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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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성태자는 백제 위덕왕 또는 성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전해지며, 일본 오우치 씨의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는 611년 일본 야마구치현에 상륙하여 쇼토쿠 태자에게 다타라 씨 성과 영지를 하사받고 정착했다고 전해지며, 오우치 씨는 임성태자를 14대조로 주장한다. 오우치 씨는 백제 왕족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조선에 족보 입증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성태자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오우치 씨가 한반도와의 무역을 위해 임성태자를 날조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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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태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임성태자 |
| 원어 이름 | 琳聖太子 |
| 로마자 표기 | Imseong-taeja |
| 일본어 표기 | 임성태자 (琳聖太子, Rinshō Taishi) |
| 휘 | 의조(義照) |
| 직함 | 백제의 태자 |
| 출생 및 사망 | |
| 출생일 | 577년 (추정) |
| 사망일 | 657년 11월 (추정) |
| 사망 장소 | 미상 |
| 가족 관계 | |
| 부왕 | 부여명농(扶餘明禯) |
| 아버지 | 백제 성왕 |
| 어머니 | 미상 |
| 형제자매 | 미상 |
| 기타 정보 | |
| 국적 | 백제 → 일본 |
| 왕조 | 백제 |
| 가문 | 미상 |
| 매장지 | 기시즈 신사 |
| 능묘 | 기시즈 신사 |
| 전각 | 미상 |
2. 생애
임성태자는 백제 위덕왕(威德王) 또는 성왕(聖王)의 셋째 아들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일본의 오우치 씨(大內氏)와 그 후손을 자처하는 토요타(豊田) 씨 등은 임성태자를 자신들의 14대 조상으로 여긴다.[29]
일본 측 전승에 따르면, 임성태자는 611년 3월 2일 야마구치현(山口県)에 상륙하여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로부터 다타라씨(多多良氏)라는 성씨와 스오국(周防國) 다타라하마(多々良浜, 현 야마구치현 호후시) 땅을 하사받아 정착했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서는 597년 타이완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의 선진 예술과 불교, 제철 기술 등을 전파했다고도 한다.[33]
그의 후손인 다타라씨는 12세기에 오우치(大內)로 성씨를 바꾸었고, 무역을 통해 중세 일본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으나 1557년에 멸망했다. 살아남은 후손들은 막부의 하타모토(旗本)나 작은 영주가 되거나 토요타씨(豊田氏)로 성씨를 바꾸어 가계를 이어갔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야마구치현에는 오우치 씨 후손들이 임성태자가 백제에서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피리를 보존하고 있다.
2. 1. 백제 왕자
임성태자는 백제 위덕왕(威德王)의 셋째 아들이거나 성왕(聖王)의 셋째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일본의 오우치 씨(大內氏)와 그 후손인 토요타(豊田)씨 등은 임성태자를 14대 조상으로 여긴다.[29]일본 측 전승에 따르면, 임성태자는 611년 3월 2일 야마구치현(山口県)에 상륙하여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로부터 다타라씨(多多良氏)라는 성씨와 스오국(周防國) 다타라하마(多々良浜, 현 야마구치현 호후시) 땅을 받아 정착했다고 한다. 다타라씨는 12세기에 오우치(大內)로 성씨를 바꾸었고, 무역을 통해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중세 일본에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1557년에 멸망했고, 살아남은 후손들은 막부의 하타모토(旗本)나 작은 영주가 되거나 토요타씨(豊田氏)로 성씨를 바꾸기도 했다.
다른 전승에서는 임성태자가 597년 타이완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의 예술을 전하고[33] 불교 융성과 제철 기술 전파에 기여했다고 한다. 오늘날 야마구치현에는 오우치씨 후손들이 임성태자가 백제에서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피리를 보관하고 있다. 또한, 묘켄보살의 계시를 받고 597년 스오 국 해안에 도착했으며, 쇼토쿠 태자가 이를 중요하게 여겨 그를 스오 국의 통치자로 임명했다는 전설도 있다.[3]
일본에서는 임성태자를 일본식 발음인 '''琳聖太子|린쇼 타이시일본어'''라고 불렀다.[4] 그의 후손들이 사용한 성씨 '''多々良|타타라일본어'''는 일본어로 '용광로'나 '발로 밟는 풀무'를 의미하며, 나중에는 제철 전문가를 뜻하게 되었다.[2] 이 이름은 철광석과 철제 갑옷으로 유명했던 가야의 항구 '''蹈鞴津|도비진한국어'''(발음을 위해 '''多多羅|다다라한국어'''로 표기)과 관련이 있는데, 이곳은 '풀무의 항구'라는 뜻으로 일본으로 철을 수출하는 주요 경로였다.[5] 타타라 씨는 후에 '''大内|오우치일본어'''로 성씨를 바꾸었고, 오우치 히로요(1325-1380) 대에 야마구치로 근거지를 옮겼다.[6]
역사적으로 오우치 씨는 국제 무역을 통해 경제력과 정치력을 키우기 위해 일본인 정체성과 함께 자신들의 한국계 혈통을 강조했다.[7] 야마구치시를 중심으로[6] 세력을 키운 오우치 씨는 무로마치 시대에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로 성장하여 조선, 명나라, 류큐 왕국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3]
''조선왕조실록''[8]에 따르면, 1399년 (정종 원년) 오우치 요시히로는 사신을 보내 자신이 백제 왕족의 후예임을 확인해달라며 충청도 땅을 요구하는 도발적인 요청을 했다. 정종은 역사적 기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오우치 요시히로를 백제 온조왕의 후손으로 잠정 인정했다. 단종 때에는 오우치 노리히로[9]가 다시 혈통 증명을 요청하기도 했다. 오우치 씨는 수세기에 걸쳐 조선과의 관계에서 우대를 받았으며, 심지어 조선 왕조가 소중히 여기던 ''고려대장경''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10]
오우치 씨는 일본 내에서도 백제계 혈통을 주장했는데, 이는 당시 후지와라 씨, 헤이케 씨, 겐지 씨 등 유력 가문과의 연관성을 내세우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어졌다. 그들의 성씨 '타타라'가 한국의 '다다라'와 연관성이 있고, 9세기 ''신찬성씨록''과 목간 유물에도 등장한다는 점이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15세기 후반에 작성된 『오우치 다타라씨 족보』에는 린세이 태자가 오우치 씨의 시조이며, 611년 백제에서 건너와 쇼토쿠 태자에게 다타라 성과 영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 연구에서는 오우치 씨가 스오국의 지방 관리가 호족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며, 린세이 태자라는 인물은 당시 일본이나 백제의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23]
오우치 씨가 백제와의 연관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와의 무역을 중시했던 오우치 요시히로 시대로 추정된다.[22] 한반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무역 이익을 얻기 위해 린세이 태자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그의 후손임을 자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실제로 외래계 혈통을 주장하는 가문은 서일본 지역에 많았으나, 그 진위가 의심스러운 경우도 많다.[23] '오우치'라는 성씨 자체도 임성태자 9대손 때부터 사용했다고 전해지나, 후쿠오 타케시로 등 연구자들은 린세이 태자를 포함한 초기 계보가 실존했다는 사료가 없다고 지적한다.[23] 오우치 씨의 가계 전승은 무로마치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문헌상으로는 오에이 연간(1394년-1427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23]
1472년(분메이 4년) 고후쿠지의 승려 진손이 기록한 『다이조인 사사 잡사기』에는 "오우치는 본래 일본인이 아니며…혹은 고려인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에도 오우치 씨의 백제계 후예설이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에도 시대의 학자 하야시 라잔은 『간에이 제가 계도전』에서 촉한의 유비나 북송의 조광윤처럼 중간 계보가 불분명한 혈통 주장의 의심스러움을 지적하며, 일본 전국시대 무장들의 계보에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고 언급하여 오우치 씨의 주장과 같은 사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24]
2. 2. 일본에서의 활동
임성태자는 남부여 위덕왕의 셋째 아들이거나 성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일본에서는 토요타(豊田)씨 등 오우치씨의 후손들이 임성태자를 자신들의 14대조로 여기고 있다.[29]611년 3월 2일 야마구치현(山口県)에 상륙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오우치씨 후예들의 이야기에 따라 597년 타이완을 거쳐 왜로 건너갔다고도 한다.[33] 후예들의 주장에 따르면, 임성태자는 당시 남부여의 선진 예술을 왜에 전파하고[33] 불교 융성에 기여했으며, 제철 기술을 전수했다고 한다.
일본에 도착한 후에는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로부터 다타라씨(多多良氏)라는 성씨와 스오국(周防國) 다타라하마(多々良浜, 현재의 야마구치현 호후시) 지역을 영지로 받아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다타라씨는 12세기에 이르러 오우치(大內)씨로 성을 바꾸었으며, 무역을 거의 독점하면서 일본 열도 내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오우치씨는 중세 일본에서 전성기를 누렸으나, 1557년에 멸문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살아남은 방계 후손들은 막부의 하타모토(旗本) 신분이나 소규모 영주로서 명맥을 유지했으며, 일부는 도요타씨(豊田氏)로 성씨를 변경하기도 했다. 오늘날 야마구치현에는 오우치씨 후손들이 임성태자가 남부여에서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피리를 보존하고 있다.
2. 3. 오우치 씨의 시조
임성태자는 백제 위덕왕의 셋째 아들이거나 성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일본에서는 오우치 씨와 그 후손인 토요타(豊田) 씨 등이 임성태자를 자신들의 14대조라고 주장한다.[29] 일본에서는 그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어 '''린쇼 타이시'''(琳聖太子|린쇼 타이시일본어)라고 부른다.[4]일본의 전설에 따르면, 임성태자는 묘켄보살(妙見菩薩)의 신성한 계시를 받고 597년 스오 국 해안(현재의 야마구치시 근처)에 도착하여 쇼토쿠 태자의 영접을 받았으며[3], 쇼토쿠 태자는 그를 스오 국의 통치자로 임명했다고 한다.[3] 다른 기록에는 611년 3월 2일 현재의 야마구치현(山口県) 다타라하마(多々良浜, 현 호후시)에 상륙하여 쇼토쿠 태자로부터 다타라씨(多多良氏)라는 성씨와 스오국(周防國) 땅을 받아 정착했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임성태자가 597년 타이완을 거쳐 왜로 건너가 백제의 예술을 전하고[33] 불교 융성과 제철 기술 전파에 기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늘날 야마구치현에는 오우치 씨 후손들이 임성태자가 백제에서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피리를 보존하고 있다.
임성태자의 후손들은 '''타타라'''(多々良)라는 성을 사용했는데, 이는 일본어로 '용광로' 또는 '발로 작동하는 풀무'를 의미하며, 나중에는 제철 및 단조 전문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2] 이 이름은 풍부한 철광석과 철제 갑옷으로 유명했던 가야 연맹이 지배했던 한국의 고대 항구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현재 '''도비진'''(蹈鞴津)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풀무의 항구'라는 뜻으로, 발음을 위해 '''다다라'''(多多羅)라고 표기하기도 했으며[5], 일본으로 철을 수출하는 주요 경로였다. 타타라 씨는 12세기에 성씨를 '''오우치'''(大內)로 바꾸었다. 오우치 히로요(1325-1380)가 가문의 근거지를 야마구치로 옮기기 전까지 다타라 지역은 가문의 전통적인 근거지였다.[6]
오우치 씨는 국제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우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일본인 정체성과 더불어 자신들의 한국계 혈통을 강조했다.[7] 야마구치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힌[6] 오우치 씨는 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로 성장했다. 특히 무로마치 시대에는 조선, 명나라, 류큐 왕국과의 무역을 거의 독점하며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렸고, 한때 막부의 행정관 역할까지 맡았다.[3]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8], 1399년(정종 원년) 오우치 요시히로는 사신을 보내 자신이 백제 왕족의 후손임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충청도에 조상의 땅을 요구하는 도발적인 요청을 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역사적 기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오우치 요시히로를 백제 온조왕의 후손으로 잠정 인정했다. 이후 조선 단종 때에는 오우치 노리히로[9]가 다시 한번 자신의 혈통을 증명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오우치 씨는 여러 세대에 걸쳐 무로마치 막부 시대 일본의 여러 다이묘 중 조선에서 가장 환영받는 존재였으며, 나중에는 귀중한 문화재인 ''고려대장경''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이는 거절당했다.[10]
오우치 씨는 일본 내에서도 자신들의 조상이 백제에서 왔다고 주장해왔다. 당시 일본에서는 후지와라 씨, 헤이케 씨, 겐지 씨 같은 유력 가문과의 연관성을 내세우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음에도, 오우치 씨는 꾸준히 백제계 혈통을 강조했다. 그들의 성씨인 '타타라'가 한국의 '다다라'와 관련이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이름이 9세기 문헌인 『신찬성씨록』과 목간 유물에도 나타난다는 점은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오우치 가문은 자신들의 계보를 기록한 '오우치 다타라 씨 족보(大内多々良氏譜牒)'라는 문서를 소장하고 있다.[1]
2009년 4월 17일, 임성태자의 45대손이라고 밝힌 오우치 키미오(大內公夫)는 백제 조상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대한민국 익산시를 방문하여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익산 쌍릉을 참배했다.[15][16]
한편, 임성태자의 실존 여부와 오우치 씨의 계보에 대해서는 학계의 비판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15세기 후반에 작성된 『오우치 다타라 씨 족보』에는 임성태자가 611년 스오 국 다타라 해변에 상륙하여 쇼토쿠 태자로부터 다타라 성과 오우치 영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 연구에서는 오우치 씨가 스오 국의 지방 관리(재청 관인) 출신으로 점차 세력을 키워 호족이 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임성태자라는 인물은 당시 일본이나 백제의 문헌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23]
오우치 씨가 백제와의 연관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와의 무역을 중시했던 오우치 요시히로 때부터로 추정된다.[22] 그가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한반도(당시 고려, 이후 조선)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임성태자라는 인물을 만들어내고 그 후손임을 자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3] 오우치 씨의 가계 전승 자체도 무로마치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문헌 기록상으로는 오에이 연간(1394년~1427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다.[23]
다만, 오우치 마사히로 시대에는 이미 오우치 씨가 백제계 후예라는 설이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후쿠지의 승려 진손이 기록한 『다이조인 사사 잡사기』 분메이 4년(1472년) 기록에는 "오우치는 본래 일본인이 아니며…혹은 고려인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에도 시대의 학자 하야시 라잔은 『간에이 제가 계도전』에서 촉한의 유비나 북송의 조광윤처럼 중간 계보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며, 일본 전국 시대 무장들의 계보에도 비슷한 의심스러운 사례가 많다고 지적한 바 있다.[24]
임성태자는 657년 11월,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2. 4. 조선과의 관계
1398년(정종 1년) 7월, 당시 스오 국 등 서일본 지역의 유력 다이묘였던 오우치 요시히로는 조선 조정에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증명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충청도 지역에 조상의 땅을 돌려달라는 도발적인 요구를 전달했다. 이는 ''정종실록''과 ''조선왕조실록'' 정종 1년(1399년) 기록에 나타난다.[8] 정종은 역사 기록만으로는 그 연관성을 명확히 입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외교적 관계 등을 고려하여 오우치 요시히로를 백제 온조왕의 후손으로 잠정 인정해주었다.이후 1453년(단종 1년)에는 오우치 노리히로[9]가 다시 한번 조선 조정에 사신을 보내 자신들의 혈통 증명을 요청했다. 수십 년간 오우치 씨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 일본의 여러 다이묘 중 조선과의 교역에서 가장 활발한 세력 중 하나였다. 그들은 조선과의 관계를 이용해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으며[7][3], 심지어 조선 조정에 귀중한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을 넘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을 펴고 있었기에 불교 경전인 대장경을 쉽게 내줄 것이라 기대했을 수 있으나, 조선 조정은 이 요청을 거절했다.[10]
오우치 씨가 백제 왕족의 후예임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와의 무역을 중시했던 오우치 요시히로 대부터로 추정된다.[22] 당시 고려 말, 조선 초의 한반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무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임성태자라는 인물을 내세워 그의 후손임을 자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조선왕조실록'' (이조실록)에 따르면, 오우치 씨는 오에이 6년(1399년) 조선에 사절을 보내 왜구 토벌에 대한 보상으로 한반도 내 영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 요구는 거절되었지만, 조선은 오우치 씨와의 무역을 허가했고, 이를 통해 얻은 경제적 이익은 오우치 씨가 세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오우치 마사히로 시대에는 오우치 씨가 백제계 후예라는 설이 일본 내에서도 알려져 있었다. 나라 고후쿠지의 승려 진손(尋尊)이 기록한 『다이조인 사사 잡사기』(大乗院寺社雑事記) 분메이 4년(1472년) 조에는 "오우치 씨는 본래 일본인이 아니며… 혹자는 고려인(한반도인)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에도 오우치 씨의 외국계 혈통 주장이 회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일본 학계에서는 오우치 씨의 백제 왕족 후예설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후쿠오 타케시로(福尾猛市郎) 등의 연구에 따르면, 임성태자라는 이름은 오우치 씨의 족보 외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그의 실존을 증명할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23] 오우치 씨의 가계 전승 자체도 무로마치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관련 기록 역시 오에이 연간(1394년~1427년) 이전으로는 소급하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23] 에도 시대의 학자 하야시 라잔 역시 『간에이 제가 계도전』에서 전국시대 무장들의 족보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고 지적하며 오우치 씨의 사례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24]
3. 임성태자 관련 유적 및 전설
백제의 왕자로 알려진 임성태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현 일대에 정착하며 여러 유적과 전설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후손을 자처한 오우치 씨족은 중세 일본에서 큰 세력을 이루었으며[29],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를 증명하기 위해 조선에 족보 확인을 요청하기도 했다.
야마구치현에는 임성태자와 관련된 다양한 장소가 전해진다. 그의 유골이 안치되었다고 알려진 야마구치시의 쇼후쿠지(乘福寺|쇼후쿠지일본어)[34]를 비롯하여, 그를 모시는 기시즈 신사(岸津神社|기시즈진자일본어), 백제 왕에게 하사받은 검이 보존되어 있다는 코류 사(興隆寺|코류지일본어)[43], 임성태자가 세웠다는 루리코 사(琉璃光寺|루리코지일본어) 5층 석탑 등이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다.[43]
또한, 임성태자의 일본 도착과 관련된 '떨어진 별 전설'은 스이코 천황, 쇼토쿠 태자, 묘켄 신앙과 얽혀 쿠다마쓰시의 지명 유래가 되는 등 지역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11][12][13] 이 전설과 관련된 묘켄구 주토지(妙見宮鷲頭寺|묘켄구 슈토지일본어) 역시 임성태자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14] 이러한 유적과 전설들은 임성태자가 고대 한일 교류사에서 차지하는 상징적인 위치를 보여준다.
3. 1. 야마구치현의 유적
임성태자의 유골은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에 위치한 쇼후쿠지(乘福寺)에 안치된 것으로 전해진다.[34] 남부여(백제) 멸망 이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그의 행적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1398년(정종 1년) 7월, 당시 서일본의 유력 가문이었던 오우치 씨족의 오우치 요시히로가 조선 조정에 자신들이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입증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면서 한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오우치 요시히로는 임성태자 관련 토지를 찾아달라고도 요청했으며, 이러한 내용은 정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1453년(단종 1년)에도 오우치 가문은 사신을 보내 족보 입증을 재차 요청하기도 했다.야마구치현에는 임성태자와 관련된 여러 유적과 전설이 남아있다.
- 기시즈 신사(岸津神社|기시즈 신사일본어): 임성태자를 모시는 신사로 알려져 있다.
- 코류 사(興隆寺): 임성태자가 왜국으로 파견될 당시 백제 왕에게 하사받았다는 검이 보존되어 있다고 전해진다.[43]
- 루리코우 사(琉璃光寺) 5층 석탑: 야마구치시에 위치하며, 임성태자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탑이 현대까지 남아있다.[43]
떨어진 별 전설과 관련 유적임성태자의 일본 도착과 관련하여 스이코 천황, 쇼토쿠 태자, 그리고 묘켄 신앙의 도입을 엮는 유명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 전설은 고나라 천황 시대에 오우치 요시타카라는 인물(그의 조상이 임성태자라고 함)과 관련하여 시작된다.
전설에 따르면, 595년 9월 8일, 스오국 와시즈노쇼(鷲頭庄) 츠노(津野) 지역의 아오야나기노우라(青柳浦)에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소나무 위에 내려앉았다. 이 별은 보름달처럼 밝게 빛나며 7일 밤낮으로 빛났다고 한다. 놀란 지역 주민들이 무녀를 부르자, 무녀는 자신을 '호쿠신 묘켄 손쇼(北辰妙見尊星)'라 밝히며 "3년 후 3월 2일에 백제의 임성태자가 이 나라에 올 것이며, 이 사실을 쇼토쿠 태자에게 알렸고 태자도 임성태자가 머물러야 한다고 동의했다"고 예언했다. 이 소식은 스이코 천황에게 보고되었고, 천황은 기뻐하며 597년 3월 2일, 100명이 넘는 조정 귀족들과 함께 스오국의 타타라노하마(多々良浜) 해변에서 임성태자를 맞이했다고 한다. 천황은 임성태자를 위해 나가토국 오우치(大内) 지역과 와시즈야마(鷲頭山)에 궁궐을 지어주었으며, 와시즈야마의 궁궐은 '별의 궁전(星の宮)'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호쿠신 묘켄 손쇼 신의 강림을 기원하며 숭배 날짜를 9월 18일로 정했다고 전해진다.[11]
이 '떨어진 별' 전설은 일본 민속, 역사 이야기, 특히 오우치 씨족의 계보 관련 기록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전설의 배경이 된 야마구치현 쿠다마츠시는 '별이 내려온 소나무'라는 뜻에서 도시 이름이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쿠다마츠시의 쿠다마츠 공원에는 이 전설을 기념하는 '별 타워'(星の塔, 호시노 토)가 세워져 있으며[12], 시의 관광 홍보 자료에서도 이 전설이 중요하게 소개된다.[13] 지역 축제나 행사에서도 임성태자의 도착 장면이 재현되는 등, 이 전설은 지역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쿠다마츠시에 위치한 묘켄구 주토지(妙見宮鷲頭寺)는 7세기에 임성태자가 도착한 후 직접 세운 사찰로 전해진다. 이곳은 묘켄 다이보사츠(妙見大菩薩) 신앙의 발상지로 여겨지며, 이후 오우치 씨족의 후원을 받아 씨족의 수호신을 모시는 사찰로 번성했다.[14]
3. 2. 떨어진 별 전설 (Fallen Star Legend)
임성태자의 일본 도착과 스이코 천황, 쇼토쿠 태자, 그리고 묘켄 신앙의 전래를 연결하는 유명한 전설이 있다.전설에 따르면, 고나라 천황 시대에 진제이(Chinzei) 지역의 단다이(探題)였던 오우치 요시타카는 자신의 조상이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라고 밝혔다. 이야기는 스이코 천황 재위 시기인 595년 9월 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밤, 매우 밝은 별 하나가 하늘에서 스오(周防) 지방 와시즈노쇼(鷲頭庄) 쓰노(津野) 구역의 아오야나기노우라(青柳浦)에 떨어져 소나무 위에 내려앉았다. 그 빛은 보름달처럼 밝았으며 7일 밤낮 동안 계속 빛났다. 이를 본 지역 사람들은 크게 놀라 기이하게 여겼고, 무녀를 불러 물었다. 무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북신묘켄손쇼(北辰妙見尊星)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 뒤인 3월 2일에 백제의 임성태자께서 이 나라에 오실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쇼토쿠 태자에게 알렸고, 태자 또한 임성태자께서 머무르셔야 한다고 동의하셨다. 이에 나는 교토의 천황께 이 뜻을 아뢰었다." 스이코 천황은 기뻐하며, 597년 3월 2일, 100명이 넘는 조정 귀족들과 함께 스오 지방의 타타라노하마(多々良浜)에 도착하여 직접 임성태자를 맞이했다. 임성태자가 타고 온 배는 뱃머리가 용머리와 기이한 바닷새의 목 모양으로 장식되어 귀족의 위상에 걸맞았다. 천황은 즉시 나가토(長門) 국 오우치(大内) 지역에 궁궐을 지어 임성태자가 머물도록 했다. 또한 와시즈야마(鷲頭山)에도 궁궐이 지어졌는데, 이곳에 북신묘켄손쇼(北辰妙見尊星) 신의 강림을 기원하며 '호시노미야(星の宮, 별 궁전)'라 이름 짓고, 9월 18일을 제사일로 정했다.[11]
이 '떨어진 별' 전설은 일본의 민속, 역사 이야기, 그리고 오우치 씨족의 계보 관련 기록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며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다. 특히 임성태자와 관련된 이 전설은 야마구치현 쿠다마츠시(下松市)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는데, 도시의 이름 '쿠다마츠(下松)' 자체가 별이 떨어졌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 소나무에서 유래했다. 이 전설은 쿠다마츠 공원에 세워진 '별 타워(星の塔, 호시노 토)'에서 기념되고 있으며[12], 시의 관광 홍보 자료에서도 중요하게 소개된다.[13] 임성태자의 도착 이야기는 지역 축제나 행사에서 재현되며 도시의 문화 유산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또한 쿠다마츠시에 위치한 묘켄구 주토지(妙見宮鷲頭寺)는 7세기에 임성태자가 도착한 후 직접 창건했으며, 묘켄 다이보사츠(妙見大菩薩) 신앙의 발상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14] 이 사찰은 이후 오우치 씨족의 후원을 받으며 씨족의 수호신을 모시는 곳으로서 번성했다.
4. 가계
- 증조부 또는 조부: 무령왕(武寧王) 부여사마(扶餘斯麻 또는 扶餘斯摩)[40]
- * 종조부: 순타태자(純陀太子)[41] (? - 513년). 간무 천황의 생모인 야마토노 니이가사(和新笠)의 선조이다.
- 조부 또는 부: 성왕(聖王) 부여명농(扶餘明穠)
- * 백부: 부여계(扶餘季)
- 부 또는 형: 위덕왕(威德王) 부여창(扶餘昌)[42]
- 부인: 이름 미상
- * 아들: 임용군(琳龍君)[35]
- ** 손자: 아부군(阿部君)[36]
- * 아들: 부여의광(夫餘義光)
- ** 손자: 의도(義道)
임성태자는 일본 도착 당시의 나이와 아들의 이름이 한국식(임령)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들 임용군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부여임용(夫餘琳龍) 계열은 5대까지 작위를 받았으나, 6대손인 大內正恒|오우치 마사츠네일본어(大內正恒) 대에 이르러 작위가 끊겼다.[1][39] 계보는 다음과 같다.
| 대수 | 이름 | 비고 |
|---|---|---|
| 1대 | 임성태자 (琳聖太子) | 오우치씨의 시조[15][1] |
| 2대 | 임용군 (琳龍君) | [1][35] |
| 3대 | 아부군 (阿部君) | [1][36] |
| 4대 | 세농군 (世農君) | [1][37] |
| 5대 | 세아군 (世阿君) | [1][38] |
| 6대 | 아진군 (阿津君) | [1][39] |
| 7대 | 오우치 마사츠네 (大內正恒) | [1] 작위 단절 |
다른 아들인 부여의광(夫餘義光) 계열은 23대 가림왕 의지(家埜王義之)까지 작위가 이어졌으나, 대내지개(大內之介) 대에 이르러 작위가 끊겼다.
5. 임성태자에 대한 역사적 논란
오우치씨는 15세기 후반에 쓰인 『오우치 다타라씨 족보』를 통해 자신들의 시조가 백제 왕족인 임성태자라고 주장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임성태자는 611년 일본 스오노쿠니에 도착하여 쇼토쿠 태자로부터 영지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 연구에서는 오우치씨가 스오노쿠니의 재청 관인 출신으로 성장한 세력이며, 임성태자라는 인물은 당시 일본이나 백제의 문헌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어 실존을 증명할 사료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한다.[23] 오우치씨가 백제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와의 무역을 중시했던 오우치 요시히로 시대로 추정되며, 정치·경제적 목적을 위해 임성태자라는 인물을 내세워 그 후손임을 자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2][23]
실제로 오우치 마사히로 시대에는 오우치씨가 백제계 후예라는 설이 알려져 있었으나, 당시 기록인 『다이조인 사사 잡사기』(1472년)에는 "오우치는 본래 일본인이 아니며…혹은 고려인(한반도 출신)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어, 그의 출자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에도 시대의 학자 하야시 라잔은 『간에이 제가 계도전』에서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계보를 꾸미는 경우가 많음을 지적하며, 오우치씨와 같은 사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24]
5. 1. 실존 여부
15세기 후반에 쓰인 『오우치 다타라씨 족보』에 따르면, 임성태자는 오우치씨의 시조로 여겨진다. 이 기록에는 그가 스이코 천황 19년(611년)에 백제에서 스오노쿠니의 다타라 해변(야마구치현 호후시)에 상륙했으며, 쇼토쿠 태자로부터 다타라(多々良) 성과 함께 오우치현(おおうちあがた)을 영지로 하사받았다고 되어 있다.그러나 현대의 연구에서는 오우치씨가 스오노쿠니의 재청 관인(현지 관직에 임명된 관리)이 지역 호족으로 성장하며 세력을 확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임성태자라는 이름은 당시 일본과 백제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23]
오우치씨가 백제와의 연관성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와의 무역을 중시했던 오우치 요시히로 대부터로 추정된다.[22] 특히 당시 한반도 국가였던 고려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임성태자라는 인물을 만들어내고 그 후손임을 자처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본, 특히 서일본 지역에는 오우치씨처럼 스스로 외래계 혈통임을 내세우는 가문이 많지만, 그 계보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다.[23]
'오우치(大內)'라는 성씨는 임성태자의 거처가 넓었던 것을 당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데서 유래했으며, 그의 9대손부터 성씨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후쿠오 타케시로는 임성태자라는 이름이 오우치씨 선조 관련 기록에만 등장할 뿐, 그의 실존을 증명할 사료는 없다고 지적했다.[23] 오우치씨의 가계 전승 역시 무로마치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문헌 기록상으로는 오에이 연간(1394년~1427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다.[23]
한편, 『이조실록』에는 오우치씨가 오에이 6년(1399년) 조선에 사절을 보내 왜구 토벌에 대한 대가로 한반도 내 영지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무역은 허가되었고, 이를 통해 얻은 이익은 오우치씨 세력 성장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오우치 마사히로 시대에는 오우치씨가 백제계 후예라는 설이 이미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후쿠지 다이조인 문적을 기록한 진손의 『다이조인 사사 잡사기』 분메이 4년(1472년) 기록에는 "오우치는 본래 일본인이 아니며…혹은 고려인이라고도 한다"는 내용이 있다.
에도 시대의 학자 하야시 라잔은 『간에이 제가 계도전』에서 촉한의 유비가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거나, 북송의 조광윤이 조간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 등이 중간 계보가 불분명하여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며, 일본 전국 시대 무장들의 계보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많다고 언급했다.[24] 이는 오우치씨의 임성태자 전승과 같은 사례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5. 2. 오우치 씨의 백제 왕족 후손 주장
오우치 씨는 자신들의 조상이 백제 왕족인 임성태자라고 주장해왔다. 일본의 전설에 따르면, 임성태자는 597년 스오 국(周防国, 현재의 야마구치현 일대) 해안에 도착하여 쇼토쿠 태자(聖徳太子)의 영접을 받았고, 쇼토쿠 태자는 그를 스오 국의 통치자로 임명했다고 한다.[3] 일본에서는 임성태자를 '''린쇼 타이시'''(林聖太子)라고 불렀다.[4]임성태자의 후손들은 처음에는 '''타타라'''(多々良)라는 성을 사용했는데, 이는 일본어로 "용광로" 또는 "풀무"를 의미하며 제철 전문가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2] 이 이름은 풍부한 철광석으로 유명했던 가야 연맹 지역의 고대 한국 항구 '''다다라'''(多多羅, 현재의 '''도비진'''(蹈鞴津))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은 일본으로 철을 수출하는 주요 경로였다.[5] 타타라 씨는 훗날 성을 '''오우치'''(大内)로 바꾸었고, 오우치 히로요(大内弘世, 1325~1380) 대에 이르러 야마구치시를 가문의 중심지로 삼았다.[6]
역사적으로 오우치 씨는 국제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우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일본 정체성과 더불어 한국계 혈통임을 강조했다.[7] 특히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는 조선, 명나라, 류큐 왕국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3]
조선왕조실록[8]에 따르면, 정종 원년(1399년) 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는 사신을 보내 자신이 백제 왕족의 후손임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하며 충청도에 조상의 땅을 요구하기도 했다. 조선 조정은 역사적 기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오우치 요시히로를 백제 온조왕의 후손으로 잠정 인정했다. 이후 단종 때 오우치 노리히로(大内教弘)[9] 역시 자신의 혈통을 증명해달라고 요청했다. 오우치 씨는 수 세기에 걸쳐 조선과의 교류에서 환영받는 존재였으며, 한때는 귀중한 고려대장경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이는 거절당했다.[10]
오우치 씨는 일본 내에서도 백제 후손임을 내세웠는데, 이는 당시 유력 가문들이 후지와라 씨(藤原氏), 헤이케 씨(平家), 겐지 씨(源氏)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이례적인 행보였다. 그 근거로 제시된 '''타타라'''라는 이름은 한국의 '''다다라'''와 연관성이 있으며, 9세기 문헌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과 목간 유물에도 등장한다. 15세기 후반에 작성된 『오우치 다타라씨 족보』(大内多々良氏譜牒)에는 린세이 태자(임성태자)가 611년 스오 국 다타라 해변(야마구치현 호후시)에 상륙하여 쇼토쿠 태자로부터 다타라 성과 오우치(大内) 땅을 하사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 연구에서는 오우치 씨가 스오 국의 재청 관인(在庁官人, 지방 관청에 근무하던 하급 관리) 출신으로, 점차 세력을 키워 호족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임성태자(린세이 태자)라는 인물은 동시대 일본이나 백제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23] 오우치 씨가 백제와의 연관성을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한반도와의 무역을 중시했던 오우치 요시히로 시대로 추정된다.[22] 무역에서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가문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성태자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그 후손임을 자칭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23] 후쿠오 타케시로(福尾猛市郎) 등 연구자들은 임성태자 관련 이야기가 오우치 씨 선조에 관해서만 등장하며, 실존을 증명할 사료가 없다고 지적한다.[23] 오우치 씨의 가계 전승 역시 무로마치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문헌 기록은 오에이 연간(1394년 ~ 1427년) 이전으로 소급하기 어렵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23]
오우치 마사히로(大内政弘) 시대에는 오우치 씨가 백제계 후예라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후쿠지(興福寺)의 승려 진손(尋尊)이 기록한 『다이조인 사사 잡사기』(大乗院寺社雑事記)의 분메이 4년(1472년) 기록에는 "오우치는 본래 일본인이 아니며…혹은 고려인(한반도 출신)이라고 한다"는 내용이 있다.
에도 시대의 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간에이 제가 계도전』(寛永諸家系図伝)에서 촉한의 유비가 유승의 자손이라거나 북송의 조광윤이 조광한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중간 계보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며, 일본 전국 시대 무장들의 계보에도 비슷한 의심스러운 사례가 많다고 언급했다.[24] 이는 오우치 씨의 백제 왕족 후손 주장 역시 그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6. 현대의 계승
임성태자는 일본에서 세력을 떨쳤던 오우치 씨(大内氏)의 시조로 여겨진다. 오우치 가문은 '오우치 다타라 씨 계보(大内多々良氏譜牒)'라는 가계도 문서를 통해 그 계보를 기록하여 소장하고 있다.[1]
2009년 4월 17일, 임성태자의 45대손이자 오우치 가문의 당주라고 밝힌 오우치 키미오(大內公夫)가 백제의 조상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대한민국 익산시를 방문했다. 그는 후나바시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익산 방문 당시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을 참배하고 지역 사회의 환영을 받았다.[15][16][25][26]
일본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 오우치 미호리 4초메에 위치한 조후쿠지(長福寺)에는 임성태자(린세이타이)의 어린이 양육탑이 남아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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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에서는 '''임정태자'''(臨政太子)라고 기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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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여(南扶餘)가 망하기 시작하자 '''임정태자'''(臨政太子)가 배를 타고 왜에 들어가 대내 좌경대부(大內左京大夫)가 되었다. 왜인은 임금을 '''대내'''라 하므로 지금도 스오주(周防州)에 대내전(大內殿)이라는 칭호가 있다. (이들은) 스오주(周防州)에 도읍하였으며, 자손이 47대를 거쳐 대대로 왜국의 관리가 되어 그 토지를 세습(世襲)하였다."(始百濟亡. 臨政太子乘船入倭, 爲大內左京大夫. 倭人謂王爲'''大內'''故至今周防州有'''大內殿'''號. 都周防州, 子孫歷四十七世, 世爲倭官, 襲其土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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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 田 家 系 譜
http://www.nichi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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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L
http://enjoyjapan.naver.com/tbbs/read.php?board_id=teconomy&nid=3482182
http://enjoyjapa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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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키쇼다이묘진엔기(崎所大明神緣起, さきしょだいみょうじんえんぎ)에 의하면, 581년 경상 원년(鏡常元年, 경당(鏡當)원년의 오기) 7월 하순에 임성태자가 스오노 쿠니 해안으로 상륙하였다(五ケ年を期し 鏡常辛丑之季 七月下旬、琳聖太子 防浜に来朝し給ふ)고 기록되어 있다.
[32]
URL
단종 1년(1453년) 음력 6월 24일,
http://sillok.histor[...]
[33]
URL
임성 태자는 성왕이 신라 정예군에게 피살되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대만을 거쳐 왜로 건너가 당시 남부여의 예술을 왜에 전래한 대표적인 왕족으로 일본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http://www.donga.com[...]
[34]
문서
야마구치현(山口県) 야마구치시(山口市) 오우치미호리(大內御堀) 4쵸메(丁目)
[35]
문서
'''오우치씨 가보(大內氏家譜)'''에는 '''린류 타이시'''(琳龍太子)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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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씨 가보(大內氏家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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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씨 가보(大內氏家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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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씨 가보(大內氏家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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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타가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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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만의 귀환
200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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