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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18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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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명준은 1870년 한성부에서 태어난 인물로, 대한제국 시기 관료로 활동했으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친일 단체에 참여했다. 그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실력 양성 운동에 참여했고, 1909년 안중근 의거 관련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다. 한일 병합 이후에는 교육계에서 활동하며 국민협회를 통해 조선인의 참정권과 자치권을 주장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친일 활동을 했으며, 1945년에는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해방 후에는 친일파로 분류되어 반민특위에 제소되었으나, 6.25 전쟁 직전까지 생존해 있었으며,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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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1870년)
김명준
김명준
김명준
기본 정보
출생1870년
사망1950년
직업교육자
기업인
정치인
학력
최종 학력배재학당 졸업
주요 경력
경력흥사단 평의원
조선식산은행 감사역
동아일보 감사
경성방직 이사
대성중학교 교장
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
친일 행적
친일 단체 활동국민협회
흥아협회
조선임전보국단
기타
서훈친일반민족행위자
김명준 (1870년)
기본 정보
출생1870년
사망1950년
직업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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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단체 활동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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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협회
기타친일반민족행위자

2. 생애

김명준은 경성부 출신으로, 대한제국 궁내부 비서관을 지냈다. 일진회와 국민협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1][3] 1920년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1] 1945년 4월부터는 귀족원 칙선 의원을 지냈다.[2]

1906년 대한자강회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6년 3월 윤효정, 장지연, 윤치호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07년 8월 21일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되자, 1907년 11월 남궁억 등이 결성한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08년 서북학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평회원이 되었다. 1909년 안중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투옥되었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1910년 2월 19일 석방되었다.[6]

한일 합방 직후에는 교육계에서 활동했지만, 105인 사건 이후 조선인 참정권 운동, 자치권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생했을 때는 만세 반대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1919년 7월 협성구락부를 조직하고, 창립발기인이 되고 곧 평의원이 되었다.[1]

1920년 민원식, 김환, 한영원 등과 함께 국민협회를 설립하여 총무를 맡았다. 1921년 국민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민원식이 암살된 뒤에도 국민협회를 이끌어갔다.[1]

1937년 7월 중일 전쟁 발발 직후, 중추원은 시국강연반을 조직했고, 김명준은 이 강연반에 참여하여 대구, 부산 등지를 돌며 순회강연을 했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이 조직될 때 참여하여 감사로 선출되었다.

김명준은 일본군의 전쟁 수행에 조선인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일본 정부 내에서 조선인 참정권과 조선인의 일본 국회 입후보를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 조선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했다.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조선인 참정권 허용과 중의원 입후보 허용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1942년부터 귀족원 의원에 조선인을 선임하고, 1945년에는 중의원 선거에 조선인 출마와 입후보를 허용했다.

2. 1. 초기 활동

김명준은 경성부 출신으로, 대한제국 궁내부 비서관, 일진회 부회장, 국민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1][3]

2. 1. 1. 생애 초기

1870년(고종 7년) 10월 26일 경기도 한성부 서서(西署) 적선방([후대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에서 김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평안남도 평양부가 출생지라는 설이 있고, 1872년(고종 9)생 설도 있어 출생년대는 불확실하다. 아버지 김석인은 성리학자로 성균관 유생이었으며 감역과 첨지를 역임했다. 한학자 집안에서 자란 그는 유교 성리학을 신봉했으나, 한때 불교로 개종했다가 1920년대 중반 다시 유교 성리학으로 종교를 바꾸었다.

1876년(고종 13년) 3월 3일 향학당(鄕學堂)에 입학하여 성리학을 수학했다. 소년 시절 신식 학교 진학을 원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한 행적은 미상이다.

2. 1. 2. 구한 말 관료 생활

1886년(고종 23년) 12월 13일 과거 향시 평안도 도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87년 3월 17일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를 지냈다.[1] 3월 25일 의원면직했다. 5월 30일 승정원주서 조병건(趙秉健)이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자 다시 승정원가주서에 임명되었지만 당일 사퇴하였다. 1887년 9월 27일 권지성균관학유가 되었다.[1] 1887년 11월 성균관 학유(成均館 學諭)가 되고, 1888년 3월 27일 봉상사 부봉사(奉常司副奉事), 3월 30일 겸 향관을 겸임하였다.[1] 4월 4일 승정원 임시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에 임명되어 6월 13일까지 매일 출근, 승정원일기 작성에 참여하였다.[1] 6월 15일 병으로 승정원 임시 사변가주서직을 물러났다. 6월 23일 사직으로 입시했다가 다시 가주서에 임명되었다.[1] 1888년 9월 승정원 가주서, 11월 4일 다시 승정원가주서가 되어 입직하고 11월 7일부터는 매일 승정원과 향실에 번갈아가며 입직했다. 1889년 1월 11일 병으로 사직했다.[1] 1889년 1월 30일 다시 승정원 가주서로 임명되어 입직, 매일 승정원에 입직하다가 1889년 8월 24일 병으로 사직했다. 1889년 9월 7일 성균관 학록2단, 11월 4일 성균관 학록에 임명되었다가 11월 5일 승정원가주서로 다시 매일 입직하였다. 11월 14일 병으로 가주서직을 사직했다.[1]

1890년 1월 29일 창락도찰방(昌樂道察訪), 1891년 10월 15일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가 1892년 5월 26일 부사과(副司果), 1893년 6월 30일 6품으로 승진하였으나 곧 의원면직하였다.[1]

1895년 1월 13일 중추원참의상원외랑(中樞院參上員外郞), 원외랑 등을 거쳐 관직에서 물러났다.[1] 1904년 12월 공진회 부회장을 맡았다.[1] 1905년(광무 7년) 10월 경연원 시강관(經筵院侍講官), 11월 13일 홍문관 시강관(侍講官) 판임관 4등(判任官四等)으로 승진하였지만 11월 17일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의원면직하고 물러났다.[1] 곧 경연원 시강관에 다시 제수되었으며, 1906년(광무 9) 1월 19일 정6품으로 승진, 여주비각의 비석을 영건할 때 별단(別單)으로 참여하였다.[1] 1906년 3월 23일 승정원 가주서에 임명되어 3월 5일까지 입직하였다. 그해 4월 16일 비서감승 주임관 3등 을호 6급(奏任官三等乙號六級)에 임명되었으나 4월 19일 의원면직하였다.[1] 11월 4일 정3품(正三品)으로 대한제국 중추원 부참의에 임명되었으며, 12월 2일 사퇴하였다.[1]

2. 2. 계몽단체 활동과 투옥

1906년 대한자강회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4월 대한협회 회보에 "식산론 (殖産論)"이라는 주제의 글을 발표하였다. 1906년 3월 윤효정, 장지연, 윤치호 등과 함께 실력 양성 운동 시민단체인 대한자강회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8월에는 대한자강회 평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총무로 선출되었다. 1906년 10월 박은식, 안병찬, 이갑, 유동열, 노백린 등과 함께 관서 및 기호지방 출신 전현직 관료와 저명인사들이 조직한 교육계몽 및 장학단체인 서우학회(西友學會)의 창립 발기인과 회원으로 참여하여 1908년 1월까지 활동하였다. 1906년 12월 1일 박은식과 함께 서우학회 기관지 서우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참여하였다. 서우1908년 8월 1일 한국통감부의 폐간령에 의해 폐간되었다.

1906년 8월 식산장려회사의 설립을 건의하고, 대한식산장려회 설립에 참여하여 회장에 선출되었다. 1907년 8월 21일 대한자강회가 강제 해산되자, 1907년 11월 남궁억 등이 결성한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08년 1월 한성부에서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기존의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서북학회를 조직하자, 서북학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평회원이 되었다. 태극학회에도 참여하였다. 1908년 1월 서북학회 평의원, 4월 대한협회 특별평의회 위원 및 대외교섭위원을 역임하고, 1908년 5월 대한학회 찬성회 창립발기인이자 회원이 되었다.

1908년 7월 서북학회 실업부 연구위원, 9월 대한학회 법률부 법칙 제정위원이 되었다. 1908년 9월 명도학교(明道學校) 교사가 되었다. 1908년 10월 서북학회의 단체 내 모임인 학회와 구락부 조직위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말 중앙기독교청년회 본부위원 겸 의사부원이 되었으며, 활민노동회에 가입하여 평의원이 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여 국채보상금조사회 평의원을 역임했다. 1909년 1월 서북학회 총무부원, 3월 서북학회 규칙개정위원이 되었다. 1909년 중추원 부참의를 사직하고 강동군 등에서 군수로 발령되나 곧 사퇴했다. 1909년 2월 27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강연회에 김광제, 조완구 등과 함께 연사로 참여, "선과 악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부적인 성질"이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09년 12월 대한협회 의사부원으로 선출됐다. 같은 해 안중근 등이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만주 다른 기차역에 숨어있던 우덕순 등도 체포된 안중근 사건이 발생하자, 안창호 등과 함께 안중근 의거 가담 및 관련 혐의자로 지목되어 체포, 투옥되었다. 그러나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1910년 2월 19일 석방되었다.[6]

2. 3. 한일 합방 이후 활동

김명준은 경성부 출신으로, 대한제국 궁내부 비서관을 지냈다. 일진회와 국민협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1][3] 1920년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1] 1945년 4월부터는 귀족원 칙선 의원을 지냈다.[2]

2. 3. 1. 교육계 활동 및 3.1운동 전후

1911년 1월 오성학교(五星學校) 재단 전임이사(專任理事)가 되었고, 1911년 9월 중앙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가 1912년 3월 사임하였다. 1911년 11월에는 사립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가 됨과 동시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장려위원(奬勵委員)이 되었다. 명도학교와 오성학교, 진명여자고보 등은 신민회 사건으로 투옥되면서 중단되었다가 풀려난 뒤, 복직하여 1920년 사퇴하였다.[1]

그는 신민회에 가입하였다가 105인 사건으로 경성부에서 이승훈, 양기탁 등과 함께 체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한일 합방 직후에는 교육계에서 활동했지만, 105인 사건 이후 이규완, 민원식 등의 조선인 참정권 운동, 자치권 운동에 호응하여 참여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생했을 때는 만세 반대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해 4월 3.1 운동이 지속되자 윤효정, 고희준 등과 함께 자제를 촉구할 것을 성명서 발표하였다. 1919년 7월 민원식 등과 함께 협성구락부를 조직하고, 창립발기인이 되고 곧 평의원이 되었다.[1]

1919년 9월 교풍회 경성지회(矯風會京城支會)에 가입하고 평의원(評議員)에 선출되었다. 10월 협성구락부가 주최한 시국강연회의 연사로 활동했다. 11월 4일부터 11월 11일까지 매일신보에 '협성구락부의 시국강연회'라는 주제로 칼럼을 기고, 3.1 운동을 반대하고, 합병은 어쩔 수 없었으며, 국방력이 약한 조선은 타국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논설을 8회에 걸쳐 기고하였다. 1920년에는 민원식, 김환, 한영원 등과 함께 조선인의 참정권과 자치권을 요구하는 단체인 국민협회를 설립하여 총무를 맡았다. 1921년 국민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민원식이 암살된 뒤에도 국민협회를 이끌어갔다.[1]

2. 3. 2.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 운동

1920년 1월 18일 국민협회(國民協會) 총무에 선출되었고, 3월 16일에는 민원식 등과 함께 시사신문(時事新聞) 창간에 참여하여 시사신문사 부사장이 되었다. 그해 8월 10일 시사신문사 부사장직을 사퇴했다. 1921년 1월 국민협회 부회장으로서 국민협회 창립 1주년 기념 시국대연설회에서 강연하였다. 같은 해 2월 17일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 허용을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한 민원식이 도쿄 제국 호텔에서 양근환에게 피살되자, 국민협회를 맡아 운영하며 조선인 참정권, 자치권을 계속 주장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일부 회원들이 이탈하고 운동은 다소 쇠퇴하였다.

1921년 4월 12일 국민협회 임시 회장이 되었다가 4월 21일 총회에서 정식 회장으로 선출되고, 정병조(鄭丙朝)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5월 31일 국민협회 평안남도지부 총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발표했는데, 축사에는 참정권과 자치권, 의무교육 실시 중 보통교육 우선 보급과 점차적 의무교육 확대, 노자 협조 등의 의견이 담겨 있었다. 1924년 4월 조선총독부 주도로 각 사회단체 연합회인 각파유지연맹이 조직되자, 국민협회 대표로 각파유지연맹 이사가 되었다. 그해 5월 각파유지연맹 주최 강연회에 참석, 관민일치·시정개선, 대동단결·사상선도, 노자협조·생활안정 등의 3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1927년 11월 조선인 참정권 관련 시국간담회를 열어, 갑자구락부, 국민협회, 대동동지회 등 단체 간부들을 초청하고 조선인 참정권 획득, 사상 선도, 금융조합 개혁, 내선공학(조선인과 일본인이 같은 학교, 공간에서 수학하는 것) 등을 결의했다.

1930년 1월 국민협회 회장직에서 물러나 고문이 되었다. 1930년 이후 국민협회 회원들이 이탈하고 활동이 지지부진했지만, 그는 국민협회를 지켰다.

1935년 2월 국민협회 이사장으로서 서명운동을 벌여 조선에 참정권, 자치권을 허용해 줄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일본 중의원에 제출했다. 1940년 조선총독부일본 본국에 조선인 몫의 귀족원, 중의원 의원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요청하였다.

2. 3. 3.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시기

1937년 7월 중일 전쟁 발발 직후, 중추원은 혼란 방지를 위해 시국강연반을 조직했다. 김명준은 이 강연반에 참여하여 대구, 부산 등지를 돌며 순회강연을 했다. 같은 해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최한 제2차 전조선시국강연반에 참여하여 평안북도에서 시국인식을 강조하는 강연을 했다. 1938년 2월에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를 창립 발기하고, 7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9년 2월에는 경성부지원병후원회 고문이 되었다.

1939년 4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조선지부 상무이사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 영국미국이 동맹을 맺자 일본 내에서 반영 여론이 일었고, 이에 배영동지회가 조직되었다. 김명준은 배영동지회 상담역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관하는 국민정신 선양을 위한 각 도 지역 순회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11월에는 유교계의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조선 유림 단체를 통합하여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이사로 위촉되었다.

1939년 민중신문사 대표 겸 편집인, 발행인을 맡았다.

1940년 창씨개명령 시행 후, 가네다 아키(金田明)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하였다. 1941년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조선임전보국단이 결성될 때 창립발기인이자 회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8월 흥아보국단 상임위원회 위원이자 흥아보국단 경기도지회 위원을 겸했다. 1941년 9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가 전시 채권 판매를 위해 조직한 채권가두우격대의 경성부 명치정지부 회원으로 참여했다. 1941년 10월, 흥아보국단임전대책협의회가 통합되어 조선임전보국단이 조직될 때 참여하여 감사로 선출되었다. 1943년 8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김명준은 일본군의 전쟁 수행에 조선인이 군인, 징용 등으로 참여하면 일본 정부 내에서 조선인 참정권과 조선인의 일본 국회 입후보를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 조선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조선인 징용, 징집, 자원병 입대 등 다양한 경로로 조선인의 참전, 전사, 부상 등이 확대되자,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참정권 허용, 입후보 허용 주장을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1940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일본 정부에 조선인 참정권 허용과 중의원 입후보 허용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는 허용하지 않았지만, 1942년부터 귀족원 의원에 조선인을 선임하고, 1945년에는 중의원 선거에 조선인 출마와 입후보를 허용했다.

2. 4. 생애 후반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본적은 경성부이며, 대한제국 궁내부 비서관, 일진회 및 국민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1][3] 1920년 경기의 중추원 참의 후보로 추천되었고, 이후 중추원 학예부 주사 위원을 지냈다.[1] 1945년 4월부터는 귀족원 조선·대만 칙선 의원을 역임했다.[2]

3. 사후 평가

2002년 대한민국 국회 민족정기회가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도 인정되었다.[3][4]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김석인(金錫仁)


참조

[1] 논문 朝鮮議会設置要求と総督政治の近代性をめぐる問題 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 2008-01-31
[2] 웹사이트 議会制度七十年史. 第1 https://dl.ndl.go.jp[...] 1960-12
[3] 웹사이트 국회민족정기모임 발표 친일파 708명 명단(한자이름) http://legacy.www.ha[...] 2002-02-28
[4] 웹사이트 06년 12월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 확정 공개 https://m.hankookilb[...] 2021-12-06
[5] 서적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12-27
[6] 문서 고종시대사 6집 융희 4년 2월 19일자, "安重根事件에 連累嫌疑로 被囚되었던 安昌浩·李甲·李璣鍾·李鍾浩·金明濬이 放免되다."
[7] 뉴스 직원임명발표 동아일보 1921-04-29
[8] 뉴스 사령 동아일보 193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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