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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17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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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태영(1744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44년 10월 9일에 태어나 1803년에 사망했다. 177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선 후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지평 등을 거쳤다. 이후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며 황해도 관찰사, 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특히 경상도 관찰사 재임 중 대구 칠성동 지석묘를 발견한 일화로 알려져 있다. 1797년 경상도 관찰사에서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어 사간원 대사간, 승정원 도승지 등을 역임했다. 1795년에는 칠성동에서 지석묘를 발견하였다. 저서로는 '삼사 연행시화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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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 (1744년)
기본 정보
이태영의 초상
이태영의 초상
본관광주 이씨
성가(盛可)
퇴옹(退休翁)
생년월일1744년
몰년월일1816년
묘소 위치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관력
음서'동몽교관'으로 출사
관직사헌부지평
사간원대사간
승정원동부승지
승정원좌부승지
승정원우부승지
승정원좌승지
승정원우승지
승정원도승지
규장각직각
규장각제학
홍문관부제학
형조참의
병조참의
공조참의
이조참의
대사성
황해도관찰사
한성부우윤
한성부좌윤
형조판서
공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지경연사
지성균관사
춘추관수찬소총재관
춘추관지사
세자시강원찬선
세자시강원자의
판의금부사
원임
시호정간(貞簡)
가족 관계
아버지이윤묵(李潤默)
어머니반남 박씨 박사원의 딸
배우자정부인 남양 홍씨 홍용한의 딸
아들이면응(李勉應)
손자이원구(李元龜)

2. 생애

1744년 10월 9일에 태어난 이태영은 목은 이색의 15대손이다.[2] 1772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지평 등 중앙 관직을 역임하였다. 1784년에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베이징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양주부윤, 황해도 관찰사, 경상도 관찰사 등 여러 지방관을 지내면서 기민 구제와 세금 감면, 농업 장려 등에 힘썼다. 특히 1795년 경상도 관찰사 재직 중에는 대구 칠성동에서 지석묘를 발견하였다. 그는 관직 생활 동안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아 파직되기도 했으나 다시 복직되었다.

말년에는 승정원 도승지, 공조 참판 등 중앙 관직을 거쳐 충청도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1801년 예조 참판을 지낸 뒤 1803년에 사망하였다. 사후 아들 이희갑의 공으로 증 의정부 좌찬성 등에 추증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744년 10월 9일에 태어났다. 그는 목은 이색(李穡)의 15대손으로, 이색의 아들 이종선의 후손이다. 12대조는 세조 때의 중신 이계전이며, 11대 방조(傍祖)는 사육신 중 한 명인 이개이다. 또한,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은 그의 8대 방조이고, 선조영의정을 지낸 이산해는 7대 방조였다.[2]

고조부는 김제군수를 지내고 사후 증 이조참판에 추증된 이정룡(李廷龍)이며, 증조부는 승지를 지낸 이집(李潗)이다. 할아버지는 호조정랑을 역임한 이병건(李秉建)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내고 사후 증 이조판서에 추증된 이산중(李山重)이며, 어머니는 조겸빈(趙謙彬)의 딸이다. 참판을 지낸 이해중(李海重)은 그의 숙부이다.

2. 2.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1772년(영조 4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가 되었고, 여러 벼슬을 거쳐 1778년(정조 2)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이후 교리, 사헌부 지평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81년에는 사헌부 지평, 1783년에는 부교리로 재직하였다. 1783년, 부교리로 있을 때 불성실한 상소문을 올렸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다음 해인 1784년(정조 8) 부수찬으로 복직하였다. 같은 해 청나라에 진하사은사 겸 동지사(進賀謝恩使兼冬至使)가 파견될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베이징을 다녀왔다.

2. 3. 지방관 생활

1785년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나, 곧 양주부윤양덕현령 등 외직으로 나갔다. 이후 광주부윤장단부사를 역임하였다.

1793년에는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황해도 관찰사로 재직하는 동안 흉년이 들어 기민(飢民) 구제에 힘쓰고 세금 탕감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795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병으로 죽어 돌아오는 정사(正使)의 상여를 소홀히 다루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직되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는 각종 오랫동안 버려진 토지(묵은 토지)의 등급을 낮추고, 밀린 세금을 탕감받도록 조정하였으며, 조세 부담을 줄여주어 농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795년에는 대구 칠성동에서 지석묘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2. 3. 1. 대구 칠성동 지석묘 발견

1795년(정조 19년)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중 대구 칠성동에서 지석묘를 발견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태영은 어느 날 밤 꿈속에서 북두칠성이 현재의 칠성동 고인돌 자리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주변을 수색하다가 대구 칠성동 지석묘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후 이태영은 고인돌 덮개돌 위에 자신의 아들 일곱 명의 이름을 새기고 후손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이때부터 이 고인돌들을 '칠성암(七星巖)'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는 마을의 토속 신앙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이라는 지명은 바로 이 '칠성암'에서 유래한 것이다.

2. 4. 생애 후반

1797년 가선대부 (嘉善大夫)로 승진하였으나,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 중 봉산(封山)의 소나무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파직되었다. 하지만 지방관으로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같은 해에 복직되었고, 곧이어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어 중앙 관직으로 돌아왔다. 이후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공조 참판을 거쳐 1798년(정조 22)에는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799년에는 평안도 관찰사로 자리를 옮겼고, 1801년(순조 1)에는 예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1803년에 세상을 떠났다.

2. 5. 사후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금대리 해좌(亥坐)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들 이희갑의 출세로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춘추관성균관세자시강원이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

3.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이병건
  • * 삼촌 : 이석중
  • ** 사촌 : 이규영 (친동생으로 삼촌 이석중의 양자가 됨)
  • * 삼촌 : 이해중
  • ** 사촌 : 이도영
  • 아버지 : 이산중 (1717년 ~ 1775년)
  • 어머니 : 양주 조씨 (1717년 ~ 1752년) - 조겸빈의 딸
  • * 동생 : 이규영 (삼촌 이석중의 양자로 입양)
  • * 동생 : 이순영
  • * 여동생 : 2명
  • 계모 : 반남 박씨 (1737년 ~ 1779년) - 박사권(朴師權)의 딸
  • 부인 : 기계 유씨 (杞溪 兪氏, 1744년 11월 13일 ~ 1781년 7월 24일) - 유한갈(兪漢葛)의 딸
  • * 아들 : 이희갑(李羲甲, 1764년 ~ 1847년) - 시호는 정헌(正獻)
  • ** 손자 : 이겸재
  • * 딸 : 이씨
  • * 아들 : 이희평 (1764년 ~ ?) - 당숙 이도영의 양자가 됨
  • * 아들 : 이희두 (1768년 12월 6일 ~ 1854년 4월 16일) - 당숙이자 삼촌인 이규영의 양자가 됨
  • * 아들 : 이희승 (1774년 8월 1일 ~ 1851년 12월 21일)
  • * 아들 : 이희준 (1775년 6월 26일 ~ 1842년 10월 23일)
  • * 아들 : 이희조 (1776년 12월 1일 ~ 1848년 4월 29일)
  • * 아들 : 이희화
  • * 딸 : 이씨
  • 첩 : 이름 미상
  • * 아들 : 이희오 (1783년 1월 7일 ~ 1858년 12월 3일)
  • * 아들 : 이희신 (1789년 12월 13일 ~ 1838년 12월 20일)
  • * 딸 : 이씨
  • * 딸 : 이씨
  • * 아들 : 이희명 (1794년 12월 11일 ~ 1869년 2월 20일)
  • * 아들 : 이희공 (1795년 10월 28일 ~ 1829년 7월 27일)

4. 저작


  • 삼사 연행시화첩

5. 기타

1795년(정조 19년)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어느 날 밤 꿈에서 북두칠성이 현재의 대구광역시 칠성동 고인돌 자리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후 주변을 수색하다가 고인돌을 발견하였다. 이태영은 발견한 고인돌 덮개돌 위에 자신의 아들 일곱 명의 이름을 새기고 후손의 번영을 기원했다. 이 고인돌은 이후 '칠성암(七星巖)'이라 불리며 마을의 토속 신앙 대상이 되었고, 대구광역시 칠성동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이태영 http://koreandb.nate[...]
[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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