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크라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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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루노 크라이스키는 1911년 빈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정치인으로, 1970년부터 1983년까지 오스트리아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을 이끌며 스칸디나비아식 사회 개혁 모델을 추구했고, 13년간의 장기 집권을 통해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지도자가 되었다. 크라이스키는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여 낙태와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다양한 사회 복지 정책을 시행했다. 외교적으로는 중립 외교를 펼치며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역할을 수행했으나, 시오니즘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과 나치 전력자 임용 등으로 논란을 겪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오스트리아의 생활 수준 향상과 복지 국가 확립에 기여했으나, 적자 재정 지출 정책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1983년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199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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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크라이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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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직함 | 오스트리아 연방수상 |
임기 시작 | 1970년 4월 21일 |
임기 종료 | 1983년 5월 24일 |
대통령 | 프란츠 요나스, 루돌프 키르히슐레거 |
부수상 | 루돌프 호이저, 하네스 안드로슈, 프레트 시노바츠 |
전임 | 요제프 클라우스 |
후임 | 프레트 시노바츠 |
직함2 | 외무장관 |
임기2 시작 | 1959년 7월 16일 |
임기2 종료 | 1966년 4월 19일 |
수상2 | 율리우스 라프, 알폰스 고르바흐, 요제프 클라우스 |
전임2 | 레오폴트 피글 |
후임2 | 루조 톤치치소린 |
직함3 | 사회민주당 의장 |
임기3 시작 | 1967년 2월 1일 |
임기3 종료 | 1983년 10월 27일 |
전임3 | 브루노 피터만 |
후임3 | 프레트 시노바츠 |
출생일 | 1911년 1월 22일 |
출생지 | 빈, 오스트리아-헝가리 |
사망일 | 1990년 7월 29일 |
사망지 | 빈, 오스트리아 |
안장지 | 빈 중앙묘지 |
배우자 | 베라 퓌르트 (1942년 결혼, 1988년 사망) |
자녀 | 2명 |
정당 | 사회민주당 |
교육 | 빈 대학교 |
개인 정보 |
2. 어린 시절과 경력
1911년 1월 22일 빈의 마르가레텐 구역에서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9세기 초부터 산업 재산과 정치 참여로 명성을 얻었다.[2][3] 크라이스키는 자신의 부르주아지 배경에 대한 비판과 주변의 빈곤에 대한 분노로 16세에 사회주의 근로 청년단에 가입하며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거나 가족을 완전히 소외시키지 않았다.[4]
1946년 5월 오스트리아로 귀국했으나, 곧 스톡홀름으로 돌아가 북유럽 국가와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1951년 귀국하여 테오도어 쾨르너 대통령의 수석 보좌관 및 정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53년에는 오스트리아 외무 차관으로 임명되어 1955년 조약 체결에 참여, 오스트리아의 독립과 영세 중립국 지위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종교적으로는 불가지론자였으나, 유대교 고정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가톨릭 동포들과의 관계는 프란츠 쾨니히 추기경과의 개인적 우정에도 불구하고 원만하지 않았다.
1934년 사회주의 봉기 이후 투옥되었으며, 1938년 나치 독일의 안슐루스 이후 짧은 기간 동안 게슈타포에 의해 다시 투옥되었다. 이후, 크라이스키는 유대인들이 나라를 떠나는 것에 대한 은혜의 기간을 이용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소비자 협동조합에서 일했으며, 훗날 서독 총리가 되는 빌리 브란트와 평생의 우정을 쌓았다.
전후 오스트리아로 귀국하여 외교관 서비스에 참여했으며, 1955년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회복한 국가 조약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3년 장관직에서 수석 비서관이 되었고, 1959년 외무장관이 되어 유럽 자유 무역 연합(EFTA) 가입 협상을 주도했다. 외무장관 재임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중립의 틀 안에서 공동 시장과 오스트리아를 연결하려는 노력과 1918년 이래 이탈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독일어 사용 지역인 남티롤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를 했다.
15세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청년 조직에 참가하여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배우면서 정치 활동을 했다. 1934년 2월 사건 이후, 사회민주노동당이 엥겔베르트 돌푸스의 독재 정치로 인해 금지되자 비합법적인 반파시스트 활동에 참여했다. 1935년 1월에 체포되어 대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1936년 6월에 석방되었다.
1938년 3월에 나치당 정권 하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1938년 9월에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스톡홀름 협동조합협회에서 근무하며 (1939년 - 1946년), 그곳에서 사회 복지 및 중립 외교를 배웠다. 1942년에는 베라 후스와 결혼했다.
3. 정치 경력
1956년 사회당 소속으로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당 중앙 지도부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1959년 7월, 율리우스 라브 총리의 연립 내각에서 외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크라이스키는 유럽 자유 무역 연합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이탈리아와의 남티롤 문제 해결을 지원했으며, 제3세계 국가들을 위한 "마셜 플랜"을 제안했다.
요제프 클라우스의 오스트리아 국민당이 국민 의회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면서 1966년에 외무 장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1967년 사회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크라이스키는 법무부 장관 크리스티안 브로다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가족법과 형무소를 개정하고, 낙태와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등 자유주의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프란츠 쾨니히 대주교와 협력했으며, 병역 의무 기간을 단축하고 여성의 기회 균등 관련 법률을 통과시켰다. 또한, 국내 소수 민족의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 1974년 오일 쇼크 이후에는 원자력 개발을 추진했으나, 1978년 국민 투표에서 부결되었다.
국제 관계에서 크라이스키는 남북 대화 촉진, 빌리 브란트, 올로프 팔메와 같은 사회 민주주의 리더들과의 협력을 통해 평화와 개발을 추구했다. 오스트리아의 유럽 연합 가입은 어려웠지만, 유럽 통합을 지지하며 동서 간 가교 역할을 했다. 빈 국제 센터 건설과 국제 연합 빈 사무국 설치를 추진하는 등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
시오니즘에 반대하며 안와르 사다트, 무아마르 알 카다피와 같은 아랍 지도자들과 우호 관계를 맺었고, 1980년에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관계를 수립했다. 이스라엘과 아랍 간 중재를 시도했으나, 많은 유대인과 이스라엘인들은 그를 비판했다.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와는 논쟁적인 관계였다. 전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과의 관계도 긴장 상태였다.
1976년에는 브루노 크라이스키 재단이 설립되어, 2년마다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이 수여되고 있다.
3. 1.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당수 (1967-1983)
1966년 크라이스키는 외무부를 떠났고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 다음 4년의 세월을 이용하였다. 1967년 의장직을 위하여 그는 브루노 피터만을 꺾고 당의 신문에 승리하였고 사회민주당원들을 스칸디나비아식 모델에 사회 개혁을 향한 계급 투쟁의 이념으로부터 방향을 바꾸었다.
사회민주당원들에게 국회에서 상대적으로 다수를 준 선거 승리와 함께 정당의 저변 확대를 위한 크라이스키의 노력들은 1970년에 결실을 맺었다. 연정을 형성할 수 없었던 그는 투표인들이 당에게 절대다수를 주었을 때까지 18개월간 위대롭게 통치했던 약한 소수 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러고나서 사회민주당원들은 총리로서 아버지 같은 크라이스키와 함께 13년 동안 홀로 다스렸다. 따라서 그는 합스부르크가 이래 장기적 최고위자가 되어 향수를 불러일으킨 오스트리아인들에게 자신을 "카이저 브루노"로 더빙하는 데 이끌었다.
3. 2. 오스트리아 연방 총리 (1970-1983)
1970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상대적 다수를 차지하면서 크라이스키는 약한 소수 내각을 구성하여 18개월간 통치했다.[6] 이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절대다수를 확보하며 크라이스키는 13년간 총리로 재임했다. 그는 합스부르크가 이래 최장기 집권 지도자가 되었다.[6]
크라이스키의 국내 정책은 견고한 경제 번영과 사회적 파트너십 증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노동과 자본 사이의 협력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그의 국제적 교류는 오스트리아 산업을 위한 무역 협정 및 계약 체결에 기여하며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다.[6]
4. 주요 정책
크라이스키 정부는 보수적인 가톨릭 전통이 강했던 오스트리아 사회에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했다.[7] 크리스티안 브로다 법무부 장관과 함께 오스트리아의 가족법과 형법을 개정하고, 낙태와 동성애를 비범죄화했다.[7]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프란츠 쾨니히 대주교와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7]
병역 의무 기간을 9개월에서 6개월로 단축하겠다고 약속했고, 이후 8개월(6개월 + 8주)로 단축했다.[7] 노동자 혜택 확대, 주 40시간 노동제 도입, 여성 평등 보장 법률 제정 등 노동 및 복지 정책도 강화했다.[7] 오스트리아 내 슬로베니아인 및 크로아티아인 소수 민족의 언어권도 확립했다.[7]
1974년 석유 파동 이후에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추진했으나, 1978년 국민 투표에서 부결되었다.[7]
교육 분야에서는 학생/교사 비율을 감소시키고, 1975년에는 대학 교육 민주화를 위한 법률을 제정하는 등 교육 기회 확대를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11] 크라이스키 재임 기간 동안 교육 부문이 크게 확대되어 대학 교육을 받는 오스트리아인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12]
다음은 크라이스키 정부의 주요 정책들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분야 | 주요 정책 |
---|---|
사회 | 가족법 및 형법 개정, 낙태 및 동성애 비범죄화,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 개선 |
국방 | 병역 의무 기간 단축 (9개월 → 6개월 → 8개월) |
노동 | 노동자 혜택 확대, 주 40시간 노동제 도입, 여성 평등 보장 법률 제정 |
소수 민족 | 슬로베니아인 및 크로아티아인 소수 민족의 언어권 확립 |
에너지 | 원자력 발전소 건설 추진 (1978년 국민 투표에서 부결) |
교육 | 학생/교사 비율 감소, 대학 교육 민주화 법률 제정 (1975년), 교육 기회 확대 |
5. 외교 정책
크라이스키는 국제 무대에서 초강대국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며 공존을 주장하고, 솔직한 진술과 주도권 확보에 힘썼다. 197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와 회담을 가진 최초의 정부 수반이었으며, PLO를 테러리즘의 은폐물로만 생각했던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 PLO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데 기여했다. 아라파트를 빈으로 초청하고 다른 서유럽 지도자들과의 회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1975년 동독과 영사 조약을 체결하여 동독의 외교적 고립을 깨는 등 동구권과의 관계 개선에도 노력했다. 같은 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부회장으로서 리비아를 방문하고, 1982년 무아마르 알 카다피를 빈으로 초청하는 등 중동 국가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1980년 이란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임무를 파견하여 분쟁 당사자 간의 소통 유지를 강조했다.
크라이스키의 외교 정책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비판적인 발언으로 소외시키고, 오스트리아가 아랍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너무 약하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한계를 보였다. 빈은 암살, 시나고그 폭격, 크라이스키의 생명에 대한 위협 등 테러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후 크라이스키는 자신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거리를 두었다.
5. 1. 중립 외교와 국제 협력
크라이스키는 오스트리아의 중립 외교 정책을 강화하고, 국제 연합(UN) 등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증진했다. 빈 국제 센터 건설과 국제 연합 빈 사무국 유치를 통해 오스트리아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24] 동서 냉전 시대에 오스트리아는 동구권과 서구권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으며, 빈은 미국과 소련의 전략 무기 제한 협상(SALT) 초기 단계를 개최하는 장소가 되었다.5. 2. 중동 문제와 이스라엘과의 관계
크라이스키는 유대인이 직면한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시오니즘에 의문을 제기했다.[24] 그는 안와르 사다트나 무아마르 알 카다피와 같은 아랍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1980년 오스트리아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관계를 수립했다. 크라이스키는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며 유럽 유대인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과 이스라엘인들은 그를 배신자로 여겼다. 그는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와 논쟁적인 관계를 가졌으며, 자신을 "유럽에서 골다 메이어가 협박할 수 없는 유일한 정치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크라이스키는 또 다른 오스트리아 유대인이자 전 나치 당원이면서 독일군 전범 사냥꾼인 시몬 비젠탈과도 긴장 관계에 있었다. 1970년 크라이스키 내각에서 4명의 각료가 "나치 당원"의 과거를 가지고 있다고 비젠탈이 주장하자, 크라이스키는 비젠탈을 비판했다. 비젠탈은 이에 대해 크라이스키가 나치즘과 유대주의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오스트리아는 소련을 탈출하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및 서유럽으로 가는 통과 지점 역할을 했다.
6. 논란과 비판
크라이스키는 시온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유대인을 민족이나 인종이 아닌 종교 집단으로 보았다. 그는 유대인이 독자적인 국적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나치의 유대인 인종에 대한 주장과 동일시하며, 이러한 생각이 유대인의 이중 충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고 주장했다.[17]
크라이스키는 메나헴 베긴을 테러리스트라고 칭하는 등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으며, 특히 1973년 인질극 동안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와 격렬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자신이 "골다 메이어가 협박할 수 없는 유럽의 유일한 정치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7] 반면, 안와르 사다트 및 무아마르 카다피와 같은 아랍 지도자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1980년 오스트리아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와 관계를 수립했다.
이러한 크라이스키의 외교 정책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며, 빈은 암살, 시나고그 폭격, 크라이스키에 대한 생명 위협 등 테러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후 크라이스키는 팔레스타인과의 관계에서 거리를 두었다.
6. 1. 크라이스키-피터-비젠탈 사건
크라이스키는 전 나치 당원 및 현대 오스트리아 극우 정치인에 대한 옹호적인 접근으로 유명했다.[16] 예를 들어, 크라이스키는 극우 포퓰리스트 요르크 하이더를 "주목할 만한 정치적 재능"이라고 묘사했다. 1967년, 신나치 오스트리아 지도자 노르베르트 버거는 크라이스키가 유대인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반대하지 않는다면서, 그는 단지 "독일인"일 뿐 종교적인 유대인도 시온주의자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크라이스키는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개인적으로 고통을 겪은 적은 없지만, 사회주의자로서 고통을 받았다고 느꼈다.1970년 선거 후, 크라이스키는 자신이 진정으로 "모든 오스트리아인의 총리"임을 보여주고 싶었고, 나치 배경을 가진 4명의 정치인을 내각에 임명했다.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은 크라이스키 내각의 4명이 전 나치였다고 폭로했고, 크라이스키는 그들을 정부에서 제거하지 않았지만, 한 명은 사임했다. 크라이스키는 모든 사람이 젊은 시절에 정치적 실수를 할 권리가 있다고 답변했다. 이 사건은 씁쓸한 갈등의 시작을 알렸고, 크라이스키가 사망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1986년, 비젠탈은 크라이스키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3년 후 법원은 크라이스키에게 명예훼손 혐의를 인정하고 상당한 벌금을 지불하도록 강요했다.[17]
6. 2. 경제 정책에 대한 비판
보수 진영은 크라이스키의 확장 재정 정책을 비판한다. 1979년 선거 운동 중 크라이스키는 "실업을 겪는 사람들을 보는 것보다 국가가 높은 부채를 지는 것을 선호한다"라고 발언했는데,[1] 이는 그의 정책이 가진 문제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보수 진영은 오스트리아가 이후 겪은 경제 위기에 크라이스키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1]7. 퇴임과 유산
1983년 오스트리아 입법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사회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크라이스키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프레트 지노바츠 교육부 장관을 후임으로 지명했다.[6] 당시 그의 건강은 악화된 상태였으며, 1984년에는 긴급 신장 이식을 받기도 했다.[6] 퇴임 후 1987년까지 사회민주당 명예 의장을 역임했으며, 1990년 7월 29일 빈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크라이스키의 총리직은 오스트리아 현대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현대 복지 국가로 변모시키고,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국가로 발돋움시킨 지도자로 기억된다. 크라이스키의 업적은 현대화된 빈 지하철 시스템과 유엔 빈 사무국 건물 단지 등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크라이스키의 총리직은 논란과 향수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의 지지자들은 크라이스키를 구시대의 마지막 사회주의자로 여기며, 생활 수준 향상, 복지 국가 전성기, 기회 균등을 위한 국가 지원 프로그램 등을 긍정적으로 회상한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크라이스키의 적자 지출 정책을 비판하며, 오스트리아의 후속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책임을 묻기도 한다.
그의 이름을 딴 브루노 크라이스키 재단과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이 제정되어 인권 증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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