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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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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익태는 1906년 평양 출생으로, 첼리스트이자 지휘자, 작곡가이다. 그는 1936년 대한민국 애국가를 작곡했으며, 1930년대 후반 유럽에서 활동하며 '교향시 한국'을 발표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40년대에는 만주국 축전곡을 작곡하는 등 친일 행적 논란이 있었으며,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한국 환상곡', '마요르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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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1955년 안익태의 모습
1955년 안익태
본관순흥 안씨
로마자 표기An Iktae
한글안익태
한자安益泰
출생일1906년 12월 5일
출생지대한제국 평양
사망일1965년 9월 16일
사망지스페인, 마요르카 섬
국적대한제국 -> 프랑코 스페인
묘지국립서울현충원
배우자롤리타 안 (결혼 전: 탈라베라) (1945년 결혼)
학력
모교구니타치 음악대학
신시내티 대학교
커티스 음악원
직업 및 활동
직업작곡가
첼로 연주가
트럼펫 연주가
바이올린 연주가
지휘자
활동 시기1919년 ~ 1965년
알려진 작품대한민국 국가 작곡
종교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 천주교(세례명: 리카르도)

2. 일생

안익태는 1906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종로보통학교와 평양 숭실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 1926년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1930년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했다. 신시내티 음악학교, 커티스 음악학교, 펜실베이니아 주립 필라델피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첼로와 지휘 등을 배웠다.

1936년 유럽으로 건너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사사받았으며, 애국가를 작곡했다. 1939년 부다페스트 음악원 졸업 후, 빈 교향악단, 베를린 교향악단, 로마 교향악단, 부다페스트 교향악단 등 유럽 각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스페인으로 이주하여 현지 여성과 결혼, 스페인 국적을 취득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그가 작곡한 관현악곡 '한국 환상곡'의 종곡 합창은 대한민국 국가가 되었다. 1960년1964년 방일하여 연주했고,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마요르카 섬에서 사망했고, 1977년 7월 8일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안익태의 주요 이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내용
1906년평안남도 평양 출생
1921년일본 유학,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 입학
1926년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 입학
1930년미국 유학, 신시내티 음악학교 등에서 수학
1936년유럽 유학,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사사, 애국가 작곡
1939년부다페스트 음악원 졸업, 유럽 각지에서 지휘 활동
1946년스페인 여성과 결혼, 스페인 국적 취득
1948년대한민국 정부 수립, 애국가 대한민국 국가로 채택
1965년문화훈장 대통령장 수여, 마요르카 섬에서 사망
1977년유해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2. 1. 유년 시절과 일본 유학 (1906~1930)

안익태는 1906년 평안남도 평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2] 평양종로보통학교를 거쳐[10] 1918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여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다.[8] 그는 형 안익삼과 학교의 미국인 교장 엘리 밀러 모우리 박사로부터 첼로를 선물받았다.[11][12] 모우리 박사는 YMCA 음악 선생님 그렉 씨를 소개해 첼로 개인 레슨을 받게 했다.[8]

1919년, 모우리 목사는 학교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3·1 운동에 참여했다.[12][13] 안익태는 한국 독립 운동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친일 교사에게 항의하는 학생 운동을 주도하다 학교의 처벌을 받았다. 그는 3·1 운동 관련자들을 구출하려다 경찰에 발각될 뻔했으나 모우리 박사의 도움으로 피신했다. 모우리 박사는 안익태의 부상을 치료하고 경찰서장을 설득하여 안익태가 도쿄에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14]

1921년, 안익태는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행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39]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였다.[39] 1926년에는 도쿄 구니타치 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했다.[8] 그해 여름, 안익태는 교회 재건 기금 모금을 위한 음악 공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 이상재[15]조만식을 만나 첼로 연주로 한국산 제품 사용을 장려하는 시위를 이끌었다.

1928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계가 어려워지자 안익태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첼리스트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14] 학비 문제와 첼로 파손 등 어려움 속에서도 동료와 스승 한스포드의 도움으로 1930년에 졸업할 수 있었다.[16] 졸업 연주회 후 일본 신문은 안익태를 "밝은 미래를 가진 천재"로 평가했다.[17]

1930년 5월, 안익태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숭실중학교 방문 시 모리 박사는 미국 유학을 제안했고, 안익태는 일본 경찰의 연주회 방해를 겪자 모리 박사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18]

2. 2. 미국 유학 (1930~1936)

1930년 5월, 안익태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숭실중학교를 방문했을 때, 모리 박사는 안익태에게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할 것을 제안했다. 일본 경찰이 연주회를 열지 못하게 하자, 안익태는 모리 박사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한국인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장벽을 피하는 데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18]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익태는 입국 심사 과정에서 첼로를 관리들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하여 구금되었다. 밤중에 안익태는 죄수 감시원에게 압수된 첼로로 연습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음악가와 범죄자 사이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었던 감시원은 안익태의 구금 사유를 조사했고 다음 날 그의 석방을 준비했다.[19]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안익태는 마우리 박사가 소개한 한인 교회에 갔다. 황 목사가 인도하는 예배에서 안익태는 당시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조로 불리던 한국 국가를 들었다.[20] 안익태는 그 곡조가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한국을 위한 새로운 국가를 작곡하기로 결심했다.[21] 안익태가 신시내티로 향하기 위해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동안 황 목사는 그에게 새로운 국가를 쓸 수 있도록 검은색 가방과 만년필을 주었다.[22]

황 목사가 주선한 대로 안익태는 숭실중학교와 국립음악대학 선배인 박원중을 기차역에서 만났다. 당시 신시내티 대학교 음악대학 학생이었던 박원중은 안익태가 음악원에 입학하는 것을 도왔다.[8][23] 안익태는 대공황 시기였기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낮은 임금을 받으며 식당에서 일해야 했다.[24] 1930년 안익태는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수석 첼리스트로 입단했고,[8][25] 2학년 봄방학 동안 미국 주요 도시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뉴욕에서는 카네기 홀에서 공연할 수 있었고, 뉴욕 신문들은 이 공연에 대해 긍정적인 논평을 썼다.

성공적인 투어 이후 안익태는 첼리스트에서 지휘자로 진로 목표를 변경했다. 1935년 안익태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커티스 음악원으로 전학했으며,[8] 1936년에 졸업했다.[8][23] 이 무렵 안익태는 캠던 교회에서 합창단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그의 소식을 들은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교회 예배에 참석한 후 그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에 합류하도록 초청했다.[26]

2. 3. 유럽 시기 (1936~1944)

1936년 처음 유럽을 방문하여 파울 힌데미트펠릭스 바인가르트너를 만나 음악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또한, '''안 에키타이'''(安益泰|안 에키타이일본어, 서양식 이름: '''에키타이 안'''(Ekitai Ahn))라는 일본어 이름을 사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안익태 후손은 '에키타이'는 일본 이름이 아니고 '익태'라는 한국 이름을 영어나 기타 외국어로 표현할 때 당시 관행에 따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며, 이는 창씨개명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당시 조선인이 외국을 나갈 때 필요한 여권을 발급하는 기관이 일제 총독부였기 때문에, 이름의 영문 표기가 일본식 발음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이를 친일 행적의 증거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 역시 한자 이름은 그대로 쓰지만 발음은 '손 기테이(Kitei)'로, 남승룡은 '난 쇼류(Shoryu)'로 표기되었다.

1937년 템플 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뒤, 1938년 아일랜드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했다. 이후 헝가리 부다페스트 음악원에서 졸탄 코다이와 도흐나니 에르뇌에게 작곡을 배웠고, 종전 직전까지 독일,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지휘 활동을 했다.

안익태가 베를린에서 머물렀던 집. (Gustav-Freytag-Straße 15, Berlin-Grunewald)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주베를린 만주국 대사관 공무원인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에하라 고이치일본어)의 집에서 살았다.[57] 안익태가 작곡한 《만주국 축전곡》 가사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추축국일본 제국,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3국의 결속을 다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가사의 일부는 에하라가 썼다고 한다. 에하라는 독일 내 일본 첩보활동을 총괄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57]

안익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1942년에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안익태 공연 프로그램에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내용이 실리기 시작했고, 슈트라우스가 자신의 작품인 '일본 축전 음악'을 지휘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성해준 추천장이 남아 있다. 안익태는 2차대전 종전 후 슈트라우스의 교향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었으며, 일본의 옹가쿠노토모샤(음악지우사)에서 슈트라우스의 전기를 출판하기도 했다.

안익태 흉상, 부다페스트 시립공원


1936년 4월 8일, 뉴욕을 떠나 유럽에 도착하여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한국 국가인 ''애국가''를 완성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인동포회"라는 한국 독립 운동 단체에 보냈다. 그는 또한 ''교향시 한국''을 최종적으로 다듬었다.[29]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가서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에게 배웠다.[25] 1937년 헝가리로 가서 코다이 졸탄에게 배우며 그의 가르침을 ''교향시 한국'' 작곡에 특히 아시아 음악에 적용했다.[8][30]

1937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교향시 한국''을 연주하도록 초청받았다. 아일랜드는 한국처럼 영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쉽게 아일랜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30] 그는 다시 비엔나로 돌아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나 그의 ''교향시 한국''에 대해 논의했다. 동시에 안익태는 헝가리 정부의 장학금으로 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고,[31] 1939년 그 대학교를 졸업했다. 슈트라우스는 안익태의 재능을 칭찬하며 그를 대신하여 부다페스트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지휘하도록 임명했다.[25] 헝가리 신문들은 안익태의 노력을 칭찬했다.[32] 슈트라우스의 추천으로 로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기꺼이 안익태를 지휘자로 받아들였다. 유럽 전역의 많은 다른 오케스트라들이 그 뒤를 따랐고, 안익태는 연주를 위해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1940년 12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도록 초청받았다.[33] 독일 신문들은 안익태에 대한 기사에서 아낌없는 칭찬을 쏟아냈다. 안익태는 유럽에서 많은 유명 오케스트라를 계속 지휘했다. 그러나 한 번은 일본 정부가 정치적으로 불쾌하다고 여긴 ''교향시 한국''을 연주한 혐의로 로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활동이 금지되었다.[34] 안익태는 파리 오케스트라에서 일자리를 찾았지만, 파리가 독일군으로부터 해방된 1944년에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는 이후 스페인 대사관의 초청을 받아 바르셀로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35]

2. 4. 스페인 시기 (1944~1965)

1944년 4월, 파리에서 베토벤 축제 연주회를 마친 직후 독일의 우방인 스페인으로 피난했으며, 그 해 12월에는 그의 대표작인 한국 환상곡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필 악보를 완성했다. 1945년 리카르도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58].

1946년 스페인 여성 롤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하여 마요르카 섬으로 이주했고,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이후 스위스, 멕시코, 과테말라 등에서 지휘했고, 1955년 3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3년간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주관했고, 런던 교향악단,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교향악단 등을 객원 지휘했다. 1965년 7월 4일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직후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9월 16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1977년 7월 8일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봉환되었다.

3. 작품

안익태는 성악곡, 관현악곡, 교향시, 합창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작곡했다.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여러 형태의 작품을 남겼으며, 대표작으로는 애국가, 한국환상곡 등이 있다. 마요르카와 '포르멘토르의 로 피'는 2006년에 자필 악보가 발견되었다. 다만, 1944년 이후 악보가 소실된 작품도 여럿 존재한다.

3. 1. 주요 작품

제목장르작곡 연도비고
성악 모음곡 한국의 생활 (이팔청춘/아리랑 고개/전원/백합화)성악1934~1935년
애국가성악1936년
교향시 '강천성악'관현악1936년
한국환상곡합창과 관현악1936~1937년
환상곡 '에텐라쿠'관현악곡1930년대?1944년 이후 악보 분실
교향 환상곡 제2번 '교쿠토(극동)'관현악곡1930년대?1944년 이후 악보 분실
전원곡 (Pastorale)관현악곡1930년대?1944년 이후 악보 분실
만주국 축전곡=만주환상곡합창과 관현악1940년대1944년 이후 악보 분실
논개교향시1962년
애국지사 추도곡관현악곡1962년
흰 백합화성악과 기악1962년?
한국무곡관현악곡1963년
교향시 '마요르카'관현악곡1948년2006년에 자필보 발견
교향시 '포르멘토르의 로 피'관현악곡1951년2006년에 자필보 발견


3. 2. 소실 작품

제목장르작곡 연도비고
환상곡 '에텐라쿠'관현악곡1930년대?1944년 이후 악보 분실
교향 환상곡 제2번 '교쿠토(극동)'관현악곡1930년대?1944년 이후 악보 분실
전원곡 (Pastorale)관현악곡1930년대?1944년 이후 악보 분실
만주국 축전곡 (만주환상곡)합창과 관현악1940년대1944년 이후 악보 분실


4. 친일 행적 논란

안익태는 '안 에키타이'(安益泰|안 에키타이일본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친일 행적이 제기되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주베를린 만주국 대사관 공무원이었던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일본어)의 집에서 살았으며,[57] 안익태가 작곡한 《만주국 축전곡》 가사에는 제2차 세계 대전추축국일본 제국,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3국의 결속을 다짐하는 내용이 있는데, 가사의 일부는 에하라가 썼다고 한다. 에하라는 독일 내 일본 첩보활동을 총괄하고 있었다.[57]

2000년 음악연속간행물 '객석'의 베를린 통신원이었던 진화영은 안익태의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 지휘 기록이 1943년에 단 한 차례 뿐이었다는 기사를 발표했다. 2006년에는 송병욱에 의해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 담긴 기록 영화가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 녹화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내 음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2006년 11월 19일 송병욱의 강연회를 통해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기록 영화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개 상영되었으며, 2007년에는 음악학자 이경분이 안익태의 1938-44년 활동상을 정리한 책을 출간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안익태가 선정되어 논란이 일었다.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2008년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안익태를 친일파로 규정하고 친일인명사전 제2회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59]. 2009년 11월 8일 발간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안익태가 일본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인물로 등재되었고,[60] 201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안익태가 작곡한 교가를 변경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60] 2020년 김원웅 광복회 회장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 이장을 제기했고, 안익태는 민족 반역자로 비판받았다.[61]

4. 1. 친일 논란에 대한 반박

안익태 후손은 '에키타이'는 일본 이름이 아니고 '익태'라는 한국 이름을 영어나 기타 외국어로 표현할 때 일제시대 당시 관행에 따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며, 이는 성과 이름을 한자부터 일본식 이름(4글자)으로 고치는 창씨개명과는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일제시대 당시 조선인이 외국을 나갈 때 필요한 여권을 발급하는 기관이 일제 총독부였기 때문에, 여권을 발급받아 해외에서 활동한 조선인의 경우 이름의 영문 표기가 일본식 발음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이를 친일 행적의 증거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 역시 한자 이름은 그대로 쓰지만 발음은 '손 기테이(Kitei)'로, 남승룡은 '난 쇼류(Shoryu)'로 표기되었다. 참고로 조선인의 이름을 일본식 4글자 이름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은 안익태가 독일로 건너가고 한참이 지난 1940년부터 일제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인종차별 정책 때문에 조선인이 일본식 이름을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었다.[57]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아버지안덕훈 (安德勳)
어머니김정옥 (金貞玉)
안익삼
배우자로리타 탈라벨라 (Lolita Talavera|롤리타 탈라베라es, 1916년 ~ 2009년 2월 16일)
첫째 딸엘레나 안 (Elena Ahn|엘레나 안es, 1949년 ~ )
외손자미구엘 익태 안 기옌 (Miguel Eaktai Ahn Guillen|미겔 익태 안 기옌es, 1977년 ~ )
첫째 외손녀레오노르 로즈 안 (Leonor Rose Ahn|레오노르 로즈 안es, 1987년 ~ )
둘째 외손녀엘레나 이루스뜨 안 (Elena Irusta Ahn|엘레나 이루스뜨 안es, 1988년 ~ )
둘째 딸안나 세실리아 (Anna Cecilia|안나 세실리아es, 1952년 ~ )
셋째 딸레오노르 안 딸라베라 (Leonor Ahn Talavera|레오노르 안 탈라베라es, 1958년 ~ )


참조

[1] 웹사이트 Korean Patriot's Musical Scores Uncovered https://web.archive.[...] 2006-11-29
[2] 웹사이트 (In search for tracing historical people) Maestro Ahn Eak-tai https://web.archive.[...] Hankook Ilbo/Sonyeon Hankook Ilbo 2004-12-27
[3] 웹사이트 S. Korea marks centennial of national anthem composer's birthday http://english.yna.c[...] Yonhap News 2006-02-12
[4] 뉴스 예술칼럼 안익태와 손기정(금노상 인천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http://news.itimes.c[...] Incheon Ilbo 2003-01-18
[5] 웹사이트 (교과서 속 인물) 안익태 선생 https://web.archive.[...] Hankook Ilbo/Sonyeon Hankook Ilbo 2003-06-23
[6] 뉴스 안익태 선생 유학 기록에 무엇이 담겨있나 http://article.joins[...] Yonhap/JoongAng Ilbo 2006-11-13
[7] 문서 Ahn Eak-taik's mother's name at Franz Liszt Academy of Music
[8] 웹사이트 안익태[安益泰] https://archive.toda[...] DAUM/Britannica
[9] 문서 Baek Sukgi, p. 8
[10] 웹사이트 안익태 安益泰 https://web.archive.[...] Nate/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11] 문서 Baek Sukgi, p. 10
[12] 뉴스 JAIL OR FINE FOR MOWRY.; Korean Missionary Has Choice in Japanese Supreme Court Sentence. https://www.nytimes.[...] 1919-12-08
[13] 뉴스 JAPANESE ARREST AMERICANS IN KOREA; Houses of Rev. Drs. Moffett, Gillis, and Mowry at Pyeng Yang Searched by Police. DR. MOWRY IS DETAINED Accused of Permitting Use of His Premises for Printing Revolutionary Propaganda. https://www.nytimes.[...] 1919-04-14
[14] 웹사이트 걸어오신 길 https://web.archive.[...] Ahn Eak Tai Foundation
[15] 문서 Baek Sukgi, pp. 31–32
[16] 문서 Baek Sukgi, pp. 41–42
[17] 문서 Baek Sukgi, p. 43
[18] 문서 Baek Sukgi, pp. 45–46
[19] 문서 Baek Sukgi, p. 50
[20] 웹사이트 Anthem http://www.opm.go.kr[...]
[21] 문서 Baek Sukgi, p. 54
[22] 문서 Baek Sukgi, p. 58
[23] 웹사이트 안익태 https://web.archive.[...]
[24] 문서 Baek Sukgi, p. 59
[25] 웹사이트 Han-gook-in, Han-gook-in https://web.archive.[...]
[26] 문서 Baek Sukgi, p. 66
[27] 문서 Baek Sukgi, p. 70
[28] 문서 Baek Sukgi, p.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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