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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제루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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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제루 2세는 1095년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1154년 사망한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이다. 노르만 출신으로, 1127년 푸글리아 공작 빌헬름 2세의 사망 후 시칠리아와 나폴리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1130년 반(反)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의 지지를 받아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했으며, 이후 교황 인노첸시오 2세와 대립하며 남이탈리아를 장악했다. 그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시칠리아를 지중해 해상 강국으로 만들었다. 루제루 2세는 아프리카 해안을 정복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는 등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으며, 팔레르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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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제루 2세
기본 정보
로제리오스 렉스 (Rogerios Rex)라는 그리스 문자로 로저 2세가 예수 그리스도 (IC)로부터 왕관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자이크]], [[팔레르모]], [[마르토라나]].
로제리오스 렉스 (Rogerios Rex)라는 그리스 문자로 로저 2세가 예수 그리스도 (IC)로부터 왕관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자이크, 팔레르모, 마르토라나.
이름로제르 2세
이탈리아어 이름루게로 2세
시칠리아어 이름루게루 2세
통치
시칠리아 왕 재위1130년 9월 27일 – 1154년 2월 26일
대관식1130년 12월 25일
시칠리아 백작 재위1105년 – 1130년 9월 27일
이전시몬
후임굴리엘모 1세
가문
왕가오트빌 가문
개인 정보
출생일1095년 12월 22일
출생지밀레토, 칼라브리아 주
사망일1154년 2월 26일
사망지팔레르모, 시칠리아 왕국
매장지팔레르모 대성당, 시칠리아
가족
아버지로제르 1세
어머니아델라이데 델 바스토
배우자엘비라 데 카스티야
시빌 드 부르고뉴
베아트리스 드 레텔
자녀로제르 3세
탄크레디
굴리엘모 1세
알폰소
콘스탄차 1세
시몬 (사생아)

2. 배경

11세기 초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이탈리아로 몰려들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오트빌가이다. 이들은 사라센과 때로는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벌였는데 용맹함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나중에 이들은 단순한 용병을 넘어서 남부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권력을 잡고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1]

노르만 출신의 장군 로베르 기스카르(루베르투 귀스카르루)와 그의 동생 로제르(후의 시칠리아 백작 루제루 1세)에 이르러 남부 이탈리아에서 작위를 인정받고 칼라브리아, 아풀리아, 시칠리아, 나폴리 등 남부 이탈리아는 사실상 노르만족의 영토가 되었다.[1]

루제루 1세는 1095년 칼라브리아주 밀레토에서 그의 막내아들 루제루가 태어났을 당시 시칠리아 백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루제루 1세의 조카인 로제르 보르사는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이었고, 그의 손조카인 카푸아의 리처드 2세는 카푸아 공작이었다. 많은 수의 소규모 백작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사실상 주권을 행사했다. 이 백작들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이 세 명의 노르망디 통치자 중 한 명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그러한 충성은 일반적으로 약했고 종종 무시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권력 획득

11세기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족은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이탈리아로 몰려들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오트빌가이다. 이들은 사라센과 때로는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벌였는데 용맹함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나중에 이들은 단순한 용병을 넘어서 남부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권력을 잡고 이 지역의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1]

노르만 출신의 장군 로베르 기스카르(루베르투 귀스카르루)와 그의 동생 로제르(후의 시칠리아 백작 루제루 1세)에 이르러 남부 이탈리아에서 작위를 인정받고 칼라브리아, 아풀리아, 시칠리아, 나폴리 등 남부 이탈리아는 사실상 노르만족의 영토가 되었다.[1]

루제루 1세가 1101년에 죽자, 그의 어린 아들 시몬이 어머니인 아델라이드 델 바스토의 섭정 하에 백작이 되었다. 시몬은 4년 후인 1105년에 12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아델라이드는 아홉 살인 그녀의 막내아들 루제루 2세의 섭정으로 계속해서 통치했다.[5]

1105년 형 시몬 드 오트빌(Simon of Hauteville)이 사망하자 루제루 2세는 어머니 아델라이드 델 바스토의 섭정 하에 시칠리아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팔레르모(Palermo)의 그리스 에미르(emir) 크리스토둘루스(Christodulus)와 같은 저명인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1112년, 16세의 나이에 루제루 2세는 6월 12일 자 성문서에서 "이제 기사이자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Calabria) 백작"으로 명명되면서 개인 통치를 시작했다.[7]

3. 생애

루제루 2세는 시칠리아 백작 루제루 1세와 그의 세 번째 부인 아델레이데 델 바스토의 아들로 태어났다. 1101년 아버지가 죽자 시칠리아 백작위는 형 시무니에게 돌아갔으나 4년 후 형도 죽었다. 당시 루제루 2세는 9살이었기 때문에 어머니 아델레이데가 섭정을 맡았다.

1112년 성년이 되어 스스로 직무를 개시했으며, 1117년 카스티야알폰소 6세의 딸 엘비라 데 카스티야와 결혼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하던 루베르투 귀스카르의 후손들인 사촌들에게서 조금씩 자신의 잇권을 얻어내고 영토를 확보해나갔다. 1122년에는 칼라브리아를 모두 손에 넣었고, 1127년 풀리아 공작 굴리엘모 2세가 자식 없이 죽자 풀리아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당시 이탈리아 귀족들은 비천한 가문이었던 오트빌가가 지배적인 가문으로 성장한 것을 시기하였고, 교황 호노리오 2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강력한 왕국이 들어서는 것이 교황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루제루 2세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루제루 2세는 강력한 군사력과 때로는 뇌물도 서슴지 않는 외교술로 결국 반대를 종식시키고 1128년에 교황 호노리오 2세는 루제루 2세를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그리고 시칠리아를 통합하는 공작으로 임명했다.

32세에 루제루 2세는 유럽의 강력한 군주 중 한 사람이 되었으나,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왕관이었다. 1130년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로부터 시칠리아 왕위를 받았으나,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하는 로마 황제 로타르 3세잉글랜드, 프랑스, 그리스의 지지를 얻어 침공해 오면서 10년간 전쟁을 벌였다. 1137년까지는 열세였지만, 로타르 3세가 제국으로 돌아간 후 반격하여 1139년까지 대부분의 영토를 탈환했다. 아나클레투스 2세 사후 인노첸시오 2세와 화해하고, 1144년에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위를 인정받았다.

시칠리아 왕국이탈리아인, 그리스인, 아랍인, 노르만인, 유대인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국가였으며, 지중해의 지배권을 장악하여 유럽의 강국 중 하나가 되었다. 1147년 제2차 십자군 당시 그리스 지배를 노렸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154년 사망 후 왕위는 아들 빌헬름 1세가 계승했다.

그는 알-이드리시에게 세계 지도(타불라 로제리아나)를 만들게 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알-이드리시는 루제루 2세의 말년에 이 지도의 해설로서 「루제루의 책」이라고 불리는 지리학 서적을 저술했지만, 아랍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주로 이슬람권에서 널리 퍼졌다.

3. 1. 시칠리아 왕위 창설

1130년 초 교황 호노리우스 2세가 사망하자 인노첸시오 2세와 아나클레투스 2세 두 명의 교황 후보자가 교황 자리를 두고 경쟁하였다. 인노첸시오 2세는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의 후원으로 황제 로타르 3세 등 여러 제후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아나클레투스는 루제루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3]

루제루 2세는 아나클레투스로부터 시칠리아 왕관을 받는 대가로 그를 교황으로 지지했다.[3] 그 해 크리스마스에 아나클레투스는 교황 칙령으로 루제루 2세를 최초의 시칠리아 왕으로 임명하였고 팔레르모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3]

3. 2. 반란과 황제와의 투쟁

루제루 2세는 이후 10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응해야 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프랑스의 루이 6세, 잉글랜드의 헨리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3세를 규합하여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와 루제루 2세에 대항하는 연합을 조직했다. 그 사이 남부 이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루제루 2세는 이를 차례로 진압했다. 1132년 아풀리아 반란에서 바리 공작 그리모알드를 폐위하고 그의 아들 탕크레드를 바리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듬해 로타르 3세가 로마에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반란군들의 군사 요청은 거절당했다. 황제가 돌아간 후, 루제루 2세는 반격하여 아들 알폰소를 카푸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한편, 로타르 3세는 피사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비잔티움 제국의 요한네스 콤네누스 황제와 연합하여 루제루 2세에 대항하는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1136년 공격을 개시했다. 로타르 3세가 이끄는 독일 연합군은 살레르모로 진격했고, 루제루 2세는 시칠리아에 머물렀다. 살레르모는 함락되었고, 독일군은 남부 이탈리아를 유린했다. 1137년 6월 바리가 함락되었고, 교황과 황제의 연합군은 아풀리아 대부분을 장악한 후 황제는 독일로 돌아갔다.[1]

1130년, 아말피 공국이 반란을 일으켰고, 1131년 루제루는 팔레르모의 존을 메시나 해협 건너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왕실 군대와 합류시켜 육로로 아말피를 공격하도록 했다. 동시에 안티오크의 조르주는 바다에서 아말피를 봉쇄하고 카프리에 기지를 세웠다. 아말피는 곧 항복했다.[1]

1132년, 루제루는 카푸아의 로베르토 2세와 알리페의 란울프 2세를 로마로 보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루제루의 이복 여동생이자 란울프의 아내인 마틸다는 학대를 주장하며 루제루에게 도망쳤다. 동시에 루제루는 란울프의 형제의 아벨리노 백작령을 합병했다. 란울프는 아내와 백작령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명령을 어기고 로베르토와 함께 로마를 떠났다.[1]

먼저 루제루는 아풀리아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는 바리의 그리몰드를 물리치고 폐위시키고 그의 차남인 탕크레드를 대신 임명했다. 한편, 로베르토와 란울프는 교황령 베네벤토를 점령했다. 루제루는 그들을 만나러 갔지만 1132년 7월 25일 노체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살레르노로 후퇴했다.[1]

다음 해, 로타르 3세는 황제 대관식을 위해 로마에 왔다. 반란 지도자들은 그를 만났지만, 로타르의 군대가 너무 작아 도움을 거절당했다. 황제가 떠나자, 반대 세력 내 분열로 루제루는 역전의 기회를 얻었다. 1134년 7월까지 그의 군대는 란울프, 세르기우스, 그리고 다른 반란 지도자들을 항복시켰다. 로베르토는 카푸아에서 쫓겨났고 루제루는 그의 셋째 아들인 오트빌의 알폰소를 카푸아 공으로 임명했다. 루제루 2세의 장남인 로제르는 아풀리아 공작 작위를 받았다.[1]

로제르 2세의 전쟁 참여 모습, 페트루스 데 에불로의 ''Liber ad honorem Augusti''(1196년)에서 발췌.


한편, 로타르가 로제루를 공격하려는 계획은 피사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비잔티움 황제 요한 2세의 지지를 얻었다. 망명 중인 카푸아 공이 이끄는 피사 함대는 1135년 나폴리 앞바다에 정박했다. 란울프는 로제루가 치명적인 병에 걸렸거나 이미 죽었다는 소식에 고무되어 로베르토와 세르기우스에 합류했다. 아베르사를 포함한 여러 곳이 반군에게 넘어갔고, 왕실 총리 구아린이 지휘하는 카푸아만 저항했다. 그러나 6월 5일, 로제르는 살레르노에 상륙하여 본토 각 주를 놀라게 했다. 여러 부대로 나뉜 왕실 군대는 아베르사와 심지어 반란의 자연 지도자인 란울프의 근거지인 알리페까지 쉽게 정복했다. 대부분의 반군은 나폴리로 피신했고, 7월에 포위되었지만, 도시 내 열악한 위생 상태에도 불구하고 로제르는 나폴리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 해 말 메시나로 돌아갔다.[1]

1136년, 로타르 3세와 바이에른 공작 헨리 자랑스러운 자가 이끄는 황제군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했다. 헨리, 로베르트, 랜울프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왕국의 반도 수도인 살레르모를 포위 공격했다. 로저 2세는 시칠리아에 남아 있었고, 대륙 주둔군은 로베르토 셀비(Robert of Selby) 총리 아래 무방비 상태에 놓였으며, 비잔티움 황제 요한 2세 콤네누스조차 로타르 3세에게 보조금을 보냈다. 살레르노는 항복했고, 독일군과 노르만 군대는 아풀리아 남쪽 끝까지 진군했다. 1137년 6월, 로타르 3세는 바리를 포위하고 함락시켰다. 산 세베리노에서 로타르 3세와 교황은 1137년 8월 랜울프를 아풀리아 공작으로 공동으로 임명했고, 황제는 독일로 돌아갔다. 최대 위험에서 벗어난 로저 2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트로페아에 상륙했다. 살레르니타인들의 환영을 받은 후, 그는 캄파니아에서 지반을 회복하여 포주올리, 알리페, 카푸아, 아벨리노를 약탈했다. 세르지우스는 그를 나폴리의 봉건 영주로 인정하고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에게 충성을 바꾸도록 강요받았다. 이 순간은 독립적인 나폴리 공국의 몰락을 의미했고, 그 후 고대 도시는 노르만 왕국에 완전히 통합되었다.[1]

거기서 로저 2세는 베네벤토와 아풀리아 북부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 랜울프 공작은 멜피, 트라니, 트로이아, 바리 도시 출신의 약 1,500명의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10월 30일, 리냐노 전투( 몬테 가르가노 근처)에서 로저 2세와 그의 아들, 그리고 나폴리의 세르지우스는 랜울프 공작의 방어군과 맞섰다. 이것은 로저 2세 경력에서 가장 큰 패배였다. 세르지우스는 사망했고 로저 2세는 살레르노로 도망쳤다.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는 1138년 1월에 사망했지만, 인노켄티우스 2세는 왕과 화해하려 하지 않았다.[1]

1138년 봄, 왕실 군대는 카푸아 공국을 침공했다. 알리페 백작이 주저하는 동안, 베네벤토의 지원을 받게 된 로저 2세는 그 지역의 반군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1139년 4월,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인노켄티우스 2세는 로저 2세를 파문했다. 자신의 수도인 트로이아에 피신했던 랜울프는 1139년 4월 30일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로저 2세는 그의 시신을 트로이아 대성당 묘에서 발굴하여 도랑에 버렸지만, 나중에 후회하고 제대로 다시 매장했다.[1]

이때 세르지우스가 죽자 알폰소가 그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선출되었고, 그의 형제 로저와 함께 압루쪼를 정복하러 떠났다.[1]

3. 3. 남이탈리아 제패

황제가 돌아간 뒤 루제루는 즉각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칼라브리아로 들어갔고 캄파냐 지방을 수복했다. 기세를 몰아 그는 나폴리를 자신의 영토에 포함시켰다. 1138년에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는 죽었는데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그래도 루제루와 화해하길 거부했다.

이듬해 루제루는 갈루초에서 교황 인노첸시오 2세의 군대를 쳐부수고 교황을 포로로 잡아 남 이탈리아 전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인정할 것을 강요했다. 교황은 루제루를 ''시칠리아 왕, 아풀리아의 백작이자 카푸아의 왕자''(''rex Siciliae ducatus Apuliae et principatus Capuae'')로 선포했다. 이때 형성된 왕국의 영토는 이후 500년간 양시칠리아 왕국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게 된다. 1139년 루제루는 남이탈리아를 완전히 평정하고 이탈리아반도를 아들에게 맡기고 시칠리아로 돌아온 루제루는 1140년 〈아리아노 조례〉라는 자신의 통치 철학을 담은 법전을 공포했다.

1127년 7월 아풀리아의 빌헬름 2세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로제르는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모든 호텐빌 가문의 소유지와 거의 30년 전에 아풀리아에 명목상으로 주어졌던 카푸아 공국의 봉건적 지배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시칠리아와 아풀리아의 통합은 교황 호노리우스 2세와 공국의 백성들에 의해 저항을 받았다.[1]

1140년, 7월 25일 왕의 승리 후 발행된 시카토 두칼리스(Scyphate Ducalis) 동전. 앞면: 그리스도. 뒷면: 로제르 2세와 로제르 공작.


1138년 1월 아나클레투스 사망 후, 로제르 2세는 인노첸시오 2세로부터 자신의 칭호에 대한 확인을 구했다. 그러나 교황은 시칠리아 왕국과 교황령 사이에 완충국가로서 독립적인 카푸아 공국을 원했고, 이는 로제르 2세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139년 여름, 인노첸시오 2세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왕국을 침략했지만, 1139년 7월 22일 로제르 2세의 아들에 의해 오늘날 카시노 남동쪽에 위치한 갈루치오에서 매복 공격을 당해 포로로 잡혔다. 사흘 후, 미냐노 조약에 따라 교황은 로제르 2세를 "시칠리아 왕, 아풀리아 공작, 카푸아 지휘관"(rex Siciliae ducatus Apuliae et principatus Capuae)으로 선포했다. 그의 왕국(regno)의 경계는 1144년 10월 교황과의 휴전으로 나중에야 확정되었다. 이 지역들은 향후 7세기 동안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을 구성하게 되었다.[2]

1139년, 지난 1년간의 전쟁 중에도 견고한 성벽 뒤에서 5만 명의 주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은 바리는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도시의 반란을 이끌었던 "가장 뛰어난 군주"(excellentissimus princeps) 야킨투스는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도시는 약탈을 피했다. 로제르 2세가 야킨투스 공작과 그의 고문들을 처형한 것은 아마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잔혹한 행위였을 것이다.[3]

그의 아들들이 본토에서 산발적인 저항을 진압하는 동안, 로제르 2세는 1139년 11월 5일 팔레르모로 돌아와 중요한 입법 행위를 계획했다. 바로 이탈리아 남부의 그의 영토를 일관된 국가로 확립하려는 시도였던 아리아노 칙령이다. 그는 1140년 아들들의 진척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돌아온 후, 반도 영토의 중심지이자 (그의 전임자들 시대에 반란의 중심지였던) 아리아노로 갔다. 거기서 그는 모든 시칠리아의 문제를 규율하는 중요한 법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은 왕과 그의 관료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하고 종종 반란을 일으키는 봉신들의 권한을 축소했다. 그곳에서 왕국을 중앙집권화하면서 로제르 2세는 아풀리아 공국의 이름을 딴 새로운 표준 화폐인 "두카트"를 선포했다.[3]

3. 4. 통치 말기

그는 이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왕국은 노르만인, 동고트인, 알란인, 사라센이 섞여있는 다민족 국가였고 그는 모든 민족을 편견없이 중용하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풀었으며 학문을 장려했다. 그의 치세 마지막 15년 동안 그는 팔레르모의 궁정에서 당대의 이름난 석학들과 함께 보냈다. 시칠리아이슬람 문화, 비잔티움의 그리스 문화, 북유럽의 노르만 문화, 라틴 문화가 뒤섞여 격조 높은 문화를 만들어냈다.[9]

루제루 2세의 무덤 (팔레르모).


루제루 2세는 제2차 십자군으로 유럽이 온통 들떠 있을 때에도 이에 동참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왕국의 백성이 대부분 이슬람교도인 것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어머니 아델레이데가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1세와 결혼했다가 다시 쫓겨왔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십자군 국가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제루 2세는 58세의 나이로 1154년 2월 26일 팔레르모에서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네 번째 아들인 구기에르무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제루 2세는 팔레르모 대성당에 묻혔다.

3. 5. 시칠리아 해군

루제루 2세의 치세에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가진 왕국이 되었다. 그는 섬나라인 시칠리아의 발전을 위해 강력한 해군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이슬람 출신의 아미르를 채용하여 해군을 발전시켰다.[9]

루제루 2세 시대 시칠리아 해군 제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안티오키아의 게오르기우스이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인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파티마 왕조를 위해 복무하다가 뛰어난 능력으로 1132년 시칠리아 해군 사령관, "아미르 중의 아미르"(''ammiratus ammiratorum'')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북아프리카 연안을 정복하고 트리폴리를 점령했다.

1149년에는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올라가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황궁 창문으로 화살을 쏘기도 했다.

해군 제독을 의미하는 "아드미랄"(admiral)은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이 아랍어 아미르(emir)를 차용하여 쓴 데서 비롯되었다. 원래는 아미르알바흐르(emir-al-bahr), 즉 "바다의 지배자"라는 복합어이다.

여러 제독 또는 "에미르"들 휘하에서 강력한 함대가 건설되었는데, 그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이전에 마흐디야의 무슬림 왕자 휘하에서 봉사했던 조지였다. 주로 그의 공로로 아프리카 해안에 대한 일련의 정복이 이루어졌다(1146~1153년).[9]

3. 6. 죽음

1154년 2월 26일 58세의 나이로 팔레르모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네번째 아들인 구기에르무가 왕위에 올랐다. 루제루는 팔레르모 대성당에 묻혔다.

4. 가족 관계

1117년 엘비라 데 카스티야 (카스티야의 알폰소 6세의 딸)와 첫 번째 결혼을 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루제루1118년1148년풀리아 공작 (1135)
탕크레디1119년1138년바리의 제후 (1135)
알폰소1121년1144년카푸아 공작 (1135) 및 나폴리 공작
아델리사1126년?1184년 이후
구기에르무1131년1166년시칠리아 왕위 계승
엔리케1135년어려서 죽음



1149년 위그 2세 드 부르고뉴 공작의 딸 시빌 드 부르고뉴와 두 번째 결혼을 하여 2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엔리쿠1149년어려서 죽음
성명미상1150년



1151년 레텔의 베아트리체(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의 손녀)와 세 번째 결혼을 하여 루제루 사후에 딸 하나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쿠스탄차1154년1198년황제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와 결혼,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시칠리아 왕위 계승



이외에 다섯 명의 사생아가 있었다.


  • 몰리세 백작 위그 1세의 딸과의 사이:
  • 시몬, 1144년 타란토 공작이 되었다.
  • 알려지지 않은 정부들과의 사이:
  • 딸, 로드리고 가르세스(후에 몬테스카글리오소 백작 헨리)와 결혼
  • 딸, 나폴리 귀족 아담과 결혼
  • 클레멘자, 몰리세 백작 위그 2세와 결혼
  • 마리나 또는 마르티나, 제독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투스와 결혼

5. 문화적 업적

루제루 2세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 그의 왕국은 노르만인, 동고트인, 알란인, 사라센인이 섞여있는 다민족 국가였고 그는 모든 민족을 편견없이 중용하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풀었으며 학문을 장려했다. 그의 치세 마지막 15년 동안 그는 팔레르모의 궁정에서 당대의 이름난 석학들과 함께 보냈다. 시칠리아는 이슬람 문화, 비잔티움의 그리스 문화, 북유럽의 노르만 문화, 라틴 문화가 뒤섞여 격조 높은 문화를 만들어냈다.[9]

팔레르모의 팔라티나 예배당은 로제르의 교회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노르만 양식의 문, 사라센 양식의 아치, 비잔틴 양식의 돔, 아랍어 문자로 장식된 지붕을 갖추고 있다. 이는 노르만인 탕크레드의 손자가 지배했던 찬란하고 혼합된 문명의 가장 인상적인 산물일 것이다. (1911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발췌)


로제르 2세는 무함마드 알-이드리시, 닐루스 닥소파트리우스(Nilus Doxopatrius) 또는 네일로스 닥소파트레스(Neilos Doxapatres)와 같이 다양한 민족과 문화 출신의 저명한 인물들을 주위에 모았다. 지중해 중심부에 위치한 시칠리아는 역사적으로 여러 집단에 의해 지배되어 왔으며, 로제르 2세는 그의 왕국에 존재하는 여러 종교, 민족 및 언어에 대해 학식 있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많은 그리스인아랍인을 고용했다. 그는 영국인 토마스 브룬, 함대의 크리스토둘루스, 안티오크의 조지와 같은 여러 국적의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았다. 특히 안티오크의 조지는 1132년에 "에미르들의 에미르"(ammiratus ammiratorum), 즉 사실상 총리 베지르로 임명되었다.

로제르 2세의 왕실 망토에는 이슬람력 528년(1133~1134년)이 새겨져 있어 그의 대관식에 사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권력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특별한 행사를 위해 제작된 이 호화로운 의복은 노르만족의 승리와 시칠리아의 새로운 왕조의 상징으로 착용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3] 이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의 대관식 망토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빈 궁정금고에 소장되어 있다.

이 망토는 노르만족의 다문화적인 궁정의 한 예시이자 팔레르모의 무역을 보여주는 표식이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수입한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졌으며, 외부 패널은 금실 자수, 진주, 에나멜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4][3] 안감 패널은 세 종류의 비단으로 짜여진 다섯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5] 페르시아 만산 진주는 수천 개가 자수의 각 부분을 둘러싸고 있다. 진주는 지중해 전역의 직물 장식으로 흔히 사용되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의복에도 사용되어 높이 평가받았다.[6] 에나멜 장식 또한 비잔티움 제국에 기인한다. 금실 자수는 티라즈 띠, 캘리그래피로 쓰인 아랍어 텍스트와 쿠피체 서체를 고려할 때, 이슬람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3] 티라즈 직물과 기타 왕실 의복은 전용의 개인 왕실 공방에서 제작되었다.[7] 이것은 파티마 양식의 왕실 의복 중 거의 유일하게 온전히 보존된 유물이다.

망토 아랫부분의 티라즈 띠에 쓰인 비문에는 "행운, 위엄, 웅장함, 완벽함, 인내, 우월성, 환영, 번영, 관대함, 광채, 자부심, 아름다움, 욕망과 희망의 충족, 밤낮으로 끊임없는 즐거움, 변함없는 영광, 헌신, 보호의 유지, 행운, 구원, 승리와 능력이 시칠리아의 수도에서 528년 H. [1133~1134년]에 창조된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다.[3][8] 이 망토는 지위를 높이고, 착용자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고, 로제르 2세의 왕권을 강조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초대 시칠리아 왕 루제루 2세는 알-이드리시에게 세계 지도(타불라 로제리아나)를 만들게 했다. 또한, 알-이드리시는 루제루 2세의 말년에 이 지도의 해설로서 「루제루의 책」이라고 불리는 지리학 서적을 저술했지만, 아랍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주로 이슬람권에서 널리 퍼졌다.

6. 평가

카롤 시마노프스키의 1926년 오페라 ''로저 왕''의 주제가 루제루 2세이다.[10] 타릭 알리의 책 ''팔레르모의 술탄''에도 루제루 2세의 생애 마지막 몇 달이 등장한다. 아카데미아 노르만나와 관련된 사립 비전통 대학교인 스투디오룸 우니베르시타스 루게로 2세는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2001년 4월 30일 미국에 설립되었다.[10]

참조

[1] 서적 Norman Kingdom
[2] 서적 Norman Kingdom
[3] 웹사이트 Mantle of Roger II of Sicily https://www.qantara-[...] 2021-04-18
[4] 논문 Sicily and the Staging of Multiculturalism http://doi.wiley.com[...] John Wiley & Sons, Inc. 2020-11-07
[5] 학술지 Textile Connections? Two Ifrīqiyan Church Treasuries in Norman Sicily and the Problem of Continuity across Political Change https://www.tandfonl[...] 2013-05-30
[6] 학술지 Textile Connections? Two Ifrīqiyan Church Treasuries in Norman Sicily and the Problem of Continuity across Political Change https://www.tandfonl[...] 2013-05-30
[7] 웹사이트 Tiraz: Inscribed Textiles from the Early Islamic Period https://www.metmuseu[...]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20-11-07
[8] 웹사이트 Manto de Roger II de Sicilia https://www.qantara-[...] 2021-04-18
[9] 서적 A History of the World in Twelve Maps Viking 2013
[10] 웹사이트 The Ruggero II University http://www.normana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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