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응식 (1844년)
1. 개요
민응식은 1844년에 태어나 1903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인현왕후의 친족으로,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피신시키는 데 기여하며 고속 승진했다. 이후 척신 세력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 제거에 앞장섰다. 갑오경장으로 유배되었으나 석방 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했다.
| 이름 | 민응식(閔應植) |
|---|---|
| 출생 | 1844년 |
| 사망 | 1917년 |
| 본관 | 여흥(驪興) |
| 자(字) | 백순(伯純) |
| 주요 관직 |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지경연사 육군법원 검사총장 중추원 찬의 |
|---|---|
| 봉작 | 자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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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조선의 정치인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조선의 정치인 -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독재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도 받으며 4·19 혁명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서거하였다. -
대한제국 고종 -
윤덕영
윤덕영은 조선 말기 문신이자 대한제국 관료, 일제 강점기 조선귀족으로, 한일 병합 조약에 적극 가담하고 순종의 일본 천황 알현을 강요했으며 고종 독살 의혹을 받았고,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대한제국 고종 -
순정효황후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황후로, 황태자비 책봉 후 순종 즉위와 함께 황후가 되었으나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이왕비로 격하되었고, 순종 사후에는 대비로 불리다 한국 전쟁 중 창덕궁을 지키고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낙선재에서 지내다 심장마비로 사망 후 유릉에 합장되었다.
2. 생애
민응식은 이조·형조 판서를 지낸 민영우의 아들로, 1882년 임오군란 때 왕비 명성황후의 피난을 도와 신임을 얻었다. 같은 해 10월 과거 문과에 급제한 후 1883년 종2품으로 승진, 호조 참판, 도승지를 거쳐 1884년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885년 정2품으로 승진하여 병조를 제외한 육조의 판서, 협변(次席) 내무부사, 독변(主席) 내무부사 등을 역임하고, 1887년 종1품으로 승진했다. 1894년 민씨 일족의 세도 정치가 붕괴되자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으나, 1895년 사면되어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2.1. 젊은 시절
1844년에 태어났으며, 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인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8대손이자, 좌의정 민진원의 7대손이다. 생부는 민영우(閔泳愚)였으나, 민한준(閔漢俊)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조부는 민원용이다. 명성황후에게는 친정 손자뻘이 되는 친척이었다.
유학을 공부하여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1882년 초 직부전시(直赴殿試)의 자격을 얻어 1882년(고종 19년) 증광별시(增廣別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세자익위사 익찬으로 재직 중, 홍계훈 등과 함께 명성황후의 피신을 도왔다. 장호원(長湖院)에 있던 민응식의 집을 명성황후의 피신처로 제공하였으며, 명성황후는 난병이 한성부로 집결되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여주군 민유중의 생가로 갔다가 다시 충주에 있던 민응식의 다른 집으로 은신하였다.
2.2. 관료 생활
민응식은 이조·형조 판서를 지낸 민영우의 아들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왕비 명성황후의 피난을 도와 신임을 얻었다. 같은 해 10월 과거 문과에 급제하여 1883년 종2품으로 승진하고, 호조 참판, 도승지를 거쳐, 1884년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885년 정2품으로 승진하여 병조를 제외한 육조의 판서, 협변(次席) 내무부사, 독변(主席) 내무부사 등을 역임하고, 1887년 종1품으로 승진했다. 1894년 민씨 일족의 세도 정치가 붕괴되자 전라도 고금도에 유배되었으나, 1895년 사면되어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2.2.1. 임오군란 직후
명성황후가 복귀하자 민응식은 고속 승진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그해 11월 규장각직각, 12월 홍문관응교가 되었다가 통정대부로 승진, 승정원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발탁되었다. 1883년 봄 군국사무 참의(軍國事務參議), 이조참의 등을 지냈고, 그해 혜상공국총판(惠商公局總辦), 성균관대사성 등을 지내며 민씨 척족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해 10월 작헌례의 예모관(禮貌官)이 되었다가 충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12월 군국사무독판으로 내직으로 되돌아왔다.
흥선대원군을 견제하려던 명성황후는 민응식을 신뢰하여 중용하였고, 민응식은 친척인 민영목, 세자빈의 친정아버지 민태호(閔台鎬) 등 척신들과 함께 수구파를 형성,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세력을 업고 개화파 타도에 앞장섰다. 또한 김옥균, 서재필 등이 일본의 폭력배를 데리고 강화도에 침입하였다는 말을 유포하여 민심을 소란하게 하였다.
민응식은 삼촌인 민영위, 민영기, 조카인 민병석 등과 함께 4인방 체제를 형성했다. 민병석은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의 아버지이다.
2.2.2. 갑신정변 이후
1884년 갑신정변 당시 피신하여 살아남았다. 그해 갑신정변에 가담한 개화파 인사들의 단죄와 심판을 주도하였고, 친군후영영무(親軍後營營務), 좌영사(左營使), 도승지, 규장각직제학 등을 거쳐 그해 8월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했다가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등을 역임했다. 1885년 친군 좌영사(親軍左營使), 이조참판을 지내고, 그해 6월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협판내무부사를 겸하고, 곧 지경연사(知經筵事)로 발탁되어 돌아왔다. 1886년 세자시강원 우부빈객, 예문관제학, 이조판서, 병조판서, 도총제사(都總制使) 등을 역임했다. 이후 민겸호, 민규호, 민태호 등의 뒤를 이어 척신 세력의 대표로 활동하며 민영익(閔泳翊) 등과 같이 위안스카이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운동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1888년 판돈녕부사, 중건소서사관(書寫官), 겸 우영사(右營使), 상량문 제술관(上樑文製述官), 호조판서, 삼도육군 통어사(三道陸軍統禦使) 등을 역임했다. 1890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1891년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고, 좌부빈객을 거쳐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892년 방곡령(防穀令)으로 인한 황두배상문제(黃豆賠償問題)가 발생하자 이를 극력반대, 일본의 고압적인 태도를 규탄하였고, 민병석(閔丙奭) 등과 함께 개화파 잔당의 제거를 추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하여 있던 김옥균의 암살을 모의, 장응규(張應奎) 등을 자객으로 밀파하여 살해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통어사, 도총제사(都總制使)를 역임하고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로 나갔다.
2.3. 생애 후반
1894년 갑오경장으로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고 유길준, 서재필 등이 복귀하자 개화파 인사들의 맹공격을 받고 전라남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1894년 가을 석방되어 복귀하여 1897년 중추원 일등의관, 태의원경(太醫院卿), 1900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재궁상자서사관(梓宮上字書寫官), 경효전 제조,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등을 역임했다. 그해 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903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재직 중 그해 10월 죽었다. 향년 59세였다.
3. 가계
| 관계 | 이름 |
|---|---|
| 친고조부 | 민양현 |
| 친증조부 | 민치화 |
| 친할아버지 | 민원용 |
| 친아버지 | 민영우 |
| 양아버지 | 민한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