책으로 잊혔지만 이와쿠라 사절단에 의해 재조명되었다. - 에도 시대의 대외 관계 - 서양기문
존왕양이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일본어 | 尊王攘夷 |
로마자 표기 | Sonnō jōi |
한자 | 尊王攘夷 |
중국어 간체 | 尊王攘夷 |
중국어 병음 | Zunwang Rangyi |
광둥어 예일 | zyun1 wong4 joeng4 ji4 |
의미 | 천황을 숭배하고 오랑캐를 몰아내자 |
관련 사상 | 존황주의 배외주의 |
역사적 배경 | |
시대 | 1850년대 일본 |
관련 인물 | 후지타 도코 아이자와 야스시 |
존왕양이 운동 | |
성격 | 국수주의적 슬로건 |
목표 | 천황 권위 강화 외국 세력 배척 |
영향 |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토대 |
기타 | |
관련 영화 | 건국사 존왕양이 (1927년) |
2. 유래
존왕양이(尊王攘夷)는 고대 중국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등장한 용어이다. 주(周) 왕실의 천자(天子)를 받들어 높이고, 중화사상(中華思想)의 관점에서 사방으로부터 중화 세계를 침략하는 이민족(夷狄)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패자(覇者)들이 사용한 용어를 에도 말기 일본의 국학(国学)자들이 유입시켜 퍼뜨려 쓴 것이다.
본래는 주 천자를 '왕'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존왕'(尊王)이라고 썼다. '양이'의 경우, 처음에는 주 왕실 및 중화 세계의 입장에서 '이적'은 주의 남방에 위치한 초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제 환공은 주 왕실에 대한 예를 지키며 제후들을 단결시켜 초를 비롯한 이적들을 토벌하였다.
이후, 존왕양이는 송학(宋学) 즉 송대에 등장한 성리학(주자학)을 배워 따르는 유학자들이 주로 주창하였다. 송 왕조가 북방의 여진족 금 왕조에 쫓겨 장강(양자강) 이남으로 내려온 뒤(남송) '군주'를 받들어 지키며(존왕) 북방의 '이적' 여진족을 물리친다(양이)라는 국가관을 내세웠다.
근대 중국 청대의 학자 위원(魏源)은 저서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 "이적의 장기로 이적을 제압한다(師夷長技以制夷)"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이인'(夷人) 또한 비슷한 개념이었다.
제 환공이 규구지맹(葵丘之盟)에서 주창한 국가 존립의 근거인 왕에 대한 존숭(존왕)과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침략자에 대한 저항 의식인 양이(攘夷)가 후대에 합쳐져 '임금을 받들며 임금을 중심으로 뭉쳐, 임금과 내 나라를 위협하는 오랑캐 이적들을 물리친다'는 뜻의 존왕양이(尊王攘夷)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일본에서도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에는 천황을 왕이라고 칭하는 용례도 드물지 않았지만, 에도 시대 명분론(名分論)이 철저해지면서 막말에는 '존황'(尊皇)으로 바꿔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막말기 '존왕양이'라는 말의 용례는 미토 번(水戸藩)의 번교(藩校) 고도관(弘道館)의 교육이념을 보여준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의 고도관기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적어도 막말에 유포된 '존왕양이'의 출전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7] 고도관기의 실질적인 기초자는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이며, 도코의 『고도관기술의(弘道館記述義)』에 의해 고도관기에 대한 해설이 이루어졌다. 막말 존왕양이론은 미토학(水戸学)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막말기에는 『일본외사(日本外史)』가 널리 유포되어 당시 존왕론이나 명분론 보급에 기여했다.
2. 1. 중국
춘추 시대 제 환공은 주 왕실에 대한 예를 지키며 제후들을 단결시켜 이적을 토벌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기원전 663년 제의 북쪽 변경에 거하던 이민족 산융(山戎)이 연(燕)을 침공하자, 연은 제에 구원을 요청했고 제는 연에 원병을 파견하였다.[9][10] 기원전 661년 산융은 다시 형(邢)을 침공했다. 당시 제의 재상이던 관중(管仲)은 "융적은 이리와도 같은 족속으로 그 욕심이 끝이 없고, 제하는 모두가 친족과 같으니 내버려둘 수 없다"라며 지원을 주장했고, 제 환공은 다시 병사를 내어 산융을 치고 형을 구원하였다.[11]
기원전 656년 제 환공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초(楚)로 들어가, 초가 천자가 주관하는 하늘에 올리는 제사에 제후가 의무로 바쳐야 할 초모(茅草)를 바치지 않아 제사가 제대로 거행되지 못하게 한 것을 힐문하였으며, 초는 자국의 잘못임을 시인하였다.[12]
기원전 651년 제 환공은 각지의 제후들을 불러모아 규구지맹(葵丘之盟)이라는 회맹을 열었다.[13] 이 자리에서 제 환공은 "주 왕실을 받들고 이적을 물리치며, 찬역과 시해를 금단하고 겸병하는 짓을 억제한다"라고 제창하였다. 주 양왕(周襄王)은 이에 재공(宰孔)을 보내 회맹에 참가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주 왕실에서 제사에 제수로 올렸던 고기를 제 환공에게 하사하였다.[14]
그 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주창한 것은 송학(宋学), 즉 송대에 등장한 성리학(주자학)을 배워 따르는 유학자들이었다. 송 왕조가 북방의 여진족 금 왕조에 쫓겨 장강(양자강) 이남으로 내려온 뒤(남송) '군주'를 받들어 지키며(존왕) 북방의 '이적' 여진족을 물리친다(양이)라는 국가관을 내세웠다.
근대 중국 청대의 학자 위원은 저서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 "이적의 장기로 이적을 제압한다(師夷長技以制夷)"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3. 한국
조선 말기 고종의 아버지이자 섭정을 했던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치를 펼치면서 존왕양이 이념을 내세웠다. 여기서 양이(攘夷)의 대상은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이었다. 조선은 이들 국가의 개항 요구에 맞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렀고, 이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양이 의식을 더욱 고취시켰다.[1]
4. 일본
에도 시대 말기까지 막부의 쇼군이 실질적인 일본의 지배자였고, 천황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 사상의 기원은 공양전이라는 유교 경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 개념을 이용하여 《춘추》를 해석한 주자학을 보급했다. 17세기 유학자 야마자키 안사이와 야마가 소코는 일본 왕실(일본의 황실)의 신성함과 다른 나라의 통치 가문에 대한 우월성에 대해 저술했다. 이러한 사상은 국학(Kokugaku) 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에 의해 확장되었고, 다케노우치 시키부의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尊皇論, sonnōron) 이론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통치하는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충성도는 낮아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
미토학 학자 아이자와 세이시사이는 1825년 그의 저서 『신론(新論)』에서 '손노죠이(尊皇攘夷, sonnō jōi)'라는 용어를 현대 일본어로 도입했는데, 여기서 '손노(尊皇)'는 도쿠가와 막부가 천황에게 표명한 존경심으로, '죠이(攘夷)'는 기독교 금지를 의미했다.
막말기의 “존왕양이”라는 말의 용례는, 미토 번의 번교고도관의 교육이념을 보여준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고도관기가 가장 빠르며, 적어도 막말에 유포된 “존왕양이”의 출전은 여기에 찾을 수 있다.[7] 고도관기의 실질적인 기초자는 후지타 도코이며, 도코의 『고도관기술의』에 의해 고도관기의 해설이 이루어지고 있다. 막말 존왕양이론은 미토학의 영향이 크다.
막말기에는 『일본외사』가 일반적으로 유포되어, 당시 존왕론이나 명분론이 보급되는 데 기여했다.
4. 1. 존왕양이 운동의 전개
1854년 미국의 강제적인 개항 요구에 굴복하여 쇼군이 무력함을 보이자, 하급 사무라이 계층은 존왕양이를 명분으로 내세워 서양 세력에 저항했다.존왕양이 운동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863년 사쓰마 번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했고, 조슈 번 역시 시모노세키에서 외국 군함에 포격을 가했다가 이듬해인 1864년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4개국 연합함대의 공격을 받고 패배했다. 조슈 번의 경우, 영국 유학 중이던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가 귀국하여 번의 태도를 바꾸도록 설득했다.[15]
마루야마 마사오에 따르면, 일본 근대사에서 존왕양이는 오랑캐와의 교섭뿐만 아니라 문명개화와 민권론으로까지 이어졌다. 초기 사족민권론은 양이론의 연장선에 있었고, 히라타 국학 등을 신봉하는 활동가들이 섞여 있었다. 이들은 1877년 세이난 전쟁까지 참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양이론을 전술적으로 이용하여 막부를 타도하려는 세력도 있었다.[15]
결국 존왕양이는 쿠데타의 명분이 되어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애초 내걸었던 존왕양이의 두 가지 명분 중 양이는 슬그머니 포기하고, 오히려 서구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게 되었다.[15]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일본 영해에 외국 선박의 침입이 증가하면서 "쇄국" 정책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존황양이(尊皇攘夷)"의 "양이(攘夷)", 즉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부분은 1854년 일본을 개항시킨 가나가와 조약에 대한 반발로 변질되었다. 매슈 페리 제독의 "흑선"이라는 군사적 위협 아래 체결된 이 조약은 강압적이었고, 사무라이 계층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5]
이 사상은 조슈 번과 사쓰마 번 등 반란 지역의 구호로 채택되었다. 교토의 궁정은 이 운동에 동조했다. 고메이 천황은 이러한 감정에 개인적으로 동의했고,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황실의 전통을 깨고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조약에 대해 격렬하게 비난했고 쇼군 계승에 개입하려 했다. 그의 노력은 1863년 3월 "양이 칙명"으로 정점에 달했다. 막부는 이 명령을 집행할 의도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부 자체와 일본 내 외국인에 대한 공격을 자극했으며,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상인 찰스 레녹스 리차드슨의 살해였다. 시모노세키에서 외국 선박에 대한 포격도 있었다.[5]
이는 존황양이 운동의 정점이 되었는데, 서구 열강이 사무라이들이 서구의 이익에 대해 저지른 암살과 기타 행위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864년, 4개의 서구 국가가 시모노세키를 공격하는 작전을 벌여 미약한 방어를 무너뜨리고 그 지역을 단기간 점령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서구 열강의 군사력에 필적하지 못함을 보여주었지만, 막부를 더욱 약화시켜 반란 지역이 동맹을 맺고 막부를 전복하여 메이지 유신을 가져오게 했다.[5]
4. 2. 존왕론과 양이론
존왕론(尊王論)은 황실을 신성한 것으로 존경해야 한다는 사상이다.양이론(攘夷論)은 에도 막부가 네덜란드와 조선을 제외하고 쇄국 정책을 유지하는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는 여러 혁명이 일어났고, 제국주의 물결을 타고 아시아로 진출하여 식민지화를 진행했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생겨났다. 외래인을 물리치고 일본을 유럽 열강으로부터 방어해야 한다는 사상이 널리 퍼졌으며, 이처럼 침략 거부와 식민지화 거부를 목적으로 하는 사상이 바로 양이론이다.
- 유럽과 미국의 주요 사건
사건 | 년도 |
---|---|
청교도 혁명 (넓은 의미에서는 1638년 주교 전쟁부터 1660년 왕정 복고까지) | 1638년 |
권리장전 및 명예혁명 (1688년 - 1689년) | 1688년 |
미국 독립 선언 | 1776년 |
권리장전 | 1789년 |
프랑스 혁명 | 1789년 |
프랑스 인권 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 1793년 |
1840년(덴포 11년), 청나라는 영국과 전쟁(아편 전쟁)을 벌여 홍콩섬을 빼앗겼다(1997년(헤이세이 9년) 반환).[8]
일본에서도 홋카이도의 고로닌 사건, 규슈의 페턴호 사건과 같은 마찰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는 히라타 아츠타네 등에 의한 국학 보급과 함께 민족 의식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었다.
1853년(가에이 6년),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가 흑선으로 내항하자, 일본 각지에서 막말의 존왕양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 3. 사상의 변화와 메이지 유신
1853년 매슈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해군의 흑선이 내항한 이후, 일본에서는 존왕양이 운동이 급격히 변화하였다. 초기 존왕양이 운동은 외국 세력을 몰아내려는 '양이'에 초점을 맞췄으나, 사쓰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에서 서양 군사력의 압도적인 힘을 경험한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양이'에서 '개국'으로 빠르게 전환하였다. 이러한 현실적인 인식 변화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통한 근대화 노선으로 이어졌다.[15]막부 타도(幕府打倒)를 목표로 하는 세력들은 존왕양이 이념을 활용하여 에도 막부의 통치 체제를 무너뜨리고 천황 중심의 국가 체제를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는 곧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이어졌으며, '존왕양이' 구호는 '부국강병'으로 대체되었다.[15]
메이지 유신 이후, '존왕양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부국강병'이 일본 제국의 새로운 국가적 목표가 되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 정책의 기반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졌다.
4. 4. 미토학의 영향
미토 번(水戶藩)의 번교(藩校) 고도관은 존왕양이 사상의 중심지였다.[7]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고도관기는 막말 존왕양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7] 후지타 도코는 고도관기술의를 통해 고도관기의 해설을 하였다. 미토학은 《일본외사》를 통해 존왕론과 명분론을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참조
[1]
서적
Enemies of Civilization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
서적
Utilitarian Confucianism: Ch'en Liang's Challenge to Chu Hsi
Harvard University Press
[3]
서적
A History of East Asia: From the Origins of Civilization to the Twenty-first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Pan-Asianism and the Legacy of the Chinese Revolu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5]
서적
[6]
서적
歴史学事典
[7]
서적
水戸学の特質
岩波書店
[8]
설명
상희선
[9]
고전
史記
[10]
고전
徒戎論
[11]
고전
左傳
[12]
고전
左傳
[13]
고전
春秋
[14]
고전
左傳
[15]
서적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