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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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효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여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광해군 때 영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관직에 올라 선조, 광해군 시기에 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여러 요직을 거쳤다. 계축옥사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작위가 추탈되었다가 아들 윤휴의 상소로 복관되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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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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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윤효전 |
한자 이름 | 尹孝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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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영초(詠初), 이영(貽永) |
호 | 기천(沂川) |
시호 | (미확인) |
국적 | 조선 |
성별 | 남성 |
출생일 | 1563년 |
사망일 | 1619년 |
본관 | (미확인) |
자녀 | 윤휴 |
관직 및 직책 | |
직책 | (미확인) |
재임 | (미확인) |
전임자 | (미확인) |
후임자 | (미확인) |
임금 | (미확인) |
학문 | |
분야 | 성리학 |
스승 | 민순(閔純), 정구(鄭逑) |
주요 저작 | (미확인) |
군사 경력 | |
서훈 | 익사공신 2등관 |
2. 생애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남인의 주요 인물인 윤휴의 아버지이다. 본명은 윤효선(尹孝先)이었으나, 1612년 계축옥사 당시 이름이 같은 인물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효전(孝全)으로 개명했다. 그의 가계는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의 문인 윤자관으로부터 이어져 북인에 속했고, 이후 소북 계열로 분류되었다. 아버지 윤희손은 유학자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효전은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과 퇴계 이황, 남명 조식의 학통을 이은 정구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활동한 공으로 훗날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선조 대에는 왕자들의 스승인 왕자사부를 지냈고, 송화 현감, 영유 현령 등을 역임하며 지방 행정 경험을 쌓았다.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기도 했다.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승정원 승지, 홍문관 부제학, 충청도관찰사 등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1613년 계축옥사 처리에 공을 세워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에 책록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북인으로서 광해군을 지지했지만,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 강경파와는 거리를 두었다. 특히 1617년 인목대비 폐비 논의 때는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반대하다 경주부윤으로 좌천되었다. 1619년 경주부윤 임지에서 5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가 북인 정권에 참여했던 경력은 훗날 아들 윤휴가 서인 세력에게 정치적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되었다.
2. 1. 생애 초반
아버지는 유학자로 선무랑을 지낸 윤희손(尹喜孫)이고, 어머니는 이수(李琇)의 딸 이씨이다. 아버지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으나, 훗날 아들 윤효전이 광해군 때 영사공신 1등에 오르면서 의정부영의정 대성부원군에 증직되었다. 윤효전은 남인의 주요 인물인 백호 윤휴(尹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처음 이름은 윤효선(尹孝先)이었으나 나중에 효전(孝全)으로 바꾸었다.
증조부 윤자관(尹子寬)은 개혁적인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나,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로 몰려 화를 입었다. 이 사건 이후 사림이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훗날 사림이 다시 정계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그의 가계는 붕당으로는 북인에 속하게 되었고, 이후 소북(小北) 계열로 이어졌다. 할아버지 윤호(尹虎)는 생원으로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공부하다 관직에 나아가 이조참판의 자리에 올랐다.
아버지 윤희손은 성리학자로, 이중호(李仲虎)와 조광조 계열 학자인 이준(李準), 이풍후(李風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전에 음직으로 선무랑 벼슬을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효전은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제자인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후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통을 이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원래 이름인 효선(孝先)을 효전(孝全)으로 바꾼 것은 1612년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 때문이었다. 당시 '여강칠우(驪江七友)'라는 인물들과 교류하다 화를 입은 유효선(柳孝先)이라는 사람과 이름이 같아,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개명한 것이다. 그는 평소 서경덕을 깊이 존경하여, 관직에 오른 뒤 서경덕의 문집인 《화담집》(花潭集) 간행에 참여하였고, 나중에는 간행 작업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파평윤씨 윤담휴(尹覃休)의 딸과 처음 결혼하였으나 사별하고, 학자인 간서재 김덕민(金德民)의 딸 경주김씨와 재혼하였다. 두 번째 부인 김씨에게서 늦은 나이에 아들 윤휴를 얻었다.
2. 2. 관료 생활
음서(蔭敍)로 관직에 처음 나아갔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왜군과 싸웠으며, 이 공로로 훗날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선조의 왕자사부가 되었으나, 1600년 4월 사직하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특별히 그를 6품직으로 승진시켜 지방관으로 임명하였다. 1601년 송화 현감(松禾縣監)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 중 불타버린 향교를 복구하는 데 힘을 쏟아 황해도 관찰사 성이문(成以文)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602년 형조좌랑이 되었고, 1603년에는 임진왜란 중에 소실된 명종실록을 다시 편찬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당시 조산대부(朝散大夫) 행 이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行吏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으로서 실록편수관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604년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부임하였는데, 그해 평안도 어사(平安道御史) 신율(申慄)은 그의 근무 태도에 대해 "몸가짐이 청렴하고 일 처리가 명확하다"고 보고하였고, 이에 선조로부터 옷 한 벌(표리 1습)을 하사받았다.
현령으로 재직하던 1604년(선조 37)에는 선무원종공신 3등(宣武原從功臣三等)에 책록되었다. 이때는 아직 이름을 바꾸기 전이었기 때문에 공신녹권에는 본명인 윤효선(尹孝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현감이 되었고, 1605년(선조 38) 현감으로 재직 중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영유현령 시절의 문제로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다. 그 뒤 홍문관 수찬을 거쳐 1606년 황해도 암행어사로 활동하였고, 이후 정언, 사헌부지평, 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에는 교리, 직강, 헌납을 거쳐 다시 직강과 교리를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에는 통훈 대부(通訓大夫) 홍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弘文館直提學知製敎兼經筵侍講官)으로서 실록편수관이 되어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의 왕자사부가 되었으며, 부제학(副提學) 등을 지낸 뒤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유영경의 옥사 직후에는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호남 지역의 군수로 재임할 당시에는 군도사(郡都事)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향시를 주관하였는데, 시험 주제가 당시 조정의 정책 방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광해군을 지지했던 그는 선조 말년에 유영경의 당론에 반대하며 광해군을 보호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광해군 즉위 초에는 임해군의 옥사 처리를 주관하였다.
2. 3. 생애 후반

1610년(광해군 2년)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와 부제학을 거쳤다. 1613년(광해군 5년)에는 계축화옥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효충 분의 병기 결책 익사공신(效忠奮義炳幾決策翼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대사헌, 지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1614년에는 공홍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615년 대원군(帶原君)에 봉해지고 지의금부사가 되었으나, 사직을 청했음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과 갈등하였다. 1617년(광해군 9년)에는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인목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 일로 도총관, 지의금부사를 거쳐 경주부윤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당색은 북인이었고 광해군 정권에 참여했던 경력은 훗날 서인들이 아들 윤휴의 가계 배경을 문제 삼는 빌미가 되었다. 봉작은 대원군(帶原君)이었다가 후에 대은군(帶恩君)으로 변경되었다. 1618년에는 이이첨의 노선에 협력하며 대북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1619년 경주 임지에서 향년 56세로 병사하였다.
3. 가계
아버지는 유학자 윤희손(尹喜孫)이며, 어머니는 이수(李琇)의 딸 이씨이다. 윤휴(尹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 윤희손은 생전에 선무랑을 지냈으나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영의정 대성부원군에 추증되었는데, 이는 아들 윤효전이 광해군 시절 영사공신 1등에 책록되면서 받은 증직이었다. 윤효전의 처음 이름은 윤효선(尹孝先)이었으나 후에 효전(孝全)으로 바꾸었다.
증조부인 윤자관(尹子寬)은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사림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면서 그의 가문은 당색으로 북인에 속했다가 후에 소북(小北) 계열이 되었다. 할아버지 윤호(尹虎)는 생원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관직에 나아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아버지 윤희손은 성리학자로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와 조광조 계열 학자인 이준(李準), 이풍후(李風后) 문하에서 수학했다. 생전에는 음직으로 선무랑을 지냈다. 윤효전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이후 가세를 다시 일으켰다. 그는 서경덕의 제자인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나중에는 이황과 조식의 제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도 학문을 익혔다.
1612년에 초명인 효선(孝先)을 효전(孝全)으로 고친 이유는, 계축옥사(癸丑獄事) 당시 '여강칠우(驪江七友)'와 교류하다 화를 입은 유효선(柳孝先)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화담 서경덕을 존경하여 관직에 오른 뒤 서경덕의 문집인 《화담집》 간행에 참여하였고, 나중에는 간행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첫 부인으로는 파평 윤씨인 윤담휴(尹覃休)의 딸과 결혼했으나 사별하였다. 이후 학자인 간서재 김덕민(金德珉)의 딸 경주 김씨와 재혼하여 만년에 아들 윤휴를 얻었다. 또한 첩으로 이원익의 서녀인 전주 이씨를 두어 서자 윤영(尹鍈)을 낳았다. 서자인 윤영은 충무공 이순신의 서녀인 덕수 이씨와 혼인하였다.
구분 |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직계 조상 | 증조부 | 윤자관(尹子寬) | 1490년 ~ 1550년 | 조광조 문인, 기묘사화 연루 |
조부 | 윤호(尹虎) | 생원, 이조참판 | ||
부 | 윤희손(尹喜孫) | 선무랑, 사후 영의정 대성부원군 추증 | ||
모 | 이씨 | 이수(李琇)의 딸 | ||
서모 | 이름 미상 | |||
이복 동생 | 서제 | 윤효종(尹孝宗) | ||
서제 | 윤효증(尹孝曾) | |||
서제 | 윤효광(尹孝光) | |||
배우자 | 본처 | 파평 윤씨 | 윤담휴(尹覃休)의 딸 | |
후처 | 경주 김씨 | 간서재 김덕민의 딸 | ||
자녀 | 아들 | 윤휴(尹鑴) | 1617년 ~ 1680년 | 호는 백호, 후처 소생 |
첩 | 전주 이씨 | 이원익의 서녀 | ||
서자녀 | 서자 | 윤영(尹鍈) | 1611년 ~ 1691년 | 첩 소생 |
서자부 | 덕수 이씨 | 충무공 이순신의 서녀 | ||
외가 | 외조부 | 이수(李琇) | ||
처가 | 장인 (본처) | 윤담휴(尹覃休) | ||
서처남 | 윤지미 | 1569년 ~ ? | 본처의 이복형제 | |
장인 (후처) | 김덕민(金德珉) | 학자, 호는 간서재 | ||
처조카 | 송규렴 | 후처의 조카 | ||
처조카 | 송규정 | 후처의 조카 |
4. 평가
그는 서경덕을 평하기를 "서경덕의 저술 1권은 다른 학자의 10권의 책에 비길 만하다"며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5. 기타
파평윤씨 윤담휴(尹覃休)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첫 부인을 잃고, 학자인 간서재 김덕민의 딸 경주김씨와 재혼하였다. 두 번째 부인인 김씨에게서 만득자인 아들 윤휴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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